장절

TOP
DOWN

집안에 있는 탕자 (눅15:25-32)

본문

돌아온 탕자는 아버지께로 부터는 환영을 받았지만 형님으로 부터는 거절 당했습니다. 아버지를 떠나서 허랑 방탕 하다가 모든 재산을 탕진한 후에 돌아온 아들을 맞아서 아버지는 귀환 축하 환영 파티를 열었습니다. 그때 농장에 나갔던 맏 아들이 돌아 옵니다. (눅15:28) 저가 노하여 들어가기를 즐겨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그가 분노한 이유는 (눅15:29-30) 아버지께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맏아들이 화를 낸 이유는 논리 정연 합니다. 그러나 그 선언 배후에는 불의가 있습니다. 그 선언 배후에 있는 중대한 과오를 살펴 보겠습니다.
첫째.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 하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둘째 아들이 아버지의 심정을 모르고 나갔다고
둘째 아들을 어리석게 생각 합니다. 그러면 맏아들은 아버지의 심정을 알았습니까. 본문을 미루어 보아 맏아들이 아버지의 심정을 몰랐던 뚜렸한 증거를 찾아 볼수 있습니다.
둘째 아들이 집을 나간후에 아버지의 고통은 얼마나 컸겠습니까. 그러나 맏아들은 아버지의 아픔을 전혀 몰랐습니다. 또한
둘째 아들이 돌아 옴으로서 아버지의 모든 애정을 빼앗기는 것으로 생각 했습니다. (눅15:31)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라고 아버지가 아들을 설득 하였습니다. 아버지는 사랑하는 아들을 위하여 모든 계획을 다 세워 놓았습니다.
그런데 이런 아버지의 계획을 외면 하였던 맏아들의 과오를 볼수 있습니다. 한편
둘째 아들이 돌아 왔을 때 아버지는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그러나 아버지의 커다란 기쁘을 맏아들은 외면 하였습니다. 그는 자기를 향한 아버지의 애정이
둘째 아들로 옮겨 가는 것으로 판단 하였을지 모릅니다. 아마 아버지는 두 사람을 함께 사랑할수 없는 분으로 생각 했을 것입니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무지 입니다.
둘째. 아버지의 가장 중요한 명령을 거스리고도 잘 지키고 있다고 생각 하였습니다. 맏아들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의 가장 중대한 명령을 어기고 있었습니다. 이 말씀을 잘 이해 하도록 15장
1,2절에 보면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원망하여 가로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여기 두 부류 세리와 죄인들 바라새인과 서기관 들이 있습니다. 돌아온
둘째 아들은 바로 이 세리와 창기들에게 비유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돌아온 이들에 대하여 가장 날카로운 비판의 칼을 들었던 사람이 바로 서기관과 바리세인이었습니다. 이들은 소위 정의에 대하여 민감한 반응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의로운 사람이다.” “우리는 의를 행하는 사람이다.” “우리는 간음 하지도 살인 하지도 않았다.” 자신들이 의로우며 세리와 창기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인간들이라는 것이 율법 주의자들과 바리새인의 자부심이었습니다. 율법 가운데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 (요13:34-35)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 율법을 지킨다고 하면서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 한다고 하면서 계명중에 가장 중요한 사랑의 계명을 어기는 바리새인의 모습은 어쩌면 우리의 모습은 아닐른지요 우리는 의를 논하고 핏대를 올리며 정의를 말합니다. 묻습니다. 당신은 이웃을 사랑 합니까 맏아들의 중대한 과오는 아버지의 모든 계명을 순종 한다고 하면서 제일 중요한 것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을 행치 않았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가장 부탁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다음과 같은 명령일것입니다. “가서 네 동생을 찾아 오너라.” “네 동생을 사랑해 다오.”
셋째. 의무감에 사로잡힌 소극적인 봉사였 습니다. (눅15:29) 아버지께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이것이 열심히 일해온 이유 입니다. 치사 합니다. 그는 아버지의 사랑 때문에 봉사한 것이 아닙니다. 성숙한 맏아들로서 자각 때문이 아닙니다. 그는 유치한 보상심리 열심히 일하면 알아 줄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런데 알아 줌이 없다고 생각한 맏아들은 분노를 터뜨렸습니다. 이 사실은 맏아들이 다분히 당위의 사슬에 얽매여 의무감에서 봉사 하였음을 말합니다. 당신은 무엇 때문에 봉사 하십니까.
넷째. 특권을 즐기면서 책임을 망각 하였습니다. 맏아들은 상속자의 특권이 있습니다. 또 그는 아버지를 제와하고 제일 어른 노릇을 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맏아들은 그 특권을 즐길수 있는 권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동시에 책임이 있습니다.
둘째 아들이 집을 나갔을 때 이 아들을 찾는 책임은 아버지뿐 아니라 맏아들에게도 있습니다. 그것이 아버지 혼자만의 책임이라고 방관 해서는 안됩니다. 아버지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가정을 책임질줄 아는 맏아들이라면 이것이 자신의 해야 할 일이란 자각이 있어야 할것입니다. 또 동생이 돌아 왔을 때 환영하는 일도 아버지 혼자서의 일이 아닙니다. 그 가정의 맏 아들로서 그는 당연히 동생을 환영할 책임이 있습니다. 자기 동생을 어떻게 불렀는지 보십시오 (눅15:30)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여기서 당신의 아들 이라고 말합니다. 한 번도 맏아들의 입에서 그의 동생을 자기의 동생이라고 인정하고 고백한 단어가 없습니다. 즉 이 사람은 동생을 아버지의 아들일수는 있다고 생각 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이 동생을 이렇게 간주 합니다. (눅15:32)“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자기의 특권을 즐길줄은 알았지만 그 책임을 다하지 못하는 이 사람의 무능함은 때때로 교회에 오래 출석한 우리 교인들의 병폐이기도 합니다. 오래 믿었다는 사실을 자부하고 그 특권을 누리기를 원하면서도 마땅히 해야할 책임을 회피하는 신자들의 모습을 볼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 특권을 주장 하기에 앞서 책임을 다하고 있습니까. 잃은 동생을 찾는 것이 아버지의 홀로의 책임이라고 말할수 있겠습니까. 여러분도 성장 하였습니다. 여러분도 그 만큼 믿었으면 잃어버린 영혼에 대한 책임을 자각하고 아버지와 함께 들에 나가서 동생을 찾아야 하지 않을 까요 그리고 이 동생이 돌아 왔을 때 누구보다도 이 동생을 환영하는 잔치를 당신이 계획해야 옳지 않겠습니까, 다섯째.이웃의 죄를 과대 선전 하였습니다. (눅15:30)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이 아들” 이것이 동생에 대한 맏아들의 생각입니다. 그러나 이는 부분적으로 옳지만 전체적으로는 과정입니다. 12절 말씀과 비교하여 보십시오 (눅15:12)“ 그
둘째가 아비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비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창기와 함게 그의 재산을 허비 하였을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사실이라고 간주 합시다. 그렇다고 하필이면 그것을 강조할 필요가 있습니까. 이웃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심리가 이형의 마음속에 작동 하고 있습니다. 여섯째. 궁극적인 가치보다 순간적인 보상을 탐하였습니다. 맏아들에게 있어서 염소 새끼는 자기가 상속자가 된다는 권리 보다 더 소중했습니다. 장차 아버지가 자기에게 장자로서의 모든 권리를 넘길 것을 준비한 사실보다. 눈앞의 염소 새끼가 더 소중했습니다. 이 사실은 인류 역사를 통해서 계속 되고 있습니다. 에서의 과오는 무엇 입니까. 팥죽 한그릇에 장자의 권리를 포기했던 에서의 오류 지금도 많은 사람이 눈앞의 쾌락 때문에 명예 때문에 그 보다 더 위대한 가치를 포기하는 일이 많습니다. 아간은 금덩이와 외투를 보고 하나님의 말씀을 저버렸습니다. 궁극적인 가치의 보람 보다도 아버지가 준비한 그 영광 스러운 계획 보다도 당장 눈앞에 염소 새기를 더 소중하게 여겼던 맏아들의 과오는 바로 현대인의 과오 입니다. 그리고 오늘을 사는 많은 현대인의 과오 일수 있습니다. 일곱째. 잔치의 의미를 몰랐습니다. (눅15:32)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아버지가왜 잔치를 열었을까요 물론 아들이 돌아 왔으니까. 아들을 격려 하기 위해서 열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피상적인것이고 더 큰 이유는 아버지가 좋아서 연것입니다. 아들이 돌아 왔을 때 돌아온 아들보다 더 기뻐한 것은 아버지였습니다 그러나 이 맏아들은 이 잔치의 의미를 몰랐습니다. 마지막은 철저한 이기심 입니다. 그는 아버지가 동생을 위하여 돈을 쓰면 자기에게 돌아올 몴이 없어 진다고 생각 하였습니다. 때로는 이런 심리가 하나님의 백성의 마음속에 많이 작용 합니다. 그래서 전도 하다가 그 사람이 구원 받고 축복 받으면 은근히 화가 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전도 하면서 사실은 상대가 믿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도 있는 것입니다. 요나가 그런 생각을 하였습니다. 바울 사도는 많은 핍박을 받았는 데 그것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였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교회밖의 사람들에게 형제 의식을 가지고 있습니까. 너희가 형제를 사랑하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줄을 알거니와” 아버지는 그 큰아들에게 자상한 모습으로 내 아들아 하고 부르지만 이 아들은 스스로 누릴수 있는 권리를 포기하고 있습니다. 상상해 보십시오 잔치가 벌어지고 풍악 소리가 들려 옵니다. 수 많은 동네 사람들이 돌아온 아들로 인하여 기뻐 합니다.
그런데 그는 집안에 들어오지 못하고 문밖에서 소리지르며 배회하고 있습니다. 그가 마음을 바꾸었다면 얼마나 기뻐 할수 있을까요 그 아버지와 함께 춤을 추면서 기뻐 할수 있었을 텐데 그 기쁨을 포기 하였으니 그의 손해 입니다. 자기의 추악한 인간상만 들어 내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그를 어떻게 생각 하였을까요 이 얼굴은 먼저 믿은 성도들의 얼굴일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에 응답하고 하나님게로 돌아오는 사람들을 사랑으로 영접 하지 못하는 얼굴입니다. 아버지와 함께 들을 헤메이면서 잃어버린 동생을 찾아 인도해야할 형의 책임을 다하지 못한 맏아들의 이지러진 모습은 마치 오늘날 전도의 책임을 다하지 못한 성도들의 이기적인 모습일수 있습니다. 맏아들인 당신들은 특권 만을 주장 하지말고 책임을 다 하십시오 . 아버지가 말씀하시기 전에 먼저 잃어버린 동생을 찾아 나서시기를 바랍니다. 그 동생이 돌아올 때 먼저 잔치를 열고 기뻐 하십시오, 대접을 받으려 하기 전에 당신이 먼저 책임을 삶을 이행하여 삶의 보람과 기쁨을 누리십시오 , 여러분은 맏아들입니다. 이제 성숙 했습니다. 아버지의 심정을 알아야 합니다. 아버지의 짐을 덜어 주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집안의 탕자가 되어 집니다. 때로는 집안의 탕자가 집 밖의 탕자보다 더 추할 수가 있습니다. 스잔 에르쯔는 탕자의 마음이라는 소설을 썻습니다. 그 소설의 이야기는 본문을 해석해 놓은 것과 같습니다. 이 소설에 나오는 아우는 육체적으로는 아버지를 떠나 있으나 마음한 구석은 항상 집에 와 있습니다. 그러나 형은 몸은 집에 있지만 마음은 항상밖에서 방황하고 있습니다. 이 두사람중 누가 더 탕자 입니까 당신은 집안의 탕자는 아닌지요 본문의 맏아들의 추한 모습과는 대조적인 다른 얼굴을 소개 합니다. (롬8: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예수님은 하나님의 맏아들로서 그 분을 믿는 사람들의 맏 형이 되게 하셧습니다. 예수님은 자비로운 형으로서 책임을 다하는 형이 되길 원햇습니다. 때문에 그분은 우리를 사랑한 나머지 피흘려 죽으로 우리를 구원 하셨습니다. 아우를 찾기 위하여 십자가의 고통을 당하셧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형입니까. 성경은 예수님게서 우리를 형제라고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 하셨다고 말씀 하십니다. (히2:11.13)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또 다시 내가 그를 의지하리라 하시고 또 다시 볼지어다 나와 및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자녀라 하셨으니 본문의 맏아들과 얼마나 다릅니까. 그 맏아들이 잃어버린 동생을 찾고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피흘려 돌아가신 그 분의 사랑이 잃어버린 영혼에게 돌아 오라고 촉구 합니다. 이제는 당신이 돌아 가야 할 순간입니다. 맏아들로서 아버지의 귀한뜻을 이루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댓글목록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전체 29,555 건 - 1531 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