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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상거가 먼데 (눅15:11-24)

본문

오늘은 강림절 넷째 주일입니다. 주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설명하는 말씀중 오늘의 본문이 가장 잘 설명된 것이라고 봅니다. 흔히 오늘의 본문을 탕자의 비유라고 하지만, 정확하게 말하면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들어낸 비유라고 봅니다. 어떤 곳에 한 가정에 두 아들이 있었는데
둘째가 아버지께 요구하기를 자기에 돌아올 유산을 나누어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나누어 주었더니, 그것을 가지고 먼 타국에 가서 허랑 방탕하게 지내는 가운데 재산을 다 허비하고, 빈털터리가 되어 남의 돼지 치는 농장에서 일군으로 일하다가 그곳에서 거의 굶어 죽게된 지경에 이르렀을 때, 아버지를 생각하고 뉘우치면서 품꾼의 하나라로 인정해 달라 하리라 마음먹고 고향으로 돌아왔는데, 아버지가 먼저 뛰어 나와 아들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 새옷으로 갈아 입히고 큰 잔치를 베풀어 동네 사람들을 모아놓고 죽었던 내 아들이 다시 살아 돌아왔다고 기뻐하였다는 내용의 말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생각하면서, 이
둘째 아들의 심리를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이 아들은 아버지의 너무나 큰사랑 속에서 자라면서도 그 사랑을 깨닫지 못하고 아버지의 품에서 독립해 보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아들된 권리만 주장하면서 자기에게 돌아올 분 깃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요즘도 이런 아들들 분명히 있을 줄 믿습니다. 한동안 오랜지족이니, 탱자 족이니 하여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켰던 일도 바로 이런 것을 두고 한 말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의 공통적인 심리가 무엇이었습니까 모두 부모를 잘 만나서 엄청난 부(富)의 여유를 누리며 살았으나, 부모로부터 독립해 보려는 심리 상태를 가지고 살았다는 점에서는 동일할 것입니다. 단순히 아들 됨의 주장만 하면서, 행패를 부리는 자식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를 일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오늘의
둘째아들이 누구일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흔히 탕자는 예수 안 믿고 세상에서 사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할는지 모르나, 사실은 오늘 우리들이 바로
둘째아들이 아니겠는가 생각해 보았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명목상의 크리스천들의 심리가 바로 본문의
둘째아들과 같은 심리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아들딸 된 것을 말하고 그것만 주장하기 쉽습니다. 그리고 내게 돌아올 분 깃만 생각하면서 아버지 하나님께 달라고만 하면서 지금껏 살아왔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다 안되면 투정도 부리고, 왜 아직도 안 주느냐 고 대들면서 아버지 하나님께 불평하면서 이 자리에 와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그것이
둘째아들과 다를 바가 무엇이겠습니까 그뿐만 아니라, 이미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분 깃을 가지고, 하나님 없는 내 자유를 위하여 사용하면서 살아온 우리들이 아닌가솔직히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탕자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유산을 아버지와 상관없이 자기 마음대로 다 써버린 것이 탕자라면, 우리가 바로 그런 사람들이 아닐까 생각하게 됩니다. 탕자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탕자의 심리로 살았으면 그것이 탕자란 말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받은s 건강, 허랑 방탕하게 육체의 소욕대로 다 소진하였다면 그것이 탕자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아버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재물, 내 마음대로 다 써버렸다면, 그것이 탕자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재능, 그것을 가지고 자기만을 위해 다 써 버렸다면, 그것이 탕자가 아니고 무엇이겠느냐 말입니다. 이렇게 보면, 여기 앉은 우리 모두,
둘째 아들과 같은 존재임에는 틀림없습니다.
1.
둘째 아들은 아들로서의 분 깃만 주장하였지 아버지의 사랑을 몰랐습니다.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면서 우리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습니까
둘째 아들과 같았던 자신을 되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예수 믿어 하나님의 자녀된 것만 주장하면서 살아온 우리들이 아닌가 자녀로서 받을 분 복의 축복만 요구하면서 그렇게 많은 사랑을 받고도 감사할 줄 모르고 살고 있지는 않는지 그리고 그 숫한 '물질'과 '재능'과 '시간'을 자신만의 만족을 위해 허랑 방탕하게 다 써 버린 삶은 아니었는지 아버지의 눈길을 피하여 스스로 마음의 벽을 쌓고 이 세상이라는 타국(他國)의 화려한 거리에서 자유(自由)라는 기생(妓生)과 함께 정신없이 놀아난 생활을 하고 있지는 않는지 우리는 지금 깊이 생각하는 계절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 은혜, 하면서 얼마나 은혜에 대하여 감사하면서 살아왔습니까 지난 일년 동안 도대체 몇 번의 감사헌금을 했습니까 불과 손으로 꼽을 정도일 것입니다. 한 달에 한번 꼴로 감사했어도 12번은 했어야 할 우리들인데 우리 장로님들에게 우선 묻습니다. 몇 번이나 감사했다고 보십니까 장로는 모든 신앙생활에서 교인의 모범이 되어야 합니다. 특별히 안수집사님들, 그리고 권사 님들, 손을 얹고 자신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감사는 마음의 표현입니다. 감사는 아버지에 대한 사랑의 응답입니다.
그런데도 일년 내내 아들된 것만 생각하면서, 내게 돌아올 분 깃만 챙기면서 산 우리들이 아닌지.깊이 반성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이
둘째 아들이 어쩔 수 없이 죽게된 지경에서 그래도 아버지 집을 생각해 냈다는 의의가 있습니다. 사람이 다 그런 것 같습니다. 죽게 되어야 부모를 생각하는 것 같이, 우리들도 하나님을 보통 때는 잊고 살다가도 어려워져야 하나님을 생각한다는 말입니다.
2.
둘째 아들은 아들로서의 명분 보다 품꾼의 하나로 인정해 주기를 바랬습니다. 아버지를 떠난 자유의 결과는 돼지가 먹는 쥐염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했으나 주는 자가 없었다고 했습니다. 돈 있었을 때 그 많던 친구들, 잘 나갈 때 주위에서 굽실거리던 많은 사람들, 모두 어디로 갔단 말입니까
둘째 아들은 아마 돼지우리를 치우면서 스스로 돌이켜 아버지를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일어나 하던 일을 내동이치고 아버지께로 발걸음을 돌렸습니다. 더 이상 머뭇거리지 아니했습니다. 철저하게 마음으로부터 회개하였습니다.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다'고 스스로 고백하였습니다. 진정한 오늘의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어떠해야 할까 아들의 명분만 갖고 있는 그런 교인들보다는 품꾼의 하나로 인정해 달라는 그런 자세를 갖고 있는 크리스천들이 더 그리운 시대입니다. 오늘날 가정에서 보면, 아들이라고 다-아들이 아님을 볼 수 있습니다. 신문에 보니 어떤 아들은 사업자금 보태지 않는다고 술을 먹고 들어와 행패를 하는 아들이 있는가 하면, 또 어떤 아들은 아무런 일도 하지 않고 빈둥빈둥 놀면서 용돈만 달라고 행패를 놋는 자식들도 있음을 봅니다. 영적으로 보면 혹시 이런 아들들이 교회 안에서도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왜냐하면 지난 일년동안 아무런 일도 하나도 한 것이 없이 세월만 보냈다면 바로 그런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전도한 일도 없고, 교회를 위한 봉사생활도 하나도 한일 없고, 남을 위해 기도해본적도 없고, 가난한자 슬픈자들 방문해본적도 없고, 교인장례에 참여해본적도 없고, 아무런 일 한 것 없이, 단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 만 가지고 분 깃만 달라고 하는 형편이 바로 나 자신이 아닌가 깊이 반성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20세기 후반의 오늘의 탕자는 집나간 아들이 아니라, 집안에서 아들의 권리만 주자하고 있는 바로 우리들 자신이 탕자라 하는 것입니다. 아버지 집에서 할 일 없이 은혜만 받기 원하는 교인들이라면, 바로 그런 사람들이 탕자들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이
둘째아들이 죽게 된 자리에서 아버지를 생각하고 그 자리에서 일어나서 집을 향해 발걸음을 내 딛었다고 했습니다. 돌아오면서 얼마나 많은 세월의 자신의 방탕한 생활을 뉘우쳤겠습니까 그래서 이제는 '나 같은 놈이 어떻게 아버지의 얼굴을 대할 수 있을까 그저 품꾼의 하나같이 대해 달라고 하리라' 하고 돌아왔는데
3. 아버지는 아들을 향해 달려 나와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특징입니다. 기독교는 하나님이 인간을 찾아온 종교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찾아가는 종교가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을 찾아오는 종교란 말입니다. 크리스마스의 의의(意義)가 여기에 있습니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고 하였습니다.(눅19:10) 우리는 모두 하나님을 등지고 멀리 떠나 죄의 거리에서 방황하며 살던 자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스스로 숨어버렸던 아담의 후손으로 범죄한 인류의 조상의 핏줄로 태어났기에 우리 스스로는 하나님께 돌아갈 수 없었던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 편에서 우리를 위해 찾아 오셨다는 데 의의가 깊습니다. 오늘 말씀중, '아직도 상거가 먼데'라는 말씀을 유의해 보시기 바랍니다. 원문대로 보면, "아직도 거리가 먼데도 불구하고".라는 뜻이 있습니다. (but while he was yet a distance) '아직도 상거(相距)가 먼데.'라는 말이 상징하는 뜻은 매우 깊다고 봅니다. 아들 편에서 아직도 아버지와의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는 그 거리였지만 아버지 편에서 먼저 달려왔다는 뜻입니다. 아직도 상거가 먼데도 하나님은 아들을 측은히 여겨 달려 왔다는 것입니다. 거지꼴이 다 된 아들! 누더기 옷, 냄새나는 몸으로 돌아오는 아들의 모습을 보고 아버지는 참을 수 없어 먼저 달려 왔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아가페의 사랑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깊은 진리의 교훈을 찾게 됩니다.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과 멀리 떨어져 있었다고 해도, 제아무리 허랑 방탕하게 인생을 살았다 해도, 그 자리에서 일어나 돌아서기만 하면 하나님 편에서 먼저 우리를 향하여 달려오신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입니다. 우리가 비록 하나님과 멀리 떠난 삶을 살았다해도 마음으로부터 다시 돌아오기만 하면, '아직도 상거가 멀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용납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탄은 우리를 불쌍히 여겨 우리에게 달려오는 거룩한 날입니다. 이 얼마나 감격적인 일입니까
그런데, 오늘 성탄을 맞이하는 우리들의 모습이 어떠합니까 우리를 향해 오시는 아버지의 사랑을 정면으로 거절하는 행위들은 하고 있지 않는지. 도리어 아버지의 오심을 보고 피해 달아나는 행위들은 하고 있지 않는지 깊이 반성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아직도 상거가 먼데.' 먼저 달려오는 아버지의 사랑을 외면하는 아들이라면 영영 버린 자식들일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 일년동안 하나님과의 거리가 멀어진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와의 거리가 멀어진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되십니까 예배생활에서 멀어진 것은 없이 않는지 감사생활에서 멀어진 것은 없지 않는지 아니면 헌금생활에서, 봉사생활에서 하나님과의 거리가 멀어진 것은 없지 않는지 깊이 반성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현실의 삶에서 정말 쥐염 열매로 배를 채우려고 해도 그것마저도 없어진 상태에서 있다면, 진정으로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바랍니다. 이
둘째아들의 심정으로 하나님께 회개하고 그 자리에서 일어서기를 바랍니다. 스스로 회개하고 돌아올 마음만 먹으면, 아직도 상거가 먼데도 불구하고 아버지 편에서 먼저 찾아오십니다. 거지꼴이 다 되었지만 '아들을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오시는 아버지이십니다. 우리가 비록 하나님과 멀리 떠난 삶을 살았다 하더라도 마음으로부터 다시 돌아오기만 하면, '아직도 상거가 멀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용납하십니다. 성탄은 우리를 불쌍히 여겨 아버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달려오심의 날입니다. 이 얼마나 감격적인 일입니까! 그래서 '기쁘다 구주 오셨네'입니다. 그래서 '만백성 맞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메리 크리스마스라(Merry Christmas)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과의 멀어진 것이 있다면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영접합시다. 혹시 남을 미워하는 마음이 아직도 남아 있습니까 혹시 남을 시기하는 마음, 원망하는 마음이 있습니까 혹시 교회생활에서 불평스러운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이 있습니까 혹시 남모르게 자신의 부정직이 탄로날가봐 전전긍긍하는 경우가 있습니까 모두 묵은해와 함께 흘러 보내고, 거지꼴이 된 아들이지만, 아직도 상거가 먼데도 달려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는 하나님의 사랑 앞에, 다 내어놓는 회개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크리스마스가 진정으로 기쁜 성탄, 즐거운 성탄이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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