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 두사람 (눅15:11-32)
본문
저는 누가복음에 나오는 다섯사람의 부자를 통하여 우리 인생을 값지게 살 수 있는 참된 비결을 얻으시기를 원합니다. 지난 주에는 세 사람의 부자에 대하여 말씀 드렸 습니다. 약속 드린대로 오늘은 두사람의 부자에 대하여 마저 말씀 드리므로서 올바 르고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축복을 받아 부유하게 사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첫째는 누가복음 15장 11절에서 32절에 나오는 두 아들을 둔 부자에 대하여 알아 보 시겠습니다. 이 부자는 어쩌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모형인지도 모릅니다. 이 부자를 생각하면서 우리는 아버지 하나님의 깊으신 사랑과 뜻을 이해하게 됩니다. 이 부자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맏아들은 그 아버지와 함께 아버지의 집에 충실 허습니다. 문제는
둘째 아들 때문에 일어 납니다.
둘째 아들은 그의 아버지께 나아 갑니다. 자기몫의 재산을 미리 분배해 줄것을 청구합니다. 유대인의 상속법에 장자는 그 아버지 재산의 3분의 2를 가지게 됩니다. 차자는 몇명이 되든지 그 나머지 3분의 1를 균등하게 나누어 가지도록 되어 있습니다. 아직 아버지가 생존해 있는데 자기 분깃의 재산을 청구하는 것은 큰 불효가 됩니다.
그런데도 그 아버지는 아들의 청구대로 재산을 나누어 줍니다. 아버지가 뼈빠지게 벌어서 모은 재산 입니다. 아직도 그 아버지가 정정하게 생존해 계십니다. 우리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으로 볼 때에는 가능한 이야기 입니다.
둘째 아들은 그 재산을 모아 가지고 먼 타국으로 갔습니다. 제멋대로 쓰기 시작합니다. 홀라당 탕진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무일푼의 설음을 맛보게 됩니다. 그는 자기의 잘못을 깨닫습니다. 크게 결심을 합니다. 돼지치기를 하던 신세를 벗어 부치고 아버지께로 돌아 옵니다. 아버지는 지금쯤
둘째 아들이 어떤 모습이 되었을지를 아시는듯 합니다. 날마다 문을 열어 놓고 아들을 기다립니다. 어느날 멀리서 아들의 모습이 어른거립니다. 상거가 먼데 아버지는 맨발로 뛰어 갑니다. 거지 꼬락서니의 아들을 품안에 안습니다. 품군의 하나로 써달라는 아들의 청를 물리칩니다. 아버지의 모든 것을 아들에게 주어 버리고 맙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입을 맞춥니다. 살과 살의 부딕침입니다. 아담이 그 아내된 하와를 보고 이는 내 살중의 살이요 하는 뜻입니다. 우리 주님이 요한복음 6장 56절에서 너는 내 안에 있고 나는 네 안에 있다는 바로 그러한 뜻이기도 합니다. 제일 좋은옷을 입힙니다. 그것은 아들로서 명예가 회복 되었다는 증거입니다. 손에 가락지를 끼워 줍니다. 아버지의 권위가 이제는 아들에게 위임된 것입니다. 발에 신을 신겨 줍니다. 종들은 신을 신지 않습니다. 그 주인의 아들이라는 표입니다. 또한 그것은 자유인의 표시이기도 합니다. 송아지를 잡아서 잔치를 벌립니다. 송아지는 속죄의 표시이며 잔치는 구속함을 받은 즐거움의 축제인 것입니다.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것은 사실입니다. 아버지의 모든 것은 아들의 것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 여기에서 재산이란 구속받은 자를 위하여 사용 되어져야 한다는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아버지의 집에 아버지와 함께 있었던 맏아들은 아버지가 동생에게 하는 것을 보고 크게 불만을 나타냅니다. 맏아들은 참을 수 없습니다. 그는 말합니다."내가 여러해를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라고 했습니다. 이 맏아들은 재산이 어떻게 쓰여져야 할것을 아지 못했습니다. 재물이란 육신의 향락을 누리기 위하여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만약 누가 재물을 육신의 향락을 위한 조건으로 소유하기를 원한다면 어떤 결과가 올까요. 그 사람은 얼마되지 아니하여 곧 돈을 사랑하는 일만 악에 빠져 버리고 말것입니다. 그 재물과 함께 육신의 일락만 좇은 댓가로 영원히 타는 불로 스스로 채아가지 않으면 안될 것입니다. 재물만을 탐하는 것은 부나비와 같이 스스로 바베큐 인생을 빚어내는 것입니다.
둘째 우리는 누가복음 19장 1절에서 10절에 나오는 삭개오와 만나게 됩니다. 삭개오는 여리고에 살고 있는 세리장이었습니다. 지금도 당시와 마찬가지이지만 세리는 대체적으로 착취와 부당이득으로 축재합니다. 돈은 많이 긁어 모으나 사람들의 미움과 천대를 받습니다. 여기 여리고의 세리장 삭개오도 마찬가지 입니다. 그는 돈은 많으나 키가 작고 볼품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사회로 부터 냉대를 받았습니다. 신체의 결점과 소외감은 그 보상심리로 더 많은 착취를 했을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는 주님을 만나고 그의 장래의 방향을 새로 결정짓게 됩니다. 그는 지위도 있고 돈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주님 만나기를 열망했다는 점에서 다른 어떤 부자들 보다도 그를 돋보이게 합니다. 삭개오가 주님을 만나고서는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습니다. 이 사실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이것은 사람마다 소원하면서도 가지지 못하는 영적은사입니다. 그리고 삭개오는 죄인된 자신이 계속 주님을 모시기 위하여서는 어 떻게 해야할 것을 알았습니다.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배나 갚겠나이다." 마음에 진심으로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하나님의 진리는 사람을 재물과 탐욕으로부터 자유롭게 합니다. 삭개오는 주님의 모습을 뵈옵고 그의 음성을 듣는것 만으로 벌써 자신 안에 새로운 개혁을 단행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삭개오의 고백은 자기의 결백함을 온 동네에 알리는 결과가 되었습니다.
그는 훌륭한 친구 주님을 영접하자 마자 그의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자기를 의롭다고 생각한 부자 관원과는 매우 대 조적입니다. 부자 관원은 주님이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라고 말씀할 때에 결단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관원으로서 자신의 부를 정당화 시킬 수 있는 의로움을 인정받기 원하였으나 사실은 그의 재물이 정당하지 못한 축재였는지도 모릅니다. 사람은 마음이 켕기면 주저스러워 지는 것입니다. 부자 관원은 자기 돈의 해결 방법에 기꺼이 따르지 못했습니다. 만약 돈의 출처가 모호하다면 그 돈의 해결을 들어내어 놓고 해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높은 지위를 가진 관원으로서 그리고 존경 받는 유지로서 치명적인 치부를 공개하는 것은 쉽지 않는 것입니다. 그 부자는 돈을 사랑하는 마음 보다는 그 돈을 해결하는 방법이 더 어려워서 그토록 갈구하던 영생의 갈망도 스스로 포기 했는지 모릅니다. 돈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이런 경우를 항상 염두에 두어야할 것입니다. 삭개오를 보십시요. 그는 더러운 방법으로 돈을 모았을 것이라고 생각들을 했습니다. 그러한 비난은 모면할 수 없었습니다. 변명할 길도 없습니다. 그는 슬펐습니다. 그러나 슬퍼하지만은 않았습니다. 굳이 결백을 따지러들지도 않았습니다. 사람이 하는 일에는 어디에나 음모와 술수 그리고 온갖 불의와 부조리가 있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때가 왔습니다. 공의와 사랑의 주님을 만난 것입니다. 삭개오는 자신의 재산을 공개 했습니다. 그는자기의 결백을 증명 받았습니다. 주님은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 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도 아브라함의 자손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성도들이 부자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천지와 만물을 지으신 조물주이십니다. 하나님께는 부족이 없으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모든 것을 당신의 자녀된 성도들에게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축복의 길을 알지 못합니다. 탐욕으로 어두어진 마음이 죄악 가운데 눌리어서 가난과 고통 으로 신음하고 있을 뿐입니다. 죄와 사망 가운데 앉아서 괴로움과 슬픔으로 밥을 삼고 사는 인생에게 새 삶을 주시기 위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주를 믿는 성도들을 영원히 풍성하고 넘치는 부자가 되게해 주시려고 주님이 오신 것입니다. 모든 재물의 주인은 주님이십니다. 모든 재물의 현주소는 자연 입니다.
그런데 사람 들은 재물을 부당하게 차지하려 합니다. 자기만을 위하여 취하려 합니다. 여기에 사람의 잘못이 있습니다. 주님의 것으로 인정하지 않는 재물은 부당한 것입니다. 주님 을 위하여 쓰여지지 않는 재물은 부끄러운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주시는 재물의 축복을 정당하게 누려야 합니다. 내 자신의 향락과 일신상의 안락만을 위하여 허비해 서는 안됩니다. 재물은 인간구원을 위하여 사용되어 져야만 합니다. 인권이 존중되는 복지사회를 향하여 인류공영에 이바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러한 재물관을 가지게 되면 하나님의 것이 내것이 되고 나의 것이 하나님의 것이 됩니다. 하나님의 부요하심 같이 이 땅에서도 부요한 삶을 누리게 될것입니다. 재물에 깨끗하여 거룩한 영적생활의 풍요함을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첫째는 누가복음 15장 11절에서 32절에 나오는 두 아들을 둔 부자에 대하여 알아 보 시겠습니다. 이 부자는 어쩌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모형인지도 모릅니다. 이 부자를 생각하면서 우리는 아버지 하나님의 깊으신 사랑과 뜻을 이해하게 됩니다. 이 부자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맏아들은 그 아버지와 함께 아버지의 집에 충실 허습니다. 문제는
둘째 아들 때문에 일어 납니다.
둘째 아들은 그의 아버지께 나아 갑니다. 자기몫의 재산을 미리 분배해 줄것을 청구합니다. 유대인의 상속법에 장자는 그 아버지 재산의 3분의 2를 가지게 됩니다. 차자는 몇명이 되든지 그 나머지 3분의 1를 균등하게 나누어 가지도록 되어 있습니다. 아직 아버지가 생존해 있는데 자기 분깃의 재산을 청구하는 것은 큰 불효가 됩니다.
그런데도 그 아버지는 아들의 청구대로 재산을 나누어 줍니다. 아버지가 뼈빠지게 벌어서 모은 재산 입니다. 아직도 그 아버지가 정정하게 생존해 계십니다. 우리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으로 볼 때에는 가능한 이야기 입니다.
둘째 아들은 그 재산을 모아 가지고 먼 타국으로 갔습니다. 제멋대로 쓰기 시작합니다. 홀라당 탕진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무일푼의 설음을 맛보게 됩니다. 그는 자기의 잘못을 깨닫습니다. 크게 결심을 합니다. 돼지치기를 하던 신세를 벗어 부치고 아버지께로 돌아 옵니다. 아버지는 지금쯤
둘째 아들이 어떤 모습이 되었을지를 아시는듯 합니다. 날마다 문을 열어 놓고 아들을 기다립니다. 어느날 멀리서 아들의 모습이 어른거립니다. 상거가 먼데 아버지는 맨발로 뛰어 갑니다. 거지 꼬락서니의 아들을 품안에 안습니다. 품군의 하나로 써달라는 아들의 청를 물리칩니다. 아버지의 모든 것을 아들에게 주어 버리고 맙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입을 맞춥니다. 살과 살의 부딕침입니다. 아담이 그 아내된 하와를 보고 이는 내 살중의 살이요 하는 뜻입니다. 우리 주님이 요한복음 6장 56절에서 너는 내 안에 있고 나는 네 안에 있다는 바로 그러한 뜻이기도 합니다. 제일 좋은옷을 입힙니다. 그것은 아들로서 명예가 회복 되었다는 증거입니다. 손에 가락지를 끼워 줍니다. 아버지의 권위가 이제는 아들에게 위임된 것입니다. 발에 신을 신겨 줍니다. 종들은 신을 신지 않습니다. 그 주인의 아들이라는 표입니다. 또한 그것은 자유인의 표시이기도 합니다. 송아지를 잡아서 잔치를 벌립니다. 송아지는 속죄의 표시이며 잔치는 구속함을 받은 즐거움의 축제인 것입니다.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것은 사실입니다. 아버지의 모든 것은 아들의 것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 여기에서 재산이란 구속받은 자를 위하여 사용 되어져야 한다는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아버지의 집에 아버지와 함께 있었던 맏아들은 아버지가 동생에게 하는 것을 보고 크게 불만을 나타냅니다. 맏아들은 참을 수 없습니다. 그는 말합니다."내가 여러해를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라고 했습니다. 이 맏아들은 재산이 어떻게 쓰여져야 할것을 아지 못했습니다. 재물이란 육신의 향락을 누리기 위하여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만약 누가 재물을 육신의 향락을 위한 조건으로 소유하기를 원한다면 어떤 결과가 올까요. 그 사람은 얼마되지 아니하여 곧 돈을 사랑하는 일만 악에 빠져 버리고 말것입니다. 그 재물과 함께 육신의 일락만 좇은 댓가로 영원히 타는 불로 스스로 채아가지 않으면 안될 것입니다. 재물만을 탐하는 것은 부나비와 같이 스스로 바베큐 인생을 빚어내는 것입니다.
둘째 우리는 누가복음 19장 1절에서 10절에 나오는 삭개오와 만나게 됩니다. 삭개오는 여리고에 살고 있는 세리장이었습니다. 지금도 당시와 마찬가지이지만 세리는 대체적으로 착취와 부당이득으로 축재합니다. 돈은 많이 긁어 모으나 사람들의 미움과 천대를 받습니다. 여기 여리고의 세리장 삭개오도 마찬가지 입니다. 그는 돈은 많으나 키가 작고 볼품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사회로 부터 냉대를 받았습니다. 신체의 결점과 소외감은 그 보상심리로 더 많은 착취를 했을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는 주님을 만나고 그의 장래의 방향을 새로 결정짓게 됩니다. 그는 지위도 있고 돈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주님 만나기를 열망했다는 점에서 다른 어떤 부자들 보다도 그를 돋보이게 합니다. 삭개오가 주님을 만나고서는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습니다. 이 사실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이것은 사람마다 소원하면서도 가지지 못하는 영적은사입니다. 그리고 삭개오는 죄인된 자신이 계속 주님을 모시기 위하여서는 어 떻게 해야할 것을 알았습니다.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배나 갚겠나이다." 마음에 진심으로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하나님의 진리는 사람을 재물과 탐욕으로부터 자유롭게 합니다. 삭개오는 주님의 모습을 뵈옵고 그의 음성을 듣는것 만으로 벌써 자신 안에 새로운 개혁을 단행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삭개오의 고백은 자기의 결백함을 온 동네에 알리는 결과가 되었습니다.
그는 훌륭한 친구 주님을 영접하자 마자 그의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자기를 의롭다고 생각한 부자 관원과는 매우 대 조적입니다. 부자 관원은 주님이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라고 말씀할 때에 결단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관원으로서 자신의 부를 정당화 시킬 수 있는 의로움을 인정받기 원하였으나 사실은 그의 재물이 정당하지 못한 축재였는지도 모릅니다. 사람은 마음이 켕기면 주저스러워 지는 것입니다. 부자 관원은 자기 돈의 해결 방법에 기꺼이 따르지 못했습니다. 만약 돈의 출처가 모호하다면 그 돈의 해결을 들어내어 놓고 해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높은 지위를 가진 관원으로서 그리고 존경 받는 유지로서 치명적인 치부를 공개하는 것은 쉽지 않는 것입니다. 그 부자는 돈을 사랑하는 마음 보다는 그 돈을 해결하는 방법이 더 어려워서 그토록 갈구하던 영생의 갈망도 스스로 포기 했는지 모릅니다. 돈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이런 경우를 항상 염두에 두어야할 것입니다. 삭개오를 보십시요. 그는 더러운 방법으로 돈을 모았을 것이라고 생각들을 했습니다. 그러한 비난은 모면할 수 없었습니다. 변명할 길도 없습니다. 그는 슬펐습니다. 그러나 슬퍼하지만은 않았습니다. 굳이 결백을 따지러들지도 않았습니다. 사람이 하는 일에는 어디에나 음모와 술수 그리고 온갖 불의와 부조리가 있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때가 왔습니다. 공의와 사랑의 주님을 만난 것입니다. 삭개오는 자신의 재산을 공개 했습니다. 그는자기의 결백을 증명 받았습니다. 주님은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 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도 아브라함의 자손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성도들이 부자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천지와 만물을 지으신 조물주이십니다. 하나님께는 부족이 없으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모든 것을 당신의 자녀된 성도들에게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축복의 길을 알지 못합니다. 탐욕으로 어두어진 마음이 죄악 가운데 눌리어서 가난과 고통 으로 신음하고 있을 뿐입니다. 죄와 사망 가운데 앉아서 괴로움과 슬픔으로 밥을 삼고 사는 인생에게 새 삶을 주시기 위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주를 믿는 성도들을 영원히 풍성하고 넘치는 부자가 되게해 주시려고 주님이 오신 것입니다. 모든 재물의 주인은 주님이십니다. 모든 재물의 현주소는 자연 입니다.
그런데 사람 들은 재물을 부당하게 차지하려 합니다. 자기만을 위하여 취하려 합니다. 여기에 사람의 잘못이 있습니다. 주님의 것으로 인정하지 않는 재물은 부당한 것입니다. 주님 을 위하여 쓰여지지 않는 재물은 부끄러운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주시는 재물의 축복을 정당하게 누려야 합니다. 내 자신의 향락과 일신상의 안락만을 위하여 허비해 서는 안됩니다. 재물은 인간구원을 위하여 사용되어 져야만 합니다. 인권이 존중되는 복지사회를 향하여 인류공영에 이바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러한 재물관을 가지게 되면 하나님의 것이 내것이 되고 나의 것이 하나님의 것이 됩니다. 하나님의 부요하심 같이 이 땅에서도 부요한 삶을 누리게 될것입니다. 재물에 깨끗하여 거룩한 영적생활의 풍요함을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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