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의 목격자-바라바 (막15:6-15)
본문
예수님이 십자가에 목박혀 죽으시기까지 이 사건을 만든 장본인들은 많았습니다. 그 중 쉽게 들어나지 않는 한사람, 우리가 간과하기 쉬운 한사람이 있는 데 그가 바로 바라바입니다. 오늘은 이사람을 상고해 보겠습니다. 복음서를 읽다보면 어떠한 사건이나 인물에 관해서 4복음서에 다 기록된 경우 를 보게 됩니다. 예수님이 하신일을 낱낱이 다 기록한다면 이 세상의 책으로 도 다모자르다 고 말한 요한의 증언으로 보아서 성경에 기록된 인물이나 사건 들은 엄선하고 엄선하고 또 엄선해서 기록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똑같은 사건이나 인물들이 계속해서 각 복음서마다 지면을 차지하고 있다면 그안에 중대한 교훈이 담겨져 있음이 틀림없습니다. 여러분들도 바라 바라는 인물이 별로 대단치 않은 사람으로 알고 계셨을 것입니다. 저도 이 말씀을 준비하기 전까지는 적어도 그랬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이 사복음서에 모 두 등장하고 있음을 보고 연구해본 결과 이 사람을 통하여 주시는 교훈은 너 무나 귀중하고 충격적이었습니다. 먼저 각 복음서에서 이 사람을 어떻게 소개 하고 있는 지 살펴봅시다. 그 때에 바라바라는 유명한 죄수가 있는데.(마27:16) 민란을 꾸미고 이 민란에 살인하고 포박된 자중에 바라바라 하는 자가 있는지라.(막15:7) 이 바라바는 성중에서 일어난 민란과 살인을 인하여 옥에 갇힌 자더라.(눅23:19) 저희가 또 소리질러 가로되 이 사람이 아니라 바라바라 하 니 바라바는 강도러라.(요18:40)
이상과 같은 증언들을 종합해 볼 때 바라바는 단순한 강도가 아니라 시위를 주동하고 살인한 강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유대가 로마의 식민지였다는 당시 상황으로 보아서 바라바는 급진 세력인 엣세네파의 행동대원이나 당 간부쯤 되는 사람으로 추측됩니다. 엣세네파는 독립운동을 하는 세력으로서 그 방법 이 매우 과격했습니다. 시위를 주동하고, 요인을 암살하고, 관공서를 습격 방 화하는 반 로마 정치적 단체였습니다. 바라바는 이 당의 일원으로 정치적 죄 목으로 체포되었을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빌라도가 총독으로 부임한 후 당시 유대에서는 두번의 대규모 시위가 있었습니다,. 한번은 빌라도가 부임하 자마자 황제에 대한 충성도를 보이기 위하여 황제 숭배 정책을 폈는데 전통적 인 유대인의 유일신 신앙을 이해하지 못한데서 나온 이러한 정책은 당시 유대 인들에게 대규모 시위라는 방법으로 반대에 부딪치게 됩니다. 다른 억압에 대 해서는 그들이 상황에 따라 그대로 받아들이지만 유일신 하나님의 이름이 도전받는 우상숭배를 강요받았을 때는 목숨걸고 항거하는 저들의 민족성 을 모른데서 나온 정책이었습니다. 두번째 폭동은 지중해 해안도시 가이샤라 에 소위 수문 건축을 시도합니다. 그러다 보니 건축비용이 많이 들게 되고 그 것을 유대인들의 세금으로 충당하려다 보니 과다한 세금을 징수하게 되었고 이것을 도화선으로 두번째 시위에 부딪치게 됩니다. 이러한 가운데 빌라도에 대한 부정적 평가가 정적들에 의해 계속해서 로마 중앙정부에 보고됩니다. 만 일 한번 더 이러한 일이 있을 경우 그는 소환당할 위기에 놓여 있었습니다. 때문에 그는 예수님의 재판때 양심의 증거와 아내의 경고가 있었음에도 불구 하고 또다른 민란이 두려워 손을 씻고 말았던 것입니다. 바라바는 여기서 첫 번째 아니면 두번째 대규모 소요가 있었을 때 주동자로 체포된것 같습니다. 바로 이사람 바라바, 이 사람의 생사를 놓고 당시 상황에서 세개의 중요한 선 택이 있었습니다.
1. 바라바에 대한 빌라도의 선택이 있었습니다. 지금의 특사제도 처럼 당시 유대나라에도 특사제도가 있었습니다. 유월절은 이스라엘의 최대 명절입니다. 이 명절을 맞아 당시 총독 빌라도는 죄수 한사람을 석방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마침 그전에 예수님이 몇몇 주동자들에 의 하여 고소된 상태였습니다. 빌라도는 이 고소가 부당했고 음모에 의한 것임을 잘 알았습니다. 잡혀온 예수님이 무죄자였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 을 석방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럴수 없었던 이유는 군중들의 압력때문이 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대로 빌라도는 정치적으로 상당한 위기에 놓여 있었 습니다. 그래서 그는 바라바와 예수와의 선택에서 바라바를 선택하고 말았습니다. 군중들의 압력은 이렇습니다.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는 자를 놓아주면 당신의 황제 가이사보다 예수가 더 높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만일 이 소식이 당신의 황제 가이사에게 들어가기라도 하면 당신의 신 상에 이로울 것이 없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자신의 정치적 안정을 위해서, 군중들의 폭동을 방지하기 위해서, 자신의 인기 영합을 위해 서 바라바를 놓아 주고 예수님를 십자가에 못박고 말았습니다. 그는 정의에 따른 선택보다 군중들의 인기에 영합하기 위한 선택을 했습니다. 양심의 선택 보다 자기의 지위를 지키기 위해 선택했습니다. 진리를 선택하기 보다 다수가 원함을 선택했습니다. 양심의 소리보다 유행을 따른 선택을 했습니다. 이러한 그는 당연히 비난 받아야만 합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그를 감히 비난할 수 없음은 바로 오늘 이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선택이 바로 빌라도와 같은 선택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운데 아직도 많은 사람이 신앙의 비겁자가 되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예수 믿었다고 한지, 교회 출석했다고 한지 수 년 혹은 수십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영적인 어린아이임의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의를 따르기보다 인기를 영합했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신앙 양심보다 밥줄을 선택하기 때문입니다. 진리보다 자기 안 에 있는사욕과 명에심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의 감동 보다 편해지고 싶어 하는 안일을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개인적 확신과 고백을 따르기 보다는 시대 의 유행과 다수의 흐름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이와같이 하나님의 시선보다 인간의 시선을 더 의식하기 때문에 올바른 구원의 길을 선택하지 못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저와 여러분들 가운데 이러한 그릇된 선택을 한 원인이 있 다면 그것은 빌라도가 선택한 그 길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빌라도의 선택을 빌라도 한사람의 선택뿐만 아니라 이시대를 살고 있는 어리석은 많은 사람의 선택을 대표하는 선택일 뿐입니다. 다수가 반드시 진리가 아님을 우리는 빌라 도에게서 배웁시다. 유행을 따르다가는 우리 마음속의 확신이 변질된다는 사 실을 배웁시다. 인기가 반드시 정의가 아님을 배웁시다. 하나님의 시선보다 인간의 시선을 의식한 결과가 얼마나 무서운가를 배웁시다. 전세계 수십억 그리스도인들이 사도신경을 고백할 때마다 빌라도의 이름이 얼마나 저주스럽게 등장합니까 바라바에 대한 빌라도의 선택은 이러한 비극을 초래했습니다.
2.바라바에 대한 군중들의 선택이 있었습니다. 군중들의 예수님에 대한 종려주일과 금요일의 차이를 아십니까 예루살렘성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향하여 열렬히 환영했던 군중들, 그러나 불과 댓새 후에 저들은 그렇게 환영했던 예수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소리지르고 있습니다. 이 짧은 5일 동안 저토록 변한 군중들의 마음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사 실 저들 나름대로 이유는 있었습니다. 어느날 갑자기 예수라는 분이 나타나서 기사이적을 행하고 지도자들의 죄를 가차없이 책망하는 것을 보니 저들이 기 다리던 메시야가 틀림없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직접, 간접적으로 자신이 메시 야임을 말씀하신 것을 보아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메시야관이 잘못되 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관점은 유대인뿐만 아니라 온 인류를 구원하는 구 세주로 메시야를 보내셨지만 유대인들의 관점은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오랫동안 억눌려 지내왔고, 약탈당해 왔고, 억울하게 지내왔던 역사속에서 세 계를 제패하는 강력한 지도자로서 메시야를 기다려 왔습니다. 더군다나 당시는 로마의 지배하에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생각은 의심할 여지 없이 서민 구 석구석까지 확장되었습니다. 이런때 예수님이 등장하셨으니 사람들은 모두 틀림없구나. 하면서 좋아하고 환영했습니다. 이러한 그들의 생각이 잘나타난 장면이 바로 예수님의 예루살렘입성입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라고 외치는 저들의 함성속에는 과거 다윗시대의 영화를 회복시켜달라는 요구가 있었습니다. 이제는 본격적으로 로마를 쳐부수고 우리를 해방시켜 주시려고 드디어 예루살렘성에 입성하시는구나 하면서 좋아하고 환영했습니다. 예수님을 민족 의 영웅으로 기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몇일 돌아가는 것을 가만히 보니 그것이 아니더란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붙잡히신 후 군중들은 이제나 저 제나 예수님의 활약을 기대했지만 어쩐지 로마병정앞에서 무력하단 말입니다. 그러다 보니 빌라도의 법정에까지 끌려오게 되었고 한마디도 못한채 오히려 매맞고, 침밴음을 당하고, 홍포를 입고, 조롱당하고 있더란 말입니다. 이러한 맥빠진 예수는 그들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예수였습니다. 용감한 사자인줄 알 았는데 이제보니 발톱이 다빠지고 이빨도 다빠진 종이사자였더란 말입니다. 그러한 예수님를 바라보는 군중들은 너무나도 실망했고 그 실망은 곧 분노로 바뀌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살인자로 체포된 바라바를 보니 패배한 메시야보 다 훨신 낫게 보이더란 말입니다. 그래도 나름대로 독립운동을 한 사람이고 보니 자칭 메시야라하는 저 예수님보다 맘에 든다는 것입니다. 적어도 이 빌 라도 법정앞에서 무기력하게 서있는 저 예수보다는 바라바가 그들의 기대와 생각에 훨신 더 걸맞는 모습으로 그들앞에 다가옵니다. 예수님보다 바라바를 놓아달라고 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입니다. 다시말해 그들이 예수님 보다 바라바를 선택한 이유는 자기들이 원하는 목표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 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 대해 불과 닷새만에 그 마음을 바꾸게 한 이 유였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은 이천년후에 사는 우리들에게 엄청난 경고 를 던져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보신 관점에서 예수를 보지 않고 내가 설정 한 동기, 내 방법, 내가 세운 목표대로 예수님를 바라본다면 우리도 닷새후에 저 군중들 처럼 예수를 십자가에 못받으소서 라고 소리치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날 소위 그리스도인들이라 하는 자들이 너무나 쉽게 신 앙을 버리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들이 교회에 출석하고, 신앙 고백을 하고, 신앙생활의 행위를 하지만 정작 저와 여러분들이 원하고 있는 것이 예수가 아니라 예수로 인한 영광과 축복뿐이었다면 우리와 여기 이 군중 들의 모습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을 원하십니까 아니면 하나님으로 부터 오는 부귀영화를 원하십니까 여러분들이 예수믿고 교회출석하는 이유가 단순히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해서라면, 질병에서만 고침받기 위해 서라면, 사업성공만을 위해서라면, 승진하기 위해서라면, 습관이기에 안나가 면 꺼림직하기 때문이라면 이런 사람은 여전히 군중일 수 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것들이 이루어지지 않을때 예수도 별거 아니더라 하나님도 어쩔 수 없더라 하며 5일 후에는 예수를 배신하게 될테니 말입니다. 이와같 이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지 않는 신앙은 이러한 위험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생각하는 구원은 어떤 구원입니까 여러분이 스스로 설정하시 기 전에 마태 1:21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 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자 이심이라. 하나님은 먼저 죄에서의 구원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목적이 바로 이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여러분이 믿고 있는 예수와는 어떤 차이가 있습니 까 바라바에 대한 군중들의 선택을 다시한번 기억하시고 지금 어떤 예수를 믿을 것인가를 선택하십시오.
3. 바라바에 대한 예수님의 선택이 있었습니다. 바라바가 석방되어지기 까지 자기가 한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는 단순 히 빌라도와 군중들의 정치게임에 의하여 석방되어진 것뿐입니다. 죽이면 죽는 것이고 살리면 사는 것뿐이지 바라바편에서는 전혀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바라바와 같은 입장에 놓여 있던 예수님은 전혀 그렇지가 않았 습니다. 물론 억울하게 잡혀오긴 하셨지만 예수님이 원하시기만 하면 언제든 지 석방될 수도 있었습니다. 요한 19장에 보면 빌라도는 내심 예수님을 놓아 주고 싶어 했습니다. 예수님이 죄다 없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12절) 만일 예수님이 고소자들의 고발을 번복할 만한 증언만 하면 예수님을 석방시킬 뜻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예수님께 그러한 변명을 요구합니다.(10절) 이때 예수님이 빌라도가 원하는 대답을 하셨더라면 그 즉 시로 석방되었을 것이요 반대로 바라바가 십자가에 처형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은 전혀 뜻밖이었습니다. 빌라도가 원하는 대답이 아닌 빌 라도의 살리고 죽이는 권세가 하나님으로 부터 온것임을 말씀하십니다. 빌라 도가 예수님을 죽이고 살리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죽고 사는 문제는 하나님께 있으며 하나님의 허락없이는 아무도 주님의 생명을 건드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빌라도의 결정때문에 죽고 사는 것이 아님을 아셨습니다. 이 십자가는 빌라도 때문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보면 예수님 스스로의 결 정이였습니다. 요한복음 10:17-18을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이를 내게서 빼앗을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바라바는 어쩔 수 없이 십자가에 죽을 수 밖에 없는 사람이었지만 예수님은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십자가는 주님의 스스로의 선택이었습니다. 주님이 원 하시기만 하면 변론을 통해서 석방될 수 있었으며 혹 빌라도가 석방시키지 않 아도 12영이 더되는 천사를 명하여 능히 십자가에서 내려오실 수 있었지만 그 리하지 아니하시고 이 길을 걸어가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이 쓴잔을 기꺼이 마시기로 작정하시고 십자가를 선택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바라바는 누구때문에 살아난 것입니까 군중들의 지지때문입니까 아니면 빌라도의 선택때문입 니까 결정적인 것은 바로 예수님 스스로 죽음의 길을 선택하셨다는데에 있습니다. 그래서 그가 살아난 것입니다. 군중들이나 빌라도가 바라바를 살렸다고 생각지 마십시오. 예수님이 이 길을 선택하셨기에 바라바는 그렇게 되어진 것 뿐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이 사실에 흥분되지 않습니 까 가슴이 두근 거리지 않습니까 전설에 의하면 바라바는 후일 그리스도인 이 되었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그는 멀리 서 가슴을 치며 통곡했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그 후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렇게 증거하며 살았다고 합니다. 그분은 나때문에 죽으셨습니다. 내가 그분을 죽인 겁니다.
4. 결론 어떤 신학자는 바라바를 가르켜 그는 모든 인류를 상징하는 죄인이었다. 라 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바라바는 저와 여러분을 포함한 모든 인류의 그 림자였습니다. 예수님이 바라바의 죽음의 자리에 대신 서신 것, 그를 대신하 여 죽으신 것, 십자가에 달리신 것은 마땅히 사형에 해당하는 죄를 지으며 살 아온 저와 여러분들의 자리를 대신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기억하십니까 주님께서 이땅에 오신 목적을 선포하신 그 생생한 음성을 말입니다. 인자가 온것은 섬김을 받으러 온것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 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들의 대속물로 주려함이니라. 많은 사람들 이란 말에 주목하십시오. 많은 사람속에 바라바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담 이후 온 인류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는 바라바를 대신하여, 저와 여러분들을 대신 하여, 온 인류를 대신하여 주님께서 스스로 취하신 자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도 전설에 의하여 내려오는 저 바라바의 울부짖음의 고백이 있어야만 하겠습니다. 주님이여, 당신은 나때문에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만나는 사람마다 우리는 바라바처럼 증거해야합니다. 여보시오,예수님은 바로 나때문에, 그리고 당신때문에 죽으셨습니다. 이것이 바라바가 만난 십자가였습니다. 이것이 이천년전 오늘, 십자가사건의 내용입니다. 주님은 십자가를 스스로 선택하셨습니다. 나를 위하여, 그리고 여러분들을 위하여.
이상과 같은 증언들을 종합해 볼 때 바라바는 단순한 강도가 아니라 시위를 주동하고 살인한 강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유대가 로마의 식민지였다는 당시 상황으로 보아서 바라바는 급진 세력인 엣세네파의 행동대원이나 당 간부쯤 되는 사람으로 추측됩니다. 엣세네파는 독립운동을 하는 세력으로서 그 방법 이 매우 과격했습니다. 시위를 주동하고, 요인을 암살하고, 관공서를 습격 방 화하는 반 로마 정치적 단체였습니다. 바라바는 이 당의 일원으로 정치적 죄 목으로 체포되었을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빌라도가 총독으로 부임한 후 당시 유대에서는 두번의 대규모 시위가 있었습니다,. 한번은 빌라도가 부임하 자마자 황제에 대한 충성도를 보이기 위하여 황제 숭배 정책을 폈는데 전통적 인 유대인의 유일신 신앙을 이해하지 못한데서 나온 이러한 정책은 당시 유대 인들에게 대규모 시위라는 방법으로 반대에 부딪치게 됩니다. 다른 억압에 대 해서는 그들이 상황에 따라 그대로 받아들이지만 유일신 하나님의 이름이 도전받는 우상숭배를 강요받았을 때는 목숨걸고 항거하는 저들의 민족성 을 모른데서 나온 정책이었습니다. 두번째 폭동은 지중해 해안도시 가이샤라 에 소위 수문 건축을 시도합니다. 그러다 보니 건축비용이 많이 들게 되고 그 것을 유대인들의 세금으로 충당하려다 보니 과다한 세금을 징수하게 되었고 이것을 도화선으로 두번째 시위에 부딪치게 됩니다. 이러한 가운데 빌라도에 대한 부정적 평가가 정적들에 의해 계속해서 로마 중앙정부에 보고됩니다. 만 일 한번 더 이러한 일이 있을 경우 그는 소환당할 위기에 놓여 있었습니다. 때문에 그는 예수님의 재판때 양심의 증거와 아내의 경고가 있었음에도 불구 하고 또다른 민란이 두려워 손을 씻고 말았던 것입니다. 바라바는 여기서 첫 번째 아니면 두번째 대규모 소요가 있었을 때 주동자로 체포된것 같습니다. 바로 이사람 바라바, 이 사람의 생사를 놓고 당시 상황에서 세개의 중요한 선 택이 있었습니다.
1. 바라바에 대한 빌라도의 선택이 있었습니다. 지금의 특사제도 처럼 당시 유대나라에도 특사제도가 있었습니다. 유월절은 이스라엘의 최대 명절입니다. 이 명절을 맞아 당시 총독 빌라도는 죄수 한사람을 석방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마침 그전에 예수님이 몇몇 주동자들에 의 하여 고소된 상태였습니다. 빌라도는 이 고소가 부당했고 음모에 의한 것임을 잘 알았습니다. 잡혀온 예수님이 무죄자였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 을 석방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럴수 없었던 이유는 군중들의 압력때문이 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대로 빌라도는 정치적으로 상당한 위기에 놓여 있었 습니다. 그래서 그는 바라바와 예수와의 선택에서 바라바를 선택하고 말았습니다. 군중들의 압력은 이렇습니다.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는 자를 놓아주면 당신의 황제 가이사보다 예수가 더 높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만일 이 소식이 당신의 황제 가이사에게 들어가기라도 하면 당신의 신 상에 이로울 것이 없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자신의 정치적 안정을 위해서, 군중들의 폭동을 방지하기 위해서, 자신의 인기 영합을 위해 서 바라바를 놓아 주고 예수님를 십자가에 못박고 말았습니다. 그는 정의에 따른 선택보다 군중들의 인기에 영합하기 위한 선택을 했습니다. 양심의 선택 보다 자기의 지위를 지키기 위해 선택했습니다. 진리를 선택하기 보다 다수가 원함을 선택했습니다. 양심의 소리보다 유행을 따른 선택을 했습니다. 이러한 그는 당연히 비난 받아야만 합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그를 감히 비난할 수 없음은 바로 오늘 이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선택이 바로 빌라도와 같은 선택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운데 아직도 많은 사람이 신앙의 비겁자가 되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예수 믿었다고 한지, 교회 출석했다고 한지 수 년 혹은 수십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영적인 어린아이임의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의를 따르기보다 인기를 영합했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신앙 양심보다 밥줄을 선택하기 때문입니다. 진리보다 자기 안 에 있는사욕과 명에심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의 감동 보다 편해지고 싶어 하는 안일을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개인적 확신과 고백을 따르기 보다는 시대 의 유행과 다수의 흐름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이와같이 하나님의 시선보다 인간의 시선을 더 의식하기 때문에 올바른 구원의 길을 선택하지 못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저와 여러분들 가운데 이러한 그릇된 선택을 한 원인이 있 다면 그것은 빌라도가 선택한 그 길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빌라도의 선택을 빌라도 한사람의 선택뿐만 아니라 이시대를 살고 있는 어리석은 많은 사람의 선택을 대표하는 선택일 뿐입니다. 다수가 반드시 진리가 아님을 우리는 빌라 도에게서 배웁시다. 유행을 따르다가는 우리 마음속의 확신이 변질된다는 사 실을 배웁시다. 인기가 반드시 정의가 아님을 배웁시다. 하나님의 시선보다 인간의 시선을 의식한 결과가 얼마나 무서운가를 배웁시다. 전세계 수십억 그리스도인들이 사도신경을 고백할 때마다 빌라도의 이름이 얼마나 저주스럽게 등장합니까 바라바에 대한 빌라도의 선택은 이러한 비극을 초래했습니다.
2.바라바에 대한 군중들의 선택이 있었습니다. 군중들의 예수님에 대한 종려주일과 금요일의 차이를 아십니까 예루살렘성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향하여 열렬히 환영했던 군중들, 그러나 불과 댓새 후에 저들은 그렇게 환영했던 예수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소리지르고 있습니다. 이 짧은 5일 동안 저토록 변한 군중들의 마음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사 실 저들 나름대로 이유는 있었습니다. 어느날 갑자기 예수라는 분이 나타나서 기사이적을 행하고 지도자들의 죄를 가차없이 책망하는 것을 보니 저들이 기 다리던 메시야가 틀림없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직접, 간접적으로 자신이 메시 야임을 말씀하신 것을 보아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메시야관이 잘못되 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관점은 유대인뿐만 아니라 온 인류를 구원하는 구 세주로 메시야를 보내셨지만 유대인들의 관점은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오랫동안 억눌려 지내왔고, 약탈당해 왔고, 억울하게 지내왔던 역사속에서 세 계를 제패하는 강력한 지도자로서 메시야를 기다려 왔습니다. 더군다나 당시는 로마의 지배하에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생각은 의심할 여지 없이 서민 구 석구석까지 확장되었습니다. 이런때 예수님이 등장하셨으니 사람들은 모두 틀림없구나. 하면서 좋아하고 환영했습니다. 이러한 그들의 생각이 잘나타난 장면이 바로 예수님의 예루살렘입성입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라고 외치는 저들의 함성속에는 과거 다윗시대의 영화를 회복시켜달라는 요구가 있었습니다. 이제는 본격적으로 로마를 쳐부수고 우리를 해방시켜 주시려고 드디어 예루살렘성에 입성하시는구나 하면서 좋아하고 환영했습니다. 예수님을 민족 의 영웅으로 기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몇일 돌아가는 것을 가만히 보니 그것이 아니더란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붙잡히신 후 군중들은 이제나 저 제나 예수님의 활약을 기대했지만 어쩐지 로마병정앞에서 무력하단 말입니다. 그러다 보니 빌라도의 법정에까지 끌려오게 되었고 한마디도 못한채 오히려 매맞고, 침밴음을 당하고, 홍포를 입고, 조롱당하고 있더란 말입니다. 이러한 맥빠진 예수는 그들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예수였습니다. 용감한 사자인줄 알 았는데 이제보니 발톱이 다빠지고 이빨도 다빠진 종이사자였더란 말입니다. 그러한 예수님를 바라보는 군중들은 너무나도 실망했고 그 실망은 곧 분노로 바뀌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살인자로 체포된 바라바를 보니 패배한 메시야보 다 훨신 낫게 보이더란 말입니다. 그래도 나름대로 독립운동을 한 사람이고 보니 자칭 메시야라하는 저 예수님보다 맘에 든다는 것입니다. 적어도 이 빌 라도 법정앞에서 무기력하게 서있는 저 예수보다는 바라바가 그들의 기대와 생각에 훨신 더 걸맞는 모습으로 그들앞에 다가옵니다. 예수님보다 바라바를 놓아달라고 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입니다. 다시말해 그들이 예수님 보다 바라바를 선택한 이유는 자기들이 원하는 목표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 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 대해 불과 닷새만에 그 마음을 바꾸게 한 이 유였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은 이천년후에 사는 우리들에게 엄청난 경고 를 던져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보신 관점에서 예수를 보지 않고 내가 설정 한 동기, 내 방법, 내가 세운 목표대로 예수님를 바라본다면 우리도 닷새후에 저 군중들 처럼 예수를 십자가에 못받으소서 라고 소리치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날 소위 그리스도인들이라 하는 자들이 너무나 쉽게 신 앙을 버리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들이 교회에 출석하고, 신앙 고백을 하고, 신앙생활의 행위를 하지만 정작 저와 여러분들이 원하고 있는 것이 예수가 아니라 예수로 인한 영광과 축복뿐이었다면 우리와 여기 이 군중 들의 모습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을 원하십니까 아니면 하나님으로 부터 오는 부귀영화를 원하십니까 여러분들이 예수믿고 교회출석하는 이유가 단순히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해서라면, 질병에서만 고침받기 위해 서라면, 사업성공만을 위해서라면, 승진하기 위해서라면, 습관이기에 안나가 면 꺼림직하기 때문이라면 이런 사람은 여전히 군중일 수 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것들이 이루어지지 않을때 예수도 별거 아니더라 하나님도 어쩔 수 없더라 하며 5일 후에는 예수를 배신하게 될테니 말입니다. 이와같 이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지 않는 신앙은 이러한 위험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생각하는 구원은 어떤 구원입니까 여러분이 스스로 설정하시 기 전에 마태 1:21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 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자 이심이라. 하나님은 먼저 죄에서의 구원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목적이 바로 이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여러분이 믿고 있는 예수와는 어떤 차이가 있습니 까 바라바에 대한 군중들의 선택을 다시한번 기억하시고 지금 어떤 예수를 믿을 것인가를 선택하십시오.
3. 바라바에 대한 예수님의 선택이 있었습니다. 바라바가 석방되어지기 까지 자기가 한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는 단순 히 빌라도와 군중들의 정치게임에 의하여 석방되어진 것뿐입니다. 죽이면 죽는 것이고 살리면 사는 것뿐이지 바라바편에서는 전혀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바라바와 같은 입장에 놓여 있던 예수님은 전혀 그렇지가 않았 습니다. 물론 억울하게 잡혀오긴 하셨지만 예수님이 원하시기만 하면 언제든 지 석방될 수도 있었습니다. 요한 19장에 보면 빌라도는 내심 예수님을 놓아 주고 싶어 했습니다. 예수님이 죄다 없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12절) 만일 예수님이 고소자들의 고발을 번복할 만한 증언만 하면 예수님을 석방시킬 뜻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예수님께 그러한 변명을 요구합니다.(10절) 이때 예수님이 빌라도가 원하는 대답을 하셨더라면 그 즉 시로 석방되었을 것이요 반대로 바라바가 십자가에 처형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은 전혀 뜻밖이었습니다. 빌라도가 원하는 대답이 아닌 빌 라도의 살리고 죽이는 권세가 하나님으로 부터 온것임을 말씀하십니다. 빌라 도가 예수님을 죽이고 살리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죽고 사는 문제는 하나님께 있으며 하나님의 허락없이는 아무도 주님의 생명을 건드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빌라도의 결정때문에 죽고 사는 것이 아님을 아셨습니다. 이 십자가는 빌라도 때문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보면 예수님 스스로의 결 정이였습니다. 요한복음 10:17-18을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이를 내게서 빼앗을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바라바는 어쩔 수 없이 십자가에 죽을 수 밖에 없는 사람이었지만 예수님은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십자가는 주님의 스스로의 선택이었습니다. 주님이 원 하시기만 하면 변론을 통해서 석방될 수 있었으며 혹 빌라도가 석방시키지 않 아도 12영이 더되는 천사를 명하여 능히 십자가에서 내려오실 수 있었지만 그 리하지 아니하시고 이 길을 걸어가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이 쓴잔을 기꺼이 마시기로 작정하시고 십자가를 선택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바라바는 누구때문에 살아난 것입니까 군중들의 지지때문입니까 아니면 빌라도의 선택때문입 니까 결정적인 것은 바로 예수님 스스로 죽음의 길을 선택하셨다는데에 있습니다. 그래서 그가 살아난 것입니다. 군중들이나 빌라도가 바라바를 살렸다고 생각지 마십시오. 예수님이 이 길을 선택하셨기에 바라바는 그렇게 되어진 것 뿐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이 사실에 흥분되지 않습니 까 가슴이 두근 거리지 않습니까 전설에 의하면 바라바는 후일 그리스도인 이 되었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그는 멀리 서 가슴을 치며 통곡했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그 후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렇게 증거하며 살았다고 합니다. 그분은 나때문에 죽으셨습니다. 내가 그분을 죽인 겁니다.
4. 결론 어떤 신학자는 바라바를 가르켜 그는 모든 인류를 상징하는 죄인이었다. 라 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바라바는 저와 여러분을 포함한 모든 인류의 그 림자였습니다. 예수님이 바라바의 죽음의 자리에 대신 서신 것, 그를 대신하 여 죽으신 것, 십자가에 달리신 것은 마땅히 사형에 해당하는 죄를 지으며 살 아온 저와 여러분들의 자리를 대신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기억하십니까 주님께서 이땅에 오신 목적을 선포하신 그 생생한 음성을 말입니다. 인자가 온것은 섬김을 받으러 온것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 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들의 대속물로 주려함이니라. 많은 사람들 이란 말에 주목하십시오. 많은 사람속에 바라바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담 이후 온 인류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는 바라바를 대신하여, 저와 여러분들을 대신 하여, 온 인류를 대신하여 주님께서 스스로 취하신 자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도 전설에 의하여 내려오는 저 바라바의 울부짖음의 고백이 있어야만 하겠습니다. 주님이여, 당신은 나때문에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만나는 사람마다 우리는 바라바처럼 증거해야합니다. 여보시오,예수님은 바로 나때문에, 그리고 당신때문에 죽으셨습니다. 이것이 바라바가 만난 십자가였습니다. 이것이 이천년전 오늘, 십자가사건의 내용입니다. 주님은 십자가를 스스로 선택하셨습니다. 나를 위하여, 그리고 여러분들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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