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의 기쁨 (삼하6:12-23)
본문
지난 23 일 주일 오후에 저는 뉴욕을 거쳐 미국의 수도 워싱턴에 갔었다. 지금도 사슴이 차도로 뛰어 나오기 때문에 사슴출몰지역이라는 간판을 운전자 들이 알아보기 쉽게 내 걸은 곳이 워싱턴의 모습이다. 그만큼 워싱턴은 숲 속에 감추어진 도시로 여겨지는 곳이다. 미국의 수도 워싱턴에는 포토맥이라는 강이 유유히 흐르고 있다. 몇해 전 정초에 항공기 한대가 추락하여 온 세계가 경악하 던 기억이 있는 강이다. 시내로 향하는 차도에서 무심코 밖을 내다보다가 깜짝 놀란 것은 저만치 아래 로 흐르는 포토맥강을 거슬러 차도보다 약간 낮은 곳을 천천히 흘러가는 또 다른 물 줄기를 보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분명히 수로였다. 누구에게 묻지도 않았지만 그것은 분명히 인간의 지혜와 힘으로 어떤 목적에 사용하려고 물 줄기를 되돌려 놓은 것이 분명하였다. 한동안 강물은 정해진 수로로 흐르지만 물을 가로막은 댐 을 제거하게 되면 물은 걷잡을 수 없는 힘으로 수로를 넘치게 된다. 우리 인간의 마음 속에는 누구나 제방과 같은 것이 있어서 혹은 조용하고 혹 은 차분하게 지내다가 어느 순간을 만나게 되면 마치 제방이 터지는 것과 같은 상황을 만나게 된다.
그런데 이 터짐이 선과 함게 만나면 모든 사람이 기뻐하는 결과를 가져오지만 악과 짝하게 되면 놀랄만한 분노를 가져오게 된다. 이 시간에 여호와 하나님 앞에 예배하기 위하여 이곳에 모이신 여러분들에게 우리 모두가 함께 기 뻐하는 일들이 이 아침에 주어질 줄로 믿는다.
1. 다윗은 언약궤를 생각하고 있었다. 언약궤는 그동안 잊혀져 있었다. 불레셋에게 빼앗겼다가 다시 돌아 온 법궤는 기럇여아림사람 가운데 아비나답 의 집에 묻혀있었다. (20년둉안) 오늘 본문에서 '바알레유다'라는 지명을 보게 되는데 이것은 가나안 사람들이 부르던 이름으로 학자들은 말한다. 불레셋의 손 에서 예루살렘의 품에 들어 올 때까지 약 70년동안을 언약궤는 잊혀져 있었다. 그렇다고 퓬 다윗의 마음 속에서도 영원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이제 어 느 정도 그의 앞에 정치적인 장애물들이 사라지고 그의 왕국이 세워지자 다윗은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열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언약궤를 옮겨 올 것을 지 시하게 된 것이다.
2. 다윗은 율법의 요구를 지키지 않았다. 다윗과 같은 큰 인물이 율법의 요구를 따르지 않았다는 것은 아무래도 어울리 지 않는 이야기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급해서일까 언약궤를 모셔 옴 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분명히 해야 하겠다는 생각에서일까 그렇다고 해서 수단 이 목적을 정당화 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만일 우리가 풍ゴ纛 섬기는 일에 있 어서도 감정에 휩쓸리게 된다면 이러한 실수를 저지를 경향은 얼마든지 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겸손과 그 분에 대한 뜨거운 사랑을 간직함에 있다. 속담에 버릇없는 손자 할아버지 수염을 잡아 다닌다는 말이 있다. 모든 것을 용서하시고 사랑하시는 분이기에 우리의 무례까지도 용납된다는 것은 올바른 생각이라고 할 수 없다. 다윗은 언약궤를 옮겨 오기 위하여 새 수례를 준비하였다. 그러나 이것부터가 잘못이었다. 언약궤에 수례는 허용된 것이 아늅駭. 수례는 불레셋사람들에게서 온 방법이었다. 다윗은 첫 단추를 잘못 끼운 것이다. 다 윗은 아비나답의 아들들이 새 수례를 몰게 하였다. 다윗과 이스라엘 온 족속이 여러가지 악기를 사용하고 수금, 비파, 소고, 양금과 제금으로 여호와 앞에서 주 악을 하면서 운반을 시작하였다. 그 행렬은 얼마나 멋진 것이었을까 그러나 나곤의 타작마당에서 결굼 사건은 터지고 말았다. 소들이 뛰기때문에 수례가 뒤집혀지고 웃사가 그 곁에서 죽었다. 이유는 언약 궤에 손을 댄 때문이다. 하나님이 웃사의 잘못 때문에 진노하셨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을 본 다윗의 마음은 한마디로 크게 분을 내었다. '베레스웃사' 라는 이름은 그래서 생긴 이름이다. 다윗은 곰곰히 생각해 보았을 것이다. 무엇을 잘못하였던가 문제가 있다면 그 이유가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것은 지혜자의 생각이다. 고사에 구덩이에 빠진 호랑이를 구해 준 나그네의 이야기가 있다. 나그네는 커다란 통나무를 넣어서 호랑이를 구해주었건만 호랑이는 배가 고파 나그네를 잡아 먹겠다는 것이다. 억울한 나그네 소나무를 붙잡고 물어 보고 한가 로히 풀을 뜯는 소를 보고 물어 보아도 나그네에게 유리한 변호가 없었다. 나무를 베는 인간/ 소를 잡아 먹는 인간들이라고 매도해 버리는데야 . 지나가던 토끼가 나그네의 울음을 듣고 왜 그러느냐 물었다. 나그네의 말을 들은 토끼는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며 처음부터 확인해 보자고 구덩이로 갔다. 호랑이는 구덩이에 들어가고 그 안에 넣었던 통나무는 밖으로 끌 어 내었다. 토끼는 능청스럽게도 말하였다. '제일 처음 상황이 이런 모습이냐 ' 그리고는 '은혜를 모르는 호랑이는 언제까지나 굘結 갇혀 있어야 한다.'면서 나그네와 함께 사라졌다는 것이다. 호랑이는 배곺은 것만 생각했지 자기를 구해 준 은혜는 잊어 버렸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데도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함 보다도 배 고픈 호 랑이처럼 자기의 유익만을 생각하다 보면 실수를 저지르게 된다. 만일 다윗이 언 약궤는 레위 자손들이 어깨에 메도록 분부되어진 것을 기억했다면 웃사의 죽음은 면할 수 있었다. 웃사의 잘못은 분명하다. 레위인도 아니면서 레위 사람 만이 할 수 있는 일을 하였다. 언약궤를 열어 보는 것은 레위인에게도 금지 된 사항이다. 레위인이라 해도 그저 단순히 어깨에 메고 운반하는 일 뿐이었다. '여호와의 궤가 어찌 내게로 오리오 !' 이 말은 나곤의 타작마당에서 일어 난 사건으로 크게 두려움에 빠진 다윗의 고백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할 때에 지나치게 하는 것이 나쁠 때가 있다. 또한 문제가 있다고 해서 중도에 그만 두는 것 보다 더 나쁜 것은 없다. 그러나 더 나쁜 것은 무슨 일을 어설프게 하는 일보 다 더 나쁜 것은 없다. 다윗은 타작마당에서 일어난 사건을 보고 크게 두려워 하 면서 언약궤를 운반하는 일을 단하였다. 이 일을 계속할 수는 없다는 생각에서 였다. 다윗은 하나님의 언약궤를 오벧에돔의 집에 두었다. 언약궤는 오벧에돔의 집에 석달을 머물렀다. 다윗조차도 자기에게 두는 것을 두려워 한 것을 오벧에돔은 자기 집에 두도록 한 것이다. 오벧에돔은 고라자손에 속하는 레위인이다.(출6:16,18,21,대상 26:4)
그러므로 오벧에돔은 궤를 메는 일을 맡았던 집안 사람이다. 하나님은 오벧에돔의 집에 복을 주었다. 불과 석달동안을 모셨는데도
3. 다윗은 기쁨으로 언약궤를 메고 다윗성에 옮겼다. 이제 다윗의 방법은 옳았다. 언약궤를 멘 이들이 여섟 옮기자 다윗은 이렇게 하였다.-소와 살진 것으로 제사를 드렸다.-베 에봇을 입고 힘을 다하여 춤을 추었다.-다윗과 온 족속이 즐거이 부르고 나팔을 불며 여호와의 궤를 메었다.-장막 가운데 예비한 자리에 두었다. (17)-번제와 화목제를 하나님 앞에 드렸다.-다윗이 백성 앞에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축복하였다.-모든 백성들은 떡 한개,고기 한 조각 건포도 한덩이씩을 나눠 가지고 집에 돌아 갔다.
4. 그러나 미갈은 기뻐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 다윗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있었으나 미갈은 그것이 없었다. 미갈이 볼 때에 다윗의 행위는 미친 짓으로 보였다. 하나님의 사랑에 지배를 받는 다윗의 감정은 왕의 품위를 떨어트리는 것으로만 판단이 되었다. 만일 우리 가 다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주님에 대한 사랑을 공감하지 못할 때, 우리도 미갈 과 같은 실수를 저지를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우리는 그 실예를 마리아가 옥합을 깨트려 향유를 주님께 부었을 때 가롯 유 다가 공감할 수 없었던 사실에서 보게 된다. 유다는 말했다. '왜 허비하는가 ' 우리가 유다에 대하여 비난의 화살을 날리지만 그 화살은 사실 우리들이 맞아야 할 화살이다. '왜 그런식으로 믿느냐 ' 이 말 속에 숨은 뜻은 무엇인가 그것은 말 한 사람 만이 안다. 야구에서 투수가 타자에게 던진 볼이 타자의 몸에 맞을 때가 있다. 영어로 데 드 볼이라고 한다. 우리 말럽 '빈 볼'이라고 하던가 이 공은 심하면 타자를 반신불수로 만든다. 아나운서가 묻는다. 왜 저런 공을 던질까요 야구 해설가는 대답한다. 그야 공을 던진 투수만이 아는 비밀이지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여러가지 모습들이 우리 주변에 많이 있다. 다윗의 기쁨처럼 춤을 추며 기뻐할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중동볼기야 들어나거나 말거나 여호와의 언약궤를 예루살렘에 모셔오는 일에 어찌 아니 기쁠 것인가 입에서 침방울이 튀도록 노래하고 찬양하며 즐거워 할 뿐이다. 술 취한 사람처럼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증거한 초대교회 성도들 처럼 그저 전 하고 싶은 마음이 불같이 일어나는 데야 어찌하겠는가 영적인 생명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을 향한 열심을 광신으로 매도한다. 하나님 을 사랑하기 때문에 나타내는 순수한 감정을 곱게 보지 않는 것이다. 사도바울은 우리에게 말한다. '육에 속한 사람은 성령님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미갈은 다윗의 행위를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이보다 더 낮아져서 스스로 천하게 보일지라도 ' (삼하 6:22) 어떻게 일국의 왕이 이러한 말을 할 수 있을까 이번 성회를 어떻게 치를 것인가 우리에게 멀리 있던 언약궤를 가까이 모시는 성회가 되게 하자 !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재발견 하자 ! 우리의 감정을 나타내서 마음껏 주님께 감사하고 찬양하자 !
그런데 이 터짐이 선과 함게 만나면 모든 사람이 기뻐하는 결과를 가져오지만 악과 짝하게 되면 놀랄만한 분노를 가져오게 된다. 이 시간에 여호와 하나님 앞에 예배하기 위하여 이곳에 모이신 여러분들에게 우리 모두가 함께 기 뻐하는 일들이 이 아침에 주어질 줄로 믿는다.
1. 다윗은 언약궤를 생각하고 있었다. 언약궤는 그동안 잊혀져 있었다. 불레셋에게 빼앗겼다가 다시 돌아 온 법궤는 기럇여아림사람 가운데 아비나답 의 집에 묻혀있었다. (20년둉안) 오늘 본문에서 '바알레유다'라는 지명을 보게 되는데 이것은 가나안 사람들이 부르던 이름으로 학자들은 말한다. 불레셋의 손 에서 예루살렘의 품에 들어 올 때까지 약 70년동안을 언약궤는 잊혀져 있었다. 그렇다고 퓬 다윗의 마음 속에서도 영원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이제 어 느 정도 그의 앞에 정치적인 장애물들이 사라지고 그의 왕국이 세워지자 다윗은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열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언약궤를 옮겨 올 것을 지 시하게 된 것이다.
2. 다윗은 율법의 요구를 지키지 않았다. 다윗과 같은 큰 인물이 율법의 요구를 따르지 않았다는 것은 아무래도 어울리 지 않는 이야기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급해서일까 언약궤를 모셔 옴 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분명히 해야 하겠다는 생각에서일까 그렇다고 해서 수단 이 목적을 정당화 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만일 우리가 풍ゴ纛 섬기는 일에 있 어서도 감정에 휩쓸리게 된다면 이러한 실수를 저지를 경향은 얼마든지 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겸손과 그 분에 대한 뜨거운 사랑을 간직함에 있다. 속담에 버릇없는 손자 할아버지 수염을 잡아 다닌다는 말이 있다. 모든 것을 용서하시고 사랑하시는 분이기에 우리의 무례까지도 용납된다는 것은 올바른 생각이라고 할 수 없다. 다윗은 언약궤를 옮겨 오기 위하여 새 수례를 준비하였다. 그러나 이것부터가 잘못이었다. 언약궤에 수례는 허용된 것이 아늅駭. 수례는 불레셋사람들에게서 온 방법이었다. 다윗은 첫 단추를 잘못 끼운 것이다. 다 윗은 아비나답의 아들들이 새 수례를 몰게 하였다. 다윗과 이스라엘 온 족속이 여러가지 악기를 사용하고 수금, 비파, 소고, 양금과 제금으로 여호와 앞에서 주 악을 하면서 운반을 시작하였다. 그 행렬은 얼마나 멋진 것이었을까 그러나 나곤의 타작마당에서 결굼 사건은 터지고 말았다. 소들이 뛰기때문에 수례가 뒤집혀지고 웃사가 그 곁에서 죽었다. 이유는 언약 궤에 손을 댄 때문이다. 하나님이 웃사의 잘못 때문에 진노하셨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을 본 다윗의 마음은 한마디로 크게 분을 내었다. '베레스웃사' 라는 이름은 그래서 생긴 이름이다. 다윗은 곰곰히 생각해 보았을 것이다. 무엇을 잘못하였던가 문제가 있다면 그 이유가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것은 지혜자의 생각이다. 고사에 구덩이에 빠진 호랑이를 구해 준 나그네의 이야기가 있다. 나그네는 커다란 통나무를 넣어서 호랑이를 구해주었건만 호랑이는 배가 고파 나그네를 잡아 먹겠다는 것이다. 억울한 나그네 소나무를 붙잡고 물어 보고 한가 로히 풀을 뜯는 소를 보고 물어 보아도 나그네에게 유리한 변호가 없었다. 나무를 베는 인간/ 소를 잡아 먹는 인간들이라고 매도해 버리는데야 . 지나가던 토끼가 나그네의 울음을 듣고 왜 그러느냐 물었다. 나그네의 말을 들은 토끼는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며 처음부터 확인해 보자고 구덩이로 갔다. 호랑이는 구덩이에 들어가고 그 안에 넣었던 통나무는 밖으로 끌 어 내었다. 토끼는 능청스럽게도 말하였다. '제일 처음 상황이 이런 모습이냐 ' 그리고는 '은혜를 모르는 호랑이는 언제까지나 굘結 갇혀 있어야 한다.'면서 나그네와 함께 사라졌다는 것이다. 호랑이는 배곺은 것만 생각했지 자기를 구해 준 은혜는 잊어 버렸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데도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함 보다도 배 고픈 호 랑이처럼 자기의 유익만을 생각하다 보면 실수를 저지르게 된다. 만일 다윗이 언 약궤는 레위 자손들이 어깨에 메도록 분부되어진 것을 기억했다면 웃사의 죽음은 면할 수 있었다. 웃사의 잘못은 분명하다. 레위인도 아니면서 레위 사람 만이 할 수 있는 일을 하였다. 언약궤를 열어 보는 것은 레위인에게도 금지 된 사항이다. 레위인이라 해도 그저 단순히 어깨에 메고 운반하는 일 뿐이었다. '여호와의 궤가 어찌 내게로 오리오 !' 이 말은 나곤의 타작마당에서 일어 난 사건으로 크게 두려움에 빠진 다윗의 고백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할 때에 지나치게 하는 것이 나쁠 때가 있다. 또한 문제가 있다고 해서 중도에 그만 두는 것 보다 더 나쁜 것은 없다. 그러나 더 나쁜 것은 무슨 일을 어설프게 하는 일보 다 더 나쁜 것은 없다. 다윗은 타작마당에서 일어난 사건을 보고 크게 두려워 하 면서 언약궤를 운반하는 일을 단하였다. 이 일을 계속할 수는 없다는 생각에서 였다. 다윗은 하나님의 언약궤를 오벧에돔의 집에 두었다. 언약궤는 오벧에돔의 집에 석달을 머물렀다. 다윗조차도 자기에게 두는 것을 두려워 한 것을 오벧에돔은 자기 집에 두도록 한 것이다. 오벧에돔은 고라자손에 속하는 레위인이다.(출6:16,18,21,대상 26:4)
그러므로 오벧에돔은 궤를 메는 일을 맡았던 집안 사람이다. 하나님은 오벧에돔의 집에 복을 주었다. 불과 석달동안을 모셨는데도
3. 다윗은 기쁨으로 언약궤를 메고 다윗성에 옮겼다. 이제 다윗의 방법은 옳았다. 언약궤를 멘 이들이 여섟 옮기자 다윗은 이렇게 하였다.-소와 살진 것으로 제사를 드렸다.-베 에봇을 입고 힘을 다하여 춤을 추었다.-다윗과 온 족속이 즐거이 부르고 나팔을 불며 여호와의 궤를 메었다.-장막 가운데 예비한 자리에 두었다. (17)-번제와 화목제를 하나님 앞에 드렸다.-다윗이 백성 앞에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축복하였다.-모든 백성들은 떡 한개,고기 한 조각 건포도 한덩이씩을 나눠 가지고 집에 돌아 갔다.
4. 그러나 미갈은 기뻐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 다윗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있었으나 미갈은 그것이 없었다. 미갈이 볼 때에 다윗의 행위는 미친 짓으로 보였다. 하나님의 사랑에 지배를 받는 다윗의 감정은 왕의 품위를 떨어트리는 것으로만 판단이 되었다. 만일 우리 가 다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주님에 대한 사랑을 공감하지 못할 때, 우리도 미갈 과 같은 실수를 저지를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우리는 그 실예를 마리아가 옥합을 깨트려 향유를 주님께 부었을 때 가롯 유 다가 공감할 수 없었던 사실에서 보게 된다. 유다는 말했다. '왜 허비하는가 ' 우리가 유다에 대하여 비난의 화살을 날리지만 그 화살은 사실 우리들이 맞아야 할 화살이다. '왜 그런식으로 믿느냐 ' 이 말 속에 숨은 뜻은 무엇인가 그것은 말 한 사람 만이 안다. 야구에서 투수가 타자에게 던진 볼이 타자의 몸에 맞을 때가 있다. 영어로 데 드 볼이라고 한다. 우리 말럽 '빈 볼'이라고 하던가 이 공은 심하면 타자를 반신불수로 만든다. 아나운서가 묻는다. 왜 저런 공을 던질까요 야구 해설가는 대답한다. 그야 공을 던진 투수만이 아는 비밀이지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여러가지 모습들이 우리 주변에 많이 있다. 다윗의 기쁨처럼 춤을 추며 기뻐할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중동볼기야 들어나거나 말거나 여호와의 언약궤를 예루살렘에 모셔오는 일에 어찌 아니 기쁠 것인가 입에서 침방울이 튀도록 노래하고 찬양하며 즐거워 할 뿐이다. 술 취한 사람처럼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증거한 초대교회 성도들 처럼 그저 전 하고 싶은 마음이 불같이 일어나는 데야 어찌하겠는가 영적인 생명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을 향한 열심을 광신으로 매도한다. 하나님 을 사랑하기 때문에 나타내는 순수한 감정을 곱게 보지 않는 것이다. 사도바울은 우리에게 말한다. '육에 속한 사람은 성령님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미갈은 다윗의 행위를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이보다 더 낮아져서 스스로 천하게 보일지라도 ' (삼하 6:22) 어떻게 일국의 왕이 이러한 말을 할 수 있을까 이번 성회를 어떻게 치를 것인가 우리에게 멀리 있던 언약궤를 가까이 모시는 성회가 되게 하자 !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재발견 하자 ! 우리의 감정을 나타내서 마음껏 주님께 감사하고 찬양하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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