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천하는 신앙 (눅6:46-49)
본문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 하여 나의 말하는 것 을 행치 않느냐 예수님의 산상설교로 알려져 있는 이 말씀은 마태복음 5,6,7장과 누가복음 6:20-49에 동일한 내용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들은 그 전체를 그대로 반드시 실천해야만할 내용들입니다. 성경 66권이 다 행하여야 할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특별히 이 산상설교의 내용은 모두가 다 듣고 행하 여야만할 윤리적 교훈들입니다. '윤리적'이라 할때에는, 그것을 듣기만 해서는 소용이 없고, 듣고 그대로 행해야만 한다는 말입니다. 어떤이는 기독교를 윤리적 종교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머리로 생각만 하고 마음으로 느끼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을 배우고 듣고 믿는대로 실 천하는 종교라는 말일 것입니다. 이 산상 설교를 마치신 예수님께서 결론으 로 하신 말씀은 '너희가 이말을 들었으면 이제 들은대로 행하라'는 것이었 습니다. 이제부터 행하고 그대로 사는 것이 우리의 과제입니다.
그런데 사람 들은 듣는것 따로 행하는 것 따로인 때가 많습니다. 아는 것과 실천하는 것 이 일치되지 않는 때가 많습니다. 믿는 것과 믿는대로 사는 것이 아무 관계 가 없을 때가 많은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 어찌하여 나의 말하는 것을 행치 않느냐'(눅 6:46)고 책망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주'라고 부릅니다. '주'라고 호칭하는 것은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는다는 뜻인데 입으로는 '주여!, 주여!' 하면서 그 분이 하신 말씀 대로 행하지 않으면 그것은 오히려 하나님을 조롱하고 모욕하는 것이 됩니다.
그런데 그 당시에 사람들이 입으로는 주여!, 주여! 하면서도무지 실천적 인 삶은 살지 못하였기 때문에 예수님은 심히 답답한 심정으로 이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행하지 못한다면 차라리 나에게 주여! 주여! 라는 말이라 도 하지말라는 책망입니다. 특별히 주님의 산상 설교는 사람들이 모두 행하 여야 될 말씀들이지 귀만 즐겁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태 복음에서는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행하면 그는 매우 지혜로운 사람인 것이며 그들에게는 모든 축복이 임하게될 것입니다. 성읍과 들에서 그 후손들이, 그 소산물이, 그 소 유물이, 그 가정 생활이, 그의 일거수 일투족이 다 복을 받는다고 하였습니다. '네가 네 하나님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하나님께서 너에게 그리하신다'고 하셨습니다. 말씀을 잘 듣고 실천하는 사람은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그 집은 세상에 그 어떤 변화와 소용돌이, 그리고 시련과 환난이 있어도 요동하 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행한다는 것은 그렇게 강한 힘을 지닙니다.
그러므로 그에게는 아무것도 염려될 것이 없습니다. 여러분의 신앙 생활에 있어서 '나는 말씀을 잘 듣고 또 들은대로 행한다'고 장담할 수 있는 분이 계시면 그 분의 신앙과 생활은 자신감이 있는 신앙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하여 볼 때에 그런 사람 들이 과연 얼마나 되겠습니까 이 실천적인 신앙이라는 것은 모르면 모르니까 못하고 또 알면 그것이 얼마나 실천하기가 어려운 것인가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여기 예수님은 '듣 고 행하는 자'라고 말씀하셨는데
그러므로 '듣는 것'과 '행하는 것'은 수레 의 양바퀴와 같은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행하지 못하는 것을 비관한 나머지 듣기만 하면 뭘하느냐고 하여서 듣는 것마저 거부해 버리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우선 열심히 들어야 합니다. 만일 듣는 것이 필요 없다 고 생각하셨다면 예수님께서 왜 이렇게 긴 설교를 그 많은 사람들에게 전하 셨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 온지라. 입을 열어 가르쳐 가라사대 ' 라고하지 않으셨습니까 예수님은 항상 '입을 열어 가르치셨고' 사람들은 그의 가르침을 들었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첫 걸음은 귀를 기울여 듣는데서부터 시작됩니다. '듣지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라고 하였고 또 '전파하는 자가 없으면 어찌 들으리요'라고 하였으며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면 어찌 전파하리요'(롬 10:14)라고 했습니다. 전파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보내 주시고 그들의 입과 말을 통하여 듣게 하시고 또 들은 자들이 믿게 하시는 이 모든 일은 곧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말씀하십니다. 여러가지 방법,여러가지 뜻,여러 사람, 여러 시대,또 여러가지 상황과 장소를 통하여 우리에게 끊임없이 말씀 하고 계십니다. 특별히 성경을 통하여 항상 말씀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그것 을 듣게 하십니다. 우리가 듣게 하시려는 것이 그 목적입니다. 때로 어떤 분 은 '나는 아무리 들어도 소용이 없어요. 들으면 금새 잊어버리는 걸요, 이 렇게 기억력이 감퇴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주로 연세많은 분들이 그렇게 말씀하 십니다.
그런데 그분들은 여전히 '듣기 위해서' 나오십니다. 기억을 못해도 듣고 잊어버려도 변함이 없이 들으시는 자세로 성실히 꾸준히 하나님 앞에 나오시는 것을 볼 때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겠습니다. 예수님이 이 산상 설교를 말씀하실 때에 그 무리들 가운데 젊은이들만 있었을까요 기억력이 좋은 이들만 따로 골라서 그들에게만 들려주셨을까 요 아닙니다. '무리들'이라고 할 때는 남녀노소 각계 각층의 갖가지 사람들 이 다 모이고 다 들었습니다. 그 모든 사람들이 다 들을 필요가 있었기 때문 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일반지식과 다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 이기 때문에 기억력이 좋다고, 지능지수가 높다고, 공부를 많이 했다고 반드 시 깨달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들음' 을 통하여 각 사람이 알도록 하여 주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들으라고 하 시는 까닭은 많은 지식들을 소유하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믿음을 가 지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믿음은 그냥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들음으 로써 생깁니다. 들을수록 믿음이 생기고 계속 들으면 그 믿음이 자라나고 많 이 들으면 큰 믿음을 소유하게 됩니다. 듣는 것은 믿음을 가지기 위한 노력 이며 수고스러운 봉사입니다. 여러분이 말씀을 들으실 때 마치 연극을 관람 하는 구경군처럼 관객의 입장에 있을 것이 아니라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 에 동참하고 그것을 함께 나누고 그 말씀을 마음속에 받아들여 깊이 상고하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신명기 28장에서는 '삼가듣는다'고 하였습니다. 그 말씀을 삼가들으십시다. 씨를 뿌리는 사람은 언제나 계속해서 여러 종류의 밭에다 뿌립니다. 다만 사람들이 삼가 들을 때에 그 씨는 비로소 옥토에 떨어져 열매를 맺는 씨앗 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기대감을 가지고 나아가 씨를 뿌리 라고 하셨고 뿌려진 씨가 1/4만 추수되더라도 그것은 좋은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더욱 열심히 하여야 할 일은 듣는 것입니다. 삼가 들 어야 합니다. 그리고 듣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전에 열심히 나와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정성과 참여, 인격적인 만남, 그리스도안에 교제로써 이루어져야 되도독 되어있습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통해서 우리를 만나주십니다. 말씀만 들으려 한다면 방송이나 설교 녹음테이프 같은 매체들도 많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참여자의 입장으로 듣는 것은 아닙니다. 참여자로서 들어 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위하여 은혜의 보좌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6)고 권하였습니다. 집에서 편안히 누워서 어떤 분의 설교를 녹음기로 듣는 것과 내가 은혜의 보좌 앞에 겸손히 나와 정성을 기울여 참여자로서 말씀을 삼가 듣는 것은 다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여러분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하여 교회에 나오시는 일을 열심히 하십시요. 듣는 것은 곧 경건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보좌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말씀을 들으시고 그것을 행하시려면 우선 그말씀을 사랑하고 사 모하는 뜨거운 심정이 있어야 합니다. 나의 관심과 정성을 말씀에 모두 집중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나에게 무슨 말씀을 주실까 하는 기대감과 사 모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전도할 때에 베뢰아 사람들은 성경을 배우고 듣는 열심이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더 많았습니다. 베뢰아 사람들은 데살로니까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 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 고함으로 그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나 (행17:11)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베뢰아 사람들이 성경을 대하는 관심과 태도는 우리가 본받아야 할 자세입니다.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성경을 상고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과연 영의 양식이라고 생각할 때, 지금 우리 한국교회는 이 양식의 풍년을 맞이한 때임이 분명합니다. 어디를가나 좋은 말씀을 들을 수가 있습니다. 듣지 못할까봐 걱정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이 교회가 맘 에 안들면 저 교회 가면 되고 이 목사의 설교가 싫으면 저 목사에게 가면 되고 ,얼마든지 자유자제로 골라서 취향대로 영양분있는 양식을 섭취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그것이 문제인 것같습니다. 사람들의 마음 속에 말씀을 사모하는 열심이 없어졌습니다. 말씀이 풍성한 것은 좋은데 그것을 귀한 줄 모르고 그것을 사모하지 않게 된 것은 문제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 이 오랜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해방되어 고국 땅에 귀환하게 되었을 때 그들 이 제일 그리워 하였던 것은 '성전'과 '말씀'이었습니다. 그 해 7월에 모든 백성들이 수문 앞 광장에 모였는데 아무 것도 없는 삭막한 폐허의 잿더미에 서 에스라 선지가 모세의 율법서를 낭독하였습니다. 그 말씀을 새벽부터 정 오까지 낭독하는동안 한사람도 미동조차하지 않았으며 뭇백성이 귀를 기울 여 들었습니다. 그 때에 강대가 없어서 거친 나무토막을 잘라 강대를 만들었 으며 딱딱한 모세의 율법서를 새벽부터 12시까지 계속 읽은 것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을 듣는 모든 백성들이 '아-멘'을 응답하며 몸을 굽혀 얼 굴을 땅에 대고 여호와를 경배하였으며 백성들은 그 말씀을 듣고 모두 다 울었다(느8:1-9)고 하였습니다. 이들이 얼마나 말씀을 사모하였으면 그랬을 까요 듣고 행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기 때 문입니다. 풍년에는 곡식 귀한 것을 모릅니다. 그리고 그것이 크나 큰 축복 이란 것도 모르고 지내기가 쉽습니다. 여러분! 좋은 때일수록 더 감사하고 더 사모하고 더 사랑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말씀을 언제나 귀히 여기고 사 모하십시다. 성서는 오늘과 같은 때를 미리 예측하고,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쫓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쫓으리라(딤후 4:3) 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바른 교훈을 싫어하고 사욕의 스승들이 많이있고 진리보다 허탄 한 이야기 듣기를 더 좋아하는 때, 그 때가 지금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그러나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그 말씀만을 사랑하고 사 모하며, 그 말씀만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삼가들으시 고 실천하시며 또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힘써 전하여야 하겠습니다. 한가지 더 생각해야 될 것은 듣고, 그리고 행하는 것입니다. 잘 들으면 결국 잘 행하게 된다고 믿습니다. '삼가든는' 이들은 그 말씀대로 행할 힘이 주어 집니다. 혹 말씀대로 행하지 못했더라고, 말씀을 들은 분 들은 이것을 깨닫고 말씀이 자신에게 그것을 지적해 주기 때문에 결국은 행할 수 밖에 없도록 만들고야 맙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그 말씀은 좌우에 날 선 예리한 칼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능력이 있어 서 들은 분들의 마음 속에서 역사를 일으킵니다. 그 역사는 말씀에 대한 책 임감입니다. 책임을 느끼게 합니다. 그 책임을 못하면 성령님이 내 마음 속에 책망을 하시고 그 책임을 잘하면 성령님이 나를 칭찬하여 주십니다.
그러므로 말씀에 사는 사람들은 사람들의 비난이나 사람들의 칭찬에 별로 관심이 없 습니다. 성령님과 함께 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말씀을 무관심하게 여기고 경홀히 취급하는 사람, 입으로는 항상 '주여 주여' 하면서도 실천할 마음이 없는 사람, 말씀을 잘못들어서 그 귀가 교만한 사람, '말씀은 말씀이고 나는 나다 ' 라고 하는 사람, 그들은 결국 실천하는 신앙을 제대로 갖지 못합니다. 성령님은 항상 말씀과 계시로써 우리 에게 신호를 보내십니다. 우리는 성령님의 신호에 복종해야 하는데 '가라'면 가고 '서라'면 서야 됩니다. 말씀대로 지키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이 신호 쯤 지키는 것이 무엇이 그리 어려운 일입니까 사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실천한다는 것은, 말씀을 문자대로 따른다는 것보다는 성령님의 신호 에 복종한다는 뜻입니다. 신호를 잘 따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어려운 것도 아니요 먼데 있는 것도 아니며 생소한 것도 아닙니다. 쉽고 가깝고 익숙하게 모두가 다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삼가듣고 행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령님께서는 우리 마음에 신호등을 켜 주십니다. 우리는 그대로 따르면 뚜니다. 말씀을 삼가듣고 또 그것을 생활에 실천하고 적 용함으로 지혜로운 건축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신자들의 3대 의무 성경
본문:살전 4:9-14 사도 바울은 본문 4:1-8절에서는 우리 신자들의 하나님께 대한 생활 태도에 관해서 권면하였고,4:9-10절에서는 모든 사람에 대한 생활 태도에 관해서 권면하였습니다. 그러면 우리 신자들의 신성한 의무가 무엇인지 생각해 봅시다. "형제를 사랑하라." 신자의 신성한 의무중에
첫째는 형제사랑이라고 하였습니다. 본문 9-10절 에 강조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형제사랑에 관해서는 쓸 필요가 없다'고 전제하고 있습니다. 형제사랑에 관해서 쓸 필요가 없다는 말은 무엇입니까 형제는 사랑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귀중하지 아니하거나, 필요하지 않 다는 의미도 아닙니다. 이는 너무나 귀중하고 중대하기 때문에 여기에 대하 여 설명하거나 기록할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특별히 이 서신을 받아들이는 데살로니가 신자들은 형제사랑의 중대성을 알고 있는 신자들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아서 사랑을 하고 있는 신자들이라고 하였습니다. 나아가서는 이 사랑을 친히 실천 하고 있는 신자들이라고 칭찬하면서 더 많은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강조하 고 권면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사랑에 대해서 우리나라 말은 한가지 용어로 사용되지만, 헬라 어에는 네가지 용어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사람을 사랑하는 신적 사랑을 '아가페'라고 하고,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는 본능적 사랑은 '스톨케'라고 하고, 부부간에 사랑하는 이성적 사랑은 '에로스'라고 하고, 형제간에 이웃간에 사랑하는 사회적 사랑은 '필리아'라고 합니다. 특히 본문에서는 여기 네번째인 형제사랑 즉 '필리아'에 대해서 언급하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형제들간에서 서로 사랑해야 된다고 하였습니다. 성경은 인간 대 인간의 사랑에 대한 범주와 대상을 여러가지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부모에 대하여 자녀에 대하여 형제에 대하여 친구에 대 하여 이웃에 대하여 사랑하고 나아가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하였습니다. 이와같이 형제를 사랑하는 실천방법은 서로 아껴주고 서로 동정하고 도와주며 서로 고락을 같이하며 서로의 운명을 같이 하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 신자들을 보니 이러한 사랑을 실천하고 있는 신자들이라 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신자의 신성한 의무중에 하 나이니 더 많이 사랑하라고 바울은 강조하였던 것으로 봅니다. 우리 신자들의 신성한
둘째 의무는 조용히 자기 일에 근면하게 일하는 것 입니다. 11절에 도 너희에게 명한 것 같이 조용하여 자기 일을 하고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와같이 강조하게 된 의도는 일을 하지 아니하고 돌아 다니면서 떠드는 신자가 있지 아니한가 해 서 권면을 한 말씀이라고 합니다. 성서학자들은 데살로니가 서신을 보면 말 많이 하며 떠드는 신자도 있었 고 자기 직업없이 한가한 신자도 있었으며 일하기 싫어하는 게으른 신 자도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데살로니가후서 3장 10절에 '일하기 싫거 든 먹지도 말게 하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자기 일에 근면하라" 그러면 어떻게 생활해야 한다고 하였습니까 사도 바울은 강조한 바와 같 이 중요한 신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침묵이란 의미인데,무게있는 신자 가 되라는 것입니다. 자기 일을 하는 신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이는 남의 일에 간섭하지 말라는 의미인데 자신의 맡은 일을 하고 자신의 책임을 다하 라는 것입니다. 힘써 일하는 신자가 되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근면하라는 뜻입니다. 독일 격언에 '노동은 기도이다'라고 했으며, 영 국 격언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악을 행하는 것이다'라고, 벤겔은 '노 동은 천국 맛을 본 사람에게 필요한 교훈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와같이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 신자들을 아낀 나머지 더 멋있는 교회, 더 멋있는 신자들이 되게 하기 위해서 조용한 신자가 되고 자기 일에 집념하는 신자가 되고 열심으로 일하는 신자가 되라고 한 것입니다. 우리 신자들의 신성한
셋째 의무는 단정히 행하라고 하였습니다. 12절에 '이는 외인을 대하여 단정히 행하고 또한 아무 궁핍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 역시 우리 신자들의 신성한 의무중 하나라고 생각 합니다. 신자일수록 더욱 단정한 사람이 되어야 하고 단정한 생활을 해야 합니다. 신자가 단정치 못하게 되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못하고, 교회안에서 덕 이 되지 못하고 세상의 빛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비난의 대상이 되고 맙니다. 요즘도 단정치 못하고 주책부리는 신자들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 고, 교회에 부덕을 끼치고, 이 세상에서 비난의 대상이 되어 빈축을 사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고 생각합니다. "사람 앞에 단정하라" 단정히 행하라는 말의 뜻은 무엇입니까
(1) 경건한 자세와 태도를 취하라는 뜻입니다. 헬라어로 '유스케-모노-스'라는 말인데, 이는 좋은 모양, 좋은 풍채, 좋은 자세란 뜻입니다. 먼저 우리 신자로서의 자세와 태도를 바르게 깨끗하게 경 건하게 가지라는 말입니다. 이는 한마디로 자기관리를 바로 하라는 말입니다.
(2) 이치체 합하게 행하라는 뜻입니다. 고전 7:35에 '이치에 합하게 행하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매우 광 범위하게 해석됩니다. 모든 삶을 합리적으로 또는 합법적으로 살아가라는 말입니다. 생각도 이치에 합하게 하고 말도 이치에 합하게 말하며 행동 도 이치에 합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치란 곧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를 중심으로 살아가라는 말입니다. 이치에서 벗어나는 삶은 제아무리 잘 산다고 하더라도 바른 궤도에서 이탈된 삶이요 탈선한 삶이란 말입니다.
(3) 고상하게 살아가라는 뜻입니다. 이를 다른 말로 하면 존귀하게 살아가라는 것이라고 합니다.우리 신자들의 생활일수록 더욱 고상해야 되고 존귀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단정하 게 되면 우리 인격이나 생활이 자연히 고상하고 존귀해 지게 마련입니다. 이는 우리 삶의 철학을 이 세상이나 물질에 두지 아니하고, 진리와 그리스도와 천국에 근거하고 살아가는 신자의 삶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단정하게 살아갈 때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되고 교회에는 덕과 유 익을 주게 됩니다. 아울러 세상에서는 자연히 빛을 발휘하여 존경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인이 빠지기 쉬운 길 성경
본문:삼하 24:1-9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다양한 이유로 하나님을 믿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수십년 동안 불교를 믿다가 회의를 느끼고 기독교로 개종하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평소에 전혀 상관없이 세상을 살다가 어려운 인생의 시련을 당함으 로 신앙의 길을 택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경위로 하나님을 믿게된 사람은 제일 먼저 '내가 과연 어떤 종류의 신앙을 가져야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부딪히게 되는데 신앙관에 대한 정의는 저마다 다르기 마련입니다.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저정의'의 속성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지적인 측면으로 먼저 신앙에 접촉하게 된 사람은 하나님에 대하여 지적으로 아는 것을, 감정적인 측면으로 접촉하게 된 사람은 체험적인 신앙을, 의지적인 측면으로 접촉하게 된 사람은 자기 의지에 의하 여 신앙의 노선을 선택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에는 '지정의' 의 세가지 속성을 다같이 주셨지만 우리 인간은 불의하고 부 족하기 때문에 이 세가지 속성을 조화시키지 못하고 어느 하나에만 치중하 여 잘못된 신앙관을 갖게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잘못된 신앙관을 가장 많이 드러낸 교회와 성도가 고린도교회 성도 들입니다. 그들은 성령님의 은사 중에서 특별히 방언의 은사를 중요시하여 방 언을 하지 못하면 성령님받은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 나머지 온 교회가 방언만 하고 말씀과 기도, 그외의 다른 봉사의 생활은 실천하지 않았습니다. 그러 다 보니 온 교회가 소란스럽게 되고 교회가 세상 다른 단체보다 못하게 되 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는 그런 그릇된 신앙관을 바로잡아 주기 위해서 고린도 후서를 기록하면서 고린도전서 12장에서는 성령님은사의 본질에 대해, 13장 에서는 성령님의 아홉가지 은사를 싸고 있는 사랑에 대하여,14장 1절에서는 사랑을 따라 은사를 구할 것을,그리고 14장1절에서는 사랑을 따라 은사를 구할 것을,그리고 14장 19절에서 남을 가르치기 위해 깨달은 다섯마디의 말 이 일만마디의 방언보다 낫다는 신앙의 본질에 대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신앙의 최고봉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디모 데후서 3장 16절은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감동'이란 헬라 원문의 '데오푸뉴토스'라는 말로 하나님께서 숨을 불어넣었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곧 하나님의 성령님이 바람처 럼, 숨결처럼 역사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언제 어디서든지 여러 방편으로 하나님의 말씀과 접촉할 때 마음 속에 은혜가 되고 기쁨을 느끼 게 하는 것은 바로 성령님의 감동이 그 말씀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생명이요, 은혜의 가장 중요한 요소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것이 바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사람의 마음을 쉽게 움직이고 감동되게 하고 은혜를 받게하는 것이 바로 성령님의 역사입니다.그러나 이같은 성령님의 은혜를 모든 사람이 체험하는 것은 아닙니다. 은혜의 세계에는 은혜를 받은 사람이 더 많이 받게된다는 법칙이 있습니다. 이 같은 사람은 성령님의 감동하시는 은헤 로 이미 마음문이 활짝 열려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바로 이런 하나님이 주시는 성령님의 감동에 대한 문제 를 다루고 있습니다. 특히 오늘날 한국교회안에 잘못된 감동을 받고서 잘못 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신자가 많이 있다는 사실을 생각할때 이것은 더욱 중요한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감동과 사단의 격동 본문의 다윗의 경우를 살펴보면 본문 1절에서 "여호와께서 다시 이스라엘 을 향하여 진노하사 저희를 치시려고 다윗을 감동시키사"라고 말합니다. 다 윗이 하나님의 감동을 받았다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그러나 오늘 본문 말씀 과 같은 내용인 역대상 21장을 잘 살펴보면 다른 중요한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사단이 일어나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다윗을 감동하여 이스라엘을 계수하게 하니라"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다윗을 감동시켰다는 ' 감동'이라는 단어와 사단이 다윗을 격동했다는 '격동'이라는 단어입니다. 이 두 단어는 같은 '쑤트'라는 히브리어 단어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처럼 ' 하나님의 감동'이라는 말과 '사단의 격동'이라는 말이 같은 뜻으로 쓰이고 있다는 사실은 결국 하나님께서 사단의 활동을 허락하실 때에라야 비로소 사단이 활동할 수 있음을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욥 1;12). 그러면 하나님이 사단으로 다윗을 격동시킨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는 우선 적으로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징계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스 라엘의 대표자 다윗왕의 마음에 사단이 격동하여 하나님이 실헝하시는 일을 하도록 허락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성령님의 감동의 역사와 사단의 격동의 역사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점이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령님의 역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나타납니다. 말씀에 감동될 때 자신의 모든 것을 주께로 드리는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의 역사입니다. 이에 반해 사단은 말씀의 근거없이 격동하는 역사를 일으 킵니다. 교회 안에서도 남을 괴롭히고,험담하며, 말과 행동으로 사람들을 찌르는 자가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쑤트(찌른다)'의 역사, 사단의 역사입니다. 여기서 이 '쑤트'라는 말의 의미를 좀 살펴보면 상징적으로 '자극한 다, 부추키고 유혹한다, 타락한다,공격한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즉 우리에 게 자극적인 일만 자꾸 부추기는 것입니다. 오늘 한국 교인들 중에도 말씀 중심으로 성령님의 감동을 받으면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보다 이러한 사단의 자극적인 은혜생활에 더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면 성령님의 역사와 사단의 역사를 어떻게 분별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그 열매를 보면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성령님의 은혜를 받으면 답답한 마음 이 되었다가도 말씀을 보면 기쁨이 생기고, 하나님을 찬양하며 헌신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단의 은혜를 받으면 자극적인 추구만 할뿐 마음이 불안하고 초조하며 기쁨이 사라집니다. 사단의 역사가 때로는 성령님의 역사 를 모방해서 나타나기도 하지만 성령님의 역사와 같이 우리의 심령에 기쁨과 은혜가 충망한 역사를 할 수는 없습니다. 자극적인 사단의 은혜를 좇기보다 성령님이 이끄는 말씀중심의 신앙생활을 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사단의 격동은 은혜받은 사람에게도 옵니다. 오늘 중요한 또 하나의 문제는 은혜 많이 받은 사람도 이런 자극적인 은혜 에 현혹되기가 쉽다는 사실입니다. 역대상 21장 1절에 보면 "사단이 다윗을 격동시키사"라고 말합니다. 다윗 같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사단의 역사를 받은 것입니다. 사무엘상 16장 18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다윗과 함께 계시더이다"라고 말씀합니다. 그만큼 다윗은 하나님이 지켜주는 사람이었고, 사시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 으로 용기의 사람이었습니다(삼상 17:4
5). 또한 다윗은 어려운 환경에서도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사람이었고(삼상 30:6), 기도의 사람(삼상 30:8), 회개의 사람이었습니다 (삼하 12장).
그런데 이러한 다윗이 사단의 공격을 받았습니다. 오늘날 교인들 중에도 은혜 많이 받고도 사단의 공격에 넘어져 타락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은혜 많이 받은 사람 도 항상 자신의 신앙을 살펴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사단이 사랑하는 다윗을 시험하게 격동하는데 가만히 계 셨습니까 그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시 하나님께 죄(반역의 죄:삼하 15-20장)을 범함으로 그들을 징계하시기 위해서 였습니다. 하나님은 순리적 인 것을 좋아하십니다. 부모는 부모로서, 교인은 교인으로서 각자의 책임을 순리대로 행하기를 하나님은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다윗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그는 하나님이 세운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에게 도전하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징계하시려고 사단의 격동을 받는 것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인은 용서하시지만 죄는 결단코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사단의 은헤는 사람을 망하게 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자각해야 될 중요한 것은 사단의 격동을 받아 자극적인 은 혜를 추구하는 사람은 본문에 보면,이스라엘 인구의 수를 세는 것은 제사장 의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단에 격동된 다윗의 요압장군을 시켜 인구수를 세도록 하였습니다. 이것은 다윗이 자신의 군사적인 힘을 과시하고, 자신의 권좌를 더욱 확고히 하고자 하는 사악한 목적에서였습니다. 사단의 은혜를 받으면 교만해집니다. 교만이 무엇입니까 자만심으로 가득찬 악한 마음입니다.본문 3절에 보면 다윗의 충신 요압이 분명 "이 백성은 얼마든지 하나님 여호와께서 백배나 더하게 하사 내 주 왕의 눈으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 나이다"라고 만류하고 하나님의 뜻이 아님을 말하였지만 다윗은 듣지 않았 습니다. 도리어 다윗은 그를 재촉합니다 (4절). 10절에 보면 끝내 다윗은 큰 죄를 범하였고 미련하게 행하였습니다. 교만은 하나님처럼 되려는 것입니다. 사단이 다윗을 격동시킨 것은 다윗 자신을 멸망시키는 것과 더불어 이스라엘 백성들을 멸망시키기 위해서입니다. 이로 인해 칠만명의 이스라엘 백성이 죽었습니다. 이렇듯 나 하나가 은 혜생활을 잘못하면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까지 해를 입게 됩니다. 그러기 에 나의 신앙이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내가 신앙생활을 아름답게 할 때 가족과 친구, 이웃은 감동을 받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성령님의 은혜는 우리를 잘되게 하기 위해서 은혜를 줍니다. 이에 반해 사단은 우리를 격동하고 자극하여 망하게 하려고 은혜를 주는 것입니다. 큰 은혜를 받으려는 욕심보다 하나님이 알맞게 주신 은혜를 잘 관리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생활에 적용하며 살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이 말씀들은 그 전체를 그대로 반드시 실천해야만할 내용들입니다. 성경 66권이 다 행하여야 할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특별히 이 산상설교의 내용은 모두가 다 듣고 행하 여야만할 윤리적 교훈들입니다. '윤리적'이라 할때에는, 그것을 듣기만 해서는 소용이 없고, 듣고 그대로 행해야만 한다는 말입니다. 어떤이는 기독교를 윤리적 종교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머리로 생각만 하고 마음으로 느끼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을 배우고 듣고 믿는대로 실 천하는 종교라는 말일 것입니다. 이 산상 설교를 마치신 예수님께서 결론으 로 하신 말씀은 '너희가 이말을 들었으면 이제 들은대로 행하라'는 것이었 습니다. 이제부터 행하고 그대로 사는 것이 우리의 과제입니다.
그런데 사람 들은 듣는것 따로 행하는 것 따로인 때가 많습니다. 아는 것과 실천하는 것 이 일치되지 않는 때가 많습니다. 믿는 것과 믿는대로 사는 것이 아무 관계 가 없을 때가 많은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 어찌하여 나의 말하는 것을 행치 않느냐'(눅 6:46)고 책망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주'라고 부릅니다. '주'라고 호칭하는 것은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는다는 뜻인데 입으로는 '주여!, 주여!' 하면서 그 분이 하신 말씀 대로 행하지 않으면 그것은 오히려 하나님을 조롱하고 모욕하는 것이 됩니다.
그런데 그 당시에 사람들이 입으로는 주여!, 주여! 하면서도무지 실천적 인 삶은 살지 못하였기 때문에 예수님은 심히 답답한 심정으로 이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행하지 못한다면 차라리 나에게 주여! 주여! 라는 말이라 도 하지말라는 책망입니다. 특별히 주님의 산상 설교는 사람들이 모두 행하 여야 될 말씀들이지 귀만 즐겁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태 복음에서는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행하면 그는 매우 지혜로운 사람인 것이며 그들에게는 모든 축복이 임하게될 것입니다. 성읍과 들에서 그 후손들이, 그 소산물이, 그 소 유물이, 그 가정 생활이, 그의 일거수 일투족이 다 복을 받는다고 하였습니다. '네가 네 하나님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하나님께서 너에게 그리하신다'고 하셨습니다. 말씀을 잘 듣고 실천하는 사람은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그 집은 세상에 그 어떤 변화와 소용돌이, 그리고 시련과 환난이 있어도 요동하 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행한다는 것은 그렇게 강한 힘을 지닙니다.
그러므로 그에게는 아무것도 염려될 것이 없습니다. 여러분의 신앙 생활에 있어서 '나는 말씀을 잘 듣고 또 들은대로 행한다'고 장담할 수 있는 분이 계시면 그 분의 신앙과 생활은 자신감이 있는 신앙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하여 볼 때에 그런 사람 들이 과연 얼마나 되겠습니까 이 실천적인 신앙이라는 것은 모르면 모르니까 못하고 또 알면 그것이 얼마나 실천하기가 어려운 것인가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여기 예수님은 '듣 고 행하는 자'라고 말씀하셨는데
그러므로 '듣는 것'과 '행하는 것'은 수레 의 양바퀴와 같은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행하지 못하는 것을 비관한 나머지 듣기만 하면 뭘하느냐고 하여서 듣는 것마저 거부해 버리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우선 열심히 들어야 합니다. 만일 듣는 것이 필요 없다 고 생각하셨다면 예수님께서 왜 이렇게 긴 설교를 그 많은 사람들에게 전하 셨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 온지라. 입을 열어 가르쳐 가라사대 ' 라고하지 않으셨습니까 예수님은 항상 '입을 열어 가르치셨고' 사람들은 그의 가르침을 들었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첫 걸음은 귀를 기울여 듣는데서부터 시작됩니다. '듣지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라고 하였고 또 '전파하는 자가 없으면 어찌 들으리요'라고 하였으며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면 어찌 전파하리요'(롬 10:14)라고 했습니다. 전파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보내 주시고 그들의 입과 말을 통하여 듣게 하시고 또 들은 자들이 믿게 하시는 이 모든 일은 곧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말씀하십니다. 여러가지 방법,여러가지 뜻,여러 사람, 여러 시대,또 여러가지 상황과 장소를 통하여 우리에게 끊임없이 말씀 하고 계십니다. 특별히 성경을 통하여 항상 말씀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그것 을 듣게 하십니다. 우리가 듣게 하시려는 것이 그 목적입니다. 때로 어떤 분 은 '나는 아무리 들어도 소용이 없어요. 들으면 금새 잊어버리는 걸요, 이 렇게 기억력이 감퇴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주로 연세많은 분들이 그렇게 말씀하 십니다.
그런데 그분들은 여전히 '듣기 위해서' 나오십니다. 기억을 못해도 듣고 잊어버려도 변함이 없이 들으시는 자세로 성실히 꾸준히 하나님 앞에 나오시는 것을 볼 때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겠습니다. 예수님이 이 산상 설교를 말씀하실 때에 그 무리들 가운데 젊은이들만 있었을까요 기억력이 좋은 이들만 따로 골라서 그들에게만 들려주셨을까 요 아닙니다. '무리들'이라고 할 때는 남녀노소 각계 각층의 갖가지 사람들 이 다 모이고 다 들었습니다. 그 모든 사람들이 다 들을 필요가 있었기 때문 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일반지식과 다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 이기 때문에 기억력이 좋다고, 지능지수가 높다고, 공부를 많이 했다고 반드 시 깨달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들음' 을 통하여 각 사람이 알도록 하여 주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들으라고 하 시는 까닭은 많은 지식들을 소유하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믿음을 가 지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믿음은 그냥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들음으 로써 생깁니다. 들을수록 믿음이 생기고 계속 들으면 그 믿음이 자라나고 많 이 들으면 큰 믿음을 소유하게 됩니다. 듣는 것은 믿음을 가지기 위한 노력 이며 수고스러운 봉사입니다. 여러분이 말씀을 들으실 때 마치 연극을 관람 하는 구경군처럼 관객의 입장에 있을 것이 아니라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 에 동참하고 그것을 함께 나누고 그 말씀을 마음속에 받아들여 깊이 상고하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신명기 28장에서는 '삼가듣는다'고 하였습니다. 그 말씀을 삼가들으십시다. 씨를 뿌리는 사람은 언제나 계속해서 여러 종류의 밭에다 뿌립니다. 다만 사람들이 삼가 들을 때에 그 씨는 비로소 옥토에 떨어져 열매를 맺는 씨앗 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기대감을 가지고 나아가 씨를 뿌리 라고 하셨고 뿌려진 씨가 1/4만 추수되더라도 그것은 좋은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더욱 열심히 하여야 할 일은 듣는 것입니다. 삼가 들 어야 합니다. 그리고 듣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전에 열심히 나와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정성과 참여, 인격적인 만남, 그리스도안에 교제로써 이루어져야 되도독 되어있습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통해서 우리를 만나주십니다. 말씀만 들으려 한다면 방송이나 설교 녹음테이프 같은 매체들도 많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참여자의 입장으로 듣는 것은 아닙니다. 참여자로서 들어 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위하여 은혜의 보좌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6)고 권하였습니다. 집에서 편안히 누워서 어떤 분의 설교를 녹음기로 듣는 것과 내가 은혜의 보좌 앞에 겸손히 나와 정성을 기울여 참여자로서 말씀을 삼가 듣는 것은 다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여러분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하여 교회에 나오시는 일을 열심히 하십시요. 듣는 것은 곧 경건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보좌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말씀을 들으시고 그것을 행하시려면 우선 그말씀을 사랑하고 사 모하는 뜨거운 심정이 있어야 합니다. 나의 관심과 정성을 말씀에 모두 집중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나에게 무슨 말씀을 주실까 하는 기대감과 사 모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전도할 때에 베뢰아 사람들은 성경을 배우고 듣는 열심이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더 많았습니다. 베뢰아 사람들은 데살로니까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 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 고함으로 그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나 (행17:11)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베뢰아 사람들이 성경을 대하는 관심과 태도는 우리가 본받아야 할 자세입니다.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성경을 상고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과연 영의 양식이라고 생각할 때, 지금 우리 한국교회는 이 양식의 풍년을 맞이한 때임이 분명합니다. 어디를가나 좋은 말씀을 들을 수가 있습니다. 듣지 못할까봐 걱정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이 교회가 맘 에 안들면 저 교회 가면 되고 이 목사의 설교가 싫으면 저 목사에게 가면 되고 ,얼마든지 자유자제로 골라서 취향대로 영양분있는 양식을 섭취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그것이 문제인 것같습니다. 사람들의 마음 속에 말씀을 사모하는 열심이 없어졌습니다. 말씀이 풍성한 것은 좋은데 그것을 귀한 줄 모르고 그것을 사모하지 않게 된 것은 문제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 이 오랜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해방되어 고국 땅에 귀환하게 되었을 때 그들 이 제일 그리워 하였던 것은 '성전'과 '말씀'이었습니다. 그 해 7월에 모든 백성들이 수문 앞 광장에 모였는데 아무 것도 없는 삭막한 폐허의 잿더미에 서 에스라 선지가 모세의 율법서를 낭독하였습니다. 그 말씀을 새벽부터 정 오까지 낭독하는동안 한사람도 미동조차하지 않았으며 뭇백성이 귀를 기울 여 들었습니다. 그 때에 강대가 없어서 거친 나무토막을 잘라 강대를 만들었 으며 딱딱한 모세의 율법서를 새벽부터 12시까지 계속 읽은 것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을 듣는 모든 백성들이 '아-멘'을 응답하며 몸을 굽혀 얼 굴을 땅에 대고 여호와를 경배하였으며 백성들은 그 말씀을 듣고 모두 다 울었다(느8:1-9)고 하였습니다. 이들이 얼마나 말씀을 사모하였으면 그랬을 까요 듣고 행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기 때 문입니다. 풍년에는 곡식 귀한 것을 모릅니다. 그리고 그것이 크나 큰 축복 이란 것도 모르고 지내기가 쉽습니다. 여러분! 좋은 때일수록 더 감사하고 더 사모하고 더 사랑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말씀을 언제나 귀히 여기고 사 모하십시다. 성서는 오늘과 같은 때를 미리 예측하고,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쫓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쫓으리라(딤후 4:3) 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바른 교훈을 싫어하고 사욕의 스승들이 많이있고 진리보다 허탄 한 이야기 듣기를 더 좋아하는 때, 그 때가 지금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그러나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그 말씀만을 사랑하고 사 모하며, 그 말씀만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삼가들으시 고 실천하시며 또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힘써 전하여야 하겠습니다. 한가지 더 생각해야 될 것은 듣고, 그리고 행하는 것입니다. 잘 들으면 결국 잘 행하게 된다고 믿습니다. '삼가든는' 이들은 그 말씀대로 행할 힘이 주어 집니다. 혹 말씀대로 행하지 못했더라고, 말씀을 들은 분 들은 이것을 깨닫고 말씀이 자신에게 그것을 지적해 주기 때문에 결국은 행할 수 밖에 없도록 만들고야 맙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그 말씀은 좌우에 날 선 예리한 칼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능력이 있어 서 들은 분들의 마음 속에서 역사를 일으킵니다. 그 역사는 말씀에 대한 책 임감입니다. 책임을 느끼게 합니다. 그 책임을 못하면 성령님이 내 마음 속에 책망을 하시고 그 책임을 잘하면 성령님이 나를 칭찬하여 주십니다.
그러므로 말씀에 사는 사람들은 사람들의 비난이나 사람들의 칭찬에 별로 관심이 없 습니다. 성령님과 함께 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말씀을 무관심하게 여기고 경홀히 취급하는 사람, 입으로는 항상 '주여 주여' 하면서도 실천할 마음이 없는 사람, 말씀을 잘못들어서 그 귀가 교만한 사람, '말씀은 말씀이고 나는 나다 ' 라고 하는 사람, 그들은 결국 실천하는 신앙을 제대로 갖지 못합니다. 성령님은 항상 말씀과 계시로써 우리 에게 신호를 보내십니다. 우리는 성령님의 신호에 복종해야 하는데 '가라'면 가고 '서라'면 서야 됩니다. 말씀대로 지키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이 신호 쯤 지키는 것이 무엇이 그리 어려운 일입니까 사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실천한다는 것은, 말씀을 문자대로 따른다는 것보다는 성령님의 신호 에 복종한다는 뜻입니다. 신호를 잘 따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어려운 것도 아니요 먼데 있는 것도 아니며 생소한 것도 아닙니다. 쉽고 가깝고 익숙하게 모두가 다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삼가듣고 행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령님께서는 우리 마음에 신호등을 켜 주십니다. 우리는 그대로 따르면 뚜니다. 말씀을 삼가듣고 또 그것을 생활에 실천하고 적 용함으로 지혜로운 건축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신자들의 3대 의무 성경
본문:살전 4:9-14 사도 바울은 본문 4:1-8절에서는 우리 신자들의 하나님께 대한 생활 태도에 관해서 권면하였고,4:9-10절에서는 모든 사람에 대한 생활 태도에 관해서 권면하였습니다. 그러면 우리 신자들의 신성한 의무가 무엇인지 생각해 봅시다. "형제를 사랑하라." 신자의 신성한 의무중에
첫째는 형제사랑이라고 하였습니다. 본문 9-10절 에 강조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형제사랑에 관해서는 쓸 필요가 없다'고 전제하고 있습니다. 형제사랑에 관해서 쓸 필요가 없다는 말은 무엇입니까 형제는 사랑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귀중하지 아니하거나, 필요하지 않 다는 의미도 아닙니다. 이는 너무나 귀중하고 중대하기 때문에 여기에 대하 여 설명하거나 기록할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특별히 이 서신을 받아들이는 데살로니가 신자들은 형제사랑의 중대성을 알고 있는 신자들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아서 사랑을 하고 있는 신자들이라고 하였습니다. 나아가서는 이 사랑을 친히 실천 하고 있는 신자들이라고 칭찬하면서 더 많은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강조하 고 권면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사랑에 대해서 우리나라 말은 한가지 용어로 사용되지만, 헬라 어에는 네가지 용어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사람을 사랑하는 신적 사랑을 '아가페'라고 하고,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는 본능적 사랑은 '스톨케'라고 하고, 부부간에 사랑하는 이성적 사랑은 '에로스'라고 하고, 형제간에 이웃간에 사랑하는 사회적 사랑은 '필리아'라고 합니다. 특히 본문에서는 여기 네번째인 형제사랑 즉 '필리아'에 대해서 언급하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형제들간에서 서로 사랑해야 된다고 하였습니다. 성경은 인간 대 인간의 사랑에 대한 범주와 대상을 여러가지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부모에 대하여 자녀에 대하여 형제에 대하여 친구에 대 하여 이웃에 대하여 사랑하고 나아가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하였습니다. 이와같이 형제를 사랑하는 실천방법은 서로 아껴주고 서로 동정하고 도와주며 서로 고락을 같이하며 서로의 운명을 같이 하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 신자들을 보니 이러한 사랑을 실천하고 있는 신자들이라 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신자의 신성한 의무중에 하 나이니 더 많이 사랑하라고 바울은 강조하였던 것으로 봅니다. 우리 신자들의 신성한
둘째 의무는 조용히 자기 일에 근면하게 일하는 것 입니다. 11절에 도 너희에게 명한 것 같이 조용하여 자기 일을 하고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와같이 강조하게 된 의도는 일을 하지 아니하고 돌아 다니면서 떠드는 신자가 있지 아니한가 해 서 권면을 한 말씀이라고 합니다. 성서학자들은 데살로니가 서신을 보면 말 많이 하며 떠드는 신자도 있었 고 자기 직업없이 한가한 신자도 있었으며 일하기 싫어하는 게으른 신 자도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데살로니가후서 3장 10절에 '일하기 싫거 든 먹지도 말게 하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자기 일에 근면하라" 그러면 어떻게 생활해야 한다고 하였습니까 사도 바울은 강조한 바와 같 이 중요한 신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침묵이란 의미인데,무게있는 신자 가 되라는 것입니다. 자기 일을 하는 신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이는 남의 일에 간섭하지 말라는 의미인데 자신의 맡은 일을 하고 자신의 책임을 다하 라는 것입니다. 힘써 일하는 신자가 되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근면하라는 뜻입니다. 독일 격언에 '노동은 기도이다'라고 했으며, 영 국 격언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악을 행하는 것이다'라고, 벤겔은 '노 동은 천국 맛을 본 사람에게 필요한 교훈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와같이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 신자들을 아낀 나머지 더 멋있는 교회, 더 멋있는 신자들이 되게 하기 위해서 조용한 신자가 되고 자기 일에 집념하는 신자가 되고 열심으로 일하는 신자가 되라고 한 것입니다. 우리 신자들의 신성한
셋째 의무는 단정히 행하라고 하였습니다. 12절에 '이는 외인을 대하여 단정히 행하고 또한 아무 궁핍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 역시 우리 신자들의 신성한 의무중 하나라고 생각 합니다. 신자일수록 더욱 단정한 사람이 되어야 하고 단정한 생활을 해야 합니다. 신자가 단정치 못하게 되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못하고, 교회안에서 덕 이 되지 못하고 세상의 빛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비난의 대상이 되고 맙니다. 요즘도 단정치 못하고 주책부리는 신자들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 고, 교회에 부덕을 끼치고, 이 세상에서 비난의 대상이 되어 빈축을 사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고 생각합니다. "사람 앞에 단정하라" 단정히 행하라는 말의 뜻은 무엇입니까
(1) 경건한 자세와 태도를 취하라는 뜻입니다. 헬라어로 '유스케-모노-스'라는 말인데, 이는 좋은 모양, 좋은 풍채, 좋은 자세란 뜻입니다. 먼저 우리 신자로서의 자세와 태도를 바르게 깨끗하게 경 건하게 가지라는 말입니다. 이는 한마디로 자기관리를 바로 하라는 말입니다.
(2) 이치체 합하게 행하라는 뜻입니다. 고전 7:35에 '이치에 합하게 행하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매우 광 범위하게 해석됩니다. 모든 삶을 합리적으로 또는 합법적으로 살아가라는 말입니다. 생각도 이치에 합하게 하고 말도 이치에 합하게 말하며 행동 도 이치에 합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치란 곧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를 중심으로 살아가라는 말입니다. 이치에서 벗어나는 삶은 제아무리 잘 산다고 하더라도 바른 궤도에서 이탈된 삶이요 탈선한 삶이란 말입니다.
(3) 고상하게 살아가라는 뜻입니다. 이를 다른 말로 하면 존귀하게 살아가라는 것이라고 합니다.우리 신자들의 생활일수록 더욱 고상해야 되고 존귀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단정하 게 되면 우리 인격이나 생활이 자연히 고상하고 존귀해 지게 마련입니다. 이는 우리 삶의 철학을 이 세상이나 물질에 두지 아니하고, 진리와 그리스도와 천국에 근거하고 살아가는 신자의 삶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단정하게 살아갈 때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되고 교회에는 덕과 유 익을 주게 됩니다. 아울러 세상에서는 자연히 빛을 발휘하여 존경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인이 빠지기 쉬운 길 성경
본문:삼하 24:1-9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다양한 이유로 하나님을 믿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수십년 동안 불교를 믿다가 회의를 느끼고 기독교로 개종하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평소에 전혀 상관없이 세상을 살다가 어려운 인생의 시련을 당함으 로 신앙의 길을 택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경위로 하나님을 믿게된 사람은 제일 먼저 '내가 과연 어떤 종류의 신앙을 가져야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부딪히게 되는데 신앙관에 대한 정의는 저마다 다르기 마련입니다.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저정의'의 속성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지적인 측면으로 먼저 신앙에 접촉하게 된 사람은 하나님에 대하여 지적으로 아는 것을, 감정적인 측면으로 접촉하게 된 사람은 체험적인 신앙을, 의지적인 측면으로 접촉하게 된 사람은 자기 의지에 의하 여 신앙의 노선을 선택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에는 '지정의' 의 세가지 속성을 다같이 주셨지만 우리 인간은 불의하고 부 족하기 때문에 이 세가지 속성을 조화시키지 못하고 어느 하나에만 치중하 여 잘못된 신앙관을 갖게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잘못된 신앙관을 가장 많이 드러낸 교회와 성도가 고린도교회 성도 들입니다. 그들은 성령님의 은사 중에서 특별히 방언의 은사를 중요시하여 방 언을 하지 못하면 성령님받은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 나머지 온 교회가 방언만 하고 말씀과 기도, 그외의 다른 봉사의 생활은 실천하지 않았습니다. 그러 다 보니 온 교회가 소란스럽게 되고 교회가 세상 다른 단체보다 못하게 되 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는 그런 그릇된 신앙관을 바로잡아 주기 위해서 고린도 후서를 기록하면서 고린도전서 12장에서는 성령님은사의 본질에 대해, 13장 에서는 성령님의 아홉가지 은사를 싸고 있는 사랑에 대하여,14장 1절에서는 사랑을 따라 은사를 구할 것을,그리고 14장1절에서는 사랑을 따라 은사를 구할 것을,그리고 14장 19절에서 남을 가르치기 위해 깨달은 다섯마디의 말 이 일만마디의 방언보다 낫다는 신앙의 본질에 대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신앙의 최고봉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디모 데후서 3장 16절은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감동'이란 헬라 원문의 '데오푸뉴토스'라는 말로 하나님께서 숨을 불어넣었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곧 하나님의 성령님이 바람처 럼, 숨결처럼 역사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언제 어디서든지 여러 방편으로 하나님의 말씀과 접촉할 때 마음 속에 은혜가 되고 기쁨을 느끼 게 하는 것은 바로 성령님의 감동이 그 말씀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생명이요, 은혜의 가장 중요한 요소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것이 바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사람의 마음을 쉽게 움직이고 감동되게 하고 은혜를 받게하는 것이 바로 성령님의 역사입니다.그러나 이같은 성령님의 은혜를 모든 사람이 체험하는 것은 아닙니다. 은혜의 세계에는 은혜를 받은 사람이 더 많이 받게된다는 법칙이 있습니다. 이 같은 사람은 성령님의 감동하시는 은헤 로 이미 마음문이 활짝 열려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바로 이런 하나님이 주시는 성령님의 감동에 대한 문제 를 다루고 있습니다. 특히 오늘날 한국교회안에 잘못된 감동을 받고서 잘못 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신자가 많이 있다는 사실을 생각할때 이것은 더욱 중요한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감동과 사단의 격동 본문의 다윗의 경우를 살펴보면 본문 1절에서 "여호와께서 다시 이스라엘 을 향하여 진노하사 저희를 치시려고 다윗을 감동시키사"라고 말합니다. 다 윗이 하나님의 감동을 받았다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그러나 오늘 본문 말씀 과 같은 내용인 역대상 21장을 잘 살펴보면 다른 중요한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사단이 일어나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다윗을 감동하여 이스라엘을 계수하게 하니라"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다윗을 감동시켰다는 ' 감동'이라는 단어와 사단이 다윗을 격동했다는 '격동'이라는 단어입니다. 이 두 단어는 같은 '쑤트'라는 히브리어 단어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처럼 ' 하나님의 감동'이라는 말과 '사단의 격동'이라는 말이 같은 뜻으로 쓰이고 있다는 사실은 결국 하나님께서 사단의 활동을 허락하실 때에라야 비로소 사단이 활동할 수 있음을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욥 1;12). 그러면 하나님이 사단으로 다윗을 격동시킨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는 우선 적으로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징계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스 라엘의 대표자 다윗왕의 마음에 사단이 격동하여 하나님이 실헝하시는 일을 하도록 허락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성령님의 감동의 역사와 사단의 격동의 역사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점이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령님의 역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나타납니다. 말씀에 감동될 때 자신의 모든 것을 주께로 드리는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의 역사입니다. 이에 반해 사단은 말씀의 근거없이 격동하는 역사를 일으 킵니다. 교회 안에서도 남을 괴롭히고,험담하며, 말과 행동으로 사람들을 찌르는 자가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쑤트(찌른다)'의 역사, 사단의 역사입니다. 여기서 이 '쑤트'라는 말의 의미를 좀 살펴보면 상징적으로 '자극한 다, 부추키고 유혹한다, 타락한다,공격한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즉 우리에 게 자극적인 일만 자꾸 부추기는 것입니다. 오늘 한국 교인들 중에도 말씀 중심으로 성령님의 감동을 받으면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보다 이러한 사단의 자극적인 은혜생활에 더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면 성령님의 역사와 사단의 역사를 어떻게 분별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그 열매를 보면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성령님의 은혜를 받으면 답답한 마음 이 되었다가도 말씀을 보면 기쁨이 생기고, 하나님을 찬양하며 헌신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단의 은혜를 받으면 자극적인 추구만 할뿐 마음이 불안하고 초조하며 기쁨이 사라집니다. 사단의 역사가 때로는 성령님의 역사 를 모방해서 나타나기도 하지만 성령님의 역사와 같이 우리의 심령에 기쁨과 은혜가 충망한 역사를 할 수는 없습니다. 자극적인 사단의 은혜를 좇기보다 성령님이 이끄는 말씀중심의 신앙생활을 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사단의 격동은 은혜받은 사람에게도 옵니다. 오늘 중요한 또 하나의 문제는 은혜 많이 받은 사람도 이런 자극적인 은혜 에 현혹되기가 쉽다는 사실입니다. 역대상 21장 1절에 보면 "사단이 다윗을 격동시키사"라고 말합니다. 다윗 같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사단의 역사를 받은 것입니다. 사무엘상 16장 18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다윗과 함께 계시더이다"라고 말씀합니다. 그만큼 다윗은 하나님이 지켜주는 사람이었고, 사시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 으로 용기의 사람이었습니다(삼상 17:4
5). 또한 다윗은 어려운 환경에서도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사람이었고(삼상 30:6), 기도의 사람(삼상 30:8), 회개의 사람이었습니다 (삼하 12장).
그런데 이러한 다윗이 사단의 공격을 받았습니다. 오늘날 교인들 중에도 은혜 많이 받고도 사단의 공격에 넘어져 타락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은혜 많이 받은 사람 도 항상 자신의 신앙을 살펴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사단이 사랑하는 다윗을 시험하게 격동하는데 가만히 계 셨습니까 그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시 하나님께 죄(반역의 죄:삼하 15-20장)을 범함으로 그들을 징계하시기 위해서 였습니다. 하나님은 순리적 인 것을 좋아하십니다. 부모는 부모로서, 교인은 교인으로서 각자의 책임을 순리대로 행하기를 하나님은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다윗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그는 하나님이 세운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에게 도전하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징계하시려고 사단의 격동을 받는 것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인은 용서하시지만 죄는 결단코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사단의 은헤는 사람을 망하게 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자각해야 될 중요한 것은 사단의 격동을 받아 자극적인 은 혜를 추구하는 사람은 본문에 보면,이스라엘 인구의 수를 세는 것은 제사장 의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단에 격동된 다윗의 요압장군을 시켜 인구수를 세도록 하였습니다. 이것은 다윗이 자신의 군사적인 힘을 과시하고, 자신의 권좌를 더욱 확고히 하고자 하는 사악한 목적에서였습니다. 사단의 은혜를 받으면 교만해집니다. 교만이 무엇입니까 자만심으로 가득찬 악한 마음입니다.본문 3절에 보면 다윗의 충신 요압이 분명 "이 백성은 얼마든지 하나님 여호와께서 백배나 더하게 하사 내 주 왕의 눈으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 나이다"라고 만류하고 하나님의 뜻이 아님을 말하였지만 다윗은 듣지 않았 습니다. 도리어 다윗은 그를 재촉합니다 (4절). 10절에 보면 끝내 다윗은 큰 죄를 범하였고 미련하게 행하였습니다. 교만은 하나님처럼 되려는 것입니다. 사단이 다윗을 격동시킨 것은 다윗 자신을 멸망시키는 것과 더불어 이스라엘 백성들을 멸망시키기 위해서입니다. 이로 인해 칠만명의 이스라엘 백성이 죽었습니다. 이렇듯 나 하나가 은 혜생활을 잘못하면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까지 해를 입게 됩니다. 그러기 에 나의 신앙이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내가 신앙생활을 아름답게 할 때 가족과 친구, 이웃은 감동을 받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성령님의 은혜는 우리를 잘되게 하기 위해서 은혜를 줍니다. 이에 반해 사단은 우리를 격동하고 자극하여 망하게 하려고 은혜를 주는 것입니다. 큰 은혜를 받으려는 욕심보다 하나님이 알맞게 주신 은혜를 잘 관리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생활에 적용하며 살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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