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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의 살림꾼 (눅7:11-17)

본문

그 후에 예수께서 나인이란 성에 가실새 제자와 허다한 무리가 동행하더니 성문에 가까이 오실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니 이는 그 어미의 독자요 어미는 과부라 그 성의 많은 사람도 그와 함께 나오거늘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가까이 오사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죽었던 자가 일어 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께서 그를 어미에게 주신데 모든 사람이 두려워 가로되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 나셨다 하고 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아 보셨다 하더라 예수께 대한 이 소문이 온 유대와 사방에 두루 퍼지니라. 살림꾼이신 어머니 . 우리는 살림을 잘하는 주부를 보고 살림꾼이라는 말을 합니다. 한 가정의 주부가 가족들을 돌보며 가계를 운영해 나가는 모든 일을 살림이라고 합니다. 아이들의 생명을 키우는 행위입니다. 남편의 직장 생활을 뒷받침하는 일입니다. 사실 우리들의 가정에 어머니가 안 계시고 살림을 맡아 하는 주부가 없다면 우리들의 생활은 삭막해 질 것입니다. 우리는 가끔 가정의 살림을 하찮게 여기는 말을 하곤 합니다. "집에서 살림이나 잘하라고 말을 하기도 하고, 살림하는 여자가."라는 말을 쓰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살림이라는 말을 가만히 생각하여 보면 이보다 더 좋고 거룩한 말이 또 어디에 있을 까 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어머니는 생명을 키우는 분입니다. 생명을 열달동안 뱃속에서 자신의 피와 살을 나누어주므로 키우다가, 아기를 낳아서는 그가 장성할 때까지 온갖 정성으로 돌보고 키우는 살림의 주역이십니다. 생명을 낳고 키우고 돌보는 속성은 바로 하나님의 속성이기도 합니다. 이 세상의 창조자 시요, 이 세상에 생명을 주어 우리를 살리시는 분도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여자는 특히 어머니는 자신이 생명을 잉태하고, 낳고 하는 과정 가운데 남자보다 더 종교적인 사람이 됩니다. 우리나라 종교인의 대부분이 여성인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불교를 가든 천주교를 가든, 우리 교회를 보든 또한 점쟁이를 찾아가는 사람을 보아도 남자보다 여자가 훨씬 많다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여자에게 종교적 심성이 발달되어 있고, 이러한 종교적 심성이 발달되게 되는 원인은 생명을 잉태하고 키우는 과정 속에서 절대자에 대한 신비적 체험을 갖게 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살림꾼은 살리는 사람을 말합니다. 가정을 살리고 생명을 살리는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남자든 여자든 사회 속에서 공동체를 위하여 일하는 많은 사람들은 모두가 살림꾼입니다. 가정이라는 가장 기초적인 집단을 벗어나서 사회를 바라보고 국가를 바라보고, 미래를 바라보고 사회를 살리기 위하여 헌신적으로 일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이 사회에 미래가 있고 꿈이 있는 것입니다. 진정한 살림꾼이신 예수님.
그런데 오늘 봉독해 올린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이야 말로 진정한 살림꾼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생명 뿐만 아니라 영혼을 살리시는 영혼의 살림꾼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읽은 말씀과 비슷한 이야기가 불경에서도 발견됩니다.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전체적인 내용은 이렇습니다. 하루는 어느 한 과부가 석가에게 와서 자기의 외아들이 죽은 것을 말하고 위로를 구합니다. 그러자 석가는 그 과부에게 집집마다 다니며, 슬픔이 없는 집 세집을 찾으면 위로를 해 주겠다고 말을 합니다. 그러자 이 과부는 집집마다 문을 두드립니다. 하지만, 사람이 죽어 본 일이 없고 슬픈일을 당해 보지 않은 집은 한 집도 없었습니다. 부잣집은 부잣집대로 가난한 집은 가난한 집대로 자기보다 더한 슬픔도 있고, 고통도 있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이 과부가 석가에게 다시 와서 말합니다. 슬픔과 고통이 없는 집은 한집도 없습니다. 그러자 석가는 과부에게 말합니다. 그것이 내가 너에게 줄 수 있는 위로이다. 너 혼자만 슬픔과 고통을 겪는다고 생각지 마라,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이 다 겪는 슬픔을 너도 겪고 있는 것이라면서 그 여인을 위로하여 주었다고 합니다. 불교의 가르침은 이렇듯, 사람들로 하여금 세상의 이치를 깨닫게 하는데 있습니다. 세상의 생로병사의 문제를 사람들에게 가르쳐 사람들로 하여금 그 고통에서 벗어나고 잊어버리게 하는 것이 불교의 가르침인 것입니다. 이 과부에게도 아들의 죽음이 혼자만의 일이 아니라 모든 인간은 죽게 마련이라는 당연한 이치를 깨닫게 하여 그 슬픔을 잊게 하고자 하는데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과부의 슬픔이 진정으로 위로를 받았을 까요 오늘 읽은 말씀 가운데에도 과부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나사렛으로 부터 남동쪽으로 6마일 가량 떨어진 나인성에 사는 과부의 이야기입니다. 누가복음의 저자는 이 여인의 과거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전해 주지 않고 있습니다. 다만 외아들을 가진 과부라고만 12절에 이야기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 여인은 아마 남편이 죽던 날 같이 죽어 버리려고 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남편이 죽어 버렸기에 또 유대 사회에서 여자가 혼자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다는 것을 알고 있는 여자는 아마 죽는 것이 더 낫겠다는 생각을 당연히 하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여인은 죽을 수가 없었습니다. 자기의 어린 외아들이 울고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여인은 이렇게 생각하였습니다. 그래 살자, 이 아들을 보아서라도 살자.이 어린 생명이 무슨 죄가 있다고. 그 이후로 외아들은 이 여인의 삶의 목적이요. 희망이 되었습니다. 아니 바로 이 아들의 생명이 자신의 생명이 되었을 것입니다. 어떤 어려움도 이 아들 하나를 바라보면서 참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오늘 그 아들이 죽어 버린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위로합니다. 그러나 어머니에게 그 위로가 들려 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들이 사람들에 의해서 메어져 나갑니다. 그 과부의 생명이 실려 나가는 것입니다. 과부는 살아 있다고는 하나 이미 죽은 몸입니다. 그의 생명인 아들이 죽었기에 그도 이미 따라 죽어 버렸던 것입니다. 외아들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몸을 희생하던 살림꾼인 어머니는 이 아들이 죽으므로 이 세상의 마지막 희망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이 과부가 자기 생명을 관에 누이고 성문을 빠져 나오다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예수님은 이 과부의 당한 일을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이러한 사람을 만날 때마다 그냥 지나치시지 않는 것이 특징이십니다. 그냥 눈 가리고 허웅 식으로 동정하지 않으시고, 자신의 아픔처럼 여기시고 해결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 예수님이 울지말라고 과부에게 말합니다. 그리고 가까이 가사 관에 손을 대시고 말씀하십니다.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예수님의 말씀으로 놀라운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청년이 일어나 앉고 말을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청년의 생명과, 과부의 생명을 동시에 살리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들의 죽음보다 과부의 슬픔을 보고 여기에 응답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과부에게 죽음은 모든 사람에게 있는 것이니 그만 슬퍼하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인생이니 어쩔 수 없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진정한 위로는 그 눈에서 눈물을 씻어 주는 것이고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울지 말라. 우리 주님은 영혼의 살림꾼이십니다. 이 영혼의 살림꾼이신 예수님은 죽음이 있는 곳, 슬픔이 있는 곳, 인생의 고통에 언제나 찾아오십니다. 예수님은 외아들의 죽음이 있고 죽음이 있고 한 과부의 피맺힌 절규가 있는 나인 성으로 가까이 가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삶에서 문제가 있을 때마다 언제나 함께 하셨던 분이십니다. 여러분이 어려운 문제로 고통 가운데 있을 때에 주님은 우리 곁에 계신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곁에 계셔서 우리에게로 다가오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는 "울지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그냥 평범한 위로의 말씀이 아닙니다. 친히 어떻게 하시겠다는 희망의 말씀인 것입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실 때도 마리아의 오라비 나사로를 살리실 때도, 예수님은 그들에게 희망의 말씀을 하시는 것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울지 말라!" 주님은 고통 속에 있던 과부에게 다시금 희망을 안겨다 주시는 분이신 것입니다. 가까이 오사. 또한 예수님은 운구의 행렬로 가까이 가십니다. 죽음의 행렬, 고통의 행렬로 가까이 가십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 언제나 함께 계시는 예수님은 우리의 아픔을 아시고 그 아픔을 고치시고 회복시키시고 다시 살리시기 위하여 가까이 오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손을 대셔서 죽음의 행렬을 막으십니다. 이 세상에서 죽음의 행렬을 막으신 분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는 자신의 몸을 던져 죽음을 향해가는 인간의 행렬을 막으신 분이십니다. 예수님 때문에 우리는 죽음을 넘어설 수 있음을 믿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우리는 부활의 소망을 가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 예수님은 죽어있는 청년에게 말씀하십니다.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한다 일어나라." 참으로 권세 있는 예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는 생명을 살리는, 죽은 영혼을 일으키는 능력이 있음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는 말씀입니다. 그를 어미에게 줍니다. 생명을 주는 것입니다. 삶에 대한 희망을 세워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야 말로 참된 생명의 살림꾼입니다. 지금의 시대. 지금의 시대야 말로 살림꾼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지금 우리의 문화는 서로가 서로를 살리는 문화라기 보다는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문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중국인들은 "너 살고 나 살자"라고 말한다고 합니다. 너도 살고 나도 살면 그것 보다 더 좋은 것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유대인들은 "너 죽고 나 살자"식으로 산다고 합니다. 나 자신이 살기 위해서는 상대방이야 죽든 살든 아무 상관이 없다고 말합니다. 국가 없이 생명의 위협을 받으며 산 민족의 처세술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 민족은 어떻습니까 "너 죽고 나 죽자"식의 생활이 아닌가 합니다. 지금의 세계는 너 살고 나 살자의 세계가 아니라 너 죽고 나 살자, 아니면 너죽고 나죽자 식의 사회입니다. 죽음의 문화와 죽임의 문화가 가 우리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살인과 폭력이 난무한 시대입니다. 결국은 세계가 이로 인해 파괴되고 자신의 생명을 위협할 터인데도 많은 사람이 눈앞에 이익에 급급하여 폐수를 방류하고, 대기를 오염시키고 있습니다. 자기 자녀들이 먹을지도 모르는 불량 식품과 오염된 농산물을 팔고 있으며, 보아서는 안될 시각 매체들을 전시하고 팔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러한 시대에 죽음의 문화에 맞서 싸우는 살림의 일꾼으로 우리들을 부르고 계십니다. 이러한 죽음의 행렬을 멈추어 세우라고 우리를 부르시는 것입니다. 자기의 생명을 빼앗기고 울고 있는 저 과부의 울음을 이제는 멈추게 하라고 우리를 부르고 계신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러한 죽음의 문화 속에서 참 생명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살림꾼이신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러할 때 진정한 살림꾼들이 필요한 것입니다. 주님이야 말로 이 세계 속에 참된 살림꾼이십니다. 고통 가운데 있는 영혼들을 향해 가까이 가시고 그들과 함께 하시는 예수님, 그리고 그들에게 울지말라 하시며 희망의 말씀을 건네시고 예수님의 말씀으로 이 세계속에서 새로운 역사를 일으키시는 예수님. 그 예수님으로 인하여 이 세상은 아직도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로 인하여 그나마 이 세상이 아직도 살맛나는 세상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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