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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자의 하나님 (마25:1-46)

본문

이번주는 세계교회가 인권주일로 지키는 주일입니다. 우리가 인권주 간 행사와 인권주일을 강조하며, 지켜야 하는 자체가 인권선교의 절실 성이 오늘도 우리의 삶 현장 곳곳에 있다는 것을 반증함이겠습니다. 해 아래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평등한 천부적 인간 존엄 의 권리를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오늘의 현실은 인간을 파괴하고 그 존엄한 권리가 무시하며 짓밟는 행위가 세계처처에 산재 해 있습니다. 지난 30여년간 군사문화가 우리의 모든 삶을 지배하고 규정하며 오도 된 가치관으로 우리의 삶을 황폐케 했을 때 세상 사람들은 모두 "큰 것"으로 상징된 그 무엇을 추구하는 일에 정신을 다 빼앗겼습니다. 큰 나라, 많은 땅, 큰 집, 좋은 차, 좋은 직장, 권력, 인류대학, 박사, 재능,미인." 이 "큰 것"을 성위한 성공자에게 부러운 시선을 보내고 그래서 이를 위해서는 인격,도덕,양심도 묻어두는 "힘의 논리"로 인하 여 사회 병리현상이 깊어 세상살이의 피고함이 말로 다할 수 없었습니다. 이러한 어두웠던 세상에서 그때 이러한 세속주의에 영합하여 교회 조차 '큰 것"을 분별없이 추구해온 지난날의 모습이었음을 자성해 봅니다. 대군중집회에 흥분하고, 큰 교회, 천문학적 헌금의 자랑. 희사 사장처럼 고급승용차 굴리는 큰 교회 목사는 유능해 보여 머리 숙이고 이름없이 빛도 없이 섬기는 농어산촌, 도시 작은 교회 목사들을 무시 한 교회 부익부 빈익빈현상,참으로 부패하고 부도덕한 세상을 심판할 만한 도덕적 권위가 교회에 있었는지 묻게 했었습니다. 이 현상이 오늘인들 없겠습니까 이런 사회와 교회 현실을 직시할때 예수님의 "최 후심판"의 비유는 오늘에 주는 교훈이 의미심장합니다. 인생 누구나 하나님의 심판앞에 영생과 영벌로서 자신의 삶이 정산되는 때가 있을텐데 본문의 최후 심판의 기준은 무슨 대단히 어렵고 까 다로운 기준이 아닙니다. 구체적으로 삶의 현장에서 주린 이, 목마른 이, 나그네 된 이, 헐벗은 이, 병든 이, 옥에 갇힌 이들을 돌아보아 주고 있는가 하는 지극히 평범한 기준입니다. 마음만 먹으면 지극히 언제라도 큰 부담없이 행할 수 있는 바로 그 작은 관심과 손길을 주고 주지 아니한 그것이 천국, 지옥행이 된다는 것입니다. 성서는 "가난한 자를 학대하는 것은 그를 지의신 자를 멸하시는 것 (잠언 14:30)"이라 했고 약한 이, 미련한 이,작은 이를 들어 강한자, 지혜있다 하는 자, 큰 자를 자처하는 사람들을 부끄럽게 (고후 1:27-29)하는 역설의 논리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가난한 이와 작은 이를 향한 하나님의 편애속에 인류의 보편적 사랑 을 구현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방정식"은 성경에 일관된 가르침입니다.
그러므로 진심으로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그속에 지니고 있으면 그래서 그 말씀에 진실한 응답의 삶을 살려 한다면, 영안이 밝히 열려 우리의 주변을 바르게 볼 수 있으니, 위로해 주어야 할 "슬픔"이,치유 해 주어야 할 "아픔"이,나누어 주어야 할 "빈 손"들이 해방시켜 주어 야할 "놀림과 묶임"들이, 열어 주어야 할 맹목적 가치에 "눈먼 이들", 채워주어야 할 "궁핍과 소외"된 곳이 너무도 많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러면 오늘의 우리가 섬겨야 할 작은 자는 누구입니까 제 3세계,제4세계(원주민)고난의 역사현장이요, 세계곳곳 억압적 구 조속에 자유의 삶을 절규하는 현장이요, 가난과 질병과 전쟁의 고통이 있는 현장이요,종교,인종,민족 분쟁으로 고통당하는 현장입니다.UR파 고, 농산물 수입개방으로 인한 절대절명의 위기속, 생존의 벼랑끝에 선 이땅의 농민들, 도시빈민, 영세상인, 막장의 광부, 열악한 노동현 장 인권사각지애에 신음하는 현장 주한미군들의 범죄 현장에서 고통당 하는 여인들, 정신대 할머니, 사회로부터 방치된 채 고통당하는 어린 이들, 시국 관련 청년학생들의 부당 징집으로 고통당하는 현장 민가협 양심수 가족, 구시대 냉전논리의 희생자들, 성폭력 희생자들, 6만여명 에 이르는 외국인 노동자들의 고통, 4백만 장애인, 아직도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못하고 있는 1천5백여 교육개혁의 주체인 해직교사 들, 1천만 이산가족, 북한 동포들, 한이 많은 서남부 백성, 제도교회 의 성차별 현장. 아직도 그리스도를 영접못한 인생들. 수없이 많은 현장의 아픔들을 눈밝히 열려 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존엄성을 높여 주시고 계십니다. 인간의 권리를 신 장시켜 주시고 계십니다. 인간의 생명을 무시하고 그의 권리를 짓밟는 사람들을 언제나 패하게 하십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들은 예수의 마음, 그분의 비우심과 낮아지심(빌립보 2:5-11)의 그 생명과 능력을 힘 입고, 해방과 자유의 충만한 영성(눅 4:18)을 바탕으로 성령님께서 하라 하시는 명령을 우리가 이행해 갈때 가능하게 되는 것을 우리는 역사 속에서 경험했습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민주화,개혁,인권을 신장시켜 가는 일이 후퇴하 지 않도록 감시자가 되고,실천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인간세 계의 해방과 권리 신장 뿐만 아니라 모든 자연과 피조물들의 생명까지 도 존중히 여기는 사회를 만들어가야 하겠습니다. 자화상을 바꾸면 운명이 바뀐다 성경


본문:롬 4:17-25 등산을 하는 사람들은 산을 오르다보면 특별한 현상을 보게 됩니다. 소나무들은 소나무들끼리,자작나무는 자작나무끼리, 단풍나무는 단풍 나무끼리 모여서 자라고 있음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새들도 마찬가 입니다. 참새는 참새끼리, 까치는 까치끼리 모여 움직입니다. 물고기 들도 같습니다. 명태떼는 명태 떼끼리, 멸치 떼는 멸치 떼끼리를 무리 를지어 함께 놀고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무리의 법칙이라고 합니다. 인간의 삶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미국 같이 세계의 각종 인종이 모 여사는 곳에는 백인촌이 있는가 하면, 흑인촌, 멕시코인촌이 있어 각 각 집단을 이루며 거주하고 있습니다. 한 개인의 삶과 그의 운명도 그 의 내적인 삶의 내용에 따라 환경이 조성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인것입니다. 사람들은 모두 다 자기의 마음판에 자화상을 그리며 삽니다. 그리고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자기가 그린 자화상을 따라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합니다. 용감한 자화상을 가지고 있으면 말과 행동을 용감하게 합니다. 그러나 비열하고 비굴한 자화상을 갖고 있으면 비열하고 비굴하 게 행동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사람의 마음에 그려 있는 자화상을 따라 환경이 조성되고 운명이 형성됩니다. 즉 자기 자화상은 거기에 알맞는 환경을 자기 주 위에 불러들입니다. 이것이 또한 다름아닌 무리의 법칙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의 운명과 환경을 변화시키기 위하여는 무엇 보다도 자 기의 마음판에 그려진 자화상을 좋게 바뀌야만 합니다. 나쁜 자화상을 가지고 좋은 삶의 환경을 기대하는 것은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나무 열 매를 기대하는 것과 같습니다. 좋은 삶의 환경을 끌어들이는 힘은 내 마음속에 좋은 자화상을 갖는 것입니다.
1. 패배주의적 자화상 많은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죄인이라는 자화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는 죄인이다. 별 도리없이 죄의 종노릇을 한다. 나는 의롭게 살 수가 없다'하는 자화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아무리 애를 써도 죄악된 삶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끼리끼리 모이는 법칙에 따라 동류인 각종 죄가 함께 거하기 위해서 찾아오기 때문입니다. 죄는 '야, 여기 우리 친구가 있다, 함께 모이자'라고 말합니다. 그 마음에 숨은 자화상이라는 것이 이렇게 무서운 힘을 발휘합니다. 자기는 더러운 사람, 거룩하지 못한 사람이라는 자화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언제나 더러운 생각과 말을 하며 거룩지 못한 생활을 합니다. 그것은 더러운 것이 집단을 이루어 그 사람과 같이 살게 되었기 때문 입니다. 자기의 자화상을 변화시키지 않는 한 거기에서 벗어날 도리가 없는것 입니다. 귀신들이 모여서 득실득실 끊게 하는 것을 막을 수가 없는 것 입니다. 어떤 사람은 늘 자기가 병자라고 자랑삼아 말합니다. '나는 병약하 다, 폐가 나쁘다, 심장이 나쁘다. 위장이 나쁘다. 우리 집안에는 이런 병력이 있다'등 이런 사람들은 마음속에서 자신을 언제나 병약한 자로 봅니다. 그래서 늘 보약을 먹고 몸에 좋다는 것은 다 해봅니다. 그러나 결코 건강해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동류끼리 모인다고 자기 자화상이 병약한 사람은 모든 병을 다 불러오기 때문입니다. '병아, 오너라, 너희들은 내 친구다,함께 거 하자'쇠가 쇠붙이를 끌어당기는 것처럼 자화상은 자기와 똑같은 환경 을 끌어당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람은 병약한 삶에서 벗어 날 수가 없습니다. 성경은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에서 남이니라'고 말씀하고 또 '사람이 마음에 가득한 것이 밖으로 나 오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를 실패자요, 가난뱅이로 보는 자화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는 무엇을해도 실패한다, 나는 가난뱅이다.' 제가 가난한 나라에 가서 복음을 증거할 때에 한결같이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이러 한 가난한 의식입니다. '우리는 조상 대대로 가난하다. 우리는 가난을 벗어날 수 없다'는 생각 속에서 삽니다. 이것을 저는 동남아나 남미에서 강하게 느꼈습니다. 칠레에는 칠에와 아르헨티나를 경계짓는 '안데스'라는 큰 산맥이 있는데 이 산맥의 길 이가 우리 한국의 4-5배됩니다. 이 긴 산맥이 모두 동,구리입니다. 이 구리는 지구 종말 때까지 캐도 다 캘수 없을 정도의 양이라고 합니다.
그런데도 가난합니다. 국민들이 가난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또 파라과이에는 산과 들에 자생하는 들풀같은 것이 있는데 이 뿌리 에는 고구마 같은 것이 달려 있습니다. 삶으면 맛도 우리 고구마나 감 자와 비슷한데 영양분이 풍부합니다. 아무리 캐어도 잘 퍼져서 산야에 깔려 있습니다. 파라과이는 식량 걱정이 없는 나라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꼭 만나와 같아서 그날 캐서 그날 먹어야지 하루만 지 나도 말라서 못먹게 됩니다.파라과이 만나입니다. 이것의 자생력이 어 찌 강한지 심고 가꾸지 않아도 무진장 생겨납니다.
그런데도 이 나라 가 잘살지 못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가난의식 때문입니다. 자신들은 백인보다 연약하고 실패자라는 식의 패배의식이 얼마나 무서 운 것인가를 저는 이번에 남미에서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이런 의식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거지 근성을 버릴 수가 없고 거지 귀신들이 득실득실 끓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어떠한 사람은 자기가 미움받고 버림받았다고 보는 자화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미워한다, 나는 버림받았다, 어릴 때부터 우리 부모가 친척이 주위 살마들이 날 사랑하지 않았다' 이러한 자화 상을 가진 사람들은 가는 곳마다 사람들과 싸우고 부딪치고 미움받고 소외되어 눈물을 흘립니다. 이런 사람은 결혼생활을 해도 사회생활을 해도 어느 곳에 가도 그런 운명과 환경을 만들어 놓고서는 '아이고 내 팔자야, 내 팔자는 왜 이 렇게 기구하냐'고 합니다. 그러나 팔자가 기구한 것이 아니고 자화상 이 기구한 것입니다. 그 자화상을 바꾸기 전에는 그 운명과 환경을 다 른 것으로 개조할 수가 없습니다. 공포의 자화상을 가진 사람이 있습니다. 욥을 보십시오. 욥은 그렇 게 잘 살면서도 늘 마음속에 자식과 재산을 다 잃고 몸은 병들고 부인 에게 버림을 당하는 자기 모습을 그리며 두려워서 떨었습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마음속에 가진 부정적인 자화상 그대로 되었습니다. 자식들 을 다 잃어버리고 재산 다 잃고 몸은 병들고 부인에게는 버림받았습니다. 그때 욥이 뭐라고 했습니까. 내 두려워 하던 것이 내게 임하고 내 무서워하던 그것이 내게 미쳤구나'고 했습니다. 마음속에 그런 자화상 이 있으니까 그런 운명과 거친 환경이 그의 생활 속에 다가왔다고 욥 은 스스로 고백한 것입니다. '내가 암에 걸리겠지, 관절염에 걸리겠지, 아이고 심장병인가 보다, 죽으려냐 보다'고 자꾸 이렇게 부정적으로 모든 일이 안될 것을 생각 하고 그것을 그려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빨리 그 속 에서 탈출해야 합니다. 거기에 머물러 있어선 안됩니다. 열등의식과 좌절감 속에 잇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무시 당하고 어려움만 당하는 그런 것을 체험하게 됩니다. 자화상이 그렇기 때문에 그런 것을 끌어오고 또 자기가 끌려갑니다. 이러므로 패배주의적인 자화상에서 하루속히 벗어냐야 됩니다. 그리고 사람이 자기 자화상을 새롭게 고치려면 예수 믿고 하나님께 돌아와 야 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 10절은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 도다"고 말씀하십니다. 새것이 되는 그런 자화상을 만들어야 하는 것 입니다.
2. 자화상을 바꾸면 운명이 바뀐다.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밑에 와서 종교를 얻는 줄로 생각하는 데, 그렇지 않습니다. 날 위해서 십자가에 몸을 찢고 피를 흘리신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에 성령님의 능력으로 그대한 변화가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힘으로도 되지 않고 능으로도 되지 않는 역사가 마음속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죄를 짓고 불의하고 추악하고 버림을 받아야 마땅한 내 가 그리스도의 피로 죄를 용서받고 이제 용서받은 의인이 되었다는 자 화상을 얻게 되는 역사인 것입니다. 그리고 내 생애 속에 의가 둘러 진치고 의인끼리 모이게 되는 것입니다. 또 거룩한 자화상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보혈이 나 를 씻고 성령님이 내게 거하고 있으니 나는 하나님과 화해하고 거룩함을 입었다. 이제는 음란하고 방탕하고 추하고 세속적인 곳에는 갈 수 없 다' 이러한 자화상을 가진 사람은 자연적으로 추하고 더러운 것이 싫 어집니다. 거룩한 것이 좋아집니다. 옛날에 돼지 우리와 같은 곳에서 즐기며 살던 것이 이제는 기가 막힙니다. 아예 담배연기도 맡기 싫습니다. 이와 같은 변화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자기의 자화상이 달라질 때 그의 생애 속에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병자들이 건강을 얻기 위해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건강하게 된 자신의 모습을 힘차게 가져야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병을 짊어지시고 채찍에 맞으심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다는 이 사실을 마음속에 깊이 받아 들여야 합니다. 저는 칠레나 파라과이에서 설교할 때에 그들에게 이 사실을 굉장히 강하게 인식시키려고 애를 썼습니다. 남미 대중들은 지식이 많지 않고 단순하여 깊고 복잡한 설교를 하면 못알아 듣습니다. 아주 짧은 문장 으로 아주 간단하게, 그러나 그것을 기관총처럼 퍼부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꾸 강조하고 또 강조합니다. 이렇게 모든 사람들에게 '당신들은 병과 상관이 없다. 병은 이미 십자가에서 다 청산되었다. 당신은 이미 법적으로 병에서 해방된 사람이다'라고 자화상을 심어줍니다. 그리고난 다음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하고 당신 마음에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새롭게 된 그 모습대로 행하라 고 할 때 목발을 던져 버리고, 휠체어에서 일어나고, 못스던 팔도 올 라가는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번에 제가 본 기적 중에 가장 큰 기적은 간이 나빠 복수가 차서 몸 이 아이를 가진 것처럼 된 부인이 고침받은 일이었습니다. 기도를 하 자마자 그 부인의 몸의 복수가 빠지기를 시작하여 순식간에 홀쭉하게 된것입니다. 그리고 한 부인은 이마에 혹이 달려 있었는데 기도하고난 다음에 혹 이 사라지고 빨간 점만 남았습니다. 저 자신 눈으로 보면서도 믿어지 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말씀을 듣고난 다음에 병에서 해방되 었다는 자화상을 가지고 기도할 때에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크게 나 타나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끼리끼리 모입니다. 마음속에 건강한 자기 모습을 확실히 받아들이고 믿을 때에 건강이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병은 떠나갑니다. 병은 '야, 여기는 우리 있을 곳이 못된다. 이제 우리 친구가 아니니 가자'고 하고 건강이 '우리 친구에게로 돌아가자'고 하며 돌아오는 것입니다. 무리의 법칙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복 받고 형통하는 자화상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저주가 다 속량되고 우리는 저주의 여리고를 떠나서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거지옷을 다 벗어버리고 동냥하던 삶을 던져버리고 눈을 뜨고 그리스도를 따라서 여리고를 떠나간 바디매오와 같이 우리의 저주의 삶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떠나가 버리고 아브라함의 복을 가득히 받은 자가 모 습을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야웨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다.내 잔이 넘친다. 내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한 사람이 되었다'는 이러한 확신을 가지고 그러한 자화상을 바라보며"할렐루야" 하고 나갈 때에 끼리끼리 모이는 것처럼 하나님의 축복의 은혜가 그 사람 속에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천국을 소유한 자화상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천국은 우리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 사 하나님의 사랑의 아들나라로 옮겨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아 버지가 되시고 예수님이 우리 임금이 되시고 성령님께서 하늘나라의 권세가 되시고 천군천사가 우리를 둘러 진치고 사는 이러한 모습을 늘 마음 속에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약한 자가 아닙니다. 우리는 천국 속에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천국을 소유하고 사는 사람들이 장차에는 영원한 천국으로 들어간다는 이러한 자화상을 굳세게 잡고 살 때에 우리는 이 세상으로 말미암아 낙심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겉사람은 후패하나 속사람은 날 로 새로운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3.긍정적인 자화상을 고백하라 마음속에 가진 자화상은 강하게 고백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을 보십시 오. 나이 많아 늙은 아브라함을 하나님이 밤중에 깨워 일으키셔서 하 늘의 별들을 세게하고 주님은 "저 수없이 많은 하늘의 별들처럼 네 자 손도 그와같이 많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들은 아브라함 은 자신이 수엄 많은 자손의 아버지가 되었다는 새로운 자화상을 얻게 되었습니다. 자기 나이가 100살인 것과 사라의 나이가 90살이라는 것도 다 잊어버 렸습니다. 자기가 큰 민족의 아버지가 된 모습을 마음속에 받아들이고 그것을 입으로 강하게 고백했습니다. 아브람이 아니라 아브라함, 많은 민족의 조상이요, 사래가 아니라 사라, 많은 자식의 어머니라는 하나님께로 얻은 자화상을 입술로 강하게 고백했습니다.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비웃었지만 그들이 이 자화상을 계속 고백할 때에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서 결국 아들 이삭을 낳게 된 것입니다. 자화상을 입술로 고백한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욥은 완전히 패배적인 자화상을 입술로 고백했습니다.
"내 무서워 하는 것이 내게 임하고 내 두려워하는 것이 내 몸에 미쳤다"고 이러한 고백은 강도높 게 그를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파멸을 가져오고 만 것입니다. 여러분, 고백은 위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이 그 마음에 믿어 의 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고 했습니다. 또 '무엇이든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 매일 것이요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 풀린다'고 했는데 우리가 매고 푸는 것은 입술의 말로써 하는 것입니다. 땅에서 긍정적으로 묶으면 하늘에서도 그대로 묶어진다는 것입니다. '내 입에 이른말로 내게 묶였으며 내 입의 말로 내가 사로 잡혔다'고 말하고 있는 입술의 고백, 이것은 자기 마음 속의 자화상을 어떠한 역 경 속에서도 긍정적으로 강하고 담대하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눈엔 아무 증거 안보이고 귀에는 아무 소리 안들리고 흑암이 둘러 진 치더라도 내 입술의 고백을 부정적이 되게 해서는 안됩니다. 항상 긍 정적으로 강하고 담대하게 해야 합니다. 설교는 일종의 고백입니다. 불신앙의 군중 앞에서 강하게 주의 말씀 을 고백하고난 다음 기도할때 그 불신앙은 사지고 수많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병고침 받는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강한 입술의 고백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의심이 꽉 들어찼거나 부정적인 설교를 한 다음에 그런 긍정적인 결 과를 얻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놀랄만한 강한 긍정적인 입술의 고백 인 말씀을 증거할 때에 하나님의 위대한 성령님의 기적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우리는 강한 입술의 고백을 하고 매일 자화상을 새롭게 하 고 깊은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매일 기도할 때에 자기 모습을 고백하 고 감사해야 합니다. '나는 주의 보혈로 정결케 되었습니다. 주님이 채찍에 맞으심으로 나는 건강합니다. 주께서 나의 가난과 저주를 짊어 지셨고 사망과 음부를 철폐하셨으므로 나는 복의 사람, 영생 천국의 백성이 되었습니다'라고 인간은 자기의 가슴판에 새겨진 자화상을 따라 언어 행동을 하고 살 뿐 아니라 그 자화상은 자기와 같은 동류를 끊임없이 끌어 모습니다. 그 때문에 환경과 운명은 밖에서 형성되는 것보다 우리들의 마음속에 서부터 시작한다는 것을 알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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