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련의 단계와 극복 (막4:35-41)
본문
오늘 읽은 본문말씀은 어느날 주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갈릴리 바다 를 건너가시게 되었는데 바다에 큰 풍랑이 일어나 타고 가던 배가 파 도에 휩쓸리게 되자 제자들이 주무시던 주님을 깨우며 살려달라고 부 르짖었고 주님께서는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사 잔잔케 하셨다는 내용 의 얘기입니다. 우리는 오늘 이 말씀을 새로운 관점에서 고찰함으로 은혜를 받아야 겠습니다. 범랑을 만났던 제자들은 곧 우리들 자신이며 바다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현실이며 저들이 타고 가던 배는 우리들이 신뢰하고 의지하 고 내 몸을 맡기고 있는 세상적인 삶의 수단이며 범랑은 부단히 우리 가 살고 있는 생활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시련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먼저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날 갈릴리 바다에는 랑이 일어날 수 없는 몇 가지 조건이 있었던 것입니다.
1. 풍랑이 일어나서는 안될 조건(일어날 수 없는 조건)이 무엇입니까
(1) 주님이 건너편으로 건너가자고 말씀하셔서 그 말씀에 순종하고 건너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범랑이 일어났습니다. 순종하고 주님과는 반대방향으로 가던 길이었다면 모 르겠지만 주님 말씀따라 순종한 길인데 범랑이 왔습니다. 구약의 요나처럼 니느웨로 가라시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다시 스로 가다가 범랑을 만났다면 그것은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의 경우는 '건너편으로 함께 가자'는 말에 순종하 고 떠났는데 시련이 닥쳐 왔던 것입니다. 현대 많은 크리스들이 질 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왜 예수를 믿는데 시련이 오느냐 왜 실패해야 하느냐 왜 고통 과 슬픔을 당해야 하느냐 왜 말씀대로 살고 주의 뜻을 따르려는 사람들이 시련의 가시밭 길 을 걸어야 하느냐 왜 `혜수를 믿는데 일이 잘 안되느냐 고 말입니다. 여기에 대해 블교는 '그것은 인과'라고 대답해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지난날의 어떤 원인 때문에 오는 당연한 결과라고 대답해 줍릭다.
그러므로 오늘 당한 이 고난과 시련을 묵묵히 감래하고 참느라 면 훗날 다시 환생할 때 보다 나은 조건으로 태어날 수 있다고 말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영겁이란 말을 씁니다. 영겁이란 말은 영원이란 말과 같은 뜻으로 쓰이는데
I겁 2겁 영겁이 모여 영원이 된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1겁이란 여인이 치마를 입고 수천 개의 돌계단을 오르락 내리락하느라면 그 치맛자락에 돌계단이 달아서 없어지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몇 천만 번을 오르락 내리락 해야할지 모릅니다. 돌계단이 1번 달아 없어지는 것 이것을
I겁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대답은 다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라고 대답해 주고 있습니다. 시련과 고통 ! 비애와 슬픔 ! 절망과 좌절 ! 실패와 쓰라림 속에 하나님의 그 어떤 뜻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이 없는 사람은 그것들을 숙명 이나 운명으로 받아드리고 막연하게 당하거나 아니면 자포자기해 버 럽니다. 그러나 신앙이 있는 사람들은 내가 당면한 시련. 고통, 실패,절망적 여건 속에서 하나님의 그 어떤 뜻을 발견하고 해결의 실마리 를 찾고 적극적으로 도전하고 굳게 닫힌 문을 열기 위해 문을 두드리 게 되는 것입니다. 왜 풍랑이 일어났습니까 거기엔 하나님의 뜻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각 개인의 형펀 과 신앙과 사정에 따라 다양하게 임하시고 나타나십니다. 메튜헨리는 '하나님의 전통에는 여러 개의 화살이 들어있다"고 했습니다. 때론 깨 닫게 하시기 위해서. 때론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 때론 그릇된 길을 막아 주시기 위해서, 때론 잘못을 징계하시기 위해서, 때론 신앙이 자 라도록 자극하기 위해서 각양의 방법으로 역사하시고 나타나시는 것 입니다. 그 뜻을 바로 깨닫는 사람은 축복받는 사람이 되고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그 시련의 뜻을 모르기 때문에 더 고통스럽고 하나님을 원망 하고 신앙에 손해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2) 배를 타고 갔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의 대부분은 갈릴리 바다에서 잔뼈가 굵은 어부 출신들이었 습니다. 저들은 갈릴리 바다를 노젓는 데는 베테랑들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갈릴리 바다가 그다지 겁나는 곳이 아닌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범랑을 만났습니다. 저들이 주름잡고 저들이 지배하던 바다 앞에 결국 무릎을 꿇고 말았던 것입니다. 저들은 배를 탔기 때문에 안심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 리고 바다에 익숙한 사람들이니까 아무 걱정이 없을 것이라고 안심하 고 잡담을 나누며 노를 젓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범랑은 일어났 습니다. 여기서 노젓는 기술은 자신의 능력을 의미하고 배는 자기가 믿고 의지하는 세상적 수단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내 친구 중에 한 사람은 천리안을 가졌다고 할만큼 시력이 좋은 사람이 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부터 눈이 아프고 시야가 흐려지기 시작했습니다. 안과에 가서 진찰을 해보니 갱년기 현상이니 돋보기를 끼라는 것이었습니다. 믿었던 건강에 이상이 옵니다. 믿었던 사업에 금이 갑니다. 의지했 던 그 어떤 것들이 기초부터 흔들리기 시작힙니다. 그래서 전도서의 저자는 '헛되고 헛되도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 고 고백했던 것입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나 자신은 믿을 것도 의지할 것도 못됩니다.' 나 뿐인가 '이 세상도 그리고 이 세상에 있는 그 어떤 것도 의지하고 나를 맡길 것들이 못됩니다.' 언젠가는 썩은 기등이 무너지 이 무너져 버릴 것들이기 때문입니 그래서 찬송 저자는 '여보시오 내 형제여 재물만 좋다가 이 세상 물건 불탈 때 너도 타=t구나'라고 탄식했던 것입니다.
(3) 주님을 모시고 함께 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이유는 말씀따라 떠났다는 사실보다 배를 타고 갔다는 사실보다 저들이 어부 출신이어서 기술이 좋은 사람들이었었다는 이유보다 더 중요한 이유입니다. 즉 예수님을 모시고 함께 가고 있었는 데도 범랑이 일어났다는 것은 해석하기 곤란한 문가 아널 수 없습니다. 주님이 멀리 계셨다면 별 문제가 됩니다. 주님과 함께 그것도 조그 만 공간 안에 함께 머리를 맞대고 있었는데 왜 범랑이 일어나야 했읍 니까 그러나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모셨다'는 단순한 행동 자체보다는 '어떻게 모셨느냐'의 신앙 자세가 증요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보십시다. 한방 안에 드러누워 있어도 남남일 수가 있고 같은 버스 같은 좌석에 앉아 있어도 남남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은 서울에 있고 한 사람은 미국에 가 있어도 그리워 견딜수가 없고 밤잠을 이룰 수가 없고 상사병이 나고 하루에 두 번씩 꾄지를 쓰고 그래도 모자라서 국제 전화를 하는 경우가 있옵니다. 어 느 쪽이 참된 만남의 관계입니까 우리가 주님을 모시는 것도 마찬 가지 입니다.
1피상적으로 만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오랫만에 습니다. 그간 격조했습니다. 작년에 뵙 고 금년에 뵙는 것 같군요.' 정도의 인사를 나누는 만남. 옷깃을 스치 고 거리에서 시장에서 잠깐 만났기 때문에 다시 만나 본 댔자 눈을 껌벅거리면서 '어디서 뵈웠더라'는 정도의 피상적 만남은 진정으로 주님을 모신 생활의 못됩니다. 10년을 만나도 이런 만남은 겉기 식의 만남입니다. 거기앤 감동도 생명도 정열도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 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오직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 대로 행하는 자라야 하느니라'고 마태복음 7장 21절에서 말하셨던 것입니다.
2사회적인 만남이 있옵니다. 부부의 만남은 인격적인 만남입니다. 모든 것을 서로 다 주고 받는 것이 부부의 원리이고 생활인 것처럼 우린 주님과 함께 모든 것을 주 고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은 나를 위해 나에게 천하보다 더 귀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나는 너를 사랑한다, 나는 너를 좋아한다, 그래서 내 생명을 네게 주었 다, 내 피를 너를 위해 주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 5장 8절에서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우린 주님을 대문 밖에 모실 수도 있고 현관에 모실 수도 있고 안 방에 모셔 놓고 푸대접할 수도 있습니다. 제일 좋은 자리는 내 마음에 주님을 모시는 일인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지배하시는 대로 주님이 이끄시는 대로 아멘하고 살아나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을 참으로 모신 생활입니다.
2. 어떤 순서로 범랑이 배에까지 들어오게 되었습니까 7 이것은 시련 의 단계를 의미합니다. (I) 광풍(성난바람, 미친바람)이 일어났습니다. 전쟁이 일어나고 기근이 일어나고 재난이 일어나고 지진이 일어나 고 환난이 일어나고 사건이 터지고 사고들이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읍니다. 시련의 첫단계는 문제가 일어나고 사건이 일어납니다. 가정에서 일 어나고 직장에서 일어나고 동서남북에서 일어납니다.
(2) 믈결이 부딪칩니다. 물결과 물결이 부딪쳐 파도가 높아지고 부딪친 물결이 다시 뱃전에 와서 부딪칩니다. 즉 층돌이 일어난 것입니다. 고속도로에서 트럭과 승용차, 버스와 택시가 부딪쳐 5증 11중 층돌 을 일이키는 것처럼 우리 시대의 시련은 너무나 많은 사건들이 S증 5중으로 한꺼번에 층돌하고 있는 점입니다. 결국 앞으로 말세에 이 세상에 있을 세계적인 전쟁은 동과 서, 남과 북이 한데 어우러져 부딪치는 충돌전쟁이 될 것입니다. 마가복음
13장 7-8절을 보면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들을 에 두려 워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끝은 아직 아니니라,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처처에 지진이 있으며 기근이 있 으리니 이는 재난의 시작이니라'고 주님께서 말세의 현상을 설명해 주셨습니다.
(3) 물결이 배에 들어와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대수롭지 않게 블기 시작한 바람은 미친바람으로 변했고 잔잔던 갈릴리 바다는 물결과 물결이 부딪치는 소리로 용하게 되었고 믈결 은 배안에까지 들어와 배안에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시련의 절정입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의 힘으로 해결해 보기 위해 노력했을 것입니다,그러나 일어난 바람은 그치지 않았고 넘쳐 오는 물결은 막을 길이 없 었습니다. 이젠 도저히 자신들의 지혜나 능력이나 기술로는 이 사태 를 수습할 수 없는 종점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우린 처음에는 문제를 자기 힘으로 해결해 보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해결은 되지 않고 문제는 커지고 점차 확대되어질 때가 있읍니다. 이패 우린 제자들처럼 '주여 우리가 죽게 되었나이다. 살려 주십시요'라고 주님을 블러야 합니다. 이어령 씨의 글을 보면 미국 사람들은 죽게 되었어도 프 미(help me ! )로 자신의 긴급한 입장을 표현하지만 한국 사람들은 사람살 려 ! '라고 표현한다고 했습니다. 체면과 체통을 존중하는 사람들에겐 help me !가 어울릴런지 몰라 도 죽느냐 사느냐, 믈에 빠져 죽어가는 사람에겐 help me 보다는 사람 살려가 더 어울리는 표현 방법입니다. 주여 살려 주십시요, 우리의 죽게 된 것을 돌아보아 주십시요 ! 라 고 노력도 기술도 능력도 경험도 다 포기하고 입을 모아 주님을 불렀 습니다. 바로 거기에 해결점이 있었옵니다. 본문 39절을 주목하십시다.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 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 여 지더라' 절을 주목합시다. '어찌 이렇게 무서워 하느냐 어찌 너희가 믿음이 없느냐 이 시련의 목적과 뜻은 저들의 믿음을 테스트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파멸시키고 죽게하려는 시련이 아니라 믿음을 시험하려는 시련이었던 것입니다. 깡꽤 블량배 뒷골목의 왕자들을 모아 놓고 간척지에서 교회를 인도 하는 김진홍 목사님이 계십니다. 그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고., 어느날 집사라는 사람이 교회 지 꼭대기에 올라가 소주병을 따고 깡술을 마시면서 큰소리로 하나님 ! 내려오슈 나하고 쐬주 한 잔 합시다 ! 그런 저들이었지만 주님의 십자가 앞에 무릎을 고 뜨거운 성령님의 역사를 체험하게 될 때 그들 의 눈에서 뜨거운 눈믈이 쏟아지고 악을 위해 휘두르던 그 주먹이 주 님을 위해 거룩하게 사용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시련을 당하고 있습니까 주님을 찾으십시요. 그 시련의 물결이 뱃전을 두드리고 있습니까 아니 배안에 들어와 넘치고 있습니까 체면 체통 위신 다 내던지고 '주여 나를 살려 주십시요'라고 주님께 부르짖으십시요. 그리고 이 시련을 통하여 나의 믿음이 성장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그렇게 하면 놀라우신 주님. 전능하신 주님은 '잔잔하랴. 고요하라'고 시련의 물결을 평정시켜 주실 것입니다. '주여 믿습니다.' 아멘
1. 풍랑이 일어나서는 안될 조건(일어날 수 없는 조건)이 무엇입니까
(1) 주님이 건너편으로 건너가자고 말씀하셔서 그 말씀에 순종하고 건너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범랑이 일어났습니다. 순종하고 주님과는 반대방향으로 가던 길이었다면 모 르겠지만 주님 말씀따라 순종한 길인데 범랑이 왔습니다. 구약의 요나처럼 니느웨로 가라시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다시 스로 가다가 범랑을 만났다면 그것은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의 경우는 '건너편으로 함께 가자'는 말에 순종하 고 떠났는데 시련이 닥쳐 왔던 것입니다. 현대 많은 크리스들이 질 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왜 예수를 믿는데 시련이 오느냐 왜 실패해야 하느냐 왜 고통 과 슬픔을 당해야 하느냐 왜 말씀대로 살고 주의 뜻을 따르려는 사람들이 시련의 가시밭 길 을 걸어야 하느냐 왜 `혜수를 믿는데 일이 잘 안되느냐 고 말입니다. 여기에 대해 블교는 '그것은 인과'라고 대답해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지난날의 어떤 원인 때문에 오는 당연한 결과라고 대답해 줍릭다.
그러므로 오늘 당한 이 고난과 시련을 묵묵히 감래하고 참느라 면 훗날 다시 환생할 때 보다 나은 조건으로 태어날 수 있다고 말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영겁이란 말을 씁니다. 영겁이란 말은 영원이란 말과 같은 뜻으로 쓰이는데
I겁 2겁 영겁이 모여 영원이 된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1겁이란 여인이 치마를 입고 수천 개의 돌계단을 오르락 내리락하느라면 그 치맛자락에 돌계단이 달아서 없어지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몇 천만 번을 오르락 내리락 해야할지 모릅니다. 돌계단이 1번 달아 없어지는 것 이것을
I겁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대답은 다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라고 대답해 주고 있습니다. 시련과 고통 ! 비애와 슬픔 ! 절망과 좌절 ! 실패와 쓰라림 속에 하나님의 그 어떤 뜻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이 없는 사람은 그것들을 숙명 이나 운명으로 받아드리고 막연하게 당하거나 아니면 자포자기해 버 럽니다. 그러나 신앙이 있는 사람들은 내가 당면한 시련. 고통, 실패,절망적 여건 속에서 하나님의 그 어떤 뜻을 발견하고 해결의 실마리 를 찾고 적극적으로 도전하고 굳게 닫힌 문을 열기 위해 문을 두드리 게 되는 것입니다. 왜 풍랑이 일어났습니까 거기엔 하나님의 뜻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각 개인의 형펀 과 신앙과 사정에 따라 다양하게 임하시고 나타나십니다. 메튜헨리는 '하나님의 전통에는 여러 개의 화살이 들어있다"고 했습니다. 때론 깨 닫게 하시기 위해서. 때론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 때론 그릇된 길을 막아 주시기 위해서, 때론 잘못을 징계하시기 위해서, 때론 신앙이 자 라도록 자극하기 위해서 각양의 방법으로 역사하시고 나타나시는 것 입니다. 그 뜻을 바로 깨닫는 사람은 축복받는 사람이 되고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그 시련의 뜻을 모르기 때문에 더 고통스럽고 하나님을 원망 하고 신앙에 손해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2) 배를 타고 갔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의 대부분은 갈릴리 바다에서 잔뼈가 굵은 어부 출신들이었 습니다. 저들은 갈릴리 바다를 노젓는 데는 베테랑들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갈릴리 바다가 그다지 겁나는 곳이 아닌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범랑을 만났습니다. 저들이 주름잡고 저들이 지배하던 바다 앞에 결국 무릎을 꿇고 말았던 것입니다. 저들은 배를 탔기 때문에 안심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 리고 바다에 익숙한 사람들이니까 아무 걱정이 없을 것이라고 안심하 고 잡담을 나누며 노를 젓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범랑은 일어났 습니다. 여기서 노젓는 기술은 자신의 능력을 의미하고 배는 자기가 믿고 의지하는 세상적 수단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내 친구 중에 한 사람은 천리안을 가졌다고 할만큼 시력이 좋은 사람이 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부터 눈이 아프고 시야가 흐려지기 시작했습니다. 안과에 가서 진찰을 해보니 갱년기 현상이니 돋보기를 끼라는 것이었습니다. 믿었던 건강에 이상이 옵니다. 믿었던 사업에 금이 갑니다. 의지했 던 그 어떤 것들이 기초부터 흔들리기 시작힙니다. 그래서 전도서의 저자는 '헛되고 헛되도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 고 고백했던 것입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나 자신은 믿을 것도 의지할 것도 못됩니다.' 나 뿐인가 '이 세상도 그리고 이 세상에 있는 그 어떤 것도 의지하고 나를 맡길 것들이 못됩니다.' 언젠가는 썩은 기등이 무너지 이 무너져 버릴 것들이기 때문입니 그래서 찬송 저자는 '여보시오 내 형제여 재물만 좋다가 이 세상 물건 불탈 때 너도 타=t구나'라고 탄식했던 것입니다.
(3) 주님을 모시고 함께 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이유는 말씀따라 떠났다는 사실보다 배를 타고 갔다는 사실보다 저들이 어부 출신이어서 기술이 좋은 사람들이었었다는 이유보다 더 중요한 이유입니다. 즉 예수님을 모시고 함께 가고 있었는 데도 범랑이 일어났다는 것은 해석하기 곤란한 문가 아널 수 없습니다. 주님이 멀리 계셨다면 별 문제가 됩니다. 주님과 함께 그것도 조그 만 공간 안에 함께 머리를 맞대고 있었는데 왜 범랑이 일어나야 했읍 니까 그러나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모셨다'는 단순한 행동 자체보다는 '어떻게 모셨느냐'의 신앙 자세가 증요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보십시다. 한방 안에 드러누워 있어도 남남일 수가 있고 같은 버스 같은 좌석에 앉아 있어도 남남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은 서울에 있고 한 사람은 미국에 가 있어도 그리워 견딜수가 없고 밤잠을 이룰 수가 없고 상사병이 나고 하루에 두 번씩 꾄지를 쓰고 그래도 모자라서 국제 전화를 하는 경우가 있옵니다. 어 느 쪽이 참된 만남의 관계입니까 우리가 주님을 모시는 것도 마찬 가지 입니다.
1피상적으로 만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오랫만에 습니다. 그간 격조했습니다. 작년에 뵙 고 금년에 뵙는 것 같군요.' 정도의 인사를 나누는 만남. 옷깃을 스치 고 거리에서 시장에서 잠깐 만났기 때문에 다시 만나 본 댔자 눈을 껌벅거리면서 '어디서 뵈웠더라'는 정도의 피상적 만남은 진정으로 주님을 모신 생활의 못됩니다. 10년을 만나도 이런 만남은 겉기 식의 만남입니다. 거기앤 감동도 생명도 정열도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 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오직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 대로 행하는 자라야 하느니라'고 마태복음 7장 21절에서 말하셨던 것입니다.
2사회적인 만남이 있옵니다. 부부의 만남은 인격적인 만남입니다. 모든 것을 서로 다 주고 받는 것이 부부의 원리이고 생활인 것처럼 우린 주님과 함께 모든 것을 주 고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은 나를 위해 나에게 천하보다 더 귀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나는 너를 사랑한다, 나는 너를 좋아한다, 그래서 내 생명을 네게 주었 다, 내 피를 너를 위해 주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 5장 8절에서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우린 주님을 대문 밖에 모실 수도 있고 현관에 모실 수도 있고 안 방에 모셔 놓고 푸대접할 수도 있습니다. 제일 좋은 자리는 내 마음에 주님을 모시는 일인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지배하시는 대로 주님이 이끄시는 대로 아멘하고 살아나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을 참으로 모신 생활입니다.
2. 어떤 순서로 범랑이 배에까지 들어오게 되었습니까 7 이것은 시련 의 단계를 의미합니다. (I) 광풍(성난바람, 미친바람)이 일어났습니다. 전쟁이 일어나고 기근이 일어나고 재난이 일어나고 지진이 일어나 고 환난이 일어나고 사건이 터지고 사고들이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읍니다. 시련의 첫단계는 문제가 일어나고 사건이 일어납니다. 가정에서 일 어나고 직장에서 일어나고 동서남북에서 일어납니다.
(2) 믈결이 부딪칩니다. 물결과 물결이 부딪쳐 파도가 높아지고 부딪친 물결이 다시 뱃전에 와서 부딪칩니다. 즉 층돌이 일어난 것입니다. 고속도로에서 트럭과 승용차, 버스와 택시가 부딪쳐 5증 11중 층돌 을 일이키는 것처럼 우리 시대의 시련은 너무나 많은 사건들이 S증 5중으로 한꺼번에 층돌하고 있는 점입니다. 결국 앞으로 말세에 이 세상에 있을 세계적인 전쟁은 동과 서, 남과 북이 한데 어우러져 부딪치는 충돌전쟁이 될 것입니다. 마가복음
13장 7-8절을 보면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들을 에 두려 워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끝은 아직 아니니라,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처처에 지진이 있으며 기근이 있 으리니 이는 재난의 시작이니라'고 주님께서 말세의 현상을 설명해 주셨습니다.
(3) 물결이 배에 들어와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대수롭지 않게 블기 시작한 바람은 미친바람으로 변했고 잔잔던 갈릴리 바다는 물결과 물결이 부딪치는 소리로 용하게 되었고 믈결 은 배안에까지 들어와 배안에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시련의 절정입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의 힘으로 해결해 보기 위해 노력했을 것입니다,그러나 일어난 바람은 그치지 않았고 넘쳐 오는 물결은 막을 길이 없 었습니다. 이젠 도저히 자신들의 지혜나 능력이나 기술로는 이 사태 를 수습할 수 없는 종점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우린 처음에는 문제를 자기 힘으로 해결해 보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해결은 되지 않고 문제는 커지고 점차 확대되어질 때가 있읍니다. 이패 우린 제자들처럼 '주여 우리가 죽게 되었나이다. 살려 주십시요'라고 주님을 블러야 합니다. 이어령 씨의 글을 보면 미국 사람들은 죽게 되었어도 프 미(help me ! )로 자신의 긴급한 입장을 표현하지만 한국 사람들은 사람살 려 ! '라고 표현한다고 했습니다. 체면과 체통을 존중하는 사람들에겐 help me !가 어울릴런지 몰라 도 죽느냐 사느냐, 믈에 빠져 죽어가는 사람에겐 help me 보다는 사람 살려가 더 어울리는 표현 방법입니다. 주여 살려 주십시요, 우리의 죽게 된 것을 돌아보아 주십시요 ! 라 고 노력도 기술도 능력도 경험도 다 포기하고 입을 모아 주님을 불렀 습니다. 바로 거기에 해결점이 있었옵니다. 본문 39절을 주목하십시다.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 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 여 지더라' 절을 주목합시다. '어찌 이렇게 무서워 하느냐 어찌 너희가 믿음이 없느냐 이 시련의 목적과 뜻은 저들의 믿음을 테스트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파멸시키고 죽게하려는 시련이 아니라 믿음을 시험하려는 시련이었던 것입니다. 깡꽤 블량배 뒷골목의 왕자들을 모아 놓고 간척지에서 교회를 인도 하는 김진홍 목사님이 계십니다. 그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고., 어느날 집사라는 사람이 교회 지 꼭대기에 올라가 소주병을 따고 깡술을 마시면서 큰소리로 하나님 ! 내려오슈 나하고 쐬주 한 잔 합시다 ! 그런 저들이었지만 주님의 십자가 앞에 무릎을 고 뜨거운 성령님의 역사를 체험하게 될 때 그들 의 눈에서 뜨거운 눈믈이 쏟아지고 악을 위해 휘두르던 그 주먹이 주 님을 위해 거룩하게 사용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시련을 당하고 있습니까 주님을 찾으십시요. 그 시련의 물결이 뱃전을 두드리고 있습니까 아니 배안에 들어와 넘치고 있습니까 체면 체통 위신 다 내던지고 '주여 나를 살려 주십시요'라고 주님께 부르짖으십시요. 그리고 이 시련을 통하여 나의 믿음이 성장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그렇게 하면 놀라우신 주님. 전능하신 주님은 '잔잔하랴. 고요하라'고 시련의 물결을 평정시켜 주실 것입니다. '주여 믿습니다.' 아멘
댓글목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