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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분담의 시절 (마1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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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 “고통을 분담하자”는 말이 입버릇 처럼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어떠한 말이든지 그 말을 ‘누가 사용하느냐’에 따라 그 의미는 사뭇 달라집니다. 그말을 들으면서 우선 드는 생각은 이러한 것이었습니다. “아니 지금까지 받은 고통 외에 우리에게 떠 넘겨 줄 고통이 아직도 더 남아있다는 말인가” 정말 말그대로 ‘자신의 몫으로 주어진 고통’까지 다른 무고한 사람들에게 떠 넘겨 주고 자신은 그것과 무관해지는 무책임한 말로 들리는 것은 그 말이 적절하게 사용되고 있지 않는 까닭입니다. 오히려 그 말은 자기 자신을 향한 “독백”이어야 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다면 최소한의 의미를 가지는 말이 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말은 방향을 제대로 잡지못함으로써 엉뚱하게도 “다른 의도”를 가지는 말이 되고 말았습니다.
고통을 받는 사람들은 애초 따로 있었습니다. “고통분담”을 운운하기 월씬 이전부터, 아니 언제나 고통을 받는 쪽은 언제나 정해져 있었습니다. 언제나 그랬습니다. ‘더 떠넘겨 받아야 할 고통이 남아있다’는 것은 아예 “죽으라”는 말보다 심한 말로 알아듣는 사람들이 애초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지금껏 ‘고통과는 무관한 삶’을 살아왔던 사람들이 ‘고통’이라는 말을 사용할 때 허탈해지고 답답증은 더욱 깊어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말이 가지고 있는 최소한의 의미조차도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이, 한톨의 손해나 고통도 자신과 연관지으려 하지않는 사람들이, 턱도없는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탐욕적이고 ‘자기 중심적인 사람들’에 의해 뒤틀리고 파괴되고 무너진 것들이 결국 ‘이웃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들’에 의해 재건되고 되살아날 것을 믿습니다”라고 마르틴 루터 킹이 말한 적이 있습니다. ‘이웃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고통을 속속들이 아는 사람입니다. 이웃과 형제의 아픔을, 이 역사가 안고있는 고통을 자신의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바로 이러한 사람들이 고통의 현실 뿐만아니라 고통을 생산해 내는 뒤틀려진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것입니다. ‘고통분담’을 말할 자격이 없는 이들의 그 가당치도 않는 말을 그들 자신에게 되돌려주고, 오히려 “고통을 생산하는 불의한 제도와 법제를 바꾸라”고 일러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제대로된 순서라고 말입니다. 더 이상 고통을 떠 넘겨받을 이유는 없습니다. 다만, 우리는 그들의 말과 상관없이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생생한 고통의 내용을 ‘함께하는 우리의 손’으로 이겨내고 치료해가는 일이 우리 자신의 몫임을 확인하는 일이 남아있을 따름입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에게는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누군가가 우리의 고통을 대신 해결해 줄 것이라거나, 누군가에게 떠넘기는 식으로 해결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자”고 말입니다. 우리가 당하고 있는 고통의 내용을 보다 더 잘 이해하고 특히 스스로를 속이지 않는 투명함으로 함께 나서야 한다는 생각을 해야 할 것입니다.
이번 주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처형을 당하시면 고통을 당하신 ‘고난주간’입니다. 예수의 죽음은 우리에게 아주 특별한 방식으로 ‘고통’에 대한 의미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것마저 ‘다른 이들에게 떠넘기는 고통분담’을 말하신 것이 아닙니다. 기꺼이 자신을 처절한 십자가 처형의 현장으로 내몰아 죽음을 선택함으로써, 그를 따르던 많은 사람들이 예수가 당한 고통이 결국 지금껏 그들 자신의 몫이었음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예수를 따르던 사람들은 십자가에서 자신의 고통을 보았고 자신의 죽음을 보았던 것입니다. 이로써 예수를 따르던 사람들이 저마다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기꺼이 고통에 참여하여, 그들 자신이 여호와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는 주체인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예수는 지금 사람들이 당하고 있는 고통에 의미있고 새로운 “방향”을 실어주었습니다. 고통이 단지 사람을 허망하게 하며, 결국 그러한 허망함으로 끝나게 된다는 생각에서 벗어나게 하였던 것입니다. 지금까지 속박되고 누군가에 의해 당했다고 생각했던 고통이었지만, 이제는 오히려 스스로 고통을 자청하며 기꺼이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놀라운 것은그때 결국 더 이상 그것이 그들에게 고통이기를 그쳤습니다. 그것은 새로운 의미를 갖게되었습니다. 오히려 ‘살리는 일’이 되었고, ‘함께 일어서는 일’이 되었고, 그들의 흔들림없는 “확신”이 되었습니다. 그들의 고통을 바라보는 눈이 빠뀌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그 언제가 누가 말했던 것처럼, 탐욕적이고 ‘자기 중심적인 사람들’에 의해 뒤틀리고 파괴되고 무너진 것들이 우리의 손을 통해 재건되고 되살아날 것을 과연 믿고 있는지를 자산에게 물어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누군가에 의해 고통을 당했다”는 생각에만 머물어 있어서 좌절하는 번민만을 곱씹고 있는 것은 아닌가를 확인해 보아야 합니다. 항간에 들리는 “고통분담”에 대한 요구는 애초 틀려먹은 것이고, 오히려 우리의 언어로 다시금 “고통을 나누는 것”의 진정한 의미를 알려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수난 당하셨던 주간을 우리가 보내면서 우리가 함께 해야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나 자신을 솔직한 시각으로 되돌아 보는 일입니다. 결코 손해보려하지 않는 “자기 보호막”에만 관심을 쏟는 동안에 메말라 가고 피폐되는 부분이 있지는 않았는지를 말입니다. 그리고 손내밀어 잡고 함께하는 일을 당연한 어투로 받아들이지만 그말에 실질적인 내용을 채워내지 못한 것은 아닌지를 물어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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