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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나안 여인처럼 (마15:21-28)

본문

본문은 가나안 여인을 한 예로 들어서 예수님을 영접하고 받아들이고 찬양해야 할 선민들은 예수님을 배척하는데 오히려 개처럼 취급당하고 예수님을 몰라야 할 이방인인 가아인 여인은 오히려 예수님을 영접하고 예수님 앞에서 칭찬을 받았던 역설적인 사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그런 점에서 오늘날 이 사건은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1.전혀 의외의 장소에서 믿음을 만나심 본문에는 “예수께서 거기서 나가사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시니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마 15:21,22).
그런데 마가복음 7장 26절에 보면 수로보니게 족속의 여인이라고 했습니다.가나안 여인이라는 말은 혈통을 중심으로 표현한 것이고 수로보니게 여인이라는 말은 지역을 중심으로 표현한 말입니다.‘수로’라는 말은 ‘수리아’의 준말이며 ‘보니게’라는 말은 ‘베니게’,정확하게는 ‘페니키아’를 말합니다.그러니까 이 말은 수리아 지역에 살고 있는 페니키아 여자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가셨다고 했는데 두로와 시돈 지역은 유다 지역 바로 밖에 위치한 이방지역의 첫번째 지역입니다.쉽게 말하면 국경지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특별히 이 두 지역은 페니키아의 아주 중요한 항구도시입니다.그뿐만 아니라 이 지역은 예수님을 믿는 신앙인이 았다고는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우상숭배 지역으로 아주 유명한 곳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참된 믿음이 전혀 생각지 않은 곳에서도 나타날 수 있다는 진리를 우리들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다시 말하면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도저히 없을 것같은 두로와 시돈에 오히려 신앙이 좋은 가나안 여인 같은 사람도 있고,유다지역은 선민들이 살고있으니 정말 믿음이 좋을 것이다 하고 기대되는 곳에는 오히려 믿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일지도 모릅니다.북한 같은 곳은 신자들이 있다고 전혀 우리가 기대할 수 없는 곳입니다.그러나 오히려 그곳에 정말 참되고 순수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있을 수가 있습니다.오히려 반대로 제2의 예루살렘이라고 하는 서울에 주님 마음에 합당한 가나안 여인과 같은 믿음을 가진 사람이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본문은 우리에게 큰 경고를 줍니다. 가나안 여인 같이 예기치 않은 곳에서 참된 믿음을 발견한 경우가 또 있습니다.사도행전 10장에 보면 백부장 고넬료가 나옵니다.백부장 고넬료도 유대인이 아닙니다.그러나 주님 앞에서 칭찬을 들었습니다.열왕기하 5장 4절 이하에 보면 아람의 군대장관 나만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그는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몸을 씻으라 했을 때 그곳으로 가서 씻었습니다.그래서 문둥병이 깨끗하게 치료가 되었습니다.이처럼 성경에 보면 도저히 신앙인이 있을까 의심스러워 하는 장소에 오히려 참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습니다.반대로 정말 거기에는 믿음이 있을 것이다 하는 곳에는 참된 믿음이 많지 않았습니다.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게하시입니다.게하시는 엘리사의 사환으로 선지자를 섬기면서 그 밑에 일하는 사람,정말 신앙이 있다고 생각되는 사람이었습니다.그러나 그 사람에게는 신앙이 없었습니다.또 가룟 유다의 경우가 이와 똑같은 경우입니다.그는 예수님의 제자로서 지식인이요 열심이 있는 사람이며 처음부터 그가 도적놈이 아닙니다.그러나 그가 예수님을 배반했습니다.결국 정말 바른 신앙이 있을 것이다라고 기대한 곳에는 신앙이 없고 거기에 무슨 신앙이 있겠느냐,나사렛에서 무슨 선한것이 나겠느냐라고 생각되어지는 그곳에는 오히려 큰 믿음을 가진 사람이 있었던 것을 보게 됩니다.
2.가나안 여인 가나안 여인이 어떻게 그 딸의 질병을 고쳤습니까 먼저 이 가나안 여인은 22절에 보면 예수님 앞에 나아와 소리를 질렀다고 했습니다.이것은 간절히 사모하는 마음을 의미합니다.또 소리를 질렀다는 것은 간절히 사모하는 마음뿐만 아니라 자녀에 대한 간절한 사랑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두번째는 “주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예수님을 불렀습니다.다윗의 자손이라는 말은 메시야의 칭호입니다.이 말은 예수님을 그냥 일반 사람으로 본 것이 아니라 메시야로 본 것입니다.성경에 보면 눈뜬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보았을 때에 메시야로 바로 보지 못했습니다.그러나 눈이 감겨져 있는 맹인들은 예수님을 바로 보고 ‘다윗의 자손이여’하고 부른 것을 여러 곳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가나안 여인이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불렀고 메시야 칭호인 다윗의 자손이라고 불렀습니다.바로 이것을 보면 이 여인이 예수님께 대한 믿음을 소유하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부른 이 여인은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 들렸나이다”라고 간절히 사모하면서 예수님을 메시야로 영접하면서 예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의외의 반응을 나타내십니다.23절에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시니”라고 했습니다.왜 그러실까요 못 들어서 침묵한 것입니까 아닙니다.가나안 여인의 믿음을,우리의 믿음을 한 번 시험해 보기를 원했던 겁니다.우리가 말로 하는 것만 가지고는 안됩니다.‘주 다윗의 자손이여!’라는 고백만 가지고는 안되는 것입니다.이렇게 먼저 침묵하신 후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은 뜻밖에도 거절하는 말씀입니다.“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가나안 여인은 인내의 사람이었습니다.예수님께서는 계속해서 가나안 여인을 거절했습니다.또 26절에 보면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고 하셨습니다.어떻게 예수님이 이렇게 냉정하신지 모르겠습니다.이 말씀은 자녀,즉 선민 이스라엘 백성들이 먹어야 할 떡인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취해서 개들에게,가나안 여인과 같은 이방 사람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다는 말씀입니다.이 여인의 간절한 간청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침묵하셨고,거절하셨고,이제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책망하셨습니다.이것은 도저히 용납하기 어려운 수모입니다.견딜 수 없이 창피한 일입니다.
그런데도 이 여인은 27절에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이것이 바로 인내입니다.기도하는데 여러분들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인내입니다.기도할 때 인내하지 않으면 절대 응답이 안됩니다.참고 기다리면서 주님이 주실 때까지,야곱이 천사와 씨름하면서 ‘내게 축복해 주시기까지 내가 놓을 수 없습니다’라고 했던 결사적인 기도가 하나님 앞에서 응답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이 여인은 자신을 개처럼 취급하는 예수님의 치욕적인 말을 들었을 때에 ‘옳소이다’하며 그대로 감내했습니다.우리도 그런 자세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예수님께서 주의 종들을 통해서 때로는 여러분들을 책망할 것입니다.그에 대해서 반발하고 이렇게 저렇게 얘기하는 사람들 은혜 못받습니다.‘옳습니다.정말 우리가 죄가 많아요.정말 우리가 죄가 많아요.정말 우리가 잘못했습니다.아멘 아멘’하면서 긍정하는 사람,겸손한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복주실 것입니다.그러면서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하며 부스러기를 요구하는 이 여인의 겸손함은 우리가 배워야 합니다. 가나안 여인에게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가 기도의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22,25,27절) 예수님에게 소리지르면서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 들렸나이다” 이것이 바로 기도입니다.25절에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주여 저를 도와주소서” 이것이 바로 기도입니다.27절에 “주여 옳소이다만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하면서 예수님께 요청한 것,이것도 바로 기도입니다.이 짧은 이야기 속에서 이 여인은 세번에 걸쳐서 계속해서 기도를 했습니다.
3.시련이 때때로 우리 영혼에 유익함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에게 기도 제목이 있습니까 기도하세요.예수님께서 처음에는 침묵하십니다.여러분이 기도할 때에 ‘그래 내가 주마’하고 바로 이렇게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시험을 합니다.저와 여러분이 간절한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 시험하고 주십니다.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다보면 바람이 불지 않는 순경이 있습니다.모든 것이 잘 되어가는 순경이 있습니다.그러나 때로는 역경이 우리에게 다가옵니다.여러분 우리가 순경에 처해 있습니까 그러면 감사하세요.오히려 이것 때문에 그리스도에게 더 가까이 가게 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여러분들의 간증이라든지 체험을 보면 ‘그래 그때 참 어려웠지.그러나 그것이 오히려 내게 도움이 되었어.하나님께서 그때 내게 그렇지 않았으면 난 큰일 났을꺼야.’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얼마 전에 어떤 분의 간증을 들었습니다.가지고 있던 재산을 속아서 다 날렸습니다.그런 다음에 주님께 나온 것입니다.간절히 매달리며 주님을 붙들었습니다.그러면서 하는 얘기가 ‘나는 재산은 다 잃었지만 내 영혼을 건졌습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본문이 보여주는 교훈은 시련이 우리에게 유익하다는 것입니다.이 시련은 굉장히 불편하고 힘들고 괴롭고 눈물나지만 우리 영혼에 있어서는 이 시련 만큼 유익한 것이 없습니다.그래서 시편 기자는 ‘이 시련(고난)이 유익이라.오히려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의 법도를 배웠다’고 했습니다(시119:71).바로 이 가나안 여인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바로 이 가나안 여인처럼 자녀에 대한 간절한 사랑을 가지고 주님께 매어 달리는 인내의 사람이 되고,기도의 사람이 되셔서 항상 쉬지 않고 기도하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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