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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새 가족 선언 (마12:46-51)

본문

‘삭막한 세상에 가족적이란 말처럼 정다운 것은 다시없다. 타인들끼리지만 형이요, 아우요, 어머니요, 아들이라면, 그 보다 더 따뜻하고, 아름다운 일이 어디 있겠는가 잘못이 있어도, 서운한 일이 있어도, 한 울타리 안에서 한 핏줄을 나눈 가족끼리는 모든 것이 애정의 이름으로 용서된다. 즐거운 일이 있으면 같이 즐기고, 슬픈 일이 있으면 같이 슬픔을 나누는 것이 가족의 모랄(Moral)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한국의 문학평론가 이어령 교수의 저서 ‘차 한잔의 사상’중에 있는 글입니다. 이어령 교수의 이 글은 가정이라고 하는 것은 동질의 핏줄로 상호관계가 맺어진 다른 사람들이 아버지, 어머니, 형, 형수, 제수, 오빠, 누이, 며느리, 사위, 사돈. 등의 이름을 갖게 되면 한 가족의 성원이 되고, 그 가족은 애정(사랑)이라는 이름 아래서 모든 가능성을 발휘하여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가정의 모랄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보여주는 예수 가족의 모랄은 전혀 차원을 달리하면서, 새 가족 선언을 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누가 내 모친이며, 내 동생들이냐(마12:48). 나의 모친과 동생을 보라!(마12:49).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마12:50)고 선언하셨습니다. 주님의 이 말씀 중에 새 가족의 모랄이 있습니다.
I. 혈통적인 가족은 새 가족이 될 수 없다고 선언하였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이 가족은 사람의 가족들입니다. 사람의 가족은 한 피와 살을 나눔으로 이루어지는 혈통가족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는 혈통적인 가족이 있었습니다. 저들이 지금 전도(설교)하고 계시는 예수님께 찾아 와서 문밖에 서서 예수님을 뵙고자 청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저들을 가리켜 ‘모친과 동생들’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모친은 마리아였습니다(마1:25). 그의 동생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와 그리고 누이들이었습니다(마13:55-56) 저들은 나사렛에서 여기까지 함께 모여 좇아 왔습니다. 저들이 이렇게 급히 와서 예수를 만나기 원했던 것은 예수에 대한 심상치 않은 소식 때문이었습니다. 예수가 미쳐서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섬기면서, 귀신을 쫓아 내는 일을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예수를 붙들어 두기 위함이었습니다(막3:21-22). 이렇게 된 것은 형제들이라도 아직까지 예수를 믿지 아니했기 때문이었습니다(요7:5). 우리는 이 본문에서 로마 천주교에서 말하는 소위 성모 마리아의 무태설(無胎說)이 얼마나 거짓말인가를 알게 됩니다. 마리아는 성령님으로 예수를 해산한후, 정혼한 요셉과 결혼하고, 이렇게 자녀를 낳았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결코 마리아는 결혼하지 않은 동정녀로 살았던 것은 아닙니다. 이 때 예수님은 그 말하던 사람에게 누가 내 모친이며, 내 동생들이냐 고 반문하였습니다. 이 말은 결코 예수님이 혈통 가족 관계를 인정하지 않거나, 무시한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가정을 귀히 여기셨습니다. 예를 들면
1 그는 어려서 부모에게 순종하여 받드셨습니다. 누가복음 2장 51절에 예수께서 한가지로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고 하였습니다.
2 그는 갈릴리 가나 혼인잔치에 참여하여 축하하시고, 축복하여 주었습니다(요2:1-11)3 그는 십자가의 최후 순간에도 그 모친을 사도 요한에게 부탁하였습니다(요19:26-27). 그럼에도 불신앙의 혈통적 가족이 하나님의 가족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혈과 육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임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실로 육은 하나님의 나라에 무익함을 보여줍니다.
II. 영통가족이 새 가족이라고 선언하였습니다. 영통가족이란 하나님의 가족을 뜻합니다. 하나님의 가족은 누가 되는가
첫째로 ‘누구든지’ 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본문 12장 50절에 누구든지라고 하였습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본방인이나, 이방인이 관계없습니다. 남녀노소에 관계가 없습니다. 빈부귀천에 관계가 없습니다. 시대 곧 시간성에 관계가 없습니다. 공간성 곧 장소성에 관계가 없습니다. 어느 시대, 어느 장소에 살고 있는 사람이라도 영통가족이 될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지식의 유무에 관계가 없습니다. 인종과 피부 색깔에 관계가 없습니다. 누구든지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가족, 곧 영통가족은 우주적 가족입니다. 오늘 이 시대는 발달된 과학문명의 혜택으로 지구촌 시대를 이루고 있습니다. 세계 방방 곡곡에 일어난 사건들이 전파매체를 타고 순식간에 우리 안방까지 들어옵니다. 발달된 기계의 힘은 넓고 먼 지구를 일일권내로 좁혀 놓고 말았습니다. 각종 통신 수단들은 초를 다투어가며 세계의 모든 곳에 있는 사람들과 대화를 가능하게 만들고 말았습니다. 이른바, 지구촌 문화시대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 지구촌 가족시대가 곧 예수님의 영통가족을 의미함은 아닙니다. 여전히 혈통적 가족관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라야 된다고 하였습니다. 영통가족은 ‘누구든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누구든지’ 안에는,
1)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자라야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 아버지는 하늘에 계신 우리 모든 영의 아버지를 가리킵니다.
2)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라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아버지의 뜻이 무엇인가 그것은 아버지의 독생자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는 이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 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한 것입니다. 요한복음 6장 40절에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고 하였습니다. 요한복음 1장 12절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었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난 자들이라고 하였습니다(요1:13). 성령님께서 우리를 거듭나게 하므로 되는 일입니다(요3:5). 그 사람은 양자의 영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 양자의 영을 받은 사람은, 그 영에 이끌리어 하나님 아버지 앞으로 인도를 받게 되고, 마침내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게 됩니다(롬8:14-16). 바로 그 사람들이 예수의 새 가족이라고 선언하였습니다. 그 사람들이 내 모친이고, 내 동생이라고 하였습니다.
셋째로 예수를 좇는 제자들입니다. 그 사람들이 바로 그를 따르는 제자들이라고 하였습니다. 본문 12장 49절에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켜 가라사대 나의 모친과 나의 동생을 보라고 하였습니다. 바로 지금 예수 앞에 모여 앉아 그의 말씀을 듣고 그를 따르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저들은 각종 병자, 귀머거리, 벙어리, 소경, 문둥병자, 앉은뱅이, 창녀, 귀신들린 자, 간질병자, 그리고 가난한 자들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소외된 죄인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그들 중에는 예수를 따르기 위하여 집과 고향과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친구와 재산을 다 버리고 주님을 좇기로 결심한 자들도 있었습니다. 저들은 혈육의 울타리를 뛰어 넘어선 자들입니다. 생명의 도약을 한 자들입니다. 생명의 부활을 받은 자들입니다. 저들이 사람의 혈통적 가족을 거부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가족에로 도약이요, 승리요, 재창조였습니다. 이렇게 예수의 새 가족 개념은 ‘누구든지’ ‘예수를 믿고’ ‘그의 제자’ 곧 그를 좇는 자였습니다.
그렇다면 예수의 새 가족 개념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새로운 피조물로써의 이웃과 전인류였습니다. 혈연과, 성(性)과, 시간과 지역과, 인종과, 문벌과, 재산과, 지식을 초월하는 모친이요, 형제요, 자매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동일한 보혈로 구속함을 받은 한 하나님, 한 구주, 한 믿음, 한 소망을 가진 영통가족이었습니다. 초대 기독교 순교자들 중에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크리스챤의 유일한 친척은 성도들이다’고 하였습니다. 초기 청교도들 가운데 에드워드 버로우(E.Burrough)가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를 영접하고 하나님 가족의 한 멤버가 되었습니다. 분개한 그의 양친은 그를 그 가정에서 쫓아내버렸습니다. 그 때 그는 부모에게 애걸복걸하기를 “나를 아버지 집에 머물게 해 주십시오. 제가 머슴처럼 일하며, 봉사하겠습니다. 그러나 내가 예수를 믿는 일 만을 이 집에 머물면서 계속할 수 있게 해 주십시요”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는 그 집에서 쫓겨 나오고 말았습니다. 영통가족과 혈통가족은 이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저는 처음에 주님을 영접한 후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 중에 가장 어려웠던 것은 가족의 심한 핍박이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저는 주님의 뜻대로 나중에 신학교를 가게 되고, 전도사가 되고 목사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제가 부산에서 신학교를 다니던 어느 해 어머니께서 오랜만에 우리 집에 오셨습니다. 그 때 저의 어머니의 마음은 대단히 괴로운 중에 있었습니다. 그것은 믿지 않는 큰 아들과, 예수를 믿는 막내 아들 사이에서 겪는 영적인 갈등이었습니다. 어느 날 어머니는 저와 조용히 단 둘이 있는 시간에 이런 고통스러운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그것은 저의 형님이 동생된 나를 향한 고통의 이야기였습니다. 술에 취하여 집에 오신 형님께서는 어머니와 단 둘이 앉은 자리에서 “어머님 예수라고 하는 그 놈이 참으로 있습니까 그 놈이 어디에 있습니까 나는 이 세상에서 단 하나밖에 없는 내 동생 원태를 예수 그 놈에게 빼앗겨 버렸습니다. 예수 그 놈이 내 동생을 위해서 해 준 일이 무엇입니까 공부를 시켜 주었습니까 아니면 밥을 먹여 주었습니까
그런데도, 내 동생을 예수 그 놈에게 나는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라고 원통해 하는 형님의 말씀과 모습을 나에게 들려주었습니다. 저는 그 소리를 들으면서 눈물을 흘렀습니다. 그리고 내 어머님께, 예수님이 나를 위해서 해 주신 일이 밥을 먹여 주고, 옷을 입혀 주고, 공부를 시켜 준 정도가 아닌, 십자가 대속의 사랑, 곧 희생의 죽음이라고 알려 주었습니다. 그 때 제가 어머니께 소개해 드린 말씀은 베드로전서 1장 18-19절이었습니다.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고 한 말씀이었습니다. 그후 그러시던 저의 형님도, 어머니도, 그 가족도 결국 예수를 믿고, 영통가족이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누가 내 모친이며, 누가 내 동생들이냐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예수 새 가족 선언입니다. 예수 새 가족은 ‘누구든지’ 될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우주적 가족을 선언하셨습니다. 예수 새 가족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는 누구든지 될 수 있다고 선언하셨습니다. 바로 그것은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는 자’를 뜻했습니다. 저들은 바로 ‘예수를 좇는 자’들 곧 제자들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 새가족 선언은 혈통 곧 인본주의가 아닌 영통(靈通) 곧 신본주의였습니다. 물질주의적인 배금사상이 아니라, 내적이요, 영적인 구속의 은총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가족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특별히 예수를 믿지 않는 가족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디모데전서 5장 8절에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자니라고 하였습니다. 특별히 부모는 자녀들의 모든 삶을 돌아보는 중에 저들의 영을 돌보는 일에 전력해야 합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가정은 하나님을 창조주 왕으로 모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고백하는 구원신앙에 기초합니다. 그리고 영생 신앙의 소망의 터 위에 굳게 섭니다. 목적으로서의 하나님을 분명히 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제일의 수단으로서 가정이 되어야 합니다. 쾌락의 궁전 속을 거닌다 할지라도/ 가정과 같을 곳을 찾지 못했네/ 비록 비천하지만./ 하늘의 아름다움이 가정에 안겨 있는 우리를 성스럽게 하는 곳/ 세상을 두루 다니며 찾아도 그 같은 곳은 만날 수 없네/ 가정, 가정, 포근하고 행복한 가정!/ 가정과 같은 곳이 없다네!/ 가정과 같은 곳이 없다네!-Jhon Howard Payne(1792-1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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