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한 사람들의 복음 (마11:1-8)
본문
세례 요한은 유대나라의 요단강을 무대로 세례를 베풀며 천국복음 을 증거한 사람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이 요단강 변에서 유대 종교 지도계층이었던 타락한 제사 장의 무리들과 바리새 교인들과 사두개 교인들을 향하여 그리고 안일 과 향락에 도취되어 타락의 깊은 함정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유대 민 중들을 향하여 '회개하라 ! 천국이 가까웠다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 였다 ! 회개치 않고 열매맺지 않으면 찍혀 불에 던지우게 된다'고 외 쳤을 때 들을 줄 알고 캐달을 줄 아는 양심을 가진 사람들은 앞을 다 투어 요한에게로 나와 죄를 회개하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러한 요 한의 소문은 각처로 널리 퍼지게 되었고 궂이 광고를 하고 나팔을 불 어대지 않아도 수많은 사람들이 요단강으로 요단강으로 모여들게 되 었습니다. 유대 민증들이 세례 요한의 칼날같은 설교를 듣기 위해 요단강 변으 로 모여든 데는 크게 세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는 오랫만에 듣는 통쾌한 설교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였던 말라기 선지자의 예언과 설교가 끝난 후 400년 간이나 기나긴 공백기간이 있었습니다. 400년 유대 동안이나 민증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요단강 변에 나타난 세례 요한의 통쾌한 설교는 저들을 층분히 홍분시키고도 남았 습니다.
둘째는 로마의 식민지로 갖은 압제와 설움을 겪고 있던 저들에게 요한의 설교는 희망과 용기를 주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나는 너희들이 기다리는 메시아 그리스도가 아니다. 그 분은 내 뒤 에 오신다. 그 분은 나보다 위대하신 분이다. 나는 그 분의 신발 끈을 풀고 메는 것도 감당치 못한다'라고 요한이 외쳤을 때 유대 민증들은 그 설교에 귀를 기울였고 요한이 말한 그 메시아를 기다리게 되었읍니다. 세째는 당시의 정치적 종교적 상황 속에서 아무도 못하는 대담한 멧세지를 거침없이 그것도 생명을 내걸고 외쳤기 때문이였습니다. 그 러니까 일반민증이 못하는 말을 세례요한은 하였고 저들이 건드리지 못하는 문제를 세례요한은 건드렸던 것입니다. 그러니 요한에게로 사람들이 모여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문제는 거기서 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유대나라의 집권자였던 헤롯왕이 세례요한을 그냥 두질 않았습니다. 교회 역사가인 오세푸스 의 기록에 의하면 헤롯 안티파스왕이 세례 요한을 민중 폭동의 선동자 라는 죄목을 씌워서 사해 동편에 있는 <마카이로스 성> 에 있는 감옥에 투옥시켰다는 것입니다. 요한을 따르던 제자들의 실망은 이만저만이 아니였습니다.
그런데 그와 때를 같이하여 30대의 젊은 청년 예수가 갈릴리에 나타 나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분은 예수였습니다. 요한을 따르던 많은 민중들이 예수에게로 몰리게 되었습니다. '민중이란 손뼉 소리만 나도 흥분하고 트럼팻 소리만 나도 떠들어대는 것'이라고 혹평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민증은 빵과 서커스만 있으면 된다'고 말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요한을 따르던 제자들이 감옥에 있는 요한을 찾아가 30대 청년 예수의 얘기를 들려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분이 메시아인 것이 틀림이 없느냐'고 물었습니다. 여기에 대하여 요한은 자신의 입으로 설명하기 보다는 직접 예수님의 말씀을 자기 제자들에게 들려 주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하고 자기 제자들을 예수님에게로 보내면서 너희는 가서 이렇게 물어보라 '오실 그분이 당신입니까 아니면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려야 합니까'라고 요한의 제자들은 선생이 시킨대로 예수님을 찾아와 물었습니다. '오 실 그분 ! 메시아가 당신입니까, 아니면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만일 당신이 메시아라면 왜 이 민족을 해방시키지 않습니까, 왜 로마 의 정권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왕국을 건설하지 않습니까, 왜 억울하 고 매맞는 의로운 사람들을 석방하지 않습니까' 바로 이러한 질문에 대하여 대답해 주신 것이 오늘 읽은 본문의 말씀입니다. 주님의 대타은 '가서 너희가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라' 기독교는 탁상공론의 종교가 아닙니다. 귀로 듣고 눈으로 보고 심장으로 체험하고 머리로 생각하고 손으로 창조하고 두 발로 뛰는 생활의 종교이며 체험의 종교이며 확실성의 종교입니다. 다른 종교는 구원의 감격이 없습니다. 뜨거운 체험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쌔가 죄와 죽음과 멸망에서 구원을 받는 것이기 때문에 심장이 뛰고 가슴이 설레이고 눈에서 눈물이 쏟아지는 감격적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너희는 가서 이떻게 얘기하라.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등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 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생각해 보십시다 !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 ! 걷지 못하는 사람 !듣지 못하는 사람 ! 문둥병으로 버림받은 사람 ! 죽음 앞에서 떨고 울부짖는 사람 ! 가진 것이 없어서 서럽고 원통하고 고독한 사람들에 게 복음이 전파된다고 요한에게 가서 얘기하라는 말은 위에서 애기 한 바로 그런 부류의 사람들에게 복음이 되고 계시더라는 뜻인 것입니다. 그 어느 시대 어느 사회를 막론하고 소경과 앉은뱅이와 문등이와 귀머거리와 가난한 자와 죽은 시체가 환영받고 대접받고 존경받는 사 회는 없었습니다, 이들 이야말로 천대와 멸시반는 사람들의 대명사나 다름 없었습니다. 나는 지금까지 사랑하는 남편의 시체이기 때문에 1년이나 S년을 침 실에 두었었다는 어느 현대판 열녀의 얘기를 들어본 일이 없습니다. 뿐인가 부부의 애정표현이 적극적이고 여성상위 사회라는 미국사람 들이지만 아내의 시체를 1년이나 2년간 침실에 두었다는 얘길 들어보 질 못했습니다. 어느 부인이 몸살감기로 아누워 있으면서 자기 남편에게 '나 죽 으면 몇일 만에 새 장가 들겠소 ' 남편왈 '일까지 갈 것 있나 나는 산에서 돌아오는 길에 결흔 상담소에 찾아가겠소. 부인왈 '그런 당신 꼴 보기 싫어 검은 머리 파뚜리가 될 때까지 오래오래 살아야겠소. 병들고 가난하고 버림받고 죽음을 선고받고 나면 남는 것이라고 고 독뿐입니다. 이 사람들은 달을 쳐다보아도 슬프고 노래소걷 들어도 서럽고 자리에 누워 천정을 올려다 보아도 거기서 수천 수만 개의 고독이라는 글자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 한 가지 큰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가난하지 않고 버 림받지 않고 병들지 않았는데도 외롭고 고독하고 슬프고 서럽고 절망 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는 점입니다. 나는 요즘 고독이갈 반드시 먹을 것이 없고 입을 것이 없고 몸을 눕힐 침대가 없고 남편이 없고 아내가 없고 보석이 없고 지위가 없고 명예가 없어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실감하고 있습니다. 나는 고독이란 병 증에서도 사치과에 속하는 사치성 병이라는 것을 실감하고 있습니다. 얼마전 아침 5시에 나와서 저녁 12시에야 집에 들 어간다는 택시운전수에게 '고독이라는 것 생각해 본 일 있는가 '고 물었더니 '춥고 배고픈 놈이 고독같은 것 생각할 겨를이 어디 있답니 까'라는 것이 그의 대답이었습니다. 남대문 지하도 입구에서 하루 일거리를 찾고 있는 어느 젊은이의 대답은 마찬가지 였습니다, '고독할 시간 있으면 지게지고 돈벌겠다'는 것이 였습니다. 전도서 5장 12절 말씀을 보면 '노동자는 먹는 것이 많든지 적든지 잠을 달게 자거니와 부자는 배부름으로 자지 못하느니라'고 했읍니다. 나는 이 시간 고독병으로 신음하는 현대인들에게 주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첫째는 고독을 음미하고 고독을 사색하고 고독을 느낄 수 있는 여 유를 갖게 된 것을 감사하십시다.
둘째는 내가 직면하고 있는 불행. 고독, 고난, 시련을 유익한 블행, 유익한 고난, 유익한 고독, 유익한 시련이 되게 하십시오. 어떤 정신의학자는 적어도 선진국가(서구사회) 국민들의 플은 밤마 다 잠 못이루는 고민에 빠져 불면의 밤을 보내고 있으며 그 증에 적어도 플은 수면제를 먹고난 후 잠을 청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날 모든 의약품의 성분 속에는 대부분 신경안정제들이 함유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가령 l0억의 인구가 하루 밤에 2시간씩 불면증과 싸우며 시간을 보냈 다고 하십시다. 그 시간은 가치도 의미도 없는 비생산적인 시간입니다. 하루밤이면 20억 시간이 불면의 고통으로 소비됩니다.
그런데 10억 의 인구가 그 두 시간을 전등을 켜고 일을 하고 책을 읽고 연구하는 데 적극적으로 썼다고 합시다. 하루면 2o억 시간 한 달이면 600억 시 간의 엄청난 시간이 창조와 생산을 위해서 적극적으로 쓰여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엄청난 차이입니까 세째는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는 가난하 고 고특하고 절망에 빠져 있는 사람들의 복음이십니다. 주님 친히 말씀하시기를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불 러 구원하러 왔다'고 하셨고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하러 왔다'고 하셨습니다. 특히 마태복음11장 절을 보면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편히 쉬게 하리라.' 왜 불안한가 왜 고독한가 그것은 나를 완전히 맡길 곳 맡길 데 상을 찾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맡기긴 맡겼는데 믿고 맡기지 못했기 때문에 불안하고 초조한 것입니다. 1820년 S월 24일 미국 뉴욕 주 푸트남(Puham)이라는 곳에서 패니 크로스비(Fanny Crosby) 라는 여자 아이가 사람들의 축복을 받으며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생후 1개월 됐을 때 감기에 걸려 열이 오르고 눈 병이 생기게 됐는데 그 집에 가정부로 있던 사람이 애기 눈에 뜨거운 겨자 파온을 갔다 대준 것이 화근이 되어 장님이 되고 말았다. l년도 채 못되어 그의 아버지인 크로스비가 세상을 떠나버렸습니다.
15살에 뉴욕 주에 있는 맹인학교에 들어가 12년 동안 공부하면서 그 의 문학적 재질이 드러나기 시작하여 시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9살 때 이런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 저는 소경이지만 대신 제 머리와 제 손을 사용해 주세요'라고 그는 일생동안 8, 000여 편의 찬송시를 써 냈습니다. 얼마나 놀라 운 일입니까 그는 자신에게 부딪쳐 온 고난과 시련, 불행과 비극을 최대한으로 선용했고 기회로 삼았던 것입니다. '예수를 내가 주로 믿어 마음의 랑이 잠 자도다. 세상에 있는 내 영흔이 하늘의 영광 누리도다.' 우러는 장님의 찬송을 부르며 은혜를 받고 있지 않습니까 또 그 가 지은 찬송 337장도 은혜로운 찬송입니다. '인애하신 구세주여 내 말 들으사 죄인오라 하실 때에 날 부르소서 주여 주여 내 말 들으사 죄인오라 하실 때에 날 부르소서 영어 찬송가 가사를 보면 'Pass me not, A gende Saviour'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의 뜻은 인애하신 주님, 자비 하신 주님, 너그러우신 주님 나 를 지나쳐 가지 마십시요'라는 뜻입니다. 즉 '나를 두고 그냥가지 마 십시오'입니다. 다시 말하면 '주여 나는 주께서 결단코 나를 그냥 내 버리고 지나쳐 가지 않으실 것을 믿습니다'라는 고백인 것입니다. 주님은 Pass me하지 않으신다. 더럽고 귀찮은 물체를 재빨리 다른 곳으로 넘겨 주려는 것처럼 나를 버리거나 내던지지 않으시고 나를 붙들어 주십니다. 그래서 '어미가 자식을 버리는 한이 있어도 나 여호와는 너희를 버 리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그뿐 입니까 이사야 41장 9절을 보면 '내가 땅끝 에서부터 너를 붙 들며 땅모이 에서부터 너를 부르고 내게l이르기를 너는 나의 종이라 내가 너를 택하고 잃어버리지 아니하였다 하였노라'고 했고 4장 14절 을 보면 '지렁이 같은 야곱아. 내가 너를 도울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비록 지 렁이처럼 무가치하고 낚시밥이나 할 정도의 존재의 나 일찌라 도 하나님은 나를 도와주신다고 했습니다. 얼마나 기쁘고 감사한 소식입니까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시는가 하나님은 나를 정말로 도와주시는가 정말로 나와 같이 계시는가 그렇습니다 !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는 분명히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오라 !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자들아 ! 내가 너희를 편히 쉬게 해 주겠다.'
첫째는 오랫만에 듣는 통쾌한 설교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였던 말라기 선지자의 예언과 설교가 끝난 후 400년 간이나 기나긴 공백기간이 있었습니다. 400년 유대 동안이나 민증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요단강 변에 나타난 세례 요한의 통쾌한 설교는 저들을 층분히 홍분시키고도 남았 습니다.
둘째는 로마의 식민지로 갖은 압제와 설움을 겪고 있던 저들에게 요한의 설교는 희망과 용기를 주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나는 너희들이 기다리는 메시아 그리스도가 아니다. 그 분은 내 뒤 에 오신다. 그 분은 나보다 위대하신 분이다. 나는 그 분의 신발 끈을 풀고 메는 것도 감당치 못한다'라고 요한이 외쳤을 때 유대 민증들은 그 설교에 귀를 기울였고 요한이 말한 그 메시아를 기다리게 되었읍니다. 세째는 당시의 정치적 종교적 상황 속에서 아무도 못하는 대담한 멧세지를 거침없이 그것도 생명을 내걸고 외쳤기 때문이였습니다. 그 러니까 일반민증이 못하는 말을 세례요한은 하였고 저들이 건드리지 못하는 문제를 세례요한은 건드렸던 것입니다. 그러니 요한에게로 사람들이 모여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문제는 거기서 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유대나라의 집권자였던 헤롯왕이 세례요한을 그냥 두질 않았습니다. 교회 역사가인 오세푸스 의 기록에 의하면 헤롯 안티파스왕이 세례 요한을 민중 폭동의 선동자 라는 죄목을 씌워서 사해 동편에 있는 <마카이로스 성> 에 있는 감옥에 투옥시켰다는 것입니다. 요한을 따르던 제자들의 실망은 이만저만이 아니였습니다.
그런데 그와 때를 같이하여 30대의 젊은 청년 예수가 갈릴리에 나타 나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분은 예수였습니다. 요한을 따르던 많은 민중들이 예수에게로 몰리게 되었습니다. '민중이란 손뼉 소리만 나도 흥분하고 트럼팻 소리만 나도 떠들어대는 것'이라고 혹평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민증은 빵과 서커스만 있으면 된다'고 말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요한을 따르던 제자들이 감옥에 있는 요한을 찾아가 30대 청년 예수의 얘기를 들려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분이 메시아인 것이 틀림이 없느냐'고 물었습니다. 여기에 대하여 요한은 자신의 입으로 설명하기 보다는 직접 예수님의 말씀을 자기 제자들에게 들려 주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하고 자기 제자들을 예수님에게로 보내면서 너희는 가서 이렇게 물어보라 '오실 그분이 당신입니까 아니면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려야 합니까'라고 요한의 제자들은 선생이 시킨대로 예수님을 찾아와 물었습니다. '오 실 그분 ! 메시아가 당신입니까, 아니면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만일 당신이 메시아라면 왜 이 민족을 해방시키지 않습니까, 왜 로마 의 정권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왕국을 건설하지 않습니까, 왜 억울하 고 매맞는 의로운 사람들을 석방하지 않습니까' 바로 이러한 질문에 대하여 대답해 주신 것이 오늘 읽은 본문의 말씀입니다. 주님의 대타은 '가서 너희가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라' 기독교는 탁상공론의 종교가 아닙니다. 귀로 듣고 눈으로 보고 심장으로 체험하고 머리로 생각하고 손으로 창조하고 두 발로 뛰는 생활의 종교이며 체험의 종교이며 확실성의 종교입니다. 다른 종교는 구원의 감격이 없습니다. 뜨거운 체험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쌔가 죄와 죽음과 멸망에서 구원을 받는 것이기 때문에 심장이 뛰고 가슴이 설레이고 눈에서 눈물이 쏟아지는 감격적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너희는 가서 이떻게 얘기하라.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등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 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생각해 보십시다 !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 ! 걷지 못하는 사람 !듣지 못하는 사람 ! 문둥병으로 버림받은 사람 ! 죽음 앞에서 떨고 울부짖는 사람 ! 가진 것이 없어서 서럽고 원통하고 고독한 사람들에 게 복음이 전파된다고 요한에게 가서 얘기하라는 말은 위에서 애기 한 바로 그런 부류의 사람들에게 복음이 되고 계시더라는 뜻인 것입니다. 그 어느 시대 어느 사회를 막론하고 소경과 앉은뱅이와 문등이와 귀머거리와 가난한 자와 죽은 시체가 환영받고 대접받고 존경받는 사 회는 없었습니다, 이들 이야말로 천대와 멸시반는 사람들의 대명사나 다름 없었습니다. 나는 지금까지 사랑하는 남편의 시체이기 때문에 1년이나 S년을 침 실에 두었었다는 어느 현대판 열녀의 얘기를 들어본 일이 없습니다. 뿐인가 부부의 애정표현이 적극적이고 여성상위 사회라는 미국사람 들이지만 아내의 시체를 1년이나 2년간 침실에 두었다는 얘길 들어보 질 못했습니다. 어느 부인이 몸살감기로 아누워 있으면서 자기 남편에게 '나 죽 으면 몇일 만에 새 장가 들겠소 ' 남편왈 '일까지 갈 것 있나 나는 산에서 돌아오는 길에 결흔 상담소에 찾아가겠소. 부인왈 '그런 당신 꼴 보기 싫어 검은 머리 파뚜리가 될 때까지 오래오래 살아야겠소. 병들고 가난하고 버림받고 죽음을 선고받고 나면 남는 것이라고 고 독뿐입니다. 이 사람들은 달을 쳐다보아도 슬프고 노래소걷 들어도 서럽고 자리에 누워 천정을 올려다 보아도 거기서 수천 수만 개의 고독이라는 글자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 한 가지 큰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가난하지 않고 버 림받지 않고 병들지 않았는데도 외롭고 고독하고 슬프고 서럽고 절망 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는 점입니다. 나는 요즘 고독이갈 반드시 먹을 것이 없고 입을 것이 없고 몸을 눕힐 침대가 없고 남편이 없고 아내가 없고 보석이 없고 지위가 없고 명예가 없어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실감하고 있습니다. 나는 고독이란 병 증에서도 사치과에 속하는 사치성 병이라는 것을 실감하고 있습니다. 얼마전 아침 5시에 나와서 저녁 12시에야 집에 들 어간다는 택시운전수에게 '고독이라는 것 생각해 본 일 있는가 '고 물었더니 '춥고 배고픈 놈이 고독같은 것 생각할 겨를이 어디 있답니 까'라는 것이 그의 대답이었습니다. 남대문 지하도 입구에서 하루 일거리를 찾고 있는 어느 젊은이의 대답은 마찬가지 였습니다, '고독할 시간 있으면 지게지고 돈벌겠다'는 것이 였습니다. 전도서 5장 12절 말씀을 보면 '노동자는 먹는 것이 많든지 적든지 잠을 달게 자거니와 부자는 배부름으로 자지 못하느니라'고 했읍니다. 나는 이 시간 고독병으로 신음하는 현대인들에게 주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첫째는 고독을 음미하고 고독을 사색하고 고독을 느낄 수 있는 여 유를 갖게 된 것을 감사하십시다.
둘째는 내가 직면하고 있는 불행. 고독, 고난, 시련을 유익한 블행, 유익한 고난, 유익한 고독, 유익한 시련이 되게 하십시오. 어떤 정신의학자는 적어도 선진국가(서구사회) 국민들의 플은 밤마 다 잠 못이루는 고민에 빠져 불면의 밤을 보내고 있으며 그 증에 적어도 플은 수면제를 먹고난 후 잠을 청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날 모든 의약품의 성분 속에는 대부분 신경안정제들이 함유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가령 l0억의 인구가 하루 밤에 2시간씩 불면증과 싸우며 시간을 보냈 다고 하십시다. 그 시간은 가치도 의미도 없는 비생산적인 시간입니다. 하루밤이면 20억 시간이 불면의 고통으로 소비됩니다.
그런데 10억 의 인구가 그 두 시간을 전등을 켜고 일을 하고 책을 읽고 연구하는 데 적극적으로 썼다고 합시다. 하루면 2o억 시간 한 달이면 600억 시 간의 엄청난 시간이 창조와 생산을 위해서 적극적으로 쓰여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엄청난 차이입니까 세째는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는 가난하 고 고특하고 절망에 빠져 있는 사람들의 복음이십니다. 주님 친히 말씀하시기를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불 러 구원하러 왔다'고 하셨고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하러 왔다'고 하셨습니다. 특히 마태복음11장 절을 보면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편히 쉬게 하리라.' 왜 불안한가 왜 고독한가 그것은 나를 완전히 맡길 곳 맡길 데 상을 찾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맡기긴 맡겼는데 믿고 맡기지 못했기 때문에 불안하고 초조한 것입니다. 1820년 S월 24일 미국 뉴욕 주 푸트남(Puham)이라는 곳에서 패니 크로스비(Fanny Crosby) 라는 여자 아이가 사람들의 축복을 받으며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생후 1개월 됐을 때 감기에 걸려 열이 오르고 눈 병이 생기게 됐는데 그 집에 가정부로 있던 사람이 애기 눈에 뜨거운 겨자 파온을 갔다 대준 것이 화근이 되어 장님이 되고 말았다. l년도 채 못되어 그의 아버지인 크로스비가 세상을 떠나버렸습니다.
15살에 뉴욕 주에 있는 맹인학교에 들어가 12년 동안 공부하면서 그 의 문학적 재질이 드러나기 시작하여 시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9살 때 이런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 저는 소경이지만 대신 제 머리와 제 손을 사용해 주세요'라고 그는 일생동안 8, 000여 편의 찬송시를 써 냈습니다. 얼마나 놀라 운 일입니까 그는 자신에게 부딪쳐 온 고난과 시련, 불행과 비극을 최대한으로 선용했고 기회로 삼았던 것입니다. '예수를 내가 주로 믿어 마음의 랑이 잠 자도다. 세상에 있는 내 영흔이 하늘의 영광 누리도다.' 우러는 장님의 찬송을 부르며 은혜를 받고 있지 않습니까 또 그 가 지은 찬송 337장도 은혜로운 찬송입니다. '인애하신 구세주여 내 말 들으사 죄인오라 하실 때에 날 부르소서 주여 주여 내 말 들으사 죄인오라 하실 때에 날 부르소서 영어 찬송가 가사를 보면 'Pass me not, A gende Saviour'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의 뜻은 인애하신 주님, 자비 하신 주님, 너그러우신 주님 나 를 지나쳐 가지 마십시요'라는 뜻입니다. 즉 '나를 두고 그냥가지 마 십시오'입니다. 다시 말하면 '주여 나는 주께서 결단코 나를 그냥 내 버리고 지나쳐 가지 않으실 것을 믿습니다'라는 고백인 것입니다. 주님은 Pass me하지 않으신다. 더럽고 귀찮은 물체를 재빨리 다른 곳으로 넘겨 주려는 것처럼 나를 버리거나 내던지지 않으시고 나를 붙들어 주십니다. 그래서 '어미가 자식을 버리는 한이 있어도 나 여호와는 너희를 버 리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그뿐 입니까 이사야 41장 9절을 보면 '내가 땅끝 에서부터 너를 붙 들며 땅모이 에서부터 너를 부르고 내게l이르기를 너는 나의 종이라 내가 너를 택하고 잃어버리지 아니하였다 하였노라'고 했고 4장 14절 을 보면 '지렁이 같은 야곱아. 내가 너를 도울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비록 지 렁이처럼 무가치하고 낚시밥이나 할 정도의 존재의 나 일찌라 도 하나님은 나를 도와주신다고 했습니다. 얼마나 기쁘고 감사한 소식입니까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시는가 하나님은 나를 정말로 도와주시는가 정말로 나와 같이 계시는가 그렇습니다 !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는 분명히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오라 !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자들아 ! 내가 너희를 편히 쉬게 해 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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