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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스데반의 모습 (행7:54-60)

본문

사람이 짐승과 다른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영원을 사모한다’는 말은 인간만이 장수하고 싶은 욕망이 있다는 말입니다. 빨리 죽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만 영생의 축복을 주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인간들이 하나님 품속에 있을 때에만이 축복이 계속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인간들이 하나님의 품속을 떠나 그 축복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간들에게 이 잃어버린 영생과 천국을 다시 찾아 주시려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독생자이십니다. 그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영생을 얻습니다. 예수님께서 만 인류의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달려 피흘려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 피를 믿기만 하면 죄 씻음을 받습니다. 죽음을 이기고 영생의 축복을 받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우리 인간들은 이 진리의 말씀을 내 것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구원의 진리를 기록한 책이 성경입니다. 우리들은 일생 생활 중에 여러 가지 책을 읽고 견식을 넓혀야 합니다. 전공하는 부분의 서적을 읽고 계속 더 연구해야 합니다. 신문도 읽고 월간 잡지나 베스트셀러도 읽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날마다, 반드시 가까이 할 책은 성경입니다. 18세기에 영국의 감리교 운동의 창시자 영국의 요한 웨슬레는 많은 책을 읽은 사람입니다. 그는 또 많은 저서를 남겼습니다. 그러나 그는 고백 하기를 “나에게는 오직 한권의 책밖에 소중한 것이 없다”고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성경 이라는 것 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경을 가까이 하시기 바랍니다. 매일 매일 읽어야 합니다. 그러면 신령한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7장 전체는 스데반의 설교입니다. 예수는 누구신가 구약에서 예언한 “메시야” 그 분이시라는 것을 설교하였습니다.
그런데 스데반의 설교를 들은 산회드린 공회의원들은 이 귀중한 구원의 진리를 받지 않았습니다. 마음을 꼭 닫아 놓았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설교한 스데반을 돌로 쳐서 죽였습니다. 그들의 자세, 즉 은혜를 거절하는 그들을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가 항상 성령님을 거스려 너희 조상과 같이 너희도 하는도다”(행 7:51-52). 그들의 교만을 책망한 말입니다. 그들은 목에 힘을 주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잘난 체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것은 성령님을 거스리는 행동입니다. “너희 조상들은 선지자 중에 누구를 핍박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저희가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 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의인은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너희는 살인자가 되었다는 책망입니다. 또한 그들은 지금도 살인자가 되려고 마음 문을 닫아놓고 은혜를 거절하고 있습니다. 스데반의 설교를 듣지 않고 있습니다. 말씀을 받지 않고 있습니다. 받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이를 갈고 있습니다. 그리고 스데반을 성밖에 내치고 돌로 쳤습니다.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스데반은 복음을 증거하다가 순교의 제물이 되었습니다만 그들과 그들 자손은 결국 멸망을 받았습니다. 지옥이 그들에게 있습니다.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저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행 7:5
4). ‘이를 갈았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크게 노하였다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마음의 문을 닫은 그들은 은혜를 받기는커녕 큰 소리를 질렀습니다. 스데반 집사를 잡아 성밖으로 내쳤습니다. 돌로 쳤습니다. 죽였습니다. ‘산회드린 공회의원’이란 것은 현재의 국회의원을 말합니다. 국회의원들이 직접 나서서 돌로 쳐서 사람을 죽였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신분은 어떠합니까 그들은 유대인들 중에서도 귀족 중의 귀족입니다. 종교 지도자들입니다. 소위 하나님만 섬긴다는 사람들입니다. 스데반은 깡패나 강도에게 맞아 죽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잘 믿는다는 자들에게 맞아 죽은 것입니다. 스데반의 설교를 듣고 그들을 책망하는 말에 마음이 찔려 그를 죽여버린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에는 책망이 있습니다. 설교에도 책망이 있습니다. 내게 들려오는 책망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책망이 있을 때는 나를 돌아보고 아멘으로 받아야 합니다. 그 때 내게 은혜와 축복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새로운 길을 걸어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장에도 비슷한 상황이 있습니다.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유대인들은 마음에 찔려 ‘우리가 어떻게 할꼬’ 하고 물었습니다. 그 때 베드로는 그들에게 회개를 촉구했습니다.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님을 선물로 받으리라”(행 2:38). 베드로의 이 말에
3,000명이 회개하고 세례를 받고 주께 돌아왔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3,000명 전부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것은 아닙니다. 실제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자는 로마 군인이고, 빌라도이고, 가야바 대제사장이고, 가룟 유다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그들 군중 전부를 보고 “너희가 예수님을 못박았다”고 책망했습니다. 그랬더니 회개하고 돌아온 자는
3,000명이었습니다. 돌아온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천국의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 우리는 은혜를 받고 살아야 합니다. 은혜를 받지 못하면 우리의 영혼이 죽습니다. 내 영혼이 죽으면 나도 모르는 사이 불평과 불만이 생겨납니다. 그러면 모든 것이 불편하게 됩니다. 형통해야 할 일이 불통하게 되고, 평안을 얻지 못합니다. 산헤드린 공회의원들이 그랬습니다.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은혜를 거부하여 예수를 증거하는 스데반을 돌로 쳐죽이는 살인자가 되었습니다. 구원받지 못한 자가 되었습니다. 그들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지옥입니다. 멸망입니다. 심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러한 현상이 우리에게는 없습니까 현대의 지성인이라는 자들은 은혜받기를 거부합니다. 이만큼 믿어야겠다는 자기 나름대로의 선(繕)을 만들어 놓고 그 만큼만의 신앙 생활을 합니다. 성경대로가 아닙니다. 설교 말씀에서 가르친 대로가 아닙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일에서는 구경꾼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오십니까 은혜 받는 증거입니다. 그 말씀대로 봉사하고 생활하려고 노력하십시오. 주님께서 계속 은혜를 주실 것입니다. 다음 본문이 주는 은혜는 돌에 맞아 죽은 스데반의 모습이 주는 교훈입니다. 그는 복음을 증거하다가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죽는 모습은 너무 귀합니다. 성경에서 인간은 한 번은 죽는다고 말해 줍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는 정한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라”(히 9:27). 성경대로 인간들은 모두 죽습니다. 그것은 성경이 아니더라도 다 알고 있는 진리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날짜를 우리는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인간들은 미련하게 인생을 살 때가 너무 많습니다. 자기는 죽지 않을 줄 알고 사는 사람이 참 많습니다. 그래서 탐욕에 빠집니다. 싸우고 삽니다. 만일 우리의 생전에 예수님이 재림 주로 오신다면 죽음을 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만 그러나 그 날도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그러기에 항상 우리는 죽을 준비를 해야 합니다. 잘 죽어야 합니다. 깨끗하게 죽어야 합니다. 오늘 스데반의 죽음은 잘 죽은 죽음입니다. 그는 복음을 증거하다가 죽었기 때문입니다. 천국 가는 사람의 죽는 모습입니다. 이제 그의 죽는 모습을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그는 죽을 때 하늘 문이 열리는 것을 보았습니다(행 7:5
5). 하나님은 필요하실 때 하늘 문을 열어 주셨습니다. 선지자 에스겔에게(겔 1:1), 예수님께(마 3:16), 사도 베드로에게(행 10:11), 사도 요한에게(계 19:11), 그리고 본문의 스데반에게 하늘 문을 열어 주셨습니다. 하늘 문이 열릴 때 스데반은 먼저 예수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 계신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앉아 계신 것이 아니고 서서 계셨습니다. 스데반을 환영하는 모습입니다. 순교자는 주님께서 기쁘시게 그 영혼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로마 네로 황제 때 예수를 믿으면 죽이고 안 믿는다고 하면 살려주는 엄한 벌을 시행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사형을 집행하는 자 앞에서 예수를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한 형관이 사형을 집행하는데 하나님께서 그 형관의 영안을 열어주사 그가 목을 치는 성도들의 영혼을 천사가 와서 그 영혼에 생명의 면류관을 씌우고 하나님의 보좌 우편으로 인도해 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것을 본 형관은 믿는 자의 마지막이 너무 귀하고 아름다워 보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형관이 또 어느 한 성도의 목을 치려는 순간 그 성도는 겁을 내면서 예수를 부인하며 살려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그 형관은 “그대가 내 옷을 입고 내 목을 치라. 나는 오늘부터 예수를 믿고 기쁘게 순교하겠노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예수를 영접하고 기쁘게 순교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도 신령한 영안이 활짝 열리는 축복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땅에 살지만 하늘을 보고 살아가는 은혜가 있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 스데반은 죽을 때 그의 영혼을 주님께 부탁드렸습니다(행 7:59).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하신 마지막 기도와 비슷한 기도를 스데반도 하였습니다. 그 공회의원들은 스데반의 육은 죽일 수 있었지만 그의 영혼은 죽일 수가 없었습니다. 생명의 주인은 주 예수님이십니다. 스데반은 그 주인께 그의 영혼을 부탁드린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생명은 누구의 것입니까 내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내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주 예수님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 의지해야 합니다. 주님 뜻대로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천국의 축복이 주어지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셋째, 스데반은 죽을 때 용서의 기도를 드렸습니다(행 7:60). 너무나 위대한 기도입니다. 목숨이 끊어지는 그 시간 원수들을 위하여 기도한 것입니다. 이 기도도 예수님의 기도와 같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셔서 제일 처음 이 기도를 드렸습니다. 주님께서 용서해 주시옵소서 하는 깊은 뜻이 있습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원수를 지고 이 세상을 떠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엡 4:25). 인간인 이상 대인 관계에서 간혹 분을 낼 수 있습니다. 인간들의 생각과 뜻이 다 같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분은 품고 있으면 안됩니다. 그것은 교만입니다. 나만 옳다는 것입니다. 나만 잘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귀가 틈을 탑니다. 그러게 되면 간단한 것이 복잡해집니다. 커집니다. 문제가 생깁니다. 스데반은 마지막으로 자기를 위하여 돌로 치는 자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내가 인생을 살아갈 때 내가 하는 일 전부가 옳을 수는 없습니다. 전부 잘할 수도 없습니다. 내가 잘못할 수도 있습니다. 스데반의 기도에는 그런 의미도 있습니다. ‘내가 이들에게 잘못한 것이 있는 지도 모릅니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용서해 주십시오’ 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멋있는 그리스도인의 최후입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도 스데반과 같이 멋있는 마지막을 항상 준비하십시다. 우리에게도 오메가 포인트(Omega Point, 최후)가 있습니다. 이것을 인정하고 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사랑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용서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어떤 신문 기자가 무디를 인터뷰했을 때, 무디는 자기를 다음과 같이 소개했습니다. “나는 1837년생입니다. 영적으로는 1856년 생입니다. 육신으로는 언제 죽을 지 모릅니다. 그러나 만약에 신문에 내가 죽었다는 기사가 나면 당신은 믿지 마십시오. 나는 죽은 것이 아니고 아버지께로 갔으니 영원히 살고 있다고 믿으십시오.” 이것은 천국을 확신하는 그리스도인의 고백입니다. 이 고백이 우리에게도 있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오늘 이 은혜와 축복이 있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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