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병 (하) (행3:1-10)
본문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 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고 …… 오전 본문에서 이런 네 가지 종류의 인물들이 기록되어 있는 것을 증거했습니다.
첫째는 나면서 앉은뱅이 된 사람이요,
둘째는 나면서 앉 은뱅이 된 사람을 날마다 구걸하기 위하여 성전 미문에 메어다가 놓는 사람들이요,
셋째는 기도하러 갔다가 이 병신에게 예수님의 이름으로 병이 낫도록 역사한 사도들이요,
넷째는 앉은뱅이가 병 나은 것을 보고 기이히 여기며 놀란 그 사람들입니다. 이 네 가지 종류의 인물은 우리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인물 전부라고 할 수 있고 또 전인류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오후에 이 말씀을 또 증거하게 되는 것은, 제가 증거하는 것도 부족하지마는 이 증거를 듣는 사람들의 마음도 많이 완패해 있기 때문에 다시 증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는 도리를 그저 성경을 망라해 놓고 연구하려 하면 그 강령을 잡기가 어렵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아주 형식적인 역사 계시 를 통해서 우리에게 교훈해 주신 일이 많습니다. 마지막 예언서 요한계시록은 거의가 다 상징적으로 되어 있습니다. 기억하기 쉽고, 생각하기 쉽고, 깨닫기 쉽도록 하기 위해서 하신 것이 요, 성신의 감화가 없으면 탈선되어서 삐뚤어지고 잘못 깨닫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이렇게 예언서를 기록하신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비유가 아니면, 또 형식이 아니면 계시하시지를 별로이 않았던 것입니다. 기독자의 행복은
1. 제일 행복 오전에도 증거한 것처럼 이 네가지 종류의 인물 중에 제일 복된 사람이 누구냐 자기도 제일 복되고 남도 복되게 하고 주님도 기쁘시게 한 이 네 종류의 인물 중에 제일 행복된 사람은 나면서 앉은뱅이 된 그 사람이었습니다. 나은 그것을 인해서 가졌던 행복이 제일의 행복이었 습니다. 기독교에는 별별 기쁨도 있고 별별 축복이 있습니다. 그 종류의 수가 심히 많습니다. 그러나 변함 없는 행복과 가장 뛰어난 기독자의 행복은
첫째가 앉은뱅이에게 임한 것과 같은 이 앉은뱅이의 행복이 기독교의 제일된 행복인 것입니다. 자기가 어디까지 변화가 되고 어디까지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서 지 사 충성을 한다 할지라도 그 충성만으로 기독자의 제일되는 행복은 가 지지를 못합니다. 만일 자기가 어떤 성자가 되고 성녀가 되었다 할지라 도 그가 이미 성자 성녀가 된 성자 성녀의 그 권능을 가지고 주를 위해 서 온갖 봉사와 희생을 한다 할지라도 그 속에 이 병을 고치는 그 역사 가 없다고 하면 그는 참된 기독자의 행복을 붙들지 못하고 놓친 사람입니다. 절대로 세상을 능가할 만한 그런 행복은 그 본인에게는 없습니다. 모든 선지자들이나 사도들이나 역사에 성도들이 자타를 예수님으로 인하여 고치려고 하는 그 욕망과 그 성질의 역사와 그 결과가 있을 때 에만 참된 기독자의 행복을 갖추었던 것입니다. 그 외에는 갖추지를 못 했습니다. 여기 네 인물 있는 중에도
첫째는 앉은뱅이가 제일의 쾌락을 그때 가졌고 또 그에게 욕망과 희망은 양양했습니다.
2.둘째 행복 둘째로는 베드로와 요한 사도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다른 사람의 병든 것을 성하게 고쳐 주려는 그 욕망과 그 노력의 결과 로 얻어진 쾌락과 기쁨을 가졌습니다. 그것이 주님에게도 기쁨이 되고, 자신에게도 기쁨이 되고, 금생과 내세에 기쁨이 되었습니다. 만일 이것이 아닌 세상이 좋아하는 다른 운동을 어떻게 힘있게 했다 할 지라도, 모든 면으로 구비한 성공을 했다 할지라도 그 중심에 예수님으 로 말미암아 치료하려는 그 욕망과 그 운동과 그 결과가 이루어지지 않 았으면 그는 결단코 쾌락을 취하지 못했을 것이요, 반드시 무엇인가 갈 증과 가책을 가지고 하나의 고통을 그가 만나게 되었을 것입니다. 여기에서 기독 신자라면 언제나 예수님으로 인하여 자기에게 있는 자기를 고치든지 다른 사람들 고치든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인간을 고쳐 보려는 요 역사 요것 외에는 세상에서 기독자의 쾌락은 없다는 것 을 알아야 됩니다. 행복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이런 것 저런 것 여러가지 역사가 있지만 만일 그 사람이 복음 운동 을 위해서 온갖 봉사와 희생의 역사를 했다 할지라도 그 사람이 자기가 경영하고 희생하고 봉사한 것이 예수님의 은혜로 인간을 고쳐 보려는 그 목적에서 그를 위해서 한 것이었음을 만일 그 사람이 잊어 버렸 때 에는 즉시 그에게 암흑이 와서 갑갑하고 답답함이 그에게 있을 것입니다. 그런 생활을 했다 할지라도. 그 사람이 되찾는 것은, 내가 이렇게 한 것이 세상과 세상의 무엇을 위함이 아니요, 이는 내가 그리스도를 표본으로 하여 나를 고치기 위한 일이며, 그렇지 않으면 내가 형제를 예수님의 공로를 인하여 고치기 위 함이라는 이 사실 이것 때문에 했다는 것을 자신이 다시 발견했을 때에 잊어 버렸던 행복은 되찾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기독자가 이 세상에 있어서 예수님의 대속으로 치료 해야 합니다.
온갖 사죄로 치료하고, 칭의로 치료하고, 화친으로 치료 해야 합니다. 예수님으로 인하여 치료해야 합니다. 내가 온 것은 병든 자를 고치기 위해서 왔고 의인 때문에 오지 않았다고 말씀하신 대로 이 것이 복음 역사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것을 굳게 잡읍시다! 예수 믿는 사람은 예수님을 아무리 부르고, 아무리 찬양하고, 어떻게 무엇으로 봉사할지라도 그 중심이 예수님이 피흘려 구속하신 이 인간의 병든 것을 고쳐 보려는 이 운동이 아니라면 그에게는 행복의 영감은 가 지를 않습니다. 구걸만 도와주는 봉사자 오후에 봉독한 말씀에는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보고 기이히 여기고 주목을 하고 놀랐습니다. 왜 밤낮 업혀 다니고, 밤낮 메여 다니고, 자 기의 몸과 같이, 자기 수족같이 그렇게 밀접하고 친밀한 그 사람들이 다 그 자리 있었겠지만 작별을 하고 베드로와 요한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고 뛰고 굴려 인생의 행복을 누리면서 기뻐 즐거워하면서 그에게 소속한 사람들이 되어졌습니다. 그것을 많은 사람 들은 보고 기이히 여기면서 놀랐습니다. 땅위에서는 우리가 거기서 거기입니다. 어쩌면 예수님의 이름으로 자타를 고쳐서 복되게 하려는 이것도 될 수 있고, 잘못하면 병신을 병 신 더 되게 해서, 병신 놀음 해서 얻는 수입 소망하고, 병신을 이용하는 그런 비참한 자도 되기 쉬운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 진리와 영감으로 그 사람이 회개해서 구속을 바로 입고 구속주를 찬양하는, 참 만유의 주님 앞에서 주님이 기뻐하시는 의인이 됨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으로 영육이 행복되기를 소망하 지 않고, 도리어 원죄와 본죄로 죽은 원죄운동 본죄운동, 마치 병신 중 에도 심한 병신이면 구걸하기에 권위가 더 있고 많은 사람에게서 유익 을 더보는 것처럼, 인간이 인간을 벗어나서 원죄 뭉텅이가 되고, 본죄 뭉텅이가 되어서 타락한 중에 제일 많이 타락한 자라면 그런 원죄와 본 죄의 세력을 가지고 처세하는 동안 인간에게 착취하고, 인간에게 봉사 나 희생이라 하는 것은 하지를 않는 것입니다.
어릴 때부터 가르치는 것이 부패성 가르치고, 대학을 보내는 것도 부패성 가르치고, 어떻게 하든지 하나님을 떠난 이 장기로, 이것의 성장 으로, 이것의 강장으로 가지고 모든 사람을 이용하고, 모든 사람에게서 유익을 입으려는 그것이 정말로 양심을 가지고 생각하면, 병신이 모든 사람들에게 구걸하는, 병신 팔아 가지고 돈벌이 하는, 병신 이용해 가지 고 자기 유익하게 하는 그것이나 조금도 다른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잘못하면 인간의 원죄 본죄의 부패성, 하나님을 멀 리하는 부패성, 이것을 길러 가지고 자기의 처세 기능을 삼고 그를 행복되게 하려 하여 이 면에 주력하는 사람되기 쉽습니다. 병신 메어다 놓는 봉사자가 되기 쉽습니다. 실은 온 세상을 이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이 진리에서 보이는 대로 이대로인 것입니다. 그 사람이 점점 병신이 더 되어 갈 때에는, 병이 짙어져 갈 때에는 메고 온 그 사람들이 저에게 가장 필요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병든 병이 예수님으로 인하여 낫게 되고 나니까 그 사람들은 상관없는 사람이요, 자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참 비참한 자 된 거기에서 구출한 베드로와 요한을 붙들고 그 뒤를 따랐습니다. 인생의 종말이 이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자기의 사랑하는 가까운 사람을 이렇게 저렇게 땅의 것으로 행복되게 하려고 하나 홍포입은 부자처럼 마지막에 눈이 밝아 만물의 진상과 하나님의 법도를 깨닫는 그때는 원수는 바로 자기가 정 말 원수라 하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자기 아니면 못 살겠다고 하는 자기에게 속한 사람이 그때는 자기로 더불어 원수가 될런지 모릅니다. 다 잊어버려질 것입니다. 앉은뱅이와 베드로와 요한 셋이 하나 되었습니다. 그는 베드로와 요한의 사람이 되었고 결단코 앉은뱅이를 업어다가, 메어다 놓은 사람 들의 사람은 안 되었습니다. 이 병신이 병이 나아서, 남한테 병 팔아 가 지고 남에게 착취하려는 구걸 행위 이것을 안 하는 참 깨끗한 사람, 복 된 사람, 정상적인 사람이 됐을 때에 메어다 놓은 사람들은 그 행복을 감사하지 않고 도리어 불평했을 것입니다.
왜 저희의 업이 끊어졌기 때문에. 인간병 치료에서만 기독자의 행복이 오늘도 그런 것을 많이 봅니다. 2천 마리 돼지떼가 바다에서 몰사하 니까, 사람은 귀신에게서 놓여서 구출됐으니, 돼지 2천 마리보다 분명히 사람이 귀하건만 그때 가다라지방의 사람들은 예수님이 떠나기를 원했 다는 그것을 우리에게 보인 것은 인생이 물질과 인간의 가치를 혼돈해 서 인간보다 물질을 귀하게 여긴다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자주 봅니다. 얼마 전에도 자기 딸이 교회를 다닌다 고 머리를 깎아 버리고 때린 후에 교회로 찾아 와서 난동을 부리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왜 자기 딸이 사람 된다고, 자기 자식이 사람 된다 고 때리는 것입니다. 이제는 사람 같잖은 행위를 벗어나서 인간병을 고쳐서 사람 노릇 해 보겠다 한다고, 욕망대로 가장 악인이 되어서 세상을 마구 악어처럼 삼켜야 부모 속이 풀릴 터인데 그렇게 하지 않는다 고 … 이놈아 네가 이렇게 이래 가지고 이 악하고 무정한 세상에서 어떻 게 세상을 살아 나갈 것이라고 네가 이런 어리석은 걸음을 걷느냐 하면서 그 부모는 자식을 사랑한다 하여서 그와 같이 하는 것을 많이 봤습니다. 그것이 주일을 지켜, 계명을 지켜, 하나님을 경외해, 이제는 인간에게 악을 행치 않고 누를 끼치지 않으려고 애를 쓰고, 악을 악으 로 갚지 않으려고 애를 쓴다고 해서 쫓겨난 사람들이 얼마나 많으며 버 림 받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그것이 사람이 되어 보겠다고, 어린 것이 잠을 깨서 새벽기도를 나 온다, 성경을 본다 하니까 부모는 자기 아이가 미쳐서 사람 버렸다고 끌고 가서, -옛날에는 공부밖에 모르고, 땅에 있는 인간 지식, 죽은 지 식, 죽게 하는 지식 이것밖에 모르고 여기에 전심 전력 기울였고 인간 노릇이나 그런 것은 말하지 않았는데, 무슨 의인처럼 인간 노릇해 보 겠다고 뭐 어째 보겠다고 한다고 해 가지고 박해를 당하는 그런 꼴을 많이 봅니다. 부모가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공부에 방해된다고 자기 아이가 새벽예배 참석한다며 깨워달라고 부탁을 하는데도 부모끼리만 그냥 가 버립니다. 그래도 공부할 시간이 되면 딱딱 깨워 줍니다. 이것이 다 무 엇 때문에 병신 만들어 가지고 인생에게 구걸하는 자, 구걸 잘 하는 자 되도록 하기 위해서, 원죄와 본죄가 강해야 잔인 무도한 세상에서 밟히지 않고 살 수 있다고 해서 하는 그것이 곧 그것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계시의 말씀은 네가 기독자라면 하나 하나의 언행심 사 움직임의 그 중심이, 예수님으로 인하여서 너를 고치든지 다른 사람 을 고치든지 고치는 역사와 고친 결과가 없는 거기에는 기독자의 기쁨 은 없다. 네가 어디까지 성자가 되었다 할지라도 거기에서 고치고 자 하는 욕망과 고치고자 하는 역사와 고쳐진 그것이 있었으면 너는 성 자의 행복을 가졌지만, 그런 것 없이 있는 것으로 만족하고, 이만하면 되었다 하고 병을 발견 못하고 고치고자 하는 욕망, 고치고자 하는 노 력, 새로 고쳐진 부분 이것이 없으면 기독자로서는 지상의 행복은 없다. 쾌락은 없다 하는 것을 여기에서 굳게 잡아야 할 것입니다. 이것 없이 땀만 흘리면 메어다 놓는 것처럼 어떻게 해도, 마지막에 그 사람이 죽을 때라도 정신이 돌아올 때에는 그 부모 형제가 해 준 봉 사나 희생이나 노력에 대해서는 감탄이라 하는 것은 결단코 없습니다.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은반회수 라 은혜를 변해서 원수로 갚는다 하는 말에 서 정말로 은혜라면 그 은혜의 대가를 사은하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의 역사인데, 왜 무지한 자기로서는 참 은혜를 베풀었다고 했지만 실상은 인생을 몰아다가 죽이는 것밖에 안되고 말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효를 못하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이 사은을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오. 사은이 아니요 죽이게 한 그것이기 때문에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정도에 있는 사람이든지 기독자가 예수의 이름으로 자타를 고쳐 보려는 이 욕망과 노력과 고친 결과가 없으면 땅 위에서 기독자의 행복은 없으며, 이것을 등한시하고 원죄와 본죄의 뱀 지식을 많이 넣어 줘 가지고 이 부패한 세상살이를 다른 사람보다 좀 더 부패해짐으로, 소부패를 대부패가 되어서 삼킬 수 있는 이런 종류의 것으로 자기에게 속한 자를 위해서 봉사했다면 언젠가는 그 사람에게 배척을 당할 것이요, 그 사람은 자기와는 상관 없이 관계가 끊어진다는 것을 여기서 말씀했습니다. 우리의 생애는 이런 참 어두운 생애가 많은 우리들입니다. 거기서 수많은 사람들이 이 병나은 자 보고 놀라고 기이히 여겨서 쭐쭐 따라다녔지만 저희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에 과 부가 많았지만 사렙다 과부에게만 찾아갔습니다. 문둥이가 많았지만 나 아만에게만 하나님의 치능이 갔다 말씀한 것은, 수많은 사람들이 이렇 게 하나님의 권능으로 병 나은 그것 보고 기이히 여기고 놀라면서 거게 주목하고 따라 다녔지만, 자신들은 예수의 이름으로 병 낫게 할 욕망도 소원도 없었기 때문에 다 버림을 받은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가 주여 주여 하면서 믿는다고 하지만 예수님의 인간 치 능, 인간을 고치는 능력이 자기와 상관 없는 이런 사람으로, 은총을 입는 기독자를 그저 구경이나 하고 이렇게 다니는 자 되기 쉽습니다. 인간을 고치는 운동에만
그러므로 오늘 오후에 말씀을 다시 증거하는 것은 기독자는 예수님 으로 인하여 고칠 것을 발견해야 되고, 또 고치는 욕망과 노력을 해야 되고, 실지로 고쳐짐이 있는 것-사도 요한이 밧모섬에 가기 전에 그가 가지지 못했던 행복을 지상의 행복을 밧모섬에서 예수님과 자기와 다른 면을 발견하고, 달음질 쳐도 못 간다고 기절한 거기에서 이제까지 얻지 못했던 행복을 그가 발견했을 것이요, 욕망했을 것이요, 다소나마 그는 죽는 날까지 권태나지 않고, 피곤치 않고, 그는 배부른 자와 같이 해이 해지지 아니하고, 갈급해서 생생한 생기에서 죽는 날까지는 그는 살았 을 것입니다. 인간을 고치는 운동 외에는 아무리 봉사해도 마지막에는 사람을 뺏 깁니다. 자기 사람 안됩니다. 마지막에는 원수가 될 것이오. 어떤 것으 로 봉사해도 다 그렇습니다. 세상이 이렇게 배은의 세상이라 불효의 세상이라 하지만 그것이 성경대로는 원리입니다.
첫째는 나면서 앉은뱅이 된 사람이요,
둘째는 나면서 앉 은뱅이 된 사람을 날마다 구걸하기 위하여 성전 미문에 메어다가 놓는 사람들이요,
셋째는 기도하러 갔다가 이 병신에게 예수님의 이름으로 병이 낫도록 역사한 사도들이요,
넷째는 앉은뱅이가 병 나은 것을 보고 기이히 여기며 놀란 그 사람들입니다. 이 네 가지 종류의 인물은 우리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인물 전부라고 할 수 있고 또 전인류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오후에 이 말씀을 또 증거하게 되는 것은, 제가 증거하는 것도 부족하지마는 이 증거를 듣는 사람들의 마음도 많이 완패해 있기 때문에 다시 증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는 도리를 그저 성경을 망라해 놓고 연구하려 하면 그 강령을 잡기가 어렵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아주 형식적인 역사 계시 를 통해서 우리에게 교훈해 주신 일이 많습니다. 마지막 예언서 요한계시록은 거의가 다 상징적으로 되어 있습니다. 기억하기 쉽고, 생각하기 쉽고, 깨닫기 쉽도록 하기 위해서 하신 것이 요, 성신의 감화가 없으면 탈선되어서 삐뚤어지고 잘못 깨닫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이렇게 예언서를 기록하신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비유가 아니면, 또 형식이 아니면 계시하시지를 별로이 않았던 것입니다. 기독자의 행복은
1. 제일 행복 오전에도 증거한 것처럼 이 네가지 종류의 인물 중에 제일 복된 사람이 누구냐 자기도 제일 복되고 남도 복되게 하고 주님도 기쁘시게 한 이 네 종류의 인물 중에 제일 행복된 사람은 나면서 앉은뱅이 된 그 사람이었습니다. 나은 그것을 인해서 가졌던 행복이 제일의 행복이었 습니다. 기독교에는 별별 기쁨도 있고 별별 축복이 있습니다. 그 종류의 수가 심히 많습니다. 그러나 변함 없는 행복과 가장 뛰어난 기독자의 행복은
첫째가 앉은뱅이에게 임한 것과 같은 이 앉은뱅이의 행복이 기독교의 제일된 행복인 것입니다. 자기가 어디까지 변화가 되고 어디까지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서 지 사 충성을 한다 할지라도 그 충성만으로 기독자의 제일되는 행복은 가 지지를 못합니다. 만일 자기가 어떤 성자가 되고 성녀가 되었다 할지라 도 그가 이미 성자 성녀가 된 성자 성녀의 그 권능을 가지고 주를 위해 서 온갖 봉사와 희생을 한다 할지라도 그 속에 이 병을 고치는 그 역사 가 없다고 하면 그는 참된 기독자의 행복을 붙들지 못하고 놓친 사람입니다. 절대로 세상을 능가할 만한 그런 행복은 그 본인에게는 없습니다. 모든 선지자들이나 사도들이나 역사에 성도들이 자타를 예수님으로 인하여 고치려고 하는 그 욕망과 그 성질의 역사와 그 결과가 있을 때 에만 참된 기독자의 행복을 갖추었던 것입니다. 그 외에는 갖추지를 못 했습니다. 여기 네 인물 있는 중에도
첫째는 앉은뱅이가 제일의 쾌락을 그때 가졌고 또 그에게 욕망과 희망은 양양했습니다.
2.둘째 행복 둘째로는 베드로와 요한 사도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다른 사람의 병든 것을 성하게 고쳐 주려는 그 욕망과 그 노력의 결과 로 얻어진 쾌락과 기쁨을 가졌습니다. 그것이 주님에게도 기쁨이 되고, 자신에게도 기쁨이 되고, 금생과 내세에 기쁨이 되었습니다. 만일 이것이 아닌 세상이 좋아하는 다른 운동을 어떻게 힘있게 했다 할 지라도, 모든 면으로 구비한 성공을 했다 할지라도 그 중심에 예수님으 로 말미암아 치료하려는 그 욕망과 그 운동과 그 결과가 이루어지지 않 았으면 그는 결단코 쾌락을 취하지 못했을 것이요, 반드시 무엇인가 갈 증과 가책을 가지고 하나의 고통을 그가 만나게 되었을 것입니다. 여기에서 기독 신자라면 언제나 예수님으로 인하여 자기에게 있는 자기를 고치든지 다른 사람들 고치든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인간을 고쳐 보려는 요 역사 요것 외에는 세상에서 기독자의 쾌락은 없다는 것 을 알아야 됩니다. 행복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이런 것 저런 것 여러가지 역사가 있지만 만일 그 사람이 복음 운동 을 위해서 온갖 봉사와 희생의 역사를 했다 할지라도 그 사람이 자기가 경영하고 희생하고 봉사한 것이 예수님의 은혜로 인간을 고쳐 보려는 그 목적에서 그를 위해서 한 것이었음을 만일 그 사람이 잊어 버렸 때 에는 즉시 그에게 암흑이 와서 갑갑하고 답답함이 그에게 있을 것입니다. 그런 생활을 했다 할지라도. 그 사람이 되찾는 것은, 내가 이렇게 한 것이 세상과 세상의 무엇을 위함이 아니요, 이는 내가 그리스도를 표본으로 하여 나를 고치기 위한 일이며, 그렇지 않으면 내가 형제를 예수님의 공로를 인하여 고치기 위 함이라는 이 사실 이것 때문에 했다는 것을 자신이 다시 발견했을 때에 잊어 버렸던 행복은 되찾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기독자가 이 세상에 있어서 예수님의 대속으로 치료 해야 합니다.
온갖 사죄로 치료하고, 칭의로 치료하고, 화친으로 치료 해야 합니다. 예수님으로 인하여 치료해야 합니다. 내가 온 것은 병든 자를 고치기 위해서 왔고 의인 때문에 오지 않았다고 말씀하신 대로 이 것이 복음 역사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것을 굳게 잡읍시다! 예수 믿는 사람은 예수님을 아무리 부르고, 아무리 찬양하고, 어떻게 무엇으로 봉사할지라도 그 중심이 예수님이 피흘려 구속하신 이 인간의 병든 것을 고쳐 보려는 이 운동이 아니라면 그에게는 행복의 영감은 가 지를 않습니다. 구걸만 도와주는 봉사자 오후에 봉독한 말씀에는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보고 기이히 여기고 주목을 하고 놀랐습니다. 왜 밤낮 업혀 다니고, 밤낮 메여 다니고, 자 기의 몸과 같이, 자기 수족같이 그렇게 밀접하고 친밀한 그 사람들이 다 그 자리 있었겠지만 작별을 하고 베드로와 요한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고 뛰고 굴려 인생의 행복을 누리면서 기뻐 즐거워하면서 그에게 소속한 사람들이 되어졌습니다. 그것을 많은 사람 들은 보고 기이히 여기면서 놀랐습니다. 땅위에서는 우리가 거기서 거기입니다. 어쩌면 예수님의 이름으로 자타를 고쳐서 복되게 하려는 이것도 될 수 있고, 잘못하면 병신을 병 신 더 되게 해서, 병신 놀음 해서 얻는 수입 소망하고, 병신을 이용하는 그런 비참한 자도 되기 쉬운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 진리와 영감으로 그 사람이 회개해서 구속을 바로 입고 구속주를 찬양하는, 참 만유의 주님 앞에서 주님이 기뻐하시는 의인이 됨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으로 영육이 행복되기를 소망하 지 않고, 도리어 원죄와 본죄로 죽은 원죄운동 본죄운동, 마치 병신 중 에도 심한 병신이면 구걸하기에 권위가 더 있고 많은 사람에게서 유익 을 더보는 것처럼, 인간이 인간을 벗어나서 원죄 뭉텅이가 되고, 본죄 뭉텅이가 되어서 타락한 중에 제일 많이 타락한 자라면 그런 원죄와 본 죄의 세력을 가지고 처세하는 동안 인간에게 착취하고, 인간에게 봉사 나 희생이라 하는 것은 하지를 않는 것입니다.
어릴 때부터 가르치는 것이 부패성 가르치고, 대학을 보내는 것도 부패성 가르치고, 어떻게 하든지 하나님을 떠난 이 장기로, 이것의 성장 으로, 이것의 강장으로 가지고 모든 사람을 이용하고, 모든 사람에게서 유익을 입으려는 그것이 정말로 양심을 가지고 생각하면, 병신이 모든 사람들에게 구걸하는, 병신 팔아 가지고 돈벌이 하는, 병신 이용해 가지 고 자기 유익하게 하는 그것이나 조금도 다른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잘못하면 인간의 원죄 본죄의 부패성, 하나님을 멀 리하는 부패성, 이것을 길러 가지고 자기의 처세 기능을 삼고 그를 행복되게 하려 하여 이 면에 주력하는 사람되기 쉽습니다. 병신 메어다 놓는 봉사자가 되기 쉽습니다. 실은 온 세상을 이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이 진리에서 보이는 대로 이대로인 것입니다. 그 사람이 점점 병신이 더 되어 갈 때에는, 병이 짙어져 갈 때에는 메고 온 그 사람들이 저에게 가장 필요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병든 병이 예수님으로 인하여 낫게 되고 나니까 그 사람들은 상관없는 사람이요, 자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참 비참한 자 된 거기에서 구출한 베드로와 요한을 붙들고 그 뒤를 따랐습니다. 인생의 종말이 이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자기의 사랑하는 가까운 사람을 이렇게 저렇게 땅의 것으로 행복되게 하려고 하나 홍포입은 부자처럼 마지막에 눈이 밝아 만물의 진상과 하나님의 법도를 깨닫는 그때는 원수는 바로 자기가 정 말 원수라 하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자기 아니면 못 살겠다고 하는 자기에게 속한 사람이 그때는 자기로 더불어 원수가 될런지 모릅니다. 다 잊어버려질 것입니다. 앉은뱅이와 베드로와 요한 셋이 하나 되었습니다. 그는 베드로와 요한의 사람이 되었고 결단코 앉은뱅이를 업어다가, 메어다 놓은 사람 들의 사람은 안 되었습니다. 이 병신이 병이 나아서, 남한테 병 팔아 가 지고 남에게 착취하려는 구걸 행위 이것을 안 하는 참 깨끗한 사람, 복 된 사람, 정상적인 사람이 됐을 때에 메어다 놓은 사람들은 그 행복을 감사하지 않고 도리어 불평했을 것입니다.
왜 저희의 업이 끊어졌기 때문에. 인간병 치료에서만 기독자의 행복이 오늘도 그런 것을 많이 봅니다. 2천 마리 돼지떼가 바다에서 몰사하 니까, 사람은 귀신에게서 놓여서 구출됐으니, 돼지 2천 마리보다 분명히 사람이 귀하건만 그때 가다라지방의 사람들은 예수님이 떠나기를 원했 다는 그것을 우리에게 보인 것은 인생이 물질과 인간의 가치를 혼돈해 서 인간보다 물질을 귀하게 여긴다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자주 봅니다. 얼마 전에도 자기 딸이 교회를 다닌다 고 머리를 깎아 버리고 때린 후에 교회로 찾아 와서 난동을 부리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왜 자기 딸이 사람 된다고, 자기 자식이 사람 된다 고 때리는 것입니다. 이제는 사람 같잖은 행위를 벗어나서 인간병을 고쳐서 사람 노릇 해 보겠다 한다고, 욕망대로 가장 악인이 되어서 세상을 마구 악어처럼 삼켜야 부모 속이 풀릴 터인데 그렇게 하지 않는다 고 … 이놈아 네가 이렇게 이래 가지고 이 악하고 무정한 세상에서 어떻 게 세상을 살아 나갈 것이라고 네가 이런 어리석은 걸음을 걷느냐 하면서 그 부모는 자식을 사랑한다 하여서 그와 같이 하는 것을 많이 봤습니다. 그것이 주일을 지켜, 계명을 지켜, 하나님을 경외해, 이제는 인간에게 악을 행치 않고 누를 끼치지 않으려고 애를 쓰고, 악을 악으 로 갚지 않으려고 애를 쓴다고 해서 쫓겨난 사람들이 얼마나 많으며 버 림 받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그것이 사람이 되어 보겠다고, 어린 것이 잠을 깨서 새벽기도를 나 온다, 성경을 본다 하니까 부모는 자기 아이가 미쳐서 사람 버렸다고 끌고 가서, -옛날에는 공부밖에 모르고, 땅에 있는 인간 지식, 죽은 지 식, 죽게 하는 지식 이것밖에 모르고 여기에 전심 전력 기울였고 인간 노릇이나 그런 것은 말하지 않았는데, 무슨 의인처럼 인간 노릇해 보 겠다고 뭐 어째 보겠다고 한다고 해 가지고 박해를 당하는 그런 꼴을 많이 봅니다. 부모가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공부에 방해된다고 자기 아이가 새벽예배 참석한다며 깨워달라고 부탁을 하는데도 부모끼리만 그냥 가 버립니다. 그래도 공부할 시간이 되면 딱딱 깨워 줍니다. 이것이 다 무 엇 때문에 병신 만들어 가지고 인생에게 구걸하는 자, 구걸 잘 하는 자 되도록 하기 위해서, 원죄와 본죄가 강해야 잔인 무도한 세상에서 밟히지 않고 살 수 있다고 해서 하는 그것이 곧 그것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계시의 말씀은 네가 기독자라면 하나 하나의 언행심 사 움직임의 그 중심이, 예수님으로 인하여서 너를 고치든지 다른 사람 을 고치든지 고치는 역사와 고친 결과가 없는 거기에는 기독자의 기쁨 은 없다. 네가 어디까지 성자가 되었다 할지라도 거기에서 고치고 자 하는 욕망과 고치고자 하는 역사와 고쳐진 그것이 있었으면 너는 성 자의 행복을 가졌지만, 그런 것 없이 있는 것으로 만족하고, 이만하면 되었다 하고 병을 발견 못하고 고치고자 하는 욕망, 고치고자 하는 노 력, 새로 고쳐진 부분 이것이 없으면 기독자로서는 지상의 행복은 없다. 쾌락은 없다 하는 것을 여기에서 굳게 잡아야 할 것입니다. 이것 없이 땀만 흘리면 메어다 놓는 것처럼 어떻게 해도, 마지막에 그 사람이 죽을 때라도 정신이 돌아올 때에는 그 부모 형제가 해 준 봉 사나 희생이나 노력에 대해서는 감탄이라 하는 것은 결단코 없습니다.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은반회수 라 은혜를 변해서 원수로 갚는다 하는 말에 서 정말로 은혜라면 그 은혜의 대가를 사은하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의 역사인데, 왜 무지한 자기로서는 참 은혜를 베풀었다고 했지만 실상은 인생을 몰아다가 죽이는 것밖에 안되고 말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효를 못하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이 사은을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오. 사은이 아니요 죽이게 한 그것이기 때문에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정도에 있는 사람이든지 기독자가 예수의 이름으로 자타를 고쳐 보려는 이 욕망과 노력과 고친 결과가 없으면 땅 위에서 기독자의 행복은 없으며, 이것을 등한시하고 원죄와 본죄의 뱀 지식을 많이 넣어 줘 가지고 이 부패한 세상살이를 다른 사람보다 좀 더 부패해짐으로, 소부패를 대부패가 되어서 삼킬 수 있는 이런 종류의 것으로 자기에게 속한 자를 위해서 봉사했다면 언젠가는 그 사람에게 배척을 당할 것이요, 그 사람은 자기와는 상관 없이 관계가 끊어진다는 것을 여기서 말씀했습니다. 우리의 생애는 이런 참 어두운 생애가 많은 우리들입니다. 거기서 수많은 사람들이 이 병나은 자 보고 놀라고 기이히 여겨서 쭐쭐 따라다녔지만 저희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에 과 부가 많았지만 사렙다 과부에게만 찾아갔습니다. 문둥이가 많았지만 나 아만에게만 하나님의 치능이 갔다 말씀한 것은, 수많은 사람들이 이렇 게 하나님의 권능으로 병 나은 그것 보고 기이히 여기고 놀라면서 거게 주목하고 따라 다녔지만, 자신들은 예수의 이름으로 병 낫게 할 욕망도 소원도 없었기 때문에 다 버림을 받은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가 주여 주여 하면서 믿는다고 하지만 예수님의 인간 치 능, 인간을 고치는 능력이 자기와 상관 없는 이런 사람으로, 은총을 입는 기독자를 그저 구경이나 하고 이렇게 다니는 자 되기 쉽습니다. 인간을 고치는 운동에만
그러므로 오늘 오후에 말씀을 다시 증거하는 것은 기독자는 예수님 으로 인하여 고칠 것을 발견해야 되고, 또 고치는 욕망과 노력을 해야 되고, 실지로 고쳐짐이 있는 것-사도 요한이 밧모섬에 가기 전에 그가 가지지 못했던 행복을 지상의 행복을 밧모섬에서 예수님과 자기와 다른 면을 발견하고, 달음질 쳐도 못 간다고 기절한 거기에서 이제까지 얻지 못했던 행복을 그가 발견했을 것이요, 욕망했을 것이요, 다소나마 그는 죽는 날까지 권태나지 않고, 피곤치 않고, 그는 배부른 자와 같이 해이 해지지 아니하고, 갈급해서 생생한 생기에서 죽는 날까지는 그는 살았 을 것입니다. 인간을 고치는 운동 외에는 아무리 봉사해도 마지막에는 사람을 뺏 깁니다. 자기 사람 안됩니다. 마지막에는 원수가 될 것이오. 어떤 것으 로 봉사해도 다 그렇습니다. 세상이 이렇게 배은의 세상이라 불효의 세상이라 하지만 그것이 성경대로는 원리입니다.
댓글목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