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과 금은 내게 없다! (행3:1-10)
본문
태어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자가 교회 문턱에서 한 푼 달라고 구걸합니다. 기도 생활을 열심히 하는 예수 잘 믿는 베드로와 요한에게 손을 내 밀었는데 무안하게도 "은과 금은 내게 없다"고 잘라 말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이래도 되는 것인가 기독교 신앙과 경제는 무관하다는 말인가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현대 자동차 근로자가 정리해고 당하자 임신중인 그 아내가 유산을 했습니다. 한 생명이 태어나기도 전에 죽었습니다. 고 용주는 자신이 살인했다고 전혀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노동자의 구조 적인 희생을 기초로 하여 유지되는 자본주의 경제체제에서 어떤 자본가 나 기업가가 구조조정을 이유로 해서 근로자를 해고했을 경우, 그래서 그 아내가 유산했다면 이는 적어도 '간접 살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 시말해 "살인하지 말라"는 십계명을 범한 것입니다. 이윤추구와 자유시장 경제논리에 따라 정리해고를 정당화하는 고용주는 "간접 살인"을 인정하 지 않을 것입니다. 자본가는 돈으로 노동을 사지만 근로자는 몸을 팔아 돈을 벌어 생계를 유지합니다. 자본가의 눈에는 경제위기에서 요구하는 BIS (자기자본비율), 생산성, 무역수지 등의 통계 자료만 보일 뿐 그 뒷편에서 가난하고 굶주리며 실업으로 고난받는 사람들의 개별적인 운명은 보이지 않기 때문에 '살인'에 대한 죄의식이 전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누구도 자기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다른 사람을 희생시켜서는 안된 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다음 성구는 가난하고 약한 자들의 권리를 지켜 주어야 한다는 것이 하나님의 경제 정의임을 밝히 보여 주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네 이웃 중에 가난하여 먹고 잘 곳이 없으면 네 집에 데리고 가 함께 지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돈을 빌려주려거든 전혀 이자없이 빌 려주라는 것입니다. "(레25:35) 네 동족이 빈한하게 되어 빈손으로 네 곁에 있거든 너는 그 를 도와 객이나 우거하는 자처럼 너와 함께 생활하게 하되 (레25:36) 너는 그에게 이식을 취하지 말고 네 하나님을 경외하여 네 형제로 너와 함 께 생활하게 할 것인즉 (레25:37) 너는 그에게 이식을 위하여 돈을 꾸이 지 말고 이익을 위하여 식물을 꾸이지 말라 (레25:38) 나는 너희 하나님 이 되려고 또는 가나안 땅으로 너희에게 주려고 애굽 땅에서 너희를 인 도하여 낸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하나님의 눈은 병자, 장애자, 과부, 어린이, 나그네 등 힘없는 약한 자 들을 강한 자들이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를 주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들 힘없는 자들에 대한 분배정의를 이루기 위해 채무자에 대해 빚독촉 을 하지 말 것이며, 매 칠년 마다 원금, 이자 할 것 없이 몽땅 빚을 탕감 해주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경제 개혁의 원리입니다. "(신15:1) 매 칠 년 끝에 면제하라 (신15:2) 면제의 규례는 이러하니라 무릇 그 이웃에게 꾸어 준 채주는 그것을 면제하고 그 이웃에게나 그 형 제에게 독촉하지 말지니 이 해는 여호와의 면제년이라 칭함이니라.(출22:25) 네가 만일 너와 함께한 나의 백성 중 가난한 자에게 돈을 꾸이거든 너는 그에게 채주같이 하지 말며 변리를 받지 말 것이며." 더나아가 하나님은 강한 자의 무제한적인 축재를 강력하게 비판하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왜 강한 자의 축재를 비판하는가 강한 자의 무제한 적인 축재는 상대적으로 약한 자에 대한 경제적 착취 행위로 얻어지는 것이며 약한 자의 극심한 빈곤이 거듭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강한 자의 축재행위는 결국 인간의 생명을 좀먹는 물신숭배(物神崇拜)로 인간의 눈 을 멀게 하여 하나님의 평등사상을 거부하며 하나님과의 교제를 거부하 게 만드는 것입니다. 강한 자의 축재행위는 모두가 다 인간의 끝없는 탐 심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축재자들에게 이렇게 경고합니다. "(엡5:5) 너희도 이것을 정녕히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 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에서 기업을 얻 지 못하리니.(골3:5)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재물이 인간의 생명을 보장하지 못하고, 탐심에서 비롯된 축재 행위는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하며 편중된 부의 향유는 인간의 삶을 어리석게 만 드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적절한 비유의 말씀을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눅12:15) 저희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 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 (눅12:16) 또 비유로 저 희에게 일러 가라사대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눅12:17) 심 중에 생각하여 가로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꼬 하고 (눅12:18) 또 가로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눅12:19)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눅12:20)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 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눅12:21)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 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는" 축재자를 하나님은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정신적, 영적 극빈자, 생활보호 대상자로 여기시어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딤전6:17) 네가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 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라." 축재자들은 경제 활동으로서의 노동 가치를 인격적 관계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단지 기업의 생산성과 이윤추구의 관점에서만 노동의 가치를 인정합니다. 그러나 인류 타락 이전의 모습을 보면 사람은 하나님의 창조 질서 안에서 노동하도록("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시고.")부름받았고 노동은 하나님의 창조를 책임지고 보호하고 가꾸는데 그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창2:5)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경작할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 며.(창2:15)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사 그것 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시고" 이와같은 말씀은 노동이 하나님의 창조 사역에 대한 봉사내지는 동역 (同役)으로서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임을 뜻합니다. 분명히 인류타락 이전의 노동은 인간의 지배와 착취 관계가 아니라 인격적인 관계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노동의 가치를 단지 생산성, 기업이윤추구의 관점 에서 평가할 것이 아니라 인격적인 돌봄과 공존의 관계에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고용주들은 노동의 가치를 복잡한 경제 체제, 수치, 도표, 통계자료 등 이해하기도 어렵고 냉정하기도 한 경제지표에서 평가하며 고난당하는 노동자의 인격과 돌봄과 공존을 통해 새로운 질서 를 모색하고 있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는 인간의 타락된 경제행위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비인격적인 노동 착취를 통한 축재 행위는 타락 한 경제행위가 아닐 수 없습니다. 지금부터 10년전 개발도상국가의 외채 총액은 8,210억 달러였습니다. 이는 개발도상국가 안에 살고 있는 각 개인이 서구 자본주의 국가의 정 부나 은행에 평균 300달러 이상의 빚을 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중에 1998년 현재 우리나라 국민 1인당 지고 있는 빚은 500만원입니다. 국제사회에서도 빈익빈 부익부 현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 세 계안에서 매 시간마다
1,500여 명의 어린이들이 굶주림과 영양실조에 따 른 질병으로 죽어가고 있습니다. 매일같이 동식물의 한 종이 멸종되어가 고 있습니다. 매월 750억 달러씩의 세계 외채가 급증하고 있습니다. 매년 한국의 4분의 3 크기의 원시림이 파괴되어가고 있습니다. 세계적 경제 난민은 2,000만 명을 훨씬 넘어서고 있습니다. 이와같은 현실에서 오늘 본문은 단지 생활보호대상자에 대한 교회가 가져야 할 배려나 장애자들에 대해 교회가 지녀야 할 신유의 능력 같은 것들을 강조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회복할 수 없는 문제를 안고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교회의 자세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교회가 무엇을 통하여 참된 교회가 되어지는가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이 앉은뱅이의 모습 속에서 자신의 생존을 위해 기독교에 손을 내 밀 수 밖에 없는 세상의 모습을 읽을 수 있습니다. 내버려두면 영원히 앉 은뱅이로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저주받은 세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교회 를 통해 구원받지 못하면 세상은 멸망당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앉 은뱅이처럼 이 세상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갈수록 세계는 경제가 이데올로기까지 지배하여 "시장 경제"가 "시장 종 교"가 되다시피하여 돈이 교주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돈이면 뭣이든 할 수 있게 되어가고 있습니다. 하나님 없이도, 하나님의 은혜 없이도, 놀라 운 성령님의 역사 없이도 잘 먹고 잘 살 수 있게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돈이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들과 근원적인 고통의 문제들을 해결 해 줄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돈에 속고 사는 인생이 되지않기를 바랍니다. 베드로와 요한 앞에 손을 내밀고 구걸하고 있는 앉은뱅이의 모습에 서 세상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세상은 스스로 자신의 참모습을 알지 못합니다. 세상은 언제나 교회의 도움 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세상이 비록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할 지라도 이 세상 어느 누구도 교회의 도움을 절박하게 필요로 하고 있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이 멸망치않고 구원받기 위 해 예수를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요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러므로 교회는 세상의 문제를 근원적으로 치료하고 인생의 문제를 원천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부름받았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교회는 세상에 대하여 책임져야만 합니다.
그런데 세상이 교회로 하여금 요구하는 바는 가장 절박한 하루 양식거리를 얻는 것이었습니다. 일용할 양식을 요구합니다. 교회는 이러한 세상의 요구들을 쉽게 거절할 수도 없고 거절 해서도 안됩니다. 초대교회처럼 가진 것을 교회 앞에 다 내놓아 한 끼가 어려운 사람들을 섬겨야 합니다.
그렇다면 교회가 그렇게 해서 가난한 자 의 일용할 양식 문제를 다 해결할 수 있겠습니까 한국 감리교회 전체의 일 년 헌금을 몽땅 털어도 웬만한 중소기업의 일 년 매출액 정도에 불과 합니다. 전 세계 교회 재산을 몽땅 턴다고 해도 수 십억이 넘는 세계 빈 곤층을 제대로 섬길 수 없습니다. 교회가 세상을 향하여 섬길 수 있는 그 모든 섬김의 시작은 영혼을 구원하는 일입니다. 이 영혼 구원없이는 세상 은 궁극적으로 치료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와 요한(교회)은 앉은 뱅이를 향하여 자신을 주목하도록 요구했습니다. 이것은 단지 하루 양식 거리를 위한 것이 아니라 그 인생의 불행한 근본적인 원인을 고쳐주고자 한 것이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사실상 다음 성구를 추정해보면 "은과 금"이 많이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행2:43)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인하여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행2:44)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행2:45)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애자에 대해 구제를 베풀지 않고 "은과 금은 내 게 없다"고 말합니다. 자신의 소유는 없었을지라도 자신의 결정에 따라 교회의 "은과 금"을 가난한 자들을 위해 얼마든지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은과 금"이 있었음에도 세상을 향하여 "은과 금이 없다"고 담대히 말합니다. 이는 세상으로 하여금 자신들의 "은과 금" 대신에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기를 원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교회는 단지 사람들에게 선행을 베풀고 사회에 아름다운 미담이나 덕담을 만드는 일을 위하여 존재하지 않고 또 그것이 교회의 사명이 아닙니다. 사회복지 사업이나 구제사업이 교회의 사명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그와같은 일들이 귀하지 않다거나 가 치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는 마땅히 '선한 이웃'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교회의 존재이유는 근본적으로 세상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세상으로 하여금 십자가의 예수를 바라보고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게 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결국 멸망당하고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하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단지 불행을 위로하고 고 통당하는 자들에게 미담을 남기는 사회사업기관이 아니라 그 고통과 불 행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인류 구원의 유일한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교회는 능히 그렇게 할 수 있는 신령한 힘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은과 금은 내게 없다"고, 자신들에게 있는 "은과 금은" 아무 것도 아니 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교회가 가지고 있는 힘은 "은과 금"이 할 수 없는 더 크고 위대한 일들을 능히 행할 수 있게 하기 때문 입니다. "은과 금"은 단지 고통스러워 하는 육신의 일용할 양식이 될 뿐 이지만 예수를 소유하게 되면 교회는 하나님을 등지고 살아가는 영혼들 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만들어 그들을 궁극적으로 구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은과 금"을 모아 일용할 양식을 공급하는데 우선하거 나 급급해 할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 세상으로 하여금 십자가 예수를 주 목하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예수께서 교회를 세우시고 교회에 남기신 것은 땅 한 평 없습니다. 예금통장 하나, 증권 한 장, 그 흔한 구멍가게 하 나 남기신 것 없습니다. "(마8:20)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 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오직 예수 이름 밖에는 남기신 것이 없습니다. 이 세상이 근본적으로 구원받는 길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되는 아니라 "오직 흠 없 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구원받기 때문입니다. "(벧전1:18)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 속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벧전1:19)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 교회는 세상을 변화시키고 그들을 구원하는 예수의 이름,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밖에는 없습니다. 교회는 세상에 있는 "은과 금"같은 것 들에 대해 관심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교회에는 "은과 금"보다 귀한 믿음 이 있고, 이 세상 모든 보화보다 더 귀한 예수를 소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예수 이름의 능력을 상실하게 되면, 교회에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가 흐르지 아니하면 교회의 참다운 사명을 다 할 수 없습니다. 교회가 영혼 구원을 위한 섬김을 사회봉사로 대신하고, 하나님의 통 치를 그리워하며 애통해야 할 중보기도의 의무를 사교적인 모임으로 대 치시키고, 신령한 은혜를 사모하는 대신 우정을 나누는 교회 분위기로 만 족한다면 하나님의 책망 가운데 결국 버림받게 될 것입니다. 마치 라오디 게아 교회처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 말할지 몰라 도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 지 못하는" 부끄러운 교회가 되고 말 것입니다. "(계3:16)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계3: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 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계3:18)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 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계3:19) 무 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18세기 위대한 영적 부흥 운동가였던 조지 휫필드와 웨슬리 형제들은 당시에 유행했던 바자회를 하지 않기로 서원 다짐하고 문서를 작성하여 서명까지 했습니다. 선교 자금 마련이나 고아와 과부를 돕기 위한 수단으 로 영원히 바자회 같은 것을 하지 않기로 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불행한 세상이 교회의 "은과 금"에 주목하는 대신에 예수 그리스도에 눈을 돌리 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휫필드와 웨슬리 형제가 바자회를 금지하기로 한 것은 바로 그 시대의 세상 사람들과 그리스도인들을 향하여 "은과 금이 없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예수가 있었습니다. 단지 하루 살이의 문제를 해결해줄 뿐인 "은과 금"이 아니라 고통당하는 인간 의 궁극적인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는 예수가 그들에게 있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구원할 다른 이름은 없습니다. 교회는 세상을 구원하는 예수 의 이름을 소유하고 그 이름을 증거하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행4:12)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이 땅에 고난당하는 자들에게 우선 필요한 것은 "은과 금"이 아니라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입니다.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막14:7)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원하는 대로 도울 수 있거니와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막14:8) 저가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사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막14:9)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하시니 라" 이 나라 민족이 근본적을 사는 길은 예수 이름에 있습니다. 예수 이름 을 위해 값비싼 향유를 깨뜨리는 것은 허비가 아니라 앉은뱅이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거룩한 행위입니다. 우리 평강교회는 "은과 금은 내 게 없습니다." 있다면 오직 예수의 이름밖에 없습니다. 성도 여러분, 세상 으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만드는 이 시대의 베도로가 되시 기 바랍니다. 세상이여, 어려울수록 교회가 제시하는 십자가 예수만을 주 목하시기 기원합니다. 세상을 구원하는 교회의 힘과 능력이 예수 이름에 있습니다. "은과 금"보다 예수의 이름을 전하여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우는 교회, "은과 금"보다 예수를 바라보고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미하는" 이 나라 백성이 되어지기를 기원합니다.
다음 성구는 가난하고 약한 자들의 권리를 지켜 주어야 한다는 것이 하나님의 경제 정의임을 밝히 보여 주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네 이웃 중에 가난하여 먹고 잘 곳이 없으면 네 집에 데리고 가 함께 지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돈을 빌려주려거든 전혀 이자없이 빌 려주라는 것입니다. "(레25:35) 네 동족이 빈한하게 되어 빈손으로 네 곁에 있거든 너는 그 를 도와 객이나 우거하는 자처럼 너와 함께 생활하게 하되 (레25:36) 너는 그에게 이식을 취하지 말고 네 하나님을 경외하여 네 형제로 너와 함 께 생활하게 할 것인즉 (레25:37) 너는 그에게 이식을 위하여 돈을 꾸이 지 말고 이익을 위하여 식물을 꾸이지 말라 (레25:38) 나는 너희 하나님 이 되려고 또는 가나안 땅으로 너희에게 주려고 애굽 땅에서 너희를 인 도하여 낸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하나님의 눈은 병자, 장애자, 과부, 어린이, 나그네 등 힘없는 약한 자 들을 강한 자들이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를 주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들 힘없는 자들에 대한 분배정의를 이루기 위해 채무자에 대해 빚독촉 을 하지 말 것이며, 매 칠년 마다 원금, 이자 할 것 없이 몽땅 빚을 탕감 해주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경제 개혁의 원리입니다. "(신15:1) 매 칠 년 끝에 면제하라 (신15:2) 면제의 규례는 이러하니라 무릇 그 이웃에게 꾸어 준 채주는 그것을 면제하고 그 이웃에게나 그 형 제에게 독촉하지 말지니 이 해는 여호와의 면제년이라 칭함이니라.(출22:25) 네가 만일 너와 함께한 나의 백성 중 가난한 자에게 돈을 꾸이거든 너는 그에게 채주같이 하지 말며 변리를 받지 말 것이며." 더나아가 하나님은 강한 자의 무제한적인 축재를 강력하게 비판하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왜 강한 자의 축재를 비판하는가 강한 자의 무제한 적인 축재는 상대적으로 약한 자에 대한 경제적 착취 행위로 얻어지는 것이며 약한 자의 극심한 빈곤이 거듭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강한 자의 축재행위는 결국 인간의 생명을 좀먹는 물신숭배(物神崇拜)로 인간의 눈 을 멀게 하여 하나님의 평등사상을 거부하며 하나님과의 교제를 거부하 게 만드는 것입니다. 강한 자의 축재행위는 모두가 다 인간의 끝없는 탐 심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축재자들에게 이렇게 경고합니다. "(엡5:5) 너희도 이것을 정녕히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 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에서 기업을 얻 지 못하리니.(골3:5)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재물이 인간의 생명을 보장하지 못하고, 탐심에서 비롯된 축재 행위는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하며 편중된 부의 향유는 인간의 삶을 어리석게 만 드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적절한 비유의 말씀을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눅12:15) 저희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 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 (눅12:16) 또 비유로 저 희에게 일러 가라사대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눅12:17) 심 중에 생각하여 가로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꼬 하고 (눅12:18) 또 가로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눅12:19)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눅12:20)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 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눅12:21)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 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는" 축재자를 하나님은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정신적, 영적 극빈자, 생활보호 대상자로 여기시어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딤전6:17) 네가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 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라." 축재자들은 경제 활동으로서의 노동 가치를 인격적 관계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단지 기업의 생산성과 이윤추구의 관점에서만 노동의 가치를 인정합니다. 그러나 인류 타락 이전의 모습을 보면 사람은 하나님의 창조 질서 안에서 노동하도록("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시고.")부름받았고 노동은 하나님의 창조를 책임지고 보호하고 가꾸는데 그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창2:5)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경작할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 며.(창2:15)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사 그것 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시고" 이와같은 말씀은 노동이 하나님의 창조 사역에 대한 봉사내지는 동역 (同役)으로서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임을 뜻합니다. 분명히 인류타락 이전의 노동은 인간의 지배와 착취 관계가 아니라 인격적인 관계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노동의 가치를 단지 생산성, 기업이윤추구의 관점 에서 평가할 것이 아니라 인격적인 돌봄과 공존의 관계에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고용주들은 노동의 가치를 복잡한 경제 체제, 수치, 도표, 통계자료 등 이해하기도 어렵고 냉정하기도 한 경제지표에서 평가하며 고난당하는 노동자의 인격과 돌봄과 공존을 통해 새로운 질서 를 모색하고 있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는 인간의 타락된 경제행위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비인격적인 노동 착취를 통한 축재 행위는 타락 한 경제행위가 아닐 수 없습니다. 지금부터 10년전 개발도상국가의 외채 총액은 8,210억 달러였습니다. 이는 개발도상국가 안에 살고 있는 각 개인이 서구 자본주의 국가의 정 부나 은행에 평균 300달러 이상의 빚을 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중에 1998년 현재 우리나라 국민 1인당 지고 있는 빚은 500만원입니다. 국제사회에서도 빈익빈 부익부 현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 세 계안에서 매 시간마다
1,500여 명의 어린이들이 굶주림과 영양실조에 따 른 질병으로 죽어가고 있습니다. 매일같이 동식물의 한 종이 멸종되어가 고 있습니다. 매월 750억 달러씩의 세계 외채가 급증하고 있습니다. 매년 한국의 4분의 3 크기의 원시림이 파괴되어가고 있습니다. 세계적 경제 난민은 2,000만 명을 훨씬 넘어서고 있습니다. 이와같은 현실에서 오늘 본문은 단지 생활보호대상자에 대한 교회가 가져야 할 배려나 장애자들에 대해 교회가 지녀야 할 신유의 능력 같은 것들을 강조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회복할 수 없는 문제를 안고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교회의 자세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교회가 무엇을 통하여 참된 교회가 되어지는가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이 앉은뱅이의 모습 속에서 자신의 생존을 위해 기독교에 손을 내 밀 수 밖에 없는 세상의 모습을 읽을 수 있습니다. 내버려두면 영원히 앉 은뱅이로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저주받은 세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교회 를 통해 구원받지 못하면 세상은 멸망당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앉 은뱅이처럼 이 세상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갈수록 세계는 경제가 이데올로기까지 지배하여 "시장 경제"가 "시장 종 교"가 되다시피하여 돈이 교주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돈이면 뭣이든 할 수 있게 되어가고 있습니다. 하나님 없이도, 하나님의 은혜 없이도, 놀라 운 성령님의 역사 없이도 잘 먹고 잘 살 수 있게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돈이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들과 근원적인 고통의 문제들을 해결 해 줄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돈에 속고 사는 인생이 되지않기를 바랍니다. 베드로와 요한 앞에 손을 내밀고 구걸하고 있는 앉은뱅이의 모습에 서 세상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세상은 스스로 자신의 참모습을 알지 못합니다. 세상은 언제나 교회의 도움 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세상이 비록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할 지라도 이 세상 어느 누구도 교회의 도움을 절박하게 필요로 하고 있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이 멸망치않고 구원받기 위 해 예수를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요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러므로 교회는 세상의 문제를 근원적으로 치료하고 인생의 문제를 원천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부름받았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교회는 세상에 대하여 책임져야만 합니다.
그런데 세상이 교회로 하여금 요구하는 바는 가장 절박한 하루 양식거리를 얻는 것이었습니다. 일용할 양식을 요구합니다. 교회는 이러한 세상의 요구들을 쉽게 거절할 수도 없고 거절 해서도 안됩니다. 초대교회처럼 가진 것을 교회 앞에 다 내놓아 한 끼가 어려운 사람들을 섬겨야 합니다.
그렇다면 교회가 그렇게 해서 가난한 자 의 일용할 양식 문제를 다 해결할 수 있겠습니까 한국 감리교회 전체의 일 년 헌금을 몽땅 털어도 웬만한 중소기업의 일 년 매출액 정도에 불과 합니다. 전 세계 교회 재산을 몽땅 턴다고 해도 수 십억이 넘는 세계 빈 곤층을 제대로 섬길 수 없습니다. 교회가 세상을 향하여 섬길 수 있는 그 모든 섬김의 시작은 영혼을 구원하는 일입니다. 이 영혼 구원없이는 세상 은 궁극적으로 치료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와 요한(교회)은 앉은 뱅이를 향하여 자신을 주목하도록 요구했습니다. 이것은 단지 하루 양식 거리를 위한 것이 아니라 그 인생의 불행한 근본적인 원인을 고쳐주고자 한 것이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사실상 다음 성구를 추정해보면 "은과 금"이 많이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행2:43)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인하여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행2:44)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행2:45)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애자에 대해 구제를 베풀지 않고 "은과 금은 내 게 없다"고 말합니다. 자신의 소유는 없었을지라도 자신의 결정에 따라 교회의 "은과 금"을 가난한 자들을 위해 얼마든지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은과 금"이 있었음에도 세상을 향하여 "은과 금이 없다"고 담대히 말합니다. 이는 세상으로 하여금 자신들의 "은과 금" 대신에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기를 원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교회는 단지 사람들에게 선행을 베풀고 사회에 아름다운 미담이나 덕담을 만드는 일을 위하여 존재하지 않고 또 그것이 교회의 사명이 아닙니다. 사회복지 사업이나 구제사업이 교회의 사명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그와같은 일들이 귀하지 않다거나 가 치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는 마땅히 '선한 이웃'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교회의 존재이유는 근본적으로 세상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세상으로 하여금 십자가의 예수를 바라보고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게 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결국 멸망당하고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하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단지 불행을 위로하고 고 통당하는 자들에게 미담을 남기는 사회사업기관이 아니라 그 고통과 불 행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인류 구원의 유일한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교회는 능히 그렇게 할 수 있는 신령한 힘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은과 금은 내게 없다"고, 자신들에게 있는 "은과 금은" 아무 것도 아니 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교회가 가지고 있는 힘은 "은과 금"이 할 수 없는 더 크고 위대한 일들을 능히 행할 수 있게 하기 때문 입니다. "은과 금"은 단지 고통스러워 하는 육신의 일용할 양식이 될 뿐 이지만 예수를 소유하게 되면 교회는 하나님을 등지고 살아가는 영혼들 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만들어 그들을 궁극적으로 구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은과 금"을 모아 일용할 양식을 공급하는데 우선하거 나 급급해 할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 세상으로 하여금 십자가 예수를 주 목하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예수께서 교회를 세우시고 교회에 남기신 것은 땅 한 평 없습니다. 예금통장 하나, 증권 한 장, 그 흔한 구멍가게 하 나 남기신 것 없습니다. "(마8:20)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 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오직 예수 이름 밖에는 남기신 것이 없습니다. 이 세상이 근본적으로 구원받는 길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되는 아니라 "오직 흠 없 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구원받기 때문입니다. "(벧전1:18)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 속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벧전1:19)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 교회는 세상을 변화시키고 그들을 구원하는 예수의 이름,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밖에는 없습니다. 교회는 세상에 있는 "은과 금"같은 것 들에 대해 관심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교회에는 "은과 금"보다 귀한 믿음 이 있고, 이 세상 모든 보화보다 더 귀한 예수를 소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예수 이름의 능력을 상실하게 되면, 교회에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가 흐르지 아니하면 교회의 참다운 사명을 다 할 수 없습니다. 교회가 영혼 구원을 위한 섬김을 사회봉사로 대신하고, 하나님의 통 치를 그리워하며 애통해야 할 중보기도의 의무를 사교적인 모임으로 대 치시키고, 신령한 은혜를 사모하는 대신 우정을 나누는 교회 분위기로 만 족한다면 하나님의 책망 가운데 결국 버림받게 될 것입니다. 마치 라오디 게아 교회처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 말할지 몰라 도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 지 못하는" 부끄러운 교회가 되고 말 것입니다. "(계3:16)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계3: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 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계3:18)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 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계3:19) 무 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18세기 위대한 영적 부흥 운동가였던 조지 휫필드와 웨슬리 형제들은 당시에 유행했던 바자회를 하지 않기로 서원 다짐하고 문서를 작성하여 서명까지 했습니다. 선교 자금 마련이나 고아와 과부를 돕기 위한 수단으 로 영원히 바자회 같은 것을 하지 않기로 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불행한 세상이 교회의 "은과 금"에 주목하는 대신에 예수 그리스도에 눈을 돌리 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휫필드와 웨슬리 형제가 바자회를 금지하기로 한 것은 바로 그 시대의 세상 사람들과 그리스도인들을 향하여 "은과 금이 없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예수가 있었습니다. 단지 하루 살이의 문제를 해결해줄 뿐인 "은과 금"이 아니라 고통당하는 인간 의 궁극적인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는 예수가 그들에게 있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구원할 다른 이름은 없습니다. 교회는 세상을 구원하는 예수 의 이름을 소유하고 그 이름을 증거하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행4:12)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이 땅에 고난당하는 자들에게 우선 필요한 것은 "은과 금"이 아니라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입니다.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막14:7)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원하는 대로 도울 수 있거니와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막14:8) 저가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사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막14:9)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하시니 라" 이 나라 민족이 근본적을 사는 길은 예수 이름에 있습니다. 예수 이름 을 위해 값비싼 향유를 깨뜨리는 것은 허비가 아니라 앉은뱅이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거룩한 행위입니다. 우리 평강교회는 "은과 금은 내 게 없습니다." 있다면 오직 예수의 이름밖에 없습니다. 성도 여러분, 세상 으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만드는 이 시대의 베도로가 되시 기 바랍니다. 세상이여, 어려울수록 교회가 제시하는 십자가 예수만을 주 목하시기 기원합니다. 세상을 구원하는 교회의 힘과 능력이 예수 이름에 있습니다. "은과 금"보다 예수의 이름을 전하여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우는 교회, "은과 금"보다 예수를 바라보고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미하는" 이 나라 백성이 되어지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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