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님충만의 표적 (행4:23-31)
본문
오늘 본문의 말씀은 성령님충만과 그에 따르는 표적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사도들의 사역과 거룩한 수고와 희생에 대하여 공부한 바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의 놀라운 역사와 성령님의 역사를 결코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특별히 성령님의 충만함이라고 하는 그 귀중한 사실을 떠나서는 사도들의 거룩한 사역을 해석할 길이 없고 그 동기를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흔히들 사도행전을 ‘성령님행전’이라고 일컫습니다. 사도들이 성령님을 받아서 역사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께서 사도들을 고용하심으로 역사하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 사도행전을 바로 이해하는 길입니다. 성령님께서 친히 여러 모양의 사람들을 통하여 역사하십니다. 그 가운데는 유식한 사람도 있고 무식한 사람도 있습니다.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형편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은 상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성령님을 통하여 여러 모양의 사람을 강권적으로 고용하시어 자신의 놀라운 역사를 이루어가심을 우리는 이미 사도행전에서 볼수가 있었습니다. 사도행전을 ‘성령님행전’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입니다. 성령님의 역사, 그 자체가 사도행전의 핵심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행전은 성령님충만이 무엇인지, 그 충만함의 결과는 어떠한지를 명확하게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성령님충만한 사도들에게 핍박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는 성령님충만하면 핍박이 없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나 국가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교회적으로 핍박이 없고 고통이 없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우리들의 일반적인 기대입니다. 흔히들 장사도 잘되고 시험에도 합격하고, 그리고 항상 건강하고 만사가 형통해야 그것이 성령님 충만의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성령님충만하다면서 어떻게 고난 당하고 죽고 쫓겨나고 비난당하고 핍박을 당할수 있느냐, 그것이 말도 안된다.’ 라고 합니다. 장모님이 살아계실 때에 어느 부흥회에 참석했다가 돌아와서 제게 해주신 이야기입니다. 그때에 옆에 같이 앉아있던 분이 밤새 계속해서 뭐라고 중얼거리며 기도하길래 들어보니 “충만, 충만 충만” 하더랍니다. “그저 성령님충만 하게 하여주시옵소서”하는 말이 줄어서 ‘충만’이 된 것입니다. 철야를 하면서 내내 하는 소리라곤 ‘충만’뿐입니다. 다른 소리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어느 시간에 조용히 물어보셨답니다. “계속 충만이라는 말만 하는데 무엇이 충만하기를 바랍니까” “그야 성령님충만을 바라지요.” 그래서 다시 “그럼 성령님충만해서 어쩌자는 것입니까” 하고 물었더니 이렇게 대답하더랍니다. “성령님충만 해야 장사가 잘되지요” 그는 장사하는 사람으로 그의 목적은 오로지 장사가 잘되는 데에 있었습니다. 장사가 잘되기를 바라고 그 수단으로 성령님충만을 기원한 것입니다. 웃어넘길 이야기가 아닙니다. 대체로 우리는 성령님충만 하면 모든 일이 잘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감옥에 들어갔다가도 옥문이 열려서 나와야지요. 병이 들었다가도 나아야지요.
그런데 보십시오. 오늘의 본문은 그렇게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성령님 충만한 사도 베드로와 요한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나면서부터 앉은뱅이된 사십 세가 넘은 사람, 누가 생각해도 일어나서 걸으리라고는 상상조차 할수 없는 그 사람을 성령님 충만한 베드로와 요한이 일으켜 세웁니다. 있을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희한한 능력까지 보였는데 왜 핍박을 받아야 하고, 왜 감옥에 끌려가 매를 맞고 능욕을 당해야 합니까 이상하지 않습니가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합니다. 성령님 충만한 자에게는 핍박이 따른다는 것을, 고난이 있고 실패가 있고 역경이 있고 질병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서부터 바른 신앙은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는 오순절교회로서 성령님의 역사가 있고, 이적의 기사가 있고, 사도들의 권세가 있고, 은혜가 충만한 교회였습니다. 유무 상통한 교회, 사랑이 넘치는 교회였습니다.
그런데도 핍박이 있었습니다. 이 핍박은 성경을 이해해나가는 데에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뜻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보십시오. 성령님 충만함에도 불구하고 핍박당하고 체포당하고 위협당하고 순교당햇습니다. 물론 성령님 충만의 결과로 이적 기사가 나타났습니다. 모두가 하나님을 찬송하고 하나님께 영광돌리고 베드로와 요한을 높이 우러러보았습니다. 그런데도 핍박은 있었습니다. 이적 기사가 있다고 해서 핍박이 없을수가 없습니다. 나면서부터 앉은뱅이된 사람을 벌떡 일으키는 놀라운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그런데도 핍박은 있었습니다. 감옥에 들어가 매도 맞고 비난도 받았습니다. 왜 그래야 합니까 때리는 사람의 팔이라도 부러지든지, 재판장의 눈이 멀든지 해야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나면서부터 앉은뱅이된 사람은 일어났지만 그래도 핍박은 있었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씀하는 사건의 실상입니다. 여기에 더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성령님 충만한 사람들은 이 핍박을 어떻게 생각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먼저, 그들은 핍박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없어야 할 일이 일어났다고 보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왜 핍박이 있습니까 주님께서 우리와 함게 하시는데 왜 고난이 있습니까 왜 베드로는 체포당하고, 야고보는 목베임을 당하고,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어야 합니까 왜 우리는 집에서 쫓겨나야 합니까-이렇게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특별히 저들은 이 핍박을 하나님의 능력이 부족해서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도대체 하나님은 계시는 것입니까, 안계시는 것입니까-이렇게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있는 그대로 당연하게 받아들였습니다. 다음으로, 그들은 핍박을 죄의 대가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사도행전을 자세히 보십시오. 그들은 핍박을 당할 때에도 ‘우리가 부족해서 그렇습니다. 죄가 많아서 그렇습니다’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회개한 흔적은 사도행전 어디에도 없습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물론 죄가 있습니다. 죄가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 죄를 회개하고 세례받고 주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핍박과 환난이 죄의 값으로 주어진다고, 죄의 대가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누구의 실수로, 시행착오로 말미암아 이 핍박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의 차이가 여기에 있습니다. 바로 믿는 사람과 그렇지 않는 사람과의 차이가 여기에 잇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고난을 당해보셨습니까 어떤 실패를 겪었습니까 고난을 당할 때에 내가 하나님 앞에 잘못한 것은 없는지를 생각하는 것은 좋습니다. 회개하는 것은 좋습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그 고난의 의미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여러분, 그 고난이 내 죄 때문이라면 그 동안 건강하게 산 것은 내 의 때문입니까 사업에 실패한 것이 내 죄 때문이라면 그동안 사업이 잘된 것은 내 의 때문입니까 예수믿는 사람은 이런 논리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적어도 예수를 바로 믿는 사람이라면 내 고난의 원인이 죄에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고난을 당할 때에 그것을 하나님께서 내 죄를 벌하시려고 주시는 것이라고 이해한다면 그는 율법주의자입니다. 엄격히 말하자면 그는 예수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예수믿는 사람은 어떤 고난을 당하고 어떤 실패를 만나도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핍박은 결코 죄의 대가로 주어지는 심판적 의미가 아닙니다. 또한 버려진 결과도 아닙니다. ‘내가 죄가 많아서, 무자격해서 하나님께서 버리셨어. 그래서 이런 고난을 당하는 거야’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초대교회 시절, 성령님충만한 사람들은 핍박을 어떻게 생각했습니까 그들은 핍박을 하나님의 능력 안에 있는 일이라고 이해했습니다. 결코 하나님의 능력 밖의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에도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28절)” 엄청난 이야기입니다. 고난과 핍박과 환난과 질병 어떤 것이든 간에 그것이 하나님의 능력 밖에서 이루어지는 일은 절대로 없습니다. 그것은 모두 하나님의 지혜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들입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안에서 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서는 이해가 있는 것 같은데, 하나님의 지혜에 대해서는 바른 이해가 없습니다. 우리 교인들도 가만히 살펴보면 지혜는 내 지혜, 능력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기를 원합니다. 계획은 내 계획대로, 능력은 하나님의 능력대로-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마치 어린아이들이 ‘일은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돈은 부모가’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욕심입니다. 내 계획, 내 뜻을 절대로 양보할 마음이 없습니다. ‘그저 하나님께서는 내가 하는 것을 밀어 주세요’하는 기대만이 있습니다. 아주 못됐습니다. 모름지기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를 함께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큽니다. 하나님의 지혜도 큽니다.
그러므로 나의 생각은 하나님의 지혜 앞에서 보면 어리석은 것일뿐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하시는 일은 훨씬 지혜로운 것입니다. 우리는 모르고 살지만 하나님은 알고 사십니다. 우리는 현재에 매이고 있지만 하나님은 미래를, 저 앞을 내다 보시고 계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어리석기 짝이 없지요. 우리가 무엇을 더 고집하겠습니까 보십시오. 성령님충만한 초대교회 사람들은 환난과 핍박을 고난 가운데서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 핍박 가운데 하나님의 초월하신 지혜가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것이 성령님충만한 마음입니다. 또한, 그들은 고난과 핍박을 선교를 위한 필수적 사건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 위하여 고난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선교가 효과적으로 이루어지기 위하여 핍박은 있어야 합니다. 이것을 우리는 어쩔수 없이 시인해야 합니다. 이것이 받아들여지지 않기 때문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이 환난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환난이 없어야 전도가 된다고 생각합니다마는 환난 없이 전도되는 법은 없습니다. 고난이 없어야 전도가 활발히 이루어진다고 생각합니다마는 그렇지 않습니다. 잊지 말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많은 설교를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전도하기도 하고, 단 몇 사람을 만나서 전도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에게는 세계 중심도시인 로마에 가서 수천 수만명을 모아놓고 힘차게 복음을 전해야겠다 하는 생각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로마 한가운데에 큰 교회를 세우고 커다란 역사를 이루어야겠다는 꿈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정작 바울이 로마에 갈 때에는 쇠사슬에 묶여서 갔습니다. 그러니 전도할 수가 있나요 누구를 만나기를 해야 전도도 하는 것이지요. 사도 바울이 있었다고 하는 감옥을 직접 가보았는데 어지간히 답답했겠다 싶더군요. 그 감옥 바로 위가 황제의 궁전입니다. 그 중전 지하에 떡하니 갇혀 있으려니 얼마나 답답햇겠습니까 그렇게 2년 동안이나 갇혀 있었기에 공개적으로는 복음을 전할 수가 없었습니다. 죄수의 몸으로 재판도 받지 않은 채 2년동안이나 감옥에 갇혀있었습니다. 너무 답답하고 속상한 나머지 바울은 로마에 상소를 하게 됩니다. 이로써 그는 로마까지 끌려가게 됩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감옥에 갇혀 가만히 있는 동안 전도의 문이 열립니다. 로마의 친위대 사람들, 요새로 말하자면 대통령 비서실의 사람들이 그를 찾아와 문안을 하게 됩니다. 바울은 기회를 놓칠세라 그들을 향하여 전도를 합니다. 그 로마의 고관들은 바울이 일생 동안 만날래야 만날수도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만나서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결국 로마 궁전의 고관들, 귀족들 사이에 깊숙이 복음이 전해지게 됩니다. 그 파급효과를 보고 바울은 깨닫습니다.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빌 1:12)” ‘나의 당한 일’이란 무엇입니까 고난과 핍박과 환난입니다. 3년 동안 감옥에서 썩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돌이켜보니 나의 당한 일이 복음의 진보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제야 그것을 깨닫고 간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초대교회의 성령님충만한 사람들은 이것을 알았습니다. 물론 분명하게 알았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성령님께서 주시는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그들은 선교를 위해서는 그 고난과 사건이 필수적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것이 가장 효과적인 선교의 방법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좀더 나아가 그들은 자신들이 당하는 그 고난의 맥락을 알았습니다. 지금 당하는 이 고난은 죄 때문도 아니요 저주 때문도 아니요 형벌도 아니라는 것을,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과 연계된 사건이라고 하는 높은 가치를 깨달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이 당하는 고난이 예수님께서 당하신 그 고난과 연계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다면야 문제가 없지요. 당할 만하지요. 얼마나 고상한 고난이겠습니까 내 생의 의미 자체가 고상해지는 것이거든요. 오늘의 본문의 말씀을 자세히 보십시오. “과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동하여 하나님의 기름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스려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27, 28절).”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더니 그것도 모자라 오늘은 우리에게 고난을 주려고 이 성에 모였다는 것입니다. 놀라운 말씀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당한 고난의 의미를 예수님께서 당하신 고난의 의미에 연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고난과 비슷한 의미의 고난이 지금 여기에서 이루어지려 한다고 말씀함입니다. 예수님을 죽인 사람들이 지금 우리를 죽이려 한다고 말씀함입니다. 예수님을 핍박한 사람들이 지금 우리를 핍박하려 한다고 말씀함입니다. 사도 바울은 골로새서에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1:24)”라고 고난을 기뻐하는 이유를 설명합니다. 내 고난에는 그리스도적 고난의 의미가 있기 때문에 기쁘게 감당할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고난당한다고 다 슬픈 것은 아닙니다. 어떤 성격의 고난을 받았느냐가 문제입니다. 정말로 그리스도적 고난, 십자가적 의미의 고난을 당할수만 있다면 까짓것 매맞는 것이 문제입니까 죽는 것이 문제입니까 그렇습니다. 고난의 성격, 고난의 의미가 문제입니다. 이렇듯 성령님충만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당한 고난의 의미를 높은 가치에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때문에 추호의 걱정도 두려움도 없었던 것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다함께 모여서 기도합니다. “주여 이제도 저희의 휘협함을 하감하옵시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29, 30절).” 기도 내용이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초대교회의 가장 대표적인 기도입니다. 보십시오. 큰 고난과 핍박이 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벌써 감옥에 들어가 매를 맞고 나왔습니다. 지금도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 다시 복음을 전하면 또 끌려들어가서 매를 맞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러한 고난을 면하게 해달라고 기도하지는 않습니다. 그것이 놀라운 것입니다. 아마 우리 같았으면 ‘하나님이여, 큰 능력을 더하사 우리 핍박당하는 것을 돌아보시고 우리를 핍박하는 자들을 소멸하옵소서, 우리의 핍박을 면케 하옵소서’라고 기도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의 본문 말씀에는 그런 기도가 없습니다. 특별히 그 사건 자체에 변화가 있기를 위하여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환경이 달라지기를 위하여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핍박도 없게 하여주시고, 고난도 없게 하여주시고. 그런 기도가 아닙니다. 환경의 변화를 위하여 하는 기도가 결코 아닙니다. 간혹 보면 이렇게 기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신은 부동자세로 서 있으면서 ‘남편의 마음을 감동하사 날 사랑하게 하여 주옵소서, 아이들의 마음을 감동하사 나에게 효도하게 하여주옵소서. 우리 구역의 사람들을 감동하사 나를 존경하게 하여주옵소서. 교회의 목사님과 장로님들을 감동하사 나를 알아주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자신은 가만히 부동자세로 있고 주변의 환경만이 달라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변하고 사회가 변하고 세상이 변해서 그저 나 하나 편안하게 해주세요 하는 것이 우리의 기도 수준입니다. 그러나 성령님 안에 있는 초대교회 사람들의 기도는 그렇지 않습니다. 핍박이 있고 환난이 있고 위험이 있습니다. 언제 죽을는지 모릅니다. 그같이 위험한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어던 환경의 변화가 있기를 전혀 바라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처한 상황 그대로를 수용하고 있습니다. 오로지 그 주어진 환경 속에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하여 기도합니다. 얼마나 귀한 기도입니까 세상이 달라지기를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은 그대로 두고 그 안에서 내가 할 일은 무엇인지, 그것을 위하여 기도하고 있습니다. 죄송한 말씀입니다마는 저는 여러 가지 이유에서 북한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어쩌면 북녘땅을 직접 다녀왔기 때문에 더욱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는지도 모릅니다. 북한을 열어주세요, 북한을 달라지게 해주세요, 북한에 자유를 주세요. 그렇게 기도할 때면 내 마음에 ‘지금 내가 저들을 위하여 무슨 일을 해야 하는가’하는 생각이 떠오릅니다. 그래서 다시 그것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지금 내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그것을 하게 해주옵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여러분, 저들이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하다고 하면 주저없이 주어야 합니다. 달라고 하면 선뜻 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럴 마음이 없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여러분, 지금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초점을 맞출 것입니다. 오늘 이 세상에 대해서도 그렇습니다. 이 환경에 대해서도 그렇습니다. 그러니 환경의 변화를 위하여 기도할 것이 아닙니다. 그 환경 그대로가 하나님의 경륜과 뜻이니까요. 그러니 No comment. 이제 내가 할 일은 무엇입니까-이것만 바랄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초대교회 사람들은 특별히 자신의 안일이나 평안을 위하여 기도드리지 않았습니다. 이 환난을 피하게 해달라고 기도드리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담대하게 해주세요. 비겁해지지 않게 해주세요. 핍박을 겁내지 않게 용기를 주세요’라고 기도했습니다. 이것이 그들의 기도 가운데 첫 번째 내용입니다. 두 번째로 그들은 ‘벙어리되지 않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했습니다. 핍박 속에서도 복음을 전하게 해주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해주십사 기도했습니다. 세 번째로 그들은 ‘표적을 주세요’라고 기도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효과있게 전하기 위하여 표적을 주십사 기도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면 하는 표적,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와 함께하신다고하는 표적, 예수님의 생명력이 우리와 함께하신다고 하는 표적을 주십사 하고 기도한 것입니다.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주옵시며”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참으로 모범적이요 위대한 기도입니다. 그 내용 전부가, 그 소원 자체가 초대 교회의 성령님받은 성도들의 마음입니다. 절대로 자신을 위한 기도가 아닙니다. 오직 전도를 위하여 내가 해야 할 일을 다하게 해주십사 하는 기도입니다. 내 일을 하나님게서 해주십사 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다른 사람을 통해서 하게 해주십사 하는 이야기도 아닙니다. 내가 해야 할 하나님의 일을 내가 할수있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내가 참아야 할 시간에 참게 해주세요. 내가 전해야 할 시간에 전하게 해주세요, 내가 사랑해야 할 사람을 사랑하게 해주세요-이것이 기도입니다. 저 사람이 나를 사랑하게 해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저 사람을 사랑할 수 있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도의 주제입니다. 참으로 귀한 마음이 아닙니까 오늘의 본문 31절에 참으로 귀한 말씀이 있습니다.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님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예수 이름으로 기도함에 거기 모인 모든 사람이 성령님의 충만함을 받았다는 말씀입니다. 참으로 중요한 말씀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충만’은 무아지경이라든가 peak experience라든가 ecstasy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종교적 절정 경험이라든가 환각, 환상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보십시오. 저들은 성령님이 충만함으로 의식이 오히려 더욱 분명해졌습니다. 그리스도께 대한 역사의식, 그리스도께 대한 지식이 더욱 분명해졌습니다. 나아가 자아의식, 사명의식이 더욱 분명해졌습니다. 이것이 바로 ‘충만’입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공동체의식이 있었습니다. 어느 한 사람만이 아니라 거기에 있던 모든 사람이 성령님의 충만함을 입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개인의 종교적 체험이 아닙니다. 어느 한 사람만 특별히 충만해졌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남녀노소 할것없이 모두가 다 성령님으로 충만해졌습니다. 여기에 교회론적 의미가 잇습니다. 나아가 충만의 궁극적 목적은 하나님의 말슴을 담대히 전하게 되는데에 있습니다.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성령님충만의 목적이 장사가 잘되고 시험 합격하는데에 있지 않습니다.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데에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의 본문말씀을 통하여 고난의 선교적 의미와 그 효과적 의미를 알게 되었습니다. 다시한번 깊이 생각해보십시오. 기도와 응답 사이에 아주 중요하고도 미묘한 관계가 있습니다. 보십시오. 저들의 기도 속에는 충만하게 해달라는 소망이 없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평생 사도행전을 연구한, 사도행전의 세계적 권위자인 모리야라는 학자가 쓴 책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사도행전에는 성령님충만 자체를 위하여 기도한 흔적이 없다’ 사도행전에는 충만하게 해주세요 하는 기도가 없다는 말입니다. 다만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해주세요 하고 기도했더니 충만해지더라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돈벌게 해주세요 하고 기도했더니 돈벌게 해주셨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 좀 많이 하게 해주세요 하고 기도했더니 돈이 벌리더라는 말입니다. 그것이 다릅니다. 돈 많이 벌게 해주세요 하고 기도하면 “그것으로 무엇을 하려느냐”하고 하나님께서 물으실 것입니다. 결국 성령님충만 자체는 은사요 선물인 것입니다.
그런데 저들은 그 선물 자체를 구하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히 전하게 해주세요 하고 열심히 구했더니 거기에 필요한 충만함을 주셨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거기에 필요한 용기도 이적도 표적도 능력도 주셨습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나로 하나님의 일을 하게 해주세요, 하나님의 일을 힘써 할 수 있게 용기를 주세요’라고 기도할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학자금도 주시고 지혜도 주시고 건강도 주실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가만히 앉아서 ‘건강 주세요’하니 하나님게서 ‘건강 주면 다른 짓만 하는 녀석이 건강을 달라고만 조르는 구나’하시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건강 자체를 위하여 기도할 것이 아닙니다. 오래 살기만을 구하는 것이 얼마나 바보같은 기도입니까 얼마나 불신앙적인 기도입니까 다시한번 오늘의 본문말씀을 자세히 보십시오.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해주세요’ 하고 기도했더니 성령님이 충만해졌다고 말씀합니다. 결국 충만은 개인적 신비체험이 아닌 것입니다. 충만은 복음 전파를 위한 필수불가결의 요소인 것입니다. 저들의 궁극적 목적은 핍박을 면하자는 것도 아니요 안일하자는 것도 아니요 영광을 누리자는 것도 아니요 명예를 구하자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히 용기있게 전하자는 데에 있습니다. 그래서 저들은 ‘핍박을 두려워하지 않고 말씀을 전하게 해주세요, 순교를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히 말씀을 전하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한 것입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게서 성령님충만과 이적과 기사와 권능을 주셨습니다. 이 맥락을 우리가 분명히 이해애야 할 것입니다. 오늘도 그렇습니다. 소극적인 기도는 하지 마십시오. 자꾸 뒤로 도망가면서 ‘하나님, 저로 복음을 전하게 해주세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해주세요’하는 것은 잘못된 기도입니다. ‘나 자신을 제물로 바쳐도 좋고 핍박을 받아도 좋고 환난도 좋고 가난도 좋고 질병도 좋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해주세요.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히 전하게 해주세요’하고 신심으로 구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이에 필요한 모든 은사를 더하실 것입니다. 충만함을 더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행전은 성령님충만이 무엇인지, 그 충만함의 결과는 어떠한지를 명확하게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성령님충만한 사도들에게 핍박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는 성령님충만하면 핍박이 없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나 국가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교회적으로 핍박이 없고 고통이 없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우리들의 일반적인 기대입니다. 흔히들 장사도 잘되고 시험에도 합격하고, 그리고 항상 건강하고 만사가 형통해야 그것이 성령님 충만의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성령님충만하다면서 어떻게 고난 당하고 죽고 쫓겨나고 비난당하고 핍박을 당할수 있느냐, 그것이 말도 안된다.’ 라고 합니다. 장모님이 살아계실 때에 어느 부흥회에 참석했다가 돌아와서 제게 해주신 이야기입니다. 그때에 옆에 같이 앉아있던 분이 밤새 계속해서 뭐라고 중얼거리며 기도하길래 들어보니 “충만, 충만 충만” 하더랍니다. “그저 성령님충만 하게 하여주시옵소서”하는 말이 줄어서 ‘충만’이 된 것입니다. 철야를 하면서 내내 하는 소리라곤 ‘충만’뿐입니다. 다른 소리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어느 시간에 조용히 물어보셨답니다. “계속 충만이라는 말만 하는데 무엇이 충만하기를 바랍니까” “그야 성령님충만을 바라지요.” 그래서 다시 “그럼 성령님충만해서 어쩌자는 것입니까” 하고 물었더니 이렇게 대답하더랍니다. “성령님충만 해야 장사가 잘되지요” 그는 장사하는 사람으로 그의 목적은 오로지 장사가 잘되는 데에 있었습니다. 장사가 잘되기를 바라고 그 수단으로 성령님충만을 기원한 것입니다. 웃어넘길 이야기가 아닙니다. 대체로 우리는 성령님충만 하면 모든 일이 잘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감옥에 들어갔다가도 옥문이 열려서 나와야지요. 병이 들었다가도 나아야지요.
그런데 보십시오. 오늘의 본문은 그렇게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성령님 충만한 사도 베드로와 요한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나면서부터 앉은뱅이된 사십 세가 넘은 사람, 누가 생각해도 일어나서 걸으리라고는 상상조차 할수 없는 그 사람을 성령님 충만한 베드로와 요한이 일으켜 세웁니다. 있을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희한한 능력까지 보였는데 왜 핍박을 받아야 하고, 왜 감옥에 끌려가 매를 맞고 능욕을 당해야 합니까 이상하지 않습니가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합니다. 성령님 충만한 자에게는 핍박이 따른다는 것을, 고난이 있고 실패가 있고 역경이 있고 질병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서부터 바른 신앙은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는 오순절교회로서 성령님의 역사가 있고, 이적의 기사가 있고, 사도들의 권세가 있고, 은혜가 충만한 교회였습니다. 유무 상통한 교회, 사랑이 넘치는 교회였습니다.
그런데도 핍박이 있었습니다. 이 핍박은 성경을 이해해나가는 데에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뜻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보십시오. 성령님 충만함에도 불구하고 핍박당하고 체포당하고 위협당하고 순교당햇습니다. 물론 성령님 충만의 결과로 이적 기사가 나타났습니다. 모두가 하나님을 찬송하고 하나님께 영광돌리고 베드로와 요한을 높이 우러러보았습니다. 그런데도 핍박은 있었습니다. 이적 기사가 있다고 해서 핍박이 없을수가 없습니다. 나면서부터 앉은뱅이된 사람을 벌떡 일으키는 놀라운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그런데도 핍박은 있었습니다. 감옥에 들어가 매도 맞고 비난도 받았습니다. 왜 그래야 합니까 때리는 사람의 팔이라도 부러지든지, 재판장의 눈이 멀든지 해야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나면서부터 앉은뱅이된 사람은 일어났지만 그래도 핍박은 있었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씀하는 사건의 실상입니다. 여기에 더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성령님 충만한 사람들은 이 핍박을 어떻게 생각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먼저, 그들은 핍박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없어야 할 일이 일어났다고 보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왜 핍박이 있습니까 주님께서 우리와 함게 하시는데 왜 고난이 있습니까 왜 베드로는 체포당하고, 야고보는 목베임을 당하고,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어야 합니까 왜 우리는 집에서 쫓겨나야 합니까-이렇게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특별히 저들은 이 핍박을 하나님의 능력이 부족해서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도대체 하나님은 계시는 것입니까, 안계시는 것입니까-이렇게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있는 그대로 당연하게 받아들였습니다. 다음으로, 그들은 핍박을 죄의 대가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사도행전을 자세히 보십시오. 그들은 핍박을 당할 때에도 ‘우리가 부족해서 그렇습니다. 죄가 많아서 그렇습니다’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회개한 흔적은 사도행전 어디에도 없습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물론 죄가 있습니다. 죄가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 죄를 회개하고 세례받고 주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핍박과 환난이 죄의 값으로 주어진다고, 죄의 대가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누구의 실수로, 시행착오로 말미암아 이 핍박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의 차이가 여기에 있습니다. 바로 믿는 사람과 그렇지 않는 사람과의 차이가 여기에 잇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고난을 당해보셨습니까 어떤 실패를 겪었습니까 고난을 당할 때에 내가 하나님 앞에 잘못한 것은 없는지를 생각하는 것은 좋습니다. 회개하는 것은 좋습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그 고난의 의미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여러분, 그 고난이 내 죄 때문이라면 그 동안 건강하게 산 것은 내 의 때문입니까 사업에 실패한 것이 내 죄 때문이라면 그동안 사업이 잘된 것은 내 의 때문입니까 예수믿는 사람은 이런 논리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적어도 예수를 바로 믿는 사람이라면 내 고난의 원인이 죄에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고난을 당할 때에 그것을 하나님께서 내 죄를 벌하시려고 주시는 것이라고 이해한다면 그는 율법주의자입니다. 엄격히 말하자면 그는 예수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예수믿는 사람은 어떤 고난을 당하고 어떤 실패를 만나도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핍박은 결코 죄의 대가로 주어지는 심판적 의미가 아닙니다. 또한 버려진 결과도 아닙니다. ‘내가 죄가 많아서, 무자격해서 하나님께서 버리셨어. 그래서 이런 고난을 당하는 거야’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초대교회 시절, 성령님충만한 사람들은 핍박을 어떻게 생각했습니까 그들은 핍박을 하나님의 능력 안에 있는 일이라고 이해했습니다. 결코 하나님의 능력 밖의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에도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28절)” 엄청난 이야기입니다. 고난과 핍박과 환난과 질병 어떤 것이든 간에 그것이 하나님의 능력 밖에서 이루어지는 일은 절대로 없습니다. 그것은 모두 하나님의 지혜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들입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안에서 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서는 이해가 있는 것 같은데, 하나님의 지혜에 대해서는 바른 이해가 없습니다. 우리 교인들도 가만히 살펴보면 지혜는 내 지혜, 능력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기를 원합니다. 계획은 내 계획대로, 능력은 하나님의 능력대로-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마치 어린아이들이 ‘일은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돈은 부모가’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욕심입니다. 내 계획, 내 뜻을 절대로 양보할 마음이 없습니다. ‘그저 하나님께서는 내가 하는 것을 밀어 주세요’하는 기대만이 있습니다. 아주 못됐습니다. 모름지기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를 함께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큽니다. 하나님의 지혜도 큽니다.
그러므로 나의 생각은 하나님의 지혜 앞에서 보면 어리석은 것일뿐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하시는 일은 훨씬 지혜로운 것입니다. 우리는 모르고 살지만 하나님은 알고 사십니다. 우리는 현재에 매이고 있지만 하나님은 미래를, 저 앞을 내다 보시고 계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어리석기 짝이 없지요. 우리가 무엇을 더 고집하겠습니까 보십시오. 성령님충만한 초대교회 사람들은 환난과 핍박을 고난 가운데서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 핍박 가운데 하나님의 초월하신 지혜가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것이 성령님충만한 마음입니다. 또한, 그들은 고난과 핍박을 선교를 위한 필수적 사건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 위하여 고난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선교가 효과적으로 이루어지기 위하여 핍박은 있어야 합니다. 이것을 우리는 어쩔수 없이 시인해야 합니다. 이것이 받아들여지지 않기 때문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이 환난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환난이 없어야 전도가 된다고 생각합니다마는 환난 없이 전도되는 법은 없습니다. 고난이 없어야 전도가 활발히 이루어진다고 생각합니다마는 그렇지 않습니다. 잊지 말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많은 설교를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전도하기도 하고, 단 몇 사람을 만나서 전도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에게는 세계 중심도시인 로마에 가서 수천 수만명을 모아놓고 힘차게 복음을 전해야겠다 하는 생각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로마 한가운데에 큰 교회를 세우고 커다란 역사를 이루어야겠다는 꿈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정작 바울이 로마에 갈 때에는 쇠사슬에 묶여서 갔습니다. 그러니 전도할 수가 있나요 누구를 만나기를 해야 전도도 하는 것이지요. 사도 바울이 있었다고 하는 감옥을 직접 가보았는데 어지간히 답답했겠다 싶더군요. 그 감옥 바로 위가 황제의 궁전입니다. 그 중전 지하에 떡하니 갇혀 있으려니 얼마나 답답햇겠습니까 그렇게 2년 동안이나 갇혀 있었기에 공개적으로는 복음을 전할 수가 없었습니다. 죄수의 몸으로 재판도 받지 않은 채 2년동안이나 감옥에 갇혀있었습니다. 너무 답답하고 속상한 나머지 바울은 로마에 상소를 하게 됩니다. 이로써 그는 로마까지 끌려가게 됩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감옥에 갇혀 가만히 있는 동안 전도의 문이 열립니다. 로마의 친위대 사람들, 요새로 말하자면 대통령 비서실의 사람들이 그를 찾아와 문안을 하게 됩니다. 바울은 기회를 놓칠세라 그들을 향하여 전도를 합니다. 그 로마의 고관들은 바울이 일생 동안 만날래야 만날수도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만나서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결국 로마 궁전의 고관들, 귀족들 사이에 깊숙이 복음이 전해지게 됩니다. 그 파급효과를 보고 바울은 깨닫습니다.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빌 1:12)” ‘나의 당한 일’이란 무엇입니까 고난과 핍박과 환난입니다. 3년 동안 감옥에서 썩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돌이켜보니 나의 당한 일이 복음의 진보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제야 그것을 깨닫고 간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초대교회의 성령님충만한 사람들은 이것을 알았습니다. 물론 분명하게 알았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성령님께서 주시는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그들은 선교를 위해서는 그 고난과 사건이 필수적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것이 가장 효과적인 선교의 방법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좀더 나아가 그들은 자신들이 당하는 그 고난의 맥락을 알았습니다. 지금 당하는 이 고난은 죄 때문도 아니요 저주 때문도 아니요 형벌도 아니라는 것을,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과 연계된 사건이라고 하는 높은 가치를 깨달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이 당하는 고난이 예수님께서 당하신 그 고난과 연계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다면야 문제가 없지요. 당할 만하지요. 얼마나 고상한 고난이겠습니까 내 생의 의미 자체가 고상해지는 것이거든요. 오늘의 본문의 말씀을 자세히 보십시오. “과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동하여 하나님의 기름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스려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27, 28절).”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더니 그것도 모자라 오늘은 우리에게 고난을 주려고 이 성에 모였다는 것입니다. 놀라운 말씀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당한 고난의 의미를 예수님께서 당하신 고난의 의미에 연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고난과 비슷한 의미의 고난이 지금 여기에서 이루어지려 한다고 말씀함입니다. 예수님을 죽인 사람들이 지금 우리를 죽이려 한다고 말씀함입니다. 예수님을 핍박한 사람들이 지금 우리를 핍박하려 한다고 말씀함입니다. 사도 바울은 골로새서에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1:24)”라고 고난을 기뻐하는 이유를 설명합니다. 내 고난에는 그리스도적 고난의 의미가 있기 때문에 기쁘게 감당할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고난당한다고 다 슬픈 것은 아닙니다. 어떤 성격의 고난을 받았느냐가 문제입니다. 정말로 그리스도적 고난, 십자가적 의미의 고난을 당할수만 있다면 까짓것 매맞는 것이 문제입니까 죽는 것이 문제입니까 그렇습니다. 고난의 성격, 고난의 의미가 문제입니다. 이렇듯 성령님충만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당한 고난의 의미를 높은 가치에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때문에 추호의 걱정도 두려움도 없었던 것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다함께 모여서 기도합니다. “주여 이제도 저희의 휘협함을 하감하옵시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29, 30절).” 기도 내용이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초대교회의 가장 대표적인 기도입니다. 보십시오. 큰 고난과 핍박이 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벌써 감옥에 들어가 매를 맞고 나왔습니다. 지금도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 다시 복음을 전하면 또 끌려들어가서 매를 맞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러한 고난을 면하게 해달라고 기도하지는 않습니다. 그것이 놀라운 것입니다. 아마 우리 같았으면 ‘하나님이여, 큰 능력을 더하사 우리 핍박당하는 것을 돌아보시고 우리를 핍박하는 자들을 소멸하옵소서, 우리의 핍박을 면케 하옵소서’라고 기도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의 본문 말씀에는 그런 기도가 없습니다. 특별히 그 사건 자체에 변화가 있기를 위하여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환경이 달라지기를 위하여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핍박도 없게 하여주시고, 고난도 없게 하여주시고. 그런 기도가 아닙니다. 환경의 변화를 위하여 하는 기도가 결코 아닙니다. 간혹 보면 이렇게 기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신은 부동자세로 서 있으면서 ‘남편의 마음을 감동하사 날 사랑하게 하여 주옵소서, 아이들의 마음을 감동하사 나에게 효도하게 하여주옵소서. 우리 구역의 사람들을 감동하사 나를 존경하게 하여주옵소서. 교회의 목사님과 장로님들을 감동하사 나를 알아주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자신은 가만히 부동자세로 있고 주변의 환경만이 달라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변하고 사회가 변하고 세상이 변해서 그저 나 하나 편안하게 해주세요 하는 것이 우리의 기도 수준입니다. 그러나 성령님 안에 있는 초대교회 사람들의 기도는 그렇지 않습니다. 핍박이 있고 환난이 있고 위험이 있습니다. 언제 죽을는지 모릅니다. 그같이 위험한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어던 환경의 변화가 있기를 전혀 바라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처한 상황 그대로를 수용하고 있습니다. 오로지 그 주어진 환경 속에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하여 기도합니다. 얼마나 귀한 기도입니까 세상이 달라지기를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은 그대로 두고 그 안에서 내가 할 일은 무엇인지, 그것을 위하여 기도하고 있습니다. 죄송한 말씀입니다마는 저는 여러 가지 이유에서 북한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어쩌면 북녘땅을 직접 다녀왔기 때문에 더욱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는지도 모릅니다. 북한을 열어주세요, 북한을 달라지게 해주세요, 북한에 자유를 주세요. 그렇게 기도할 때면 내 마음에 ‘지금 내가 저들을 위하여 무슨 일을 해야 하는가’하는 생각이 떠오릅니다. 그래서 다시 그것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지금 내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그것을 하게 해주옵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여러분, 저들이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하다고 하면 주저없이 주어야 합니다. 달라고 하면 선뜻 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럴 마음이 없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여러분, 지금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초점을 맞출 것입니다. 오늘 이 세상에 대해서도 그렇습니다. 이 환경에 대해서도 그렇습니다. 그러니 환경의 변화를 위하여 기도할 것이 아닙니다. 그 환경 그대로가 하나님의 경륜과 뜻이니까요. 그러니 No comment. 이제 내가 할 일은 무엇입니까-이것만 바랄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초대교회 사람들은 특별히 자신의 안일이나 평안을 위하여 기도드리지 않았습니다. 이 환난을 피하게 해달라고 기도드리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담대하게 해주세요. 비겁해지지 않게 해주세요. 핍박을 겁내지 않게 용기를 주세요’라고 기도했습니다. 이것이 그들의 기도 가운데 첫 번째 내용입니다. 두 번째로 그들은 ‘벙어리되지 않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했습니다. 핍박 속에서도 복음을 전하게 해주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해주십사 기도했습니다. 세 번째로 그들은 ‘표적을 주세요’라고 기도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효과있게 전하기 위하여 표적을 주십사 기도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면 하는 표적,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와 함께하신다고하는 표적, 예수님의 생명력이 우리와 함께하신다고 하는 표적을 주십사 하고 기도한 것입니다.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주옵시며”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참으로 모범적이요 위대한 기도입니다. 그 내용 전부가, 그 소원 자체가 초대 교회의 성령님받은 성도들의 마음입니다. 절대로 자신을 위한 기도가 아닙니다. 오직 전도를 위하여 내가 해야 할 일을 다하게 해주십사 하는 기도입니다. 내 일을 하나님게서 해주십사 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다른 사람을 통해서 하게 해주십사 하는 이야기도 아닙니다. 내가 해야 할 하나님의 일을 내가 할수있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내가 참아야 할 시간에 참게 해주세요. 내가 전해야 할 시간에 전하게 해주세요, 내가 사랑해야 할 사람을 사랑하게 해주세요-이것이 기도입니다. 저 사람이 나를 사랑하게 해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저 사람을 사랑할 수 있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도의 주제입니다. 참으로 귀한 마음이 아닙니까 오늘의 본문 31절에 참으로 귀한 말씀이 있습니다.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님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예수 이름으로 기도함에 거기 모인 모든 사람이 성령님의 충만함을 받았다는 말씀입니다. 참으로 중요한 말씀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충만’은 무아지경이라든가 peak experience라든가 ecstasy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종교적 절정 경험이라든가 환각, 환상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보십시오. 저들은 성령님이 충만함으로 의식이 오히려 더욱 분명해졌습니다. 그리스도께 대한 역사의식, 그리스도께 대한 지식이 더욱 분명해졌습니다. 나아가 자아의식, 사명의식이 더욱 분명해졌습니다. 이것이 바로 ‘충만’입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공동체의식이 있었습니다. 어느 한 사람만이 아니라 거기에 있던 모든 사람이 성령님의 충만함을 입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개인의 종교적 체험이 아닙니다. 어느 한 사람만 특별히 충만해졌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남녀노소 할것없이 모두가 다 성령님으로 충만해졌습니다. 여기에 교회론적 의미가 잇습니다. 나아가 충만의 궁극적 목적은 하나님의 말슴을 담대히 전하게 되는데에 있습니다.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성령님충만의 목적이 장사가 잘되고 시험 합격하는데에 있지 않습니다.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데에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의 본문말씀을 통하여 고난의 선교적 의미와 그 효과적 의미를 알게 되었습니다. 다시한번 깊이 생각해보십시오. 기도와 응답 사이에 아주 중요하고도 미묘한 관계가 있습니다. 보십시오. 저들의 기도 속에는 충만하게 해달라는 소망이 없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평생 사도행전을 연구한, 사도행전의 세계적 권위자인 모리야라는 학자가 쓴 책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사도행전에는 성령님충만 자체를 위하여 기도한 흔적이 없다’ 사도행전에는 충만하게 해주세요 하는 기도가 없다는 말입니다. 다만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해주세요 하고 기도했더니 충만해지더라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돈벌게 해주세요 하고 기도했더니 돈벌게 해주셨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 좀 많이 하게 해주세요 하고 기도했더니 돈이 벌리더라는 말입니다. 그것이 다릅니다. 돈 많이 벌게 해주세요 하고 기도하면 “그것으로 무엇을 하려느냐”하고 하나님께서 물으실 것입니다. 결국 성령님충만 자체는 은사요 선물인 것입니다.
그런데 저들은 그 선물 자체를 구하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히 전하게 해주세요 하고 열심히 구했더니 거기에 필요한 충만함을 주셨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거기에 필요한 용기도 이적도 표적도 능력도 주셨습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나로 하나님의 일을 하게 해주세요, 하나님의 일을 힘써 할 수 있게 용기를 주세요’라고 기도할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학자금도 주시고 지혜도 주시고 건강도 주실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가만히 앉아서 ‘건강 주세요’하니 하나님게서 ‘건강 주면 다른 짓만 하는 녀석이 건강을 달라고만 조르는 구나’하시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건강 자체를 위하여 기도할 것이 아닙니다. 오래 살기만을 구하는 것이 얼마나 바보같은 기도입니까 얼마나 불신앙적인 기도입니까 다시한번 오늘의 본문말씀을 자세히 보십시오.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해주세요’ 하고 기도했더니 성령님이 충만해졌다고 말씀합니다. 결국 충만은 개인적 신비체험이 아닌 것입니다. 충만은 복음 전파를 위한 필수불가결의 요소인 것입니다. 저들의 궁극적 목적은 핍박을 면하자는 것도 아니요 안일하자는 것도 아니요 영광을 누리자는 것도 아니요 명예를 구하자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히 용기있게 전하자는 데에 있습니다. 그래서 저들은 ‘핍박을 두려워하지 않고 말씀을 전하게 해주세요, 순교를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히 말씀을 전하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한 것입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게서 성령님충만과 이적과 기사와 권능을 주셨습니다. 이 맥락을 우리가 분명히 이해애야 할 것입니다. 오늘도 그렇습니다. 소극적인 기도는 하지 마십시오. 자꾸 뒤로 도망가면서 ‘하나님, 저로 복음을 전하게 해주세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해주세요’하는 것은 잘못된 기도입니다. ‘나 자신을 제물로 바쳐도 좋고 핍박을 받아도 좋고 환난도 좋고 가난도 좋고 질병도 좋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해주세요.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히 전하게 해주세요’하고 신심으로 구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이에 필요한 모든 은사를 더하실 것입니다. 충만함을 더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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