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지지 않는 사람 (행4:32-37)
본문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잊을 수 없는 사람들이 생깁니다. 특별히 목회를 하는 과정에서는 더 더욱이 그렇습니다(좋은 경험으로, 고통으로). 여러분은 성경의 인물중 누구를 가장 좋아하십니까 저는 많은 인물중에 바나바를 좋아 합니다. 이런 성도가 우리 교인이었으면 하는 생각이 듭니다. 바나바에대한 자세한 소개는 말씀을 증거하며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여러분 성경에 나오는 의리의 사나이를 알고 계십니까 그는 이스라엘의 초대왕인 사울왕의 아들 요나단입니다. 그는 위대한 업적을 남긴 사람이 아닌데도 이 사람을 생각할 때마다 우리의 마음이 뭉클하게 됩니다. 요나단은 다윗이 죽으면 왕권에 대한 라이벌이 제거되는 셈이고
그렇다면 자기가 쉽게 왕이 될 수 있었지만 그에게는 왕보다 한 인물이 더욱 중요했기에 왕좌를 버리고 친구를 택했습니다. 그는 업적이나 감투보다 친구가 얼마나 소중한가를 보여주는 삶을 살았습니다. (요즘 이런 친구 있습니까) 여러분은 예수님에 의하여 높이 평가된 겸손의 사람이 누구인 줄 알고 계십니까 바로 세례요한입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마지막선지자로서 그의 외침 앞에 사람들은 누구나 나와서 회개하고 세례를 받고 새삶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분명히 그시대의 영웅이였고 정신적인 지주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등단하자 마자 요한을 따르던 무리들이 예수님을 따르기 시작합니다. 이때 요한의 제자중 한사람이 이렇게 말합니다. 요즘 말로 쉽게 바꾸면 "선생님 이래도 되는 겁니까 선생님의 제자들까지 예수를 따르고 있습니다." 이 말을 뒤집어 말하면 "선생님은 질투도 안나십니까"라는 뜻일 겁니다(새로생긴 옆집이 장사가 더 잘되면 여러분은). 이때 세례요한은 그 유명한 이야기를 합니다. "그는 흥하여야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주인공은 바로 저분이시요 자기는 들놀이 일뿐이라는 겁니다. 이것이 요한의 대답이었습니다. 오늘날 많은 세월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가 우리의 신앙적 모범이 되고 있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인간의 야심보다도 하나님의 영광을 중심했던 신앙의 겸손 때문인줄 압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에 바나바는 어떤 사람 이길래 잊혀지지 않는 사람이요 보고싶은 사람일까요
1. 바나바가 잊혀지지 않는 이유는
1) 그는 헌신의 사람 이었기 때문입니다(37).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너무나 타산적이요 계산적입니다. 조그만 이익과 손해를 생각하며 등을 돌리는 그런 시대 입니다. 이런시대에 계산을 초월하고 살았던, 그리고 더 높은 가치를 위해서 헌신할줄 았았던 바나바가 그리워 집니다. 본문 36-37절에 보면 성도들이 교회사역을 위해 자신의 밭을 팔아 헌납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때나 이때나 부동산처럼 확실한 재산이 없었나봅니다. 이사람 바나바도 자기의 밭을 팔아 하나님께 헌납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의 초대교회가 가난했으면서도 가난하지 않았던 이유가 바로 이러한 사람들의 헌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성도들은 가난했지만 풍성하게 살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풍성은 바나바가 같은 사람들의 모범을 통해 이루워 졌습니다. 그의 이름은 원래 요셉이었지만 사람들은 그에게 "바나바"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습니다.(36절) 이는 "격려의 아들권고하고 위로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바나바로 인하여 권고 받고 위로 받고 도움 받은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별명을 붙여준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속에서 관심 있는 현상은 바나바의 헌신으로 바나바가 존경 받고 칭송을 받는 것을 보고 "나도 바나바처럼 존경을 받아 보았으면."하는 사람들이 생겨 난다는 것입니다. 그중 한사람이 바로 다음 장에 나오는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입니다. 그래서 그들도 밭을 팔았습니다.
그런데 팔고보니 너무나 아깝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반을 뚝 떼어서 감추어 두고 사도들에게는 전체인 것인양 갖다 바쳤습니다. 그리고 이제자기들도 "바나바와 같이 존경을 받겠지"하고 생각했을 겁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온 결과는 존경이 아니라 비극적인 종말이었습니다. 그들의 헌신의 동기는 주님앞에 정말로 드리고 싶어서 보다 바나바의 인기가 탐나서 드린것입니다. 그들의 헌신의 동기는 분명히 불순한 육신적 동기였습니다. 시기로 시작한 헌신이요, 과장된 헌신이요, 거짓된 헌신이었습니다. 바나바의 헌신과 얼마나 차이가 있습니까 바나바의 헌신은 남이 알아주기를 원하는 헌신이 아니었습니다. 내가 이만큼 헌신하고 이 만큼 드렸으니 내가 교회 안에서 이 만큼의 발언권을 가져야 한다는 의식조차 없었던 사람입니다. 요즈음 교회가 가지고 있는 문제중 하나가 바로 이러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바나바는 자기가 드린것에 대하여는 일체 왈가왈부하지 않았던 사람입니다. 그저 사도들 발앞에 두었다고만 했지 "이것을 어디어디에 써야합니다."라고 주장한 흔적은 전혀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과 뜻을 위해 쓰여질 때 나의 뜻대로 쓰여지지 않았다 하더라도 거기에 족할 줄 아는 헌신이 참 헌신인 것입니다. 오늘날 소위 헌신, 봉사, 헌금. 등이 자기 PR을 동기로 시작되는 경우가 많은데 인정 받으려는 동기, 체면의동기,. 이러한 동기가 남무하는 상황속에서 바나바의 헌신은 우리에게 숙연한 교훈을 던져주고 있습니다. 마치 옥합을 깨뜨린 여인같이, 초월적인 헌신을 하고 드려진 것으로 만족했던 이 바나바가 성도들과 목사의 마음속에 잊혀지지 않는 사람인 것입니다.
2) 사람을 세워주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행9:27) 저와 여러분이 살고 있는 이사회는 경쟁사회이기에 성취를 최고의 목표로 삼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때문에 사회 모든 분야에서 전쟁을 치루고 있습니다. 입시전쟁, 취업전쟁, 생존경쟁, 수출경쟁, 출근전쟁.등 이미 우리는 전쟁속에 살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정말로 심각한 것은 목표만을 추구 하다 보니 인간성은 짖밟히고 인간을 단지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되어 버리고 마는 인간성 상실에 더 큰 문제가 있습니다. 이러한 시대에서 행9장에 나오는 바나바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커다란 교훈을 던져주고 있습니다. 행9장의 첫머리는 사울이 주의 제자들을 잡으려고 살기등등하여 떠나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그러나 다메섹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 변한 후 제자들과 사귀고자 제자를 찾아가나 제자들은 그를 경계하여 믿어주질 않습니다. 조금전 까지만 해도 예수믿는 사람들을 잡아 죽이는 사람이었기에 당연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이때 바나바가 등장하여 사울의 신원을 보증합니다. (27) "내가 저사람을 보증하겠습니다. 이사람은 참으로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했습니다. 이 사람은 장차 주님의 큰 일군이 될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람을 믿어야합니다. 여러분, 내가 저 사람을 보증할테니까 믿어주십시오." 그의 보증과 변호 덕분에 바울은 비로소 사도로서 첫 걸음을 시작한것입니다. 그때 그가 바울을 변호해 주지 않았다면 과연 오늘의 바울이 있었겠습니까 바나바의 사람에 대한 이 태도는 바울의 경우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에 대해서도 다 마찬가지 였습니다. 행15장에 기록된 마가에 대한 바울과의 의견 충돌때도 마찬가지 였습니다. 1차 전도 여행기간중 떠나간 마가를 다시 데리고 가자는 바나바와 그런 사람은 데리고 갈수 없다는 바울과 의견이 대립된 것입니다. 바나바는 마가를 열심히 변호합니다. "이 사람에게 한번 더 기회를 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한번의 실수로 어찌 사람을 판단할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그 실수 때문에 더 열심 일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마가도 데리고 갑시다." 그러나 결국은 바울은 실라를 데리고 갔고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전도여행을 떠났습니다. 먼훗날 마가는 바나바의 말대로 훌륭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바울이 말년에 마가에 대한 고백을 보면 "이 복음의 사역을 위해 내가 동역자가 필요하니 마가를 내게 보내주십시오" 바울이 이렇게 말할 정도로 그는 훌륭한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때 만약 바나바가 마가를 보호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오늘날 인간성은 대단히 변해가고 있습니다. 인간은 목표를 성취하는 수단으로 전락해버렸습니다. 심지어 교회안에서까지 서로를 헐뜯고, 비난하고, 조롱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이 얼마나 바나바가 그리운 시대입니까 이러한 상황속에서 여러분은 바나바와 같이 살지 않으시렵니까 한사람에 대한 가능성을 보고 그 가능성을 키워주는 사람, 비록 그의 과거가 우리를 실망시켰어도 그가 가진 한가지 장점이 주님께 붙잡히는 그날, 그가 큰 인물이 될것을 믿고서 바나바와 같이 외치지 않으시겠습니까 비판하기 보다, 버리기 보다, 기하기 보다. 그 사람을 믿어주며, 힘들고 약하고 쓰러져 있는 형제의 손을 붙잡고 함께 가자고 소리치는 바나바 같은 이사람이 부럽지 않습니까
3)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는 신앙 때문입니다. 행11장에는 바나바의 또 다른 아름다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바나바가 안디옥교회에 목회자로 초청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바나바가 부임한 그 날 부터 안디옥교회는 부흥하기 시작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옵니다. 바나바의 인기는 최고였습니다. 그러나 그 많은 일을 바나바가 혼자 감당하기 어렵자 그는 바울을 초청하여 함께 동역하기 시작합니다. 이때 바나바가 옹졸한 목회자였다면 바울을 데리고 오는 것을 꺼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인기나 명예, 성취욕보다도 하나님의 일이 더욱 중요한 관심사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을 불렀고 그가 오자마자 교회는 더욱 부흥하기 시작합니다. 바나바의 판단이 적중했습니다. 그리고 바울이 있었기에 비로소 안디옥 교회는 세계선교의 센터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사도행전에서 바울과 바나바의 표기가 변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1장 이전에는 "바나바와 사울이"라고 기록되었지만 이 일 후에는 "바울과 바나바가"로 바뀌고 있습니다. 세계선교위 주체가 바나바에서 바울로 옮겨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에서 바나바의 불평이나 원망은 전혀 볼 수 없습니다. 그는 침묵으로 기쁘게 서서히 사라지고있습니다. 바울이 자기의 뒤를 이어서 하나님의 사역을 계속 감당 하는 이것이 전혀 섭섭하지 않았던 이사람, 그는 철저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사람이었습니다. 자기의 인기, 체면, 목표보다도 주님의 사역이 더욱 활발하기를 원했던 바나바, 여러분은 이런 사람이 그립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될 수 있다면, 주의 교회가 좀더 부흥될 수 있다면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감사하며 주를 섬기리라"고 살았던 사람 바나바, 자기의 체면이 세워지는 것, 다른 사람에게 인정 받고 존경 받는 것, 이것은 그의 일차적 관심사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오로지 주의 일이 부흥되기 원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승리하기를 원했던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기를 원했던사람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구원 받기 원했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그리스도의 제자로 성숙하기를 원했던 사람이 바로 바나바였습니다. 이 목적이 이루어 지기 위해서라면 자기는 조용히 사라져도 좋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오늘의 한국교회가 더욱 필요로 하고 있는 인물이 있다면 바울보다는 오히려 바나바일지 모릅니다. 모두가 지도자만 되려는 이시대에서 바나바와 같이 섬기는 자가 얼마나 필요합니까 어떠한 자리가 위대한 자리입니까 어떤 사람이 위대한 사람입니까 하나님이 나를 부르시고, 세우신 그자리에 이름 없이 빛도 없이 묵묵히 그 일을 감당할때 비로소 그 자리가 위대한 자리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는 자기는 바울이 될 수 없음을 잘알았습니다. 그러나 바울을 발견하여 그를 세우는 것이 자기의 사명임을 알았던 이 사람 바나바, 바울을 자기 자리에 세우고 자기는 무대 뒤로 조용히 사라졌던 바나바, 여러분은 이 바나바가 그리워 지지 않습니까 우리 모두 다 바울이 될 수 없습니다. 전세계를 세차례나 걸쳐 여행하면서 복음을 증거하는 바울이 될 수 없을지라도 적어도 우리는 바나바는 될 수 있습니다. 넘어져 있는 한사람을 일으켜 세우며 "성도님 일어나야 합니다.집사님 수고하셨습니다.전도사님 힘을 내십시오" 이 한마디를 통해서 바울 같은 일군을 만드는 바나바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교회는 바울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더 많은 바나바도 필요합니다. 이 바나바와 같은 사람 잊혀지지 않는 사람이 되시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렇다면 자기가 쉽게 왕이 될 수 있었지만 그에게는 왕보다 한 인물이 더욱 중요했기에 왕좌를 버리고 친구를 택했습니다. 그는 업적이나 감투보다 친구가 얼마나 소중한가를 보여주는 삶을 살았습니다. (요즘 이런 친구 있습니까) 여러분은 예수님에 의하여 높이 평가된 겸손의 사람이 누구인 줄 알고 계십니까 바로 세례요한입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마지막선지자로서 그의 외침 앞에 사람들은 누구나 나와서 회개하고 세례를 받고 새삶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분명히 그시대의 영웅이였고 정신적인 지주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등단하자 마자 요한을 따르던 무리들이 예수님을 따르기 시작합니다. 이때 요한의 제자중 한사람이 이렇게 말합니다. 요즘 말로 쉽게 바꾸면 "선생님 이래도 되는 겁니까 선생님의 제자들까지 예수를 따르고 있습니다." 이 말을 뒤집어 말하면 "선생님은 질투도 안나십니까"라는 뜻일 겁니다(새로생긴 옆집이 장사가 더 잘되면 여러분은). 이때 세례요한은 그 유명한 이야기를 합니다. "그는 흥하여야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주인공은 바로 저분이시요 자기는 들놀이 일뿐이라는 겁니다. 이것이 요한의 대답이었습니다. 오늘날 많은 세월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가 우리의 신앙적 모범이 되고 있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인간의 야심보다도 하나님의 영광을 중심했던 신앙의 겸손 때문인줄 압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에 바나바는 어떤 사람 이길래 잊혀지지 않는 사람이요 보고싶은 사람일까요
1. 바나바가 잊혀지지 않는 이유는
1) 그는 헌신의 사람 이었기 때문입니다(37).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너무나 타산적이요 계산적입니다. 조그만 이익과 손해를 생각하며 등을 돌리는 그런 시대 입니다. 이런시대에 계산을 초월하고 살았던, 그리고 더 높은 가치를 위해서 헌신할줄 았았던 바나바가 그리워 집니다. 본문 36-37절에 보면 성도들이 교회사역을 위해 자신의 밭을 팔아 헌납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때나 이때나 부동산처럼 확실한 재산이 없었나봅니다. 이사람 바나바도 자기의 밭을 팔아 하나님께 헌납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의 초대교회가 가난했으면서도 가난하지 않았던 이유가 바로 이러한 사람들의 헌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성도들은 가난했지만 풍성하게 살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풍성은 바나바가 같은 사람들의 모범을 통해 이루워 졌습니다. 그의 이름은 원래 요셉이었지만 사람들은 그에게 "바나바"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습니다.(36절) 이는 "격려의 아들권고하고 위로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바나바로 인하여 권고 받고 위로 받고 도움 받은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별명을 붙여준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속에서 관심 있는 현상은 바나바의 헌신으로 바나바가 존경 받고 칭송을 받는 것을 보고 "나도 바나바처럼 존경을 받아 보았으면."하는 사람들이 생겨 난다는 것입니다. 그중 한사람이 바로 다음 장에 나오는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입니다. 그래서 그들도 밭을 팔았습니다.
그런데 팔고보니 너무나 아깝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반을 뚝 떼어서 감추어 두고 사도들에게는 전체인 것인양 갖다 바쳤습니다. 그리고 이제자기들도 "바나바와 같이 존경을 받겠지"하고 생각했을 겁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온 결과는 존경이 아니라 비극적인 종말이었습니다. 그들의 헌신의 동기는 주님앞에 정말로 드리고 싶어서 보다 바나바의 인기가 탐나서 드린것입니다. 그들의 헌신의 동기는 분명히 불순한 육신적 동기였습니다. 시기로 시작한 헌신이요, 과장된 헌신이요, 거짓된 헌신이었습니다. 바나바의 헌신과 얼마나 차이가 있습니까 바나바의 헌신은 남이 알아주기를 원하는 헌신이 아니었습니다. 내가 이만큼 헌신하고 이 만큼 드렸으니 내가 교회 안에서 이 만큼의 발언권을 가져야 한다는 의식조차 없었던 사람입니다. 요즈음 교회가 가지고 있는 문제중 하나가 바로 이러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바나바는 자기가 드린것에 대하여는 일체 왈가왈부하지 않았던 사람입니다. 그저 사도들 발앞에 두었다고만 했지 "이것을 어디어디에 써야합니다."라고 주장한 흔적은 전혀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과 뜻을 위해 쓰여질 때 나의 뜻대로 쓰여지지 않았다 하더라도 거기에 족할 줄 아는 헌신이 참 헌신인 것입니다. 오늘날 소위 헌신, 봉사, 헌금. 등이 자기 PR을 동기로 시작되는 경우가 많은데 인정 받으려는 동기, 체면의동기,. 이러한 동기가 남무하는 상황속에서 바나바의 헌신은 우리에게 숙연한 교훈을 던져주고 있습니다. 마치 옥합을 깨뜨린 여인같이, 초월적인 헌신을 하고 드려진 것으로 만족했던 이 바나바가 성도들과 목사의 마음속에 잊혀지지 않는 사람인 것입니다.
2) 사람을 세워주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행9:27) 저와 여러분이 살고 있는 이사회는 경쟁사회이기에 성취를 최고의 목표로 삼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때문에 사회 모든 분야에서 전쟁을 치루고 있습니다. 입시전쟁, 취업전쟁, 생존경쟁, 수출경쟁, 출근전쟁.등 이미 우리는 전쟁속에 살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정말로 심각한 것은 목표만을 추구 하다 보니 인간성은 짖밟히고 인간을 단지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되어 버리고 마는 인간성 상실에 더 큰 문제가 있습니다. 이러한 시대에서 행9장에 나오는 바나바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커다란 교훈을 던져주고 있습니다. 행9장의 첫머리는 사울이 주의 제자들을 잡으려고 살기등등하여 떠나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그러나 다메섹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 변한 후 제자들과 사귀고자 제자를 찾아가나 제자들은 그를 경계하여 믿어주질 않습니다. 조금전 까지만 해도 예수믿는 사람들을 잡아 죽이는 사람이었기에 당연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이때 바나바가 등장하여 사울의 신원을 보증합니다. (27) "내가 저사람을 보증하겠습니다. 이사람은 참으로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했습니다. 이 사람은 장차 주님의 큰 일군이 될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람을 믿어야합니다. 여러분, 내가 저 사람을 보증할테니까 믿어주십시오." 그의 보증과 변호 덕분에 바울은 비로소 사도로서 첫 걸음을 시작한것입니다. 그때 그가 바울을 변호해 주지 않았다면 과연 오늘의 바울이 있었겠습니까 바나바의 사람에 대한 이 태도는 바울의 경우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에 대해서도 다 마찬가지 였습니다. 행15장에 기록된 마가에 대한 바울과의 의견 충돌때도 마찬가지 였습니다. 1차 전도 여행기간중 떠나간 마가를 다시 데리고 가자는 바나바와 그런 사람은 데리고 갈수 없다는 바울과 의견이 대립된 것입니다. 바나바는 마가를 열심히 변호합니다. "이 사람에게 한번 더 기회를 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한번의 실수로 어찌 사람을 판단할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그 실수 때문에 더 열심 일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마가도 데리고 갑시다." 그러나 결국은 바울은 실라를 데리고 갔고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전도여행을 떠났습니다. 먼훗날 마가는 바나바의 말대로 훌륭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바울이 말년에 마가에 대한 고백을 보면 "이 복음의 사역을 위해 내가 동역자가 필요하니 마가를 내게 보내주십시오" 바울이 이렇게 말할 정도로 그는 훌륭한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때 만약 바나바가 마가를 보호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오늘날 인간성은 대단히 변해가고 있습니다. 인간은 목표를 성취하는 수단으로 전락해버렸습니다. 심지어 교회안에서까지 서로를 헐뜯고, 비난하고, 조롱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이 얼마나 바나바가 그리운 시대입니까 이러한 상황속에서 여러분은 바나바와 같이 살지 않으시렵니까 한사람에 대한 가능성을 보고 그 가능성을 키워주는 사람, 비록 그의 과거가 우리를 실망시켰어도 그가 가진 한가지 장점이 주님께 붙잡히는 그날, 그가 큰 인물이 될것을 믿고서 바나바와 같이 외치지 않으시겠습니까 비판하기 보다, 버리기 보다, 기하기 보다. 그 사람을 믿어주며, 힘들고 약하고 쓰러져 있는 형제의 손을 붙잡고 함께 가자고 소리치는 바나바 같은 이사람이 부럽지 않습니까
3)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는 신앙 때문입니다. 행11장에는 바나바의 또 다른 아름다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바나바가 안디옥교회에 목회자로 초청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바나바가 부임한 그 날 부터 안디옥교회는 부흥하기 시작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옵니다. 바나바의 인기는 최고였습니다. 그러나 그 많은 일을 바나바가 혼자 감당하기 어렵자 그는 바울을 초청하여 함께 동역하기 시작합니다. 이때 바나바가 옹졸한 목회자였다면 바울을 데리고 오는 것을 꺼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인기나 명예, 성취욕보다도 하나님의 일이 더욱 중요한 관심사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을 불렀고 그가 오자마자 교회는 더욱 부흥하기 시작합니다. 바나바의 판단이 적중했습니다. 그리고 바울이 있었기에 비로소 안디옥 교회는 세계선교의 센터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사도행전에서 바울과 바나바의 표기가 변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1장 이전에는 "바나바와 사울이"라고 기록되었지만 이 일 후에는 "바울과 바나바가"로 바뀌고 있습니다. 세계선교위 주체가 바나바에서 바울로 옮겨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에서 바나바의 불평이나 원망은 전혀 볼 수 없습니다. 그는 침묵으로 기쁘게 서서히 사라지고있습니다. 바울이 자기의 뒤를 이어서 하나님의 사역을 계속 감당 하는 이것이 전혀 섭섭하지 않았던 이사람, 그는 철저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사람이었습니다. 자기의 인기, 체면, 목표보다도 주님의 사역이 더욱 활발하기를 원했던 바나바, 여러분은 이런 사람이 그립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될 수 있다면, 주의 교회가 좀더 부흥될 수 있다면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감사하며 주를 섬기리라"고 살았던 사람 바나바, 자기의 체면이 세워지는 것, 다른 사람에게 인정 받고 존경 받는 것, 이것은 그의 일차적 관심사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오로지 주의 일이 부흥되기 원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승리하기를 원했던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기를 원했던사람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구원 받기 원했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그리스도의 제자로 성숙하기를 원했던 사람이 바로 바나바였습니다. 이 목적이 이루어 지기 위해서라면 자기는 조용히 사라져도 좋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오늘의 한국교회가 더욱 필요로 하고 있는 인물이 있다면 바울보다는 오히려 바나바일지 모릅니다. 모두가 지도자만 되려는 이시대에서 바나바와 같이 섬기는 자가 얼마나 필요합니까 어떠한 자리가 위대한 자리입니까 어떤 사람이 위대한 사람입니까 하나님이 나를 부르시고, 세우신 그자리에 이름 없이 빛도 없이 묵묵히 그 일을 감당할때 비로소 그 자리가 위대한 자리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는 자기는 바울이 될 수 없음을 잘알았습니다. 그러나 바울을 발견하여 그를 세우는 것이 자기의 사명임을 알았던 이 사람 바나바, 바울을 자기 자리에 세우고 자기는 무대 뒤로 조용히 사라졌던 바나바, 여러분은 이 바나바가 그리워 지지 않습니까 우리 모두 다 바울이 될 수 없습니다. 전세계를 세차례나 걸쳐 여행하면서 복음을 증거하는 바울이 될 수 없을지라도 적어도 우리는 바나바는 될 수 있습니다. 넘어져 있는 한사람을 일으켜 세우며 "성도님 일어나야 합니다.집사님 수고하셨습니다.전도사님 힘을 내십시오" 이 한마디를 통해서 바울 같은 일군을 만드는 바나바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교회는 바울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더 많은 바나바도 필요합니다. 이 바나바와 같은 사람 잊혀지지 않는 사람이 되시지 않으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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