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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사회를 향한 꿈 (행2:42-47)

본문

우리는 오늘 우리 교회의 설립 7주년을 맞이하면서 우리 교회가 추구하는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인지를 다시 한번 확인하려고 합니다. 이 목표를 분명히 한다는 것은 우리 교회가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며,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위치가 어디인지도 확인하게 되고, 우리의 문제점을 진단해 볼 수 있다는데 그 의의가 있습니다. 저는 이번 기회를 통하여 우리 교회 성도들이라면 누구나 우리 교회가 이 지역 사회에 존재하는 이유를 진술하고,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어떤 교회가 되어야 하며, 어떤 방법론을 가지고 있는지를 설명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특히 방법론 문제에 대하여서는 다음 시간에 논의하려고 합니다). 우리 교회의 설립 7주년을 맞이하면서 성경말씀을 통하여 첫 번째로는 우리 교회의 존재목적이 무엇인지를 확인하고, 두 번째로는 우리 교회가 어떤 모습을 이루어야 하는지, 세 번째로는 그러한 교회가 될 때 하나님께서 어떤 결과를 주시는 지를 함께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1. 우리 교회의 존재목적 우리 교회가 이 지역에 존재하는 목적이 무엇일까요 우리가 이 문제를 이해하기 위하여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과 교회를 세우신 목적을 해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과 교회의 존재목적은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한 두 가지로 정의할 수 있는 성격은 아닙니다만 크게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범죄한 인간을 구원하여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님과 영원토록 교제하는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하나님 나라를 회복하여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첫 번째 목적인 예수님이 범죄한 인간을 구원하여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님과 영원토록 교제하는 생명을 주시려는 일에 대하여 여러 가지로 진술하고 있습니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19:10)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20:28)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10:10)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동네에서도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 이는 이 일로 보내심을 입었노라."(눅4:43)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두 번째 목적은 완전한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 위함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작정의 궁극적인 목적이기도 합니다. 인간은 에덴동산에서 범죄함으로 하나님 나라에서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인간에게 죽음이 오게 되었고, 하나님께서 만드신 세상은 인간의 죄로 인하여 고통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하여 완전한 나라를 이루시기를 원하셨습니다. 이 일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나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엡1:10)고 하였습니다. 여기에 "통일되다"(-)라는 말은 헬라어 성경에서 아주 특이하게 사용되는 표현으로서 한 머리 안에서 새로운 질서를 가진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우주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회복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질서를 가지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물론 이것은 지금 이 세상에서 이룰 수 있는 문제도 있고, 주님이 재림하실 때 이룰 수 있는 문제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로는 죄인을 죄에서 구원하여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님과 교제하는 생명을 얻게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는 완전한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하나님의 통치를 받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왜 교회를 세우셨을까요 교회는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수행하기 위함입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사도 바울은 교회를 가리켜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였습니다(엡1:23). 이 말이 의미하는 가장 중요한 뜻은 교회는 머리되신 그리스도의 뜻을 수행하는 몸이라는 뜻입니다. 교회는 복음을 전파하여 사람을 구원하여 하나님과 교제하는 생명을 얻게 해야 합니다. 또한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서 하늘 위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있는 모든 것들, 예를 들면 정치, 경제, 문화, 환경, 가정, 교육, 이성, 철학 등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받게 해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는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일이라고 표현합니다. 바로 이것들이 우리 교회가 존재하는 목적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목적을 이루시기 위하여 세상 가운데 그의 백성들을 선택하시고 교회를 이루게 하셨습니다. 교회는 세상 가운데 부르심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공동체입니다. 이 공동체는 하나님의 말씀이 통치원리가 되어 이 말씀의 지배를 받습니다. 그리고 이 공동체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머리되신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하나님의 뜻을 세상에 전파하여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존 스토트 목사님은 교회를 "하나님의 새로운 사회"라고 하였습니다. 그가 이렇게 부른 것은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창조하시려는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으로 이루는 공동체라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는 하나님의 새로운 사회의 특징을 설명하기를 죽음이 아닌 생명, 분열과 소외가 아닌 일치와 화해, 사악함과 부패가 아닌 건전한 의의 표준, 증오와의 투쟁이 아닌 악과 부단한 투쟁이라고 하였습니다.
일반적으로 다양한 형태의 사람들인 모여 사는 집단을 사회라고 정의합니다. 사회학자들은 이 사회를 여러 가지 형태로 정의하며 개인과의 관계를 규정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교회를 하나님의 새로운 사회라고 부르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한 목적으로 이루기 위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의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거룩한 목적을 이루시기 위하여 세움을 받은 하나님의 새로운 사회입니다. 이 교회에 목사와 교사를 세우시고 조직 교회를 이루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세계 각 지역에 흩어져 있는 택한 백성들을 위하여 지역별로 교회를 세우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이해하는 지역교회(local church)입니다. 우리 한샘교회도 한국이라는 나라 안에서, 대전시 유성이라는 지역에서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하여 세워진 교회입니다. 우리 교회가 이 지역에 세워진 것도 역시 두 가지 중요한 목적이 있습니다. 첫 번째로는 이 지역을 중심으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여 생명을 얻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두 번째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서 이 지역이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하나님 나라를 이루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교회 안에 목사와 교사, 그리고 집사들을 세우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직분자를 세우신 목적에 대하여 말하기를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엡4:12)고 하였습니다. 우리 교회는 전체 주님의 교회의 한 지체요, 이 지역에서 복음을 전파하여 구원을 얻게 하고, 또한 구원받은 사람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르쳐서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가기 위하여 세움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교회에 직분자를 세운 것은 교회의 성도들을 말씀으로 세워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세상에서 그 기능을 다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아직까지 복음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구원을 얻게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서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데 있습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우리 교회는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이루기 위하여 세움을 받은 하나님의 새로운 사회입니다. 우리는 이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일에 꿈을 가져야 하고, 여기에 삶의 목적을 두어야 합니다.
2. 우리 교회의 존재모습 그러면 우리는 우리 교회가 존재하는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어떤 모습을 가져야 할까요 이 점은 오순절에 사도들에 의해 처음 교회가 세워졌을 때 초대 예루살렘 교회의 모습을 통하여 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 교회는 오늘날 교회의 존재모습이 어떻게 되어야 하겠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중요한 모델이 됩니다. 사도행전 2:42-47은 우리에게 아주 잘 알려진 본문입니다. 이 말씀의 전체적인 서론은 42절이고, 거기에 대한 설명이 43-46절이며, 결과가 47절입니다. 이 말씀의 서론격인 42절에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사실 이 말씀은 우리 개역한글판이 잘못 번역되었습니다. 우리 번역에 따르면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고 그 결과로 교제하고, 떡을 떼고 기도하는 일에 힘쓰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원문의 의미는 사도들의 가르침과 교제와 떡을 떼는 일과 기도가 모두 동격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우리 번역에 "전혀 힘쓰니라"고 하는 말은 헬라어 성경에 프로스-카르테레오(-)라고 하는 말인데 계속적으로 헌신하는 것을 말합니다. 성령님강림시에 사람들이 성령님이 임한 이후에 사도적인 가르침(, teaching)과 교제하는 일과 떡을 떼는 일과 기도하는 일에 열심을 내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 본문의 핵심적인 내용인데 이것들을 차례로 생각해 보면서 우리 교회 공동체가 어떤 모습을 지니고 있어야 하는지를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성경공부하는 공동체 처음 교회는 베드로를 위시한 사도들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이 중심이 되었습니다. 이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에 열심을 내었습니다. 사도들의 가르침이라는 것은 사도행전의 문맥에서 보면 구약성경과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설명하는 것이었습니다. 즉 성경을 배우는 일에 열심을 내었습니다. 새로운 회심자들이 당시에 나타난 기적이나 여러 가지 체험에 관심을 기울인 것이 아니고 사도들의 가르침에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초기의 성도들은 세례를 받아서 성령님을 받았기 때문에 성령님만이 유일한 교사라고 생각하여 다른 인간적인 교사가 없어도 된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사도들을 통하여 가르침을 받는 일에 열심을 내었습니다. 오늘날 성령님을 받았다고 자칭하는 사람들은 아무에게도 가르침을 받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습니다만 그것은 아주 잘못된 것입니다. 또한 성경을 읽으면 저절로 이해가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이것도 잘못되었습니다. 물론 성경을 읽을 때 성령님이 깨닫게 하시고 감동을 주시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린이가 자라서 글을 깨우치기 시작할 때 재미있다가 다음부터는 스스로 연구하여 깨우쳐야 하듯이, 처음 믿을 때는 성경이 재미가 있다가 믿음생활의 연륜이 깊어질수록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신앙의 연륜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더 성경을 공부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 교회와 한국교회의 실정은 어떤지 아십니까 신앙의 연륜이 깊어지면 배울 것이 없다고 생각하고 성경을 공부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영적으로 점점 메말라 갑니다. 교회의 제일 중요한 존재모습은 성경을 배우고 가르쳐야 합니다.
(2) 교제하는 공동체 초대 예루살렘 교회는 교제하는 일에 힘썼습니다. 이 교제는 헬라어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데 코이노니아라는 말인데 이것은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나눔, 참여, 섬김, 협력, 친교라고 하는 의미로 폭넓게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 의미는 우선적으로 함께 나누는 것을 표현합니다. 이 교제의 특성에 대하여 44-45절에 잘 표현이 되어 있습니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나눠주고" 초대 예루살렘 교회는 그들의 가진 것으로 자발적으로 구원받은 믿음을 표현하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재물을 가지고 있으면서 나누지 않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요일3:17). 초대 예루살렘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진정한 교제의 모습이 있었는데, 이러한 모습이 오늘 우리 교회에도 있기를 바랍니다.
(3) 예배하는 공동체 초대 예루살렘 교회의 세 번째 특징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이 일에 또한 열심을 내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42절에 "떡을 떼며 기도하며"라고 되어 있고, 46-47절에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떡을 떼는 일을 어떤 사람들은 성도들이 모여서 함께 식사하는 교제로 이해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사실 이 절을 문법적으로 볼 때 얼마든지 이렇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만 동격입니다. 초기 단계에 있어서의 성만찬은 지금 행하는 것처럼 간소화되고 정제된 예식은 아니었습니다. 초대교회 당시의 성만찬 풍습을 고린도전서 11장을 보면 잘 알 수가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당시의 성만찬이 식사 가운데 일부였다고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만찬에 관하여서는 우리가 성찬에 참여할 때마다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만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예식의 형식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것이 상징하고 있는 내용적인 의미를 기억하고 행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성찬의 가장 핵심적인 내용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인데 성찬은 그 죽으심을 기념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성도들이 모일 때마다 떡을 떼었다고 하는 것은 성찬의 내용적인 의미를 기억하고 하나님께 예배하였다고 하는 것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배는 본질적으로 우리를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하고 존경과 경의를 바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도 모일 때마다 우리를 죄악 가운데서 구원해 주신 것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존경과 경의를 나타내어야 합니다.
(4) 기도하는 공동체 초대교회의 예배에서 주님의 죽으심과 관련된 지식을 확인하고 체험하는 성찬예식과 함께 기도 역시 예배의 중요한 부분이었다고 하는 것을 이 본문에서 잘 볼 수 있습니다. 42절에 "기도하기에 전혀 힘쓰니라"고 하였습니다. 기도하는 일에 대하여서는 다른 요소들처럼 설명이 나타나지 않습니다만 46절에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썼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47절에는 "하나님을 찬미하며"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는 당시의 예배가 말씀을 듣는 일과 성찬에 참여하는 일과 기도하는 일과 하나님을 찬미하는 일들이 모두 예배의 중요한 요소였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물론 여기서의 기도는 개인기도라기 보다는 공동으로 하는 기도, 즉 기도회의 성격이었다고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개인이 하는 것이 아니고 성전에서, 또는 각자의 집에서 함께 모여서 하는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이들의 기도내용이 무엇인지 이 본문에 기록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잘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도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약속에 말씀에 전제가 되어 있는 것이고, 또한 그 말씀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라여 행하는 것이 기도하고 하는 사실을 이해한다면 이들의 기도는 사도의 가르침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고 하는 것은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고백하고 있는 웨스트민스터 소교리문답 제88문에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이루신 모든 구속의 은혜를 우리에게 전하는 외적인 방편을 말하고 있는데 그것은 말씀과 성례와 기도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것을 고려해 볼 때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신 구속의 은혜와 여러 가지 약속들을 기억하고 기도하는 일은 하나님의 약속을 우리 생활에 현실화시키는 구체적인 방법이라고 하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참고 약 4:1-3). 저는 우리 교회가 기도하는 일에 열심을 내기를 바랍니다. 우리 기도가 힘이 없는 이유는 하나님이 필요하다는 절박감이 없기 때문입니다. 기도에 대하여 추상적인 지식은 많이 가지고 있는데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기도하는 일에 힘을 기울여야 합니다.
(5) 백성들에게 칭찬듣는 공동체 초대교회 성도들은 또한 백성들로부터 칭찬을 들었습니다. 이들이 칭찬을 들었던 이유들은 구체적으로 명시도어 있지 않습니다만 분명한 구별되는 특징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틀림이 없습니다. 백성들에게 칭찬듣는 생활은 참 중요합니다. 우리가 여러 차례 생각한 바가 있습니다만 신자의 삶이라고 하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표현이기 때문에 우리의 삶을 보고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마5:13-16). 그러나 오늘날 우리 한국교회와 우리 모든 성도들은 이 점에 있어서 너무 부끄러운 부분이 많이 있습니다. 사회로부터 칭찬을 듣기보다는 "저 돼지 같은 기독교인들!"이라고 하는 욕을 듣고 있는 형편입니다. 그것은 돼지처럼 지극히 자기 중심적일 뿐만 아니라 자기의 유익을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을 판단하는 거울이 된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백성들로부터 선한 행실로 인하여 칭찬듣는 모습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어떤 교회의 모습을 가져야 할까요 초대 예루살렘 교회처럼 성경을 공부하는 공동체, 교제하는 공동체, 예배하는 공동체, 기도하는 공동체, 백성들에게 칭찬듣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교회의 모습을 기억하고 항상 이러한 모습을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3. 그 결과:구원받는 자들을 더하게 하심 초대 예루살렘 교회에 이러한 일에 힘쓰게 될 때 하나님께서 어떤 결과를 주시고 있는지를 마지막 47절에서 잘 볼 수 있습니다. "주께서 구원받은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하나님께서 구원받은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셨습니다. 여기서 구원이 실제적인 주도권을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다고 하는 것을 잘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초대교회 성도들이 전도하지 않았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사도들은 복음을 전하였고, 그 복음을 듣고 사람들은 회개하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순종하였습니다. 그래서 전도라고 하는 말이 없어도 전도하였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로마서에 사도 바울이 기록하고 있는 대로 전도라고 방편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찾으시기 때문에 이 본문에 기록되어 있지 않아도 사도들의 말씀을 통하여 자기 백성을 구원하신다고 하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롬10:13-17).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떤 일을 하는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교회의 모습을 가지느냐 하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강림하실 때의 초대 예루살렘 교회에 보여주셨기 때문에 이러한 교회의 모습을 가지려고 힘써야 합니다. 이러한 모습을 가지게 될 때 하나님께서 구원받은 자들을 더하게 하시고, 또한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해야할 일은 하나님께서 모든 결과를 책임져 주신다는 사실을 믿고 겸손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서 주의 일에 힘써야 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 교회 설립 7주년을 기념하면서 우리 교회의 존재목적과 존재모습을 함께 살펴보았습니다. 우리 교회가 이 지역에 세워진 것은 이 지역을 중심으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여 구원을 얻게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서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의 새로운 사회로서 새로운 통치원리를 가지고 이 시대를 개혁하는 일에 앞장서야 합니다. 이 일을 잘 감당하기 위하여 우선적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가르치는 일에 힘을 기울이며, 예배생활과 기도생활에 더욱 열심을 내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교회의 모습이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칭찬듣는 삶으로 나타나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을 우리가 계속 유지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에 큰 부흥을 주시리라 믿습니다. 우리 교회는 이 세상에 있는 여느 다른 사회 공동체와는 분명히 구별되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하나님의 거룩한 목적을 이루어 드리는 하나님의 새로운 사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새로운 사회로서의 이 교회에 대한 거룩한 꿈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이 꿈을 이루기 위하여 우리는 우리 교회의 모습을 하나님의 원하시는 모습을 잘 단장하는 노력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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