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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증보판 세상 (마9: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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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에서 책을 고르다 보면 이따금씩 눈에 띄는 글귀가 있습니다. 이름하여 수정-증보판이란 덧붙임말 입니다. 말그대로 원래 기록된 글을 약간 수정하고 덧붙혀서 펴낸 책이란 뜻이겠습니다.
그러므로 “수정-증보한 새것”은 일종의 새로움이면서 그 새로움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는 것입니다. “새것이라 불리우면서도 결코 새롭지 않은 것”은 물론 이것 말고도 우리가 무수히 경험해왔던 바입니다. “새롭다”고 말하면서 여전히 뿌리를 내리고 있는 곳은 전혀 바뀌지 않는 시절을 우리는 겪어왔고, 우리는 새로움의 시절이라고 불리우는 지금도 여전히 새로움의 진정한 내용에 다가서지 못한 느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분명합니다. 속 내용은 그대로인데 포장만 요란하게 바꿔치기 했거나, 표면의 색깔만을 살짝 덧칠한 상태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진정한 새로움을 경험할 수 없는 이른바 “수정증보판 세계” 속에서 우리는 새로움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서를 통해 우리는 “회칠한 무덤”이라는 표현을 우리는 읽을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향해 “너희는 겉은 그럴싸해 보이지만 그 속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썩은 것이 가득 차 있는 회칠한 무덤 같다(마태23:27)”라고 말합니다. 속에 위선과 불법이 가득한 상태에서 요란한 겉치장이나 약간의 새로운 덧붙임이 어떠한 새로움의 경험을 가져다 줄 수 있을 지는 너무다 분명한 것입니다. 새롭다는 것은 “전혀 비교될 수 없는 새로움”이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새로움은 “단(斷끊을단)”에서 시작됩니다. 이사를 할 때 미련이 남아서 수십년 동안 끌고다니던 낡은 물건들을 계속 끓어안고 있다면 제한된 공간에 새로운 물건이 자리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버려야할 것들을 버릴 때 새로운 것의 자리가 생기는 법입니다. 미적거리고 주춤거리는 동안 새로움은 사라져버리고 옛것의 연장선에서 수정증보한 별반 달라지지 않은 현실이 있을 뿐입니다. 수정증보한 것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은 이미 한계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더는 나아갈 수 없는 지점이 너무나도 분명한데 약간의 수리 작업만을 고집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때 그때 문제가 되는 것을 때우기식으로 수리하는 일만을 되풀이 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새로와지는 것과 별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근본적인 내용은 그대로이고 마음속의 심지나 가치에 대한 평가방식도 그대로인데, 옷만 바꿔입거나 표면에 생겨난 약간의 흠집을 때운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용기”입니다. 타성에 젖어 더는 새로움이 있을 수 없는 관행 속에서 과감하게 벗어나는 용기 말입니다. 돌파구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도 바로 이러한 것입니다. 예수께서 언제나 “새로움의 경험” 속에 있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오늘 성서에는 예수께서 생각했던 “새로움의 내용”을 읽을 수 있습니다. 예수는 시작할 때는 새롭다가 시간의 흐름과 함께 역시 퇴색하고 변질되고마는 것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날마다 새로워지는, 오히려 낡아지게 하고 퇴색되게 하는 요소들을 거스르는 새로움을 말하신 것입니다. “낡은 옷에다 새 천조각을 대고 깁는 것”(9:16)이나, “낡은 가죽부대에 새 포도주를 담는 것”(9:17)은 결코 새로움일 수 없다고 말합니다. 오히려 더 못쓰게 만들어버리고 새로움이라고 말했던 것 조차도 다 쏟아버려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게 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새포도주는 새부대에 담아야 한다”(9:17)고 우리에게 강조하여 말합니다.
“새로워지기 위해 낡은 것을 버려야 하는 당연한 이치”를 쉽사리 지나치거나, 생각의 구석에 밀어놓은 것은 아닌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호흡하며 살기 위하여 뱃 속의 죽은 것들을 몸밖으로 내보내야 한다”는 상식적인 원리를 너무나도 가볍게 생각하는 것은 아닌가하는 생각입니다. 새로움은 이렇게 옵니다.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새로움은 이러한 원리를 통하여 언제나 현재의 사건이 됩니다”. “언제나 새롭다는 것”은 새로움이 고정된 하나의 상태가 아니라, 계속하여 낡은 것을 거스르며 끊는 용기이면서 끊임없이 싸우는 움직임이란 사실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새로움이라고 말했던 것이 어느새 우리를 또다시 옭아매고 더는 나아가지 못하게 하는 사슬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예수께서 생각하신 새로움의 내용 속에는 “수정-증보”라는 것이 없습니다. 낡은 것에 미련을 두고 미적거리며 추춤 주춤거리는 모습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러한 새로움에 대한 감흥이나 갈망이 사라져 버린 것입니까 이러한 새로움을 위한 “단(斷)”의 사건이 우리와는 무관한 것입니까 새로와지기를 거부하는 순간부터 우리는 이미 죽음의 상황 속에 있는 것인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새로움 만나게 될 때 오히려 생각과 몸이 경직되고 굳어지는 이유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오늘은 어린이주일 입니다. 이 땅의 어린이들이 더 이상 “회칠한 무덤”과 같은 세상을 물려받지 않도록, 건강하고 언제나 새로운 세상을 만나도록 기도하며 이를 위하여 결단하는 시간입니다. 전혀 비교도 될 수 없는 새로움의 세상를 만들어가는 기쁨을 생각하면서, 수정-증보판 새로움을 거부하고 고정되지 않는 새로움의 움직임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지금까지 이야기 한대로 새로움을 담는 그릇은 역시 그 내용에 걸맞는 것이어야 합니다. 지금 우리 공동체 속에, 우리 안에 경직된 부분을 도려내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우리를 뿌리로 부터 살리는 방법임을 기억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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