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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저의 가치 (마1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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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스개 소리로 “아들과 딸 소품”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적이 있습니다. 이따금씩 “구제품”이라는 이름으로 교회에 전달되는 물건들이 있습니다. 물론 모든 것이 그렇지야 않겠지만 상당 부분의 물품이 마치 “아들과 딸”이란 드라마에 소품으로 사용하면 좋을 것들이 들어있는 경우를 봅니다. 어떤 의도는 없었겠지만 “거저 주는 것”을 “단지 집구석에 공간만 차지하는 것이어서 처분해야 하는데 마침 가져가겠다고 하니 준다”는 정도로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여겨집니다. “거저줌”을 단지 자신에게 ‘있어도 없어도 그만인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없어도 크게 손해나지는 않기 때문에 주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면 아주 “거저”에 대해서 오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애초 사람들이 이기적인 존재들이어서 항시 자기중심으로 생각하고 “거저”라는 말에 소스라치게 놀라 꽁무니를 빼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더군다나 자신에게 있어서 이득이 있다고 생각되는 부분에 대해서는 더욱 그러합니다. 그래서 아주 생색이 나는 경우이거나, 어떤 식으로든 자신에게 도움이되고 유익이 되는 경우에 마지못해서 “거저”라는 이름으로 “주고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거저”라는 말을 새로이 읽어야 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아무런 대가를 따지지 않고 고스란히 주는 것”이라고 읽으면 될까요. “거저”라는 단어를 말입니다. 그것이 가치없는 겁데기일 뿐이어서가 아니라, 하나도 손색이 없는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이면서도 따져묻지 않고 거저주는 것입니다. 자로 잰듯 정확해야 하고, 따져 묻고, 이해득실을 계산하는 “조건부 거래” 속에서는 “거저의 행동”이란 어리석은 행위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러나 “거저”라는 말을 “정작 있어야 할 곳에 있도록 돌려주는 것”으로 본다면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이 될 것입니다. 너무나 소중한 것이기 때문에, 게다가 값을 매길 수 없을 만큼 가치가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냥 주는 방법밖에 없는 경우”에 “거저”라는 표현이사용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자신에게 ‘있으나 없으나 상관없는 것’이기 때문에 ‘아무 생각없이 건네주고는 잊어버리는 식으로 주는 것’과는 아주 다른 이야기 입니다. “거저주는 일”은 주고 받음이 하나인 경우를 말합니다. 아주 정성스럽게 준비한 소중한 선물을 사랑하는 이에게 건네주었다면 그것은 물건을 단지 건네주었다고 생각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을 내어준 것입니다. 성서는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주어라”고 말합니다. 제자들이 받은 것은 “온갖 뒤틀리고 어그러진 것을 바로잡는 힘”입니다. “앓는 사람을 고쳐주고 죽음 사람을 일으켜 세우며, 나병환자는 깨끗게하고 마귀를 내어쫓는”, 이른바 “사람다움을 앗아가고 죽이는 온갖 세력을 물리치는 힘”입니다. 이것은 세상과 사물을 바라보는 새로운 방식을 지니게된 것을 뜻합니다. 거짓되고 그릇된 상황에 아무 생각없이 끌려다녔었지만, 이제 더 이상 그럴 수 없다는 것이지요.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 나라의 진실되고 생명적인 그 생생한 움직임을 보고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뒷짐지고 구경이나 하거나 논쟁이나 하는 대상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리게 됩니다. 이렇게 그들이 “거저줌을 실천하는 것”은 “약한 이들의 아픔을 더 이상 무심코 지나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그들은 발딛고 서있는 곳의 문제를 자신의 삶 속에 들여 놓습니다. 그것은 더 이상 자신과 별개의 것이 되지 않습니다. 아픔이 있는 곳에 그들은 자신을 내어주는 것입니다. 이는 자신에게 있으면 좋고 없어도 그만인 물건을 아무런 생각도 없이 던져놓고 잊어버리는 알량한 생색과는 아주 다른 이야기 입니다. 오직 자신의 아픔이며 자신의 문제이기 때문에 당연하게 그 아픔에 참여하고 그 어그러진 것을 바로잡습니다. 이것은 하나도 어색한 일이 아닙니다. ‘눈을 뜨고 본 것을 확신있게 이야기 하는 것’ 만큼 자연스럽고 분명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거저주라”는 말은 “보고 깨달은 대로 움직이라”는 준엄한 명령으로 들립니다.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울어도 가슴을 치치않는” 요지부동 완고한 마음을 가진 이들은 “거저주라”는 말에 오히려 움츠러들 뿐입니다. 그러나 이 쇳소리 나는 세상을 우리가 살아가면서 이미 받은 것, 다시말해 “확신으로 자리 잡은 것”들을, 하나님 나라의 상식에 해당되는 것들을 우리 모두의 삶 속에 심어놓아야 합니다. 하나도 어색하지 않은 이 자연스로운 걸음 속에 사람답게 살아가는 “거저의 가치”가 담겨 있습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주어라” 가서 화해하라
본 문:마태 5:21-26 “그러므로 제단에 예물을 드리려 할 때에 너에게 원한을 품고 있는 형제가 생각나거든 그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그를 찾아가 화해하고 나서 돌아와 예물을 드려라.” “먼저해야할 것을 하지 않아 잃을 그르치는 경우”를 보아왔습니다. 이를테면 우선순위를 제대로 찾지 못하여 생겨난 일이겠습니다. 우선적으로 움직여야 하는 아주 상식적인 일이면서도 “먼저” 손이 가지 않는데는 여러 이유가 있을 수 있겠지만 아마도 무엇이 중요한지를 정말 몰라서 일 수도 있겠고, 어쩌면 손해보지 않으려는 속셈이 앞섰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생각이 심하게 굽어있어서 분명 그릇된 방향을 걷고 있으면서도 “이 길이 옳다, 틀림없다”고 확신하며 움직이는 경우이겠습니다. 어찌되었던 이 모든 경우 결국에자신에게 당도하게될 허탈한 결과들을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먼저 해야할 일을 바르게 찾아내는 눈”이 정말 필요합니다. “예배만능주의”가 한국 기독교를 그르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성서는 줄곳 “삶이 곧 예배이어야 한다”고 말해왔는데, 풀어말한다면 “호흡하는 모든 경우에 하나님의 정의로운 뜻이 깃들어 있어야 하고, 이것은 어느 제한된 공간과 시간에 갇혀 있을 수 없는 일이다”라는 이야기 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말뜻을 “자 어서 매일 매일 교회로 모여라 거룩한 예배를 바쳐야 한다”고 해석해 버렸습니다. 교회는 “모임과 흩어짐의 긴장”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모임은 흩어져서 해야할 일을 고민해야 합니다. 모여야 할 필요에 대해서 생각했다면 “그만큼 흩어져서 건강하게 살아야할 일에 대하여, 모든 공간과 시점에서 하나님의 뜻을 풀어내야할 일에 대하여” 생각해야 합니다. 모여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꾸며진 예배를 바쳐야 한다고 생각했다면, 그 일에 우선하여 풀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성서에서 예수는 “그러므로 제단에 예물을 드리려 할 때에 너에게 원한을 품고 있는 형제가 생각나거든 그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그를 찾아가 화해하고 나서 돌아와 예물을 드려라”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먼저”라는 말에 주목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제한된 공간 속에서 “밀실회담”하듯 이루어 지거나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구체적인 인간관계 속에서 국제적인 관계속에서 이루어 져야 합니다. 이 한 많은 한반도의 역사 속에서 밝혀지고 이루어 져야 합니다. 먼저 할 것이 있다면 바로 땅딪고 서 있는 이곳에서 하나님의 뜻을 헤아려 내는 일입니다. 이것을 밀쳐두고 밀실속에서 하나님을 찾으려 한다면 결코 그를 만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 민족이 지금 발딛고 서 있는 땅의 현실, 곧 뼈에 사무치는 분단의 현실을 그대로 내벼려 두고, 밀실 속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는 없습니다. 형제를 거절하고 욕하면서, 이방인 중의 이방인으로 취급하면서 하나님을 밀실속에서 찾으려 하는 태도는 더이상 바르게 평가될 수 없습니다. 분단을 지속시키려는 그 어떠한 세력도 화해하시고 해방케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용납될 수 없는 것입니다. “통일 희년의 해”로 선포된 1995년을 두해 앞두고 우리의 민족통일에 대한 생각은 어디에 이르렀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자유를 잃어버린 백성들에게 땅을 빼앗긴 백성들에게 노예로 전락한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희년의 해방을 선포합니다. 이것은 본래 저마다 누려야 할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는 것입니다. “제 모습을 찾는 희년의 기쁨은 한반도 역사 속에서 민족 통일의 기쁨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바라며 우리가 먼저 힘써야 할 일의 내용입니다. 더이상 밀실회담하듯 하나님을 만나려 말아야 합니다. 먼저 해야할 일 속에서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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