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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와 너희 (엡1:11-14)

본문

오늘은 본문에 나타난 ‘우리’라는 말씀이 갖는 뜻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엡 1:11-12)“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12)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우리로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본론' 여기서 ‘우리’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말미암아 영원한 소망과 기업을 얻게 된 모든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13-14절에가면, 또 다른 ‘우리’의 부류에 속한 사람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14)이는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 11절에서 십자가의 구속 사역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들을 총괄해서 ‘우리’라고 했는데도 불구하고, 13절에서는 “너희도 그 안에 부름을 받았다”라고 이야기 합니다. 다시말해, 너희도 ‘우리’의 부류 가운데 부름 받았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의 부류에 속하지 않다가 ‘우리’의 부류에 속하게 된 ‘너희’가 누구일까요 그것은 이방인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 차등이나 구별이 있어서 ‘우리’와 ‘너희’라는 말로 따로 호칭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렇게 굳이 사도 바울이 따로 부르는 이유는 우리에게 밝히고 싶은 중요한 내용이 있어서인 것입니다. 앞의 10절에서, (엡1:10)“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영원하신 경륜을 따라서 유대인 뿐만 아니라, 이방인, 곧 헬라인이라 할지라도 차별이 없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르셔서 그리스도 안에서 한 구원받은 백성으로 통일되게 하시려는 뜻을 가지고 계신다는 의미입니다. 바로 이같은 일을 지금 그리스도 안에서 시작하셨고, 이루어 가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어디서 증명이 되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예전에 있었던 유대인과 이방인이라는 구별이 없어지고 유대인과 이방인이 차별이 없이 다시 통일된 것에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지금 ‘우리’라고 하면서도 ‘너희도’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모두가, 전 인류가, 온 세상이, 온 우주가 하나님과 화목되며 다시 그 질서를 찾으며 재통일되는 것을 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가지신 계획이신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이 재림하시는 날, 온전히 완성되겠지만, 이미 지금 시작되었고, 진행되어 가고 있는 중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구별이 없이 ‘하나로 통일되어 만난다’는 이 하나님의 계획과 비밀들이 실현되는 것을 설명하는 곳곳에서 교회가 등장합니다. 여러분이 에베소서를 처음부터 끝까지 자세히 읽어보면 중간중간 필요할 때마다 이 ‘교회’가 자꾸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교회란 그리스도 안에서 중생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서 차별이 없이 화목되는 재통일이 가시적으로 모임인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차별이 없습니다. 물론 이에 대해서 동의하지 못하고 이의를 제기할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아니, 교회 가도 차별은 있던데요’라고 말하고 싶은 분이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 사람의 신앙이 나빠서 그렇게 유독 보이는 것입니다. 원래는 차별이 없는 곳입니다. 그 차별없는 그것이 보여야 신앙이 있는 것입니다. 교회란 원칙적으로 차별이 없고 어떤 반목과 싸움이 없이 통일되고 조화되고 화목된 자들이 모이는 유일한 장소입니다. 그것이 교회입니다.
그런데 신자들이 그렇지 못하고 반목하고 싸우고 차별하는 자들이더라!는 것으로 교회를 그런 장소인줄로 오해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만, 교회를 그렇게 이해하면 실패합니다. 교회와 신자를 말할때,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사실을 떼어놓고서는 절대로 이야기가 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자라는 뜻도 되지만, 그리스도와 결부되지 않고서는 그 존재 자체가 불가능한 사람이란 뜻입니다. 다시말해, 지금 그리스도가 중요하고, 우리는 거기에 얹혀 있는 사람입니다. 내가 더 중요하고 내가 그리스도를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가 더 중요하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선택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뿌리와 근거가 주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않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라고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혹 믿음이 부족하여 자신이 좀 나타나서 교회 안에서 차별이 있게 보이게 되고, 신자들이 조금 혼란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과도기적인 일시적 현상에 불과한 것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것이 본래의 교회의 모습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부족하고 문제있는 사람들을 서서히 변화시키실 것이고, 그것은 먼저된 자들의 인내와 사랑이 있어야 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도 차별이 있더라는 말 대신에 ‘바로 저런 사람도 교회 안에 들어와 바뀌어진다!’는 믿음의 눈을 가져야 합니다. 이 믿음이 없으니까, 아우성이요 낙심하고 시험에 빠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자의 존재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3장 4절 이후에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빌3:4-9)“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만하니 만일 누구든지 다른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5)내가 팔일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6)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 (7)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8)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9)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이것이 신자의 존재원리 입니다. 사도 바울이 알고 있는 신자라는 존재는 주님 안에서 발견되는 것입니다. 신자란 단지 주를 믿는다는 것으로는 아직 부족합니다. 주님께서 나를 붙잡고 있는 분이시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존재는 주님의 계획 속에 있는 존재요, 주님께서 그의 품에 안으신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라는 존재의 주체자가 내가 아니라, 주님이십니다. 다시말해, 내가 주님을 붙잡고 있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나를 붙잡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럴 때에 참 신자가 되는 것입니다. 신앙이란 결국 주님께서 나를 붙잡고 계시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내가 주를 붙잡았다는 이야기는 그 다음의 이야기입니다. 내가 주를 붙잡아도 주께서 나를 붙잡지 않으면 그것은 헛된 것입니다. 그러나 주께서 붙잡지 않은 자가 주를 붙잡을 수 없기 때문에 내가 주를 붙잡고 있다고 고백하는 자는, 다 주께서 붙잡은 자인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된다’고 할때의 그리스도라는 말의 의미를 잘 알아야 합니다. 그리스도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메시야라는 말을 그대로 번역한 것으로서,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이 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하면며, 우리를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그의 뜻을 시행하시기 위하여 보낸 종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그 속에 하나님의 계획이 포함되어 있고, 그 계획과 뜻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엄청난 구속 사역을 뜻합니다. 그러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향하여 베풀어주신 엄청난 사역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첫째, 원죄와 자범죄와 조상의 죄로 영원히 죽을 수 밖에 없는 우리를 영원한 대 제사장이 되시고, 자신이 친히 화목제물이 되사 우리에게 단번에 대속과 의인의 반열에 올려 주신 엄청난 제사장적 사역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둘째, 이 땅에 인생들이 참 길과 진리와 생명이 무엇인지 몰라서 방황하며 죽어가고 있을 때, 그리스도께서 참 생명의 길과 진리를 가르켜 주시는 영원한 마지막 선지가가 되셔서 우리에게 참생명이 진리를 주신 선지자적 사역이 또한 포함되어 있습니다.
셋째, 에덴 동산에서 우리 인생을 파멸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었던 그 사단은 지금도 우리를 죄와 악의 영원한 지옥의 파멸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으려고 할때, 그 모든 사단의 세력을 단번에 이기시고 우리를 건지신 왕적 사역이 또한 그리스도라는 이름에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같은 엄청난 사역이 바로 우리를 위해서 이루어졌고, 주어졌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이라고 할때, 그 말 속에는 엄청난 복음의 비밀이 감추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신자란 자신의 노력과 됨됨이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입니다. 그러기에 교회 안에도 차별이 있더라는 이 말은 아직 신앙의 허상을 쫓아가는 말입니다. 다시말해, 사람의 눈을 따라서 하는 말이지,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놀라운 은혜와 사역을 바라보는 눈으로 말하는 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은혜의 복음으로 유대인이나, 이방이나 할것없이 다 통일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롬3:19-20)“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율법을 받은 자들은 유대인들 뿐입니다.
그런데 율법의 행위로 하나님 앞에 의롭다함을 얻을 육체가 없습니다. 다시말해 율법을 지켜서 구원을 얻을 유대인은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갈3:26절부터 보면, (갈3:26-29)“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27)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입었느니라 (28)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29)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남자나 여자나 상관이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만 구원을 얻습니다. 뿐만아니라, 아브라함의 자손은 유대인만이 아니라, 이방인까지 포함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엡1:10절 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 모든 것이 새롭게 다시 통일되게 하려는 하나님의 계획이 예수 그리스도를 보냄으로 시작되고 완성되어져 가고 있는 것입니다. 구원이란 유대인도, 이방인도, 모두 구원을 얻는데, 이것이 교회를 통하여 잘 나타나 보여지고 있습니다. 교회는 주님을 머리로 한 지체들이 모여서 한 몸을 이룹니다. 거기에는 조화가 있고, 화목이 있고, 협력이 있습니다. 주님만 머리입니다. 다 지체입니다. 여기는 몸이 서로 싸우는 것은 자신을 해하는 것과 같습니다. 왜냐면 한 몸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교회를 통하여 하늘과 땅에 있는 것이 재통일되는 영원한 진리와 생명의 약속이 성취되어가는 것을 목도하게 됩니다. 이것을 엡2:1-6 에서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엡2:1-6)“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2)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3)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4)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5)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6)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이렇게 우리는 이방인이었고, 율법을 모르는 자요, 하나님을 모르는 자였는데, 하나님의 긍휼로 하나님과 함께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전에는 도무지 유대인과 함께 할 수 없고, 반목할 수 밖에 없었는데, 이제는 통일되게 됩니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큰 한국병 중에 하나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무슨 지연이나, 학교, 파벌, 배웠다, 못배웠다, 가졌다, 안가졌다고 하는 것으로 구분하는 싸움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는 이런 것이 싸움이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를 믿는 순간 우리에게는 세상이 가졌던 가치와는 전혀 다른 가치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가지는 가치는 언제나 ‘싸움하는 가치’이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가치는 언제나 ‘남을 살리는 가치’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신자에게 끊임없이 무엇을 요구하느냐 하면, ‘양보하라!’는 겁니다. 이 말은, 우리 본성이 양보를 잘 하지 않으려 하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명령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뿐만아니라, 신자는 교회 안에서 세상과는 전혀 다른 원리로 산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함입니다. 신자가 교회에서는 항상 남을 위해서 내가 죽을 지언정, 나를 위해서 너가 죽어라!고는 절대 하지 않는 곳입니다. 이게 신자 사이의 관계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얻기 위해서 다른 사람을 죽여야 됩니다. 먼저 가진 자를 죽여야 됩니다. 내가 가진 것을 보호하기 위해서도 남을 죽여야 됩니다. 이것이 가장 크게 다른 점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유대인들이 율법을 가지고 이방인들을 개 돼지로 취급하며 무시하고 영적으로 죽였습니다. (엡2:15)“원수 된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여기서 왜 율법이 원수된 것이라고 하느냐 하면 이 율법 때문에 유대인들이 자기들은 지키지도 못하면서 폼으로만 갖고 있으면서 이방인들을 무시하고 죽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항상 이런 식입니다. 그래서 인간이란 무의식적으로 잘난척 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선악과를 따먹은 이유입니다.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있다는 마귀의 유혹에 마음이 움직인 것은, 그 마음 바탕에 무엇이든지 깔고 앉으려는 유아독존식 사고방식이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이 무서운 죄입니다. 그래서 똑똑하게 보이는 사람치고 그 똑똑한 것으로 상대방을 편안하게 배려하려는 똑똑한 사람을 본적이 없습니다. 언제든지 모든 사람을 깔고 뭉개려는 똑똑함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 점을 바로 아셔야 합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에게 똑똑하게 비치려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도 없습니다. 교회는 똑똑한 사람, 뭐든지 끝내주게 똑 부러지는 확실한 사람보다도, 겸손한 사람을 필요로 합니다.
그러므로 교회란 우리가 옛날에 들었던 동화속에 나오는 금술 좋은 부부와 같은 곳입니다. 금술 좋은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사셨습니다. 할머니는 언제나 할아버지가 하시는 일에 대해서 ‘잘했다!’고 합니다. ‘잘했군, 잘했어!’입니다. 어떤 날, 할아버지께서는 암소를 팔러 갔습니다. 가다가 당나귀와 바꾸었습니다. 또 가다가 돼지와 바궜습니다. 그 돼지를 또 오리와 바꾸었습니다. 이렇게 바꾸다가 나중에는 콩인가를 갖고 돌아왔습니다. 할머니가 뭐라고 했는지 아십니까 ‘염감, 잘했소!’ 그랬답니다. 여러분, 제발 서로서로에게 이렇게 좀 해주시기 바랍니다! ‘잘했소! 얼마나 수고가 많으셨습니까 암소를 갖고 나가서 콩을 만들어 오시느라고!’ 이렇게 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아시겠습니까 가정이 이래야 되고, 교회가 이래야 됩니다. 교회는 어느 쪽에서나, 어느때나 누구든지 어떤 일에 대하여 성질을 내거나, 눈을 부릅뜨고 일을 왜 이런 식으로 하였느냐며 시끄러운 마음을 가지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교회는 이래야 됩니다. 교회는 금술좋은 할아버지 할머니와 같이 서로에 대하여 부정적인 말을 최대한 줄이며 화합해 나가는 곳입니다. 이렇게 하여 교회가 어디로 이끌려 갑니까 엡2:19절을 보십시다. (엡2:19-22)“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20)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21)그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22)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이렇게 교회는 통일되고, 조화되고, 화목과 평안으로 완성시키기 위하여 하나께서 세우신 기관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십자가로만 이 교회 안에 들어옵니다. 그리고 이 교회 안에 들어온 자들은 모두가 원래부터 가지고 있던 반목과 싸움을 벗어던지고 화목하여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경주가 있을 뿐입니다. 이것을 위하여 부름을 받았고, 아직 잘 안되어지는 것을 훈련받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가 항상 강조하고 요구하는 것은 언제나 인내, 순종, 양보입니다. (마16:24)“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그렇습니다. 언제나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가 죽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2장식으로 말하자면, (빌2:5-8)“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8)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죽는 것만 해도 어려운데, 거기에 무슨 죽음이냐 하면,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십자가’라는 표현은 죽음의 처절함을 뜻합니다. 그리고 그 죽음은 억울함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 죽음은 오해된 것을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최고의 고통이 수반된 죽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신자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연합하기 위하여 십자가의 죽음을 본받아, 자기를 죽이고, 억울함도 참고, 오해도 견디고, 처절하고 참담한 고통을 감당하여 연합하고 화목함으로 통일되어야 합니다. (엡4:1-6)“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2)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3)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4)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5)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6)하나님도 하니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이 말씀은 엡1:10절 말씀과 통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모든 것이 이제 재통일 되는 것입니다. 다시 반목이 없습니다. 싸움이 없습니다. 불만이 없습니다. 이것은 신자라면 마땅히 해야할 일입니다. 주를 뒤쫓아 마땅히 자기 십자가를 질 것이요, 양보할 것이요, 님을 나보다 낫게 여길 것이요, 죽기까지 복종할 것이요, 모든 것 가운데 언제나 사랑을 품고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결론' 여러분, 예수를 믿으면, 더 이상 고생하지 않아도 되고, 오해도 없고, 변명하거나 양보하는 것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가만히 있어도 무엇이 생기고, 무엇이 이루어질 줄로 생각하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죽기까지 복종하셨을 때에 비로소 일이 이루어졌습니다. 저절로 되는 것이 없습니다. 지금 우리는 누두든지 자기를 위하여 산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습니다. 우리는 다 사나 죽으나 주의 것입니다. 신자가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한 평안이 없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양보하지 않고, 여러분이 죽지 않는 한은 어느 곳에서든지 싸움은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여러분의 자존심 때문에 못박히고, 여러분의 참지 못하는 것 때문에 피를 흘렸습니다. 또 다시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고 피를 흘리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제는 그리스도의 빛이 온 세상에 비취고, 그 영광이 땅위에 편만하도록 살기로 결심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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