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된 조건인 믿음과 사랑 (엡1:15-16)
본문
오늘 본문은 앞에있는 3-14절까지 말씀과 뒤에있는 17-23절 말씀을 이어주는 연결고리가 됩니다. 앞에 있는 3-14절까지는 하나님의 구원계획과 우리를 통하여 성취하고자 하는 영광된 소망이 우리 것이 되려면, 15절에 나타나 있는 신자의 자리에 있지 않으면 이것이 현실화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17-23절까지는 신자된 자리에 있게하기 위하여 우리에게 무엇을 허락하셨는가 하는 것들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15절에 나타나 있는 신자의 자리란 무엇입니까 (엡1:15)“이를 인하여 주 예수 안에서 너희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을 나도 듣고” 하나님께서 우리 신자들에게 약속한 축복들을 이루기 위해서는 믿음과 사랑이 자리에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15절에 나타나 있는 이 “믿음과 사랑”에 관한 것입니다.
'본론' 오늘날 신자들에게 아주 결여되어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신앙이 너무 관념적이고, 추상적이라는데 있습니다. “믿습니다!”고 외치지만 그 믿음의 외침이 분명치 않다는 것입니다. 믿음이나 사랑이 그것을 행하는 사람 위주로 취급되고 있고, 그것이 도대체 어떤 제한 조건을 가지고 있으며 어떤 방향을 가지고 있어야 하느냐 하는 문제에 관해서는 너무 생각들이 소홀히 하고 있지 않나 싶습니다.
1. 믿음이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이라야 됩니다. 본문 15절에서 ‘믿음’이라고 할때, ‘주 예수 안에 있는 믿음’이라고 분명히 못을 박습니다. ‘신자된 표’란 그 믿음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그 믿음이 대개는 믿는 사람 본인의 열심이나 주관적인 체험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빗나가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예) 어떤 신자가 신앙생활을 그냥 그럭저럭 해 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심각한 병에 걸렸습니다. 놀랍게도 치료할 수 없는 암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기도원에 가서 기도를 받고는 그 병이 나아버렸습니다. 이렇게 되고난 이후에 이분의 신앙이 조금씩 삐뚤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말하자면, 복음의 실제적인 내용, 믿음의 중심에서 약간 벗어나서 당신께서 체험한 것을 위주로 한 신앙적인 체계를 갖기 시작했고 드디어 한쪽으로 기울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얻은 바 기쁨과 체험들을 여러 사람들에게 권하고 병을 고치지 못한 사람과 자꾸만 논쟁을 벌이기 시작했습니다. 왜 이런 은혜를 체험한 사람이 문제가 되고 논쟁을 벌입니까 믿어서 병이 나았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크게 감사할 제목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예수님이 강조되어야지, 본인의 열심이나 신령한 장소와 분위기를 주장하면 방향이 빗나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언제나 믿음에 관한 말을 할때에 항상 믿음의 대상되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강조합니다. 다시말해, 예수를 믿는다고 할때에 예수님과 믿는다는 것중에서 어느것이 강조되어야 하느냐 할때, 예수님이 강조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적입니다. 만일 여기서, 자신의 열심이나 정열적인 기도의 행위에 지나치게 강조가 되면 서서히 빗나갈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라는 말이 나올 때마가 언제든지 예수 그리스도가 반드시 강조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라는 이름 속에는 그 이름이 갖는 두 가지 뜻과 그리스도라는 말의 의미를 분명히 알고 계셔야 합니다. 예수님이란 이름에 있어서 그 첫째는, 예수님의 주권성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할때, 그러면 예수님의 무엇을 믿느냐고 불어 보아야 합니다. 이때, 우리는 예수님이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분이요, 천하 만물의 주인이시요, 온천하가 그 앞에서 잠잠해야 되는 주권자 되심을 인정하고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지으신 분으로서 모든 우리의 운명과 생사화복을 쥐고 계시는 분임을 믿어야 합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믿음이라고 합니다. 만약에 극단적으로 병이 낫지 않는 것이 주님의 뜻이라고 하면 그것이 그 상황에서 최선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은 주권자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같은 주님의 뜻은 외면한채 무조건 내 생각이 다 맞는다고 고집하기도 하는데, 이럴 수는 없는 것입니다. 어떤 의사는 이런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건강한 사람은 자기 안에 있는 어떤 잠재력을 70%쯤 밖에 쓰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건강치 않는 사람은 자기 안에 있는 잠재력을 120% 활용해야 된답니다. 그러다 보면, 몸의 무리한 부분, 연약한 부분, 이런 것들을 극복하는 힘들을 만들어 낸답니다. 참으로 놀라운 이야기가 아닙니까 실제로 역사상에는 불구자나, 깊은 질병을 가진 자들이 큰 일들을 이루었었습니다. 바울이 그렇고, 칼빈 선생이 그렇고, 베토벤이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우리에게 평소에는 도무지 생각할 수 없었던 일들이 좌절과 실패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겁니다. 우리 중에 대부분은 아마 어려움이 없었더라면, 오늘 이복된 구원의 자리에 없었고, 지금도 사망의 깊은 잠에 빠져 저 세상을 방황하고 있었을 분들이 꽤 많을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계속 승리하고 출세하고 잘 되어 나갔다면, 아마 지금 눅16:19-31절에 나타나는 부자와 같이 완벽하게 지옥 아랫목에 떨어져 있었을 위인이 되었을지 모를 일입니다.
그러므로 무조건 내 소원과 내 뜻이 관철되는 것만이 축복이 아니라는 것을 알 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은 병이 지금 낫는 것이 그에게 축복이 되고, 어떤 사람은 지금 병이 낫지 않는 것이 오히려 그에게 축복이 되는 경우도 있다는 것을 깨달고 인정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게세마네 동산에서 뭐라고 기도하십니까 당신은 정말 싫은 것이었으나, “아버지, 할 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사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그렇습니다. 내 마음대로 내 소원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아버지의 뜻대로 되어지기를 소원하는 자세가 진정한 믿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다 병에서 무조건 나아야 되며, 병이 낫지 않으면 믿음이 없는 것이다!고 강변하는 것은 무리가 있는 주장인 것입니다. 나의 판단과 가치 기준에 의해 믿음을 가지는 것이 아니고, 모든 비중과 판단과 생각을 다 예수님의 생각과 판단 기준에 맞추는 것이 믿음인 것입니다. 두번째는, 그 주권성과 함께 또 믿어야 되는 것은 주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대접하시는가 우리를 향하여 어떤 마음을 갖고 계시는가를 알고 믿는 것이 바른 믿음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어떤 마음을 갖고 계십니까 우리를 사랑하는 마음을 갖고 계십니다. 이것을 믿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분입니다. 우리 부모보다도, 나 자신보다다, 나를 주님이 더 사랑하는 것을 믿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그리고 또한, 예수님의 이름 속에는 그리스도가 포함됩니다. 마16:13-20절에, 베드로가 신앙고백을 바로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라고 했습니다. 지금 우리 하나님께서는 다른 것을 원치 아니하시고, 예수님을 바로 알기를 원하십니다. 여기에서 바른 믿음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불러놓고, "내가 너희를 부른 것은 무슨 일을 시키기 위함이 아니요, 내가 너희와 함께있기 위함이다!"고 했다. 함께 있기 위함이란 올바로 깨닫게 하기를 원한신다는 뜻입니다. 사도바울이 어떻게 그런 큰 일을 하게되었느냐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알 고 바로 만났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성경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바로 알면, 역사는 얼마든지 일어납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용하실 것입니다.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고백을 하였을때, 쓰셨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라는 이 말은, 기름부음을 받는다는 뜻으로서, 선지자, 왕, 제사장이 기름부음을 받아서 임명됩니다. 그리스도란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예수님을 어떻게 알아야 하느냐 제사장, 선지자, 왕으로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여러분의 모든 죄와 재앙과 저주가 떠나가게 하시는 제사장이십니다. 또한, 예수님은 여러분에게 하나님이 말씀과 참 진리를 우리에게 전달해 주는 선지자 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부르는 순간에 하나님의 말씀과 뜻이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가 이땅에 서는 동안에 사탄의 권세로부터 우리를 보호하시고 지켜주시는 왕이십니다. 그래서 예수 이름을 부르는 순간 우리를 괴롭히는 사탄이 결박됩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 그 속에는 엄청난 비밀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을 갖는다고 할때는 거저 간단한 믿음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정확한 믿음을 가져야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의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축복과 특권과 동떨어져 있는 믿음일 경우에 그 믿음은 나의 열심일 뿐이요, 나의 정성일 뿐입니다. 믿음에는 열심과 정성도 필요하지마는 믿음의 대상에 대한 바른 이해없는 열심과 정성은 우상에 쏟는 열심과 정성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참 믿음은 우리 믿음의 대상이 되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갖고 가지는 믿음이라야 참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바른 이해없이 무조건 덤벼드는 믿음은 많은 부작용과 실수를 만들어 내고 주님께서 외면하시는 믿음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믿음의 대상인 예수님과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가 제대로 되어있지 않는 상태에서 주님을 믿는다며 열심과 정성을 쏟아 부었을 때, 실제로 여러가지 부작용이 따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오는 넉두리가 이렇습니다. ‘아니, 내가 이렇게 갈급하고 정성을 들였는데도 안해 주신단 말입니까 주님! 하는 문턱에 꼭 걸립니다.’ ‘여기서 어떻게 더 열심을 부린단 말입니까 내게 있는 것 다 바치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는데도
그런데도 응답을 안하십니까’ 하면서 문턱에 걸리게 됩니다. 이러다가 응답을 못받는 이유도 모르고 낙심되어 또 다시 그렇고 그런 신앙으로 깊이 빠져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바른 이해없는 믿음에는 응답이 없다는 사실을 명심하셔야합니다. 응답이 없는 주 원인이 바로 이것입니다. 초대 교회 당시에 유명한 인물 중 폴리갑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사도들의 제자들의 제자들에 속하는 부류입니다. AD 1-2세기 전후한 인물들입니다. 폴리갑이 80이 되어 가지고 순교를 당할 입장에 섰습니다. 이때 심문하던 자가 회유책을 썼습니다. ‘이제라도 주를 부인하면 네 목숨만은 살려주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이 제의에 대하여 유명한 대답을 합니다. ‘주께서 내 팔십 평생을 한번도 배신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제와서 어떻게 주를 배신합니까’ 이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내 열심과 내 고매한 인격을 자랑하는 것이 신앙이 아니며, 내가 얼마나 선하고 의로운가를 표현하는 것이 믿음이 아닙니다. 내가 얼마나 주를 위하여 얼마나 주를 위하여 헌신하며 열심을 가졌는가 조차도 사실은 믿음의 최고 핵심은 아닙니다. 주 안에 있는 것들이어야 합니다. (빌3:3)“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당이라” 예수를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 것, 이것이 믿음입니다. 주 안에 있어야 믿음입니다. 만일 믿음이 주 안이 아니고, 자기를 믿는 믿음이 되면 그것은 휴머니즘이라고 합니다. 다시말해, 인본주의라는 겁니다. 정신일도 하사불성(精神一倒 何事不成)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정신통일 하면 안되는 일이 없다!는 말입니다. 믿음이 이런 식으로 간다면, 믿음이라는 것을 단지, 자신의 잠재력을 분발시키는 것이 되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면된다!’는 정신입니다.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정신통일과 노력을 믿음이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불행히도, 노만 빈센트 필이 쓴 ‘적극적 사고방식’이 기독교 안에 흘러 들어와서 하면 된다는 식의 ‘적극적인 믿음’이 생겼습니다. 이것이 로버트 슐러 목사님이 역동적인 믿음이라는 말로 바꾸어 사용했습니다. 신자가 적극성을 가진다는 것 자체는 참으로 좋은 것이고, 당연히 그렇게 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인간의 잠재능력을 개발하는 싸움으로 나간다면 이것은 신앙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서 주를 믿는다고 한다면, 그것은 주님을 죽이면서 주를 믿는 것과 같습니다. 다시말해 인본주의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거기에는 주님이 없는 것입니다. 죽은 주님을 모셔 놓고 믿는다고 목소리를 외칠 뿐입니다. 다시말해 주님은 없는데, 주님의 인형 모형을 갖다놓고 믿는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믿음이란 자신을 믿는 것이어서는 절대 안됩니다. 오늘날 새시대 운동이라고 하는 것이 등장하여 초능력이니, 요가니, 단이니 하는 것들을 장려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모두 인간도 신이 될 수 있다 하면서, 인간 속에있는 무한한 가능성과 능력을 개발하고 키우는 운동입니다. 그래서 급기야는 인간이 곧 신이 될 수 있다는 사탄적 논리로 몰고 가는 것입니다. 오늘날 메스컴 신문, 텔레비전, 영화 등을 지배하는 주 사상이 바로 이 뉴에이지 사상, 즉 새시대 운동입니다. 새시대 운동은 사탄의 사상이며, 이 사상이 인간을 무한한 능력을 가진 존재로 보고, 신의 자리에 까지 추겨 세웁니다. 에덴 동산에서 우리 조상을 유혹하였던 그 마귀의 전략과 꼭같은 전략인 것입니다. 바로 이 적극적 사고방식은 이런 맥락과 통하고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셔야 합니다. 참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과 그가 우리를 사랑하셔서 죄와 저주에서 스스로 희생하심으로 우리의 저주를 벗게 하시고, 참 진리가 없는 이 땅에서 참 진리를 알게 해 주시고, 사탄이 계속 우리를 헤치고 망하게 하려는 세력으로부터 승리의 왕으로서 우리를 보호해 주시는 분으로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 믿음입니다.
2. 믿음이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 뿐만 아니라, 성도를 향한 사랑도 포 함됩니다. 그리고 이 사랑은 언제나 자신의 유익을 구치 않는 것입니다. 고전 13장에서 사랑에 대해서 설명하기를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라고 하였습니다. 사랑은 상대방의 유익을 구하는 것입니다. 내가 사랑한다는 것을 광고하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같은 참 사랑이란 어디서 부터 나오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주인이 되고, 우리는 전부 서로 동등하게 졸병이 되었을때만 나옵니다. 만일 내가 주인이 되면 모두는 내 하인으로 부립니다. 그때는 사랑이 동정이 되고, 우월감의 표시가 되어 버립니다. 조심하셔야 됩니다. 이 참 사랑은 성경 어디서나 발견되는 것입니다. (마22:36-40)“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37)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여기서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첫째 계명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인데, 둘째를 설명할때 ‘둘째는 그와 같으니라’고 합니다. 첫번째 것과 똑같다는 뜻입니다. 다시말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이웃을 사랑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주권자로 모시고 우리가 그 앞에 무릎을 꿇을 때에만 우리는 동류를 만납니다. 서로서로가 동등해 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안 계시고 내가 주인이 되어 버리면, 우리는 모두 왕이 되고, 나 외에 모든 사람들은 신하로 봅니다.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은 예외없이 모두 나 외에 모든 사람들을 신하 정도로 생각하는 사고방식으로 삽니다. 그래서 모두 상대방을 죽여서 자기 만족을 취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같은 사고방식이 묘하게도 신자들 사이에도 그 뿌리가 남아서 겉으로는 신앙적인 행위를 하는 것처럼, 사랑을 베푸는 것처럼 하면서 나는 사랑을 베푸는 자요, 나는 거룩한 자라는 증명으로 사랑을 하고 있지, 상대방을 진짜로 존중하고 상대방을 내 위에 모시지 못합니다. 상대방이 내 위에 있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는 겁니다. 여러분도 스스로 한 번 이 말씀과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직도 우리 마음 속에는 이런 것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누구 누구 꼴이 보기 싫어서 못간다!’는 것이 어느 교회든지 있다는 겁니다. 이것이 우리에게는 보통 어려운 문제거리가 아닌 것입니다. 사랑이란 단지 사랑한다고 말만 한다고 해서 간단하게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참 사랑이란 내 마음 속에 정말 그리스도를 높이고 그 앞에 겸손히 무릎을 꿇어 주를 믿는 믿음을 가졌느냐 하는 것이 그 기초가 되고, 이같은 사랑이 진짜냐 가짜냐를 무엇으로 확인하느냐 하면, 내게 아직도 미워하는 사람이 있느냐 없느냐로 확인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기도를 많이했다. 성경을 많이 보았다. 무슨 선교사를 보내고 하는 것이 여러분의 믿음을 정검하는 직접적인 기준이 아닙니다. 내가 정말 바른 믿음을 갖고 바른 사랑을 하고 있느냐는 아직도 내가 미워하는 사람을 가지고 있느냐 없느냐하는 것으로 정검하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정말 원수를 위하여 기도할 수 있느냐를 스스로에게 물어보셔야 된다는 겁니다. 거기에 바로 대답해야 참 사랑을 하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나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나를 변화시킬 수있다는 것을 믿고, 동시에 나아가서 내가 미워하는 저 사람, 증오하는 저 사람, 도무지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 그 사람을 하나님이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을 믿는 것, 이것이 믿음입니다. 이 믿음이 있을 때에만이 우리는 진정으로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이웃까지 사랑해야 한다고 합니까 성경은 내 오른뺨을 때리는 사람이요, 나에게 속옷을 달라는 사람이요, 나에게 억지로 오리를 가자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그 원수를 용서하는 것을 지나서 그 원수를 위하여 기도해야 하고, 사랑을 베풀어야 합니다. 사랑이란 용서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원수가 주리거든 먹여야 되고, 갈하거든 마시우게 해야 합니다. 어떤 차원에서만 그것이 가능하다고 했습니까 ‘주를 높일 때’ 뿐입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하는 것을 분명히 기뻐하시는데 우리가 그것을 싫다고 외면할 수 없습니다. 아니, 왜 하나님께서 그렇게 우리를 감당할 수없는 요구까지 하시는가 하는 부정적으로만 따지지 마시기 바랍니다. 바로 그 어렵고 힘든 것을 주님께서 좋아하신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세상 사람들이 서로 미워하는 것은 생존경쟁 속에 사는 이 사회가 둘이 서로 나눠먹을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용으로도 부족한 것밖에 없기 때문에 상대방을 죽여야 내가 삽니다. 동물의 세계도 마찬가지가 아닙니까 약육강식이 적용됩니다. 이것이 타락한 인간세계에도 주어진 비극입니다. 그러나, 천국은 다릅니다. 천국에는 서로 나누어서 먹어도 남을 정도로 풍족하기 때문에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천국에서 영원히 살자로서 땅의 적은 것에 집착하여 세상이 전부인 자들처럼 싸우며 원수로 서로 찟고 찢기우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 가운데 들어온 자들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천국을 연습하며 살다가 천국에 영원히 살 자들입니다.
'결론' 이제자신을 시험해 보시기 바랍니다. 원수를 먹여 보시기 바랍니다. 원수를 위하여 기도도 해보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여러분에게 얼마나 풍성한 것을 갖다 주는 것인가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서만 흘러 나오는 것임을 보실 것입니다. 그것이 여러분의 믿음을 정검하는 어쩌면 제일 좋은 방법입니다. 이 말씀을 놓고 우리는 매일 우리를 정검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마땅히 누려야 할 부요한 것들,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가 마땅히 누려야 하는 그 풍성한 것들, 그 생명됨과 영광됨들을 혼자 감추어서 썩히지 말고 나눠드려 펼쳐진 그 영광을 실제로 누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본론' 오늘날 신자들에게 아주 결여되어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신앙이 너무 관념적이고, 추상적이라는데 있습니다. “믿습니다!”고 외치지만 그 믿음의 외침이 분명치 않다는 것입니다. 믿음이나 사랑이 그것을 행하는 사람 위주로 취급되고 있고, 그것이 도대체 어떤 제한 조건을 가지고 있으며 어떤 방향을 가지고 있어야 하느냐 하는 문제에 관해서는 너무 생각들이 소홀히 하고 있지 않나 싶습니다.
1. 믿음이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이라야 됩니다. 본문 15절에서 ‘믿음’이라고 할때, ‘주 예수 안에 있는 믿음’이라고 분명히 못을 박습니다. ‘신자된 표’란 그 믿음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그 믿음이 대개는 믿는 사람 본인의 열심이나 주관적인 체험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빗나가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예) 어떤 신자가 신앙생활을 그냥 그럭저럭 해 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심각한 병에 걸렸습니다. 놀랍게도 치료할 수 없는 암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기도원에 가서 기도를 받고는 그 병이 나아버렸습니다. 이렇게 되고난 이후에 이분의 신앙이 조금씩 삐뚤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말하자면, 복음의 실제적인 내용, 믿음의 중심에서 약간 벗어나서 당신께서 체험한 것을 위주로 한 신앙적인 체계를 갖기 시작했고 드디어 한쪽으로 기울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얻은 바 기쁨과 체험들을 여러 사람들에게 권하고 병을 고치지 못한 사람과 자꾸만 논쟁을 벌이기 시작했습니다. 왜 이런 은혜를 체험한 사람이 문제가 되고 논쟁을 벌입니까 믿어서 병이 나았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크게 감사할 제목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예수님이 강조되어야지, 본인의 열심이나 신령한 장소와 분위기를 주장하면 방향이 빗나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언제나 믿음에 관한 말을 할때에 항상 믿음의 대상되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강조합니다. 다시말해, 예수를 믿는다고 할때에 예수님과 믿는다는 것중에서 어느것이 강조되어야 하느냐 할때, 예수님이 강조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적입니다. 만일 여기서, 자신의 열심이나 정열적인 기도의 행위에 지나치게 강조가 되면 서서히 빗나갈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라는 말이 나올 때마가 언제든지 예수 그리스도가 반드시 강조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라는 이름 속에는 그 이름이 갖는 두 가지 뜻과 그리스도라는 말의 의미를 분명히 알고 계셔야 합니다. 예수님이란 이름에 있어서 그 첫째는, 예수님의 주권성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할때, 그러면 예수님의 무엇을 믿느냐고 불어 보아야 합니다. 이때, 우리는 예수님이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분이요, 천하 만물의 주인이시요, 온천하가 그 앞에서 잠잠해야 되는 주권자 되심을 인정하고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지으신 분으로서 모든 우리의 운명과 생사화복을 쥐고 계시는 분임을 믿어야 합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믿음이라고 합니다. 만약에 극단적으로 병이 낫지 않는 것이 주님의 뜻이라고 하면 그것이 그 상황에서 최선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은 주권자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같은 주님의 뜻은 외면한채 무조건 내 생각이 다 맞는다고 고집하기도 하는데, 이럴 수는 없는 것입니다. 어떤 의사는 이런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건강한 사람은 자기 안에 있는 어떤 잠재력을 70%쯤 밖에 쓰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건강치 않는 사람은 자기 안에 있는 잠재력을 120% 활용해야 된답니다. 그러다 보면, 몸의 무리한 부분, 연약한 부분, 이런 것들을 극복하는 힘들을 만들어 낸답니다. 참으로 놀라운 이야기가 아닙니까 실제로 역사상에는 불구자나, 깊은 질병을 가진 자들이 큰 일들을 이루었었습니다. 바울이 그렇고, 칼빈 선생이 그렇고, 베토벤이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우리에게 평소에는 도무지 생각할 수 없었던 일들이 좌절과 실패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겁니다. 우리 중에 대부분은 아마 어려움이 없었더라면, 오늘 이복된 구원의 자리에 없었고, 지금도 사망의 깊은 잠에 빠져 저 세상을 방황하고 있었을 분들이 꽤 많을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계속 승리하고 출세하고 잘 되어 나갔다면, 아마 지금 눅16:19-31절에 나타나는 부자와 같이 완벽하게 지옥 아랫목에 떨어져 있었을 위인이 되었을지 모를 일입니다.
그러므로 무조건 내 소원과 내 뜻이 관철되는 것만이 축복이 아니라는 것을 알 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은 병이 지금 낫는 것이 그에게 축복이 되고, 어떤 사람은 지금 병이 낫지 않는 것이 오히려 그에게 축복이 되는 경우도 있다는 것을 깨달고 인정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게세마네 동산에서 뭐라고 기도하십니까 당신은 정말 싫은 것이었으나, “아버지, 할 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사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그렇습니다. 내 마음대로 내 소원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아버지의 뜻대로 되어지기를 소원하는 자세가 진정한 믿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다 병에서 무조건 나아야 되며, 병이 낫지 않으면 믿음이 없는 것이다!고 강변하는 것은 무리가 있는 주장인 것입니다. 나의 판단과 가치 기준에 의해 믿음을 가지는 것이 아니고, 모든 비중과 판단과 생각을 다 예수님의 생각과 판단 기준에 맞추는 것이 믿음인 것입니다. 두번째는, 그 주권성과 함께 또 믿어야 되는 것은 주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대접하시는가 우리를 향하여 어떤 마음을 갖고 계시는가를 알고 믿는 것이 바른 믿음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어떤 마음을 갖고 계십니까 우리를 사랑하는 마음을 갖고 계십니다. 이것을 믿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분입니다. 우리 부모보다도, 나 자신보다다, 나를 주님이 더 사랑하는 것을 믿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그리고 또한, 예수님의 이름 속에는 그리스도가 포함됩니다. 마16:13-20절에, 베드로가 신앙고백을 바로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라고 했습니다. 지금 우리 하나님께서는 다른 것을 원치 아니하시고, 예수님을 바로 알기를 원하십니다. 여기에서 바른 믿음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불러놓고, "내가 너희를 부른 것은 무슨 일을 시키기 위함이 아니요, 내가 너희와 함께있기 위함이다!"고 했다. 함께 있기 위함이란 올바로 깨닫게 하기를 원한신다는 뜻입니다. 사도바울이 어떻게 그런 큰 일을 하게되었느냐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알 고 바로 만났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성경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바로 알면, 역사는 얼마든지 일어납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용하실 것입니다.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고백을 하였을때, 쓰셨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라는 이 말은, 기름부음을 받는다는 뜻으로서, 선지자, 왕, 제사장이 기름부음을 받아서 임명됩니다. 그리스도란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예수님을 어떻게 알아야 하느냐 제사장, 선지자, 왕으로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여러분의 모든 죄와 재앙과 저주가 떠나가게 하시는 제사장이십니다. 또한, 예수님은 여러분에게 하나님이 말씀과 참 진리를 우리에게 전달해 주는 선지자 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부르는 순간에 하나님의 말씀과 뜻이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가 이땅에 서는 동안에 사탄의 권세로부터 우리를 보호하시고 지켜주시는 왕이십니다. 그래서 예수 이름을 부르는 순간 우리를 괴롭히는 사탄이 결박됩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 그 속에는 엄청난 비밀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을 갖는다고 할때는 거저 간단한 믿음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정확한 믿음을 가져야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의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축복과 특권과 동떨어져 있는 믿음일 경우에 그 믿음은 나의 열심일 뿐이요, 나의 정성일 뿐입니다. 믿음에는 열심과 정성도 필요하지마는 믿음의 대상에 대한 바른 이해없는 열심과 정성은 우상에 쏟는 열심과 정성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참 믿음은 우리 믿음의 대상이 되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갖고 가지는 믿음이라야 참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바른 이해없이 무조건 덤벼드는 믿음은 많은 부작용과 실수를 만들어 내고 주님께서 외면하시는 믿음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믿음의 대상인 예수님과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가 제대로 되어있지 않는 상태에서 주님을 믿는다며 열심과 정성을 쏟아 부었을 때, 실제로 여러가지 부작용이 따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오는 넉두리가 이렇습니다. ‘아니, 내가 이렇게 갈급하고 정성을 들였는데도 안해 주신단 말입니까 주님! 하는 문턱에 꼭 걸립니다.’ ‘여기서 어떻게 더 열심을 부린단 말입니까 내게 있는 것 다 바치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는데도
그런데도 응답을 안하십니까’ 하면서 문턱에 걸리게 됩니다. 이러다가 응답을 못받는 이유도 모르고 낙심되어 또 다시 그렇고 그런 신앙으로 깊이 빠져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바른 이해없는 믿음에는 응답이 없다는 사실을 명심하셔야합니다. 응답이 없는 주 원인이 바로 이것입니다. 초대 교회 당시에 유명한 인물 중 폴리갑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사도들의 제자들의 제자들에 속하는 부류입니다. AD 1-2세기 전후한 인물들입니다. 폴리갑이 80이 되어 가지고 순교를 당할 입장에 섰습니다. 이때 심문하던 자가 회유책을 썼습니다. ‘이제라도 주를 부인하면 네 목숨만은 살려주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이 제의에 대하여 유명한 대답을 합니다. ‘주께서 내 팔십 평생을 한번도 배신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제와서 어떻게 주를 배신합니까’ 이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내 열심과 내 고매한 인격을 자랑하는 것이 신앙이 아니며, 내가 얼마나 선하고 의로운가를 표현하는 것이 믿음이 아닙니다. 내가 얼마나 주를 위하여 얼마나 주를 위하여 헌신하며 열심을 가졌는가 조차도 사실은 믿음의 최고 핵심은 아닙니다. 주 안에 있는 것들이어야 합니다. (빌3:3)“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당이라” 예수를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 것, 이것이 믿음입니다. 주 안에 있어야 믿음입니다. 만일 믿음이 주 안이 아니고, 자기를 믿는 믿음이 되면 그것은 휴머니즘이라고 합니다. 다시말해, 인본주의라는 겁니다. 정신일도 하사불성(精神一倒 何事不成)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정신통일 하면 안되는 일이 없다!는 말입니다. 믿음이 이런 식으로 간다면, 믿음이라는 것을 단지, 자신의 잠재력을 분발시키는 것이 되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면된다!’는 정신입니다.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정신통일과 노력을 믿음이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불행히도, 노만 빈센트 필이 쓴 ‘적극적 사고방식’이 기독교 안에 흘러 들어와서 하면 된다는 식의 ‘적극적인 믿음’이 생겼습니다. 이것이 로버트 슐러 목사님이 역동적인 믿음이라는 말로 바꾸어 사용했습니다. 신자가 적극성을 가진다는 것 자체는 참으로 좋은 것이고, 당연히 그렇게 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인간의 잠재능력을 개발하는 싸움으로 나간다면 이것은 신앙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서 주를 믿는다고 한다면, 그것은 주님을 죽이면서 주를 믿는 것과 같습니다. 다시말해 인본주의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거기에는 주님이 없는 것입니다. 죽은 주님을 모셔 놓고 믿는다고 목소리를 외칠 뿐입니다. 다시말해 주님은 없는데, 주님의 인형 모형을 갖다놓고 믿는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믿음이란 자신을 믿는 것이어서는 절대 안됩니다. 오늘날 새시대 운동이라고 하는 것이 등장하여 초능력이니, 요가니, 단이니 하는 것들을 장려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모두 인간도 신이 될 수 있다 하면서, 인간 속에있는 무한한 가능성과 능력을 개발하고 키우는 운동입니다. 그래서 급기야는 인간이 곧 신이 될 수 있다는 사탄적 논리로 몰고 가는 것입니다. 오늘날 메스컴 신문, 텔레비전, 영화 등을 지배하는 주 사상이 바로 이 뉴에이지 사상, 즉 새시대 운동입니다. 새시대 운동은 사탄의 사상이며, 이 사상이 인간을 무한한 능력을 가진 존재로 보고, 신의 자리에 까지 추겨 세웁니다. 에덴 동산에서 우리 조상을 유혹하였던 그 마귀의 전략과 꼭같은 전략인 것입니다. 바로 이 적극적 사고방식은 이런 맥락과 통하고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셔야 합니다. 참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과 그가 우리를 사랑하셔서 죄와 저주에서 스스로 희생하심으로 우리의 저주를 벗게 하시고, 참 진리가 없는 이 땅에서 참 진리를 알게 해 주시고, 사탄이 계속 우리를 헤치고 망하게 하려는 세력으로부터 승리의 왕으로서 우리를 보호해 주시는 분으로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 믿음입니다.
2. 믿음이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 뿐만 아니라, 성도를 향한 사랑도 포 함됩니다. 그리고 이 사랑은 언제나 자신의 유익을 구치 않는 것입니다. 고전 13장에서 사랑에 대해서 설명하기를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라고 하였습니다. 사랑은 상대방의 유익을 구하는 것입니다. 내가 사랑한다는 것을 광고하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같은 참 사랑이란 어디서 부터 나오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주인이 되고, 우리는 전부 서로 동등하게 졸병이 되었을때만 나옵니다. 만일 내가 주인이 되면 모두는 내 하인으로 부립니다. 그때는 사랑이 동정이 되고, 우월감의 표시가 되어 버립니다. 조심하셔야 됩니다. 이 참 사랑은 성경 어디서나 발견되는 것입니다. (마22:36-40)“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37)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여기서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첫째 계명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인데, 둘째를 설명할때 ‘둘째는 그와 같으니라’고 합니다. 첫번째 것과 똑같다는 뜻입니다. 다시말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이웃을 사랑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주권자로 모시고 우리가 그 앞에 무릎을 꿇을 때에만 우리는 동류를 만납니다. 서로서로가 동등해 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안 계시고 내가 주인이 되어 버리면, 우리는 모두 왕이 되고, 나 외에 모든 사람들은 신하로 봅니다.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은 예외없이 모두 나 외에 모든 사람들을 신하 정도로 생각하는 사고방식으로 삽니다. 그래서 모두 상대방을 죽여서 자기 만족을 취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같은 사고방식이 묘하게도 신자들 사이에도 그 뿌리가 남아서 겉으로는 신앙적인 행위를 하는 것처럼, 사랑을 베푸는 것처럼 하면서 나는 사랑을 베푸는 자요, 나는 거룩한 자라는 증명으로 사랑을 하고 있지, 상대방을 진짜로 존중하고 상대방을 내 위에 모시지 못합니다. 상대방이 내 위에 있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는 겁니다. 여러분도 스스로 한 번 이 말씀과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직도 우리 마음 속에는 이런 것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누구 누구 꼴이 보기 싫어서 못간다!’는 것이 어느 교회든지 있다는 겁니다. 이것이 우리에게는 보통 어려운 문제거리가 아닌 것입니다. 사랑이란 단지 사랑한다고 말만 한다고 해서 간단하게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참 사랑이란 내 마음 속에 정말 그리스도를 높이고 그 앞에 겸손히 무릎을 꿇어 주를 믿는 믿음을 가졌느냐 하는 것이 그 기초가 되고, 이같은 사랑이 진짜냐 가짜냐를 무엇으로 확인하느냐 하면, 내게 아직도 미워하는 사람이 있느냐 없느냐로 확인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기도를 많이했다. 성경을 많이 보았다. 무슨 선교사를 보내고 하는 것이 여러분의 믿음을 정검하는 직접적인 기준이 아닙니다. 내가 정말 바른 믿음을 갖고 바른 사랑을 하고 있느냐는 아직도 내가 미워하는 사람을 가지고 있느냐 없느냐하는 것으로 정검하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정말 원수를 위하여 기도할 수 있느냐를 스스로에게 물어보셔야 된다는 겁니다. 거기에 바로 대답해야 참 사랑을 하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나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나를 변화시킬 수있다는 것을 믿고, 동시에 나아가서 내가 미워하는 저 사람, 증오하는 저 사람, 도무지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 그 사람을 하나님이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을 믿는 것, 이것이 믿음입니다. 이 믿음이 있을 때에만이 우리는 진정으로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이웃까지 사랑해야 한다고 합니까 성경은 내 오른뺨을 때리는 사람이요, 나에게 속옷을 달라는 사람이요, 나에게 억지로 오리를 가자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그 원수를 용서하는 것을 지나서 그 원수를 위하여 기도해야 하고, 사랑을 베풀어야 합니다. 사랑이란 용서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원수가 주리거든 먹여야 되고, 갈하거든 마시우게 해야 합니다. 어떤 차원에서만 그것이 가능하다고 했습니까 ‘주를 높일 때’ 뿐입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하는 것을 분명히 기뻐하시는데 우리가 그것을 싫다고 외면할 수 없습니다. 아니, 왜 하나님께서 그렇게 우리를 감당할 수없는 요구까지 하시는가 하는 부정적으로만 따지지 마시기 바랍니다. 바로 그 어렵고 힘든 것을 주님께서 좋아하신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세상 사람들이 서로 미워하는 것은 생존경쟁 속에 사는 이 사회가 둘이 서로 나눠먹을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용으로도 부족한 것밖에 없기 때문에 상대방을 죽여야 내가 삽니다. 동물의 세계도 마찬가지가 아닙니까 약육강식이 적용됩니다. 이것이 타락한 인간세계에도 주어진 비극입니다. 그러나, 천국은 다릅니다. 천국에는 서로 나누어서 먹어도 남을 정도로 풍족하기 때문에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천국에서 영원히 살자로서 땅의 적은 것에 집착하여 세상이 전부인 자들처럼 싸우며 원수로 서로 찟고 찢기우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 가운데 들어온 자들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천국을 연습하며 살다가 천국에 영원히 살 자들입니다.
'결론' 이제자신을 시험해 보시기 바랍니다. 원수를 먹여 보시기 바랍니다. 원수를 위하여 기도도 해보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여러분에게 얼마나 풍성한 것을 갖다 주는 것인가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서만 흘러 나오는 것임을 보실 것입니다. 그것이 여러분의 믿음을 정검하는 어쩌면 제일 좋은 방법입니다. 이 말씀을 놓고 우리는 매일 우리를 정검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마땅히 누려야 할 부요한 것들,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가 마땅히 누려야 하는 그 풍성한 것들, 그 생명됨과 영광됨들을 혼자 감추어서 썩히지 말고 나눠드려 펼쳐진 그 영광을 실제로 누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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