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후의 사람, 최초의 사람 (막15:42-16:8)
본문
오늘은 성탄 이틀 전이지만 성탄메시지는 성탄예배에 김동호 목사님께서 해 주실 것이고, 저는 오늘 아직 개척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우리의 신앙의 자세를 바로 잡아야 할 것이 많은 때인지라 교인된 자세의 설교를 준비하였습니다. 역시 사람은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관계를 맺어가며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사람을 가리켜 ‘사회적동물’이니, 혹은 ‘관계적존재’니 하는 말들을 하곤 합니다. 그런 관점으로 사람을 보면 모든 것이 다 관계가 아닐 수 없습니다. 지금 저와 여러분이 이 높은뜻 숭의교회에 함께 모인 것도 이 관계의 연속성 속에 놓여 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관계가 다 똑 같은 수는 없습니다. 개인에 따라서 관계가 깊은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나뉘어집니다. 이것은 때로는 가족과도 무관하며 친척, 즉 촌수와도 상관이 없습니다. 제가 사는 아파트 단지의 입구에는 원친불여근린(遠親不如近隣)이라는 글이 큰돌에 새겨져 잇습니다. 한 때 유명했던 코미디언 김병조씨의 글씨인데, 가까운 이웃이 먼 친척보나 낫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말 중에 ‘이웃사촌’이란 표현을 자주 듣고 쓰게 되는데 그 말도 이 관계를 표현하는 말인 것입니다. 좋은 관계냐 그렇지 못하냐 그 나누는 기준은 사람에 따라 다 다를 수 있지만 그러나 어느 정도 보편성은 존재합니다. 그것은 대체적으로 그 사람이 어려움을 당할 때, 얼마나 그 슬픔을 같이 나눌 수 있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이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관계를 평가하는 보편적인 잣대로 쓰여 왔습니다. 그래서 옛 어른들은 목숨까지 버릴 수 있는 친구가 있는 것이 가장 큰 재산이라 여겨왔고, 또 그런 친구를 얻기 위해 노력하라고 가르쳐 왔던 것입니다. 초등학교 때 교과서에서 배운 이야기입니다. 두 나무꾼이 나무를 하러 산에 갔다가 크고 사나운 곰을 만났습니다.
한 친구는 자가만 살려고 재빨리 도망을 쳐 나무위로 올라갔지만 다른 친구는 그만 도망을 가지 못하고 땅바닥에 엎드려 죽은 체 하였습니다. 곰은 이 엎드려 있는 사람의 머리에 냄새를 맡더니만 죽은 줄 알고 가 버렸습니다. 나무에 올라가 있던 친구가 그제서야 안심하고 내려와 친구에게 물었습니다. “곰이 자네에게 뭔가 말하는 것 같던데 뭐라 그러든가” “응, 자네같이 위험에 처한 친구를 놓아두고 가는 사람하고는 사귀지 말라고 그러더구먼!” “!!.” 저는 이 시각으로 예수님을 한 번 생각해 보았습니다. 예수님의 인간관계는 어땠을까 예수님도 이 땅에서 생활하실 때 많은 인간관계를 갖고 생활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주위에 있었던 모든 사람이 다 예수님과 똑같은 관계를 가지며 지낸 사람이라고는 절대 볼 수 없습니다. 달리 말하면 예수님 입장에서 볼 때 그저 예수님 주위에 있었다는 것 자체만으로 예수님의 사랑과 관심을 똑같이 받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항상 사람의 중심을 보시기에 그 중심인 마음의 생각과 자세에 따라 그들을 달리 평가하시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주위에 있었고, 또 성경은 그것을 증거 해 주고 있으나 정말로 그들이 똑같은 마음으로 예수님을 사랑했을까 그에 대한 의문은 우리가 한 번 가져 봐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중심 축으로 놓고 원을 그려가며 그 관계의 거리를 측정 해 볼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1. 제일 먼저 맨 바깥쪽 원에 있는 사람들로는 마14장에 나오는 5천명을 들 수 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말씀이 너무 좋아서 여러 마을로부터 예수님을 따라 들에까지 좇아갔었고, 또 밥 먹는 것도 잊고는 말씀을 들었던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병 고치심을 보고 놀랐던 사람들이고 오병이어의 기적, 즉 보리 떡 다섯 개와 작은 생선 두 마리로 오천 명이 배불리 한 끼를 먹었던 그 기적 중의 기적을 몸소 체험했던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계속 읽어 내려가 보면 어느 순간인가 이들은 모두 예수님 곁에서 사라지고 맙니다. 그렇게 열정적으로 말씀을 듣기 위해, 말씀이 즐거워 예수님을 좇아 다녔건만 예수님이 고난을 받기 시작하자 모두 다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만 것입니다. 오늘 날 이들은 누구입니까 말씀을 듣기 위해 예수를 좇아 다니지만 그 신앙의 중심에 예수로부터 무엇인가 유익을 얻으려는 사람들 아닙니까 내게 유익이 되면 좇고, 그렇지 않으면 떠나버리는 그런 사람들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은 그런 사람들을 보면서 이렇게 평가를 하고 계십니다. “너희가 나를 좇는 이유는 떡 먹고 배부른 까닭이라!” “이 패역한 세대가 내게서 표적과 이적을 찾는구나”
2. 그 다음 그 원주의 한 단계 안쪽으로 들어가 보면 70명의 제자가 나옵니다. 눅10장에 나오는 이들70명은 예수님으로부터 친히 전도훈련을 받고는 각 동 각 처로 보냄을 받았던 파송자 들입니다. 영광스런 직분을 맡은 자들이요 예수님도 저들을 사랑하셨고 또 측은히 여기는 연민까지 보이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친히 그들을 보낼 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어린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그들도 그렇게 예수님을 돕고 예수님의 사랑을 받았건만 정작 예수님이 필요로 할 때에는 한 명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즉 고난 중에 계실 때 그 곁에서 예수님을 돌봐주고 함께 있어주지는 못했다는 말입니다. 이들이 누구입니까 일시적인 감정으로 열정적으로 훈련을 받고, 또 요란하게 교회에 많은 봉사를 하지만, 교회나 교인들로부터 크고 작은 상처라도 받거나 개인적인 시련이라도 닥치는 날이면 그 뜨거웠던 감정이 곧 식어버리는, 그래서 예수를 쉽게 떠나버리는 그런 교인들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3. 그 원주의 한 단계 또 안쪽으로 들어가 보면 비로소 예수님의 12제자가 나옵니다. 이들은 3년이라고 하는 많은 시간을 투자해 주와 동행하며 친히 예수님으로부터 제자훈련을 받아 제자가 된 사람들이요 예수님의 최 정예부대였던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에 대해서 체계적으로 배웠고 예수님의 의중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던 한솥밥의 장본인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이적과 기사를 수도 없이 체험했고 그 때마다 감탄을 하며 더욱 예수님을 사랑했던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그들도 예수님이 잡히시던 그 날 밤, 저녁만 같이 먹고는 모두 다 도망가고 말았습니다. 주님으로 인한 불이익은 절대 받지 않겠다는 자세로 모두 예수님을 배반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길로 갈릴리로 가서 결국 자신들이 살아왔던 방법으로 다시 그물을 내리게 됩니다. 오늘날도 이런 교인들은 아주 많습니다. 예수님께 배우고 또 주를 위해 죽겠노라고 헌신까지도 했지만 결국 내 생활에 있어서 조금이라도 어려움이 닥치게 되면, “예수가 밥 먹여 주나!” 하며 세상적인 방법에 다시금 삶을 의지하는 그런 사람들 말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떠십니까 “그래도 돈이 제일이야!” “그래도 우리 사회는 학벌이 좋아야 돼!” 라고 생각하신다면 여러분도 이 부류가 아니다 말 못하실 것입니다.
4. 한 단계 더 안쪽으로 들어가 보면 그 12제자 중에 조금은 다르게 예수님을 사랑했던 한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그 사람은 다름 아닌 바로 베드로입니다. 예수님이 잡혀가신 그 날 밤, 잡혀가 심문을 받고 있는 대제사장 가야바의 집 뜰까지 좇아 가, 비록 멀찍이 이지만 측은한 마음으로 예수님을 바라보았던 그런 제자였습니다. 다른 사람은 다 주를 버려도 나만은 주님을 버리지 않겠노라고 주 앞에서 말을 했을 뿐 아니라, 적어도 그 말을 지키기 위해 애썼던 제자였습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 어느 정도 손해도 감수하고 각오도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도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순간에는 결국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맙니다. 예수 그리스도 보다는 내 생명이 더 소중하다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베드로의 생명을 원하고 계시는데, 그는 결국 예수님의 그런 요구를 거절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어느 정도의 헌신과 손해를 각오하고 예수를 믿기는 하지만 정작 생명의 위협을 느낄 때는 본색을 드러내고 마는 그런 신앙인의 모습이 바로 베드로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그 원에 가장 가까이 근접해 있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예수님의 고난에 끝까지 좇아갔던 사람들은 과연 누구인가
5. 그들은 불행하게도 제자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바로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 그리고 살로메라고 하는 세 여인이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갈릴리에 계실 때에부터 좇아 섬기던 자들이었고, 예수님을 따라 예루살렘까지 왔었으며, 결국은 예수님의 장례를 지켜 본 마지막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무덤은 로마 군인들로 하여금 삼엄하게 경계를 하고 있었기에 그 현장엘 가면 잘못하면 붙잡혀 고난을 받을 수도 있었고, 또 같은 패로 인정되어 죽임을 당할 수도 있었지만, 그 여인들은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예수님을 그대로 보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며 예수님을 끝까지 따랐던 사람들인 것입니다. 우리는 다 같이 주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주일인 오늘 이 자리에 나아와 모두 똑같이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것 한 가지는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주님과의 모든 관계가 다 같을 수는 없다는 것 말입니다. 과연 우리 주님은 누구를 더 사랑하시겠습니까 과연 우리 주님은 누구에게 더 애틋한 마음을 갖고 계시겠습니까 주님의 곁에 단순히 오래 있으면 남보다 더 많은 사랑을 받겠습니까 헌금을 많이 내면 주님이 더 사랑하시겠습니까 봉사를 더 많이 하면 되겠습니까 기도를 오래 하면 되겠습니까 성경을 많이 읽고, 또 열심히 배우면 되겠습니까 아니면 저같이 예수로 밥 먹고사는 목사가 되면 주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착각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고난 당하신 주님 곁에 끝까지 있어, 그 분을 떠나지 아니한 이 여인들이야말로 그리스도의 참 사랑을 듬뿍 받을 만한 신앙인들인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어떤 신앙생활을 하고 계십니까 여러분들의 신앙의 관심은 무엇이며, 여러분들의 교회생활은 무엇에 많은 에너지를 쏟고 계십니까 여러분의 그 힘과 정력은 어디에 투자되고 있습니까 적어도 우리에게는 그리스도 예수의 곁에 끝까지 남겠다는 그 욕심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한 선한 그 욕심은 그 분의 사랑을 얻기에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1999년도에 일본 영화계에서는 제작당시부터 일본사람들로부터 관심의 대상이었던 영화 한 편이 개봉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상영되었던 철도원(鐵道員)입니다. 이 영화는 국민배우라고 하는 다카쿠라 켄 이라는 유명한 남자 배우와 또 유명하고 깜찍한 히로스에 료꼬 라고 하는 여배우가 주연을 맡은 덕에 모든 세인의 관심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시사회 표 두 장이 당시 일본 동경에서 목회를 하고 있던 제게 날라 왔습니다. 흥분에 되어 날짜와 시간을 보니 글쎄 수요일 저녁이었습니다. 하는 수 없이 누군가에게 주어야겠다 마음먹고는 줄 사람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 때의 그 마음은 무척 행복했습니다. 매 주 토요일 저녁이 되면 교회는 청년들이 하나 둘 씩 모여듭니다. 주일을 준비하기 위해 청소를 하려 모이는데 토요일의 청소는 늦게까지 이어집니다. 이윽고 하나 둘 씩 돌아가고 10시가 넘었습니다. 그 늦은 시간가지 묵묵히 청소를 하던 청년이 있었습니다. 제일 힘들고 궂은 일, 쓰레기를 비우고 걸레를 빠는 그 친구 둘에게 저는 기쁜 마음으로 그 티켓을 주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예수의 곁에서 서성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높은뜻 숭의교회의 교인 된 여러분만큼은 그리스도 곁에 있어서 최후의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맨 마지막까지 남는 사람이 꼭 되시기를 바랍니다. 내 모든 것을 잃는다 해도, 때로는 생명의 위협을 느낀다 해도, 그동안 주님께로부터 받은 은혜가 너무 많아, 이제는 내가 주님을 끝까지 지켜 드리겠다는 그 마음으로 주님에게 있어서 최후의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자세가 그렇게 될 때, 우리 주님은 여러분들을 역시 끝까지 붙들어 주실 것입니다. 주님은 지금도 끝까지 주님의 곁에 남아 있는 그런 사람을 찾고 계시는 것입니다. 주님과의 인간관계에 있어서 또 하나의 기준이 있습니다. 그것은 오늘 본문에 이름이 분명히 나와 있는 이 세 여인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끝까지 참여해 최후의 사람이 되었지만, 성경은 또한가지 중요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그들이 예수의 무덤에 최초로 가 보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본문 16:2 에는 안식 후 첫날 매우 일찍이. 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로마 군인들에게 잡혀 죽을지도 모른다 해서 제자들은 이미 다 도망 가 버린 상황에서 그들이라고 왜 그 공포심이 없었겠습니까 만은 그리스도가 너무 좋아 그 분의 시신이라도 보고자 했던 그 간절한 마음이 그들의 새벽 잠을 깨웠고, 예수님을 저렇게 장례 치러서는 안 된다는 그 안타까운 마음이 이른 시간 그 여인들의 발걸음을 그리스도께로 향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고등학생 때 심훈의 소설 ‘상록수’를 읽었습니다. 주인공 채영신이라는 여학생과 박동혁이라는 남학생을 중심으로 일제시대 시골 개화운동을 그린 드라마틱한 소설로 우리에게 많은 감동을 준 책입니다. 금의 충남 청석골이라는 마을에서의 여름 봉사가 시작됩니다. 채영신 선생은 마을의 조그마한 예배당에서 어린이 130명을 모아 놓고 한글을 가르치고 있었는데,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일본 순사는 이를 막기로 작정하고 채영신 선생을 주재소로 소환합니다. “이 무더운 여름, 좁은 공간에 많은 아이들이 있으면 전염병이 돌 우려가 있으니 내일부터 아이들을 80명으로 줄이시오!” 하늘이 무너지는 소리였습니다. 그것은 한글을 가르치는 일을 하지 말라는 것과 같은 소리였기 때문입니다. 주재소를 나온 채영신성생은 그 길로 예배당으로 달려 가 십자가 앞에 엎드려 밤 새 눈물로 기도를 합니다. 그 기도를 작가 심훈은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주여 당신의 뜻으로 이곳에 모여든 귀엽고 사랑스러운 어린양들이 오늘은 그 삼분의 일이나 목자를 잃게 되었습니다. 다시 어둠 속에서 헤맬 수밖에 없이 되었습니다.
주여 가엾은 무리가 낙심하지 말게 하여 주시고 하나도 버리지 마시고 다시금 새로운 광명을 받을 기회를 내려 주시옵소서. 오 주여 저의 가슴은 지금 메어질 듯 합니다. 이윽고 새멱, 기도가 다 끝나자 채영신 선생은 무언가 강한 결심을 한 듯 일어나 분필을 들고는 예배당의 마룻바닥에 선을 긋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는 그 날 아침 일찍 오는 아이들부터 그 선 안으로 집어넣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는 80명이 다 되자 그 뒤에 오는 아이들을 막고는 울면서, 오늘부터 같이 공부하지 못하는 이유를 말하게 됩니다. 선생님도 울고 아이들도 울었습니다. 가슴이 아파 오는 명 장면입니다. 새벽 기도회를 나와야 좋은 신앙인이 된다고 하는 말도 아니고, 예배시간에 늦지 말자고 하는 말은 더더욱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일찍 나와야 구원을 얻는 다는 그런 허무 맹랑한 말도 결코 아닙니다. 즉 물리적인 시간을 말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러나 이 것 한가지는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첫 시간 주님께 달려나가는 것은 곧 우리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시간적으로, 선착순으로 우리를 평가하지는 않으나 우리의 첫 관심과 첫 마음을 드리는지 그렇지 않는지는 구분하신다는 의미입니다. 따지고 보면 하나님도 우리 인간의 마음과 거진 비슷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럴 리야 없으시겠지만, 하나님도 어쩔 수 없이 우리 인간들을 구분해야만 하는 상황이 된다면 결국 이 방법 밖에는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과 관심의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바로 우리가 첫 마음을 주님께 드렸는가 아닌가에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를 따르되 끝까지 따르는 것입니다. 내 몸이 힘들고 내 환경이 어렵다고, 내 처지가 변했다고 주를 멀리하는 삶은 결코 주님의 사랑을 받을만한 신앙인의 자세가 아닙니다. 내 몸이 힘들고 부서지고 나의 모습이 만신창이가 되어도 그리스도를 끝까지 붙드는 최후의 사람, 그 사람이 예수께서 찾는 참 신앙인인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 속에서 제일 먼저 주를 찾으며, 주 앞에 남들보다 먼저 나아가기를 힘쓰는 그 선한 욕심을 갖는 사람들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입니다. 우리의 생각과 우리의 모든 관심에서 가장 처음 것을 드리고자 하는 삶이야말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아름다운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높은 뜻을 이루기 위해 모인 여러분, 그리스도 곁에 끝까지 남는 최후의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향해 달려나가는데는 누구보다도 뒤지지 않는 최초의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한 친구는 자가만 살려고 재빨리 도망을 쳐 나무위로 올라갔지만 다른 친구는 그만 도망을 가지 못하고 땅바닥에 엎드려 죽은 체 하였습니다. 곰은 이 엎드려 있는 사람의 머리에 냄새를 맡더니만 죽은 줄 알고 가 버렸습니다. 나무에 올라가 있던 친구가 그제서야 안심하고 내려와 친구에게 물었습니다. “곰이 자네에게 뭔가 말하는 것 같던데 뭐라 그러든가” “응, 자네같이 위험에 처한 친구를 놓아두고 가는 사람하고는 사귀지 말라고 그러더구먼!” “!!.” 저는 이 시각으로 예수님을 한 번 생각해 보았습니다. 예수님의 인간관계는 어땠을까 예수님도 이 땅에서 생활하실 때 많은 인간관계를 갖고 생활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주위에 있었던 모든 사람이 다 예수님과 똑같은 관계를 가지며 지낸 사람이라고는 절대 볼 수 없습니다. 달리 말하면 예수님 입장에서 볼 때 그저 예수님 주위에 있었다는 것 자체만으로 예수님의 사랑과 관심을 똑같이 받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항상 사람의 중심을 보시기에 그 중심인 마음의 생각과 자세에 따라 그들을 달리 평가하시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주위에 있었고, 또 성경은 그것을 증거 해 주고 있으나 정말로 그들이 똑같은 마음으로 예수님을 사랑했을까 그에 대한 의문은 우리가 한 번 가져 봐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중심 축으로 놓고 원을 그려가며 그 관계의 거리를 측정 해 볼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1. 제일 먼저 맨 바깥쪽 원에 있는 사람들로는 마14장에 나오는 5천명을 들 수 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말씀이 너무 좋아서 여러 마을로부터 예수님을 따라 들에까지 좇아갔었고, 또 밥 먹는 것도 잊고는 말씀을 들었던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병 고치심을 보고 놀랐던 사람들이고 오병이어의 기적, 즉 보리 떡 다섯 개와 작은 생선 두 마리로 오천 명이 배불리 한 끼를 먹었던 그 기적 중의 기적을 몸소 체험했던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계속 읽어 내려가 보면 어느 순간인가 이들은 모두 예수님 곁에서 사라지고 맙니다. 그렇게 열정적으로 말씀을 듣기 위해, 말씀이 즐거워 예수님을 좇아 다녔건만 예수님이 고난을 받기 시작하자 모두 다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만 것입니다. 오늘 날 이들은 누구입니까 말씀을 듣기 위해 예수를 좇아 다니지만 그 신앙의 중심에 예수로부터 무엇인가 유익을 얻으려는 사람들 아닙니까 내게 유익이 되면 좇고, 그렇지 않으면 떠나버리는 그런 사람들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은 그런 사람들을 보면서 이렇게 평가를 하고 계십니다. “너희가 나를 좇는 이유는 떡 먹고 배부른 까닭이라!” “이 패역한 세대가 내게서 표적과 이적을 찾는구나”
2. 그 다음 그 원주의 한 단계 안쪽으로 들어가 보면 70명의 제자가 나옵니다. 눅10장에 나오는 이들70명은 예수님으로부터 친히 전도훈련을 받고는 각 동 각 처로 보냄을 받았던 파송자 들입니다. 영광스런 직분을 맡은 자들이요 예수님도 저들을 사랑하셨고 또 측은히 여기는 연민까지 보이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친히 그들을 보낼 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어린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그들도 그렇게 예수님을 돕고 예수님의 사랑을 받았건만 정작 예수님이 필요로 할 때에는 한 명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즉 고난 중에 계실 때 그 곁에서 예수님을 돌봐주고 함께 있어주지는 못했다는 말입니다. 이들이 누구입니까 일시적인 감정으로 열정적으로 훈련을 받고, 또 요란하게 교회에 많은 봉사를 하지만, 교회나 교인들로부터 크고 작은 상처라도 받거나 개인적인 시련이라도 닥치는 날이면 그 뜨거웠던 감정이 곧 식어버리는, 그래서 예수를 쉽게 떠나버리는 그런 교인들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3. 그 원주의 한 단계 또 안쪽으로 들어가 보면 비로소 예수님의 12제자가 나옵니다. 이들은 3년이라고 하는 많은 시간을 투자해 주와 동행하며 친히 예수님으로부터 제자훈련을 받아 제자가 된 사람들이요 예수님의 최 정예부대였던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에 대해서 체계적으로 배웠고 예수님의 의중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던 한솥밥의 장본인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이적과 기사를 수도 없이 체험했고 그 때마다 감탄을 하며 더욱 예수님을 사랑했던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그들도 예수님이 잡히시던 그 날 밤, 저녁만 같이 먹고는 모두 다 도망가고 말았습니다. 주님으로 인한 불이익은 절대 받지 않겠다는 자세로 모두 예수님을 배반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길로 갈릴리로 가서 결국 자신들이 살아왔던 방법으로 다시 그물을 내리게 됩니다. 오늘날도 이런 교인들은 아주 많습니다. 예수님께 배우고 또 주를 위해 죽겠노라고 헌신까지도 했지만 결국 내 생활에 있어서 조금이라도 어려움이 닥치게 되면, “예수가 밥 먹여 주나!” 하며 세상적인 방법에 다시금 삶을 의지하는 그런 사람들 말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떠십니까 “그래도 돈이 제일이야!” “그래도 우리 사회는 학벌이 좋아야 돼!” 라고 생각하신다면 여러분도 이 부류가 아니다 말 못하실 것입니다.
4. 한 단계 더 안쪽으로 들어가 보면 그 12제자 중에 조금은 다르게 예수님을 사랑했던 한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그 사람은 다름 아닌 바로 베드로입니다. 예수님이 잡혀가신 그 날 밤, 잡혀가 심문을 받고 있는 대제사장 가야바의 집 뜰까지 좇아 가, 비록 멀찍이 이지만 측은한 마음으로 예수님을 바라보았던 그런 제자였습니다. 다른 사람은 다 주를 버려도 나만은 주님을 버리지 않겠노라고 주 앞에서 말을 했을 뿐 아니라, 적어도 그 말을 지키기 위해 애썼던 제자였습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 어느 정도 손해도 감수하고 각오도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도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순간에는 결국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맙니다. 예수 그리스도 보다는 내 생명이 더 소중하다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베드로의 생명을 원하고 계시는데, 그는 결국 예수님의 그런 요구를 거절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어느 정도의 헌신과 손해를 각오하고 예수를 믿기는 하지만 정작 생명의 위협을 느낄 때는 본색을 드러내고 마는 그런 신앙인의 모습이 바로 베드로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그 원에 가장 가까이 근접해 있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예수님의 고난에 끝까지 좇아갔던 사람들은 과연 누구인가
5. 그들은 불행하게도 제자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바로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 그리고 살로메라고 하는 세 여인이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갈릴리에 계실 때에부터 좇아 섬기던 자들이었고, 예수님을 따라 예루살렘까지 왔었으며, 결국은 예수님의 장례를 지켜 본 마지막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무덤은 로마 군인들로 하여금 삼엄하게 경계를 하고 있었기에 그 현장엘 가면 잘못하면 붙잡혀 고난을 받을 수도 있었고, 또 같은 패로 인정되어 죽임을 당할 수도 있었지만, 그 여인들은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예수님을 그대로 보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며 예수님을 끝까지 따랐던 사람들인 것입니다. 우리는 다 같이 주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주일인 오늘 이 자리에 나아와 모두 똑같이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것 한 가지는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주님과의 모든 관계가 다 같을 수는 없다는 것 말입니다. 과연 우리 주님은 누구를 더 사랑하시겠습니까 과연 우리 주님은 누구에게 더 애틋한 마음을 갖고 계시겠습니까 주님의 곁에 단순히 오래 있으면 남보다 더 많은 사랑을 받겠습니까 헌금을 많이 내면 주님이 더 사랑하시겠습니까 봉사를 더 많이 하면 되겠습니까 기도를 오래 하면 되겠습니까 성경을 많이 읽고, 또 열심히 배우면 되겠습니까 아니면 저같이 예수로 밥 먹고사는 목사가 되면 주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착각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고난 당하신 주님 곁에 끝까지 있어, 그 분을 떠나지 아니한 이 여인들이야말로 그리스도의 참 사랑을 듬뿍 받을 만한 신앙인들인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어떤 신앙생활을 하고 계십니까 여러분들의 신앙의 관심은 무엇이며, 여러분들의 교회생활은 무엇에 많은 에너지를 쏟고 계십니까 여러분의 그 힘과 정력은 어디에 투자되고 있습니까 적어도 우리에게는 그리스도 예수의 곁에 끝까지 남겠다는 그 욕심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한 선한 그 욕심은 그 분의 사랑을 얻기에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1999년도에 일본 영화계에서는 제작당시부터 일본사람들로부터 관심의 대상이었던 영화 한 편이 개봉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상영되었던 철도원(鐵道員)입니다. 이 영화는 국민배우라고 하는 다카쿠라 켄 이라는 유명한 남자 배우와 또 유명하고 깜찍한 히로스에 료꼬 라고 하는 여배우가 주연을 맡은 덕에 모든 세인의 관심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시사회 표 두 장이 당시 일본 동경에서 목회를 하고 있던 제게 날라 왔습니다. 흥분에 되어 날짜와 시간을 보니 글쎄 수요일 저녁이었습니다. 하는 수 없이 누군가에게 주어야겠다 마음먹고는 줄 사람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 때의 그 마음은 무척 행복했습니다. 매 주 토요일 저녁이 되면 교회는 청년들이 하나 둘 씩 모여듭니다. 주일을 준비하기 위해 청소를 하려 모이는데 토요일의 청소는 늦게까지 이어집니다. 이윽고 하나 둘 씩 돌아가고 10시가 넘었습니다. 그 늦은 시간가지 묵묵히 청소를 하던 청년이 있었습니다. 제일 힘들고 궂은 일, 쓰레기를 비우고 걸레를 빠는 그 친구 둘에게 저는 기쁜 마음으로 그 티켓을 주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예수의 곁에서 서성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높은뜻 숭의교회의 교인 된 여러분만큼은 그리스도 곁에 있어서 최후의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맨 마지막까지 남는 사람이 꼭 되시기를 바랍니다. 내 모든 것을 잃는다 해도, 때로는 생명의 위협을 느낀다 해도, 그동안 주님께로부터 받은 은혜가 너무 많아, 이제는 내가 주님을 끝까지 지켜 드리겠다는 그 마음으로 주님에게 있어서 최후의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자세가 그렇게 될 때, 우리 주님은 여러분들을 역시 끝까지 붙들어 주실 것입니다. 주님은 지금도 끝까지 주님의 곁에 남아 있는 그런 사람을 찾고 계시는 것입니다. 주님과의 인간관계에 있어서 또 하나의 기준이 있습니다. 그것은 오늘 본문에 이름이 분명히 나와 있는 이 세 여인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끝까지 참여해 최후의 사람이 되었지만, 성경은 또한가지 중요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그들이 예수의 무덤에 최초로 가 보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본문 16:2 에는 안식 후 첫날 매우 일찍이. 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로마 군인들에게 잡혀 죽을지도 모른다 해서 제자들은 이미 다 도망 가 버린 상황에서 그들이라고 왜 그 공포심이 없었겠습니까 만은 그리스도가 너무 좋아 그 분의 시신이라도 보고자 했던 그 간절한 마음이 그들의 새벽 잠을 깨웠고, 예수님을 저렇게 장례 치러서는 안 된다는 그 안타까운 마음이 이른 시간 그 여인들의 발걸음을 그리스도께로 향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고등학생 때 심훈의 소설 ‘상록수’를 읽었습니다. 주인공 채영신이라는 여학생과 박동혁이라는 남학생을 중심으로 일제시대 시골 개화운동을 그린 드라마틱한 소설로 우리에게 많은 감동을 준 책입니다. 금의 충남 청석골이라는 마을에서의 여름 봉사가 시작됩니다. 채영신 선생은 마을의 조그마한 예배당에서 어린이 130명을 모아 놓고 한글을 가르치고 있었는데,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일본 순사는 이를 막기로 작정하고 채영신 선생을 주재소로 소환합니다. “이 무더운 여름, 좁은 공간에 많은 아이들이 있으면 전염병이 돌 우려가 있으니 내일부터 아이들을 80명으로 줄이시오!” 하늘이 무너지는 소리였습니다. 그것은 한글을 가르치는 일을 하지 말라는 것과 같은 소리였기 때문입니다. 주재소를 나온 채영신성생은 그 길로 예배당으로 달려 가 십자가 앞에 엎드려 밤 새 눈물로 기도를 합니다. 그 기도를 작가 심훈은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주여 당신의 뜻으로 이곳에 모여든 귀엽고 사랑스러운 어린양들이 오늘은 그 삼분의 일이나 목자를 잃게 되었습니다. 다시 어둠 속에서 헤맬 수밖에 없이 되었습니다.
주여 가엾은 무리가 낙심하지 말게 하여 주시고 하나도 버리지 마시고 다시금 새로운 광명을 받을 기회를 내려 주시옵소서. 오 주여 저의 가슴은 지금 메어질 듯 합니다. 이윽고 새멱, 기도가 다 끝나자 채영신 선생은 무언가 강한 결심을 한 듯 일어나 분필을 들고는 예배당의 마룻바닥에 선을 긋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는 그 날 아침 일찍 오는 아이들부터 그 선 안으로 집어넣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는 80명이 다 되자 그 뒤에 오는 아이들을 막고는 울면서, 오늘부터 같이 공부하지 못하는 이유를 말하게 됩니다. 선생님도 울고 아이들도 울었습니다. 가슴이 아파 오는 명 장면입니다. 새벽 기도회를 나와야 좋은 신앙인이 된다고 하는 말도 아니고, 예배시간에 늦지 말자고 하는 말은 더더욱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일찍 나와야 구원을 얻는 다는 그런 허무 맹랑한 말도 결코 아닙니다. 즉 물리적인 시간을 말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러나 이 것 한가지는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첫 시간 주님께 달려나가는 것은 곧 우리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시간적으로, 선착순으로 우리를 평가하지는 않으나 우리의 첫 관심과 첫 마음을 드리는지 그렇지 않는지는 구분하신다는 의미입니다. 따지고 보면 하나님도 우리 인간의 마음과 거진 비슷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럴 리야 없으시겠지만, 하나님도 어쩔 수 없이 우리 인간들을 구분해야만 하는 상황이 된다면 결국 이 방법 밖에는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과 관심의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바로 우리가 첫 마음을 주님께 드렸는가 아닌가에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를 따르되 끝까지 따르는 것입니다. 내 몸이 힘들고 내 환경이 어렵다고, 내 처지가 변했다고 주를 멀리하는 삶은 결코 주님의 사랑을 받을만한 신앙인의 자세가 아닙니다. 내 몸이 힘들고 부서지고 나의 모습이 만신창이가 되어도 그리스도를 끝까지 붙드는 최후의 사람, 그 사람이 예수께서 찾는 참 신앙인인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 속에서 제일 먼저 주를 찾으며, 주 앞에 남들보다 먼저 나아가기를 힘쓰는 그 선한 욕심을 갖는 사람들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입니다. 우리의 생각과 우리의 모든 관심에서 가장 처음 것을 드리고자 하는 삶이야말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아름다운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높은 뜻을 이루기 위해 모인 여러분, 그리스도 곁에 끝까지 남는 최후의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향해 달려나가는데는 누구보다도 뒤지지 않는 최초의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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