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수냐 소수냐 (삼상13:23-14:52)
본문
가까스로 패배를 면하고 승리하는 것은 결코 낭만적인 일이 아닙니다. 그렇게 되기까지는 많은 고비를 넘겨야 합니다. 1857년 인디안 폭동 당시 럭나우(Lucknow) 수비대는 스코틀랜드 북부 지역 출신의 콜린 캠 벨(Colin Campbell)경이 백파이프를 불어 구원병이 온다는 신호를 보내올 때까지 위기에 처해 있었습니다. 영국과 미국 군인들의 전투는 대체로 처음에는 패하는 듯하다가 형세가 돌변하여 결국 그들의 승리로 끝나 게 됩니다. 앨라모 전투가 그랬고, 그 직후의 산야킨토 전투가 그랬으며, 이산들오나 전투와 던키르크 전투, 엘알라마인 전투가 그랬고, 그 중에서도 진주만 전투가 가장 치열했습니다. 결국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핵 폭탄이 투하되고 말았습니다. 월남전이 대반전의 신화를 약화시켰다면, 포클 랜드와 그레나다 전투는 우리 가 결국은 유리하리라는 예로부터 전해 오는 위로에 찬 확신에 불을 붙여 주었습니다. 사울은 (게바)기브아 근처의 석류나무 아래에 앉아 그의 왕국이 블레셋의 속박 하에 들어가게 된 일을 생각하면서 이스라엘의 운명이 그렇게 반전되기를 희망했을 것입니다. 그의 상황은 사실상 절망적이었습니다. 블레셋 침략군들이 그 지역을 샅샅이 뒤지고(13:17). 이스라엘은 쇠로 된 장비들을 몰수당함으로써 (13:19-22). 거의 비무장화되었습니다. 그리고 사울의 곁에는 600명의 군사와 제사장 아히야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 의 궤밖에 없었습니다(14:1-3). 블레셋 사람들은 사울이 망연자실해서 앉아 있는 곳으로부터 2㎞ 정도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믹마스에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적의 사기가 저하되어 더 이상 침공하지 못할 것 이라고 믿고 안심하고 있었습니다. 인간의 죄에는 리듬이 있습니다. 업적은 교만을 낳고 교만은 파멸을 가 져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인간의 악을 억제하는 결과를 지닌 작용과 반작용이 있습니다. 세 익스피어의 멕베드처럼 분에 넘치는 야심은 실패합니다. 그리고 자기 파멸을 향한 반복된 충동은 곤궁한 사람에게는 위안이 됩니다. 그러나 또 다른 요인도 작용합니다. 그것은 자기 백성의 병력을 보강하시려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신 앙의 눈을 가진 사람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정상적인 과정 속에서 이것을 바라봅니다. 이것은 역사 전체의 움직임 속에서는 정확하게 식별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일들이 일어나도록 하시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목적을 이루어 가시기도 합니다. 그는 자기 백성을 위한 은혜스런 목적을 갖고 계십니다. 그는 아직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타락한 백성을 위한 구원 계획도 가지고 계십니다. 그는 자신 의 목적, 곧 악에 대한 승리를 적극적으로 이루어 가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길을 따라 나아가는 모든 발걸 음이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구원이요, 승리인 것입니다. 그러한 구원이 이제 곧 사울과 이스라엘에게 일어 날 것입니다. 하나님은 왕의 어리석음으로 말미암아 지친 민족을 일으켜 세우려고 하십니다. 이 부흥 과정 에서 우리는 두 주인공, 즉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의 성품을 통찰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특히 사울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가 입증되었는데도 불구하고 타락한 본성을 지닌 사람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단락의 핵심 주제는 사람이 많든 적든 구원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처음에는 소수로 다수를 구원하시고, 다음에는 다수로 소수를 구원하십니다. 소수에 의한 구원(13:23-14:23) 요나단이 사람의 많고 적음에 상관없이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증거한 것은(14:6) 전도유망하고 경건한 군인이자, 왕자인 그가 군사 행동을 할 때였습니다. 특공대의 수는 많지 않았으나(2명). 이 진술에 함축되어 있는 의미는 보편적이고 우주적입니다1
왜냐하면 여기에는 진리에 관한 매우 놀라운 설명 가운데 하나님의 계시에 관한 보편적인 원리가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속성 가운데 하나 입니다. 이 원리는 결코 수정되거나 설명되지 않습니다. 이 원리는 주를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늘 위로가 됩니다. 하나님은 오늘날 사람이 많든 적든 우리를 구원해 주실 수 있습니다.
1. 요나단의 기습(13:230-14:15) 믹마스 전투는 매우 조용하게 시작되었습니다. 사울은 결정을 못 내리고 주저하고 있었던 것 같지만, 그의 아들 요나단은 결연히 난국에 맞서 전쟁을 개시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래서 그와 그의 갑옷을 맡은 자는 골짜기 건너편의 블레셋 전진 기지를 공격할 목적으로 진을 빠져 나왔습니다(14:1). 그 무렵 (게바)기브아에 있던 사울은 블레셋 군대가 주둔해 있던 믹마스의 남쪽 산에 있었습니다. 비록 그들 사이가 2-3㎞ 정도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지만, 양측에는 낭떠어리가 있고 그 사이에 깊은 골짜기가 가 로놓여 있었습니다.(14:4-5). 요나단의 계획은 한쪽 편에서 블레셋의 전진 기지에 접근하여 그들의 기개를 시험하는 것이었습니다. 요나단은 이스라엘 군사들의 사기가 저하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상황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두 가지 중요한 요인이 있다는 사실도 깨달았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능력이 었고, 다른 하나는 비록 처음에는 제한적이었지만, 결국에는 승리하리라는 확신이었습니다. 올리버 크롬웰 (Oliver Cromwell)이 하나님을 믿고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였듯이, 요나단도 하나님에 대한 산 신앙과 노련 한 전략가의 눈으로 그 일에 착수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믿고 낙관적으로 일을 시작했습니다. (삼상14:6)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일하실까 하노라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의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아 니하였느니라 그는 계속 신중한 자세를 견지했습니다. 그는 무모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시험을 해보기로 한 것입니다. 블레셋의 감시병들이 그들더러 올라오라고 할 경우, 그들은 건너가서 전쟁을 할 생각이었습니다. 요나단은 이것을 여호와께서 그들을 우리 손에 붙이신 표징 으로 여겼습니다(14:8-10). 이 표징을 기드온의 양털처럼(삿6:34-40, 7:9-15). 하나님 계시의 초자연적인 개입으로 간주할 필요는 없습니다. 요나단은 올라오 라고 하는 블레셋 사람들의 권유를 이스라엘에 대한 경멸과 이스라엘의 도전을 얼마든지 물리칠 수 있다는 자신감의 표시로 여겼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요나단은 기회만 주어진다면, 자기 백성을 위해 일격을 가 해 주실 하나님을 믿고, 갈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마침내 블레셋 사람들의 조롱 조의 반응으로 그 기회 가 주어졌습니다. 보초들은 히브리 사람이 그 숨었던 구멍에서 나온다 고 외쳤습니다. 우리에게로 올라오 라 여호와께서 그들을 이스라엘의 손에 붙이셨느니라 (14:12). 그는 이것을 결정적인 행동을 하도록 하기 위 한 하나님의 계기로 믿었습니다. 두 사람은 와디를 횡단하여 내려와서는 믹마스 편에서 올라갔습니다. 그 꼭대기에서 육탄전이 벌어지고 그 후에 난투가 벌어졌는데, 그 싸움으로 20명의 블레셋 사람이 쓰러졌습니다(14:13-14). 이 두 사람의 기습 전 결과, 안심하고 빈둥대던 블레셋 주력 부대가 공포에 떨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그것은 사실상 하나님이 일으킨 공포 였습니다(14:16). 두려움에 떠는 적의 소동과 더불어 땅도 흔들렸습니다. 그리하여 블레셋 사람들은 도주했습니다!
2. 사울의 개입(14:16-23) (게바)기브아에서 걱정에 싸여 있던 사울은 블레셋 사람들에게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곧 군대를 소집하였습니다. 그 과정에서 그는 요나단과 그의 병기를 맡은 자가 없음을 알았습니다.(14:16-17), 그러나 그는 적과의 싸움을 즉시 개시하지는 않았습니다. 사울은 희생 제사를 드리고 하나님 의 뜻을 알아보도록 제사장 아히야에게 부탁했습니다. 하나님의 궤가 이스라엘 자손과 함께 있었다는 언급 은 요나단이 블레셋 사람들에게 일격을 가한 것과 마찬가지로 성경 주석가들 사이에 많은 논란을 야기시켰 습니다. 그 당시 궤는 기럇여아림에 있었고, 일반적으로 학자들은 다윗이 궤를 예루살렘으로 가져오기까지 궤가 줄곧 그 곳에 있었다고 가정합니다(7:1-2, 삼하 6:2, 대상13:5-6). 70인역에는 사울이 궤가 아니라 에 봇 을 두른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면서, 많은 성서 신학자들은 히브리 본문이 이 부분에서 와전되었으며, 궤는 진이 아니라 기럇여아림에 있었다고 결론을 지었습니다. 실제로 이스라엘 군대와 함께 있었던 것은 제사장의 옷인 에봇과 신비한 돌인 우림과 둠밈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이것을 가지고 하나님 의 인도를 추구했을 것입니다. 상황이야 어찌되었든, 사울은 일상적인 방법으로 하나님께 자문을 구할 생각 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이 엄숙하고 거룩한 절차를 제정했다 하더라도, 그는 마음을 바꾸어 이스라엘 사람들이 지체없이 전쟁에 가담할 수 있도록 아히야에게 손을 거두라고 지시했습니다(14:18-20). 블레셋 사람 들을 섬기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전 주인에게 반란을 일으켰으며, 이스라엘 사람들이 숨어 있다가 나타나서 전쟁에 가담하자, 블레셋 사람들은 완전히 퇴각했습니다. (삼상14:23) 여호와께서 그 날에 이스라엘을 구원 하시므로 전쟁이 벧아웬을 지나니라 믹마스 전투는 인간적인 수준에서 볼 때, 요나단의 승리였습니다. 사 울은 나중에 결정적으로 개입했지만, 그의 모습이 돋보이지는 않았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일들에 주저했다는 것은 제사장 아히야와 하나님의 법령을 활용하는 데서도 다시 나타났습니다. 사울은 처음에 블레셋 군대 를 치러 가야 하는지 결정하지 못해 머뭇거리다가 하나님의 뜻을 알려고 아히야를 불렀습니다. 그러나 그 후 그는 자기 마음을 정하고 당장에 그를 물러가게 했습니다. 사울은 스스로 종교적이라고 여기고 적절한 때에 특정한 관례들을 지킨다고 착각할 뿐 깊이 자각할 줄 모른다는 인상을 줍니다. 그는 하나님에 대한 산 신앙과 반대되는 종교를 이용했습니다. 그는 자기 방식대로 옳은 일을 하려고 할 때에도 곧장 어리석음 (13:9-10, 14:24-47, 15:19-23)이나 불경(14:18-19)에 빠지곤 합니다. 하나님의 법령에 대한 그의 태도에는 근 본적으로 영적인 분별력의 부족이 깔려 있었던 것입니다. 그의 종교는 사울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반면에; 요나단은 어떤 영적인 자질을 보여 주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그의 믿음은 나날이 발전했습니다. 그리고 그와 그의 병기 맡은 자는 그 당시의 영웅이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승리를 상 징하는 인물로도 길이 남아 있습니다. 조셉 홀(Joseph Hall, 1574-1656) 감독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믿음은 극심한 반대에 부딪칠 때 찬란하게 빛난다. 이성은 언제나 수단을 바라보고 믿음은 끝을 바라 본다. 오, 주여 당신이 고통스러워하는 순례자들을 위해 지정하는 여정이 얼마나 위험 한지요! 어려움 때문에 낙심하고 만다면, 우리는 올라가기도 전에 떨어지고 말 것입니다. 우리가 마지막 단계에 발을 올려놓을 때, 그 곳에는 죽음과 유혹의 블레셋 사람들이 도사리고 있을 것이나, 우리가 믿음을 갖고 있으면 땅과 지 옥의 심술을 극복하게 될 것이다. 많은 사람의 구원(14:24-45) 사울이 가까스로 승리함과 동시에 전쟁은 그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었습니다.
1. 사울의 허영에 찬 맹세(14:24-44) 어울리지 않게 능숙한 솜씨로 종교의 위로 없이도 행할 수 있었음을 입증한 사울은 즉시 모든 군사들 에게 엄숙한 맹세를 하도록 했습니다. (삼상14:24) 이 날에 이스라엘 백성이 피곤하였으니 이는 사울이 백성에게 맹세시켜 경계하여 이르기를 저녁 곧 내가 내 원수에게 보수하는 때까지 아무 식물이든지 먹는 사람은 저주를 받을지어다 하였음이 라
그러므로 백성이 식물을 맛보지 못하고 나폴레옹이 그 시대에 살았더라면 군대, 심지어 하나님의 군대도 배가 불러야 싸울 수 있다는 말을 해 주었을 것입니다. 군사들의 건강을 무시한 것은 사울의 지독한 이기심 때문이었습니다. 모든 것은 개인적인 영화를 누리 려는 그의 이기적인 충동에서 나온 것입니다. 내가 내 원수에게 보수하는 때까지… 이것은 자기 부하들로 하여금 땀과 피를 흘리며 죽게 만드는 처사입니다! 아니, 그것은 자기의 승리를 얻기 위해 사람들을 굶어 죽고 지쳐서 쓰러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사울은 이것을 금식, 따라서 그 날 이스라엘 군사들의 승리를 경축 하는 헌신 행위로 간주했을 것입니다. 사실이 그랬다면 이것은 사울의 이해할 수 없는 독특한 종교성을 다 시 한 번 입증하는 것입니다. 그런 식의 종교성 은 이 세상에서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다음의 두 가지 일반적인 사항들은 오늘의 우리에게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첫째, 그렇게 맹세하도록 함으로써 사울은 하나님 자신보다 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많은 요구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에 자의적 숭배 (골2:23)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의 기본적인 특징입니다. 예수님 시대의 바리새인들도 바로 이런 부류에 속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제시하신 것 이상의 의 식적인 의의 체계를 세웠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레위기 20:9절을 그들에게 적용시켰습니다. (마15:9) 사람 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 도다 하였느니라 하시고 그리고 후에 그들에게 심판을 선고하면서 예수님은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 직이려 하지 아니하고 (마23:4)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계시된 뜻과 반대되는 인간의 자기 의지를 왕위에 올려놓기 때문에 자의적인 예배라고 일컬어집니다. 결국 이런 일은 참혹한 결과를 맞게 됩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우리가 벗어나야 할 요소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인간적인 문제이므로 다른 식 으로는 해결될 수 없습니다.
둘째, 비 성경 적인 요구들은 심각한 악을 유발합니다. 사울의 맹세는 어려운 상황을 더 악화시켰습니다. 이제 적절하지 못한 맹세의 다섯 가지 해로운 결과들을 생각해 봅시다.
1)요나단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맹세를 위반하고 말았습니다(14:25-27). 벌이 없는 벌집에 다가간 요 나단은 꿀을 찍어 먹고 새 힘을 얻었습니다.
2)그날 내린 사울의 명령에 부득이 순종한 다른 사람들의 항의를 듣고 요나단은 몹시 화를 내었습니다 (14:28-30). 요나단은 세 가지 점에서 모두 잘못이 없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이 땅으로 곤란케 하였던 것 입니다. 그가 꿀을 약간 맛보자 그의 눈이 밝아져 습니다. 그러나 왕의 명령을 거역하는 것은 비록 그가 왕 의 아들이라 하더라도 불경죄에 해당했습니다. 물론 그의 말은 진실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이 약탈한 것을 먹었더라면, 블레셋 사람을 살육함이 더욱 많 았을 것입니다.
3)백성들이 고기를 성급히 요리함으로 말미암아 피를 먹는 죄를 범하게 되었습니다. (14:31-35). 율법은 이것을 분명하게 금했습니다. 고기는 피째 먹어서는 안되었습니다(레19:26). 이것은 장막의 희생 제사를 위 해 피를 보존하는, 레위기 17:10-12절의 규정 때문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기 때문입니다(레17:11). 이런 식으로 하나님은 대속과 관련된 피의 상징적인 의미의 완전성을 유지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그런 대속이 얼마나 필요하고 값진 것인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에 서 옛계약의 피뿌림으로 상징된 모든 것이 단번에 이루어진 것입니다(히9:11-10:18). 사울은 서둘러서 이 죄 를 대속할 방법을 모색했으며, 신하들의 의식적 정결을 위한 준비를 했습니다(14:33-35). 그러나 이것의 슬 픈 측면은 사울이 쌓은 첫 번째 제단은 승리에 대한 감사를 드리기 위해서 세워진 것이 아니라 그가 자초 했던 죄의 용서를 구하기 위해 세워졌다는 것입니다.
4)이스라엘의 승리가 축소되었습니다(14:36-37). 사울은 제사장의 말에 따라 추격을 계속할 것인지 하나님의 뜻을 물었으나 하나님은 대답하지 않으셨으며 이렇게 해서 블레셋 사람들은 밤을 틈타 도망쳤습니다. 5)사울의 불 경건한 횡포가 노출되었습니다(14:38-4
6). 이것은 가장 슬픈 죄를 범함으로써만 지켜질 수 있는 맹세임이 입증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시지 않자, 이스라엘 사람들은 제비 뽑기로 그 이유를 물었으며 결국 요나단이 뽑혔습니다. 요나단은 자기가 꿀을 조금 먹었다고 고백했으며 유감스럽게도 그는 사형을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내가 죽을 수밖에 없나이다. 사울이 그 다음에 자기 아들을 사형에 처한 다는 자신의 의지를 강력하게 표명했다는 것은 그의 분노에 대한 냉정한 설명입니다(14:44). 사실상 그는 죄 인이었습니다. 의도적으로 죄를 범했던 것은 아니지만, 그가 사울의 맹세를 어기고 사울이 이행해야 하는 형벌을 자초했기 때문에(14:24, 39), 맹세 위반의 초점이 되었던 것입니다. 게다가 그는 사울 때문에 하나님 께서 이스라엘에게 화를 내신다는 사실을 백일하에 드러내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주는 경고는 아주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사람들에게 성경에 나오는 것 이외의 규정이나 규칙을 부과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말씀 가운데에서 말씀하시기 때문에, 성경만이 우리의 믿음과 삶의 유일한 규칙인 것입니다. 성경에 새롭고 사실상 거짓된 것을 덧붙이는 행위는 죄입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희생자들에게 미치는 악한 영향은 거짓이 아닙니다. 제사만을 살 펴보더라도 이것이 개인적인 비극에서 어떤 의미를 지닐 수 있는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복음주의 교회들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신 것에 조금이라도 덧붙이려는 유혹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과 성경의 그리스도에 만족해야 하겠습니다!
2. 다수가 소수를 구원함!(14:45) 사울은 정의감을 지니지 못했지만, 백성은 지녔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 당시의 죄없는 영웅이 무지 몽매한 그 아버지의 이기심 때문에 헛된 죽음을 죽도록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분개했습니다.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하옵나니 그의 머리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할 것은 그가 오늘 하나님과 동사하였 음이니이다. 사실상 이것은 이 사례(事例)에 대한 하나님의 판결이었습니다. 그 당시 백성의 소리는 하나님의 소리 였기 때문입니다. 요나단은 죄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는 자의적이고 독재적인 명령을 내려 이스라엘에 죄 를 몰고 온 그의 아버지의 희생 양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에게 응답하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와 같이 우회적인 방법으로 백성들 앞에서 사울을 수치스럽게 만드셨던 것입니다. 개인적이고 영적 인 관점에서, 이것은 교만의 위험과 맹세 신학, 그리고 하나님의 계시된 뜻은 신앙과 삶의 규칙으로 족하다는 이론에 관한 교훈이었습니다. 법적인 관점에서, 이것은 왕의 권력의 한계를 강조해 줍니다. 왕 (의장, 대 통령, 지도자, 독재자)의 신성 불가침권 은 절대주의를 옹호하고 백성에 대한 국가의 폭력을 합법화하기 위 해 인간이 고안해 낸 것입니다. 오늘날 독재자들은 부드럽고 완곡한 용어들을 사용합니다. 그들은 민족주의 적인 관심 과 백성의 의지 를 불러일으킵니다. 그러나 이것들은 권력에의 욕망과 현 질서를 파괴하려는 뜻 을 신성시하기 위한 전략 인 것입니다. 사울은 이 백성이 그날 무슨 일을 했는지 기억하고 그들을 두려워했 습니다(15:24). 이것은 독재자의 허세 뒤에 감추인 비참한 현실입니다. 그들은 백성을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더욱 두려워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사랑하심(14:46-52). 이 장의 마지막 부분은 부록이나 각주처럼 보이며, 말이 나온 김에 하는 주해처럼 여겨집니다. 그러나 이 단락 뒤에는 놀라운 원리가 감추어져 있습니다. 사울은 그 후에도 계속 이스라엘 왕으로 군림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자기 곳으로 돌아 갔습니다.(14:46). 그리고 해마다 사울은 수세기 동안 이스라엘을 억압 하던 민족들과의 싸움에서 성공을 거두었습니다.(14:47-48). 사울과 이스라엘은 국가 통일을 이룩하기에 충 분할 정도의 힘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았습니다(14:49-52). 이 단락의 요지는 하나님께서 여러 가지 허물에도 불구하고 자기 백성을 사랑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 의 사랑은 언제나 그들의 죄를 이기고도 남음이 있었습니다. 자비로우신 하나님은 구원을 가져오는 은혜를 백성에게 쏟아 부으십니다. 그래서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질책과 그의 구원에 관한 메시지는 그의 백성의 일 상적인 경험 속에서 병행을 이룹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분노의 산 위로 올라오심으로써 자기 사랑을 입증하 십니다. 들을 귀와 볼 눈을 지닌 사람들에게는 그의 훈련조차도 은혜의 목적을 지닙니다. 그의 법은 옛언약 백성들에게 참 생명과 참 자유의 길이며 참 행복의 추구였습니다. 바로 그 법은 영원히 우리를 그리스도에 게로 인도하는 몽학 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합니다(갈3:24).
왜냐하면 여기에는 진리에 관한 매우 놀라운 설명 가운데 하나님의 계시에 관한 보편적인 원리가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속성 가운데 하나 입니다. 이 원리는 결코 수정되거나 설명되지 않습니다. 이 원리는 주를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늘 위로가 됩니다. 하나님은 오늘날 사람이 많든 적든 우리를 구원해 주실 수 있습니다.
1. 요나단의 기습(13:230-14:15) 믹마스 전투는 매우 조용하게 시작되었습니다. 사울은 결정을 못 내리고 주저하고 있었던 것 같지만, 그의 아들 요나단은 결연히 난국에 맞서 전쟁을 개시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래서 그와 그의 갑옷을 맡은 자는 골짜기 건너편의 블레셋 전진 기지를 공격할 목적으로 진을 빠져 나왔습니다(14:1). 그 무렵 (게바)기브아에 있던 사울은 블레셋 군대가 주둔해 있던 믹마스의 남쪽 산에 있었습니다. 비록 그들 사이가 2-3㎞ 정도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지만, 양측에는 낭떠어리가 있고 그 사이에 깊은 골짜기가 가 로놓여 있었습니다.(14:4-5). 요나단의 계획은 한쪽 편에서 블레셋의 전진 기지에 접근하여 그들의 기개를 시험하는 것이었습니다. 요나단은 이스라엘 군사들의 사기가 저하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상황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두 가지 중요한 요인이 있다는 사실도 깨달았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능력이 었고, 다른 하나는 비록 처음에는 제한적이었지만, 결국에는 승리하리라는 확신이었습니다. 올리버 크롬웰 (Oliver Cromwell)이 하나님을 믿고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였듯이, 요나단도 하나님에 대한 산 신앙과 노련 한 전략가의 눈으로 그 일에 착수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믿고 낙관적으로 일을 시작했습니다. (삼상14:6)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일하실까 하노라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의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아 니하였느니라 그는 계속 신중한 자세를 견지했습니다. 그는 무모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시험을 해보기로 한 것입니다. 블레셋의 감시병들이 그들더러 올라오라고 할 경우, 그들은 건너가서 전쟁을 할 생각이었습니다. 요나단은 이것을 여호와께서 그들을 우리 손에 붙이신 표징 으로 여겼습니다(14:8-10). 이 표징을 기드온의 양털처럼(삿6:34-40, 7:9-15). 하나님 계시의 초자연적인 개입으로 간주할 필요는 없습니다. 요나단은 올라오 라고 하는 블레셋 사람들의 권유를 이스라엘에 대한 경멸과 이스라엘의 도전을 얼마든지 물리칠 수 있다는 자신감의 표시로 여겼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요나단은 기회만 주어진다면, 자기 백성을 위해 일격을 가 해 주실 하나님을 믿고, 갈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마침내 블레셋 사람들의 조롱 조의 반응으로 그 기회 가 주어졌습니다. 보초들은 히브리 사람이 그 숨었던 구멍에서 나온다 고 외쳤습니다. 우리에게로 올라오 라 여호와께서 그들을 이스라엘의 손에 붙이셨느니라 (14:12). 그는 이것을 결정적인 행동을 하도록 하기 위 한 하나님의 계기로 믿었습니다. 두 사람은 와디를 횡단하여 내려와서는 믹마스 편에서 올라갔습니다. 그 꼭대기에서 육탄전이 벌어지고 그 후에 난투가 벌어졌는데, 그 싸움으로 20명의 블레셋 사람이 쓰러졌습니다(14:13-14). 이 두 사람의 기습 전 결과, 안심하고 빈둥대던 블레셋 주력 부대가 공포에 떨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그것은 사실상 하나님이 일으킨 공포 였습니다(14:16). 두려움에 떠는 적의 소동과 더불어 땅도 흔들렸습니다. 그리하여 블레셋 사람들은 도주했습니다!
2. 사울의 개입(14:16-23) (게바)기브아에서 걱정에 싸여 있던 사울은 블레셋 사람들에게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곧 군대를 소집하였습니다. 그 과정에서 그는 요나단과 그의 병기를 맡은 자가 없음을 알았습니다.(14:16-17), 그러나 그는 적과의 싸움을 즉시 개시하지는 않았습니다. 사울은 희생 제사를 드리고 하나님 의 뜻을 알아보도록 제사장 아히야에게 부탁했습니다. 하나님의 궤가 이스라엘 자손과 함께 있었다는 언급 은 요나단이 블레셋 사람들에게 일격을 가한 것과 마찬가지로 성경 주석가들 사이에 많은 논란을 야기시켰 습니다. 그 당시 궤는 기럇여아림에 있었고, 일반적으로 학자들은 다윗이 궤를 예루살렘으로 가져오기까지 궤가 줄곧 그 곳에 있었다고 가정합니다(7:1-2, 삼하 6:2, 대상13:5-6). 70인역에는 사울이 궤가 아니라 에 봇 을 두른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면서, 많은 성서 신학자들은 히브리 본문이 이 부분에서 와전되었으며, 궤는 진이 아니라 기럇여아림에 있었다고 결론을 지었습니다. 실제로 이스라엘 군대와 함께 있었던 것은 제사장의 옷인 에봇과 신비한 돌인 우림과 둠밈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이것을 가지고 하나님 의 인도를 추구했을 것입니다. 상황이야 어찌되었든, 사울은 일상적인 방법으로 하나님께 자문을 구할 생각 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이 엄숙하고 거룩한 절차를 제정했다 하더라도, 그는 마음을 바꾸어 이스라엘 사람들이 지체없이 전쟁에 가담할 수 있도록 아히야에게 손을 거두라고 지시했습니다(14:18-20). 블레셋 사람 들을 섬기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전 주인에게 반란을 일으켰으며, 이스라엘 사람들이 숨어 있다가 나타나서 전쟁에 가담하자, 블레셋 사람들은 완전히 퇴각했습니다. (삼상14:23) 여호와께서 그 날에 이스라엘을 구원 하시므로 전쟁이 벧아웬을 지나니라 믹마스 전투는 인간적인 수준에서 볼 때, 요나단의 승리였습니다. 사 울은 나중에 결정적으로 개입했지만, 그의 모습이 돋보이지는 않았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일들에 주저했다는 것은 제사장 아히야와 하나님의 법령을 활용하는 데서도 다시 나타났습니다. 사울은 처음에 블레셋 군대 를 치러 가야 하는지 결정하지 못해 머뭇거리다가 하나님의 뜻을 알려고 아히야를 불렀습니다. 그러나 그 후 그는 자기 마음을 정하고 당장에 그를 물러가게 했습니다. 사울은 스스로 종교적이라고 여기고 적절한 때에 특정한 관례들을 지킨다고 착각할 뿐 깊이 자각할 줄 모른다는 인상을 줍니다. 그는 하나님에 대한 산 신앙과 반대되는 종교를 이용했습니다. 그는 자기 방식대로 옳은 일을 하려고 할 때에도 곧장 어리석음 (13:9-10, 14:24-47, 15:19-23)이나 불경(14:18-19)에 빠지곤 합니다. 하나님의 법령에 대한 그의 태도에는 근 본적으로 영적인 분별력의 부족이 깔려 있었던 것입니다. 그의 종교는 사울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반면에; 요나단은 어떤 영적인 자질을 보여 주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그의 믿음은 나날이 발전했습니다. 그리고 그와 그의 병기 맡은 자는 그 당시의 영웅이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승리를 상 징하는 인물로도 길이 남아 있습니다. 조셉 홀(Joseph Hall, 1574-1656) 감독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믿음은 극심한 반대에 부딪칠 때 찬란하게 빛난다. 이성은 언제나 수단을 바라보고 믿음은 끝을 바라 본다. 오, 주여 당신이 고통스러워하는 순례자들을 위해 지정하는 여정이 얼마나 위험 한지요! 어려움 때문에 낙심하고 만다면, 우리는 올라가기도 전에 떨어지고 말 것입니다. 우리가 마지막 단계에 발을 올려놓을 때, 그 곳에는 죽음과 유혹의 블레셋 사람들이 도사리고 있을 것이나, 우리가 믿음을 갖고 있으면 땅과 지 옥의 심술을 극복하게 될 것이다. 많은 사람의 구원(14:24-45) 사울이 가까스로 승리함과 동시에 전쟁은 그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었습니다.
1. 사울의 허영에 찬 맹세(14:24-44) 어울리지 않게 능숙한 솜씨로 종교의 위로 없이도 행할 수 있었음을 입증한 사울은 즉시 모든 군사들 에게 엄숙한 맹세를 하도록 했습니다. (삼상14:24) 이 날에 이스라엘 백성이 피곤하였으니 이는 사울이 백성에게 맹세시켜 경계하여 이르기를 저녁 곧 내가 내 원수에게 보수하는 때까지 아무 식물이든지 먹는 사람은 저주를 받을지어다 하였음이 라
그러므로 백성이 식물을 맛보지 못하고 나폴레옹이 그 시대에 살았더라면 군대, 심지어 하나님의 군대도 배가 불러야 싸울 수 있다는 말을 해 주었을 것입니다. 군사들의 건강을 무시한 것은 사울의 지독한 이기심 때문이었습니다. 모든 것은 개인적인 영화를 누리 려는 그의 이기적인 충동에서 나온 것입니다. 내가 내 원수에게 보수하는 때까지… 이것은 자기 부하들로 하여금 땀과 피를 흘리며 죽게 만드는 처사입니다! 아니, 그것은 자기의 승리를 얻기 위해 사람들을 굶어 죽고 지쳐서 쓰러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사울은 이것을 금식, 따라서 그 날 이스라엘 군사들의 승리를 경축 하는 헌신 행위로 간주했을 것입니다. 사실이 그랬다면 이것은 사울의 이해할 수 없는 독특한 종교성을 다 시 한 번 입증하는 것입니다. 그런 식의 종교성 은 이 세상에서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다음의 두 가지 일반적인 사항들은 오늘의 우리에게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첫째, 그렇게 맹세하도록 함으로써 사울은 하나님 자신보다 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많은 요구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에 자의적 숭배 (골2:23)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의 기본적인 특징입니다. 예수님 시대의 바리새인들도 바로 이런 부류에 속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제시하신 것 이상의 의 식적인 의의 체계를 세웠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레위기 20:9절을 그들에게 적용시켰습니다. (마15:9) 사람 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 도다 하였느니라 하시고 그리고 후에 그들에게 심판을 선고하면서 예수님은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 직이려 하지 아니하고 (마23:4)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계시된 뜻과 반대되는 인간의 자기 의지를 왕위에 올려놓기 때문에 자의적인 예배라고 일컬어집니다. 결국 이런 일은 참혹한 결과를 맞게 됩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우리가 벗어나야 할 요소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인간적인 문제이므로 다른 식 으로는 해결될 수 없습니다.
둘째, 비 성경 적인 요구들은 심각한 악을 유발합니다. 사울의 맹세는 어려운 상황을 더 악화시켰습니다. 이제 적절하지 못한 맹세의 다섯 가지 해로운 결과들을 생각해 봅시다.
1)요나단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맹세를 위반하고 말았습니다(14:25-27). 벌이 없는 벌집에 다가간 요 나단은 꿀을 찍어 먹고 새 힘을 얻었습니다.
2)그날 내린 사울의 명령에 부득이 순종한 다른 사람들의 항의를 듣고 요나단은 몹시 화를 내었습니다 (14:28-30). 요나단은 세 가지 점에서 모두 잘못이 없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이 땅으로 곤란케 하였던 것 입니다. 그가 꿀을 약간 맛보자 그의 눈이 밝아져 습니다. 그러나 왕의 명령을 거역하는 것은 비록 그가 왕 의 아들이라 하더라도 불경죄에 해당했습니다. 물론 그의 말은 진실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이 약탈한 것을 먹었더라면, 블레셋 사람을 살육함이 더욱 많 았을 것입니다.
3)백성들이 고기를 성급히 요리함으로 말미암아 피를 먹는 죄를 범하게 되었습니다. (14:31-35). 율법은 이것을 분명하게 금했습니다. 고기는 피째 먹어서는 안되었습니다(레19:26). 이것은 장막의 희생 제사를 위 해 피를 보존하는, 레위기 17:10-12절의 규정 때문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기 때문입니다(레17:11). 이런 식으로 하나님은 대속과 관련된 피의 상징적인 의미의 완전성을 유지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그런 대속이 얼마나 필요하고 값진 것인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에 서 옛계약의 피뿌림으로 상징된 모든 것이 단번에 이루어진 것입니다(히9:11-10:18). 사울은 서둘러서 이 죄 를 대속할 방법을 모색했으며, 신하들의 의식적 정결을 위한 준비를 했습니다(14:33-35). 그러나 이것의 슬 픈 측면은 사울이 쌓은 첫 번째 제단은 승리에 대한 감사를 드리기 위해서 세워진 것이 아니라 그가 자초 했던 죄의 용서를 구하기 위해 세워졌다는 것입니다.
4)이스라엘의 승리가 축소되었습니다(14:36-37). 사울은 제사장의 말에 따라 추격을 계속할 것인지 하나님의 뜻을 물었으나 하나님은 대답하지 않으셨으며 이렇게 해서 블레셋 사람들은 밤을 틈타 도망쳤습니다. 5)사울의 불 경건한 횡포가 노출되었습니다(14:38-4
6). 이것은 가장 슬픈 죄를 범함으로써만 지켜질 수 있는 맹세임이 입증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시지 않자, 이스라엘 사람들은 제비 뽑기로 그 이유를 물었으며 결국 요나단이 뽑혔습니다. 요나단은 자기가 꿀을 조금 먹었다고 고백했으며 유감스럽게도 그는 사형을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내가 죽을 수밖에 없나이다. 사울이 그 다음에 자기 아들을 사형에 처한 다는 자신의 의지를 강력하게 표명했다는 것은 그의 분노에 대한 냉정한 설명입니다(14:44). 사실상 그는 죄 인이었습니다. 의도적으로 죄를 범했던 것은 아니지만, 그가 사울의 맹세를 어기고 사울이 이행해야 하는 형벌을 자초했기 때문에(14:24, 39), 맹세 위반의 초점이 되었던 것입니다. 게다가 그는 사울 때문에 하나님 께서 이스라엘에게 화를 내신다는 사실을 백일하에 드러내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주는 경고는 아주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사람들에게 성경에 나오는 것 이외의 규정이나 규칙을 부과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말씀 가운데에서 말씀하시기 때문에, 성경만이 우리의 믿음과 삶의 유일한 규칙인 것입니다. 성경에 새롭고 사실상 거짓된 것을 덧붙이는 행위는 죄입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희생자들에게 미치는 악한 영향은 거짓이 아닙니다. 제사만을 살 펴보더라도 이것이 개인적인 비극에서 어떤 의미를 지닐 수 있는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복음주의 교회들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신 것에 조금이라도 덧붙이려는 유혹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과 성경의 그리스도에 만족해야 하겠습니다!
2. 다수가 소수를 구원함!(14:45) 사울은 정의감을 지니지 못했지만, 백성은 지녔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 당시의 죄없는 영웅이 무지 몽매한 그 아버지의 이기심 때문에 헛된 죽음을 죽도록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분개했습니다.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하옵나니 그의 머리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할 것은 그가 오늘 하나님과 동사하였 음이니이다. 사실상 이것은 이 사례(事例)에 대한 하나님의 판결이었습니다. 그 당시 백성의 소리는 하나님의 소리 였기 때문입니다. 요나단은 죄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는 자의적이고 독재적인 명령을 내려 이스라엘에 죄 를 몰고 온 그의 아버지의 희생 양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에게 응답하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와 같이 우회적인 방법으로 백성들 앞에서 사울을 수치스럽게 만드셨던 것입니다. 개인적이고 영적 인 관점에서, 이것은 교만의 위험과 맹세 신학, 그리고 하나님의 계시된 뜻은 신앙과 삶의 규칙으로 족하다는 이론에 관한 교훈이었습니다. 법적인 관점에서, 이것은 왕의 권력의 한계를 강조해 줍니다. 왕 (의장, 대 통령, 지도자, 독재자)의 신성 불가침권 은 절대주의를 옹호하고 백성에 대한 국가의 폭력을 합법화하기 위 해 인간이 고안해 낸 것입니다. 오늘날 독재자들은 부드럽고 완곡한 용어들을 사용합니다. 그들은 민족주의 적인 관심 과 백성의 의지 를 불러일으킵니다. 그러나 이것들은 권력에의 욕망과 현 질서를 파괴하려는 뜻 을 신성시하기 위한 전략 인 것입니다. 사울은 이 백성이 그날 무슨 일을 했는지 기억하고 그들을 두려워했 습니다(15:24). 이것은 독재자의 허세 뒤에 감추인 비참한 현실입니다. 그들은 백성을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더욱 두려워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사랑하심(14:46-52). 이 장의 마지막 부분은 부록이나 각주처럼 보이며, 말이 나온 김에 하는 주해처럼 여겨집니다. 그러나 이 단락 뒤에는 놀라운 원리가 감추어져 있습니다. 사울은 그 후에도 계속 이스라엘 왕으로 군림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자기 곳으로 돌아 갔습니다.(14:46). 그리고 해마다 사울은 수세기 동안 이스라엘을 억압 하던 민족들과의 싸움에서 성공을 거두었습니다.(14:47-48). 사울과 이스라엘은 국가 통일을 이룩하기에 충 분할 정도의 힘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았습니다(14:49-52). 이 단락의 요지는 하나님께서 여러 가지 허물에도 불구하고 자기 백성을 사랑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 의 사랑은 언제나 그들의 죄를 이기고도 남음이 있었습니다. 자비로우신 하나님은 구원을 가져오는 은혜를 백성에게 쏟아 부으십니다. 그래서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질책과 그의 구원에 관한 메시지는 그의 백성의 일 상적인 경험 속에서 병행을 이룹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분노의 산 위로 올라오심으로써 자기 사랑을 입증하 십니다. 들을 귀와 볼 눈을 지닌 사람들에게는 그의 훈련조차도 은혜의 목적을 지닙니다. 그의 법은 옛언약 백성들에게 참 생명과 참 자유의 길이며 참 행복의 추구였습니다. 바로 그 법은 영원히 우리를 그리스도에 게로 인도하는 몽학 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합니다(갈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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