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흔적을 가진 사도 (갈6:14-18)
본문
현대는 기능과 능률을 중요시하는 시대입니다. 능력있는 사람만이 우대를 받고 과거에 아무리 훌륭한 업적과 공로가 있었어도 지금 별 쓸모가 없으면 외면당하고 소외당할 수 밖에 없는 시대가 왔습니다. 세월이 가고 시대가 바 뀔수록 그러한 경향은 점점 더 심해 질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지금 우리나라 에서도 노인 문제, 은퇴하여 여생을 쓸쓸하게 보내시는 분들의 문제가 하나 의 큰 사회문제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그분 들에게 어떻게 하여야 할까를 신중히 생각하여야 할 것입니다. 원래 한국 사람들은 자기 자랑이나 혹은 하소연을 말하지 않는 것이 미덕 이요 예의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보면 사도바울 같은 분도 자기 이름을 나타내는 귀절에 가서는 '나 바울은' 이라고 하지않고 '어떤 사람이'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바울도 자신의 간증이나 자기의 주장 혹은 변명, 신상발언 같은 것을 과감히 말할 때도 없지않아 있었습니다. 지금 봉독한 갈라디아 6:17 말씀은 바로 이러한, 그의 개인적인 이야기입니다. 사 도 바울은 '이제부터 아무도 나를 괴롭히지 마십시오. 내 몸에는 예수님의 흔적이 있습니다.'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사도바울이 말하는 '괴로움'이 무엇이었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바울은 여러가지 면에서 많은 고난을 당한 분입니다. 고린도전서 4:9에 서 바울은 세상에서의 사도들의 처지를 이렇게 넉두리처럼 호소하고 있습니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하나님이 우리 사도들을 사형장의 죄수들처럼 제일 천한 자리에 세우셔서 우리가 온 세상 사람들과 천사들의 구경거 리가 되게 하였습니다.' 라고 하면서, 사도들의 생활이란 굶주림 헐벗음 목마름 그리고 매맞음과 집없이 떠돌아 다니는 신세, 남에게 욕을 먹어도 축복을 해 주어야하고 핍박 을 당해도 참아야 하며 비방을 받아도 좋은 말로 달래야 하는. '세상의 쓰레기와 만물의 찌꺼기 ' 같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주의 종된 사도들의 운명이요 그들이 가야할 길이었습니다. 특별 히 과거 우리가 모두 가난했던 시절의 교회를 섬기던 목사님들의 그 깊은 속 이야기들을 들으면 참으로 눈물겨운 사연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런데 하물며 사도바울의 시대였겠습니까 사실 주님의 성실한 종이 되려면 부유한 것과는 결별할 각오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 바울이 당하고 있는 괴로움은 단 지 그러한 경제적인 궁핍만을 두고 한 말이 아닙니다. 그는 지금 자기가 세 워서 돌보고 있는 바로 자기의 교회때문에 크나 큰 심적 괴로움을 당하고 있습니다. 괴로움을 당한다는 것은 일반적으로는 누구에게나 다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들이 당하는 괴로움은 특수한 것입니다. 남들이 보기에는 아무것 도 아닌 일을 가지고 그들은 잠을 못이루고 식음을 전폐하기까지 하면서 기 나긴 영적 고투를 하게 될 때가 많습니다. 여기 갈라디아 교회로부터 당한 괴로움은 유대 율법주의자들의 그릇된 주 장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주장하기를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않는다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라고 주장한 그 말 한마디 때문이었습니다. 그 말 한마디가 무엇이 그리 대단한 것입니까 그러나 사도바울은 심히 화가났고 또 심히 걱정이 되었으며 심히 괴로워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큰 분노로써 그 일에 대하여 길고도 상세하게 책망과 권면의 서신을 쓴 것입니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순수성과 진실성을 옹호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사도들의 가장 큰 관심사는 복음이 복음으로서 전 달되고 가르쳐 지는 일이요, 사도들의 가장 큰 괴로움은 참된 복음 아닌 다 른 것이 복음 행세를 하고 판을 치고 사람을 미혹하게 하는 일인 것입니다. 복음의 수호자 전파자로서, 어쩔수없이 이러한 큰 괴로움을 지니고 살아야하는 분들이 바로 교역자들이라고 보시면 틀림이 없을 것입니다. 그 반대로, 이 분들의 가장 큰 기쁨은 복음이 바로 알려지고 힘있게 전파 되며 교회와 성도들이 구원과 진리안에서 행하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그의 사랑하는 제자 가이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나는 성도들로부터 그대가 진리대로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무척 기뻤습니다. 나에게는 내 자녀들이 진리안에서 생활한다는 소식을 듣는 것보다 더 기쁜일이 없습니다.'(요3 1:2-3) 여기서 요한은 자기의 교인들을 '내 자녀'라고 하였는데 사도는 신령한 면 에서 아버지와 같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아버지인 사도는, 그 아들들이 진리 안에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들을때 가장 기쁘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아버 지에게는 자녀들로서는 알지도 못하고 겪어 보지도 못한 고충과 괴로움이 많 은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그 괴로움과 아픔이 너무도 커서 '이후로는 아무도 나를 괴롭히지 마십시요'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일은 이와같은 아픔이나 고민, 그리고 괴로움이 있음으 로 인하여 더 밝은 빛을 발하게 됩니다. 우리는 사도바울의 서신을 통하여 그것을 더욱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유대 율법주의자들과 다른 복음을 전하는 반대자들이 없었다면 이 갈라디아서는 기록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종교개 혁자 마틴 루터는 이 갈라디아서를 가르켜 '기독교인의 자유헌장'이라고 하 였습니다. 그는 갈라디아서와 로마서에서 힘을 얻어 부패한 중세의 교회를 개혁하는데 성공한 것입니다. 또한 사도바울이 감옥에 들어가지 않았더라면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 로새서같은 옥중서신이 기록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모든 자유와 권리를 박탈 당한 옥에 갇힌 죄수의 처지에서 바울은 '기뻐하라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옥에 갇혀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는 그가 '소망을 가지라', '용서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아픔과 괴로움중에 서 하나님의 뜻을 더 밝게 하여준 주옥과도 같은 귀중한 말씀들입니다. 예수의 제자 가운데 가롯 유다같은 이는 차라리 없는 것이 더 나을 사람 이었습니다. 그러나 배반자가 가슴에 못을 박았지만, 그 때문에 제자들은 더 욱 결속하여 경각심을 가지고 그들의 공동체를 지켜 나갔습니다. 또 베드로는 세번씩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한 것에 대한 가책때문에 다른 사람들보 다 훨씬 더 주님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사도바울은 '육체의 찌르는 가시가 사탄이 보낸 사자'라고 할 만큼 육체의 고통을 지니고 살았지만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가 자신에게 풍성하고 넉넉한 것임을, 그로인하여 더욱 새롭게 깨 달았던 것입니다. 그런면에서, 목회자들에게 신령한 면의 근심과 영적인 고민 이 없을 수 없으며 이를 통하여 더 좋은 목회와 더 좋은 설교가 나올 수 있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교역자들의 그 고투하고 고민하는 일은, 이 세상에 그 어떠한 노동보다도 힘들고 어려운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저는 지난 한세기동 안 우리나라의 교회를 지켜오신 많은 목사님들을 진심으로 존경해 마지 않습니다. 목회자의 길이 어렵다고 하지만 그 참으로 어려운 사정은, 결국 같은 목회자들만이 이해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무리 어렵고 괴 롭더라도 그러한 과정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그 일을 더욱 빛나게 해주시고 더욱 값진 것으로 만들어주식 때문에 환난을 당해도 즐거워하고 그 일을 생각하면 기쁨을 억누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 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핍박하 였느니라.'(마 5:11-) 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깊이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경험한 참을 수 없는 고통과 괴로움은 그를 위대한 사도로 만 들기 위한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그렇게 생각할 때에 우리 하나님의 은혜는 항상 나에게 부족함이 없으며 우리의 잔을 항상 넘치게 하시는 축복인 것 입니다. 여기서 사도바울은 자기 몸에는 예수의 흔적이 있다는 좀 특별한 말을 강 조하고 있는데, 그가 몸의 지니고 있다는 '예수의 흔적'이란 무엇입니까 만 일 사도바울의 벗은 몸을 세밀히 관찰하여 본다면 그 몸에 남들이 갖지않은 특이한 흔적들을 찾아 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의 소매를 걷어 올리고 팔 뚝을 살펴보면, 빌립보 감옥에서 착고에 차였던 흔적을 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또 그 어깨 언저리에는 루스드라에서 돌에 맞아 죽을뻔 했을 때에 입은 흉터를 볼 수 있을 것이고 허리에는 '40에 하나 감한 매'를 5번 맞았을 때에 가죽채찍에 맞은 깊은 상처를 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바울은 매맞은 흔적들 을 그 몸에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볼 때마다 끔찍하고 소름끼치는 기억 이 되겠지만 바울은 그것을 '예수의 흔적'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과 관련된 어떤 흔적을 가지고 계십니까 원래 이 흔적이 란 것은 낙인(烙印)을 의미합니다. 낙인은 방목하는 가축들에게 찍어서 그 주 인의 소유권을 표시하는 것입니다. 고대에는 노예들이나 군인들에게도 낙인 을 찍어 그들이 누구에게 소유된 자들인지를 표시했습니다. 그러니까 사도바울이 말한 예수의 흔적이란 예수의 낙인으로 자신이 철저 히 예수님께 속한 예수의 종이라는 사실을 일컬은 것입니다. 그는 자기 몸의 찢긴 상처나 매맞아 멍든자국을 볼 때에 자기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 한 주님의 종이라는 사실은 깊이 인식하였던 것입니다. 그것은 노예들에게 찍는 낙인과 같이 예수님께 소유된 소유권의 표시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 신을 항상 '예수 그리스도의 종된 나 바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의 흔적은 예수의 종으로서 찍혀진 낙인입니다. 그것은 그의 영원한 종임을 의 미하는 것입니다. 종이기 때문에 자기 마음대로 하지못합니다. 살아도 죽어도 오직 주의 것 이므로 주의 영광을 위하여 존재합니다.
바울은 자기 안에 사시는 이는 자신 이 아니고 오직 예수이시라고 하였습니다. 이와같이 사도들의 생활은 오직 주님께만 철저히 복종하지 않으면 않되는 종의 생활입니다. 우리는 주의 종 된 분들의 고충과 노고를 깊이 이해하지 않으면 않될 것입니다. 바울은 사도들의 영적인 면의 신령한 수고에 비하여 그들이 받는 보수가 그리 대단한 줄 아느냐 라고까지 말한 일이 있습니다. '우리가 너희에게 신령한 것을 뿌렸은 즉 너희 육신의 것을 거두기로 과하 다 하겠느냐'(고전 9:11) 라 하였으며, 또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하라.'(갈 6:6)고 하였습니다. 또한 '주의 종들이 성도들을 위하여 일할 때에 이것을 근 심으로하게 하지말고 즐거움으로하게 하여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아무런 유익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말씀들은 주의 종된 분들을 잘 받 들고 편안하게 해드려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구약에서는 영원히 변함없는 소금언약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의 흔적을 우리의 몸에 지닌다고 하는 것은 우리 모두가 주님의 남은 고난을 우리 육체에 채우는 일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고난을 직접 우리 몸으 로 감당해야만 합니다. 여러분의 몸이나 믿음생활의 경험에서 그 어떠한 예수의 흔적을 가지신다면 그것은 신령한 면에 있어서 영광스러운 표적이라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예수의 종이라는 표시요 하나님이 소유한 백성 이라는 싸인이기 때문입니다. '너는 내것이라'고 하신 하나님의 인(印)이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아무도 나를 괴롭게 하십시오. 내 몸에는 예수의 흔적이 있습니다' 라고 한 사도 바울의 말씀을 깊이 생각해 봅시다. 이것은 '나를 더 이 상 괴롭게 하지말고 내 말을 들어라'고 하는 복음의 충실한 사도 바울의 진실한 고백입니다. 우리는 사도들의 말을 들어야 됩니다. 듣고 순종하며 따라 야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성도들은 자기들을 인도하며 가르치고 수고하신 사도들을 위하여 변함없는 기도와 사랑을 베풀어 드려야 된다고 믿습니다.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경
본문:히 10:19-25 오늘은 세족 목요일로서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다락방에 모여 저들 의 발을 씻겨 주시고 최후의 만찬을 드신 날입니다.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님은 떡을 떼어 축복하시고 제자들에게 주시면서 "이것은 나의 몸" 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잔을 가지고 사례하시고 제자들에게 주시면서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흘리실 자기의 피를 상징하는 잔을 제자들에게 주시므로 여러가지 의미 심장한 새로운 일을 이루신 것입니다. 오늘 이 뜻깊은 세족 목요일에 다시 한번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흘리신 피의 의미가 무엇이며, 그것이 우리에게 이룩한 은총이 무엇인지 살펴 보고자 합니다. 피는 생명이다 구약에서 피는 곧 생명을 뜻하였습니다. 피는 우리 신체의 일부분이 아 니라 바로 인간 생명의 본질로 본 것입니다.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 라"(레17:11) 생명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요 따라서 하나님께 속한 것이 기에 누구도 다른 사람의 피를 흘려서는 안되고 짐승의 피라도 절대로 먹 어서는 안되도록 명하셨습니다. 피를 마신다는 것은 하나님께 속한 생명을 취하는 것으로 간주되어 엄격히 금지되었습니다. "어떤 피든지 먹는 자가 있으면 내가 그 피 먹는 사람에게 진노하여 그를 백성 중에서 끊으리니" (레17:10)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피 속에 생명이 있기 때문에 이 피는 죄를 속하는 힘이 있는 것으로 간주되었습니다.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 라"(레17:11). 더러운 모든 죄를 속하는 힘이있는 이 피를 더러워진 그릇 이나 사람에게 바르면 정결케 된다고 믿었습니다.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히9:22). 이런 원리를 따라 제사제도가 설정된 것입니다. 특히 대 속죄일인 7월 10일에는 대제사장이 온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죄를 위하여 수송아지의 피 를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가서 속죄소에 피를 뿌리고 다시 나와서 제단뿔에 피를 바르고 번제를 드리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 제사를 통하여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죄가 용서되는 것입니다. 이런 제사는 매년 행하여졌습니다. 이 제사를 통하여 하나님은 수송아지의 피를 통하여 이스라엘 자손들의 생 명을 대신 받으시고 그 죄를 용서하시고 그 생명을 보존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흘림을 이런 구약적인 배경에서 검토할 때 그 피흘림의 의미를 올바로 알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를 속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첫째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피는 우리의 죄를 속하는 보혈입니다. 구약에서 수송아지의 피가 온 이스라엘 자손의 죄를 일년동안 사하는 효력이 있었습니다. 만약에 이것이 한 사람의 피로 대치된다면 그 효과는 더욱 증대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이 피가 흘려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모든 인류를 지으시고 그 안에 품으신 분으로 그 인류를 대 표하는 분입니다. 그런 분의 피가 흘려졌다는 것은 온 인류의 죄가 단번에 사함을 받게 된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로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 를 정결케 하여 거룩케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 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히 9:13-14)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 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벧전1:18-19) 하나님께서 수송아지의 피를 받으시고 이스라엘 자손의 죄를 추궁하시지 아니하고 다 용서하신 것처럼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를 보시고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영원히 용서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성찬을 통하여 우리의 죄를 속하신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 를 기념하면서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시는 포도주는 우리의 죄를 속하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흘리신 그리스도의 피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더러운 죄를 씻어 성결케 하시는 예수님의 피 를 상징하는 것임을 기억하면서 감사와 감격함으로 드시기 바랍니다. 우리를 구속하신 그리스도의 피
둘째로, 예수께서 피를 흘리셨음은 그의 생명을 쏟으심을 뜻합니다. 우리의 죄값으로 그의 생명을 내놓으신 것입니다. 그가 자기 생명을 내놓으 시므로 우리가 구속함을 받게 된 것입니다. "구속(救贖)"이란 말은 노예 상태에서 해방됨을 뜻합니다. 옛날에 노예 를 사고 팔 때 노예를 해방시키고자 하면 먼저 주인에게 노예의 몸값을 치 루고 노예를 사서 해방시켰습니다. 이와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 의 몸값을 위해 지불된 것입니다. 죄의 노예된 우리를 죄와 사탄과 율법과 죽음의 노예 상태에서 해방시킨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 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10:45)고 하셨습니다. 자기 목숨을 대속물(代贖物) 즉 몸값으로 내어 놓으신 것입니다. 이 구속 혹은 속량(가가)의 개념은 구약에서 아주 중요한 개념으로 사용 되었습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던 땅을 다른 사람에게 팔았거나 심지어는 자신의 몸을 종으로 팔았을 때 이것을 무를 힘이 없으면 가장 가까운 친척 이 대신 무를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대신 무를 사람을 "꼬엘"이라고 합니다. 구속자, 속량자란 뜻입니다.
그런데 바벧론에 포로되어 간 이스라엘 자손들을 향하여 예언자는 외치기를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내가 너를 도 울 것이라. 네 구속자는 이 스라엘의 거룩한 자니라"(사41:14)고 하였습니다. 야훼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꼬엘" 즉 "구속자"가 되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자기 백성으로 택하셨기 때문에 그백성 을 구속하신다는 말입니다. 야훼 하나님은 우리의 "꼬엘"이 되셔서 우리가 저지른 죄로 인하여 노예가 된 상태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기 위하여 독생자 의 생명을 대속물로 내 놓으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피는 우리를 속량하기 위한 대속물입니다. 이제 그리스도의 피로 속량된 우리는 자유함을 얻게 되었습니다. 우리를 얽어매던 모든 죄의 사슬과 죽음의 권세에서 우리는 자유함을 얻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시는 죄의 멍에 아래 들어가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 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5:1)는사도 바울의 권면을 우리가 이 시간 명심하여야 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참여하는 성찬은 바로 우리를 자유케 하시려고 십자가에서 흘리신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에 참여함이 요, 이 성찬을 통하여 우리가 자유인 되었음을 감사하면서 다시는 종의 멍 에를 메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동시에 우리는 우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사신바 된 몸임을 기억하면서 우리의 몸으로 하나님께 산제사를 드려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성찬에 참여함으로 다지는 결단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새 언약을 세우신 그리스도의 피 다음으로, 그리스도의 피는 새 언약의 피라고 하였습니다. 옛날에 이스 라엘 자손들이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계약을 맺을 때 피를 사용하였습니다. 출애급기 24장에 보면, 모세가 소를 잡아 번제와 화목제를 드린 다음 피를 취하여 반은 제단에 뿌리고 나머지 반은 여러 그릇에 담아가지고 백성들에 게 뿌렸습니다. 이것이 바로 언약의 피였습니다. 이것은 일종의 조인(調 印)과 같은 것입니다. 계약서를 쓰고 도장을 찍는 것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피로 계약을 맺은 것입니다. 생명을 뜻하는 피로 계약을 맺었다는 것은 서로 생명을 나누어 가졌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는 혈연(血緣)관계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의 아버지가 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야훼 하나님 의 자손들이 된 것입니다. 이 관계는 뗄 수 없는 피의 관계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들이 이 계약을 준행하지 아니하였습니다. 이 계약을 가볍게 여겨 하나님을 공경하지 아니하고 이방 우상을 섬기기를 밥먹듯이 하였던 것입니다. 예언자들은 이스라엘 자손들을 향하여 이 계약을 준수할 것을 촉구하였으나 저들은 귀기울여 듣지 아니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할 수 없이 새계약을 세우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렘30:31-3
4). 그 새 계약이 바로 그리스도의 피로 조인된 것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 에게 포도주 잔을 주시면서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그 피를 흘리시므로 새 언약의 중보자(仲保者)가 되신 것입니다(히9:15). 새 계약에 의하여 우리는 새 이스라엘 공동체가 된것입니다. 새 계약에 의 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자손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 가 되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돌보시는 그의 가족이 된 것입니다.
우리는 이 계약 공동체 안에서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며(벧후 1:4), 그의 풍성한 생명을 또한나누어 받게 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 나 하늘 에 있는 것들로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골 1:21) 새 계약 공동체 안에서 우리는 더 이상 하나님과 원수된 관계가 아닌 진 정한 그의 자녀들이 된 것입니다. 우리는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골1:22)로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게 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언 약의 피를 상징하는 성찬에 참여함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새로운 생 명, 새로운 지위, 새 계약 관계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야훼 하나님은 더 이상 우리의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이 넘치시는 우리의 아버지로서 우리가 기쁨으로 예배하여야 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기업을 이어받을 새 계약 공동체의 백성들이 된 것입니다. 새 계약 공동체인 교회 에 속하여 우리 모두가한 형제 되었음을 감사하면서 더욱 우리의 결속을 다짐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이 성찬에 참여함으로 우리 사이에 있던 모든 불화를 씻어 버리고 사랑으로 이 새 계약 공동체를 다져야 하겠습니다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이제 우리는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다고 하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제는 담대하게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대 제사장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 마음과 온전 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이스라엘 조상들은 하나님의 선민이면서도 하나님을 등지고 세상으로만 나갔지만, 이제 우리는 우리 앞에 열린 "새롭고 산 길"을 통하여 하나님께 기쁨으로 나아가기를 힘써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고자 함은 그의 사랑을 감사하며 예배하기 위함 입니다. 날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생활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마지 막 때가 가까울수록 우리는 함께 모이기를 힘쓰며 하나님을 소리 높이 찬 양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려야 하겠습니다. 또한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고자 함은 그의 거룩하심을 우러르고자 함 입니다. 그 앞에 날마다 나아가므로 우리 자신의 나약함과 부정함을 벗어 버리고 그의 거룩하심을 따라 경건하고 성결한 자녀가 되고자 함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우리를 붙들어 주시며 우리를 거룩하게 변화시켜 주 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또한 하나님께 나아가고자 함은 그가 우리 앞에 펼쳐 보이시는 미래를 보기 위함입니다. 현실에 매여 꿈을 잃어버리고 사는 현대인인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가므로 잃어버렸던 꿈을 되찾고 이 땅에 그 꿈의 실현 을 위해 헌신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미래를 바라보는 자는 결코 낙심하지 않습니다. 결코 좌절하지 않습니다. 결코 물러서지 않 습니다. 그는 결코 옹졸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는 큰 꿈을 안고 많은 사람 에 이 꿈을 나누며 희망을 안겨주고 용기를 북돋우어 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의 죄를 사하기 위하여 부 어진 어린양의 희생의 제물이며, 우리를 죄와 죽음의 속박 아래서 구속하 여 주시는 대속의 피이며, 우리를 하나님의 새 언약의 자손으로 불러주신 언약의 피입니다. 이 예수의 피로 이제 우리가 하나님께 담대히 나아갈 수 있게 되었으므로 세상을 향하던 우리의 삶에서 돌이켜 날마다 기쁨으로 그 앞에 나아갑시다. 우리가 감사함으로 그 앞에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 기뻐 하시며 우리를 위하여 예비하신 하늘의 은총들로 우리의 생명과 삶을 풍성 케 하실 것입니다. 오늘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날 밤 제자들에게 베푸신 성찬상에 우리가 둘러 앉았습니다. 우리를 위해 찢으신 그의 몸과 그의 피를 마시므로 우리 속에 이루어진 죄 사함과 자유함과 온전케 됨을 확인하면서 하나님 앞에 영광과 찬양을 돌립시다. 이제 이와같이 보배로운 그리스도의 피를 헛되게 하지 않는 여러분의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하물며 사도바울의 시대였겠습니까 사실 주님의 성실한 종이 되려면 부유한 것과는 결별할 각오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 바울이 당하고 있는 괴로움은 단 지 그러한 경제적인 궁핍만을 두고 한 말이 아닙니다. 그는 지금 자기가 세 워서 돌보고 있는 바로 자기의 교회때문에 크나 큰 심적 괴로움을 당하고 있습니다. 괴로움을 당한다는 것은 일반적으로는 누구에게나 다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들이 당하는 괴로움은 특수한 것입니다. 남들이 보기에는 아무것 도 아닌 일을 가지고 그들은 잠을 못이루고 식음을 전폐하기까지 하면서 기 나긴 영적 고투를 하게 될 때가 많습니다. 여기 갈라디아 교회로부터 당한 괴로움은 유대 율법주의자들의 그릇된 주 장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주장하기를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않는다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라고 주장한 그 말 한마디 때문이었습니다. 그 말 한마디가 무엇이 그리 대단한 것입니까 그러나 사도바울은 심히 화가났고 또 심히 걱정이 되었으며 심히 괴로워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큰 분노로써 그 일에 대하여 길고도 상세하게 책망과 권면의 서신을 쓴 것입니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순수성과 진실성을 옹호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사도들의 가장 큰 관심사는 복음이 복음으로서 전 달되고 가르쳐 지는 일이요, 사도들의 가장 큰 괴로움은 참된 복음 아닌 다 른 것이 복음 행세를 하고 판을 치고 사람을 미혹하게 하는 일인 것입니다. 복음의 수호자 전파자로서, 어쩔수없이 이러한 큰 괴로움을 지니고 살아야하는 분들이 바로 교역자들이라고 보시면 틀림이 없을 것입니다. 그 반대로, 이 분들의 가장 큰 기쁨은 복음이 바로 알려지고 힘있게 전파 되며 교회와 성도들이 구원과 진리안에서 행하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그의 사랑하는 제자 가이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나는 성도들로부터 그대가 진리대로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무척 기뻤습니다. 나에게는 내 자녀들이 진리안에서 생활한다는 소식을 듣는 것보다 더 기쁜일이 없습니다.'(요3 1:2-3) 여기서 요한은 자기의 교인들을 '내 자녀'라고 하였는데 사도는 신령한 면 에서 아버지와 같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아버지인 사도는, 그 아들들이 진리 안에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들을때 가장 기쁘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아버 지에게는 자녀들로서는 알지도 못하고 겪어 보지도 못한 고충과 괴로움이 많 은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그 괴로움과 아픔이 너무도 커서 '이후로는 아무도 나를 괴롭히지 마십시요'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일은 이와같은 아픔이나 고민, 그리고 괴로움이 있음으 로 인하여 더 밝은 빛을 발하게 됩니다. 우리는 사도바울의 서신을 통하여 그것을 더욱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유대 율법주의자들과 다른 복음을 전하는 반대자들이 없었다면 이 갈라디아서는 기록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종교개 혁자 마틴 루터는 이 갈라디아서를 가르켜 '기독교인의 자유헌장'이라고 하 였습니다. 그는 갈라디아서와 로마서에서 힘을 얻어 부패한 중세의 교회를 개혁하는데 성공한 것입니다. 또한 사도바울이 감옥에 들어가지 않았더라면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 로새서같은 옥중서신이 기록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모든 자유와 권리를 박탈 당한 옥에 갇힌 죄수의 처지에서 바울은 '기뻐하라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옥에 갇혀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는 그가 '소망을 가지라', '용서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아픔과 괴로움중에 서 하나님의 뜻을 더 밝게 하여준 주옥과도 같은 귀중한 말씀들입니다. 예수의 제자 가운데 가롯 유다같은 이는 차라리 없는 것이 더 나을 사람 이었습니다. 그러나 배반자가 가슴에 못을 박았지만, 그 때문에 제자들은 더 욱 결속하여 경각심을 가지고 그들의 공동체를 지켜 나갔습니다. 또 베드로는 세번씩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한 것에 대한 가책때문에 다른 사람들보 다 훨씬 더 주님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사도바울은 '육체의 찌르는 가시가 사탄이 보낸 사자'라고 할 만큼 육체의 고통을 지니고 살았지만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가 자신에게 풍성하고 넉넉한 것임을, 그로인하여 더욱 새롭게 깨 달았던 것입니다. 그런면에서, 목회자들에게 신령한 면의 근심과 영적인 고민 이 없을 수 없으며 이를 통하여 더 좋은 목회와 더 좋은 설교가 나올 수 있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교역자들의 그 고투하고 고민하는 일은, 이 세상에 그 어떠한 노동보다도 힘들고 어려운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저는 지난 한세기동 안 우리나라의 교회를 지켜오신 많은 목사님들을 진심으로 존경해 마지 않습니다. 목회자의 길이 어렵다고 하지만 그 참으로 어려운 사정은, 결국 같은 목회자들만이 이해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무리 어렵고 괴 롭더라도 그러한 과정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그 일을 더욱 빛나게 해주시고 더욱 값진 것으로 만들어주식 때문에 환난을 당해도 즐거워하고 그 일을 생각하면 기쁨을 억누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 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핍박하 였느니라.'(마 5:11-) 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깊이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경험한 참을 수 없는 고통과 괴로움은 그를 위대한 사도로 만 들기 위한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그렇게 생각할 때에 우리 하나님의 은혜는 항상 나에게 부족함이 없으며 우리의 잔을 항상 넘치게 하시는 축복인 것 입니다. 여기서 사도바울은 자기 몸에는 예수의 흔적이 있다는 좀 특별한 말을 강 조하고 있는데, 그가 몸의 지니고 있다는 '예수의 흔적'이란 무엇입니까 만 일 사도바울의 벗은 몸을 세밀히 관찰하여 본다면 그 몸에 남들이 갖지않은 특이한 흔적들을 찾아 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의 소매를 걷어 올리고 팔 뚝을 살펴보면, 빌립보 감옥에서 착고에 차였던 흔적을 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또 그 어깨 언저리에는 루스드라에서 돌에 맞아 죽을뻔 했을 때에 입은 흉터를 볼 수 있을 것이고 허리에는 '40에 하나 감한 매'를 5번 맞았을 때에 가죽채찍에 맞은 깊은 상처를 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바울은 매맞은 흔적들 을 그 몸에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볼 때마다 끔찍하고 소름끼치는 기억 이 되겠지만 바울은 그것을 '예수의 흔적'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과 관련된 어떤 흔적을 가지고 계십니까 원래 이 흔적이 란 것은 낙인(烙印)을 의미합니다. 낙인은 방목하는 가축들에게 찍어서 그 주 인의 소유권을 표시하는 것입니다. 고대에는 노예들이나 군인들에게도 낙인 을 찍어 그들이 누구에게 소유된 자들인지를 표시했습니다. 그러니까 사도바울이 말한 예수의 흔적이란 예수의 낙인으로 자신이 철저 히 예수님께 속한 예수의 종이라는 사실을 일컬은 것입니다. 그는 자기 몸의 찢긴 상처나 매맞아 멍든자국을 볼 때에 자기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 한 주님의 종이라는 사실은 깊이 인식하였던 것입니다. 그것은 노예들에게 찍는 낙인과 같이 예수님께 소유된 소유권의 표시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 신을 항상 '예수 그리스도의 종된 나 바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의 흔적은 예수의 종으로서 찍혀진 낙인입니다. 그것은 그의 영원한 종임을 의 미하는 것입니다. 종이기 때문에 자기 마음대로 하지못합니다. 살아도 죽어도 오직 주의 것 이므로 주의 영광을 위하여 존재합니다.
바울은 자기 안에 사시는 이는 자신 이 아니고 오직 예수이시라고 하였습니다. 이와같이 사도들의 생활은 오직 주님께만 철저히 복종하지 않으면 않되는 종의 생활입니다. 우리는 주의 종 된 분들의 고충과 노고를 깊이 이해하지 않으면 않될 것입니다. 바울은 사도들의 영적인 면의 신령한 수고에 비하여 그들이 받는 보수가 그리 대단한 줄 아느냐 라고까지 말한 일이 있습니다. '우리가 너희에게 신령한 것을 뿌렸은 즉 너희 육신의 것을 거두기로 과하 다 하겠느냐'(고전 9:11) 라 하였으며, 또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하라.'(갈 6:6)고 하였습니다. 또한 '주의 종들이 성도들을 위하여 일할 때에 이것을 근 심으로하게 하지말고 즐거움으로하게 하여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아무런 유익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말씀들은 주의 종된 분들을 잘 받 들고 편안하게 해드려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구약에서는 영원히 변함없는 소금언약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의 흔적을 우리의 몸에 지닌다고 하는 것은 우리 모두가 주님의 남은 고난을 우리 육체에 채우는 일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고난을 직접 우리 몸으 로 감당해야만 합니다. 여러분의 몸이나 믿음생활의 경험에서 그 어떠한 예수의 흔적을 가지신다면 그것은 신령한 면에 있어서 영광스러운 표적이라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예수의 종이라는 표시요 하나님이 소유한 백성 이라는 싸인이기 때문입니다. '너는 내것이라'고 하신 하나님의 인(印)이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아무도 나를 괴롭게 하십시오. 내 몸에는 예수의 흔적이 있습니다' 라고 한 사도 바울의 말씀을 깊이 생각해 봅시다. 이것은 '나를 더 이 상 괴롭게 하지말고 내 말을 들어라'고 하는 복음의 충실한 사도 바울의 진실한 고백입니다. 우리는 사도들의 말을 들어야 됩니다. 듣고 순종하며 따라 야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성도들은 자기들을 인도하며 가르치고 수고하신 사도들을 위하여 변함없는 기도와 사랑을 베풀어 드려야 된다고 믿습니다.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경
본문:히 10:19-25 오늘은 세족 목요일로서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다락방에 모여 저들 의 발을 씻겨 주시고 최후의 만찬을 드신 날입니다.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님은 떡을 떼어 축복하시고 제자들에게 주시면서 "이것은 나의 몸" 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잔을 가지고 사례하시고 제자들에게 주시면서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흘리실 자기의 피를 상징하는 잔을 제자들에게 주시므로 여러가지 의미 심장한 새로운 일을 이루신 것입니다. 오늘 이 뜻깊은 세족 목요일에 다시 한번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흘리신 피의 의미가 무엇이며, 그것이 우리에게 이룩한 은총이 무엇인지 살펴 보고자 합니다. 피는 생명이다 구약에서 피는 곧 생명을 뜻하였습니다. 피는 우리 신체의 일부분이 아 니라 바로 인간 생명의 본질로 본 것입니다.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 라"(레17:11) 생명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요 따라서 하나님께 속한 것이 기에 누구도 다른 사람의 피를 흘려서는 안되고 짐승의 피라도 절대로 먹 어서는 안되도록 명하셨습니다. 피를 마신다는 것은 하나님께 속한 생명을 취하는 것으로 간주되어 엄격히 금지되었습니다. "어떤 피든지 먹는 자가 있으면 내가 그 피 먹는 사람에게 진노하여 그를 백성 중에서 끊으리니" (레17:10)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피 속에 생명이 있기 때문에 이 피는 죄를 속하는 힘이 있는 것으로 간주되었습니다.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 라"(레17:11). 더러운 모든 죄를 속하는 힘이있는 이 피를 더러워진 그릇 이나 사람에게 바르면 정결케 된다고 믿었습니다.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히9:22). 이런 원리를 따라 제사제도가 설정된 것입니다. 특히 대 속죄일인 7월 10일에는 대제사장이 온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죄를 위하여 수송아지의 피 를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가서 속죄소에 피를 뿌리고 다시 나와서 제단뿔에 피를 바르고 번제를 드리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 제사를 통하여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죄가 용서되는 것입니다. 이런 제사는 매년 행하여졌습니다. 이 제사를 통하여 하나님은 수송아지의 피를 통하여 이스라엘 자손들의 생 명을 대신 받으시고 그 죄를 용서하시고 그 생명을 보존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흘림을 이런 구약적인 배경에서 검토할 때 그 피흘림의 의미를 올바로 알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를 속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첫째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피는 우리의 죄를 속하는 보혈입니다. 구약에서 수송아지의 피가 온 이스라엘 자손의 죄를 일년동안 사하는 효력이 있었습니다. 만약에 이것이 한 사람의 피로 대치된다면 그 효과는 더욱 증대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이 피가 흘려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모든 인류를 지으시고 그 안에 품으신 분으로 그 인류를 대 표하는 분입니다. 그런 분의 피가 흘려졌다는 것은 온 인류의 죄가 단번에 사함을 받게 된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로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 를 정결케 하여 거룩케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 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히 9:13-14)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 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벧전1:18-19) 하나님께서 수송아지의 피를 받으시고 이스라엘 자손의 죄를 추궁하시지 아니하고 다 용서하신 것처럼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를 보시고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영원히 용서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성찬을 통하여 우리의 죄를 속하신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 를 기념하면서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시는 포도주는 우리의 죄를 속하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흘리신 그리스도의 피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더러운 죄를 씻어 성결케 하시는 예수님의 피 를 상징하는 것임을 기억하면서 감사와 감격함으로 드시기 바랍니다. 우리를 구속하신 그리스도의 피
둘째로, 예수께서 피를 흘리셨음은 그의 생명을 쏟으심을 뜻합니다. 우리의 죄값으로 그의 생명을 내놓으신 것입니다. 그가 자기 생명을 내놓으 시므로 우리가 구속함을 받게 된 것입니다. "구속(救贖)"이란 말은 노예 상태에서 해방됨을 뜻합니다. 옛날에 노예 를 사고 팔 때 노예를 해방시키고자 하면 먼저 주인에게 노예의 몸값을 치 루고 노예를 사서 해방시켰습니다. 이와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 의 몸값을 위해 지불된 것입니다. 죄의 노예된 우리를 죄와 사탄과 율법과 죽음의 노예 상태에서 해방시킨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 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10:45)고 하셨습니다. 자기 목숨을 대속물(代贖物) 즉 몸값으로 내어 놓으신 것입니다. 이 구속 혹은 속량(가가)의 개념은 구약에서 아주 중요한 개념으로 사용 되었습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던 땅을 다른 사람에게 팔았거나 심지어는 자신의 몸을 종으로 팔았을 때 이것을 무를 힘이 없으면 가장 가까운 친척 이 대신 무를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대신 무를 사람을 "꼬엘"이라고 합니다. 구속자, 속량자란 뜻입니다.
그런데 바벧론에 포로되어 간 이스라엘 자손들을 향하여 예언자는 외치기를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내가 너를 도 울 것이라. 네 구속자는 이 스라엘의 거룩한 자니라"(사41:14)고 하였습니다. 야훼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꼬엘" 즉 "구속자"가 되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자기 백성으로 택하셨기 때문에 그백성 을 구속하신다는 말입니다. 야훼 하나님은 우리의 "꼬엘"이 되셔서 우리가 저지른 죄로 인하여 노예가 된 상태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기 위하여 독생자 의 생명을 대속물로 내 놓으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피는 우리를 속량하기 위한 대속물입니다. 이제 그리스도의 피로 속량된 우리는 자유함을 얻게 되었습니다. 우리를 얽어매던 모든 죄의 사슬과 죽음의 권세에서 우리는 자유함을 얻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시는 죄의 멍에 아래 들어가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 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5:1)는사도 바울의 권면을 우리가 이 시간 명심하여야 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참여하는 성찬은 바로 우리를 자유케 하시려고 십자가에서 흘리신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에 참여함이 요, 이 성찬을 통하여 우리가 자유인 되었음을 감사하면서 다시는 종의 멍 에를 메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동시에 우리는 우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사신바 된 몸임을 기억하면서 우리의 몸으로 하나님께 산제사를 드려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성찬에 참여함으로 다지는 결단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새 언약을 세우신 그리스도의 피 다음으로, 그리스도의 피는 새 언약의 피라고 하였습니다. 옛날에 이스 라엘 자손들이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계약을 맺을 때 피를 사용하였습니다. 출애급기 24장에 보면, 모세가 소를 잡아 번제와 화목제를 드린 다음 피를 취하여 반은 제단에 뿌리고 나머지 반은 여러 그릇에 담아가지고 백성들에 게 뿌렸습니다. 이것이 바로 언약의 피였습니다. 이것은 일종의 조인(調 印)과 같은 것입니다. 계약서를 쓰고 도장을 찍는 것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피로 계약을 맺은 것입니다. 생명을 뜻하는 피로 계약을 맺었다는 것은 서로 생명을 나누어 가졌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는 혈연(血緣)관계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의 아버지가 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야훼 하나님 의 자손들이 된 것입니다. 이 관계는 뗄 수 없는 피의 관계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들이 이 계약을 준행하지 아니하였습니다. 이 계약을 가볍게 여겨 하나님을 공경하지 아니하고 이방 우상을 섬기기를 밥먹듯이 하였던 것입니다. 예언자들은 이스라엘 자손들을 향하여 이 계약을 준수할 것을 촉구하였으나 저들은 귀기울여 듣지 아니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할 수 없이 새계약을 세우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렘30:31-3
4). 그 새 계약이 바로 그리스도의 피로 조인된 것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 에게 포도주 잔을 주시면서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그 피를 흘리시므로 새 언약의 중보자(仲保者)가 되신 것입니다(히9:15). 새 계약에 의하여 우리는 새 이스라엘 공동체가 된것입니다. 새 계약에 의 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자손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 가 되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돌보시는 그의 가족이 된 것입니다.
우리는 이 계약 공동체 안에서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며(벧후 1:4), 그의 풍성한 생명을 또한나누어 받게 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 나 하늘 에 있는 것들로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골 1:21) 새 계약 공동체 안에서 우리는 더 이상 하나님과 원수된 관계가 아닌 진 정한 그의 자녀들이 된 것입니다. 우리는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골1:22)로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게 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언 약의 피를 상징하는 성찬에 참여함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새로운 생 명, 새로운 지위, 새 계약 관계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야훼 하나님은 더 이상 우리의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이 넘치시는 우리의 아버지로서 우리가 기쁨으로 예배하여야 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기업을 이어받을 새 계약 공동체의 백성들이 된 것입니다. 새 계약 공동체인 교회 에 속하여 우리 모두가한 형제 되었음을 감사하면서 더욱 우리의 결속을 다짐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이 성찬에 참여함으로 우리 사이에 있던 모든 불화를 씻어 버리고 사랑으로 이 새 계약 공동체를 다져야 하겠습니다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이제 우리는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다고 하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제는 담대하게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대 제사장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 마음과 온전 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이스라엘 조상들은 하나님의 선민이면서도 하나님을 등지고 세상으로만 나갔지만, 이제 우리는 우리 앞에 열린 "새롭고 산 길"을 통하여 하나님께 기쁨으로 나아가기를 힘써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고자 함은 그의 사랑을 감사하며 예배하기 위함 입니다. 날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생활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마지 막 때가 가까울수록 우리는 함께 모이기를 힘쓰며 하나님을 소리 높이 찬 양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려야 하겠습니다. 또한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고자 함은 그의 거룩하심을 우러르고자 함 입니다. 그 앞에 날마다 나아가므로 우리 자신의 나약함과 부정함을 벗어 버리고 그의 거룩하심을 따라 경건하고 성결한 자녀가 되고자 함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우리를 붙들어 주시며 우리를 거룩하게 변화시켜 주 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또한 하나님께 나아가고자 함은 그가 우리 앞에 펼쳐 보이시는 미래를 보기 위함입니다. 현실에 매여 꿈을 잃어버리고 사는 현대인인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가므로 잃어버렸던 꿈을 되찾고 이 땅에 그 꿈의 실현 을 위해 헌신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미래를 바라보는 자는 결코 낙심하지 않습니다. 결코 좌절하지 않습니다. 결코 물러서지 않 습니다. 그는 결코 옹졸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는 큰 꿈을 안고 많은 사람 에 이 꿈을 나누며 희망을 안겨주고 용기를 북돋우어 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의 죄를 사하기 위하여 부 어진 어린양의 희생의 제물이며, 우리를 죄와 죽음의 속박 아래서 구속하 여 주시는 대속의 피이며, 우리를 하나님의 새 언약의 자손으로 불러주신 언약의 피입니다. 이 예수의 피로 이제 우리가 하나님께 담대히 나아갈 수 있게 되었으므로 세상을 향하던 우리의 삶에서 돌이켜 날마다 기쁨으로 그 앞에 나아갑시다. 우리가 감사함으로 그 앞에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 기뻐 하시며 우리를 위하여 예비하신 하늘의 은총들로 우리의 생명과 삶을 풍성 케 하실 것입니다. 오늘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날 밤 제자들에게 베푸신 성찬상에 우리가 둘러 앉았습니다. 우리를 위해 찢으신 그의 몸과 그의 피를 마시므로 우리 속에 이루어진 죄 사함과 자유함과 온전케 됨을 확인하면서 하나님 앞에 영광과 찬양을 돌립시다. 이제 이와같이 보배로운 그리스도의 피를 헛되게 하지 않는 여러분의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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