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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없는 낙관주의자 (막10:46-52)

본문

언제나 “희망하는 것”은 우리에게 중요한 일입니다. 그것은 척박한 오늘을 살아가려는 사람에게, 좌절과 아픔 속에서도 살아가는 일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에게 더더욱 중요합니다.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는 곳에서도 사람을 일으켜 세우고 움직이게 하는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희망하는 방법이 따로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떠한 모양새가 따로 있거나 일정한 틀이 존재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맛보고 만져볼 수는 없는 것이지만, 공간을 차지하고 시간을 점유하고 있는 것도 아니지만, 어떠한 경우에도 희망을 우리안에 자리잡게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마음가짐과 단련된 의지와도 관련이 있습니다.
이것은 개인적인 경우에도 그러하지만 굳게 잡은 손과 손 사이에서 공동체의 내용으로 희망이 피어나고 움직이게 됩니다. 실로 “희망”은,“희망하는 일”은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고, 깊이있는 영향력이 됩니다. 희망은 숨쉬어 정의롭게 살아가는 일과 인간에 대한 고집스러운 애정이라는 밭에서, 단련된 용기라는 자양분을 받아 자라납니다. 이것은 결코 인위적인 작업으로 가능하지 않습니다. 또한 이것은 취미생활이나 삶의 장식품정도로 취급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언제까지나 이것은 변함없는 가치를 지니되, “정의롭고 단련된 삶에 대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쉽사리 머리 끝까지 자만감을 올려놓거나, 하루아침에 땅끝까지 절망감을 심어놓는 태도는 진정한 희망을 일구는 토양이 될 수 없습니다. 예수의 주변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고 그를 따랐습니다. 그중에 성서에 구체적으로 언급되지 아니한 많은 사람들 중에 한사람 늘비관씨가 있었습니다. 그는 병자입니다. 그는 몹시 아픕니다. 세상의 수많은 병자들처럼, 복음서에 나오는 수많은 병자들처럼 말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는 치유불능이야. 이제 소용없어. 나는 너무 늙고 병들었어. 낡아버린 기계 꼴이지. 고쳐봐야 헛일이야!” ‘늘비관’씨는 이름그대로 비관주의자 입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께서 자기집 앞을 지날 때 그냥 방안에 있었습니다. 복음서는 이런 식의 비관주의자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아무것도 전하고 있지 않습니다. 왜냐면 그들은 예수께서 지나가실때 자신을 스스로 집안에 가두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김비관’씨는 달리 행동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커다란 고통 중에서 그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습니다. “전에도 이런일은 있었어. 왜 아픈지 나는 알아. 별로 대단한 것이 아니야. 내일이면 아픔이 가시겠지. 나는 어떤 도움도 필요없어!” 이러한 ‘늘비관’씨는 대책없는 ‘낙관주의자’입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께서 자기집 앞을 지나가실 때 그냥 집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대책없이 막연하게 잘될 것이며 어떤 도움도 필요없다고 생각하면서 사태를 아주 낙관했기 때문에 말입니다. 복음서는 이러한 낙관주의자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아무것도 전하고 있지 않습니다. 왜냐면 역시 예수께서 지나가실 때 그냥 집에 머물러 있었으며, 한발짝도 예수께 옮겨 놓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런식의 낙관주의자, 이런식의 비관주의자들에게는 희망이 자리할 틈이 없습니다. 아니 이들은 희망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기 중심적입니다. 그들은 홀로 남아 있습니다. 밖으로 나가지 않습니다. 또한 다른사람들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함께하는 법을 애초 알지 못합니다. 그들은 스스로의 방에 갇혀 있습니다. 복음서에는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들의 이야기로 가득차 있습니다. “눈이 아픈 사람, 볼 수 없는 사람. 다리를 저는 사람, 도저히 일어설 수 없는 불구자. 혀가 굳어진 사람, 그래서 아무말도 할 수 없는 사람. 귀 먹은 사람, 그래서 도무지 들을 수 없는 사람. 늘 죽음을 안고 사는 사람 사람들!” 그러나 이들이 ‘늘비관’씨와 다른 것은 그들의 집에서 나왔다는데 있습니다. 그들은 숨어있던 곳에서 나왔습니다. 실려서 들려서라도 나왔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혹은 다른 사람의 도움으로 나왔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희망했기 때문입니다. 희망은 그들을 움직였습니다. 그들의 발을 옮겨놓게 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운명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다했을 것입니다. 불가능이라는 장벽에 늘상 부딛히기도 했을거구요. 그들은 그런 사실을 누구보다 잘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누구에겐가로 나왔습니다. 홀로 머물지 않았습니다. 도움을 청했습니다. 도와달라고 갈망했습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과의 친교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들은 고집스럽게 희망을 간직했습니다. 희망이란 바로 이런 것입니다. 구체적인 사람에게 마음을 열고 살아있는 친교 속에 들어가는 것이며 도움을 청하는 것 속에 있는 것입니다. 자기 중심적인 낙관주의나, 자기중심적인 비관주의가 아니라 겸손하게 서로에게 믿음을 가지고 다른이와 관계를 맺으며 그 사람과 희망에 넘쳐 서로 친교하는 것입니다.
마가10장에 등장하는 “바르티매오”라는 여리고 소경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희망을 갖고 희망에 의해 자신을 움직였습니다. 그는 달려나와 부르짖었고, “용기를 내어 일어나요. 바르티매오. 그분이 당신을 부르고 있잖소”라고 말해주는 이웃의 손을 굳게 잡고 예수에게로 다가갔던것입니다. 예수는 그에게 “네 믿음, 너의 희망이 너를 살렸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하기가 힘들어서 우리는 많은 경우에 희망을 갖지 못합니다. 우리는 너무 자신 만만해서 스스로 모든 것을 다 해결하려 합니다. 우리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해방자 예수께로 발을 옮겨놓는 것, 형제자매에게 마음을 열고 굳게 손을 잡는 것, 서로에게 용기가 되며 서로가 서로에게 희망이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저마다의 편협한 틀 속에 갇혀있어서 희망의 작은 텃밭 하나 일구지 못하고 해방의 가능성을 우리 스스로 짖누르는 현실을 아파해야 합니다. 진정 우리에게 “희망에 넘쳐”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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