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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막10:32-34)

본문

예루살렘으로 가는 예수의 마지막 길은 사실상 헬몬산으로 추측되는 이른 바 변화산에서 모세와 엘리야로 더불어 자기가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에 대해 말씀을 나누신 그 만남을 가진 이후부터였습니다. 변화산에서 기도하시던 주님은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났 습니다. 그때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 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눅 9:28-32). 그 산에서 내려 오신 후 우선 고향 지역이면서 많은 활동을 했던 갈릴리로 들어오셨습니다. 그리고 얼마후 예수는 요단강 동쪽을 거쳐 여리고성을 지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을 택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변화산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도중에 많은 사건과 교훈을 남기게 됩니다. 본문이 보여 주는 지금 이 장면은 예수의 일행이 갈릴리 지방을 거쳐 요단강 동쪽을 따라 여리고성으로 향하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 앞뒤에 행렬을 이루어서, 마치 민족적 대 이동과도 같이 보였습니다. 바 로 그 시기가 유대인들의 민족적 축제인 유월절 절기였기 때문입니다. 이때 예수는 그의 열두 제자들 앞에 서서 가시면서 '자기의 당할 일'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마지막 길에,
I. 자기의 당할 일을 말씀하셨습니다(10:32)
1. 그것은 십자가 수난과 부활의 영광이었습니다. 그 내용은 마가복음 10장 33-34절입니다.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 기우매 저희가 죽이기로 결안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주겠고 그들은 능욕하며 침뱉으며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니 저는 3일만에 살아나리라 고 하였습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자기의 당할 일을 예언하신 본문의 말씀은 세 번째 예고입니다. 첫 번째는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말씀하셨습니다(눅 9:22-27, 마 16:21-28, 막 8:31-9:1). 두 번째는 자신의 체포와 부활에 대한 예언이었습니다. 이것은 갈릴리에서였습니다(눅 9:43-45, 마17:22-23, 막9:30-32). 그 세 번째가 본문에 나타난 내용인데 여리고로 향하던 요단강 근처에서였습니다(눅 18:31-34, 마 20:17-19, 막 10:32-3
4). 그 네 번째라고 할 수 있는 것이 감람 산에서 가룟 유다의 배반과 유월절에 당할 자신의 체포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마 26:2). 예수께서 자신이 예루살렘에서 당할 미래적 사건을 예고하신 세 번째 내용 중에서는 특별히 여섯 가지 중대한 내용을 담고 있음을 봅니다. 또 그것은 모 두 미래에 일어날 미래 시제 동사를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게 됩니다.
첫째는 그 사건이 예루살렘에서 일어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둘째는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기움이 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여기 에는 가룟 유다가 예수를 넘겨줄 사실이 포함됩니다(막 14:53-15:1).
셋째는 이방인이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하기로 결의하는 사건이라고 하였습니다.
넷째는 예수께서 받으실 능욕과 침뱉음, 채찍질 당할 멸시를 말하고 있습니다. 다섯째는 그가 십자가에 죽임을 당할 사실입니다. 그리고 여섯째는 그가 삼일만에 살아난다는 부활을 예고하는 내용입니다. 이것은 한 마디로 예수께서 자신이 예루살렘에서 당할 십자가 수난과 부활 의 영광을 예고한 것입니다.
2. 십자가 수난과 부활의 영광을 예고하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1) 예수의 십자가 수난과 부활은 영원하신 하나님의 구속 경륜의 성취임을 알려주기 위함입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시는 사건은 갑작스럽게 된 것이 아님을 알려 줍니다. 그것은 또한 인간이 꾸며낸 신화적 이야기거리 가 아님을 알려 줍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 앞에 전개되는 중요한 수난 사건의 장면마다 '인자는 기록된 대로 간다'든가, '성경을 이루려 하심이라' 등 등 구약 예언을 인용함으로 그것이 예언 성취의 사건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는 마침내 십자가에서 내가 다 이루었다 (요 19:30)고 최후 선언을 남기 고 운명하셨습니다. 이것은 그의 예루살렘 길이 계획적이고, 목적적이고, 필 연적인 길이었음을 보여줍니다.
2) 그의 제자들에게 확신과 사명을 불어 넣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의 십자가 죽음이 제자들 앞에서 갑자기 벌어졌다면, 저들은 말할 수 없이 실망하고 낙담하는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렇게 에수께서 미리 예고 해 주신 말씀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막상 사건이 벌어졌을 때 제자들은 순 간적으로 모두 다 주를 배반하고 떠나버리는 연약에 빠져 버리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나중에 저들이 성령님을 받은 후에는 주께서 예고하신 십자가 수난의 진의를 깨닫고 확신과 사명에 불타게 되었습니다.
3) 십자가의 복음을 짊어지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나중에 예수의 제자들은 그 수욕의 십자가의 복음을 전파하는 우주적 사명 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죽기까지 감당하였습니다. 그것은 예루살렘으 로 가는 길에, 주께서 저들에게 들려 주신 온갖 교훈들이 생각났기 때문입니다. 결국 십자가를 지는 자만이 예수의 제자가 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3. 이 말씀을 하시는 예수의 모습을 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자기의 당할 일'을 말씀하셨습니다. 자 기의 갈 길을 말씀하셨습니다.
1) 그것은 예언자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왜 예루살렘으로 가고 있는가를 스스로 알고 계셨습니다. 거기 서 자신이 어떤 일을 당하실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것을 제자 들에게 공개적으로 반복해서 예고해 주셨습니다. 그러면서 그분은 자기 길을 멈추지 않고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 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 (눅 13:33)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예루살 렘아 예루살렘아 라고 탄식하며 예루살렘을 불렀습니다(눅 13:34).
2) 그것은 고독의 모습이었습니다. 지금 예수는 군중 속에서 군중과 함께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고 있습니다. 그 앞에도, 그 뒤에도, 그 옆에도 그를 환호하는 군중들이 인파를 이루고 있 었습니다. 열광하는 군중은 예루살렘이 가까워 올수록 더하여 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실상 예수는 자기 혼자 예루살렘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자기 혼자 생각하고, 예루살렘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자기 혼자 예루살렘에서 일어날 사건을 내다보며 미리 고통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아무도, 그 누구도 에수 자신 속에 있는, 예수가 속으로 혼자 생각하고 있는, 예루살렘에서 당할 수난을 몰 랐습니다. 오히려 예수 제자들과 군중들은 헛된 세상의 야망을 꿈꾸며 그를 따르고 있었습니다. 예수는 실로 군중 속의 고독자였습니다. 그는 지금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 에, 그 수많은 군중 속에서도 예루살렘에서 당할 일을 혼자 내다보고 있습니다. 그는 세상에 계실 때 스스로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마 8:20)고 하였습니다. 예수 자신이 가야 할 길이나, 예수 자신이 당할 일은 그 누구와 도 분담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만 담당시켰기 때문입니다(사 53:6). 그는 실로 군중 속에서, 군중들의 환호 속에서 고독한 분이었습니다.
3) 그것은 그분의 용기를 말해 주는 모습이었습니다. 예수께서 하신 예루살렘에서 자신이 당할 일에 대한 예고는 처음에는 단순 한 발표처럼 나타났습니다(막 8:31, 9:31). 그러나 본문에 나타난 그의 세 번째 예고에는 자신이 능욕을 당하고, 침뱉 음을 당하고, 채찍질을 받고,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구체적으로 말씀하였습니다. 이렇게 자신이 당할 일을 다 아시면서도 제자들에게 예고하시면서 담담히 그 길을 향하여 가시는 주님의 모습은 그분의 용맹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보통 우리가 겪는 용기에는 두 가지 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로 본능적인 반응과 같은 용기가 있습니다. 그 사람이 생각지도 못했던 어느 순간에 교통사고를 만나 죽어가는 사람을 보았다든가, 물에 빠진 사람을 보았다든가, 불꽃 속에 타 죽어 가는 사람을 보았을 경우, 그 사람을 구원하 려고 뛰어드는 본능적인 반응 같은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런 순간에 영 웅이 되기도 합니다. 또 하나는 이와는 다른 경우의 용기가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에게 비참한 일이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알고, 보면서 그리고 충분히 그 길에서 돌아 설 수 있는 여유가 있고, 피할 길도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목적한 바를 성취하 기 위하여 전진하는 용기입니다. 예수의 용기는 바로 이런 두 번째 류에 속하는 용기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떤 자선적 용기가 아닙니다. 인도주의적 용기가 아닙니다. 어떤 도덕적 선 례를 남기기 위한 용기도 아닙니다. 그것은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기 위한 생명의 용기, 구속의 용기, 희생의 용기였습니다. 사랑의 용기였습니다.
그러므로 예수의 용기는 알렉산더나 시저나 나폴레옹 같은 자의 용기와는 구별됩니다.
4) 그것은 그분의 영광을 보여 주는 모습이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가는 그분의 길은 죽음 이후, 다시 살아나는 부활의 새 아침 을 향하던 길이었습니다. 아무도, 그 누구도 그 아침의 영광을 볼 수 없었습니다. 죽음 건너 편에 일어날 새로운 세계를 쳐다 보고 예루살렘으로 걸어 가 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죄인들에게 보여 주신 구세주로서의 매력의 모습이기도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따릅니다. 그분이 살았을 때도 그러했습니다. 그분이 십자가 에 돌아가신 후에도 사람들은 그를 따릅니다. 그분의 마음을 따르고, 교훈을 따르고, 행동을 따릅니다. 심지어 그를 따르는 정도는 죽기까지에 이릅니다. 그래서 그분 가신 후에는 순교자가 생겨나기까지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그분에게 매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매력은 바로 사랑입니다. 그 사랑은 바로 나를 대속하신 사랑입니다. 그분만 우리가 죄인임을 알려 주었습니다. 죄의 삯이 사망이라고 알려 주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를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도록 우리가 받을 사망의 값을 대신 지불하여 주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은 바로 그 길이었습니다. 그 길은 정복자들이 나팔불 며, 북치며, 창검을 휘두르면서 가던 길이 아니었습니다. 영예로운 권세의 왕 관을 쓰기 위하여 등극하는 보좌를 찾아가던 가이사의 길이 아니었습니다. 그 분은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속죄의 죽음을 취하시려고 예루살렘으로 가던 길 이었습니다. 그것이 그분만이 죄인들에게 던져 준 사랑의 매력이었습니다. 생 명의 매력이었습니다. 희생의 매력이었습니다. 아니 승리의 매력이었습니다. 그래서 2000년 세월이 지나도록 그분을 따르는 사람들의 행로가 역사의 새 길을 만들고 말았습니다. 그를 따르는 무리들은 이 세상에서 가이사의 영광보 다도, 십자가의 가시면류관을 쓰기를 더 좋아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우리는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 가시던 길을 쳐다 보고 있습니다. 그 길에서 제자들에게 자신이 예루살렘에서 당할 일을 말씀해 주시던 그 주님 을 쳐다보고 있습니다. 그 말씀은 십자가 죽음의 수난이었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으로 가시던 그 분의 모습은 자기가 당할 일을 다 알고, 다 말하던 예언자의 모습이었습니다. 아니 자신만이 그 길을 알고, 그 사건을 알고, 자신만이 홀로 담당하러 가는 고독자의 모습이었습니다. 아니 그것은 죄인을 구원하러 가는 사랑의 용사 같 은 모습이었습니다. 아니 더 밝은 부활의 새 아침을 내다보고 걸어가시던 영광의 모습이었습니다. 저 유명한 영국의 군인 정치가 올리버 크롬웰(Oliver Cromwell) 장군 (1599-1658)이 있었습니다. 그는 독실한 청교도 군인이었습니다. 그는 그 얼 굴에 있었던 사마귀 때문에 이따금 고민했다고 합니다. 언젠가, 궁정 화가가 그의 초상화를 그렸다고 합니다. 그 화가는 크롬웰 장군을 기쁘게 하기 위하여 그의 얼굴에 있던 사마귀는 초상화에 그려 넣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자신 의 초상화를 본 크롬웰은 이 사실을 알고 그 사마귀가 빠진 초상화를 던지면 서 "이것을 내 방에서 당장 치워 버려라! 이 초상화는 나 크롬웰이 아니다. 왜 내 얼굴에 있는 사마귀가 없어졌느냐 초상화의 생명은 있는 그대로 그리는 것이 아니냐 사마귀가 있든지, 또 다른 무엇이 있든지 있는 그대로의 나 를 그려라."고 하며 호통을 쳤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예수의 얼굴을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합니다. 예수의 모 습을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합니다. 예수의 마음에 있는 그대로를 보아야 합니다.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예수는 자기의 당할 일을 그대로 제자들에게 말 했습니다. 그리고 주저하지 않고 자기가 당할 일을 향하여 예루살렘으로 나아 갔습니다. 예수는 저주의 십자가를 지시려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습니다. 여기에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을 비추어 보아야 합니다. 우리도 자기 몫에 태인 십자가를 짊어지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 던 주님의 그 마음, 그 모습, 그 걸음이 그를 따르는 그의 제자들(신자)의 모 습이어야 합니다. 나는 지금 예수를 따라 예루살렘으로 가고 있는가 내 몫에 태인 십자가를 짊어지고 예루살렘(천국)을 향하여 길을 가고 있는가 수난 주간에 주님이 물 어 보시는 질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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