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에 머물지 않기 (막7:6)
본문
많은 사람이 “바르고 진실하다고 여겨지는 생각”을 지니고 있다는 자부심만으로 살아가려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것이 지금 자신의 삶에 “어떠한 영향을 주고 있으며, 어떠한 움직임으로 이끄는가”에 대해서는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단지 “그래도 누구보다는”이란 생각으로 만족해 합니다. 그 생각들이 조각 조각나 있는 것이건, 단지 흉내내기에 불과하든 상관이 없는 듯이 행동합니다. 그것은 마치 연탄불은 꺼져가는데 이불속에 누워서 조금도 움직일 기색을 하지않으면서 “새연탄을 갈기만 하면 피어오르기 마련이다”라는 생각만 가지고 있는 것과 다름 없습니다. ‘연탄을 갈면 다시 피어오른다’는 생각이 식어버린 방에 따스한 온기를 가져오지 않습니다. 여러가지 이유로해서 “생각 속에 머물어 버리는” 많은 경우을 우리는 보아 왔습니다. 그러나 한때 그러한 “기발하고 유용하고 훌륭한 생각을 했었다”는 자부심에 기대어 잠을 청하는 모습은 언제나 서로에게 대책없는 아픔만을 줄 뿐입니다. “무엇을 생각해 냈느냐”보다 중요한 기준이 있음을 언제나 기억해야 합니다. 오히려 우리는 “그것을 위해서 무엇을 했느냐”,“그러한 생각이 정당하단 사실을 어떻게 증명해 갈것인가”에 모든 힘이 모아져야 합니다.
우리가 “무책임한 생각”만을 해낸다면, 그것을 위하여 치밀하게 움직이지 않으면서 생각에만 머물어 있다면 서로에게 답답증만을 안겨줄뿐 입니다. 언제나 우리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기발한 아이디어가 없어서”라기 보다는 그것을 “치밀하게 책임지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데 있는 것 같습니다. “머리쪽만 무거워지고 입주위만 발달되었지만, 손과 발은 점점 허약해 지는 이름모를 병”에 시름 시름 앓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지 않으면서, 여전히 움직임과는 멀리떨어진 궁리만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생각하는 석고상”이 무슨 소용입니까 석고상은 석고상일 뿐입니다. 그것이 어떠한 겉모양을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은 더더욱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움직임이 애초 불가능한 석고상의 생각은 이미 “석고”입니다. “생각 하는 감자, 박사가 된 감자, 요리되고 그릇에 담기기를 거부하는 생각하는 감자”는 끝내 썩어버리고 말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장식품이 아닙니다. 휼륭하고 기발한 생각보다 더 유용한 것은 우리 자신이 “먹음직한 감자”가 되는 것입니다. 배고픈 사람이 먹으면 배부르게 될 잘익은 감자가 되는 편이 석고화된 생각보다 낫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어느 구약의 예언자가 깨어지는 가슴으로 외쳐된 말 한조각에 귀를 기울입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여도 마음은 나에게서 멀리 떠나 있구나 !” 예언자는 야훼의 생각이 땅에 떨어지고 자신만을 위하여 흥청거리며, 약한자들은 더욱 고통을 받고있는 예루살렘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들은 습관에 따라 야훼를 들먹거리지만 사실 야훼의 생각이 그들에게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지금을 즐기며 흥청거리기만 하였습니다. 생각의 구석에 “야훼의 백성”이라는 습관처럼 되어버린 말이 새겨져 있었지만, 그것은 석고처럼 굳어져 있을 뿐 “숨기”를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한때 그것에 자부심가지고 행동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아무 소용도 없는 석고상을 가슴 구석에 두고있을 뿐입니다. “야훼의 백성”이 그의 정의로운 뜻을 따라 책임있게 걸어야 한다는 사실은 접어두고 거듭 거듭 반역하는 걸음을 걷고있는 예루살렘이 가지고 있는 어떠한 생각이며, 예배가 “숨기”를 가지고 있겠는지를 생각해 봅니다.
수백년이 지난 시간에 같은 장소에서 예수께서 동일한 구절을 인용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수백년이 지났지만 달라진 것은 없습니다. 여전히 위선적이며 형편없는 현실입니다. 수없이 많은 불필요한 법적인 제약들, 뜨내기들과 가난한 사람들이 지켜 낼 수 없는 규제들, 기득권을 쥐고 있던 정착자들의 법, 지배자들의 논리와 그들의 이기적이고 탐욕적인 정서에 근거를 둔 법들이 약한 사람들을 옭아 매고 있는 현실입니다. 야훼의 이름으로 자신만을 살찌우며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가당치도 않은 “고상한 생각”에 자부심을 가지고 들먹거리고 있었습니다. 예수는 그러한 모습을 한마디로 “위선자”라고 평가합니다. 예수는 차리리 “잘익은 감자한알이 그 시대에 더 커다란 감동을 줄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듯합니다. “치밀하고 책임있는 성실한 움직임”으로 이어지지 않는 어떠한 고상한 생각도 “썩은 감자”에 불과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석고상의 생각도 아니며, 기발한 아이디어도 아닙니다. 그것보다 우선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자신이 한결같이 살아있는 것”입니다. “움직임을 가져오는 살아있음”이 필요합니다. 기꺼이 한알의 잘익은 감자가 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고상한 생각보다 우선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의 공동체를 바라보며 어떠한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까 우리가 혹시 “바르고 진실하다고 여겨지는 생각”을 지니고 있다는 자부심만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그것이 지금 자신의 삶에 “어떠한 영향을 주며, 어떤 움직임으로 이끄는가”에 대해서는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으면서, 단지 “그래도 누구보다는”이란 생각만 가지고 있는 건 아닐까요 우리가 한사람 한사람이 서로에게 진한 감동을 주는 감자 한알이 되기 위하여 지금 움직여야 합니다.
우리가 “무책임한 생각”만을 해낸다면, 그것을 위하여 치밀하게 움직이지 않으면서 생각에만 머물어 있다면 서로에게 답답증만을 안겨줄뿐 입니다. 언제나 우리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기발한 아이디어가 없어서”라기 보다는 그것을 “치밀하게 책임지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데 있는 것 같습니다. “머리쪽만 무거워지고 입주위만 발달되었지만, 손과 발은 점점 허약해 지는 이름모를 병”에 시름 시름 앓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지 않으면서, 여전히 움직임과는 멀리떨어진 궁리만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생각하는 석고상”이 무슨 소용입니까 석고상은 석고상일 뿐입니다. 그것이 어떠한 겉모양을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은 더더욱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움직임이 애초 불가능한 석고상의 생각은 이미 “석고”입니다. “생각 하는 감자, 박사가 된 감자, 요리되고 그릇에 담기기를 거부하는 생각하는 감자”는 끝내 썩어버리고 말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장식품이 아닙니다. 휼륭하고 기발한 생각보다 더 유용한 것은 우리 자신이 “먹음직한 감자”가 되는 것입니다. 배고픈 사람이 먹으면 배부르게 될 잘익은 감자가 되는 편이 석고화된 생각보다 낫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어느 구약의 예언자가 깨어지는 가슴으로 외쳐된 말 한조각에 귀를 기울입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여도 마음은 나에게서 멀리 떠나 있구나 !” 예언자는 야훼의 생각이 땅에 떨어지고 자신만을 위하여 흥청거리며, 약한자들은 더욱 고통을 받고있는 예루살렘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들은 습관에 따라 야훼를 들먹거리지만 사실 야훼의 생각이 그들에게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지금을 즐기며 흥청거리기만 하였습니다. 생각의 구석에 “야훼의 백성”이라는 습관처럼 되어버린 말이 새겨져 있었지만, 그것은 석고처럼 굳어져 있을 뿐 “숨기”를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한때 그것에 자부심가지고 행동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아무 소용도 없는 석고상을 가슴 구석에 두고있을 뿐입니다. “야훼의 백성”이 그의 정의로운 뜻을 따라 책임있게 걸어야 한다는 사실은 접어두고 거듭 거듭 반역하는 걸음을 걷고있는 예루살렘이 가지고 있는 어떠한 생각이며, 예배가 “숨기”를 가지고 있겠는지를 생각해 봅니다.
수백년이 지난 시간에 같은 장소에서 예수께서 동일한 구절을 인용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수백년이 지났지만 달라진 것은 없습니다. 여전히 위선적이며 형편없는 현실입니다. 수없이 많은 불필요한 법적인 제약들, 뜨내기들과 가난한 사람들이 지켜 낼 수 없는 규제들, 기득권을 쥐고 있던 정착자들의 법, 지배자들의 논리와 그들의 이기적이고 탐욕적인 정서에 근거를 둔 법들이 약한 사람들을 옭아 매고 있는 현실입니다. 야훼의 이름으로 자신만을 살찌우며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가당치도 않은 “고상한 생각”에 자부심을 가지고 들먹거리고 있었습니다. 예수는 그러한 모습을 한마디로 “위선자”라고 평가합니다. 예수는 차리리 “잘익은 감자한알이 그 시대에 더 커다란 감동을 줄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듯합니다. “치밀하고 책임있는 성실한 움직임”으로 이어지지 않는 어떠한 고상한 생각도 “썩은 감자”에 불과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석고상의 생각도 아니며, 기발한 아이디어도 아닙니다. 그것보다 우선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자신이 한결같이 살아있는 것”입니다. “움직임을 가져오는 살아있음”이 필요합니다. 기꺼이 한알의 잘익은 감자가 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고상한 생각보다 우선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의 공동체를 바라보며 어떠한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까 우리가 혹시 “바르고 진실하다고 여겨지는 생각”을 지니고 있다는 자부심만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그것이 지금 자신의 삶에 “어떠한 영향을 주며, 어떤 움직임으로 이끄는가”에 대해서는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으면서, 단지 “그래도 누구보다는”이란 생각만 가지고 있는 건 아닐까요 우리가 한사람 한사람이 서로에게 진한 감동을 주는 감자 한알이 되기 위하여 지금 움직여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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