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단계 (마5:43-48)
본문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람사는 곳에서 언제나 감동을 주는 것은 사랑의 이야기입니다. 자식에 대한 부모의 헌신적인 사랑이나 젊은 남녀가 오직 사랑만으로 여러가지 고난을 이겨나가는 이야기 그리고 고통당하는 이웃을 위 해 자신을 희생하며 살아가는 인간 드라마는 우리의 가슴을 훈훈한 온정과 감격의 눈물로 적셔줍니다. 그러나 동시에 사랑은 우리에게 갈등은 안겨줍니다. 사랑이 그토록 고상 한 것이고 감동적인 것이기 때문에 항상 나 자신의 헌신은 그것에 미치지 못하여 불만스럽기 때문입니다. 소설 속에서 우리는 그렇고 그런 평범한 인 생을 살고 있습니다.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는 사랑보다 미워하는 일이 더욱 많이 있습니다. 나의 태도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나를 대한 태도 또한 사랑 이 아니라 무관심과 멸시와 미움으로 보일 때가 많습니다. 더구나 교회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에 대하여 배웠습니다. 하늘 영광 을 버리고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흘리신 우리 주님의 사랑을 알고 깨달았습니다.
그러므로 무릇 믿는 자는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고 하는 말씀에 이의를 달 수가 없으나 사실상으로는 사랑의 실천이 잘되지 않습니다. 기도할 때마다 "우리가 사랑하지 못한 죄를 용서해 주옵소서"라 고 하지만 그 기도 후에는 조금도 나아진 것이 없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그리하여 오늘날 우리 시대의 사랑이야기는 거의가 고발이요 증오이며 왜곡 된 불륜의 사랑 이야기가 아니면 적당한 흥정과 거래거리가 되었습니다. 외환은행에 다니는 어떤 분이 이런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어떤 노인이 매 월1일이면 정확하게 은행 지불창구에 나타나서 만오천원씩 찾아가는데 언제 나 동전100원짜리로 찾아갑니다. 은행원이 하도 궁금하여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할아버지는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손자들에게 주려고 그럽니다. 아이들은 내가 돈을 주어야만 '할아버지 할아버지'하고 따릅니다. 손자들이 나를 따르면 며느리가 좋아하고 며느리 가 나를 좋아해야 아들이 나를 좋아하게 되니까요." 그리고 어느 사이에 그 할아버지 눈에는 눈물이 고이더랍니다. 오늘날 우리는 모두 사랑에 목말라 있으면서도 그 사랑은 실종되었고 병들었고 왜곡되었습니다. 불가능한 가능성 (impossible possibility) 그러면 어떻게 하여야 사랑을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실천하지 못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삶 속에서 참다운 사랑의 샘이 터져나올 수가 있겠습니까 그 것은 영원히 불가능한 것이겠습니까 여러분이 한가지 명심해야 할 것은 인간에게 참된 사랑은 이상이고 열망 일 뿐이지 심자가의 사랑같은 절대사랑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불가능한 것을 상대방에게 요구하고 자기 자신에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왜 사랑하지 않느냐고 비난하고 갈등합니다. 최고의 윤리적 표준인 십자가의 사랑으로 재면 인간사는 모조리 허위이고 위선이 드러나기 때문에 서로 위선자라고 비난하게 됩니다. 타락한 인간은 이미 사랑할 수 있는 능 력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소경이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 것과 같 습니다. 사랑의 모양은 있어도 실제로 사랑의 능력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본문 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원수까지 사랑하 라고 명령하십니다. 불가능한 것을 가능케 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어떤 신학자는 이것을 "불가능한 가능성(impossible opssibility)" 이라고 하였 습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불가능하지만 믿는 자에게는 성령님의 도우심을 힘 입어서 사랑의 근사치에 끊임없이 접근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먼저 겸손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진짜 사랑을 할 수 있는 능 력이 없습니다. 구원 받은 자,순종하는 자만이 사랑의 근사치에라도 접근할 수 있는 것입니다. 불가능한 가능성으로서의 사랑에 3가지 단계가 있습니다. 미워하지 않는 단계
첫째 단계는 미워하지 않는 단계입니다. 사랑의 반대 개념은 두말할 것 없이 증오입니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증오를 안고 태어납니다. 어린 아 이들에게 어른들이 싸우는 것을 가르쳐 준일이 없는데 처음 보는 아이들과 만나자마자 싸웁니다. 인간은 사악하여 누군가를 미워하지 않으면 못삽니다. 어떤 엄마는 큰 애를 사랑하는 대신
둘째 아이를 미워합니다. 자기 가 족을 끔찍이 사랑하는 대신 옆집 아주머니를 공연히 미워합니다. 교회에 와 서도 누군가를 미워하고 공격합니다. 이렇게 미워하는 마음이 아직도 가득 히 자리잡고 있는데 무슨 온전한 사랑이 가능하겠습니까 희생적이며 헌신적인 사랑은 불가능할런지 모르지만,우리가 투명한 눈으로 우리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나같은 죄인을 용서하신 주님의 사랑을 깨 달을 때 나의 이웃과 미움의 대상까지도 용서하고 미워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어느 회사의 벽에 이런 글귀가 적혀 있습니다. "인간관계에서 성공하려면 기분좋게 웃어라. 항상 산뜻하고 깨꿋하라. 화내지 말라.논쟁을 피하라. 단 점을 발견하려고 애쓰지 말라. 뻔뻔스러운 사람이 되지 말라. 돈을 빌리거 나 빌려주지 말라. 새로운 일에 반대자가 되지 말라. 거만하게 행동하지 말 라. 거짓말을 하지 말라. 남을 놀리거나 빈정대지 말라."고 권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끊임없이 용서하는 일입니다. 흔히 말하 기를 불의를 보고 어찌 미워하지 않을 수 있느냐고 합니다. 불의를 미워하 면 할수록 사람을 미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을 미워하는 것은 또 하나의 불의이며,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살인죄에 해당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만일 은혜 생활하는 중에 특별한 사랑의 능력은 없어도 전에는 미움이 충만했는데 지금은 미움이 사라지고 왜인지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생겼다면 그 자체가 사랑이며 사랑의 능력을 받은 증거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본문 가운데 말씀하십니다."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아버지의아들이 되리니." 외면하지 않는 단계
둘째 단계는 외면하지 않는 단계입니다. 우리가 너무 큰 사랑을 자신에게 나 타인에게 요구하지 말아야 합니다. 인간의 능력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다만 내 앞에 직면한 현실에서 나의 협력과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일이 분명 히 있는데 핑계를 대고 외면하여 도피하지 않는 것이 우리에게 가능한 사랑 입니다. 지난 22일에는 몇몇 목사님들과 함께 철 지난 대천해수욕장에 갔었습니다. 아침 6시에 해변을 산책하며 기도하려고 나갔습니다. 아침바다는 아름 담고 신선한 염감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파도가 바닷가에 밀어다 놓은것 때문에 감정은 깨어졌습니다. 비닐봉지,깡통같은 것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것들이 다시 바닷물에 쓸려들어가지 않도록 주워 모으느라고 아침 산책시간 을 다 보냈습니다. 깨끗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외치면서도 쓰레기를 아무데나 버리고 보도위 에 껌을 탁탁 뱉어버립니다. 사랑이라고 하는 것을 너무 거창하게 생각하지 말고 단순하게 '타인에 대한 고려와 관심'이라고 생각한다면 나의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 고통을 주고 불편을 주지 말아야 할 뿐 아니라 내가 그순간 무엇을 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0장의 선한사마리아사람은 강도 만난 이웃을 도피하지 않고 외면하지 않았다는데 큰 뜻이 있습니다. 어떤 불쌍한 사람이 여러분에게 무슨 도움을 구한다고 합시다. "내가 조 금 도와 준다고 해서 사회 전반에 걸친 구조적인 빈곤에 무슨 도움이 되겠 느냐 그러니 나는 도와줄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근본적인 도움이 되든지 안되든지 당장 배고픈 사람에게는 한 개라도 먹이고난 다음 에 볼 일입니다. 사회와 제도를 빙자하여 자기 할 일을 외면하는 것은 또하 나의 위선이고 범죄입니다. 다만 내 앞에 당한 현실에 대하여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스스로 자만하지 말고 "주여 나는 이것밖에 할 수 없었습니다"라고 겸손히 주님앞에 부끄러워 해 야 할 것입니다. 부부간의 사랑,부모 자식간의 사랑도 실상은 서로의 고통에 대하여 눈에 띄었을 때에 외면하지 않는 태도를 나타내십시오. 그렇게 되면 생각밖에 여러분의 가정은 감격과 환희가 넘칠 것입니다. 헌신하는 단계
셋째 단계는 소명 받은 분야에 헌신하는 단계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 은 누구나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뿐만 아니라 누구나 다 세상에 파송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 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하신 것입니다. 우리를 세상에 보내신 것 을 우리가 자각할 때 그것을 소명이라고 합니다. 소명은 평신도나 성직자나 차별이 없습니다. 어떤 형태로든지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소명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실 때에 나에게 특별한 관 심을 부어 주시는 분야가 있습니다. 어떤이에게는 농어촌 교회에 관심을 주 십니다. 어떤이에게는 지체 부자유자에 대한 관심을 주십니다. 또 어떤이에 게는 특별히 세계선교에 대해 관심을 주십니다. 또 어떤이에게는 장차 주의 종이 될 신학생들을 길러서 위대한 일꾼으로 봉사케 하는 일에 큰 관심을 주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특별한 소명입니다. 그 일에 대하여 뜨 뜻미지근하게 하면 하나님도 여러분의 일생의 의미를 걸고 그일을 위해 전 심을 기울이십시오. 하나님의 성령님께서 그것이 가능하도록 역사해 주실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우리는 정말 사랑할 수 없는 인간 존재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능력을 믿고 진정으로 사랑하기를 원하시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위의 세가 지를 가능케 하십니다. 나를 선대하지 않는 사람들을 미워하지 않고 용서할 수 있습니다.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한 자에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할 수가 있습니다. 이 두 가지는 소극적인 면이지만 여기에 머물지 않고 내게 주시는 소명의 분야에 일생을 걸고 살아갈 수 있으니 이것이 곧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무릇 믿는 자는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고 하는 말씀에 이의를 달 수가 없으나 사실상으로는 사랑의 실천이 잘되지 않습니다. 기도할 때마다 "우리가 사랑하지 못한 죄를 용서해 주옵소서"라 고 하지만 그 기도 후에는 조금도 나아진 것이 없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그리하여 오늘날 우리 시대의 사랑이야기는 거의가 고발이요 증오이며 왜곡 된 불륜의 사랑 이야기가 아니면 적당한 흥정과 거래거리가 되었습니다. 외환은행에 다니는 어떤 분이 이런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어떤 노인이 매 월1일이면 정확하게 은행 지불창구에 나타나서 만오천원씩 찾아가는데 언제 나 동전100원짜리로 찾아갑니다. 은행원이 하도 궁금하여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할아버지는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손자들에게 주려고 그럽니다. 아이들은 내가 돈을 주어야만 '할아버지 할아버지'하고 따릅니다. 손자들이 나를 따르면 며느리가 좋아하고 며느리 가 나를 좋아해야 아들이 나를 좋아하게 되니까요." 그리고 어느 사이에 그 할아버지 눈에는 눈물이 고이더랍니다. 오늘날 우리는 모두 사랑에 목말라 있으면서도 그 사랑은 실종되었고 병들었고 왜곡되었습니다. 불가능한 가능성 (impossible possibility) 그러면 어떻게 하여야 사랑을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실천하지 못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삶 속에서 참다운 사랑의 샘이 터져나올 수가 있겠습니까 그 것은 영원히 불가능한 것이겠습니까 여러분이 한가지 명심해야 할 것은 인간에게 참된 사랑은 이상이고 열망 일 뿐이지 심자가의 사랑같은 절대사랑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불가능한 것을 상대방에게 요구하고 자기 자신에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왜 사랑하지 않느냐고 비난하고 갈등합니다. 최고의 윤리적 표준인 십자가의 사랑으로 재면 인간사는 모조리 허위이고 위선이 드러나기 때문에 서로 위선자라고 비난하게 됩니다. 타락한 인간은 이미 사랑할 수 있는 능 력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소경이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 것과 같 습니다. 사랑의 모양은 있어도 실제로 사랑의 능력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본문 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원수까지 사랑하 라고 명령하십니다. 불가능한 것을 가능케 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어떤 신학자는 이것을 "불가능한 가능성(impossible opssibility)" 이라고 하였 습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불가능하지만 믿는 자에게는 성령님의 도우심을 힘 입어서 사랑의 근사치에 끊임없이 접근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먼저 겸손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진짜 사랑을 할 수 있는 능 력이 없습니다. 구원 받은 자,순종하는 자만이 사랑의 근사치에라도 접근할 수 있는 것입니다. 불가능한 가능성으로서의 사랑에 3가지 단계가 있습니다. 미워하지 않는 단계
첫째 단계는 미워하지 않는 단계입니다. 사랑의 반대 개념은 두말할 것 없이 증오입니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증오를 안고 태어납니다. 어린 아 이들에게 어른들이 싸우는 것을 가르쳐 준일이 없는데 처음 보는 아이들과 만나자마자 싸웁니다. 인간은 사악하여 누군가를 미워하지 않으면 못삽니다. 어떤 엄마는 큰 애를 사랑하는 대신
둘째 아이를 미워합니다. 자기 가 족을 끔찍이 사랑하는 대신 옆집 아주머니를 공연히 미워합니다. 교회에 와 서도 누군가를 미워하고 공격합니다. 이렇게 미워하는 마음이 아직도 가득 히 자리잡고 있는데 무슨 온전한 사랑이 가능하겠습니까 희생적이며 헌신적인 사랑은 불가능할런지 모르지만,우리가 투명한 눈으로 우리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나같은 죄인을 용서하신 주님의 사랑을 깨 달을 때 나의 이웃과 미움의 대상까지도 용서하고 미워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어느 회사의 벽에 이런 글귀가 적혀 있습니다. "인간관계에서 성공하려면 기분좋게 웃어라. 항상 산뜻하고 깨꿋하라. 화내지 말라.논쟁을 피하라. 단 점을 발견하려고 애쓰지 말라. 뻔뻔스러운 사람이 되지 말라. 돈을 빌리거 나 빌려주지 말라. 새로운 일에 반대자가 되지 말라. 거만하게 행동하지 말 라. 거짓말을 하지 말라. 남을 놀리거나 빈정대지 말라."고 권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끊임없이 용서하는 일입니다. 흔히 말하 기를 불의를 보고 어찌 미워하지 않을 수 있느냐고 합니다. 불의를 미워하 면 할수록 사람을 미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을 미워하는 것은 또 하나의 불의이며,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살인죄에 해당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만일 은혜 생활하는 중에 특별한 사랑의 능력은 없어도 전에는 미움이 충만했는데 지금은 미움이 사라지고 왜인지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생겼다면 그 자체가 사랑이며 사랑의 능력을 받은 증거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본문 가운데 말씀하십니다."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아버지의아들이 되리니." 외면하지 않는 단계
둘째 단계는 외면하지 않는 단계입니다. 우리가 너무 큰 사랑을 자신에게 나 타인에게 요구하지 말아야 합니다. 인간의 능력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다만 내 앞에 직면한 현실에서 나의 협력과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일이 분명 히 있는데 핑계를 대고 외면하여 도피하지 않는 것이 우리에게 가능한 사랑 입니다. 지난 22일에는 몇몇 목사님들과 함께 철 지난 대천해수욕장에 갔었습니다. 아침 6시에 해변을 산책하며 기도하려고 나갔습니다. 아침바다는 아름 담고 신선한 염감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파도가 바닷가에 밀어다 놓은것 때문에 감정은 깨어졌습니다. 비닐봉지,깡통같은 것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것들이 다시 바닷물에 쓸려들어가지 않도록 주워 모으느라고 아침 산책시간 을 다 보냈습니다. 깨끗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외치면서도 쓰레기를 아무데나 버리고 보도위 에 껌을 탁탁 뱉어버립니다. 사랑이라고 하는 것을 너무 거창하게 생각하지 말고 단순하게 '타인에 대한 고려와 관심'이라고 생각한다면 나의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 고통을 주고 불편을 주지 말아야 할 뿐 아니라 내가 그순간 무엇을 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0장의 선한사마리아사람은 강도 만난 이웃을 도피하지 않고 외면하지 않았다는데 큰 뜻이 있습니다. 어떤 불쌍한 사람이 여러분에게 무슨 도움을 구한다고 합시다. "내가 조 금 도와 준다고 해서 사회 전반에 걸친 구조적인 빈곤에 무슨 도움이 되겠 느냐 그러니 나는 도와줄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근본적인 도움이 되든지 안되든지 당장 배고픈 사람에게는 한 개라도 먹이고난 다음 에 볼 일입니다. 사회와 제도를 빙자하여 자기 할 일을 외면하는 것은 또하 나의 위선이고 범죄입니다. 다만 내 앞에 당한 현실에 대하여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스스로 자만하지 말고 "주여 나는 이것밖에 할 수 없었습니다"라고 겸손히 주님앞에 부끄러워 해 야 할 것입니다. 부부간의 사랑,부모 자식간의 사랑도 실상은 서로의 고통에 대하여 눈에 띄었을 때에 외면하지 않는 태도를 나타내십시오. 그렇게 되면 생각밖에 여러분의 가정은 감격과 환희가 넘칠 것입니다. 헌신하는 단계
셋째 단계는 소명 받은 분야에 헌신하는 단계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 은 누구나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뿐만 아니라 누구나 다 세상에 파송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 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하신 것입니다. 우리를 세상에 보내신 것 을 우리가 자각할 때 그것을 소명이라고 합니다. 소명은 평신도나 성직자나 차별이 없습니다. 어떤 형태로든지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소명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실 때에 나에게 특별한 관 심을 부어 주시는 분야가 있습니다. 어떤이에게는 농어촌 교회에 관심을 주 십니다. 어떤이에게는 지체 부자유자에 대한 관심을 주십니다. 또 어떤이에 게는 특별히 세계선교에 대해 관심을 주십니다. 또 어떤이에게는 장차 주의 종이 될 신학생들을 길러서 위대한 일꾼으로 봉사케 하는 일에 큰 관심을 주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특별한 소명입니다. 그 일에 대하여 뜨 뜻미지근하게 하면 하나님도 여러분의 일생의 의미를 걸고 그일을 위해 전 심을 기울이십시오. 하나님의 성령님께서 그것이 가능하도록 역사해 주실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우리는 정말 사랑할 수 없는 인간 존재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능력을 믿고 진정으로 사랑하기를 원하시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위의 세가 지를 가능케 하십니다. 나를 선대하지 않는 사람들을 미워하지 않고 용서할 수 있습니다.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한 자에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할 수가 있습니다. 이 두 가지는 소극적인 면이지만 여기에 머물지 않고 내게 주시는 소명의 분야에 일생을 걸고 살아갈 수 있으니 이것이 곧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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