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상수보훈강해- 보이려고 (마6:1-4)
본문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 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 산상수훈은 팔복을 정점으로해서 본질적인 하나님의 나라와 그에 이르게 되는 복음이 잘나타나 있다. 5장은 어떻게 인간이 구원에 이르게 되며 무엇이 우리에게 임하는 하나님 나라의 참된 모습이며 복인가가 잘 드러나고 있다. 동시에 그 복이 임하는 과 정과 비밀들이 팔복의 핵심이다. 더불어 하나님 나라의 성취자들의 삶인 빛과 소금의 문제와 함께 율법의 본질 문제가 다루어지고 있음을 우리는 살펴 왔다. 결국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혹은 온전하게 되리 라, 동사직설법 미래 중간 디포동사) 라는 말씀으로 귀결되고 있다. 이는 팔복의 임 하심으로 나타나게 되는 삶속에서 표면적 율법과 완성적 율법, 동시에 완성적 율법의 성취된 삶이 어떠한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는지를 말씀해 주는 것이라 하겠다. 그것은 시종 이는 이, 눈은 눈 이라는 상식적이고 종교적인 일반법칙을 초월해 있는 삶의 모습이다. 이는 이, 눈은 눈 이라는 것은 사랑하고는 전혀 별개의 법칙이다. 오히려 그러한 것으로부터 구원 받은 모습이야말로 사랑의 모습이요, 팔복 성취 의 진면목(眞面目) 임이 계속되는 말씀을 통해서 강조되어 왔다. 자, 이제 마태복음 6장에서는 어떤 문제들이 제기되고 다루어질것인가 그렇다.
하나님 나라의 성취와 동시에, 그것이 율법의 문제에서는 어떻게 적응되고 실현되게 되어 있는지를. 율법의 가장 보편적인 조항인 살인,간음,맹세와 같은 조항으로 5장에서 언급되어 왔다면, 그러한 문제들로 씨름하는 인간들에게 당연한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는 종교적인 양태의 행위들에 대하여는 6장에서 언급하고 있다. 인간의 죄악은 그것에 대한 해결방안의 일환으로서 종교적인 행위를 하게되고 그러한 것이 종교인들의 심연에서부터 거룩한 모습의 종교양식으로 발전되어 나타나게 되어 있다. 의식(儀式)과 행위(行爲)의 방법이야말로 인간이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최후의 방법이다. 그러한 것을 가장 잘 나타내주는 행위의 개념이 구제라든지 기도, 혹은 금식인 것이다. 이러한 외적인 현상들은 내적인 인간의 죄악을 해결하고 자 발버둥치는 인간 본연의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그렇게 볼 때 6장에서 바로 이같은 문제들이 다루어지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다 하겠다. 그러기 때문에 따지고 보면 5장에서 언급되고 있는 율법의 문제들이 해결되지 않으면 동시에 6장의 문제들도 전혀 해결되지 않는다. 완성적 율법의 성취가 없는 이들에게 서 표면적 율법을 순응하고 이루어 보려고 하는 시도들이 나타나게 된다. 그러한 종 교적 행위들로 얼굴을 화장(化粧)하고 분칠하지 않으면 위로받을 길이 없고 불안하여 견딜 수 없기 때문에 열심히 그렇게 해야 되고 하게 되어 있다. 그것은 곧 율법적 행복이기도 하기 때문이며 자신의 소속에 충실한 것이기도 한다. 아무리 5장의 내용 들에 대한 성취 운운하고 팔복이 어떻고 운운해도 6장의 말씀들이 자신의 삶 속에서 나타나지 않는다면 앞의 말들은 결국 헛소리이기에 6장의 말씀들이 전개되어 나온다 고 보면 될 것이다.
그러므로 6장은 바로 이러한 문제들이 다루어지고 있다. 너희의 삶 속에서 전개되고 있는 모습들이 너희 자신의 義이냐 아니면 하나님의 義의 성취로 나타나는 삶이냐 하는 물음들이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義를 行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 어떤 이들은 이렇게 말한다.
그러므로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께만 보이 려고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본문 어디에도 그러한 표현은 없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의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는 말씀이,
그러므로 하나님께 보이도록 하라는 말씀으로 둔갑된다면 이는 말씀을 왜곡하는 것은 물론이요 한 술 더 뜨는 결과일 뿐이다. 그것이 진실한 신앙의 모습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현대 종교인들의 모습이기도 하며 그렇지 못한 것에 대해 자책하는 말씀으로 이 구절이 이해된다면 너무나 오해한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지 않고 오로지 당신에게만 보이려고 했다고 해서 기뻐하시고 칭찬하실 분으로 아신다면 이는 아주 큰 착각이다. 그것은 다만 좀더 세 련되고 고등적인 기만 술책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결코 뇌물을 기뻐하지 않으실 뿐더러, 제발 더 이상은 무엇인가 보이려고 하는 짓거리들은 그만 하라고 애원하신다. 오죽하면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고 계시겠는가.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재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 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희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 디지 못하겠노라.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 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어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 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 (사1:12-15)
그러므로 문제는 사람앞에서냐 혹은 하나님 앞에서냐 가 문제가 아니라, 보이려고 한다는 데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보이려고 무엇인가 하려는 자들은 보인 다음에는 보였다는 자부심으로 기븜을 얻고 그것을 상급으로 누리지만, 보이려고 하는 그 짓을 보고 있고 보아야만 하는 이는 그것이 큰 짐이요, 피곤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다만 그냥 넘어가 줄 분이지만, 그냥 넘어가 준다는 사실은 사랑이자 동시에 저주인 것이다. 보였다 고 하는 즐거움 밖에는 그에게 상급으로 누릴 수 있는 것 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인간이 하는 행위가 얼마나 어린 아이이며 우스꽝스러운가. 무엇인가 보인 것 같다고 여기면 희(喜) 요, 그렇지 않으면 비 (悲) 이니, 잘못 보였으면 다시 잘 보이기 위해 회개하고 또 다시 잘 보이려고 하는 다람쥐 체바 퀴도는 식의 인생들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인생들에게 구원이 필요하지 않으면 누가 필요하겠는가 때문에 구원을 받아야 되며 구원은 그러한 인생들에게 복된 소식인 것이다. 구제의 경우를 살펴보자.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 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 (마6:2-4 ) 도대체 구제라는 것이 무엇인가 전통적인 원문(Textus Receptus,)에서는 6장 1절 에 나오는 (너희 義)대신에 (너희의 구제)이 쓰이고 있다. 구제의 사전적 의미는 m erciful,kind,compassion,pity,즉 자비,혹은 긍휼을 베푸는 것이라 말할 수 있겠다.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근본으로해서 나타나는 것이 구제이다. 성경은 특히 인간의 본 질적인 필요와 관련하여 구제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누가복음 12장39절 이하는 이 를 잘 밝혀준다.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 바리새인은 지금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나 너희 속인즉 탐욕과 악동이 가득하도다. 어리석은 자들아 밖을 만드신 이가 속도 만들지 아니하 셨느냐 오직 그 안에 있는 것이 너희에게 깨끗하리라 (눅12:39-41) 여하튼 종교적 행위로서, 자기의 라는 형태로 가장 잘 나타나는 행위가 구제라는 것이다. 때문에 가장 잘 외식 이라는 말하고 어울릴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구제를 하고 나팔을 분다는 것은 사람들에게 이미 그것은 하나님의 의가 아니고 자기 의라는 것을 시인하는 것이다. 나팔이라는 것은 전쟁터에서 사용하는 악기로서 어떤 사실을 전달하고 알리기 위해서 사용된다. 구제할 때에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은 자 신을 알아달라는 주문이요, 영광을 얻겠다는 것 밖에는 없다. 또 그렇게 해서 영광을 얻고 누린다. 그것이 그의 상급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의 말씀이다.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 어떻게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한다는 말인가 그것이 도대체 가능한 것 인가 또한 왜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알 수 밖에 없으며, 그것을 어떻게 벗어나서 정 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할 수 있을까 그것의 비결은 무엇인가 그러나 그것은 비결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하면 오른손이 하는것을 왼손이 모 르게 하려고 한다면 이미 그 때는 왼손이 알고 있는 때인지라 속수무책이 되는 것이다. 어떻게 하여야 왼손이 모르게 구제를 할 수 있는 것인가 원문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너의 구제가 은밀함중에 있도록(가정법과 함께 목적이나 계획을 나타내는 접속사)너는 구제할 때에 너의 오른손이 하는 것을 너의 왼손이 모르게 하라(간접 명령). 그리하면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네게 갚으시리라(스테판 사본에는 자신을 드러내주심으로 갚으시리라). 왼손이 몰라야 구제가 은밀함 중에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할 때에만 갚으심으로 그 자신을 드러내 주신다는 말이디도 하다. 그분은 감추어진 보화이시다. 마가복음 4:22에는 드러내려 하지않고는 숨긴 것이 없고 나타내려하지 않고는 감추인 것이 없느니라. 라고 말씀하신다. 이러한 갚으심이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할 때 주어지는 은총이요 축복이다. 도대체 어떠하길래 그러한가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알고 있다는 것은 이미 그 자신이 하고 있는 행위에 대해 서 의식하고 있음을 말함이다. 의식하고 있다함은 벌써 의식하게 되는 상대가 있다는 말이다. 반대급부심리가 작용하기 때문에 의식(意識)이 버젓하게 남아 있는 것이다 . 다시 말하면 율법 아래에 있는 동안은 그것을 벗어날 수가없는 운명에 놓여 있는 것 이 특징이다. 여기서 의식이라함은 율법적 의식(意識)을 말한다. 무엇을 해야 된다고 하는 율법적 기준이 작용하고 있는한은 분명하고도 석연하게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 손이 알고 있다. 또한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알지 못한다면 할 수도 없다. 왼손 이 알아야만 살맛이 나서 할 수 있는 것이다. 율법의 특징은 무엇을 했다,또는 하지 못했다는 것이 그것의 특징이기 때문에 했다는 것도 하지 못했다는 것도 생생하게 기억되는 것이다. 했을 때 신나는 기억으로, 하지 못했을 때는 우울하고 죄송스러운 기억으로 남아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려고 노력할 문제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한 율법으로부터 탈피하고 구원받지 못하면 불가능한 일이다. 여기서 오해해서는 안 될 것이 있으니 구제할 때 무의식 중에 해야 된다는 말은 더더 욱 아니다. 다만 자신의 삶이 구제의 삶으로 살아진 것 뿐이요, 그것이 보이기 위함 도 아니요, 해야되기 때문에 하는 것도 아니요, 다만 그렇게 한 것 뿐이요 살아진 것 뿐이라는 말이다. 그러한 구제의 삶을 살 때 무의식중에 해야 한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무슨 몽유병환자라는 말인가 무의식 중에 하게, 오히려 더 自己認識이 명확한 삶을 산다. 행위에 대한 어떤 기억이 살아서 자신을 지배하지 않는다는 것이 특징일 뿐이다. 다만 그의 삶이 율법적 의식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래서 무엇을 했다라는 자긍이라든지 하지 못했다는 자책의 의식이 전혀 없는 것이다 . 그러한 의식의 기억으로 전혀 남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태복음 25장 31절 이하의 기사는 두 가지의 경우에 대해 잘 말해준다.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 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 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 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 궤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하리니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 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이와는 아주 대조가 되는 계속되는 기사를 보자.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 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들어가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 니하였고. 저희도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이나 목 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치 아니하더이까.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 이 본문에 나오는 대목 중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하였으 晝떳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하리니 와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이 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치 아니하더이까 의 두개의 대조되는 사건은 오늘 본문 이해에도 매 우 적절한 비유가 되고 있다. 왜 이러한 차이가 나는 것인가 어떤이는 어떻게 하길래 도무지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는, 즉 무엇인가 했 다는 의식이 자리하지 않고 있는가 그와는 반대로 언제 우리가 하지 않았습니까 라는 부류는 도대체 왜 그러할 수 밖에 없겠는가 그것은 앞서도 말하였거니와 도 대체 아직도 율법 아래에 있느냐 아니면 율법으로부터 벗어난 그 어떤 곳에 있느냐 하는 문제이다. 율법은 기억이다. 율법은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안다. 아무리 모르게 하려고 해도 그러면 그럴수록 더 생생하게 왼손이 잘 안다. 철저하면 철저할 수록 더 철저한 외식(外飾) 밖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것을 일컬어 성경은 자기 義 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삶을 살 수 있는 이들은 자신이 살 아있지 않은 자들이요 은밀한 가운데 계신 감추인 보화와 더불어 사는 이들이다. 바 로 그로 더불어 사는 삶이 하나님의 義 가 주장하는 삶이다. 그것은 어떻게 살아 보겠다는 삶이 아니요 사과나무가 사과나무로 살 수 밖에 없듯 그렇게 사는 삶을 말 한다. 사과나무는 결코 장미꽃을 피울수 없다. 김창호 씀 여러분의 평안을 기원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성취와 동시에, 그것이 율법의 문제에서는 어떻게 적응되고 실현되게 되어 있는지를. 율법의 가장 보편적인 조항인 살인,간음,맹세와 같은 조항으로 5장에서 언급되어 왔다면, 그러한 문제들로 씨름하는 인간들에게 당연한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는 종교적인 양태의 행위들에 대하여는 6장에서 언급하고 있다. 인간의 죄악은 그것에 대한 해결방안의 일환으로서 종교적인 행위를 하게되고 그러한 것이 종교인들의 심연에서부터 거룩한 모습의 종교양식으로 발전되어 나타나게 되어 있다. 의식(儀式)과 행위(行爲)의 방법이야말로 인간이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최후의 방법이다. 그러한 것을 가장 잘 나타내주는 행위의 개념이 구제라든지 기도, 혹은 금식인 것이다. 이러한 외적인 현상들은 내적인 인간의 죄악을 해결하고 자 발버둥치는 인간 본연의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그렇게 볼 때 6장에서 바로 이같은 문제들이 다루어지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다 하겠다. 그러기 때문에 따지고 보면 5장에서 언급되고 있는 율법의 문제들이 해결되지 않으면 동시에 6장의 문제들도 전혀 해결되지 않는다. 완성적 율법의 성취가 없는 이들에게 서 표면적 율법을 순응하고 이루어 보려고 하는 시도들이 나타나게 된다. 그러한 종 교적 행위들로 얼굴을 화장(化粧)하고 분칠하지 않으면 위로받을 길이 없고 불안하여 견딜 수 없기 때문에 열심히 그렇게 해야 되고 하게 되어 있다. 그것은 곧 율법적 행복이기도 하기 때문이며 자신의 소속에 충실한 것이기도 한다. 아무리 5장의 내용 들에 대한 성취 운운하고 팔복이 어떻고 운운해도 6장의 말씀들이 자신의 삶 속에서 나타나지 않는다면 앞의 말들은 결국 헛소리이기에 6장의 말씀들이 전개되어 나온다 고 보면 될 것이다.
그러므로 6장은 바로 이러한 문제들이 다루어지고 있다. 너희의 삶 속에서 전개되고 있는 모습들이 너희 자신의 義이냐 아니면 하나님의 義의 성취로 나타나는 삶이냐 하는 물음들이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義를 行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 어떤 이들은 이렇게 말한다.
그러므로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께만 보이 려고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본문 어디에도 그러한 표현은 없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의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는 말씀이,
그러므로 하나님께 보이도록 하라는 말씀으로 둔갑된다면 이는 말씀을 왜곡하는 것은 물론이요 한 술 더 뜨는 결과일 뿐이다. 그것이 진실한 신앙의 모습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현대 종교인들의 모습이기도 하며 그렇지 못한 것에 대해 자책하는 말씀으로 이 구절이 이해된다면 너무나 오해한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지 않고 오로지 당신에게만 보이려고 했다고 해서 기뻐하시고 칭찬하실 분으로 아신다면 이는 아주 큰 착각이다. 그것은 다만 좀더 세 련되고 고등적인 기만 술책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결코 뇌물을 기뻐하지 않으실 뿐더러, 제발 더 이상은 무엇인가 보이려고 하는 짓거리들은 그만 하라고 애원하신다. 오죽하면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고 계시겠는가.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재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 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희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 디지 못하겠노라.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 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어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 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 (사1:12-15)
그러므로 문제는 사람앞에서냐 혹은 하나님 앞에서냐 가 문제가 아니라, 보이려고 한다는 데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보이려고 무엇인가 하려는 자들은 보인 다음에는 보였다는 자부심으로 기븜을 얻고 그것을 상급으로 누리지만, 보이려고 하는 그 짓을 보고 있고 보아야만 하는 이는 그것이 큰 짐이요, 피곤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다만 그냥 넘어가 줄 분이지만, 그냥 넘어가 준다는 사실은 사랑이자 동시에 저주인 것이다. 보였다 고 하는 즐거움 밖에는 그에게 상급으로 누릴 수 있는 것 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인간이 하는 행위가 얼마나 어린 아이이며 우스꽝스러운가. 무엇인가 보인 것 같다고 여기면 희(喜) 요, 그렇지 않으면 비 (悲) 이니, 잘못 보였으면 다시 잘 보이기 위해 회개하고 또 다시 잘 보이려고 하는 다람쥐 체바 퀴도는 식의 인생들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인생들에게 구원이 필요하지 않으면 누가 필요하겠는가 때문에 구원을 받아야 되며 구원은 그러한 인생들에게 복된 소식인 것이다. 구제의 경우를 살펴보자.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 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 (마6:2-4 ) 도대체 구제라는 것이 무엇인가 전통적인 원문(Textus Receptus,)에서는 6장 1절 에 나오는 (너희 義)대신에 (너희의 구제)이 쓰이고 있다. 구제의 사전적 의미는 m erciful,kind,compassion,pity,즉 자비,혹은 긍휼을 베푸는 것이라 말할 수 있겠다.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근본으로해서 나타나는 것이 구제이다. 성경은 특히 인간의 본 질적인 필요와 관련하여 구제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누가복음 12장39절 이하는 이 를 잘 밝혀준다.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 바리새인은 지금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나 너희 속인즉 탐욕과 악동이 가득하도다. 어리석은 자들아 밖을 만드신 이가 속도 만들지 아니하 셨느냐 오직 그 안에 있는 것이 너희에게 깨끗하리라 (눅12:39-41) 여하튼 종교적 행위로서, 자기의 라는 형태로 가장 잘 나타나는 행위가 구제라는 것이다. 때문에 가장 잘 외식 이라는 말하고 어울릴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구제를 하고 나팔을 분다는 것은 사람들에게 이미 그것은 하나님의 의가 아니고 자기 의라는 것을 시인하는 것이다. 나팔이라는 것은 전쟁터에서 사용하는 악기로서 어떤 사실을 전달하고 알리기 위해서 사용된다. 구제할 때에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은 자 신을 알아달라는 주문이요, 영광을 얻겠다는 것 밖에는 없다. 또 그렇게 해서 영광을 얻고 누린다. 그것이 그의 상급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의 말씀이다.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 어떻게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한다는 말인가 그것이 도대체 가능한 것 인가 또한 왜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알 수 밖에 없으며, 그것을 어떻게 벗어나서 정 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할 수 있을까 그것의 비결은 무엇인가 그러나 그것은 비결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하면 오른손이 하는것을 왼손이 모 르게 하려고 한다면 이미 그 때는 왼손이 알고 있는 때인지라 속수무책이 되는 것이다. 어떻게 하여야 왼손이 모르게 구제를 할 수 있는 것인가 원문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너의 구제가 은밀함중에 있도록(가정법과 함께 목적이나 계획을 나타내는 접속사)너는 구제할 때에 너의 오른손이 하는 것을 너의 왼손이 모르게 하라(간접 명령). 그리하면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네게 갚으시리라(스테판 사본에는 자신을 드러내주심으로 갚으시리라). 왼손이 몰라야 구제가 은밀함 중에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할 때에만 갚으심으로 그 자신을 드러내 주신다는 말이디도 하다. 그분은 감추어진 보화이시다. 마가복음 4:22에는 드러내려 하지않고는 숨긴 것이 없고 나타내려하지 않고는 감추인 것이 없느니라. 라고 말씀하신다. 이러한 갚으심이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할 때 주어지는 은총이요 축복이다. 도대체 어떠하길래 그러한가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알고 있다는 것은 이미 그 자신이 하고 있는 행위에 대해 서 의식하고 있음을 말함이다. 의식하고 있다함은 벌써 의식하게 되는 상대가 있다는 말이다. 반대급부심리가 작용하기 때문에 의식(意識)이 버젓하게 남아 있는 것이다 . 다시 말하면 율법 아래에 있는 동안은 그것을 벗어날 수가없는 운명에 놓여 있는 것 이 특징이다. 여기서 의식이라함은 율법적 의식(意識)을 말한다. 무엇을 해야 된다고 하는 율법적 기준이 작용하고 있는한은 분명하고도 석연하게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 손이 알고 있다. 또한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알지 못한다면 할 수도 없다. 왼손 이 알아야만 살맛이 나서 할 수 있는 것이다. 율법의 특징은 무엇을 했다,또는 하지 못했다는 것이 그것의 특징이기 때문에 했다는 것도 하지 못했다는 것도 생생하게 기억되는 것이다. 했을 때 신나는 기억으로, 하지 못했을 때는 우울하고 죄송스러운 기억으로 남아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려고 노력할 문제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한 율법으로부터 탈피하고 구원받지 못하면 불가능한 일이다. 여기서 오해해서는 안 될 것이 있으니 구제할 때 무의식 중에 해야 된다는 말은 더더 욱 아니다. 다만 자신의 삶이 구제의 삶으로 살아진 것 뿐이요, 그것이 보이기 위함 도 아니요, 해야되기 때문에 하는 것도 아니요, 다만 그렇게 한 것 뿐이요 살아진 것 뿐이라는 말이다. 그러한 구제의 삶을 살 때 무의식중에 해야 한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무슨 몽유병환자라는 말인가 무의식 중에 하게, 오히려 더 自己認識이 명확한 삶을 산다. 행위에 대한 어떤 기억이 살아서 자신을 지배하지 않는다는 것이 특징일 뿐이다. 다만 그의 삶이 율법적 의식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래서 무엇을 했다라는 자긍이라든지 하지 못했다는 자책의 의식이 전혀 없는 것이다 . 그러한 의식의 기억으로 전혀 남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태복음 25장 31절 이하의 기사는 두 가지의 경우에 대해 잘 말해준다.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 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 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 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 궤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하리니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 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이와는 아주 대조가 되는 계속되는 기사를 보자.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 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들어가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 니하였고. 저희도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이나 목 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치 아니하더이까.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 이 본문에 나오는 대목 중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하였으 晝떳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하리니 와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이 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치 아니하더이까 의 두개의 대조되는 사건은 오늘 본문 이해에도 매 우 적절한 비유가 되고 있다. 왜 이러한 차이가 나는 것인가 어떤이는 어떻게 하길래 도무지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는, 즉 무엇인가 했 다는 의식이 자리하지 않고 있는가 그와는 반대로 언제 우리가 하지 않았습니까 라는 부류는 도대체 왜 그러할 수 밖에 없겠는가 그것은 앞서도 말하였거니와 도 대체 아직도 율법 아래에 있느냐 아니면 율법으로부터 벗어난 그 어떤 곳에 있느냐 하는 문제이다. 율법은 기억이다. 율법은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안다. 아무리 모르게 하려고 해도 그러면 그럴수록 더 생생하게 왼손이 잘 안다. 철저하면 철저할 수록 더 철저한 외식(外飾) 밖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것을 일컬어 성경은 자기 義 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삶을 살 수 있는 이들은 자신이 살 아있지 않은 자들이요 은밀한 가운데 계신 감추인 보화와 더불어 사는 이들이다. 바 로 그로 더불어 사는 삶이 하나님의 義 가 주장하는 삶이다. 그것은 어떻게 살아 보겠다는 삶이 아니요 사과나무가 사과나무로 살 수 밖에 없듯 그렇게 사는 삶을 말 한다. 사과나무는 결코 장미꽃을 피울수 없다. 김창호 씀 여러분의 평안을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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