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의 몸은 어떠한 것인가 (눅24:28-43)
본문
그리스도인들은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하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요11:25-26). 그리고 그분께서 친히 죽음에서 부활하심으로 그분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입증하셨고(롬1:4) 그분의 주장이 사실임을 입증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궁금한 것은 부활의 사실 여부가 아니라 부활하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입니다. 다행히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요한일서 3장 2절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요일3:2) 예수님께서는 부활의 몸으로 승천하셨고 부활의 몸으로 다시 오실 것입니다(행1:11).
그런데 그때 우리 그리스도인이 “그분과 같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부활 이후의 예수님의 지상 행적에서 그분의 몸이 어떠했는지 알아낼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우리가 입게 될 부활의 몸이 되는 것입니다. 본문은 이에 대한 단서를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첫째, 부활의 몸은 죽음 이전의 몸의 발전적인 형태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에게는 분명한 신체적인 변화가 있었습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가 처음에 그분을 보고도 알아보지 못했던 것은 근심과 불안과 선입견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그분의 외모에 무엇인가 현저한 변화가 있었기 때문인 듯합니다. 막달라 마리아도 처음에는 그분을 동산지기로 오해했었다는 사실(요20:15)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그러나 결국은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어딘지 다르면서도 다른 사람이라고 할 수 없는 신체적, 인격적 특성이 있었다고 설명하는 것이 결코 지나친 주장은 아닐 것입니다. 예수님은 부활 전에나 부활 후에나 동일한 인격이었습니다. 우리가 장차 입게 될 부활의 몸은 죽음 이전의 몸과 완전히 단절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이전 몸의 상태와 똑같은 것도 아니고 발전된 상태의 것입니다. 혹시 상대적으로 신체의 균형이 잡히지 않고 외모가 아름답지 않다고 여기는 사람들은 이 땅에서도 외모로 인해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는데 천국에서도 스트레스를 받을까 걱정할지 모르겠습니다. 부활의 몸에 연속성이 있다는 사실을 비관적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개인적으로 믿기는 부활의 몸은 각 사람의 특성이 외모에서도 나타나면서도 결코 다른 사람에 비해서 열등감을 갖지 않아도 되는 상태일 것이라는 점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외모는 별 볼 일 없었습니다. 영화나 만화에서 그려지는 예수님은 성경적인 묘사와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메시야에 대한 이사야서 예언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들에게 싫어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사53:2-3) “이왕에는 그 얼굴이 타인보다 상하였고 그 모양이 인생보다 상하였으므로 무리가 그를 보고 놀랐거니와”(사52:14) 우리가 가지고 있는 유전적인 지식으로 판단하건대 예수님께서 이러하셨다면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도 외모가 아름다운 여인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헐리우드 영화의 주인공 같은 외모를 가진 사람의 모습으로 오시지 않았습니다. 외모를 중시하는 사회에 얼마나 도전이 되는 말씀입니까 이것은 외모를 보시지 않고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의 관점과 일치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 이후 그분의 변화된 모습은 가히 놀랄 만한 것이었습니다. 영광스러운 것이었습니다. 사도 요한이 밧모 섬에서 본 예수님의 모습이 요한계시록 1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얼굴은 해가 힘 있게 비취는 것 같더라”(계1:16) 변화산 위에서의 그분의 모습이 그러했습니다. 사도 바울도 외모가 형편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둘째, 부활의 몸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할 수 있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어느 순간에 엠마오로 가고 있는 두 제자에게 나타나셨고(15절), 순식간에 그들 앞에서 사라지셨습니다(31절). 그뿐이 아닙니다. 그 날 저녁시간에 제자들은 유대인을 두려워하여 모인 장소의 문들을 모두 닫았었습니다(요20:19).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께서는 그들 가운데 나타나실 수 있었습니다(36절). 제자들이 문 두드리는 소리를 들은 것도 아니고 누가 인기척을 느끼고 나가서 문을 열어 준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분께서 건물 벽체를 통과하신 것이라고 이해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의 특성이었습니다. 죽음 이전에는 결코 그렇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부활의 몸을 입을 때 더 이상 우리 몸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게 될 것입니다. 순식간에 여기 저기 오갈 수 있으며 만화에서나 보던 “공간이동”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시간을 초월하게 됨으로 일단 부활의 몸을 입은 이상 신체의 변화는 더 이상 이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승천 때 놀라서 하늘을 쳐다 보는 제자들에게 천사가 나타나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고 말했습니다(행1:11). “너희가 본 그대로”라는 말에는 여러 의미가 있겠지만 2천 년이 지나도 몸의 변화가 없을 것이라는 의미도 포함될 것입니다.
셋째, 부활의 몸은 살과 뼈가 있는 가시적인 실체입니다. 예수님의 갑작스런 출현에 제자들은 크게 놀랐고 무서워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안심시키기 위하여 자신의 손과 발을 만져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덧붙여 설명하시기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고 하셨습니다(39절). 또한 그 말씀을 입증하시기 위하여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받아 그들 앞에서 잡수시기까지 하셨습니다. 에베소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예수님께서는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계2:7). 부활의 몸은 허상이 아니라 만질 수 있고 먹을 수 있는 실체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42-44절은 부활의 몸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습니다.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의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 부활은 애벌레가 나비로 탈바꿈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늘을 날기 위해서 애벌레에게는 신체의 큰 변화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천국에서 살기 위해서는 신령한 몸으로 변화되어야만 합니다. 그것이 부활의 몸입니다. 그 영광스러운 몸을 입게 될 때를 기다리며 예수님의 재림을 사모해야 합니다. 썩은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산다.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산다.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산다.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산다(고전15:35,42-44). 부활의 몸에 대한 관심. 요즘 유전자 복제양이 태어남으로 인간복제가 윤리적인 문제를 야기시키고 있다. 일부 과학자들은 인간복제에 대한 연구를 계속하겠다고 하고 미국 대통령은 강력히 저지하겠다고 선언했다. 도대체 왜 이런 마찰이 빚어지는지 잘 알아야 한다. 각종 사고로 인하여 눈이나 간이나 신장, 심장까지 장기이식하는 수술이 늘고 있다. 이식수술이 필요한 사람들이 많이 있지만 장기를 구할 길이 없어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은 것이다. 아무 것이나 선택할 수도 없다. 체내 거부반응이 없는 것을 골라야 하는 것이다. 가장 좋은 것이 자기 피부이식이다. 엉덩이 살을 떼어내서 상처부위에 덮어씌우기도 하고 뼈를 깍아내어서 코뼈를 세우기도 하고 손가락 뼈로 대체하기도 하고 한다.
그런데 복제인간이 만들어질 수 있다면 필요한 장기를 언제든지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복제인간이 가능해진다고 할 때 그도 인간이고 영혼을 가질 것이며 사고할 것이다.
그렇다면 복제인간이 양산될 경우 복제인간이 원인간의 장기를 요구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인간 존엄성이 짓밟히는 것이다. 이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좋은 것이 부활의 몸을 가지는 것이다.
그런데 그때 우리 그리스도인이 “그분과 같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부활 이후의 예수님의 지상 행적에서 그분의 몸이 어떠했는지 알아낼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우리가 입게 될 부활의 몸이 되는 것입니다. 본문은 이에 대한 단서를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첫째, 부활의 몸은 죽음 이전의 몸의 발전적인 형태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에게는 분명한 신체적인 변화가 있었습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가 처음에 그분을 보고도 알아보지 못했던 것은 근심과 불안과 선입견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그분의 외모에 무엇인가 현저한 변화가 있었기 때문인 듯합니다. 막달라 마리아도 처음에는 그분을 동산지기로 오해했었다는 사실(요20:15)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그러나 결국은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어딘지 다르면서도 다른 사람이라고 할 수 없는 신체적, 인격적 특성이 있었다고 설명하는 것이 결코 지나친 주장은 아닐 것입니다. 예수님은 부활 전에나 부활 후에나 동일한 인격이었습니다. 우리가 장차 입게 될 부활의 몸은 죽음 이전의 몸과 완전히 단절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이전 몸의 상태와 똑같은 것도 아니고 발전된 상태의 것입니다. 혹시 상대적으로 신체의 균형이 잡히지 않고 외모가 아름답지 않다고 여기는 사람들은 이 땅에서도 외모로 인해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는데 천국에서도 스트레스를 받을까 걱정할지 모르겠습니다. 부활의 몸에 연속성이 있다는 사실을 비관적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개인적으로 믿기는 부활의 몸은 각 사람의 특성이 외모에서도 나타나면서도 결코 다른 사람에 비해서 열등감을 갖지 않아도 되는 상태일 것이라는 점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외모는 별 볼 일 없었습니다. 영화나 만화에서 그려지는 예수님은 성경적인 묘사와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메시야에 대한 이사야서 예언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들에게 싫어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사53:2-3) “이왕에는 그 얼굴이 타인보다 상하였고 그 모양이 인생보다 상하였으므로 무리가 그를 보고 놀랐거니와”(사52:14) 우리가 가지고 있는 유전적인 지식으로 판단하건대 예수님께서 이러하셨다면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도 외모가 아름다운 여인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헐리우드 영화의 주인공 같은 외모를 가진 사람의 모습으로 오시지 않았습니다. 외모를 중시하는 사회에 얼마나 도전이 되는 말씀입니까 이것은 외모를 보시지 않고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의 관점과 일치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 이후 그분의 변화된 모습은 가히 놀랄 만한 것이었습니다. 영광스러운 것이었습니다. 사도 요한이 밧모 섬에서 본 예수님의 모습이 요한계시록 1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얼굴은 해가 힘 있게 비취는 것 같더라”(계1:16) 변화산 위에서의 그분의 모습이 그러했습니다. 사도 바울도 외모가 형편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둘째, 부활의 몸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할 수 있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어느 순간에 엠마오로 가고 있는 두 제자에게 나타나셨고(15절), 순식간에 그들 앞에서 사라지셨습니다(31절). 그뿐이 아닙니다. 그 날 저녁시간에 제자들은 유대인을 두려워하여 모인 장소의 문들을 모두 닫았었습니다(요20:19).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께서는 그들 가운데 나타나실 수 있었습니다(36절). 제자들이 문 두드리는 소리를 들은 것도 아니고 누가 인기척을 느끼고 나가서 문을 열어 준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분께서 건물 벽체를 통과하신 것이라고 이해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의 특성이었습니다. 죽음 이전에는 결코 그렇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부활의 몸을 입을 때 더 이상 우리 몸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게 될 것입니다. 순식간에 여기 저기 오갈 수 있으며 만화에서나 보던 “공간이동”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시간을 초월하게 됨으로 일단 부활의 몸을 입은 이상 신체의 변화는 더 이상 이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승천 때 놀라서 하늘을 쳐다 보는 제자들에게 천사가 나타나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고 말했습니다(행1:11). “너희가 본 그대로”라는 말에는 여러 의미가 있겠지만 2천 년이 지나도 몸의 변화가 없을 것이라는 의미도 포함될 것입니다.
셋째, 부활의 몸은 살과 뼈가 있는 가시적인 실체입니다. 예수님의 갑작스런 출현에 제자들은 크게 놀랐고 무서워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안심시키기 위하여 자신의 손과 발을 만져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덧붙여 설명하시기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고 하셨습니다(39절). 또한 그 말씀을 입증하시기 위하여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받아 그들 앞에서 잡수시기까지 하셨습니다. 에베소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예수님께서는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계2:7). 부활의 몸은 허상이 아니라 만질 수 있고 먹을 수 있는 실체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42-44절은 부활의 몸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습니다.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의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 부활은 애벌레가 나비로 탈바꿈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늘을 날기 위해서 애벌레에게는 신체의 큰 변화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천국에서 살기 위해서는 신령한 몸으로 변화되어야만 합니다. 그것이 부활의 몸입니다. 그 영광스러운 몸을 입게 될 때를 기다리며 예수님의 재림을 사모해야 합니다. 썩은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산다.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산다.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산다.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산다(고전15:35,42-44). 부활의 몸에 대한 관심. 요즘 유전자 복제양이 태어남으로 인간복제가 윤리적인 문제를 야기시키고 있다. 일부 과학자들은 인간복제에 대한 연구를 계속하겠다고 하고 미국 대통령은 강력히 저지하겠다고 선언했다. 도대체 왜 이런 마찰이 빚어지는지 잘 알아야 한다. 각종 사고로 인하여 눈이나 간이나 신장, 심장까지 장기이식하는 수술이 늘고 있다. 이식수술이 필요한 사람들이 많이 있지만 장기를 구할 길이 없어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은 것이다. 아무 것이나 선택할 수도 없다. 체내 거부반응이 없는 것을 골라야 하는 것이다. 가장 좋은 것이 자기 피부이식이다. 엉덩이 살을 떼어내서 상처부위에 덮어씌우기도 하고 뼈를 깍아내어서 코뼈를 세우기도 하고 손가락 뼈로 대체하기도 하고 한다.
그런데 복제인간이 만들어질 수 있다면 필요한 장기를 언제든지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복제인간이 가능해진다고 할 때 그도 인간이고 영혼을 가질 것이며 사고할 것이다.
그렇다면 복제인간이 양산될 경우 복제인간이 원인간의 장기를 요구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인간 존엄성이 짓밟히는 것이다. 이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좋은 것이 부활의 몸을 가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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