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일의 신앙 (눅24:1-10)
본문
기독교는 독특한 신앙 체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부활의 신앙입니다. 세상에는 종교가 수도 없이 많이 있지만 부활을 말하는 종교는 단 하나도 없습니다. 요즘 불교가 산에서 도심으로 내려와서 기독교를 여러 가지 면에서 모방해 가고 있습니다. 찬불가도 만들어 부르고, 심방도 하고, 불교 어린이 핚교도 개설하고, 수련회도 갖고, 요즘에는 주일마다 정기 예불도 드리고 있습니다. 불교가 아무리 기독교의 것을 모방한다고 하여도 한 가지만은 모방할 수가 없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부활입니다. 불교에는 부활이 있을 수 없습니다. 기독교가 이 땅에 탄생하게 된 것은 부활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입니다. 부활이 없으면 기독교도 있을 수 없고 그리스도도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그리스도인들이 신앙 생활을 하는 것을 보면 여기에서 많이 벗어났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개중에는 부활하신 주님을 믿는 것이 아니고 죽은 예수를 찾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여인들이 그랬습니다. 방부제를 들고 아침 무덤을 찾아간 이 여인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셨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하고 날이 밝기를 기다려 무덤을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가 보았더니 예수님은 부활하시고 무덤은 텅 비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제서야 제 3일에 살아나리라고 하신 말씀을 믿을 수가 있었습니다. 오늘 많은 신앙인들이 이 모양입니다. 부활의 예수를 찾는 것이 아니고 인간 예수를 찾고 있습니다. 그래서 공자의 무덤도 있고 석가의 무덤도 있는데 왜 예수의 무덤은 없느냐고 묻습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이들은 부활의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고 부자 예수를 믿으려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예수만 믿으면 곧 바로 복을 받아서 부자가 되는 줄로 아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예수만 믿으면 부자가 되고 형통하는 줄로 압니다. 그래서 소유가 많아지고 건강해지고 잘 되면 다 축복이고 은혜라고 쉽게 믿어 버립니다. 그래서 예수 알기를 부자 예수로 해결사 예수로 알고 있습니다. 정말 그렇습니까 가난하고, 병들고, 대학에 낙방하고, 머리가 나쁘고 한 것이 모두 복을 받지 못해서 그렇습니까 그것은 모두 잘못된 생각입니다. 오늘 우리는 너무나 현세적이고 현실 중심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너무 결과주의고 모두 성급한 성공 위주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여러분, 죄를 짓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우둔한 사람들은 죄를 짓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둔한 사람들 중에는 진실하고 충성스러운 사람들이 많습니다. 오히려 우둔한 사람들은 더 선량한 사람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죄를 짓는 사람들을 보면 거의 다 비상한 머리를 가진 사람들이 많습니다. 몇 년 전에 전국 성경 암송 대회에서 일등을 한 사람이 영등포 교도소에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이것은 우리들에게 많은 것을 시사해 주는 이야기입니다. 이를테면 머리가 명석하고 좋다고 해서 다 복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또 병든 사람도 죄를 짓지 않습니다. 병든 사람은 죄를 짓고 싶어도 지을 수가 없습니다. 죄는 모두 건강한 사람들이 짓습니다.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도 죄를 짓지 않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탈선을 하고 싶어도 기회가 없고 여유도 없습니다. 오직 살아가는 데 열중할 뿐입니다. 그러면 누가 죄를 짓습니까 모두가 가진 자, 배부른 자, 건강한 자들이 죄를 짓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들이 신앙 생활을 하면서 형통 형통하지만 그것이 모두 복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이들은 부활의 예수를 찾지 않고 의사 예수를 찾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서 변화를 받고, 새생명을 얻고, 구원을 얻으려는 것이 아니고, 병을 고치려고 예수를 찾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병을 잘 고친다고 소문난 목사에게 몰려가고, 병을 잘 고친다는 기도원으로 몰려갑니다.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려고 가는 것이 아니고 의사 예수를 만나려고 가는 것입니다. 병을 고치려는 목적이 우선하다 보니 신앙은 본질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같은 예수를 찾으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부활하신 예수를 찾아가야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러 가야 합니다. 그 때 비로소 그에게 새 삶이 주어지고, 새 인생이 시작되고, 새 믿음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새 출발이 시작되고, 변화된 삶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 같은 부활의 예수를 믿고, 만나게 되면, 우리에게 주어지는 선물이 있습니다.
첫째는 우리에게서 불안이 없어집니다. 오늘 사람들은 불안에 싸여 살아가고 있습니다. 불안 중에서도 질병에 대한 불안이 가장 큽니다. 오늘은 무서운 질병들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암도 종류가 대단히 많습니다. 암의 발병률도 대단히 높습니다. 언제 그 같은 암이 내게도 찾아올지 모릅니다. 그래서 모두 질병 때문에 불안해 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죽음에 대한 불안도 큽니다. 중병 환자들에게 가장 큰 고독은 죽음에 대한 불안입니다. 그래서 어떤 환자는 자신이 암이라는 병에 걸렸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 지례 죽는 경우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불안이 크기 때문입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이라는 책에 나오는 주인공 라시콜리니코프는 자신에게 죽음이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압니다. 두렵고 초조하고 불안합니다. 나중에는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옆에 있는 애인에게 요한복음 11장을 읽어 달라고 합니다. 죽음을 눈 앞에 두고 보니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나사로가 다시 살아나는 이야기를 기록해 놓은 요한복음 11장을 읽어 달라고 한 것입니다. 예수의 부활은 우리들에게서 이 같은 불안과 두려움을 일거에 없애 주었습니다. 예수의 부활의 신앙만 내 속에 확립되어 있으면 죽음조차도 두려운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 사후 얼마나 두려워 하엿고 불안해 하였습니까 다락방에 모여 앉아 문을 걸어 잠그고 숨을 죽이고 있었습니다. 나중에는 그것도 여의치 않아서 제자들은 야음을 틈타 시골로 피신을 갑니다. 그러다가 그들이 예수의 부활 소식을 듣습니다. 그 순간 그들은 해 힘을 얻습니다. 용기와 격려를 받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만나게 됩니다. 몸소 직접 체험을 한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제자들은 비로소 부활의 예수를 나가서 전하기 시작합니다. 수천명이 모인 사람들 앞에서 예수를 전하는 전도자로 변화를 받습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그렇게 두려워하며 숨어 있었던 제자들이 오늘은 그렇게 달라진 모습입니다. 얼마나 위대한 변화입니까 부활의 예수는 이렇게 그들로 하여금 두려움을 없애 주었습니다.
둘째는 슬픔을 없애 줍니다. 예수님 사후 많은 사람들이 슬퍼했습니다. 엠마오의 두 제자는 슬퍼하면서 낙향하였습니다. 베드로 요한 형제도 시름에 젖어 고향으로 내려갔습니다. 당시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 숨어서 낙심하였고 슬퍼하였습니다.
그런데 죽으셨던 주님이 부활하셨습니다. 그 순간 모든 이들에게서 슬픔과 탄식이 사라졌습니다.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슬픈 마음, 어두운 마음, 낙심되었던 마음들이 순식간에 환희와 기쁨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부활은 이 세상 방방곡곡 어두운 곳에까지 기쁨과 소망을 준 것입니다. 사실 우리들이 세상을 살아가다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죽는 모습을 보면 그보다 더 큰 슬픔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부모와 형제가 죽으면 슬퍼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죽은 부모나 형제가 부활을 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기쁜 일이겠습니까 그래서 기독교는 소망의 종교인 것입니다. 기쁨의 종교입니다. 그리고 부활의 종교인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가 주는 축복입니다. 얼마 전 뉴스위크지에 실린 기사가 눈에 띄었습니다. 오늘의 미국인들 중에 94%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을 하였습니다. 그중 77%가 천국을 믿는다고 고백을 하였습니다. 또 그 가운데 4명 중 3명이 “나는 이 다음에 천국에 갈 것을 믿는다.”고 고백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이 다음 죽은 후에 천국에 가서 부모를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고백을 하였다고 합니다. 이 얼마나 위대한 믿음의 자산입니까 이런 사람들에게는 이 세상에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그것이 혹시 죽음일지라도 말입니다.
왜냐하면 부활의 신앙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이렇게 우리들에게서 슬픔을 제거하여 줍니다.
셋째는 실망도 제거해 줍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구세주로, 해방자로 믿었습니다. 억압하는 로마로부터 민족을 구원하여 줄 만한 해방자로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믿고 희망을 걸고 있던 예수가 힘없이 죽고 말았습니다. 그때 사람들의 실망은 대단히 컸을 것입니다. 무력하게 죽어가는 예수의 모습에서 분노마저 느꼈을 것입니다. 3년 동안이나 병을 고치시고, 먹이시고, 가르치시고, 기적을 베풀던 결과가 고작 이것이란 말인가, 그렇게 죽어가는 무력한 예수를 보면서 사람들은 “과연 불의의 힘이 선의 힘보다 더 크구나”하고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이 세상을 보면 불의의 힘이 선의 힘보다 더 강하게 보일 때가 많습니다. 악한 사람이 더 잘살고, 더 형통하고, 강도는 석방되고, 예수는 죽고, 그래서 어떤 때는 불의가 이기는 것같이 보일 때가 있습니다. 이것이 이 세상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끝내 예수님은 살아나셨습니다. 불의의 힘을 이기고 부활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은 결코 정의는 죽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준 본보기입니다. 아무리 긁어 덮고, 억압하고, 돌을 굴려 문을 틀어 막아도, 정의는 반드시 이긴다는 사실을 예수님은 부활로써 입증해 보이셨습니다. 얼마나 위대한 일입니까 이것이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넷째는 의심도 제거해 줍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많은 사람들에게 신앙적으로 확신을 준 사건입니다. 제자들조차도 주님으로부터 3년 동안이나 가르침도 받고 훈련도 받았지만 신앙이 분명치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동생들조차도 생전에 예수를 믿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부활하신 예수를 보고서야 참신앙인들이 되었습니다. 베드로가 참베드로가 된 것도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나서부터입니다. 엠마오의 두 제자도, 다메섹을 걷던 사울도,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고 나서야 비로소 변화를 받았습니다. 부활의 주님은 이렇게 모든 사람들의 가슴 속에서 의심을 제거해 주십니다. 괴테의 파우스트를 보면 파우스트가 인생의 의미를 모르고 살아 갑니다. 나중에는 허무에 빠져서 자살을 하려고 합니다. 그때 교회에서 합창 소리가 들려옵니다. “사셨네 사셨네 예수 다시 사셨네.” 합창 소리를 듣는 순간 그는 눈이 뜨였습니다. 그 순간 그는 내면으로부터 이상한 힘이 솟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때 비로소 그는 인생의 깊은 뜻을 발견하게 됩니다. 부활의 예수가 없다고 하면 우리 인류의 문명은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인류의 문명은 고사하고 오늘 우리의 처지는 어떤 모습이겠습니까 생각을 하면 할수록 주님의 부활이 그렇게도 소중할 수가 없습니다. 오늘 다시 사신 그리스도께서 여러분들에게 찾아오셔서 큰 믿음을 주시기를 기원합니다.
그런데 오늘, 그리스도인들이 신앙 생활을 하는 것을 보면 여기에서 많이 벗어났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개중에는 부활하신 주님을 믿는 것이 아니고 죽은 예수를 찾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여인들이 그랬습니다. 방부제를 들고 아침 무덤을 찾아간 이 여인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셨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하고 날이 밝기를 기다려 무덤을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가 보았더니 예수님은 부활하시고 무덤은 텅 비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제서야 제 3일에 살아나리라고 하신 말씀을 믿을 수가 있었습니다. 오늘 많은 신앙인들이 이 모양입니다. 부활의 예수를 찾는 것이 아니고 인간 예수를 찾고 있습니다. 그래서 공자의 무덤도 있고 석가의 무덤도 있는데 왜 예수의 무덤은 없느냐고 묻습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이들은 부활의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고 부자 예수를 믿으려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예수만 믿으면 곧 바로 복을 받아서 부자가 되는 줄로 아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예수만 믿으면 부자가 되고 형통하는 줄로 압니다. 그래서 소유가 많아지고 건강해지고 잘 되면 다 축복이고 은혜라고 쉽게 믿어 버립니다. 그래서 예수 알기를 부자 예수로 해결사 예수로 알고 있습니다. 정말 그렇습니까 가난하고, 병들고, 대학에 낙방하고, 머리가 나쁘고 한 것이 모두 복을 받지 못해서 그렇습니까 그것은 모두 잘못된 생각입니다. 오늘 우리는 너무나 현세적이고 현실 중심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너무 결과주의고 모두 성급한 성공 위주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여러분, 죄를 짓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우둔한 사람들은 죄를 짓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둔한 사람들 중에는 진실하고 충성스러운 사람들이 많습니다. 오히려 우둔한 사람들은 더 선량한 사람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죄를 짓는 사람들을 보면 거의 다 비상한 머리를 가진 사람들이 많습니다. 몇 년 전에 전국 성경 암송 대회에서 일등을 한 사람이 영등포 교도소에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이것은 우리들에게 많은 것을 시사해 주는 이야기입니다. 이를테면 머리가 명석하고 좋다고 해서 다 복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또 병든 사람도 죄를 짓지 않습니다. 병든 사람은 죄를 짓고 싶어도 지을 수가 없습니다. 죄는 모두 건강한 사람들이 짓습니다.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도 죄를 짓지 않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탈선을 하고 싶어도 기회가 없고 여유도 없습니다. 오직 살아가는 데 열중할 뿐입니다. 그러면 누가 죄를 짓습니까 모두가 가진 자, 배부른 자, 건강한 자들이 죄를 짓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들이 신앙 생활을 하면서 형통 형통하지만 그것이 모두 복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이들은 부활의 예수를 찾지 않고 의사 예수를 찾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서 변화를 받고, 새생명을 얻고, 구원을 얻으려는 것이 아니고, 병을 고치려고 예수를 찾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병을 잘 고친다고 소문난 목사에게 몰려가고, 병을 잘 고친다는 기도원으로 몰려갑니다.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려고 가는 것이 아니고 의사 예수를 만나려고 가는 것입니다. 병을 고치려는 목적이 우선하다 보니 신앙은 본질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같은 예수를 찾으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부활하신 예수를 찾아가야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러 가야 합니다. 그 때 비로소 그에게 새 삶이 주어지고, 새 인생이 시작되고, 새 믿음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새 출발이 시작되고, 변화된 삶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 같은 부활의 예수를 믿고, 만나게 되면, 우리에게 주어지는 선물이 있습니다.
첫째는 우리에게서 불안이 없어집니다. 오늘 사람들은 불안에 싸여 살아가고 있습니다. 불안 중에서도 질병에 대한 불안이 가장 큽니다. 오늘은 무서운 질병들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암도 종류가 대단히 많습니다. 암의 발병률도 대단히 높습니다. 언제 그 같은 암이 내게도 찾아올지 모릅니다. 그래서 모두 질병 때문에 불안해 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죽음에 대한 불안도 큽니다. 중병 환자들에게 가장 큰 고독은 죽음에 대한 불안입니다. 그래서 어떤 환자는 자신이 암이라는 병에 걸렸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 지례 죽는 경우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불안이 크기 때문입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이라는 책에 나오는 주인공 라시콜리니코프는 자신에게 죽음이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압니다. 두렵고 초조하고 불안합니다. 나중에는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옆에 있는 애인에게 요한복음 11장을 읽어 달라고 합니다. 죽음을 눈 앞에 두고 보니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나사로가 다시 살아나는 이야기를 기록해 놓은 요한복음 11장을 읽어 달라고 한 것입니다. 예수의 부활은 우리들에게서 이 같은 불안과 두려움을 일거에 없애 주었습니다. 예수의 부활의 신앙만 내 속에 확립되어 있으면 죽음조차도 두려운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 사후 얼마나 두려워 하엿고 불안해 하였습니까 다락방에 모여 앉아 문을 걸어 잠그고 숨을 죽이고 있었습니다. 나중에는 그것도 여의치 않아서 제자들은 야음을 틈타 시골로 피신을 갑니다. 그러다가 그들이 예수의 부활 소식을 듣습니다. 그 순간 그들은 해 힘을 얻습니다. 용기와 격려를 받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만나게 됩니다. 몸소 직접 체험을 한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제자들은 비로소 부활의 예수를 나가서 전하기 시작합니다. 수천명이 모인 사람들 앞에서 예수를 전하는 전도자로 변화를 받습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그렇게 두려워하며 숨어 있었던 제자들이 오늘은 그렇게 달라진 모습입니다. 얼마나 위대한 변화입니까 부활의 예수는 이렇게 그들로 하여금 두려움을 없애 주었습니다.
둘째는 슬픔을 없애 줍니다. 예수님 사후 많은 사람들이 슬퍼했습니다. 엠마오의 두 제자는 슬퍼하면서 낙향하였습니다. 베드로 요한 형제도 시름에 젖어 고향으로 내려갔습니다. 당시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 숨어서 낙심하였고 슬퍼하였습니다.
그런데 죽으셨던 주님이 부활하셨습니다. 그 순간 모든 이들에게서 슬픔과 탄식이 사라졌습니다.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슬픈 마음, 어두운 마음, 낙심되었던 마음들이 순식간에 환희와 기쁨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부활은 이 세상 방방곡곡 어두운 곳에까지 기쁨과 소망을 준 것입니다. 사실 우리들이 세상을 살아가다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죽는 모습을 보면 그보다 더 큰 슬픔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부모와 형제가 죽으면 슬퍼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죽은 부모나 형제가 부활을 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기쁜 일이겠습니까 그래서 기독교는 소망의 종교인 것입니다. 기쁨의 종교입니다. 그리고 부활의 종교인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가 주는 축복입니다. 얼마 전 뉴스위크지에 실린 기사가 눈에 띄었습니다. 오늘의 미국인들 중에 94%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을 하였습니다. 그중 77%가 천국을 믿는다고 고백을 하였습니다. 또 그 가운데 4명 중 3명이 “나는 이 다음에 천국에 갈 것을 믿는다.”고 고백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이 다음 죽은 후에 천국에 가서 부모를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고백을 하였다고 합니다. 이 얼마나 위대한 믿음의 자산입니까 이런 사람들에게는 이 세상에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그것이 혹시 죽음일지라도 말입니다.
왜냐하면 부활의 신앙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이렇게 우리들에게서 슬픔을 제거하여 줍니다.
셋째는 실망도 제거해 줍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구세주로, 해방자로 믿었습니다. 억압하는 로마로부터 민족을 구원하여 줄 만한 해방자로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믿고 희망을 걸고 있던 예수가 힘없이 죽고 말았습니다. 그때 사람들의 실망은 대단히 컸을 것입니다. 무력하게 죽어가는 예수의 모습에서 분노마저 느꼈을 것입니다. 3년 동안이나 병을 고치시고, 먹이시고, 가르치시고, 기적을 베풀던 결과가 고작 이것이란 말인가, 그렇게 죽어가는 무력한 예수를 보면서 사람들은 “과연 불의의 힘이 선의 힘보다 더 크구나”하고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이 세상을 보면 불의의 힘이 선의 힘보다 더 강하게 보일 때가 많습니다. 악한 사람이 더 잘살고, 더 형통하고, 강도는 석방되고, 예수는 죽고, 그래서 어떤 때는 불의가 이기는 것같이 보일 때가 있습니다. 이것이 이 세상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끝내 예수님은 살아나셨습니다. 불의의 힘을 이기고 부활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은 결코 정의는 죽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준 본보기입니다. 아무리 긁어 덮고, 억압하고, 돌을 굴려 문을 틀어 막아도, 정의는 반드시 이긴다는 사실을 예수님은 부활로써 입증해 보이셨습니다. 얼마나 위대한 일입니까 이것이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넷째는 의심도 제거해 줍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많은 사람들에게 신앙적으로 확신을 준 사건입니다. 제자들조차도 주님으로부터 3년 동안이나 가르침도 받고 훈련도 받았지만 신앙이 분명치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동생들조차도 생전에 예수를 믿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부활하신 예수를 보고서야 참신앙인들이 되었습니다. 베드로가 참베드로가 된 것도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나서부터입니다. 엠마오의 두 제자도, 다메섹을 걷던 사울도,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고 나서야 비로소 변화를 받았습니다. 부활의 주님은 이렇게 모든 사람들의 가슴 속에서 의심을 제거해 주십니다. 괴테의 파우스트를 보면 파우스트가 인생의 의미를 모르고 살아 갑니다. 나중에는 허무에 빠져서 자살을 하려고 합니다. 그때 교회에서 합창 소리가 들려옵니다. “사셨네 사셨네 예수 다시 사셨네.” 합창 소리를 듣는 순간 그는 눈이 뜨였습니다. 그 순간 그는 내면으로부터 이상한 힘이 솟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때 비로소 그는 인생의 깊은 뜻을 발견하게 됩니다. 부활의 예수가 없다고 하면 우리 인류의 문명은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인류의 문명은 고사하고 오늘 우리의 처지는 어떤 모습이겠습니까 생각을 하면 할수록 주님의 부활이 그렇게도 소중할 수가 없습니다. 오늘 다시 사신 그리스도께서 여러분들에게 찾아오셔서 큰 믿음을 주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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