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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의 제일 되는 책임 (눅24:1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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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뉴스위크에서 "21세기의 미국'이라는 주제를 커버 스토리로 다룬 적 이 있었습니다. 거기에 보니 21세기는 단순히 한 세기가 바뀐다는 차원을 넘어 새로운 천년대(Millennium)가 도래한다는 의미에서 초유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부터 1천년 전, 첫 번째 천년기(The First Millennium)가 왔을 때 어떤 이들은 축제를 벌이기도 했고 어떤 이들은 기도를 드리기도 했으며, 어떤 이들은 종말이 가까웠다고 교회에 모여 주님을 기다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 천년기(The Second Millennium) 인 2천년 대를 기다리는 현 대인들의 모습은 사뭇 대조적이라고 합니다. 소위 말하는 빅나이트 (1999년 New Year's Eve)를 맞기 위해 전세계의 호텔 방은 이미 예약이 되어 있고, 그날을 축하하기 위한 샴페인 사재기가 벌써 시작되었다고 뉴스위크지는 보도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21세기가 되면 우주항공업의 발달로 달을 왕래하는 여행이 인기 를 끌 것이며 화성 위를 사람들이 걷게 될 것이라고 믿는 사람이 64%나 된다고 합니다. 의학의 발달로 인체의 이식수술 정도가 아니라 피부, 뼈, 인체의 각 기 관, 심지어 노쇠한 뇌까지 재생이 가능해지기에 인간의 수명은 무한대로 길어질 가능성이 크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더 풍요로운 삶과 격렬한 스포츠를 즐기게 될 것이며 소위 팍스 에코노미카(Pax Economica) 시대가 열릴 것이라고 부풀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풍요로운 뒤에 심각한 현상 하나가 경고되고 있습니다. 인정 이 메랄라가고 사랑이 식고 마음의 가책과 감동이 없기에 비인간화의 시대 열릴 것이란 말입니다. (The Christian Herald U.S.A 1998년 4월 19일자 참조 바람) 저는 이 글을 보면서 이런 때일수록 우리 믿는 기독교인들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일까 하는 것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즉 앞으로 닥칠 21세기를 바라보면서, 우리가 2000년을 맞이할 준비를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하는 것을 생각해 보았 습니다. 그러한 생각의 결론에서 아래와 같이 부활의 증인들이 되어야 함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흔히 '인생의 제일 되는 목적이 무엇인가' 라고 하면 요리 문답의 대답을 쉽게 잘 대답하는 신자들이 많습니다. '인생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그를 즐거워함에 있다'고 그렇게 잘 대답합니다. 그렇다 면 '신자(信者)의 제일 되는 책임이 무엇인가' 라고 묻는다면 무엇이라고 대답하 겠습니까
1. 신자의 제일 되는 책임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인 생활입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을 선택하여 3년동안 함께 한 것도 증인되는 책임을 감당케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고 하였고(눅24:48),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님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 하실 것이요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음으로 증거 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요15:26-27) 성령님의 직분이 예수님을 증거 하는 것이라고 했고, 동시에 신자의 직분도 성령과 함께 예수님을 증거 하는 것임을 밝혀 주었습니다. 그래서 "오직 성령님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 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 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하였습니다.(행1:8)
그러므로 사도행전은 바로 사도들이 예수를 증거한 행적의 기록입니다. 사람 이 사는 제일 되는 목적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라면, 신자의 제일 되는 책임은 부활의 예수님을 증거 하는 일입니다. 무슨 일에나 제일 중요한 책임을 망각하고 있다면 그런 사람을 올바른 사람 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가령 아내의 제일 중요한 책임이 무엇이겠습니까 또 남 편의 제일 중요한 책임이 무엇이겠습니까 아내는 아내로서의 책임이 있고, 남편 은 남편으로서의 책임이 있게 마련입니다. 또 회사에서도 사장은 사장의 제일 중 요한 책임이 있고, 직원들은 직원들의 제일 중요한 책임들이 다 있습니다. 만일 이런 중요한 기본적인 책임들을 등한히 하는 경우라면 어떻게 올바른 평가를 받 을 수 있겠습니까 마찬가지입니다. 신자는 신자로서의 제일 되는 책임이 있습니다.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면 모두가 다 헛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 생활에 들어 가 보면 책임을 잘 감당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못한 경우가 있습니다. 모든 역할에는 반드시 책임이 따르는 법입니다. 한 나라에서도 대통령은 대통 령으로서 역할을 잘 감당해야 하고, 장관은 장관으로서의 역할을 잘 감당해야 합니다. 이 말은 바꾸어 말하면 대통령은 대통령의 책임을 잘 감당해야 하고, 장관 은 장관의 책임을 잘 감당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신자의
첫째 되는 책임은 예수를 증거 하는 증인된 전도의 책임을 잘 감당해야 올바른 신자라 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잘 감당하지 못한다면 다른 것 아무리 잘한다고 해도 주님께로부터 칭찬을 들을 수 없을 것입니다. 책임 감당 않는 사람의 기도를 어 떻게 들어 줄 수 있겠습니까 주님의 명령을 순종하지 않는 사람의 요구를 어떻 게 들어주겠는가 입니다. 그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입니다. 우리는 가끔 주님 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도, 주님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사항중 가장 절실한 책임을 감당하지 못하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난 세월 동안 내가 신 앙생활을 하느라고 했지만 주님의 명령인 '내 증인이 되라'는 신자의 제일 중요 한 책임을 얼마나 감당해 보려고 노력하였습니까 사람들은 무책임한 사람과 함께 일하기를 싫어합니다. 무책임한 사람과 함께 사귀려고도 안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무엇 하나 제대 로 되는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남편이 무책임한 남편이라면 어떻게 하 겠습니까 여러분의 아내가 무책임한 아내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주님도 우리를 볼 때 그럴 것입니다. 무책임한 크리스천들, 무책임한 교인들, 무책임한 제직들이라면, 그런 사람을 주님께서 어떻게 보시겠습니까 요즘 우리 나라 전반에 걸쳐 문제는 부끄럼을 모르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아 졌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책임 의식이 없다는 말입니다. 나라가 이렇게 어려운데 도 책임 의식들이 없습니다. 가정을 제대로 이끌지 못하고도 책임 의식이 없습니다. 저는 요즘 영화관에서 상영된다는 타이태닉호에 대한 글을 보면서 더더욱 우리의 사회의 책임 의식이 없는 부끄러움을 느껴 보았습니다. 1912년 4월14일 2천2백명이 타고 있던 영국의 호화 여객선이 짙은 안개 속에 서 빙산과 충돌하여 침몰하게 됩니다. 구명보트의 수용 능력은 1000여명밖에 되 지못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승객의 절반 이상은 가라앉는 배와 함께 운명을 같이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생사의 갈림길에서도 승객들은 모두가 침착하게 구 명정에 올라타기 시작하였습니다. 자기 차례가 오자 다른 사람에게 양보하는 늙 은 신사도 있었습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승객들을 구조하려는 승무원들을 돕겠다 고 구디 배에 남기를 간청한 젊은이들도 있었습니다. 1등객실의 남자 승객에게는 우선적으로 구명보트가 배정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이를 거부한 승객들도 있었습니다. 그 중에는 억만장자인 구겐하임 테프트 대통령의 군사 고문인 아치볼트 배 트, 당시 미국 최고의 부자라던 아스터와, 메이시 백화점의 경영자인 스트라우스 부부 등이 있었습니다. 스타라우스가 아내만을 구명보트에 옮겨 타도록 하자 부 인은 구명보트에 타기를 거부했습니다. '한평생을 당신과 함께 살아왔으니 끝까 지 당신이 가는 곳에 따라 가겠습니다' 라고그리고는 둘은 갑판의 의자에 나란 히 앉아 조용히 죽음 기다렸습니다. 그런 중에 살아남은 일본인 승객이 있었습니다. 42세의 공무원이든 그가 남긴 기록에 의하면 2등객실에서 막 잠이 들려고 하는데 선원이 요란스럽게 문을 두드리면서 구명대를 던지고 갔습니다. 갑판으로 달려가 보았더니 때마침 구명정 하나가 어둠 속에서 물위에 내려지고 있었습니다. 선원들은 여성 여객들을 먼저 태우더니 "자리가 둘 남았으니 두 사람만 타시 오" 라고 소리 질렀습니다. 이 사람은 이 소리를 듣자마자 뛰어 내렸습니다. 두 달후 그는 무사히 일본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그를 맞는 일본 사람들의 눈은 차가웠습니다. 그가 다른 사람을 밀어 제치고 살아남은 것이 아니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결국 직장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물론 그 가족들까지도 어깨를 펴지 못하고 살았다는 기록을 보았습니다. 저는 이런 글을 읽으면서 오늘의 우리 사회를 되돌아보았습니다. 나라를 이렇 게 어지럽게 만들어 놓고도 누가 하나 부끄러움을 모릅니다. 영국의 신사도가 어 디에서부터 출발하였다고 보십니까 뭐니 뭐니 해도 기독교적 말씀에 입각한 가 정 교육이라고 봅니다. 가정에서부터 책임 의식을 길러 준 결과일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교회 행사때 보아도 그런 것 하나도 질서 있게 나누지를 못합니다. 그런 마음속에 심겨진 예수니까 지극히 이기적인 예수꾼들만 길러 냈습니다. 그를 위하여 증거 하자는 말에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습니다. 1년 에 예수 증거 한번도 못하고도 부끄러움조차도 못 느끼고 있습니다. 남은 살아서 돌아왔다는 그것 때문에 평생을 죄책감으로 살았다는데, 우리는 나를 위해 죽으 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렇게 증인되라고 하였지만 그것 하나도 감당목하 면서 그거 예수 믿어 돈이나 많이 벌게 해 달라고만 하고 있으니, 얼마나 부끄러 운 일입니까 예수와 함께 죽기를 각오하면 예수와 함께 다시 살아난다고 했건 만 우리는 서로 밀치며 먼저 배에 오르려고만 하였고, 올라탔으면, 도리어 하나님이 지켜 주어 나는 살아났다고 할 판이 되었으니, 얼마나 부끄러움을 모르는 신자들이 되었습니까 미국의 인류학자인 '루스 베네딕트'는 말하기를 "서양 사람의 행동을 규제하는 것은 죄의식이지만 일본 사람의 경우에는 염치나 부끄러움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한국인의 행동을 규제하는 것은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과거 에는 그래도 체면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요즘에는 그것 마져 어졌습니다. 요즘 저는 목사의 신분이 이렇게까지 농락을 당하고, 꾸정물을 뒤집어쓰는 경우를 처 음 느끼고 있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다시 제자리로 올려놓겠습니까 아무도 그럴 만한 힘이 없습니다. 모두가 흘탕물에서 뒤범벅이 된 세상입니다. 그러니 하나님 의 손에 의지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깨끗게 하는 심판으로만 가능하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심판의 날이 오기 전에 신자의 책임을 다해야 하겠습니다. 예수 믿는다는 사람들이 일년에 한 사람에게도 전도하지 못하고도 부끄러움 을 느끼지 못하고 또한 가책도 느끼지 못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전도의 책임 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풍조가 만연되었다는 점입니다. 그러면서도 집사가 되려고 하고, 그러면서도 권사가 되려고 합니다. 그러면서도 안수 집사가 되려고만 합니다. 그러면서 장로가 되려고 합니다. 투표할 때 보면 가관입니다. 서로 하겠다고 말입니다. 참으로 부끄러움도 체면도 없어진 시대입니다. 오늘의 우리 나라의 큰 문제는 나라의 일도 그렇고, 사회의 모든 일에서 책임을 감당하지 못하면서도 부 끄러움을 모른다는데 있습니다. 신앙인 이 신앙 인으로서의 책임 의식 없이 믿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2. 증거 하지 못하면 빚을 갚지 못한 상태와 같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복음의 빚진 자라고 하였습니다.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 라"(롬1:14). 빚을 젓으면 그 빚을 갚아야 합니다. 빚을 갚지 못하고 있다면 얼마 나 괴로운지 모를 일입니다. 빚을 갚아 버린 후 느끼는 그 기분을 이해할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돈만 빚으로 알고 복음의 빚은 빚으로 생각지 않고 있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누군가에 의해서 구원의 복음을 듣고 구원받은 자들이라면 그 것을 또 다른 사람에게 갚아야 할 빚임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가령 예를 들어 우리가 무슨 병에 걸렸다가 어떤 약을 써서 낳았는데 우리 친구가 그 병에 걸렸다면 우리는 기쁜 마음으로 무슨 약을 써서 병이 낳았다고 전해 주어야 할 것입니다. 만일 아무말도 안해서 그 친구가 죽었다면 그 죽음에 대하여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결코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만일 우리가 듣고 구원받은 복음을 가까운 사람에게 전해 주지 않아서 예수 를 모르고 죽었다면 이후에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그 책임을 벗을 수 있겠습니 까
그러므로 반드시 전해 주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내게 화(禍)가 있을 것 이라고 사도 바울은 말하였습니다.(고전9:16)
그런데 오늘 우리들은 어떤 의식을 가지고 있습니까 참으로 주님 앞에 부끄 러운 일입니다. 내 증인이 되어 달라고 그렇게 부탁했건만, 증인 서기를 기피하 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증인(證人)서려면 우선 귀찮기 때문입니다. 모두 자기일 에 바빠서 귀찮게 믿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요즘 그런 의미에서 귀족계급의 신앙 인 들이 많이 생겨났습니다. 점잖게 나와서 예배만 보고 가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예배는 드리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드리는 예배는 없고, 그냥 보고 듣고만 가는 예배 자들이 점점 많아졌습니다. 이렇게 믿다가 어떻게 주님을 맞이하겠는 지 심히 걱정됩니다. 정말로 내세를 믿는 신앙인 들이라면 '멀리 가서 이방 사람 구원하지 못해도, 네집근처 다니면서 건질 죄인 많도다'라는 찬송처럼 얼마든지 우리 주변에는 아직도 예수 모르고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영 원히 사는 생명의 길을 일러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신자의 제일 되는 책임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말은 쉽지 잘 행동으로 실천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차일피 일 하면서도 마음으로는 원하지만 육신이 약해서 못한다고 할 수 있을 때가 많 습니다.
그러므로 증인이 되려면 내 힘만으로는 불가능합니다.
3. 능력 있는 증거는 성령님의 힘으로만 가능합니다. 전도는 힘이 있어야 합니다.(행1:8) 그 힘을 권능(權能)이라고 하였습니다. 권능이란 원문의 뜻은 '다이너마이트'란 뜻입니다. 즉 폭탄이란 뜻입니다. 폭탄의 위력은 대단합니다. 그 폭파력이란 상상도 못합니다. 바위산도 다이너 마이트로 평지를 만들 수 있습니다. 성령님의 힘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성경에는 여러 곳에서 성령님의 권능을 말하고 있습니다. 특히 이사야 41:14-16 "지렁이 같은 너 야곱아, 너희 이스라엘 사람들아 두려 워 말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내가 너를 도울 것이라. 네 구속 자는 이스라엘 의 거룩한 자니라. 보라 내가 너로 이가 날카로운 새 타작 기계를 삼으리니 네가 산들을 쳐서 부스러기를 만들 것이며 작은 산들로 겨 같게 할 것이라. 네가 그들 을 까부른즉 바람이 그것을 날리겠고 회리바람이 그것을 흩어 버릴 것이로되 너는 여호와로 인하여 즐거워하겠고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로 인하여 자랑하리라" 고 하였습니다. 지렁이 같은 무능한 존재들이라도 날카로운 타작 기계처럼 강하게 역사 하겠 다고 하였습니다. 산들을 쳐서 부스러기를 만들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산들 로 겨 같게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놀라운 힘을 말합니다. 광석 중에서 제일 단단한 것이 다이어먼트라고 합니다. 다이어먼트로 유리도 자르고, 깊이 샘물도 파내려 갑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단단한 것이 사람의 마음 이라고 했습니다. 사람의 굳어진 마음은 다이어먼트로도 뚫을 수 없습니다. 완악해진 심령! 누구의 말이라고 듣겠습니까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불가능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힘은 오직 성령님의 힘으로만 가능합니다. 전도를 하는 분들을 보면 참으로 용기가 넘칩니다. 지하철 전철에서 어떤 나이 많은 노인이 전도지를 들고 전도하는데, 그 당당 한 위세에 모든 사람들이 겁을 집어먹는 것을 보았습니다. 오후 시간이라 그렇게 차내가 분비지 않았는데 앉아 있는 사람에게 전도지를 돌리면서 특히 젊은 처녀 들에게는 거의 반말을 하면서 "예수 믿어!, 예수 믿어야 좋은 신랑 만나! 알어!예수 믿어야 영생!예수 부활!예수 생명!" 하는데, 사람들이 옴짝 못하고 다 전도지를 받아 보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겠습니다. 금년 초에 벌써 수차에 걸쳐 광고를 하였습니다. 안드레운동에 참여 하지고 말입니다.
그런데도 아직도 제직들이 이 일에 관심을 갖지 못했다면 스스로 책임 의식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것이 도리어 부끄러움을 인정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부끄러움이라도 의식한 사람이라면 그래도 소망은 있습니다. 부끄러움조차도 느끼지 못하고 또한해를 마칠까 그것이 걱정입니다. 아무쪼록 주님의 마지막 명 령인 땅끝까지 일으러 내 증인이 되라는 말씀에 경청할 때라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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