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과 부활 신앙 (눅24,13-43)
본문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현실과 부활신앙 소식은 에나 지금이나 그를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끝없는 <소망>과 <생명>을 불러 이르키는 <역사적 사실>이 되고 있습니다. 고도로 발달한 현대 과학문명 속에서 인간의 개성마져 상실되고, 삶의 의미마져 잃고 사는 현대인들에게 부활은 에나, 지금이나 <삶의 근거 와>, <신앙의 근거>와, <소망의 근거>가 되고 있습니다. 에수께서 다시 부활 하셨다는 일에 대하여 반대하는 경향이 19세기 인간 이 성을 에찬했던 합리주의자들에게서 있었으나, 그러나, 그와같은 합리적 논리가 에수의 부활이 없었다는 증거를 제시하지 못한채 물거품 같이 살아지고 말았습니다. 기독교를 박해하고 핍박했던자들이 아무리 부활의 사건을 부인하려해도, 그것은 엄연한 현실의 사건이었기에 저들은 폭력과 무력으로 탄압했지만, 그러나, 이 부활의 사실을 증거하는 증거자들 앞에 두손들고 말았습니다. 아직도 여과도지 못한 이성을 가지고 신앙의 세게를 자기들의 제한된 이성의 범위에서 역사적 그리스도를 관념적 그리스도로, 그리고 육체적 그리스도의 부활 을 정신적 상징으로 이해하려는 시도는 게속되고 있으나, 시대와 시간은 흐르나 십자가와 부활은 영원히 변할 수 없는 사실 위에 선 진리가 되었습니다. 저는 이시간 역사적 부활의 사실을 다시 논증할려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마치 초대교회의 제자들이 그랬드시 너무도 벅찬 감격이요, 너무도 당연한 귀결 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인간의 두뇌가 아무리 발달하고, 과학기술의 응용이 말 할 수 없이 거대한 힘으로 우리의 현실을 지배한다 해도,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의 두뇌 에 따라 변하는 하나님이 아니요, 역사적 사실은 시간이 흐른다고 사실이 될 수 없다는 이유가 성립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치 6.25 전쟁을 자기들이 먼저 이르켜 놓고도, 지금껏 남한이 먼저 이르켰 다고 떠들어 대지만, 그것은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기에, 시간과함께 그 사실이 바꾸어질 수 없음 같이 에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사건도 그런것이기 때문입니다.
1. 오늘 우리의 걸음을 살펴보면, 2000년전 부활의 날에 에루살렘을 떠나 엠 마오로 향해가는 두 제자들 같이 <회의>와 <슬픔>과 <낙담>속에서 걸어가는 생인지도 모릅니다. 저녁 노을이 깃든 석양의 하늘을 바라보며 무엇인가 겉잡을 수 없는 허탈감 에서, 그리고 그들이 보고들은 간단없는 현실의 사건들 속에 대화를 나누며 내려 가는 두 제자의 모습에서 21세기의 문명의 몰락으로 기우려가는 우리의 모습을 보는것 같습니다. 오늘의 인간이 쌓아올린 물질문명은, 과거 로마의 창검같이 현대인의 마음속 에 크다란 위용으로 군림하는데, 나귀를 타시고 입성하시는 예수님! 그리고 빌라 도 법정에서 한마디 변명도 없이 골고다 언덕까지 무거운 형틀의 십자가를 지고 가는 예수님은 오늘의 현대인들에게는 너무도 초라하게 보여질런지 모릅니다. 그러기에 실망하고 돌아서는 젊은이들이 많은지도 모릅니다. 그것이 제자들의 발걸음이었고, 오늘 우리들의 걸음이 아닌가 얼핏보면, 신앙은 이렇게 현실 속에서 나약한 것 같이 보입니다. 골고다 언덕 으로 향하는 예수님을 보는 사람들의 눈에는 얼마나 그가 나약한 존재로 보였겠 습니까. 그러나 오늘 그리스도는 우리가운데 다시 살아 나시었습니다. 죽었던 자리에서 생명의 부활로 다시 살아 나시었습니다. 실패와 조롱속에서 영광과 승리로 부활 하시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만일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심이 없었으면 우리의 믿음도 헛것 이요, 모든 사람들 가운데 가장 불쌍한자들"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도께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다"고, 그는 감격의 환호성을 발했습니다.
2. 여러분! 우리는 어짜피 죽음의 행렬에 서 있는 사람들인지도 모릅니다. 석양을 보며 내려가는 길과 같이 언제가는 우리들 차례가 될 것을 부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으리라 봅니다. 만일 우리들에게 그리스도의 역사적 사실의 부활이 없었다면, 그 행렬에서 우리처럼 더 불쌍한 사람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문질문명은 제아무리 풍요한 사회, 번영한 사회를 이룩했다고 해도, 죽음의 행렬에 끼어있는 나를 건져낼 힘은 없습니다. 응당 인류의 평화와 행복을 위하여야 할 과학이 도리어 생명을 노리는 전쟁 의 무기로 이용되고 있는 사실을 여러분 어떻게 보십니까 한반도에 아직도 전쟁의 공포분위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몇 개의 폭탄이 한 꺼번에 쌓아올렸던 문명세계를 페허와 시킬 위협 속에서 살아간다는 사실을 부 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지금 당장이라도 우리 앞에 나타날 수 있는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의해서 만들어진 병기가, 인간을 살륙하려는데 쓰여지고 있습니다. 현대 의학이 인간생명을 보호, 연장하려고 필사의 노력을 하지만, 이처럼 한 편에서는 한꺼번에 인류를 멸절시킬 무기를 만들어 놓고 있으니이것이 어찌 슬픈 현실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런가 하면, 오늘의 기계문명은 우리의 마음마져 뺏어 갔습니다. 20세기의 기계문명은 공장만 기계화한 것이 아니라, 이 시대의 모든 것, 심 지어는 인간까지도 기계화 해 버렸습니다. 사람에게 봉사하기 위해 만들어진 기 계가, 결국은 그것이 사람을 부리게 되었고, 사람을 판단케 되었고, 그 기계 앞에 시간과 마음을 그리고 모든것을 빼았겼습니다. 그러기에 정신적 고아들이 되었습니다. 사람과 사람을 믿을 수 없게 되었고, 사랑과 봉사와 희생은 자취를 감추고 단지 이 불안을 잊기위한 찬라적인 쾌락추 구만이 성행하게 되었습니다. 자신을 가누어 갈 삶의 기초를 잃은 현대인들은 이제 갈곳이 없어졌습니다. 갈곳은 낙심속에 엠마오로 내려가던 제자들 처럼 엠마오 도상의 길 뿐입니다. 미래가 없고, 소망도없고, 감격도 없는, 오직 현실의 불안과 슬픔뿐, 그러기에 이순간도 향락추구에서 자신을 포기하고 있는 생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르겠습니다. 살려고 내려가는 길이었으나, 그 길에는 기쁨이 없었습니다. 이런 슬픔 속에 있는 인간에게 그리스도는 오늘도 새 소망으로 찾아 오십니다.
3. 그러면 오늘 이 현실속에 있는 우리에게 부활신앙은 도대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것입니까 옛날 초대교회의 신자들이 갖었던 부활신앙과 과연 달라야 할 것인가 2000년전 초대교회의 부활 신앙과 오늘의 있어서 부활신앙의 의미과 내용이 달라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물론 시대적 변천, 시간의 흐름은 비교할 수 없이 달라졌지만, 죽음, 그 자체 가 변하지 않고 엄연히 우리의 현실로 존재한다면, 부활 신앙도 엄연히 존재해야 할 것입니다. 초대교회에서나, 오늘 우리에게서나,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꼭 같은 하나님이 요, 꼭 같은 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 변한것은 시간의 흐름이요, 인간의 마음이 지, 그리스도는 변함이 없습니다. 세상의 인간과, 그 문명의 모습이 달라졌을뿐,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는 달라지지 아니 했습니다. 이제 슬픔에 있던 제자들에게 나타났던 예수님이 오늘 우리들의 슬픔 마음에 부활하시기를 바랍니다. 낙심속에 실망가운데 세상을 향해가던 제자들에게 나타났던 그 주님이 지금 불안한 현실 속에서 부활의 주로 나타나기를 바랍니다. 병고의 시달리는 육체속에 부활과 생명의 주로 나타나기를 바랍니다. 저 북방의 먹구름 속에 살아가는 우리의 동포들에게 참 자유와 소망의 주님 으로 나타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우리의 현실이 제아무리 어둡게 보이고, 제아무리 미래를 볼 수 없는 암담한 현실이라도, 부활의 주님을 모시고 살아가는 한, 절망은 없습니다. 부활은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부활은 초자연적 하나님의 능력의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감각의 경험의 세계를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러나, 그와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신앙의 능력입니다. 부활 신앙은 이 세상의 죽음의 세력을 이겨낼 수 있는 유일한 힘입니다. 부활신앙이 없는 신앙이라면, 그것은 한낮 윤리적 도덕적 교훈은 될 지언정 영생의 종교는 아닐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신앙은 윤리적 교훈이 아닙니다. 살아날 영생을 얻을 구원의 종교입니다. 그러기에 기독교 신앙이야 말로 부활신아에서 꽃이 피게 됩니다. 십자가와 부활을 빼 버린다면, 기독교는 아무런 쓸모없는 종교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의 부활은 만들어놓은 신화나 꾸민 허구가 아니라, 역사적 사건입니다. 온갖 적 그리스도의 세력들이 이 부활의 사실을 음페하려고 제아무 리 노력했지만, 역사적 사실을 뒤집어 놓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최후 승리를 얻기까지 다시 사신 부활의 주님을 영접하고, 죽음의 세력을 극복하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제 목:<백산교회>부활이 없으면 복음이 아닙니다. 부활이 없으면 복음이 아닙니다. 고전15:1-12 백산교회 1995/04/16. 세계 7대 불가사의 라고 하는 이집트의 거대한 피라밋에는 썩지 않은 곡식알이 있습니다. 이미 3000년전의 것이지만 지금도 땅속에 옮겨 심으면 거기에서 싹이 트고 잎이 피는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그 옛날 이집트 사람들은 곡식알뿐 아니라 사람이 죽었을때도 속 내장을 다 들어내고 아름답게 화장을 해서 보관을 해 왔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한 이유는 언젠가는 다시 살아날 것이라는 막연한 희망이 있었 기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은 이집트 사람들만의 소망이 아니라 이 땅을 살다간 온 인류의 소망이었고 절대적인 문제였습니다. 지금 우리가 어렵고 힘들게 산다고 할 지라도 다시 살수 있는 소망만 있다면 얼마든지 인내하고 참아낼 수 있습니다. 인간의 역사가 시작된 이후 가장 큰 소망은 다시 살고자 하는 마음이었습니다. 이 소망 때문에 사실 수많은 종교가 생겨났습니다. 다시 산다는 소망이 없다면 많은 것을 가진 자가 종교를 따를리 없었고, 힘이 센자가 참을수 없었을 것입니다. 부자 들이 돈을 내어 놓고, 힘이 센자들이 약자의 편에 섰던 한가지 이유가 있었다면 지금보다 더 좋은 날이 다음 세계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극락을 가르쳤고, 지상 천국을 가르쳤습니다. 영원한 날이 있을 것이라고 가르쳤던 많은 종교의 교주들 그들은 지금 다 어디에 있습니까 석가모니도, 공자도, 마호멧 트도, 그 어떤 성인군자들도 모두가 죽었습니다. 물론 우리 예수님도 죽었습니다. 많은 성인들은 나이가 많아서 인간의 수명이 다하여 죽었습니다. 그들이 죽을때에 제자들은 스승들의 죽음을 숨기려 했고, 마침내 죽은 사실들이 드러났을때 그 무덤 을 크고 화려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실망했지만 분명한 사실이었기에 어쩔수가 없었습니다. 음페이지(리턴키) > 우리가 믿는 예수님도 어쩔수 없는 인간의 한계로 죽어야 했고 그것으로 끝이 났 겠습니까 바울은 고전 15:19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더욱 불쌍한 자니라. 남들은 주일날 공부해서 학교 성 적도 올라가고, 주일날 열심히 일해서 부자가 되는데, 나는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 때문에 더 많이 많이 참아 왔는데 예수님의 부활이 거짓이라면 이땅에서의 우리의 모든 수고는 헛것이 되고 말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믿는 주님은 분명히 부활하셨습니다. 세상의 그 어떤 사람도 다시 산 사람이 없으 되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하셨고,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의 부활을 보증하는 분명한 증거가 되었습니다. 만약에 부활이 아닌 다른 어떤 복음을 전한다면 그것은 복음이 아니요. 가짜입니다. 부활은 우리의 모든 억울함도, 괴로움도 안타까움도 그날에 다 보상받을수 있는 절대적인 희망이요. 분명한 사실 입니다. 오늘 아침 귀한 이 시간에 우리 주님의 부활의 분명한 사실을 말씀 드릴려 고 합니다.
1.예수님의 부활은 예언의 성취였습니다. (3-4) 예수님은 성경대로 죽으시고 성경대로 다시 사셨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어느날 갑 자기 알에서 깨어 나거나 동굴속에서 발견된 어떤 영웅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것을 성경은 이미 수천년전부터 수 없이 예언되어져 왔습니다. 동시에 그 예언에는 태어나는 것 만이 아니라 죽음의 모습과 동시에 다시 살것을 예언하 고 있습니다. 세상의 어떤 교주가 어디에서 어떻게 태어날 것이 예언 되거나 그가 다시 살게 될것이라고 이미 예언 되어져 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여러분! 로마를 역사한 연구가들에 의하면 십자가에 못박혀 사형당한 사람은 약 3만명에 이른다고 합니다. 십자가에 죽은 사람이 그 엄청나게 많음에도 불구하고 오늘 뛰어 난 지성을 갗춘 사람들에게 십자가에 죽은 사람을 말해 보라고 한다면 예수 외에는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분명한 죽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죽었습니다. 요즘은 신학도 타 락되어서 인간의 이성으로 성경을 해석할려고 하는 잘못된 목사들도 있긴 합니다. 어느 부활절날 자유주의 신학에 물든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한 사람이 경건한 목사님께 편지를 써 보냈습니다. 아아아목사님 부활절에 저희 목사님께서 설교 하셨는데 예수는 십자가 위에서 기절했을 뿐이고, 제자들이 그분을 간호해서 회복시켰 다는 것입니다. 목사님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답장이 보내어져 왔습니다. 아아아 귀하 "아홉 가닥으로 된 채찍으로 그 목사를 서른 아홉번 매질 하십시요.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십시오. 그를 햇빛 속에 여섯 시간 동안 매달아 놓으십시오. 창으로 가슴을 찌러 관통을 시키십시오. 그를 공기가 안 통하는 무덤에 묻고 72시간 동안 놔 두십시오. 그러고 나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지켜 보십시오. 소위 지성인들이라고 하는 자들중에는 천국을 믿지 못하고, 부활을 받아 들이려 하 지 않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들도 예수라는 사람이 유대땅에 태어났었고, 십자가에 못박혔다는 것쯤은 받아들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제자들이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 라는 사실을 우리가 어떻게 알수 있습니까 사도행전 2장에는 유명한 베드로의 설 교가 나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부활을 어떻게 증거합니까 여러분 내 눈으로 예수님의 부활을 똑똑히 보았습니다. 부활은 사실입니다. 믿으십시오. 그렇게 말하 지 않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그렇게도 존경하는 다윗왕을 아시죠 다윗이 구약성경 에서 뭐라고 예언했는지 성경을 한번 읽어 보십시오. 믿음에 충만한 다윗은 예수님 은 고난을 받으시고 3일동안 무덤 속에 계시지만 그 어떤 힘도 무덤을 막을수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형제들이여 우리 예수님은 죽었습니다. 우리 예수님이 많은 사람들에게 모욕을 겪으시고, 빌라도의 법정에서 불의한 재판을 당하시고 십자가의 형틀에 매인바 되었다가 로마 군병들에 의해서 무덤이 지켜졌습니다. 우리는 두려 워서 다 도망갔습니다. 그 강한 로마의 군인들을 이길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그러나 지금 한번 가 보십시오 그 무덤을 가서 한번 확인해 보십시오. 무덤은 비어 있습니다. 이 설교를 들은 완악한 유대인들이 하루에 3천명씩, 5천명씩 회개를 했습니다. 그들이 모두 바보였습니까 베드로의 웅변력이 뛰어 났겠습니까 그들은이 구약 성경을 알고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분명한 예언의 성취였음 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증거를 가지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2.예수님의 부활은 반대자들이 증거했습니다.(5-7) 예수님의 죽음은 당당했습니다. 살려 달라고 빌지도 않았으며, 고통에 못이겨 발악 하지도 않았습니다. 최후의 순간까지 양손과 양발이 못에 박혀 있는 그 순간까지도 연약한 인간들을 위하여 기도했습니다. 사형을 집행했던 로마의 백부장의 고백을 들어 보십시오.눅23:47 백부장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 하고 이를 구경하던 모인 무리들도 그 된 일을 보고 다 가슴을 두드리며 돌아가고. 죄인의 죽음이 아니라 의인의 죽음이었음을 안타까워 했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십자가의 사형을 집행했던 백부장이 후에 회개하고 복음 을 전하다가 순교까지 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책으로 출판이 되어서 많은 사람 들에게 읽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반대하던 그들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다는 말씀이 두려워서 무덤을 지키기로 했습니다. 당시에 십자가에 못박혀 죽는 사형수들 은 그 얼굴이 너무 흉악하게 일그러지고, 온 몸들이 찢겨저서 무덤에 장사 지내지 않고 계곡에 던져서 짐승들의 밥이 되게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대적자들은 만약에 주님이 다시 살것을 걱정해서 돌 무덤을 막고, 로마 총독의 도장으로 그 무덤을 인 봉하고, 로마의 군병들이 철저하게 지킵니다. 당시에 로마 총독의 도장이 찍힌 것 을 건드린다는 것은 곧 죽음을 듯합니다. 거기에다 로마의 군4병들이 지키고 있지 않습니까 시체를 지키기에 철저했던 그들의 모습을 볼수 있습니다. 롬8:28 하나님 의 일은 합력해서 선을 이룬다고 했습니다. 분명히 무덤에 갇혔고, 분명히 지켰습니다. 그들의 철저하게 지킨 사실이 오히려 부활을 증명해 보이는 증거가 될수 있 었습니다. 모두가 두려워서 도망가 버린 제자들 아닙니까 감히 누가 주님의 무덤 을 막고 있는 그 돌을 굴리기라고 할수 있단 말입니까 후에 예수님이 부활한 사 실을 전했을때 제자들은 함께 모여 다락방에 숨어 있었습니다. 아무도 그 아무도 굴려낼수 없는 돌을 하나님은 얼마든지 할수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예수님 이 부활했을때, 제자들은 대적자들 앞에 가서 당당하게 외칩니다. 당신들이 때려 십자가에 못박으신 그 주님은 살아나셨습니다. 그들은 아니라고 말할수 없었습니다. 그 강한 로마의 군대도 부활하신 주님의 빈 무덤을 채울수가 없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뛰어난 지식으로 예수는 거짓이라고 대적하면서 예수 믿는자들을 핍 박하던 사울에게 부활의 주님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뛰어난 지성인이었던 사울, 철저한 핍박자요 대적자인 사울은 부활의 주님을 만나 고 그의 삶이 180' 바뀌어졌습니다. 미국에서 가장 머리가 좋은 사람, 가장 글을 잘 쓰는 사람으로 손 꼽히던 윌리스는 성경은 거짓이요. 예수는 꾸며낸 사람이라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성경을 읽던중 두번 읽고 세번째 읽던중 무릎을 꿇고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라는 고백을 하게 되고 그리스도에 대한 이야기를 책을 쓰기 시 작했는데 그 책의 이름은 벤허(그의 아들)이며 부제로는 그리스도의 이야기라는 소 설을 쓰게 됩니다. 그 책이 영화로 만들어 지면서 역사상 가장 뛰어난 영화로 인정 을 받게 됩니다. 역사상 그 어느 누구든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철저하게 대적 했던 자는 모두가 무릎을 꿇을수 밖에 없었음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서 알고 있습니다. 그분은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셔서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은 오믈도 믿는자의 하나님이신 것을 믿으시고 그 역사하심이 여러부의 삶을 주장하 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3.예수님의 부활은 인간의 본성이 증거합니다.(9-12) 사람은 누구든지 드러나는 일을 하기 원하고 가치 있는 일에 투자하기를 원합니다. 그일이 정말 의미있고 가치 있는 일이라면 생명을 두려워하지않게 되어 있습니다. 200년전 윌리암 케리는 옥스포드 대학에서 공부하며 기도하던중 인도의 불쌍한 영 혼을 위해 한평생 그 땅에서 살았습니다. 의학, 철학, 신학박사의 학위를 가졌던 데 이빗 리빙스턴은 아프리카에서 그의 남은 생애를 예수 부활을 증거하며 살았습니다. 보스톤 대학에서 수석을 졸업한 져드스은 버어마에서 한평생 주님의 부활을 증 거하다가 노년에는 모국어인 영어도 잊어 버릴만큼 버어마를 위해 살다간 사람이 었습니다. 그 시대에는 아무도 그들을 크게 알아주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받은 댓 가는 질병과 가난뿐이었습니다. 그들은 바보가 아니었고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들도 아니었습니다. 우리 본문에 나타나는 바울은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난 다음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자 같은 나에게도 보이셨다고 했습니다. 바울만 그러햇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두려워 하여 도망갔던 제자들 그들은 다시 되돌아 왔습니다. 그들은 한결같 이 예수 부활을 외쳤습니다. 사람의 본능은 죽음앞에서는 진실을 말하게 됩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한결같이 죽음의 순간이 닥아 왔을때도 더욱 담대하게 예수 부활 을 증거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시체를 훔쳐 갔다고 말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읽어 보면 4복음서 모두에 예수님의 시체를 쌉 던 세마포가 무덤에 놓여 있더라고 했습니다. 백번 양보해서 로마의 군병드을 제치 고 예수님의 시신을 훔쳐 갔다손 치더라도 그들이 왜 예수님의 시신을 쌉던 세마 포를 그 자리에 두고 가겠습니까 재미있는 것은 요한20:7에는 개켜 있었다고 되어 있는데 개켜 라는 이말의 원어적인 뜻은 어떤 물건을 감싸두었다가 나중에 물건만 싹 빠지고 물건의 형체가그대로 남아있는 것을 말합니다. 그 황급한 시간에 어떤 사람이 그렇게 지극정성으로 해 놓을수가 있기나 했겠습니까 인간의 심리적으로 볼때에 시신을 쌉던 세마포가 그 자리에 있었다는 것은 사람이 결코 예수님의 시신을 건드리지 않았다는 이야깁니다. 죽음이 두려워 흩어졌던 제자들이 다시금 예루살렘에 모여 기도하고 같은 시대의 사람들에게 예수의 부활을 와쳤다는 것은 보지 않고는 할수 없는 이야깁니다.
본문에는 바울이 고린도전서를 쓸때에도 예수님의 부활을 본 사람이 태반이나 살아 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재 판햇던 공회원들도 침묵했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야 한다고 햇던 유대인들도 침묵을 지켰으며, 무덤을 지켰던 로마의 군병들은 더욱더 할말이 없었습니다. 역사 적으로도 예수님의 부활에 대하여 3세기까지는 감히 예수님의 부활에 대하여는 반 박하는 글이 없다고 합니다. 그뿐 아니라 오늘도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이들이 저 밀림지대에 열대병과 풍토병이 있는 그곳으로 나아가기 위해 자신의 전생을 준비 하며 과감히 투자하는 것을 우리는 볼수 있습니다. 무엇이 이 일을 가능하게 합니까 사람의 말 때문에 자신의 전생을 그렇게 드릴만 큼 어리석은 자들이 아닙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께서 오늘도 믿는 자에 게 함께 하시며 위로하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병약하거나 가난 때문에 고민이 되 십니까 불확실한 미래의 문제로 인하여 고민 하십니까 예수님은 살아게십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십시오. 여러분의 눈빛이 달라지게 될것이며, 여러분의 삶이 달 라지게 됩니다. 부활의 소망, 부활의 능력으로 여러분의 삶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충만하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요한1서 3:2에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 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것을 인함이니 우리와 똑 같은 몸으로 이 땅에 오 셨던 주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드릴때에 부활의 분명한 사실이 우리앞 에서 역사적으로 증 . 그 역사는 2000년전 대땅에서 있었던 이야기만 이 아닙니다. 딸기의 좋은 모종을 얻기 위해서는 가장 좋은 모종의 씨앗을 받아서 뿌릴때에 그 씨앗속에서 싹이 트고 열매가 맺힌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다른 어떤 사람들의 꾸며낸 이야기가 아닙니다. 믿는자들에게는 오늘도 찾아오셔서 능력으로 역사하십니다. 우리 주님을 누구보다도 잘 믿었던 화 니 크로스비라는 분이 고백한 찬송가 231장에는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1주가 맡긴 모든 역사 힘을 다해 마치고 밝고 밝은 그 아침을 당할때 요단강을 건너가서 주의 손을 붙잡고 기쁨으로 주의 얼굴 뵈오리 나의 주를 나의 주를 내가 그의 곁에 서 서 뵈오며 나의 주를 나의 주를 손에 못자국을 보아 알겠네.
4.영화롭게 시온 성문 들어가서 다닐때 흰옷 입고 황금길을 다니며 금 거문고 맡추어서 새 노래를 부를 때 세상 고생 모두 잊어 버리리 그렇습니다. 부활은 분명한 역사적 사실이었습니다. 동시에 주님의 부활은 오늘도 믿는 자에게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맛볼수 있는 분명한 증거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복된 부활의 계절에 우리의 믿음이 새로워져서 영광의 주님을 만나고 지금부터 영원토록 부화하신 주님과 동행하면서 우리도 잠시후에 영광스럽게 부활할 그날을 소망하면서 살아가는 여러분들이 되시 기를 바랍니다. 1
1. 오늘 우리의 걸음을 살펴보면, 2000년전 부활의 날에 에루살렘을 떠나 엠 마오로 향해가는 두 제자들 같이 <회의>와 <슬픔>과 <낙담>속에서 걸어가는 생인지도 모릅니다. 저녁 노을이 깃든 석양의 하늘을 바라보며 무엇인가 겉잡을 수 없는 허탈감 에서, 그리고 그들이 보고들은 간단없는 현실의 사건들 속에 대화를 나누며 내려 가는 두 제자의 모습에서 21세기의 문명의 몰락으로 기우려가는 우리의 모습을 보는것 같습니다. 오늘의 인간이 쌓아올린 물질문명은, 과거 로마의 창검같이 현대인의 마음속 에 크다란 위용으로 군림하는데, 나귀를 타시고 입성하시는 예수님! 그리고 빌라 도 법정에서 한마디 변명도 없이 골고다 언덕까지 무거운 형틀의 십자가를 지고 가는 예수님은 오늘의 현대인들에게는 너무도 초라하게 보여질런지 모릅니다. 그러기에 실망하고 돌아서는 젊은이들이 많은지도 모릅니다. 그것이 제자들의 발걸음이었고, 오늘 우리들의 걸음이 아닌가 얼핏보면, 신앙은 이렇게 현실 속에서 나약한 것 같이 보입니다. 골고다 언덕 으로 향하는 예수님을 보는 사람들의 눈에는 얼마나 그가 나약한 존재로 보였겠 습니까. 그러나 오늘 그리스도는 우리가운데 다시 살아 나시었습니다. 죽었던 자리에서 생명의 부활로 다시 살아 나시었습니다. 실패와 조롱속에서 영광과 승리로 부활 하시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만일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심이 없었으면 우리의 믿음도 헛것 이요, 모든 사람들 가운데 가장 불쌍한자들"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도께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다"고, 그는 감격의 환호성을 발했습니다.
2. 여러분! 우리는 어짜피 죽음의 행렬에 서 있는 사람들인지도 모릅니다. 석양을 보며 내려가는 길과 같이 언제가는 우리들 차례가 될 것을 부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으리라 봅니다. 만일 우리들에게 그리스도의 역사적 사실의 부활이 없었다면, 그 행렬에서 우리처럼 더 불쌍한 사람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문질문명은 제아무리 풍요한 사회, 번영한 사회를 이룩했다고 해도, 죽음의 행렬에 끼어있는 나를 건져낼 힘은 없습니다. 응당 인류의 평화와 행복을 위하여야 할 과학이 도리어 생명을 노리는 전쟁 의 무기로 이용되고 있는 사실을 여러분 어떻게 보십니까 한반도에 아직도 전쟁의 공포분위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몇 개의 폭탄이 한 꺼번에 쌓아올렸던 문명세계를 페허와 시킬 위협 속에서 살아간다는 사실을 부 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지금 당장이라도 우리 앞에 나타날 수 있는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의해서 만들어진 병기가, 인간을 살륙하려는데 쓰여지고 있습니다. 현대 의학이 인간생명을 보호, 연장하려고 필사의 노력을 하지만, 이처럼 한 편에서는 한꺼번에 인류를 멸절시킬 무기를 만들어 놓고 있으니이것이 어찌 슬픈 현실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런가 하면, 오늘의 기계문명은 우리의 마음마져 뺏어 갔습니다. 20세기의 기계문명은 공장만 기계화한 것이 아니라, 이 시대의 모든 것, 심 지어는 인간까지도 기계화 해 버렸습니다. 사람에게 봉사하기 위해 만들어진 기 계가, 결국은 그것이 사람을 부리게 되었고, 사람을 판단케 되었고, 그 기계 앞에 시간과 마음을 그리고 모든것을 빼았겼습니다. 그러기에 정신적 고아들이 되었습니다. 사람과 사람을 믿을 수 없게 되었고, 사랑과 봉사와 희생은 자취를 감추고 단지 이 불안을 잊기위한 찬라적인 쾌락추 구만이 성행하게 되었습니다. 자신을 가누어 갈 삶의 기초를 잃은 현대인들은 이제 갈곳이 없어졌습니다. 갈곳은 낙심속에 엠마오로 내려가던 제자들 처럼 엠마오 도상의 길 뿐입니다. 미래가 없고, 소망도없고, 감격도 없는, 오직 현실의 불안과 슬픔뿐, 그러기에 이순간도 향락추구에서 자신을 포기하고 있는 생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르겠습니다. 살려고 내려가는 길이었으나, 그 길에는 기쁨이 없었습니다. 이런 슬픔 속에 있는 인간에게 그리스도는 오늘도 새 소망으로 찾아 오십니다.
3. 그러면 오늘 이 현실속에 있는 우리에게 부활신앙은 도대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것입니까 옛날 초대교회의 신자들이 갖었던 부활신앙과 과연 달라야 할 것인가 2000년전 초대교회의 부활 신앙과 오늘의 있어서 부활신앙의 의미과 내용이 달라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물론 시대적 변천, 시간의 흐름은 비교할 수 없이 달라졌지만, 죽음, 그 자체 가 변하지 않고 엄연히 우리의 현실로 존재한다면, 부활 신앙도 엄연히 존재해야 할 것입니다. 초대교회에서나, 오늘 우리에게서나,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꼭 같은 하나님이 요, 꼭 같은 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 변한것은 시간의 흐름이요, 인간의 마음이 지, 그리스도는 변함이 없습니다. 세상의 인간과, 그 문명의 모습이 달라졌을뿐,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는 달라지지 아니 했습니다. 이제 슬픔에 있던 제자들에게 나타났던 예수님이 오늘 우리들의 슬픔 마음에 부활하시기를 바랍니다. 낙심속에 실망가운데 세상을 향해가던 제자들에게 나타났던 그 주님이 지금 불안한 현실 속에서 부활의 주로 나타나기를 바랍니다. 병고의 시달리는 육체속에 부활과 생명의 주로 나타나기를 바랍니다. 저 북방의 먹구름 속에 살아가는 우리의 동포들에게 참 자유와 소망의 주님 으로 나타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우리의 현실이 제아무리 어둡게 보이고, 제아무리 미래를 볼 수 없는 암담한 현실이라도, 부활의 주님을 모시고 살아가는 한, 절망은 없습니다. 부활은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부활은 초자연적 하나님의 능력의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감각의 경험의 세계를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러나, 그와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신앙의 능력입니다. 부활 신앙은 이 세상의 죽음의 세력을 이겨낼 수 있는 유일한 힘입니다. 부활신앙이 없는 신앙이라면, 그것은 한낮 윤리적 도덕적 교훈은 될 지언정 영생의 종교는 아닐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신앙은 윤리적 교훈이 아닙니다. 살아날 영생을 얻을 구원의 종교입니다. 그러기에 기독교 신앙이야 말로 부활신아에서 꽃이 피게 됩니다. 십자가와 부활을 빼 버린다면, 기독교는 아무런 쓸모없는 종교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의 부활은 만들어놓은 신화나 꾸민 허구가 아니라, 역사적 사건입니다. 온갖 적 그리스도의 세력들이 이 부활의 사실을 음페하려고 제아무 리 노력했지만, 역사적 사실을 뒤집어 놓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최후 승리를 얻기까지 다시 사신 부활의 주님을 영접하고, 죽음의 세력을 극복하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제 목:<백산교회>부활이 없으면 복음이 아닙니다. 부활이 없으면 복음이 아닙니다. 고전15:1-12 백산교회 1995/04/16. 세계 7대 불가사의 라고 하는 이집트의 거대한 피라밋에는 썩지 않은 곡식알이 있습니다. 이미 3000년전의 것이지만 지금도 땅속에 옮겨 심으면 거기에서 싹이 트고 잎이 피는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그 옛날 이집트 사람들은 곡식알뿐 아니라 사람이 죽었을때도 속 내장을 다 들어내고 아름답게 화장을 해서 보관을 해 왔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한 이유는 언젠가는 다시 살아날 것이라는 막연한 희망이 있었 기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은 이집트 사람들만의 소망이 아니라 이 땅을 살다간 온 인류의 소망이었고 절대적인 문제였습니다. 지금 우리가 어렵고 힘들게 산다고 할 지라도 다시 살수 있는 소망만 있다면 얼마든지 인내하고 참아낼 수 있습니다. 인간의 역사가 시작된 이후 가장 큰 소망은 다시 살고자 하는 마음이었습니다. 이 소망 때문에 사실 수많은 종교가 생겨났습니다. 다시 산다는 소망이 없다면 많은 것을 가진 자가 종교를 따를리 없었고, 힘이 센자가 참을수 없었을 것입니다. 부자 들이 돈을 내어 놓고, 힘이 센자들이 약자의 편에 섰던 한가지 이유가 있었다면 지금보다 더 좋은 날이 다음 세계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극락을 가르쳤고, 지상 천국을 가르쳤습니다. 영원한 날이 있을 것이라고 가르쳤던 많은 종교의 교주들 그들은 지금 다 어디에 있습니까 석가모니도, 공자도, 마호멧 트도, 그 어떤 성인군자들도 모두가 죽었습니다. 물론 우리 예수님도 죽었습니다. 많은 성인들은 나이가 많아서 인간의 수명이 다하여 죽었습니다. 그들이 죽을때에 제자들은 스승들의 죽음을 숨기려 했고, 마침내 죽은 사실들이 드러났을때 그 무덤 을 크고 화려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실망했지만 분명한 사실이었기에 어쩔수가 없었습니다. 음페이지(리턴키) > 우리가 믿는 예수님도 어쩔수 없는 인간의 한계로 죽어야 했고 그것으로 끝이 났 겠습니까 바울은 고전 15:19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더욱 불쌍한 자니라. 남들은 주일날 공부해서 학교 성 적도 올라가고, 주일날 열심히 일해서 부자가 되는데, 나는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 때문에 더 많이 많이 참아 왔는데 예수님의 부활이 거짓이라면 이땅에서의 우리의 모든 수고는 헛것이 되고 말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믿는 주님은 분명히 부활하셨습니다. 세상의 그 어떤 사람도 다시 산 사람이 없으 되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하셨고,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의 부활을 보증하는 분명한 증거가 되었습니다. 만약에 부활이 아닌 다른 어떤 복음을 전한다면 그것은 복음이 아니요. 가짜입니다. 부활은 우리의 모든 억울함도, 괴로움도 안타까움도 그날에 다 보상받을수 있는 절대적인 희망이요. 분명한 사실 입니다. 오늘 아침 귀한 이 시간에 우리 주님의 부활의 분명한 사실을 말씀 드릴려 고 합니다.
1.예수님의 부활은 예언의 성취였습니다. (3-4) 예수님은 성경대로 죽으시고 성경대로 다시 사셨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어느날 갑 자기 알에서 깨어 나거나 동굴속에서 발견된 어떤 영웅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것을 성경은 이미 수천년전부터 수 없이 예언되어져 왔습니다. 동시에 그 예언에는 태어나는 것 만이 아니라 죽음의 모습과 동시에 다시 살것을 예언하 고 있습니다. 세상의 어떤 교주가 어디에서 어떻게 태어날 것이 예언 되거나 그가 다시 살게 될것이라고 이미 예언 되어져 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여러분! 로마를 역사한 연구가들에 의하면 십자가에 못박혀 사형당한 사람은 약 3만명에 이른다고 합니다. 십자가에 죽은 사람이 그 엄청나게 많음에도 불구하고 오늘 뛰어 난 지성을 갗춘 사람들에게 십자가에 죽은 사람을 말해 보라고 한다면 예수 외에는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분명한 죽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죽었습니다. 요즘은 신학도 타 락되어서 인간의 이성으로 성경을 해석할려고 하는 잘못된 목사들도 있긴 합니다. 어느 부활절날 자유주의 신학에 물든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한 사람이 경건한 목사님께 편지를 써 보냈습니다. 아아아목사님 부활절에 저희 목사님께서 설교 하셨는데 예수는 십자가 위에서 기절했을 뿐이고, 제자들이 그분을 간호해서 회복시켰 다는 것입니다. 목사님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답장이 보내어져 왔습니다. 아아아 귀하 "아홉 가닥으로 된 채찍으로 그 목사를 서른 아홉번 매질 하십시요.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십시오. 그를 햇빛 속에 여섯 시간 동안 매달아 놓으십시오. 창으로 가슴을 찌러 관통을 시키십시오. 그를 공기가 안 통하는 무덤에 묻고 72시간 동안 놔 두십시오. 그러고 나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지켜 보십시오. 소위 지성인들이라고 하는 자들중에는 천국을 믿지 못하고, 부활을 받아 들이려 하 지 않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들도 예수라는 사람이 유대땅에 태어났었고, 십자가에 못박혔다는 것쯤은 받아들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제자들이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 라는 사실을 우리가 어떻게 알수 있습니까 사도행전 2장에는 유명한 베드로의 설 교가 나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부활을 어떻게 증거합니까 여러분 내 눈으로 예수님의 부활을 똑똑히 보았습니다. 부활은 사실입니다. 믿으십시오. 그렇게 말하 지 않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그렇게도 존경하는 다윗왕을 아시죠 다윗이 구약성경 에서 뭐라고 예언했는지 성경을 한번 읽어 보십시오. 믿음에 충만한 다윗은 예수님 은 고난을 받으시고 3일동안 무덤 속에 계시지만 그 어떤 힘도 무덤을 막을수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형제들이여 우리 예수님은 죽었습니다. 우리 예수님이 많은 사람들에게 모욕을 겪으시고, 빌라도의 법정에서 불의한 재판을 당하시고 십자가의 형틀에 매인바 되었다가 로마 군병들에 의해서 무덤이 지켜졌습니다. 우리는 두려 워서 다 도망갔습니다. 그 강한 로마의 군인들을 이길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그러나 지금 한번 가 보십시오 그 무덤을 가서 한번 확인해 보십시오. 무덤은 비어 있습니다. 이 설교를 들은 완악한 유대인들이 하루에 3천명씩, 5천명씩 회개를 했습니다. 그들이 모두 바보였습니까 베드로의 웅변력이 뛰어 났겠습니까 그들은이 구약 성경을 알고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분명한 예언의 성취였음 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증거를 가지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2.예수님의 부활은 반대자들이 증거했습니다.(5-7) 예수님의 죽음은 당당했습니다. 살려 달라고 빌지도 않았으며, 고통에 못이겨 발악 하지도 않았습니다. 최후의 순간까지 양손과 양발이 못에 박혀 있는 그 순간까지도 연약한 인간들을 위하여 기도했습니다. 사형을 집행했던 로마의 백부장의 고백을 들어 보십시오.눅23:47 백부장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 하고 이를 구경하던 모인 무리들도 그 된 일을 보고 다 가슴을 두드리며 돌아가고. 죄인의 죽음이 아니라 의인의 죽음이었음을 안타까워 했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십자가의 사형을 집행했던 백부장이 후에 회개하고 복음 을 전하다가 순교까지 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책으로 출판이 되어서 많은 사람 들에게 읽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반대하던 그들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다는 말씀이 두려워서 무덤을 지키기로 했습니다. 당시에 십자가에 못박혀 죽는 사형수들 은 그 얼굴이 너무 흉악하게 일그러지고, 온 몸들이 찢겨저서 무덤에 장사 지내지 않고 계곡에 던져서 짐승들의 밥이 되게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대적자들은 만약에 주님이 다시 살것을 걱정해서 돌 무덤을 막고, 로마 총독의 도장으로 그 무덤을 인 봉하고, 로마의 군병들이 철저하게 지킵니다. 당시에 로마 총독의 도장이 찍힌 것 을 건드린다는 것은 곧 죽음을 듯합니다. 거기에다 로마의 군4병들이 지키고 있지 않습니까 시체를 지키기에 철저했던 그들의 모습을 볼수 있습니다. 롬8:28 하나님 의 일은 합력해서 선을 이룬다고 했습니다. 분명히 무덤에 갇혔고, 분명히 지켰습니다. 그들의 철저하게 지킨 사실이 오히려 부활을 증명해 보이는 증거가 될수 있 었습니다. 모두가 두려워서 도망가 버린 제자들 아닙니까 감히 누가 주님의 무덤 을 막고 있는 그 돌을 굴리기라고 할수 있단 말입니까 후에 예수님이 부활한 사 실을 전했을때 제자들은 함께 모여 다락방에 숨어 있었습니다. 아무도 그 아무도 굴려낼수 없는 돌을 하나님은 얼마든지 할수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예수님 이 부활했을때, 제자들은 대적자들 앞에 가서 당당하게 외칩니다. 당신들이 때려 십자가에 못박으신 그 주님은 살아나셨습니다. 그들은 아니라고 말할수 없었습니다. 그 강한 로마의 군대도 부활하신 주님의 빈 무덤을 채울수가 없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뛰어난 지식으로 예수는 거짓이라고 대적하면서 예수 믿는자들을 핍 박하던 사울에게 부활의 주님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뛰어난 지성인이었던 사울, 철저한 핍박자요 대적자인 사울은 부활의 주님을 만나 고 그의 삶이 180' 바뀌어졌습니다. 미국에서 가장 머리가 좋은 사람, 가장 글을 잘 쓰는 사람으로 손 꼽히던 윌리스는 성경은 거짓이요. 예수는 꾸며낸 사람이라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성경을 읽던중 두번 읽고 세번째 읽던중 무릎을 꿇고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라는 고백을 하게 되고 그리스도에 대한 이야기를 책을 쓰기 시 작했는데 그 책의 이름은 벤허(그의 아들)이며 부제로는 그리스도의 이야기라는 소 설을 쓰게 됩니다. 그 책이 영화로 만들어 지면서 역사상 가장 뛰어난 영화로 인정 을 받게 됩니다. 역사상 그 어느 누구든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철저하게 대적 했던 자는 모두가 무릎을 꿇을수 밖에 없었음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서 알고 있습니다. 그분은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셔서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은 오믈도 믿는자의 하나님이신 것을 믿으시고 그 역사하심이 여러부의 삶을 주장하 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3.예수님의 부활은 인간의 본성이 증거합니다.(9-12) 사람은 누구든지 드러나는 일을 하기 원하고 가치 있는 일에 투자하기를 원합니다. 그일이 정말 의미있고 가치 있는 일이라면 생명을 두려워하지않게 되어 있습니다. 200년전 윌리암 케리는 옥스포드 대학에서 공부하며 기도하던중 인도의 불쌍한 영 혼을 위해 한평생 그 땅에서 살았습니다. 의학, 철학, 신학박사의 학위를 가졌던 데 이빗 리빙스턴은 아프리카에서 그의 남은 생애를 예수 부활을 증거하며 살았습니다. 보스톤 대학에서 수석을 졸업한 져드스은 버어마에서 한평생 주님의 부활을 증 거하다가 노년에는 모국어인 영어도 잊어 버릴만큼 버어마를 위해 살다간 사람이 었습니다. 그 시대에는 아무도 그들을 크게 알아주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받은 댓 가는 질병과 가난뿐이었습니다. 그들은 바보가 아니었고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들도 아니었습니다. 우리 본문에 나타나는 바울은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난 다음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자 같은 나에게도 보이셨다고 했습니다. 바울만 그러햇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두려워 하여 도망갔던 제자들 그들은 다시 되돌아 왔습니다. 그들은 한결같 이 예수 부활을 외쳤습니다. 사람의 본능은 죽음앞에서는 진실을 말하게 됩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한결같이 죽음의 순간이 닥아 왔을때도 더욱 담대하게 예수 부활 을 증거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시체를 훔쳐 갔다고 말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읽어 보면 4복음서 모두에 예수님의 시체를 쌉 던 세마포가 무덤에 놓여 있더라고 했습니다. 백번 양보해서 로마의 군병드을 제치 고 예수님의 시신을 훔쳐 갔다손 치더라도 그들이 왜 예수님의 시신을 쌉던 세마 포를 그 자리에 두고 가겠습니까 재미있는 것은 요한20:7에는 개켜 있었다고 되어 있는데 개켜 라는 이말의 원어적인 뜻은 어떤 물건을 감싸두었다가 나중에 물건만 싹 빠지고 물건의 형체가그대로 남아있는 것을 말합니다. 그 황급한 시간에 어떤 사람이 그렇게 지극정성으로 해 놓을수가 있기나 했겠습니까 인간의 심리적으로 볼때에 시신을 쌉던 세마포가 그 자리에 있었다는 것은 사람이 결코 예수님의 시신을 건드리지 않았다는 이야깁니다. 죽음이 두려워 흩어졌던 제자들이 다시금 예루살렘에 모여 기도하고 같은 시대의 사람들에게 예수의 부활을 와쳤다는 것은 보지 않고는 할수 없는 이야깁니다.
본문에는 바울이 고린도전서를 쓸때에도 예수님의 부활을 본 사람이 태반이나 살아 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재 판햇던 공회원들도 침묵했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야 한다고 햇던 유대인들도 침묵을 지켰으며, 무덤을 지켰던 로마의 군병들은 더욱더 할말이 없었습니다. 역사 적으로도 예수님의 부활에 대하여 3세기까지는 감히 예수님의 부활에 대하여는 반 박하는 글이 없다고 합니다. 그뿐 아니라 오늘도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이들이 저 밀림지대에 열대병과 풍토병이 있는 그곳으로 나아가기 위해 자신의 전생을 준비 하며 과감히 투자하는 것을 우리는 볼수 있습니다. 무엇이 이 일을 가능하게 합니까 사람의 말 때문에 자신의 전생을 그렇게 드릴만 큼 어리석은 자들이 아닙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께서 오늘도 믿는 자에 게 함께 하시며 위로하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병약하거나 가난 때문에 고민이 되 십니까 불확실한 미래의 문제로 인하여 고민 하십니까 예수님은 살아게십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십시오. 여러분의 눈빛이 달라지게 될것이며, 여러분의 삶이 달 라지게 됩니다. 부활의 소망, 부활의 능력으로 여러분의 삶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충만하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요한1서 3:2에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 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것을 인함이니 우리와 똑 같은 몸으로 이 땅에 오 셨던 주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드릴때에 부활의 분명한 사실이 우리앞 에서 역사적으로 증 . 그 역사는 2000년전 대땅에서 있었던 이야기만 이 아닙니다. 딸기의 좋은 모종을 얻기 위해서는 가장 좋은 모종의 씨앗을 받아서 뿌릴때에 그 씨앗속에서 싹이 트고 열매가 맺힌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다른 어떤 사람들의 꾸며낸 이야기가 아닙니다. 믿는자들에게는 오늘도 찾아오셔서 능력으로 역사하십니다. 우리 주님을 누구보다도 잘 믿었던 화 니 크로스비라는 분이 고백한 찬송가 231장에는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1주가 맡긴 모든 역사 힘을 다해 마치고 밝고 밝은 그 아침을 당할때 요단강을 건너가서 주의 손을 붙잡고 기쁨으로 주의 얼굴 뵈오리 나의 주를 나의 주를 내가 그의 곁에 서 서 뵈오며 나의 주를 나의 주를 손에 못자국을 보아 알겠네.
4.영화롭게 시온 성문 들어가서 다닐때 흰옷 입고 황금길을 다니며 금 거문고 맡추어서 새 노래를 부를 때 세상 고생 모두 잊어 버리리 그렇습니다. 부활은 분명한 역사적 사실이었습니다. 동시에 주님의 부활은 오늘도 믿는 자에게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맛볼수 있는 분명한 증거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복된 부활의 계절에 우리의 믿음이 새로워져서 영광의 주님을 만나고 지금부터 영원토록 부화하신 주님과 동행하면서 우리도 잠시후에 영광스럽게 부활할 그날을 소망하면서 살아가는 여러분들이 되시 기를 바랍니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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