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동행 (눅24:13-17)
본문
영국이 요즈음의 우리처럼 한창 경제 위기를 겪고있을 때에 한 젊은이가 이력서를 가지고 돌아가신 아버님의 친구인 런던의 한 덕망 있는 은행가를 찾아갔습니다. 그러나 그 은행가는 친구의 아들인 이 청년을 따뜻이 맞이하기는 했으나 그에게 줄 자리가 없는 것에 유감을 표했습니다. 때가 때인지라 사방에서 밀려오는 인사청탁에 일일이 응할 수 없는 나름의 애로사항이 있는 듯 했습니다. 실망한 젊은이는 인사를 하고 방을 나왔는데 마침 그 은행가도 약속이 있어 곧 뒤따라 청년과 함께 동행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며 길을 가던 저들은 은행가의 거래약속이 있는 근처 은행에 함께 들어가게 되었고 청년은 자연히 은행가를 반갑게 맞 그 은행의 임원들 눈에 뜨이게 되었습니다. 며칠 후 마침 그 은행에서 약간의 사원을 모집한다는 공고를 본 청년은 이력서를 제출했고 드디어 면접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이 청년을 알아본 은행장이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신은 며칠 전 배로우씨와 함께 왔던 바로 그 청년이군요. 당신은 참으로 좇멎이웃을 두었습니다. 당신의 친분관계는 우리에게 아주 충분한 추천장인 셈이니 당신을 우리 은행에 채용하도록 하겠소.' 누구와 동행하느냐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여주는 유쾌한 에피소드입니다. 누구와 동행하느냐, 우리 인생에 무척 중요한 화두(話頭)입니다.
왜냐하면 그 동행자가 누구냐에 따라 성공할 수도 있고 실패할 수도 있고, 승리할 수도 있고 패배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함께 간다고 해서 다 아름다운 동행은 아니지 않습니까 결코 동행해선 안될 동행도 있는 겁니다. 우리나라도 이젠 서구의 영향으로 남편이나 아내가 아닌 애인을 갖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고 합니다. 굳이 재혼하지 않고도 그냥 부담 없이 필요할 때 만나는 그런 관계, 아내와 남편이 버젓이 있으면서도 그 아닌 다른 동행을 만드는 예가 늘어나는 추세라고 합 求裏 그래서 동행이면서 동행이 아닌 듯이 행동해야 하는 그런 아름답지도 떳떳하지도 못한 동행이 적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누구와 함께 동행하는 삶인가', 참으로 중요한 인생의 주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동행자에 따라 삶이 아름다워질 수도 있고 추해질 수도 있고, 행복해질 수도 있고 불행해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예루살렘에서 엠마오로 이어지는 길을 걷고 있는 두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예수를 따르던 추종자였음을 알 수 있는 저들은 지금 '수심 가득 찬 얼굴'로 힘없이 낙향하고 있는 중입니다. 저들이 왜 그런 수심 짙은 슬픈 기색을 띠고 길을 걷고 있는지를 우리는 잘 압니다. 그것은 바로 저들이 그토록 꿈꾸어왔던 기대와 희망이 사라져버렸기 때문입니다. 저들의 희망이란 21절에서 보듯이 '이스라엘의 구속'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로마의 압제로부터 벗어나 독립을 쟁취하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그 희망을 구현해줄 인물이 있었기에 저들은 부풀어 있었습니다. '저라면 이 일이 가능할 것'이라고 여겼던 희망의 등대, 陋 바로 나사렛 예수였습니다.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했던 그가 이 일을 반드시 성취해내고 말 것이라는 기대에 저들은 한껏 부풀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만 그가 로마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속하기는커녕 로마의 그 악명높은 십자가 형틀에 처참하게 매달려 참혹한 죽음을 맞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 순간 저들의 꿈과 기대도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예수의 죽음은 다름 아닌 저들 희망의 종말이었니다. 혼미와 당혹과 실망이 밀물처럼 밀려왔고 허탈과 좌절에 주저앉아 이틀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안식일이 지난 다음날 저들은 꿈과 소망을 모두 상실한 자로서 넋나간 사람처럼 서쪽을 향해 힘없는 발걸음을 내딛고 있는 중인 것입니다. '사랑이냐 소유냐'로 유명한 독일의 사회심리학자 에릭 프롬은 인간을 정의하기를 '호모 에스페란스(Homo Esperans)'라고 했습니다. 번역하면 '인간은 꿈과 소망을 가진 존재'라는 것입니다. 미국의 유명한 신학자 에밀 부루너도 '허파에 산소가 필요하듯이 우리네 楮〈잔소망이 필요하다'고 했는데 저들의 선언처럼 인간은 꿈을 먹고사는 존재요 희망을 가짐으로서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 엠마오길의 두 사람에게서는 그런 꿈과 소망을 찾아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저들이 그 길에서 끊임없이 주고받은 말은 어떤 말이었을까요 누가는 '저들이 서로 이야기하며 길을 걸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그 서로 주고받은 이야기가 무엇이었을까요 긍정적인 이야기 소망찬 이야기 밝고 미래지향적인 이야기. 그러나 저들이 나누는 潔薩穗잔부정적이고 암울하고 절망적인 '실패와 좌절의 이야기'였습니다. 물론 십자가에 달려 죽어간 그에 대한 깊은 애도도 있었고 그 형벌이 너무 참혹하여 죽음에 이르는 고통이 컸을 것이라는 연민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보다도 자신들의 낙담, 자신들의 이상이 좌절된 것에 훨씬 더 큰 비중을 두고 주고받는 이야기였습니다. ' 粱사람이면 되겠다고 생각했었는데.' '그라면 충분히 우리의 염원을 이루어줄 것이라고 기대했었는데.' 그런 안타까움과 아쉬움이 짙게 배어있는 회한의 대화들을 나누면서 저들은 그 길을 걷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한숨 배인 소리를 우리는 멀고 아득한 2천년 전의 엠마오 도상에서만 듣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 우리 삶의 한복판에도 이런 절망의 소리들이 끊임없이 들려오고 있습니다. 작금에 우리는 '우리의 삶의 터전이 무너져 내린다'는 소리를 듣습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우리의 일터인 이 고장이 황폐화될 것'이라는 우려도 있습니다. 좋은 시절 다 지나고 꿈도 사라지고 희망도 사라지는 그런 우리의 오늘과 내일이라는 한탄이 사무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바로 여기가 엠마오입니다. 엠마오길은 끝없이 내려가는 길입니다. 해저무는 쪽을 바라보며 걷는 서향길입니다. 점점 어두워져 갑니다. 낙심과 좌절이 배어있는 길입니다. 땅거미가 찾아들 듯이 온갖 부정과 암울함과 낙담이 스며드는 길입니다. 얼굴은 수 차고 마음엔 절망이 일고 몸은 피곤해지는 그 길이 바로 엠마오길인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믿던 것들이 일순간에 무너져 내리는 자리가 엠마오입니다. 그치지 않는 상실감에 몸부림치는 자리가 엠마오입니다. 그런 경험을 한 이들이 어찌 저들 글로바와 그의 또한 친구뿐이겠습니까 오늘도 이 땅에는 직장을 잃은 사람, 사랑하는 가족을 잃 멎사람, 가장 절실한 건강을 잃고서 끝없는 상실감에 몸부림치는 인생들이 있습니다. 바로 그런 생의 고비가 있는 곳이 엠마오인 것입니다. 그런 길에서 저들 두 사람은 답답하고 무겁고 한스런 대화를 끝없이 이어가며 그 길을 가고 있고 오늘의 우리 또한 그러한 것 都求裏 바로 그때 그런 저들 곁에 한 길손이 따라붙습니다. 아마 그의 발걸음은 저들과는 달리 가볍고 힘찼을 것입니다. 길손은 어느새 따라와 저들과 어깨를 같이하며 여정을 함께 합니다. 그럼으로서 저들에게는 뜻하지 않은 동행자가 생긴 것입니다. 그 동행자는 저들에게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주고받으며 길을 가는가'고 묻습니다. 글로바와 그 친구는 그를 핀잔하는 투로 '당신은 예루살렘에서 내려오면서 엊그제 일어난 그 충격적인 금요일 사건도 모르냐'면서 '나사렛 예수의 일'을 설명합니다. '그 사람은 나님 앞에서도 사람들 앞에서도 행하는 일이 바르고 행위로나 말로나 참으로 예언자다운 훌륭한 예언자였소.
그런데 그만 제사장과 장로들이 그를 좋아하지 않아서 사형에 처하도록 총독에게 넘기지 않았겠소. 그래서 그분은 지난 금요일 십자가에 달려 죽임을 당했다 얘 우리는 그분께 얼마나 희망을 걸었는지 모르오. 그분이야말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분이라고 굳게 믿어 의심치 않았으니.' 저들은 이어서 어떤 여자들과 제자들이 경험한 빈 무덤 이야기, 그리고 천사가 전해준 부활 메시지도 있었다는 소식도 전합니다. 그러나 그 중요한 이야기들이 저들에게는 아무 것도 아닌 바람결에 흘러가는 소리로만 스쳐갈 뿐이었습니다. 그러한 저들의 말을 다 듣고 길손은 크게 탄식합니다.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사람들아,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어야 승리의 영광에 이르는 것이 아니었더냐.' 길손은 이제 구약성서에 기록된 '오셔야할 메시야'에 대한 모든 예언 을 놀라운 지식과 통찰로서 차근차근 설명해 나갑니다. 길손은 메시야의 고난과 죽음은 오히려 오랫동안 예언되어온 구약의 성취라고 설명합니다. 말씀이 거기서 완성되었다는 것입니다. 메시야 생애의 클라이막스가 바로 십자가라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실패가 아니라 성공이요, 멸망이 아니라 승리요, 부끄러움이 아니 영광이라는 것입니다. 부활은 사망의 죽음이요 죽을 수밖에 없는 육신의 연장이 아닌 영원한 생명의 새로운 탄생이기에 말씀의 완성이요 그 과정으로서의 십자가는 필연적이라는 것입니다. 달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저들이 알고 있는 말씀이나 주님이 알고 있는 말씀이나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을 들여다보는 눈은 달랐습니다. 저들은 단편적으로는 이것저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세히 알지는 못했습니다. 피상적이고 부분 岵막灌잔아는데 구체적이고 통전적으로는 알고 있지를 못했습니다. 그래서 길손은 저들에게 그러한 메시아 프로그램을 정확하고 분명하게 알려줍니다. 그렇습니다. 성서에 의하면 수난과 죽음은 그 모순과 패배의 양상을 벗어나 오히려 영광을 입는 조건입니다.
그런데 저들은 그렇게 생각하지를 않았습니다. 그것은 실패요 좌절이라고 받아들였습니다. 말씀 따로 생활 따로인 우리처럼 말입니다. 그렇게는 생각하지 그렇게는 내 구체적인 삶 속에 받아들이지 않는 우리처럼 말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아주 중요한 사실을 발견합니다. 왜 주님이 저들에게 지난 금요일의 사건을 말하게 하는 걸까요 그 일들을 몰라서가 아닐텐데 말입니다. 주님이 저들을 찾아와 저들의 입으로 그날의 일을 말하게 하고 그 사건에 대한 저들의 이해를 토로하게 하는 은 저들의 잘못된 삶의 해석을 고쳐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미 살펴본대로 '금요일 사건'은 하나님의 구원역사가 이루어지는 긍정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들에게 그것은 실의와 좌절과 절망의 스토리였습니다. 주님은 그런 저들의 잘못된 이해를 고추 잡아주시 잔겁니다. 지금은 결코 절망할 현실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이 좌절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져가고 있는 겁니다. 주님은 저들이 절망이라고 단정한 그 이야기 속에서 희망을 싹을 돋우어내고 삶의 불길을 댕겨 올립니다. 그래서 이 주님의 말씀 속에서 희망이 발 森퓸沮測잔것입니다. 참으로 신기하게도 길손의 말을 듣고 있자니 어느새 저들에게 뜨거운 감동이 일고 있었습니다. 조금 전까지의 그 무겁고 우울했던 감정이 말끔히 가시고 무엇인가 새로운 희망이 솟구쳐 오르는 것을 느낍니다. 그리고 비로소 가리워졌던 두 사람의 눈이 열리게 됩니 裏 16절의 '가리워졌다'는 헬라어 '이크라툰토'는 '어떤 힘에 의해 붙들렸다'는 뜻입니다. 저들이 그 무엇엔가 붙들려 있을 때에 저들은 올바로 볼 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이데올로기, 이념이었습니다. '유대나라가 해방되어야 한다는 그 이념'이었습니 . 그 이념이 저들로 하여금 다른 것을 볼 수 있는 눈을 가리웠던 것입니다. 저들은 사실 메시야의 나라가 실현되기를 기다린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꿈꾸어온 나라가 실현되기를 기다렸습니다. 메시야의 꿈의 실현이 아닌 자신들의 꿈의 실현을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그러한 꿈이 실현되지 않자 모든 것이 실패했다고 단정짓고 좌절 고 말았던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가장 큰 문제는 저들의 마음이 어두워져 말씀을 바로 대하지 못했고 저들의 눈이 닫혀있어 부활의 주님을 보질 못한 겁니다. 이제 저들의 마음과 눈이 열려짐으로써 새로운 깨달음과 전망이 생겨난 것입니다. 챨스 알멘이라는 사람이 쓴 '하나님의 정신요법(God's psychiatry)'이라는 책에 보면 그는 세 가지 시력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신체적 시력이고,둘째는 정신적 시력이고,셋째는 영적 시력입니다. 온전한 시력은 이 세 가지를 다 갖고 보는 것입니다. ダ막涇보고, 이성과 마음으로도 보고, 그리고 영으로 볼 때에 비로소 모든 것이 온전히 보인다는 것입니다. 눅24장에는 '연다'라는 말이 세 번 등장합니다. 헬라어로 '디아노이고'라고 하는 이 단어가 이 24장에서는 세 가지 의미로 각각 다르게 번역되고 있습니다.
첫째는 31절에서 '눈이 밝아져'라는 단어입니다. 그리고 32절의 '성경을 풀어'의 '풀어'라는 헬라어도 같은 '디아노이고'입니다. 그리고 45절의 '마음을 열어'도 역시 '디아노이고'입니다 '눈이 밝아지고', '성경이 풀려지고', '마음이 열려지고'. 이 세 가지를 종합하면 '디아노이고'는 '밝아지고 풀려지고 열려지는 것'입니다. 즉 '올바른 시력이란 하나님께서 우리의 눈 열어주시고 말씀을 열어주시고 마음을 열어주실 때 생기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실의와 좌절에 빠져 길을 가고 있던 두 제자를 찾아와 사랑의 경험을 회상하게 하고 새로운 깨달음으로 깨닫게 하고 부활의 당신을 만나게 하는 은총을 베풀어주십니다. 그래서 저들로 새로운 자기로 탄생케 하십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난 저들은 이제 예전의 저들이 아닙니다. 이제껏 저들 삶의 초점은 이스라엘의 독립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아닙니다. 저들의 새 삶의 초점은 부활하신 주님, 자신들과 동행해 주시며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신 바로 그분을 증거하는 것이었습니다. 환경은 아무 것도 바뀐 것이 없습니다. 있다면 단 하나 저들이 동행하는 부활의 주님을 만났고 경험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에 대한 바른 이해가 생긴 것입니다. 그랬을 때 저들은 더 이상 자기들의 이념을 추종하는 삶이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을 증거하는 새 楮》括텝패러다임의 전환을 가져왔던 것입니다. 나라의 독립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이 새 삶의 주제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저들은 그것을 알리려고 힘차게 자리를 박차고 달려가는 것입니다. 저들이 자리를 박차고 달려가는 그 때는 밤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만난 저들에게 이제 밤은 더 이상 무섭지가 않습니다.
왜냐하면 저들은 길에서 살아계신 주님의 동행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저들이 향하는 방향은 이제 곧 태양이 떠오를 동쪽을 향한 堧潔享윱求裏 저들은 부활의 주님을 만났고 말씀에 대한 올바른 앎을 가졌고 그로 말미암아 뜨거운 마음으로 사명의 길을 향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오직 누가복음에만 나오는 이 이야기, 엠마오 길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이 두 제자의 이야기는 복음서에서 가장 아름답고 감명 깊은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렘브란트를 비롯한 수많은 화가들이 이 장면을 화폭에 담았습니다. 왜 이 장면이 그렇게 아름다운 겁 까 엠마오 도상은 지리적인 어느 한곳에 고정된 자리가 아닙니다. 엠마오는 단순히 어떤 장소가 아니라 모순과 실망과 의심과 고통으로 뒤덮인 일상의 삶에서 어떤 의미를 찾고자 하는 사람이 가야할 하나의 여정입니다. 그리고 엠마오는 주님으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여정입니다. 주님은 말씀을 건네며 길동무가 되어주시고 나누고 베푸는 것이 죽음과 무감각 그리고 구석구석에 숨어있는 불신앙을 물리치는 길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십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엠마오는 자신이 불필요하고 쓸모없는 인간이라고, 내 인생은 여기서 끝났다고 자포자기하는 인생들에게 새로운 마음과 눈을 열어주는 비전의 자리이기도 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여정'이라든가 '길'이라든가 '걸어간다'는 단어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길 위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건입니다. '여정'과 '길'은 이 이야기의 특징적인 개념입니다. 이 개념들이 시사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주인공들이 음식을 먹기 위해 잠시 머 ゴ잔것 외에 이 여정은 결코 멈춰지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이 여정은 우리네 삶을 비유하는 대상이 됩니다. 이 두 사람은 그냥 살아가는 데 만족하지 않고 삶의 이유와 의미를 추구하며 무엇보다도 특히 장미빛 환상과 지극히 낙천적인 환영을 무너뜨리는 고통과 죽음의 이유와 의미를 찾는 모든 인간들을 대표합니다. 그런 이들에게 주님은 함께 하시며 저들의 삶의 의미, 毬ご纛텝역사를 알게 하시며 그 길에 동행해 주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저들과 함께 걷는다는 것은 주님은 결코 인간을 자신들의 운명에 홀로 버려 두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 길동무되시고 안내자되시는 분이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이 친히 저들과 함께 길을 가는 것은 저들을 하나님의 길을 가는 당신의 길 인도하셔서 저들로 참된 인생의 기쁨과 보람을 그 길에서 발견케 하기 위한 것입니다.
보십시오. 이제 저들 사이에는 더 이상 허탈한 말들이 오가지 않고 뜨거운 말이 오가고 있지 않습니까 '아아, 길에서 우리의 마음이 그토록 뜨거워진 것은 그랬었기 때문이야. 그분이 말씀을 풀어주실 때 우리의 마음이 불붙고 있었던거야.' 그 뜨거운 마음으로 骸湧멎자리를 박차고 사명의 자리 예루살렘을 향해 내달렸던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엠마오 길에 저들과 함께 동행하셨던 이분은 오늘 우리들과도 동행해주시는 부활의 주님이심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누가 나와 함께 울어줄 것입니까 누가 나와 함께 따뜻한 동행이 되어줄 것입니까 바로 우리 주님이십니다. 그분은 어 서나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심지어 인간의 끝자리, 죽음까지도 동행해 주시고 그 너머까지도 함께 하시는 분이십니다. 비록 힘들고 곤고해도 이분이 내 인생길에 아름다운 동행이 되신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사시기 바랍니다. 그분은 언제나 우리 곁에 함께 하시며 왜 사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무엇 때문에 살아야 하는지를 일러주십니다. 낙심하고 좌절하고 허망해하는 우리 곁 (우리를 북돋우시고 싸늘하게 식어가는 마음에 새로운 열정과 용기를 불어 넣어주시는 분이십니다. 여기 이러한 주님의 은총을 체험한 사람이 있습니다. 한때 우리나라 노동운동의 상징이었던 박노해가 바로 그입니다. 그의 본이름은 박기평이지만 노동해방의 약자로 박노해라는 필명을 썼었습니다. 그런 그가 지난 8년 동안 감옥에서 인고의 세월을 보내면서 새로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타났습니다. 김수환 추기경은 그런 그를 이렇게 소개합니다. '불의한 권력을 향해 몸바쳐 투쟁하는 삶에 치열했던 혁명가 박노해, 그가 이제 새로운 모습으로 우리 곁에 다가옵니다. 단지 외부의 적을 행해서만 목소리를 높이는 사상과 투쟁에서 나아가 삶의 안쪽에서 자기 자신 骸넵치열하게 투쟁하는 삶이 진정한 혁명적 삶이란 것을 깊이 깨우친 사람으로.' 감옥에서 하루도 새벽묵상을 멈추지 않았다는 그는 '굽이 돌아가는 길'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올곧게 뻗은 나무들보다는/휘어 자란 소나무가 더 멋있습니다/똑바로 흘러가는 물줄기보다는/휘청 굽이친 강줄기가 더 정겹습니다/일직선으로 뚫린 른 길보다는/산 따라 물 따라 가는 길이 더 아름답습니다/곧은 길 끊어져 길이 없다고/주저앉지 마십시오/돌아서지 마십시오/삶은 가는 것입니다/그래도 가는 것입니다/우리가 살아 있다는 건/아직도 가야 할 길이 있다는 것/곧은 길만이 길이 아닙니다/빛나는 길만이 길이 아닙니다/굽이 돌아가는 길이 멀고 쓰라릴지라도/그래서 더 깊어지고 환해져오는 길/서둘지 말고 가는 것입니다/서로가 길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생을 두고 끝까지 가는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주님은 엠마오길과 같은 우리네 인생길에 언제나 가장 아름다운 동행이 되어주시는 분이십니다.
왜냐하면 그 동행자가 누구냐에 따라 성공할 수도 있고 실패할 수도 있고, 승리할 수도 있고 패배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함께 간다고 해서 다 아름다운 동행은 아니지 않습니까 결코 동행해선 안될 동행도 있는 겁니다. 우리나라도 이젠 서구의 영향으로 남편이나 아내가 아닌 애인을 갖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고 합니다. 굳이 재혼하지 않고도 그냥 부담 없이 필요할 때 만나는 그런 관계, 아내와 남편이 버젓이 있으면서도 그 아닌 다른 동행을 만드는 예가 늘어나는 추세라고 합 求裏 그래서 동행이면서 동행이 아닌 듯이 행동해야 하는 그런 아름답지도 떳떳하지도 못한 동행이 적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누구와 함께 동행하는 삶인가', 참으로 중요한 인생의 주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동행자에 따라 삶이 아름다워질 수도 있고 추해질 수도 있고, 행복해질 수도 있고 불행해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예루살렘에서 엠마오로 이어지는 길을 걷고 있는 두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예수를 따르던 추종자였음을 알 수 있는 저들은 지금 '수심 가득 찬 얼굴'로 힘없이 낙향하고 있는 중입니다. 저들이 왜 그런 수심 짙은 슬픈 기색을 띠고 길을 걷고 있는지를 우리는 잘 압니다. 그것은 바로 저들이 그토록 꿈꾸어왔던 기대와 희망이 사라져버렸기 때문입니다. 저들의 희망이란 21절에서 보듯이 '이스라엘의 구속'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로마의 압제로부터 벗어나 독립을 쟁취하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그 희망을 구현해줄 인물이 있었기에 저들은 부풀어 있었습니다. '저라면 이 일이 가능할 것'이라고 여겼던 희망의 등대, 陋 바로 나사렛 예수였습니다.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했던 그가 이 일을 반드시 성취해내고 말 것이라는 기대에 저들은 한껏 부풀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만 그가 로마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속하기는커녕 로마의 그 악명높은 십자가 형틀에 처참하게 매달려 참혹한 죽음을 맞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 순간 저들의 꿈과 기대도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예수의 죽음은 다름 아닌 저들 희망의 종말이었니다. 혼미와 당혹과 실망이 밀물처럼 밀려왔고 허탈과 좌절에 주저앉아 이틀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안식일이 지난 다음날 저들은 꿈과 소망을 모두 상실한 자로서 넋나간 사람처럼 서쪽을 향해 힘없는 발걸음을 내딛고 있는 중인 것입니다. '사랑이냐 소유냐'로 유명한 독일의 사회심리학자 에릭 프롬은 인간을 정의하기를 '호모 에스페란스(Homo Esperans)'라고 했습니다. 번역하면 '인간은 꿈과 소망을 가진 존재'라는 것입니다. 미국의 유명한 신학자 에밀 부루너도 '허파에 산소가 필요하듯이 우리네 楮〈잔소망이 필요하다'고 했는데 저들의 선언처럼 인간은 꿈을 먹고사는 존재요 희망을 가짐으로서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 엠마오길의 두 사람에게서는 그런 꿈과 소망을 찾아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저들이 그 길에서 끊임없이 주고받은 말은 어떤 말이었을까요 누가는 '저들이 서로 이야기하며 길을 걸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그 서로 주고받은 이야기가 무엇이었을까요 긍정적인 이야기 소망찬 이야기 밝고 미래지향적인 이야기. 그러나 저들이 나누는 潔薩穗잔부정적이고 암울하고 절망적인 '실패와 좌절의 이야기'였습니다. 물론 십자가에 달려 죽어간 그에 대한 깊은 애도도 있었고 그 형벌이 너무 참혹하여 죽음에 이르는 고통이 컸을 것이라는 연민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보다도 자신들의 낙담, 자신들의 이상이 좌절된 것에 훨씬 더 큰 비중을 두고 주고받는 이야기였습니다. ' 粱사람이면 되겠다고 생각했었는데.' '그라면 충분히 우리의 염원을 이루어줄 것이라고 기대했었는데.' 그런 안타까움과 아쉬움이 짙게 배어있는 회한의 대화들을 나누면서 저들은 그 길을 걷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한숨 배인 소리를 우리는 멀고 아득한 2천년 전의 엠마오 도상에서만 듣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 우리 삶의 한복판에도 이런 절망의 소리들이 끊임없이 들려오고 있습니다. 작금에 우리는 '우리의 삶의 터전이 무너져 내린다'는 소리를 듣습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우리의 일터인 이 고장이 황폐화될 것'이라는 우려도 있습니다. 좋은 시절 다 지나고 꿈도 사라지고 희망도 사라지는 그런 우리의 오늘과 내일이라는 한탄이 사무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바로 여기가 엠마오입니다. 엠마오길은 끝없이 내려가는 길입니다. 해저무는 쪽을 바라보며 걷는 서향길입니다. 점점 어두워져 갑니다. 낙심과 좌절이 배어있는 길입니다. 땅거미가 찾아들 듯이 온갖 부정과 암울함과 낙담이 스며드는 길입니다. 얼굴은 수 차고 마음엔 절망이 일고 몸은 피곤해지는 그 길이 바로 엠마오길인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믿던 것들이 일순간에 무너져 내리는 자리가 엠마오입니다. 그치지 않는 상실감에 몸부림치는 자리가 엠마오입니다. 그런 경험을 한 이들이 어찌 저들 글로바와 그의 또한 친구뿐이겠습니까 오늘도 이 땅에는 직장을 잃은 사람, 사랑하는 가족을 잃 멎사람, 가장 절실한 건강을 잃고서 끝없는 상실감에 몸부림치는 인생들이 있습니다. 바로 그런 생의 고비가 있는 곳이 엠마오인 것입니다. 그런 길에서 저들 두 사람은 답답하고 무겁고 한스런 대화를 끝없이 이어가며 그 길을 가고 있고 오늘의 우리 또한 그러한 것 都求裏 바로 그때 그런 저들 곁에 한 길손이 따라붙습니다. 아마 그의 발걸음은 저들과는 달리 가볍고 힘찼을 것입니다. 길손은 어느새 따라와 저들과 어깨를 같이하며 여정을 함께 합니다. 그럼으로서 저들에게는 뜻하지 않은 동행자가 생긴 것입니다. 그 동행자는 저들에게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주고받으며 길을 가는가'고 묻습니다. 글로바와 그 친구는 그를 핀잔하는 투로 '당신은 예루살렘에서 내려오면서 엊그제 일어난 그 충격적인 금요일 사건도 모르냐'면서 '나사렛 예수의 일'을 설명합니다. '그 사람은 나님 앞에서도 사람들 앞에서도 행하는 일이 바르고 행위로나 말로나 참으로 예언자다운 훌륭한 예언자였소.
그런데 그만 제사장과 장로들이 그를 좋아하지 않아서 사형에 처하도록 총독에게 넘기지 않았겠소. 그래서 그분은 지난 금요일 십자가에 달려 죽임을 당했다 얘 우리는 그분께 얼마나 희망을 걸었는지 모르오. 그분이야말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분이라고 굳게 믿어 의심치 않았으니.' 저들은 이어서 어떤 여자들과 제자들이 경험한 빈 무덤 이야기, 그리고 천사가 전해준 부활 메시지도 있었다는 소식도 전합니다. 그러나 그 중요한 이야기들이 저들에게는 아무 것도 아닌 바람결에 흘러가는 소리로만 스쳐갈 뿐이었습니다. 그러한 저들의 말을 다 듣고 길손은 크게 탄식합니다.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사람들아,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어야 승리의 영광에 이르는 것이 아니었더냐.' 길손은 이제 구약성서에 기록된 '오셔야할 메시야'에 대한 모든 예언 을 놀라운 지식과 통찰로서 차근차근 설명해 나갑니다. 길손은 메시야의 고난과 죽음은 오히려 오랫동안 예언되어온 구약의 성취라고 설명합니다. 말씀이 거기서 완성되었다는 것입니다. 메시야 생애의 클라이막스가 바로 십자가라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실패가 아니라 성공이요, 멸망이 아니라 승리요, 부끄러움이 아니 영광이라는 것입니다. 부활은 사망의 죽음이요 죽을 수밖에 없는 육신의 연장이 아닌 영원한 생명의 새로운 탄생이기에 말씀의 완성이요 그 과정으로서의 십자가는 필연적이라는 것입니다. 달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저들이 알고 있는 말씀이나 주님이 알고 있는 말씀이나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을 들여다보는 눈은 달랐습니다. 저들은 단편적으로는 이것저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세히 알지는 못했습니다. 피상적이고 부분 岵막灌잔아는데 구체적이고 통전적으로는 알고 있지를 못했습니다. 그래서 길손은 저들에게 그러한 메시아 프로그램을 정확하고 분명하게 알려줍니다. 그렇습니다. 성서에 의하면 수난과 죽음은 그 모순과 패배의 양상을 벗어나 오히려 영광을 입는 조건입니다.
그런데 저들은 그렇게 생각하지를 않았습니다. 그것은 실패요 좌절이라고 받아들였습니다. 말씀 따로 생활 따로인 우리처럼 말입니다. 그렇게는 생각하지 그렇게는 내 구체적인 삶 속에 받아들이지 않는 우리처럼 말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아주 중요한 사실을 발견합니다. 왜 주님이 저들에게 지난 금요일의 사건을 말하게 하는 걸까요 그 일들을 몰라서가 아닐텐데 말입니다. 주님이 저들을 찾아와 저들의 입으로 그날의 일을 말하게 하고 그 사건에 대한 저들의 이해를 토로하게 하는 은 저들의 잘못된 삶의 해석을 고쳐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미 살펴본대로 '금요일 사건'은 하나님의 구원역사가 이루어지는 긍정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들에게 그것은 실의와 좌절과 절망의 스토리였습니다. 주님은 그런 저들의 잘못된 이해를 고추 잡아주시 잔겁니다. 지금은 결코 절망할 현실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이 좌절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져가고 있는 겁니다. 주님은 저들이 절망이라고 단정한 그 이야기 속에서 희망을 싹을 돋우어내고 삶의 불길을 댕겨 올립니다. 그래서 이 주님의 말씀 속에서 희망이 발 森퓸沮測잔것입니다. 참으로 신기하게도 길손의 말을 듣고 있자니 어느새 저들에게 뜨거운 감동이 일고 있었습니다. 조금 전까지의 그 무겁고 우울했던 감정이 말끔히 가시고 무엇인가 새로운 희망이 솟구쳐 오르는 것을 느낍니다. 그리고 비로소 가리워졌던 두 사람의 눈이 열리게 됩니 裏 16절의 '가리워졌다'는 헬라어 '이크라툰토'는 '어떤 힘에 의해 붙들렸다'는 뜻입니다. 저들이 그 무엇엔가 붙들려 있을 때에 저들은 올바로 볼 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이데올로기, 이념이었습니다. '유대나라가 해방되어야 한다는 그 이념'이었습니 . 그 이념이 저들로 하여금 다른 것을 볼 수 있는 눈을 가리웠던 것입니다. 저들은 사실 메시야의 나라가 실현되기를 기다린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꿈꾸어온 나라가 실현되기를 기다렸습니다. 메시야의 꿈의 실현이 아닌 자신들의 꿈의 실현을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그러한 꿈이 실현되지 않자 모든 것이 실패했다고 단정짓고 좌절 고 말았던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가장 큰 문제는 저들의 마음이 어두워져 말씀을 바로 대하지 못했고 저들의 눈이 닫혀있어 부활의 주님을 보질 못한 겁니다. 이제 저들의 마음과 눈이 열려짐으로써 새로운 깨달음과 전망이 생겨난 것입니다. 챨스 알멘이라는 사람이 쓴 '하나님의 정신요법(God's psychiatry)'이라는 책에 보면 그는 세 가지 시력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신체적 시력이고,둘째는 정신적 시력이고,셋째는 영적 시력입니다. 온전한 시력은 이 세 가지를 다 갖고 보는 것입니다. ダ막涇보고, 이성과 마음으로도 보고, 그리고 영으로 볼 때에 비로소 모든 것이 온전히 보인다는 것입니다. 눅24장에는 '연다'라는 말이 세 번 등장합니다. 헬라어로 '디아노이고'라고 하는 이 단어가 이 24장에서는 세 가지 의미로 각각 다르게 번역되고 있습니다.
첫째는 31절에서 '눈이 밝아져'라는 단어입니다. 그리고 32절의 '성경을 풀어'의 '풀어'라는 헬라어도 같은 '디아노이고'입니다. 그리고 45절의 '마음을 열어'도 역시 '디아노이고'입니다 '눈이 밝아지고', '성경이 풀려지고', '마음이 열려지고'. 이 세 가지를 종합하면 '디아노이고'는 '밝아지고 풀려지고 열려지는 것'입니다. 즉 '올바른 시력이란 하나님께서 우리의 눈 열어주시고 말씀을 열어주시고 마음을 열어주실 때 생기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실의와 좌절에 빠져 길을 가고 있던 두 제자를 찾아와 사랑의 경험을 회상하게 하고 새로운 깨달음으로 깨닫게 하고 부활의 당신을 만나게 하는 은총을 베풀어주십니다. 그래서 저들로 새로운 자기로 탄생케 하십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난 저들은 이제 예전의 저들이 아닙니다. 이제껏 저들 삶의 초점은 이스라엘의 독립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아닙니다. 저들의 새 삶의 초점은 부활하신 주님, 자신들과 동행해 주시며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신 바로 그분을 증거하는 것이었습니다. 환경은 아무 것도 바뀐 것이 없습니다. 있다면 단 하나 저들이 동행하는 부활의 주님을 만났고 경험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에 대한 바른 이해가 생긴 것입니다. 그랬을 때 저들은 더 이상 자기들의 이념을 추종하는 삶이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을 증거하는 새 楮》括텝패러다임의 전환을 가져왔던 것입니다. 나라의 독립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이 새 삶의 주제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저들은 그것을 알리려고 힘차게 자리를 박차고 달려가는 것입니다. 저들이 자리를 박차고 달려가는 그 때는 밤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만난 저들에게 이제 밤은 더 이상 무섭지가 않습니다.
왜냐하면 저들은 길에서 살아계신 주님의 동행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저들이 향하는 방향은 이제 곧 태양이 떠오를 동쪽을 향한 堧潔享윱求裏 저들은 부활의 주님을 만났고 말씀에 대한 올바른 앎을 가졌고 그로 말미암아 뜨거운 마음으로 사명의 길을 향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오직 누가복음에만 나오는 이 이야기, 엠마오 길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이 두 제자의 이야기는 복음서에서 가장 아름답고 감명 깊은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렘브란트를 비롯한 수많은 화가들이 이 장면을 화폭에 담았습니다. 왜 이 장면이 그렇게 아름다운 겁 까 엠마오 도상은 지리적인 어느 한곳에 고정된 자리가 아닙니다. 엠마오는 단순히 어떤 장소가 아니라 모순과 실망과 의심과 고통으로 뒤덮인 일상의 삶에서 어떤 의미를 찾고자 하는 사람이 가야할 하나의 여정입니다. 그리고 엠마오는 주님으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여정입니다. 주님은 말씀을 건네며 길동무가 되어주시고 나누고 베푸는 것이 죽음과 무감각 그리고 구석구석에 숨어있는 불신앙을 물리치는 길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십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엠마오는 자신이 불필요하고 쓸모없는 인간이라고, 내 인생은 여기서 끝났다고 자포자기하는 인생들에게 새로운 마음과 눈을 열어주는 비전의 자리이기도 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여정'이라든가 '길'이라든가 '걸어간다'는 단어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길 위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건입니다. '여정'과 '길'은 이 이야기의 특징적인 개념입니다. 이 개념들이 시사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주인공들이 음식을 먹기 위해 잠시 머 ゴ잔것 외에 이 여정은 결코 멈춰지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이 여정은 우리네 삶을 비유하는 대상이 됩니다. 이 두 사람은 그냥 살아가는 데 만족하지 않고 삶의 이유와 의미를 추구하며 무엇보다도 특히 장미빛 환상과 지극히 낙천적인 환영을 무너뜨리는 고통과 죽음의 이유와 의미를 찾는 모든 인간들을 대표합니다. 그런 이들에게 주님은 함께 하시며 저들의 삶의 의미, 毬ご纛텝역사를 알게 하시며 그 길에 동행해 주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저들과 함께 걷는다는 것은 주님은 결코 인간을 자신들의 운명에 홀로 버려 두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 길동무되시고 안내자되시는 분이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이 친히 저들과 함께 길을 가는 것은 저들을 하나님의 길을 가는 당신의 길 인도하셔서 저들로 참된 인생의 기쁨과 보람을 그 길에서 발견케 하기 위한 것입니다.
보십시오. 이제 저들 사이에는 더 이상 허탈한 말들이 오가지 않고 뜨거운 말이 오가고 있지 않습니까 '아아, 길에서 우리의 마음이 그토록 뜨거워진 것은 그랬었기 때문이야. 그분이 말씀을 풀어주실 때 우리의 마음이 불붙고 있었던거야.' 그 뜨거운 마음으로 骸湧멎자리를 박차고 사명의 자리 예루살렘을 향해 내달렸던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엠마오 길에 저들과 함께 동행하셨던 이분은 오늘 우리들과도 동행해주시는 부활의 주님이심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누가 나와 함께 울어줄 것입니까 누가 나와 함께 따뜻한 동행이 되어줄 것입니까 바로 우리 주님이십니다. 그분은 어 서나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심지어 인간의 끝자리, 죽음까지도 동행해 주시고 그 너머까지도 함께 하시는 분이십니다. 비록 힘들고 곤고해도 이분이 내 인생길에 아름다운 동행이 되신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사시기 바랍니다. 그분은 언제나 우리 곁에 함께 하시며 왜 사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무엇 때문에 살아야 하는지를 일러주십니다. 낙심하고 좌절하고 허망해하는 우리 곁 (우리를 북돋우시고 싸늘하게 식어가는 마음에 새로운 열정과 용기를 불어 넣어주시는 분이십니다. 여기 이러한 주님의 은총을 체험한 사람이 있습니다. 한때 우리나라 노동운동의 상징이었던 박노해가 바로 그입니다. 그의 본이름은 박기평이지만 노동해방의 약자로 박노해라는 필명을 썼었습니다. 그런 그가 지난 8년 동안 감옥에서 인고의 세월을 보내면서 새로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타났습니다. 김수환 추기경은 그런 그를 이렇게 소개합니다. '불의한 권력을 향해 몸바쳐 투쟁하는 삶에 치열했던 혁명가 박노해, 그가 이제 새로운 모습으로 우리 곁에 다가옵니다. 단지 외부의 적을 행해서만 목소리를 높이는 사상과 투쟁에서 나아가 삶의 안쪽에서 자기 자신 骸넵치열하게 투쟁하는 삶이 진정한 혁명적 삶이란 것을 깊이 깨우친 사람으로.' 감옥에서 하루도 새벽묵상을 멈추지 않았다는 그는 '굽이 돌아가는 길'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올곧게 뻗은 나무들보다는/휘어 자란 소나무가 더 멋있습니다/똑바로 흘러가는 물줄기보다는/휘청 굽이친 강줄기가 더 정겹습니다/일직선으로 뚫린 른 길보다는/산 따라 물 따라 가는 길이 더 아름답습니다/곧은 길 끊어져 길이 없다고/주저앉지 마십시오/돌아서지 마십시오/삶은 가는 것입니다/그래도 가는 것입니다/우리가 살아 있다는 건/아직도 가야 할 길이 있다는 것/곧은 길만이 길이 아닙니다/빛나는 길만이 길이 아닙니다/굽이 돌아가는 길이 멀고 쓰라릴지라도/그래서 더 깊어지고 환해져오는 길/서둘지 말고 가는 것입니다/서로가 길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생을 두고 끝까지 가는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주님은 엠마오길과 같은 우리네 인생길에 언제나 가장 아름다운 동행이 되어주시는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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