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절

TOP
DOWN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눅23:32-38)

본문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은 일곱 마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것을 흔히 가상칠언(架上七言)이라고 부릅니다. 이 말씀에는 그분의 가르침과 믿음이 군더더기 없이 응축되어 있습니다. 누가복음에서는 그 중 세 마디 말씀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 말씀은 용서의 기도였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오늘은 이 기도와 관련해서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의문점을 세 가지로 살펴보며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첫째, 이 기도는 가식인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후 제일 먼저 하신 말씀은 기도였습니다. 자기에게 악을 행하는 사람들을 용서해 달라는 기도였습니다. 이 기도는 너무나 숙연하고 이 기도에 배여 있는 그분의 생각과 감정은 비슷한 처지에 처한 다른 사람들에게서 관찰할 수 있는 것과 너무 달라서 사람이 정말 이렇게 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을 불러일으킵니다. 지난 7월 23일에 최후 순간까지 무죄를 주장했던 이탈리아계 미국인 사형수 조지프 오델(54)이 국내외 탄원과 압력에도 불구, 97.7.23일밤 결혼 8시간만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버지니아주 그린스빌 교도소에서 철제 이동침대에 누워 가죽벨트로 몸을 묶이고 양팔에 주사바늘을 꽂은 오델은 독약이 온몸에 퍼지기 직전 "앨런 지사, 너는 죄 없는 인간을 죽이고 있다"고 소리쳤다. 오델은 85년 2월 버지니아 비치에서 식당종업원을 강간 살해한 혐의로 86년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사형제 반대운동과 오델의 무죄주장으로 집행은 이날까지 미뤄져 왔다. 그의 구명운동에는 테레사수녀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이탈리아 정부를 포함, 수많은 인권단체들이 참여했다. 특히 이탈리아인들의 관심은 각별했다. 앨런 주지사가 받은 1만여통의 전화와 편지, 팩스 가운데 95%가 모두 이탈리아에서 왔다고 한다. 로마주재 미국대사관에는 사형제를 반대하는 이탈리아인들이 연일 시위를 벌였으며 TV는 사형장 밖에서 위성중계방송까지 했다. 예수가 특이한 존재로 후대에 기억되기를 원하여 마지막 순간에 의도적으로 연기한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 일반적인 의문입니다. 소크라테스와 같은 성인도 죽는 순간에 자기 양심을 깨끗케 하기 위하여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아크리톤, 아스클레피오스에게 닭 한 마리 빚진 것이 있으니 곧 갚아 주게나.” 그가 다른 사람을 생각해 준 것이 아니라 죽는 순간에 자기 양심을 깨끗케 하기 위하여 말한 것입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기도한 예수, 그는 과연 사람인가, 신인가 이것이 의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진심으로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십자가는 결코 연극 무대가 될 수 없습니다. 십자가 형벌의 고통은 결코 사람이 이것 저것을 생각하며 없는 것까지 꾸며낼 정도로 한가한 것이 아닙니다. 호흡곤란과 타오르는 목마름은 불구하고 머리와 몸이 쪼개지고 찢어지는 것 같은 상황인데 어떻게 그런 생각까지 할 수 있겠습니까 사람이 모진 고문을 당하다 보면 진실을 감추기는커녕 없는 사실도 강요받는 대로 긍정하게 되는 것이 실제 상황입니다. 이것 저것 생각하고 따지고 할 겨를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경우 강요된 것이 없었기 때문에 그분의 기도는 연기가 아니라 평상시의 생각과 행동이 그대로 드러난 진실이었습니다. 그분께서는 “아버지여” 하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분께서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이것은 진실입니다. 그분께서는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하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분께서는 무고한 자신에게 온갖 죄목을 씌우고 십자가 형에 처하는 사람들이 용서받기를 원하셨습니다. 이것은 진실입니다.
둘째, 왜 예수님은 친히 죄를 사하시지 않았나 예수님께서 사역 초기에 중풍병자를 보시며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선언하시며 “죄 사하는 권세”를 가지셨음을 사람들로 알게 하기 위하여 그 병자를 낫게 하신 적이 있었습니다(눅5:24). 그분께서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졌다고 주장하셨습니다. 심판하는 권세를 가졌다고 주장하셨습니다(요5:22,27). 영생을 줄 수 있는 권세를 가졌다고 주장하셨습니다(요8:28). 이 주장들은 그분께서 죄 사하는 권세를 가졌다는 주장을 뒷받침해 주는 것입니다. 심판할 수 있는 권세가 있으므로 죄를 사해 주실 수 있는 것이며 죄를 사해 줄 수 있는 권세가 있으므로 영생을 주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십자가 위에서는 그 권세를 직접 행사하시지 않고 하나님 아버지께 그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그들을 친히 용서하기에는 감정이 너무 격앙되었기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성부 하나님과 동등하시지만 자발적으로 자신을 낮추시고 그분을 높이시기 위해서 그렇게 하셨을까요 꼭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여기에는 지나칠 수 없는 중요한 진리가 있습니다. 십자가 위에 달리셨을 때 그분께서는 죄인들의 자리에 서신 것이었습니다. 죄인의 자리에 서서 그들의 죄를 담당하고 계신 것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시간만큼은 그 권세를 사용하실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사실상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시고 나를 정죄하옵소서” 하고 기도하신 것이었습니다. 다른 것으로는 죄를 사할 방도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사해 달라고 기도하신 “저희”는 누구일까요 그분의 손과 발에 쇠못을 박는 로마군인들이었습니다.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누가복음의 기록된 내용에 의하면 관원들이 비웃고 군병들이 희롱한 것은 이 기도 이후에 있었습니다. 그분이 그리스도라는 주장을 조롱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하셨을까요 그분이 왕이라는 주장을 조롱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하셨을까요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가로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도 함께 희롱하여 가로되,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저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 저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저를 기뻐하시면 이제 구원하실지라 제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 하며,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마27:39-44)
베드로전서 2장 22절에 의하면 어떤 사람들은 그분에게 욕을 했습니다. “저는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 궤사도 없으시며,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벧전2:22,23) 그렇다고 해서 그들에게는 저주하셨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분께서는 평소에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선으로 이기라는 내용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분께서는 누가복음 6장 28-29절 말씀을 실천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눅6:28-29) 또한 이 기도에서 우리는 죄인이 용서받게 되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마음도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응답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요11:41-42)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분께서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게 기도하신 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던 것입니다.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음이라 그러나 실상은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지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하시니라”(사53:12) 평상시에는 증오하다가 이제 그 증오심을 털어놓고 가는 모습이 아니다. 평상시도 용서와 사랑을 실천했다. 그렇게 때문에 더욱 위대한 것이다. 오순절에 3천 명이 회개한 것은 베드로의 설교에 대한 반응이라기보다 예수님의 기도에 대한 응답이라고 볼 수 있다. 그후 얼마 지나지 않아 “허다한 제사장의 큰 무리”가 복음에 굴복했다(행6:7). 그리고 유대 민족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3,40년 늦추어졌다.
셋째, 무지는 용서받을 수 있는가 예수님께서는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하고 기도하신 후에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고 덧붙이셨습니다. 그분께서 무지로 인한 행동에 대하여 고려하심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후에 베드로가 유대인들에게 설교할 때도 같은 취지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여서 그리 하였으며 너희 관원들도 그리 한 줄 아노라”(행3:17). 바울 사도도 “만일 알았더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박지 아니하였으리라”고 했습니다(고전2:8). 이러한 말씀들은 알지 못하고 저지르는 죄악된 행동에 대해서 법정 용어로 정상 참작의 여지가 있음을 시사하는 것 같이 여겨집니다. 그러나 무지는 자랑할 것이 못됩니다. 무지가 죄악에 대한 충분한 변명은 되지 못합니다. 만약 충분하다면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용서해 달라고 굳이 기도하실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무지가 죄의 질을 가볍게 할 수는 있어도 결코 용서의 근거가 되지는 못합니다. “주인의 뜻을 알고도 예비치 아니하고 그 뜻대로 행치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 무릇 많이 받는 자에게는 많이 찾을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눅12:47,48) 이것은 알고 죄를 범하는 자는 결코 관대한 처분을 기대할 수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주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죄인들을 위하여 기도하신 것은 우리에게 우리에게 본이 됩니다.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벧전2:21) 애매히 고난을 받은 것이었지만 선을 행하며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는 것이 하나님 앞에 아름다운 것임을 보여주셨습니다(벧전2:19-20). 그리고 악과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않고 도리어 복을 비는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벧전3:9).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 하여 체휼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이는 복을 유업으로 받게 하려 하심이라”(벧전3:8,9)

댓글목록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전체 29,555 건 - 1620 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