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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받은 사형수 (눅23:32-43)

본문

가상칠언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보라 네 어머니라”(요19:26,27)-어둠이 임함-“나의 여호와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27:46) “내가 목마르다”(요19:28) “다 이루었다”(요19:30)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23:46) 예수님께서 3시(오전9시)에 십자가에 달리셨고(막15:25), 6시에 어두움이 임했고 9시(오후3시)에 운명하셨다(막15:33). “때가 제 삼시가 되어 십자가에 못 박으니라”(막15:25) “제 육시가 되매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제 구시까지 계속하더니, 제 구시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지르시되.예수께서 큰 소리를 지르시고 운명하시다”(막15:33,37) 가상칠언 첫 번째 말씀은 용서의 기도였고 두 번째 말씀은 구원의 확신을 주시는 말씀이었습니다. 두 강도가 예수님 좌우편에서 함께 십자가에 달리게 된 것은 하나님의 연출이었고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이것은 죄인들 사이에 주님께서 계심을 상징하는 장면입니다. 이것은 죄인들에게 주님께서 지극히 가까이 계심을 상징하는 장면입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죄인들과 같이 되셨음을 상징하는 장면입니다. 이것은 주님의 우편에 있는 자는 구원받고 좌편에 있는 자는 저주와 심판을 받게 된다는 영적 진리를 상징하는 장면입니다. 이러한 진리를 이보다 더 강력하게 다룰 수 있는 장면을 과연 누가 연출할 수 있겠으며 어느 화가가 그려낼 수 있겠습니까.
첫째, 구원은 즉각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십자가 위에 못 박히신 예수님은 십자가 아래에 모여든 사람들에게서만 조롱과 멸시를 받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분과 함께 못 박힌 두 행악자들조차 그분을 비방하고 욕했습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는 두 사람이 다 예수님을 욕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마27:44)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자들도 예수를 욕하더라”(막15:32) 본문 39절의 “비방하다”는 미완료시제로 되어 있습니다. 한 차례 비방하고 그친 것이 아니라 계속 그렇게 했음을 뜻합니다. 그러다 두 사람 중 하나가 어느 순간에 심정의 변화를 보였습니다. 죽음의 순간이 점점 다가옴을 감지했을 것입니다. 자기에게 온갖 몹쓸 짓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용서를 구하시는 예수님의 기도 모습이 떠올라 양심의 가책으로 괴로움을 견딜 수 없었던 듯합니다. 지난 날 예수님에 대해서 보고 들었던 것이 생각났던 듯합니다. 마침내 그는 자기 동료를 꾸짖고 그의 비방을 저지했습니다.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그리고 예수님을 향해 신앙을 고백했습니다.
“예수여 당신이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주님께서는 그에게 낙원을 약속하셨고 소망을 심어주셨습니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짧은 말이었지만 우리는 이 행악자의 말에서 자기의 죄에 대한 시인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가 죄로 인해 심판받는 것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나라가 임할 것을 믿었습니다(“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예수님께서 왕이심을 믿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구원하실 권세를 가지셨다고 믿었습니다(“나를 생각하소서”). 자신이 죄로 인해 죽고 심판받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회개한 후 예수를 구주와 주님으로 영접하는 사람은 구원을 받습니다. 이 강도가 그렇게 하기까지 시간이 얼마나 걸렸겠습니까 불과 몇 분 안 걸렸습니다. 복음의 진리가 깨닫고 믿어지기까지는 사람에 따라 걸리는 시간이 다르겠지만(지적 능력, 경험, 환경 때문에) 일단 깨닫고난 후에 참된 회개와 믿음이 이루어지면 “즉각적으로” 구원받습니다. 십자가에 달린 두 행악자는 가장 흉악한 죄인이었습니다. 사법적인 잣대로 잴 때 이들이 지은 죄보다 더 심각하고 더 중한 죄는 없습니다. 그들은 평화로운 사회에 폭동을 일으켰습니다. 물건을 약탈했습니다. 사람을 죽였습니다. 십중팔구 통치권에 저항했습니다. 이 이야기는 이러한 죄인도 회개하고 믿으면 구원받을 수 있음을 가르쳐 줍니다. 따라서 세상 사람들 중에서 구원받지 못할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단지 회개하기를 거부하고 예수님을 구주로 믿기를 거부하기 때문에 구원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다만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롬2:5) 또한 사람이 십자가 위에서도 구원받을 수 있었다면 이 세상에서 구원받을 수 없는 장소는 한 군데도 없음을 이 사건이 가르치고 있습니다. 복음은 장소에 구애받음 없이 들려져야 합니다.
`실인공장' 지존파 사형수 6명 "눈물의 참회" '오늘 저녁예배를 드리는 도중 저도 모르게 하염 없는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동료들에게 보이지 않기 위해 참으로 혼났습니다. 천하에 제가 눈물을 흘리다니….' 오는 28일이면 지존파가 검거된지 만 1년이 된다. 그 1년 동안 지존파는 한 교회집사에게 1백여통의 편지를 보냈다. 내용은 죄과를 참회한다는 것. 모든 책임을 [압구정동 야타족]에게 돌린 강동은, 인육을 먹은 김현양을 비롯, 고개를 빳빳이 들고 죄를 뉘우칠 줄 몰랐던 두목 김기환까지 1백80도 돌변한 모습이었다. 편지로나마 죽음을 앞둔 이들의 마음을 돌린 이는 서울 서초구 [사랑의 교회] 이재명집사(53). 이집사는 지난 해 지존파사건이 언론에 보도된 뒤 이들이 감금돼 있는 서울 구치소에 꾸준히 영치금과 편지를 전달했다. 첫 답장이 온 것은 지난 해 10월말. 김기환은 '제가 저지른 사건이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잘못됐음을 선생님 앞에 처음으로 고백합니다'라는 말로 참회를 시작했다. 김현양은 '지난 날 사탄의 굴레에서 사회를 어지럽히던 김현양이 하나님의 종이 되었다고 전해 주세요'라고 부탁했다. 이집사는 "처음엔 영치금과 편지에 대한 순간적인 감사의 표시 로만 알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편지는 계속됐고, 교도관에게 전해 듣는 그들의 수형생활도 모범적으로 변해 갔다. 지난 5월20일 6명 전원에 대한 사형이 확정되자 [감방전도사]로 돌변해 다른 사형수를 교화시키는 일에 힘을 쏟고 있다는 소식도 들었다. 강동은은 최근 참회의 편지에서 '저같은 죄인도 하나님께서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실까요'라고 썼다. 이집사는 '지존파 6명은 이제 예수님의 제자와 마찬가지'라고 답장했다.
둘째, 구원은 은혜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구원이 은혜로 값 없이 주어지는 것인가 아니면 선행의 대가로 주어지는 것인가는 기독교계에서 오랫동안 논란되어 온 문제입니다. 본문은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이 될 수 있습니다. 회개한 강도에게 예수님께서 낙원을 약속하셨다는 사실은 틀림없이 그가 구원받았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그가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은 것은 숨이 끊어지기 불과 서너 시간 전이었습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그가 어떤 선한 일을 했습니까 게다가 그는 자유로운 몸도 아니고 십자가에 못 박혀 매어달린 상황이었는데 그런 상황에서 무슨 일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 강도는 행위와 관계 없이 구원받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한 번 더 살펴보기 바랍니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예수님께서 그 강도에게 어떤 조건을 제시하시고 그 이후로 그가 그 조건을 충족시키면 낙원에 갈 수 있다고 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회개하고 믿자 그에게 낙원을 보장하신 것입니다. 6개월, 1년, 3년 동안 선행을 하고 나면 낙원에 가게 될 것이라고 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늘이라도 이 땅에서의 삶이 끝나면 낙원에 있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행위와 관계 없이 회개하고 믿는 자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푸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믿음만으로 구원받는다는 진리를 의심하는 무리를 의식하신 듯 강조하시기 위해서 “진실로”를 덧붙이셨습니다. 그 말씀은 진실이었습니다. 성경은 이 진리를 계속 강조하고 있습니다.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되지 못하느니라”(롬11:6)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 바,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롬4:4-8)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엡2:8-9) 만일 구원받기 위해서는 은혜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정하실 만한 선한 행위가 조금이라도 필요하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구원이 은혜로 말미암는 것임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행위가 개재된 것은 결코 공짜라고 말할 수 없고 공짜가 아닌 것은 성경적인 의미에서 결코 은혜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경험은 아니라고 말하게 되어 있다. 유대교인들이 그러했고 지금도 그러하다. 천주교가 그러하다. 지난 500년 동안 사람들이 믿음으로만 의롭다 하심을 얻는냐 아니냐 하는 문제는 카톨릭인들과 복음주의자들 간의 신학적 논쟁의 주요쟁점이 되어 왔다. 카톨릭교회는 트렌트 종교회의에서 칭의에 관한 카톨릭의 견해를 정했다. 그 작업은 1545년에 시작되어 거의 20년간이나 계속되었다. 그 종교회의가 결정해야 할 사항들 중 칭의 교리문제는 우선순위에 들어 있었다. 칭의에 관한 교회법과 제정은 1547년 제6회기 때 작성되었다. 그때 내려진 결정이 개신교의 종교개혁에 대한 카톨릭 교회의 답변이었다. “만일 칭의의 은혜를 얻기 위해 협력하는 데 믿음 이외의 다른 것은 전혀 필요하지 않다는 의미에서 죄인은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으면.그 사람은 파문을 당할 것이다”(제6회기, 제정9) “만일 하나님 앞에서 얻은 칭의는 선행으로 끝까지 지켜지거나 증진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리고 그 선행은 칭의를 증진시키는 원인이 아니라 오히려 칭의의 열매요 표시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은 파문을 당할 것이다(제6회기, 제정24)
“만일 은혜는 새로운 법에서 정한 성례전들(트렌트 종교회의 제7회기에서 정한 영세, 견진, 성체, 고해, 종부, 신품, 혼배성사)을 통해 ”이루어진 행동“으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만으로도 충분히 획득할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은 파문을 당할 것이다”(제7회기, 8장) 칭의는 점진적이 아니라 즉각적이다. 성전에서 회개 기도한 세리는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으로 돌아갔다(눅18:14). 신자가 칭의되는 것은 현재나 미래시제가 아닌 과거시제이다(롬5:1,9). 칭의는 그 죄인이 실제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의롭다고 선언하는 것을 말한다. 칭의는 그 죄인의 영혼 속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법정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그것은 죄인의 본성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죄인의 신분을 바꾸는 것이다. 물론 회심하는 순간 그 죄인의 본성은 기적적으로 변한다. 글래서 이전 것은 지나가고 새 것이 된다. 그러나 그 신자 안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변화는 중생 및 성화와 관련이 있는 것이지 칭의가 아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느니라”(롬11:6). 1962년에 교황 요한 23세가 제 2회 바티칸 종교회의를 열었다. 표면적인 목적은 카톨릭 교회를 새롭게 하고 다른 종교와의 대화를 통하여 전세계적인 종교연합을 꾀하자는 것이었다. 그 종교회의는 1962년 10월에 소집되어 1965년까지 모두 네 번의 회기를 가졌다. 이 종교회의는 트렌트 종교회의 이래 카톨릭 교회의 관습에 가장 광범위한 변화를 시도한 종교회의이다. 그것은 미사 때 라틴어로 하지 않고 자국어로 할 것을 허용하는 등 의식에 많은 수정을 가했으며, 평신도들에게는 성경을 경건히 읽을 것을 권했다. 이전에는 성경 읽는 사람을 사형에 처했었다. 카톨릭 교회의 예배의식을 갱신하여 간소화했으며 대화와 일치를 호소했고, 전쟁, 인간의 존엄성, 사회 정의 및 종교적 자유와 같은 문제들에 관해 정치적, 철학적 선언을 많이 했다. 또 개신교, 유대교, 회교, 힌두교 등 모든 다른 종교와 대화할 것을 제안했다. “트렌트 종교회의에서 주장된 교리적 원리들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고 선언함으로 그 종교회의가 한 일을 공식적으로 승인했다.
셋째, 구원은 사람이 선택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구원받을 자를 예정하셨다는 것은 성경의 진리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애쓰지 말고 가만히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성경은 그 반대로 행할 것을 명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고 명하고 있습니다(행3:19). “주 예수를 믿으라”고 명하고 있습니다(행16:21). 회개하고 믿는 것은 우리의 선택입니다. 우리가 회개하고 우리가 믿을 수만 있다면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는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구원은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입니다. 흉악무도한 사형수가 뻔뻔스럽게 구원을 요청할 수 있었다는 사실보다 더 놀라운 일은 예수님께서 그 요청을 너무도 당연하게 들어주셨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이 은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그렇게 하시기를 기대하시며 기쁘게 구원하여 주십니다. 어떤 신학자는 구원받은 강도를 가리켜 “그는 진짜 강도였다”고 했습니다. 평생동안 도둑질을 하다가 죽음 앞에서 한 마디의 말로 천국을 훔쳤기 때문입니다.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마11:12) 그 날에 골고다 언덕에는 세 사람이 십자가에 달렸으나 죽은 사람은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어느 날 골고다에 세 사람 죽었으니 한 강도와 그리스도, 그리고 다른 강도가 십자가형을 받도다. 한 강도에게 십자가는 너무 늦지는 않은 소망의 십자가였으되, 동료 강도는 증오의 십자가에서 죽어가는도다. 그 두 강도들 사이의 간격보다 더 넓은 공간은 없으리라. 그들 사이에서, 그들을 위하여 그리스도 달리시어 죽으셨네-도로시
B. 톰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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