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의 복음 (눅23:33-34)
본문
오늘날 십자가는 기독교의 상징으로 보편화되어 있습니다. 예배당을 표시하기 위해서 뾰족탑 위에 십자가를 달아놓습니다. 여성들은 악세사리로 십자가 목걸이를 하여 기독교인임을 나타냅니다. 또 무덤 위에도 십자가를 꽂아놓아서 묻힌 사람이 기독교인임을 표시합니다. 그러나 기독교 역사를 살펴보면 최초의 상징은 십자가가 아니었습니다. 로마에는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핍박을 피해서 모였던 곳이 있는데 바로 지하 공동묘지 카타콤입니다. 이곳의 벽면과 천장에 그려진 그림에는 비둘기, 월계관, 물고기 등이 상징으로 등장합니다.
그렇다면 왜 기독교의 상징이 십자가로 바뀌어 정착되었을까요 한 마디로 답변하다면 십자가가 기독교의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존 스토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에 대한 그들의 이해와 중심을 표시하는 기념물로서 무엇을 택했느냐 하면, 그분의 탄생이나 청년 시 절을 택하지 않았고, 그분의 가르침이나 봉사를 택하지도 않았 으며, 그분의 부활이나 통치를 택하지 않았고, 그분의 성령님의 은사를 택하지도 않았으며, 도리어 그분의 죽음, 곧 십자가에 달리심을 기념하고자 했던 것이다”(그리스도의 십자가, 25쪽). 사복음서 기자들은 예수님의 생애와 사역을 기록하는 데 있어서 지나칠 정도로 많은 지면을 그분의 마지막 주간과 죽음에 할애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은 5분의 2, 마가복음은 5분의 3, 누가복음은 3분의 1, 그리고 요한복음은 거의 2분의 1을 예루살렘 입성과 승천 사이의 사건에 할애하고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전서 1:18-25에서 십자가의 도를 언급하며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전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갈라디아서 6:14에서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고 선언합니다. 십자가는 기독교의 중심이기 때문에 당연히 그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더구나 그 말씀은 죽음의 순간에 하신 것입니다. 사람은 죽는 순간에 자신에 대하여 가장 진실하게 됩니다. 가식과 위선에 가득찬 사람도 본심을 털어놓게 됩니다. 죽음을 조롱하듯 담대하게 자청했던 지존파 일당도 죽음의 순간에는 사악한 모습을 거두고 참회했습니다. 그분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기 직전에 하신 첫번째 말씀이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입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영웅 행세를 하기 위해 연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연기장소가 아닙니다. 이 죽음은 무대의 셋팅이 아닙니다. 그분께서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첫째로, 이 말씀에는 예수님의 신성이 나타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시게 된 것은 유대교 지도자들의 잘못된 판단과 시기 때문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지극히 거룩하신 분으로 인식한 나머지 그분의 이름조차 입에 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불렀기 때문에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라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이를 인하여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만 범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요5:18) 예수님께서는 붙잡히신 후에 유대인 최고 법정인 산헤드린에서 재판받으셨는데,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는 신문에 당당하게 “너희 말과 같이 내가 그니라”고 대답하셨습니다(눅22:70). 그리고 십자가 위에서도 하나님을 아버지라 호칭함으로써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분명하게 나타내셨습니다.
둘째로, 이 말씀에는 예수님의 무죄가 나타나 있습니다. 거룩한 신앙생활을 한 사람일지라도 죽는 순간에는 전능자에게 자신의 죄와 부족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달랐습니다. 그분은 자신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신 것이 아니라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는 사람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분에게는 죄가 조금도 없었습니다. 이것은 성경의 일관된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셋째로, 이 말씀에는 예수님의 대속물 되심이 나타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중풍병자에게 죄 사함을 선언하시면서 자신에게 죄 사하는 권세가 있음을 주장하셨습니다(눅5:20,2
4).
그렇다면 이 순간에도 그 권세를 사용하시면 될텐데 왜 그렇게 하시지 않고 하나님께 간구한 것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가지시는 권세를 주장하실 수 없는 형편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고 가르쳐 줍니다(히9:22). 예수님은 이 진리를 알고 계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라는 기도에는 “죄 없는 나를 흠 없는 어린양으로 보아 정죄하시고 십자가 위에서 흘리는 내 피로 저희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라는 의미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인간적인 관점에서 보면, 유다가 예수님을 대제사장에게 넘겨주었고(paradidomi, 마26:14-16), 대제사장은 다시 그분을 빌라도에게 넘겨주었고(마27:18), 빌라도는 그분을 군병들에게 넘겨주어서(마27:26) 군병들이 그분을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성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내주셨고(롬8:32), 예수님께서도 자신을 내주셔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것입니다(요10:11,18). 예수님께서는 죄 사함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셨습니다. 그 기도는 응답되었습니다. 문제는 용서란 베풀어져야 할 뿐만 아니라 받아들여져야 한다는 데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기도로 모든 사람이 죄 사함 받을 수 있게 되었지만 모든 사람들이 그 용서를 받아들인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왜 기독교의 상징이 십자가로 바뀌어 정착되었을까요 한 마디로 답변하다면 십자가가 기독교의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존 스토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에 대한 그들의 이해와 중심을 표시하는 기념물로서 무엇을 택했느냐 하면, 그분의 탄생이나 청년 시 절을 택하지 않았고, 그분의 가르침이나 봉사를 택하지도 않았 으며, 그분의 부활이나 통치를 택하지 않았고, 그분의 성령님의 은사를 택하지도 않았으며, 도리어 그분의 죽음, 곧 십자가에 달리심을 기념하고자 했던 것이다”(그리스도의 십자가, 25쪽). 사복음서 기자들은 예수님의 생애와 사역을 기록하는 데 있어서 지나칠 정도로 많은 지면을 그분의 마지막 주간과 죽음에 할애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은 5분의 2, 마가복음은 5분의 3, 누가복음은 3분의 1, 그리고 요한복음은 거의 2분의 1을 예루살렘 입성과 승천 사이의 사건에 할애하고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전서 1:18-25에서 십자가의 도를 언급하며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전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갈라디아서 6:14에서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고 선언합니다. 십자가는 기독교의 중심이기 때문에 당연히 그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더구나 그 말씀은 죽음의 순간에 하신 것입니다. 사람은 죽는 순간에 자신에 대하여 가장 진실하게 됩니다. 가식과 위선에 가득찬 사람도 본심을 털어놓게 됩니다. 죽음을 조롱하듯 담대하게 자청했던 지존파 일당도 죽음의 순간에는 사악한 모습을 거두고 참회했습니다. 그분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기 직전에 하신 첫번째 말씀이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입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영웅 행세를 하기 위해 연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연기장소가 아닙니다. 이 죽음은 무대의 셋팅이 아닙니다. 그분께서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첫째로, 이 말씀에는 예수님의 신성이 나타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시게 된 것은 유대교 지도자들의 잘못된 판단과 시기 때문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지극히 거룩하신 분으로 인식한 나머지 그분의 이름조차 입에 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불렀기 때문에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라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이를 인하여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만 범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요5:18) 예수님께서는 붙잡히신 후에 유대인 최고 법정인 산헤드린에서 재판받으셨는데,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는 신문에 당당하게 “너희 말과 같이 내가 그니라”고 대답하셨습니다(눅22:70). 그리고 십자가 위에서도 하나님을 아버지라 호칭함으로써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분명하게 나타내셨습니다.
둘째로, 이 말씀에는 예수님의 무죄가 나타나 있습니다. 거룩한 신앙생활을 한 사람일지라도 죽는 순간에는 전능자에게 자신의 죄와 부족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달랐습니다. 그분은 자신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신 것이 아니라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는 사람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분에게는 죄가 조금도 없었습니다. 이것은 성경의 일관된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셋째로, 이 말씀에는 예수님의 대속물 되심이 나타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중풍병자에게 죄 사함을 선언하시면서 자신에게 죄 사하는 권세가 있음을 주장하셨습니다(눅5:20,2
4).
그렇다면 이 순간에도 그 권세를 사용하시면 될텐데 왜 그렇게 하시지 않고 하나님께 간구한 것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가지시는 권세를 주장하실 수 없는 형편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고 가르쳐 줍니다(히9:22). 예수님은 이 진리를 알고 계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라는 기도에는 “죄 없는 나를 흠 없는 어린양으로 보아 정죄하시고 십자가 위에서 흘리는 내 피로 저희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라는 의미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인간적인 관점에서 보면, 유다가 예수님을 대제사장에게 넘겨주었고(paradidomi, 마26:14-16), 대제사장은 다시 그분을 빌라도에게 넘겨주었고(마27:18), 빌라도는 그분을 군병들에게 넘겨주어서(마27:26) 군병들이 그분을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성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내주셨고(롬8:32), 예수님께서도 자신을 내주셔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것입니다(요10:11,18). 예수님께서는 죄 사함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셨습니다. 그 기도는 응답되었습니다. 문제는 용서란 베풀어져야 할 뿐만 아니라 받아들여져야 한다는 데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기도로 모든 사람이 죄 사함 받을 수 있게 되었지만 모든 사람들이 그 용서를 받아들인 것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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