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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죽음의 의미 (눅23:3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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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일에는 우리 나라 철도 사상 유례없는 대형 사고로 많은 사람들이 졸지 에 죽음을 당한 비극의 현실을 보았습니다. 너무나도 끔직스러운 장면들이 텔레비 죤 화면에 비쳐져 보기도 민망한 장면들이었습니다. 그것도 인재란 것에 대하여 온 국민은 다시 한번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었습니다. 사람이 언젠가는 한번의 죽음은 누구에게나 다 당할 것이지만, 너무나도 비참하 게 죽어간 모습들을 보면서 동정과 연민의 정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람이 한평생 살다가 죽는데는 여러 가지의 죽음의 종류들이 있습니다. 위에서 처럼 사고로 죽는일이 있는가 하면, 재난으로 인한 사망이 있고, 그런가 하면 전쟁으로 인한 죽음이 있는가 하면, 또한 병으로 인한 죽음도 있습니다. 모두 가 죽음의 직접적인 원인이야 무엇이던 간 사람은 모두 죽는 존재란 것에는 의의가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가 어떤 죽음으로 죽었느냐 하는 것으로 그 죽음의 의미를 각각 다르게 부여합니다. 저는 지난주 신문에서 연세대학에 입학한 금년도 신입생이 선배들과 함께 술을 먹고 토하다 기도가 막혀 죽었다는 기사를 보면서 참으로 어이없는 죽음이라고 보 았습니다. 요즘 대학의 풍토 중에 하나가 신입생들에게 못 먹는 술을 퍼 먹이는 것 이 관례가 되어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우리네 대학 문화가 언제나 좀더 향상될 수 있을까 하는 아쉬움이 컸습니다. 못 먹는 술을 먹고 기도가 막혀 죽었다면, 그러 한 죽음이 주는 의미는 도대체 무엇이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우리가 생각하는 또 하나의 죽음은 그런 것과는 전혀 다른 죽음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것이 우리 주님의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1.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사고나, 재난이나,질병이나, 전쟁으로 인한 죽 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그렇게 죽지 안하야 할 그분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스스로 그러한 죽음을 택한 죽음이었습니다. 아니다른 사람의 죄를 대신하여 죽은 대속의 죽음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고 하였습니다(사53:5). 목숨은 하나뿐입니다. 일회적인 삶을 살다가 누구나 한번은 죽는 것이 엄연한 사실이지만, 그러나, 그 죽음이 무엇을 위한 죽음이었느냐 하는데 따라서 의미는 달라집니다. 한나라의 애국지사들을 떠받드는 것도 그들의 죽음이 나라를 사랑 하는 일에서 죽었기 때문이고, 동상을 세워 그 공적을 기리는 것을 보면, 모두가 그들의 죽음이 자신을 위한 죽음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역사는 언제나 이렇게 죽 은 사람들을 찾아내어 진실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죽음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어야 했습니까 또 십자가의 예수님의 죽음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다는 것입니까
2. 우리는 그가 십자가상에서 한 7곱마디 말중에서 그의 죽음의 의미를 올바 로 깨닫게 됩니다. 누구나 죽으면서 한 말들은 귀담아 듣고, 또 그런말은 진실로 받아드리는것이 사실임으로 십자가상에서 하신 우리 주님의 말씀을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첫번 째로 한 말씀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라는 말이었습니다. 두번째로 한 말씀은,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고 하였고, 세번째로 한 말씀은,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 이다 라고 하였고, 네번째로 한 말씀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라고 하였고, 다섯번째로한 말씀은,내가 목마르다 고 하였고, 여섯번째로한 말씀은,다-이루었다 고 하였고, 일곱번째로한 말씀은,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 하나이다 라 고. 우리가 이 말중에서 첫번 째와 맨 마지막 한 말을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의 무지한 죄들을 용서하는 말씀이었고, 그것을 위하여 마지막까지 다-이루었다고 하 면서 자신의 영혼을 하나님께 부탁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까지 전 인류의 죽음중, 이렇게 죽은 죽음이 또 어디에 있겠는가! 모두가 자신을 위하여 살다가 죽는죽음뿐입니다. 아무리 남을 위한다고 하지만, 결국 우리 인간은 욕심으로 인하여 자지 중심적으로 살다가 죽는존재들임을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또한 누구나 사람은 아무도 남의 죄를 대속할수 있는 죽음은 못됩니다. 물론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사랑이 없다고 하였지만, 설사 그런 죽음이 있다손 치더라도 죄를 씻을 수 있는 십자가의 죽음은 아니란 것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만이 우리의 죄를 씻기는 죽음인 것입니다.
3. 그러기에 그의 죽음이 우리에게 주는 깊은 뜻은 죄를 사하여 주는 죽음이 란 데 있습니다. 우리가 만일 예수의 죽음을 감상적으로, 또는 인간적인 연민으로 만 생각한다면 그처럼 잘못된 생각은 없습니다. 그의 죽음은 나의 죄를 사하시려는 죽음이란 것입니다. 그렇게 믿어야 합니다. 이 믿음 속에 지금도 구원의 역사는 이루어집니다. 그좋은 예가 바로 강도의 구원입니다. 주님의 십자가가 강도들과 함께 세워졌다는 것은 퍽 상징적 의미가 깊습니다. 우리 모두들은 자기가 지은 죄 값으로 죽어 마땅한 강도들과 같은 존재들입니다 강도들은 자신의 지은 죄 값으로 죽는자들이 었으나, 예수는 그렇지가 아니했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신비로운 구원의 역사가 있습니다.
그런데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강도라고 다 구원 받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옳은편 강도만 구원받았습니다. 옳은편 강도가 구원을 얻었다는 그 사실에서 우리의 죽음의 문제가 해결되고 새 로운 소망과 생명의 길이 열리게 된 것을 보게 됩니다. 강도는 우리 모든 죄인들의 대표자입니다. 즉 자기 죄로 죽을 존재들이란 것입니다. 한평생 죄중에 살다가 강도가 되어 잡혀서 죽게되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바로 죽을 죄인인 인생 전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즉 강도처럼 살다가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들이 바로 우리들 자신들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그런 강도가 어떻게 구원을 얻었습니까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를 쳐다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고 예수를 영접해 들였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나라에 임할 때 나를 기억하여 달라"고 입으로 고백했기 때문입니다. 구원 얻는 비결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면 구원에 이른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도 죄중에 살다가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한번의 기회는 있습니다. 십자가의 예수를 바라볼 수 있는 단 한번의 기회는 누구에게나 다 있습니다. 죽을 죄인이 살수 있는 유일한 길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쳐다보아야 합니다.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라고 기도하는 예수를 옳은편 강도는 쳐다보았 습니다. 그리고 고백했습니다. 이것은 이미 출애굽 과정에서 구리 뱀의 사건에서 보여준 사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와 아론을 원망할 때, 광야에서 갑짜기 독사들이 나와 모두 물려 죽게 되었습니다. 이때 모세는 하나님 앞에 울부짖는 기도를 했더니, 하나님께서 구리 뱀을 만들어 장대에 세워 누구든지 쳐다보는자들은 살리라 하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곧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누구든 지 구리 뱀을 쳐다보는자는 살았듯이 십자가를 쳐다보면 구원에 이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최후의 기도가 이 강도의 기도처럼, "주여! 당신의 나라에 임 할 때, 나를 기억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의 선물이지, 행위의 보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기독교의 구원관을 잘못 알고 있습니다. 구원을 얻으려면 무엇인가 선한 행위를 많이 쌓아 적선을 해야 되는 줄로 그렇 게 잘못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얻은 구원이라면 은혜로 얻은 것이 아니고 자신의 노력으로 얻은 보상일 뿐입니다. 그래서 아직도 유교적인 기독교인들이 많습니다. 율법주의적 기독교인이 많다는 말입니다. 계율과 행위 속에서 완벽을 기하려는 철저한 크리스천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이런 사람들에게는 복음의 은총이 그렇게 감격스럽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 대신 모든 사람들을 비판하고 정죄하는 일에만 급급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은 바로 그런 사람들까지도 위한 죽음이라는데 더 큰 의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구원관이야 말로 인간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독특한 구원관입니다. 강도까지도 구원 얻었는데.우리가 왜 구원 얻지 못하 겠습니까 행위대로 보면 우리는 다 십자가에 달린 강도처럼 죽어야 할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저들이 저희의 하는 일을 알지 못 함이니 이다" 라고 기도하는 예수님이 있기에 구원에 이르게 됩니다. 이제 우리는 얼마나 많은 것을 가지고 자색 옷을 입고 살았느냐 가 아니라, 어 떻게 죽을 수 있겠는가 가 문제입니다. 오늘도 수많은 죽음을 보면서 이 한주간동안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이 의미하는 뜻을 나와 결부시켜 바르게 생각하면서, 구원의 은총을 감격하며 강도의 구원이 의미하는 뜻을 널리널리 전하도록 힘써야 하겠습니다. 이 이상 더 기쁜소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4. 그러면 이 한주간 주님의 고난에 동참한다는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소극적인 의미로 만 생각할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의 고통을 묵상하며 절제된 생활을 하는 것으로 만 생각하지 말고, 거기에 한걸음 더 들어가야 하겠습니다. 주 님이 강도 같은 자들까지도 구원시키기 위하여 죽으셨다면, 그 죽음이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하여 하찮은 한 생명을 천하보다 더 귀하게 여기는 운동에 참여하여야 하겠 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결국은 한 생명 구원시키는 전도 운동입니다. 선교 사업입니다. 바울은 '주님의 남은 고난' 을 주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자신의 육체에 채우노 라고 하였습니다. '주의 남은 고난'이란 한 생명 구원시키려는 전도 운동입니다. 전도를 위한 고난입니다. 선교를 위한 희생입니다. 그 희생이 시간이든, 재능이든, 권리이든, 재물이든, 다 좋습니다. 그것을 포기하고 희생하는 일이라면, 그것이 바 로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일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처럼 이기주의적인 시대도 없었습니다. 신앙생활도 지극히 타산적으로 흘러 가는 시대입니다. 주님의 몸된 교회라고 하지만, 교회도 내게 손해를 끼치지 않는 범위 안에서 봉사도 하고, 교제도 하려고 합니다. 교회를 위해 희생이란 엄두도 못 냅니다. 그런 것은 모두 장로나 목사들에게나 해당되는 말이고 나와는 아무런 관계 없는 말이라고 관심조차 못 가집니다. 자신을 위해서는 몇 만원 몇10만원을 쉽게 쓰면서도 '주님의 남은 고난' 을 위 하여는 사용하자는 선교 헌금을 위하여는 왜 그렇게 액수가 낮아지는 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면서 한끼 금식이나 하고, 그러면서 적선의 흉내만 낸다고 그것이 주님 의 고난에 동참하는 줄 알고 있는 나태한 생각들을 떨쳐 버려야 하겠습니다. 오늘의 주님의 십자가의 의미는 강도를 위한 죽음이라기 보다는, 이제는 냉냉해 진 소위 타성 화된 그리스도인들을 위하여 십자가에 달렸다고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차라리 강도라면 진지한 회개의 고백의 기도라도 있었으련만, 도리어 성도라는 호칭을 들으며 있는 우리들이기에 회개마져 매 말라진 상태에 있는 것이 아닐까 깊이 반성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 한주간 우리는 과거 어느때 보다, 나라 전체가 무엇인가 새로워져 야 하겠다는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된 것처럼, 우리 교회들도 과거의 타성에서 벗어 나 자체 회개 운동과 갱신 운동을 우리 마음에서도 부터 시작해야 할 때라고 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리스도 몸이 십자가에 달린 것처럼, 오늘의 교회는 이 세상을 위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고민하며, 땀방울이 피 방울리 되어 떨어지는 진지한 기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리는 아픔까지도 감수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은, 자기를 따라오려거든 먼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쫓지 않는자마다 합당 치 않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고난의 동참한다는 것은 주님을 위해 십자가 (아픔을) 나누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나를 위한 아픔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세상에서는 이것을 위선이라고 매도하지만,2000년전 십자가의 주님이 그러했듯 이 십자가는 십자가로 이겨내야 합니다. 우리의 영광은 바로 이 십자가 다음에 있는 부활의 승리에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위해 쓰여진 시간들이 있습니까 주님을 위해 받쳐진 물질들이 있습니까 주님을 위해 양보한 권리의 포기들이 있습니까 아니, 주님을 위해 더 좋은 기회를 포기한 희생이 있습니까 그것이 바로 주님의 고난에 동참한 흔적일 것입니다. 바울은 이 흔적을 자신의 육체 속에 남기고 간다고 하였습니다. 고난 주간을 보내는 우리들의 올바른 자세가 무엇이라고 생각되십니까 그의 죽음의 의미를 바로 깨달아, 그의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그의 남은 구령 사역에 동참하는 일이라고 봅니다. 모쪼록 성령님께서 감동하시어 주님과 함께 하는 이 한주간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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