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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여, 나를 생각하소서 (눅23:39-43)

본문

제2차 세계대전 때 악명 높았던 헐레스코스라는 지방에는 6백만의 유태인을 비참하게 집단 학살한 인간 가마솥이 있었습니다. 선민(選民)으로서의 강한 자 부심을 가졌던 유태 민족이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소나 개만도 못한 대우를 받 으며 남녀 노소할 것 없이 가마솥에서 연기로 사라져 버렸습니다. 이에 위제이 라는 사람은, "하나님은 죽었다. 만일 하나님이 살아 있다면 나는 원고요. 그는 피고다."라는 글을 썼습니다. 그는 자기 민족이 처한 비참한 현실을 통탄해 하며 원고의 심정이 되어 하나님을 고소하였습니다. 죽어가는 가운데 '하나님, 당신은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당신은 왜 우리에게 이런 일들을 허용하셨는지요'라는 말들 을 무수히 되뇌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연합군이 유태인들이 죽어갔던 수용소를 탈환하여 수용소의 벽을 검사하다가 벽의 외진 한 구석에 희미하게 씌여진 찬 송가의 가사를 보고 깜짝 놀라게 되었습니다. 거기에는 어느 그리스도인이 신 앙 고백으로 기록한 것처럼 보여지는 찬송가의 한 구절이 적혀 있었습니다. '404장1절'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말로 다 형용 못하네 저 높고 높은 별을 넘어 이 낮고 낮은 땅위에 죄 범한 영혼 구하려 그 아들 보내사 화목제로 삼으 시고 죄 용서하셨네 하나님 크신 사랑은 측량 다 못하며 영원히 변치 않는사랑 성도여 찬양하세 " '404장3절'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한없는 하나님의 사랑 다 기록할 수 없겠네 하나님의 크신 사랑 그 어찌 다 쓸까 저 하늘 높이 쌓 아도 채우지 못하리 하나님 크신 사랑은 측량 다 못하며 영원히 변치 않는 사랑 성도여 찬양하세." 저주와 지옥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글귀를 발견한 그들은 그 벽의 아랫 면을 발견하고는 더욱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는 이렇게 씌여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기에 계십니다(God is here)." 더 이상 견뎌낼 수 없는 고통의 상태, 지옥의 절규 속에서 무엇보다 더욱 두 렵고 안타깝게 그들을 떨게 만들었던 것은 독일의 잔인한 고문과 학살이 아니 라, 그러한 고통 가운데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계시며 그들을 여전히 사랑하 고 계시는가에 대한 회의와 갈등의 아픔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 중 어떤 이들 은 결국 그 열악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여전히 자신들을 사랑하시며 자신들의 고통 가운데 함께 계심을 확신하였기에 "하나님은 여기에 계십니다(God is here)."라고 고백하며 죽어갔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 시고,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눌린 자를 자유케 하려고, 그리고 그들과 세상 끝날까지 함께 하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던 여인, 그리고 세리 등 죄인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시는 순간 까지도 죄인, 흉악한 강도와 함께 하셨습니다. 미리암 르페브르 크루즈(Miriam LeFevre Grouse)는 이 사건에 관하여 시선 을 끄는 다음과 같은 시를 썼습니다. "또한 언덕에서 세 사람이 함께 죽음을 맞이했네 하지만 오직 한 사람만 죽었다네 다른 두 사람 강도와 자신이 하나님이신 분, 그 둘이 만났다네 갈보리 언덕에는 아직도 세 개의 십자가가 서 있다네 아직도 죄로 인하여 그 십자가들은 높이 서 있는데 하나는 저주하며 죽어가는 멸망받은 자를 품고 있고 다른 하나에는 기도하는 강도가 달려 있네 그처럼 기도하는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그리스도께서 그 옆에 계시네."
너무나 아름답게도 이 모든 일이 다음의 두 행에 요약되어 있습니다. "강도와 자신이 하나님이신 분 그 둘이 만났다네." 죄인된 우리 인생들에게 가장 소망되고 아름다운 예수님의 모습은 그가 우리 와 함께 계시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자신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 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마 9:10-13) 오늘 본문은 복음서에서 가장 극적인 사건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가장 극형 인 십자가형을 받은 것으로 보아 살인까지도 서슴지 않고 저질러 댔던 흉악한 강도 하나가 예수님의 최후의 순간에 함께 함으로 극적인 구원을 받아 낙원에 들어간 사건이었습니다. 이 강도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예수를 만나는 순간이 었을 것입니다. 강도가 마지막 순간에 목격한 예수의 마지막 모습은 무엇이었 겠습니까 그는 우선 아무런 저항도 아무런 불평도 없이 십자가의 잔인한 형벌 에 자신을 내어 맡기는 의로운 한 사람의 놀라운 모습을 보았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보았던 어린양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었습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 수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 하였도다."(사53:) 그리고 나서 그는 예수께서 기도하시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눅23:34)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강도는 관원들이 예수님을 비웃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눅23:35).관원들도 비웃어 가로되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의 택하신 자 그리스도여든 자기도 구원할지어다." 그리고 군병들의 희롱하는 소리도 들었습니다. "(눅23:36) 군병들도 희롱하면서 나아와 신 포도주를 주며 (눅23:37) 가로되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어든 네가 너를 구원하라." 이에 뒤질세라 주제넘게 자기 동료 강도가 예수를 비방하는 소리까지 들었습니다. "(눅23:39)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가로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이 모든 비웃는 소리, 희롱하는 소리, 비방하는 소리 등을 듣고 예수님의 기도 소리를 들은 한편의 강도는 참다못해 자기 동료 강도를 꾸짖어 외쳤습니다. "(눅23:40)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가로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 (눅23:41)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이 말은 그 강도의 영혼 속에 일어난 혁명적인 삶의 변화를 나타내 줍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기 이웃의 재산과 생명을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 면 얼마든지 약탈과 살인을 서슴지 않았을 흉악한 강도가 이제 하나님을 인정 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면서 평생 동료 강도를 향해 "너는 하나님이 두렵지도 않느냐"며 책망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받는 형벌이 지극히 당 연한 것이라는 참회의 고백과 예수님의 의로우심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눅23:41)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니 이에 당연 하거니와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이것은 아마 강도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쏟아놓은 참된 회개와 신앙고백을 의미합니다. 계속해서 회개한 강도는 예수께 이렇게 부탁합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이것은 한 순간의 회개와 신앙고백으로 말미암아 영원한 삶을 약속받은 가장 극적인 삶의 변화를 말해줍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박히셨습니다. 주님은 죽어가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강 도도 마지막 고통의 순간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도 그와 같은 상태 에 계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께서 저 위에 계시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시며 기도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고 비방하는 사람들을 용서해 달라고 하나님 아버지에게 기도하시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께서 권능과 권세가 있는 하늘 나라에 들어가실 것을 확신하면서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라고 호소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께 십자가 처형을 내린 빌라도 법정보다도, 아 니 로마 가이사의 왕좌보다 더 높은 영광스럽고 의로운 최후의 심판보좌가 있 다는 사실을 갑자기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자신의 강도 행각에 대해 십자가 처형을 내린 세상 법정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었지만, 예수의 하나님 아버지께 드리는,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는 기도 내용을 보건대 한없는 자비를 베푸시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계신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강도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예수께라면 그 최후 의 심판보좌에 호소할 수 있는 권리가 있음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 강도는 예수께 부탁드렸던 것입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이것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믿음의 고백이었습니다. 십자가상의 예수님은 강 도에게 그의 지난날의 죄악에 대한 한 마디 묻지도 아니하시고 그에게 영원한 삶을 약속했습니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어떤 경건한 사람이 랍비에게 물었습니다. "제가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랍비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습니다. "당신이 영생을 얻 기 위해서는 세 가지를 해야 하오. 당신은 자선을 베풀어야 하고, 병자를 돌보 아야 하며, 죽은 자를 묻어 주어야 하오." 그 사람은 랍비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서 그곳을 떠났습니다. 그는 집으로 돌아오는 도중 다리를 절룩거리는 거 지를 만났습니다. 그순간 그는 랍비의 말을 생가해 내고는 그 사람을 집으로 데리고 왔습니다. 그는 거지에게 풍성한 음식을 대접하고는 이로써 첫 번째 요 건을 갖출 수 있게 해주신 하나님께 찬양드렸습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그 걸인 은 과식한 관계로 몸져 누웠습니다. 그래서 경건한 사람은 그를 침대에 눕히고는 약을 주었습니다. 그런 다음 그는 랍비의 두 번째 교훈을 생각해 내고는 그 것도 이미 이루었다고 기뻐했습니다. 밤 사이에 걸인의 병세는 매우 악화되어 죽고 말았습니다. 아침이 되자 그 경건한 사람은 그 걸인을 묻을 준비를 한 뒤, 유대인 묘지에 안장되도록 했습니다. 그런 다음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고 기뻐 외쳤습니다. "이렇게 쉽게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게 해 주신 주님이여, 찬양받으 소서!" 천국에는 누구라도 쉽게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노력이나 공로 행위로는 들어갈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의 강도는 한 순간의 회개와 신앙고백 으로 쉽게 낙원에 들어갔습니다. 그 강도는 오직 죽는 순간,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라고 회개하며 예수 믿은 것 밖에 없습니다. 또한 본문의 이야기는 그 언제라도, 무슨 죄라도 남김없이 용서받을 수 있음 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줍니다. 저 우수(憂愁)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죄를 짓는 것이 죄가 아니라 자기 죄를 회개하지 못하는 것이 죄이다'라고 갈파한 바 있습니다. 굳이 이 십자가상의 강도들처럼 흉악한 범죄는 저지르지 않았다 고 하더라도 우리들의 일생은 크고 작은 죄악으로 가득하며 더구나 아담의 후 손인 우리들의 몸 속에는 원죄의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 인생의 모습을 이렇게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롬3:9) 그러면 어떠하뇨 우리는 나으뇨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롬3:10) 기록한 바 의인은 없 나니 하나도 없으며 (롬3:11)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롬 3:12)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 다 (롬3:13)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롬3:14)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롬3:15)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롬3:16)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롬3:17) 평 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롬3:18) 저희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 나라에 이르는 길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 믿고 회개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가 되는 것입니다. "(롬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롬3: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자신의 죄악이 너무 중하여 도저히 하나님의 거룩하신 존전에 나아갈 수 없 다고, 생각하는 분이 있습니까 이제 돌이키기에는 너무 많은 죄악의 세월이 흘러갔다고 낙심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혹시 그런 분이 있다면, 죽음의 일보 직전에 회개함으로써 모든 죄악을 사함받고 천국에 들어간 십자가의 강도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야말로 어떤 죄를 지었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그 죄를 회개하느냐 하지않느냐가 문제인 것입니다. 이 우편 강도의 회개는 어디서부터 비롯되었을까요 그것은 스스로도 고백하 였듯이 바로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40절). 이제 죽음을 바로 눈 앞에 둔 마지막 순간에 이르러 이 흉악범은 지난날의 끔찍스런 범행을 되돌아 보며 눈물겨운 회한에 잠겼을 것이며, 죽음의 터널을 지난 후 자신의 갈 곳은 어디일까에 대한 두려움과 나아가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으로 떨었을 것 입니다. 오늘날 세상은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고 두려워하지도 않는 무리들로 말미암아 날로 흉포해져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부인하고 스스로 주인의 자리 에 올라 돈이나 권력 혹은 무력을 믿고 날뛰다가 급기야는 본문의 다른 한 강 도와 같이 죽음의 자리에 이르러서까지 저주만 내뱉는 경우가 우리 주변에서 흔히 들려오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지식과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이 더없 이 절실히 요청되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이 청원은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로 믿고 모든 것을 예수께 내어 맡긴다는 뜻입니다. 이 강도는 이 제껏 스스로가 주인이 되어 죄의 종노릇하며 흉포한 삶을 살았지만 이제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게 된 것입니다. 주님은 지금도 말씀하십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든지 지금 회개하고 예수를 구 세주로 영접하면 지금 천국의 자녀가 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회개하며,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 나를 생각하소서."라는 신앙고백 으로 예수님을 믿으시고 자신의 삶을 맡기심으로 최후의 심판 때에 예수님의 기억된바 되어 천국에 들어가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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