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에 관심 두신 예수 (눅2:26-33)
본문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는 노인이 살았습니다. 혹자는 이 노인이 유대의 랍비 힐렐의 아들이라고도 하고, 그 유명했던 사도 바울의 스승인 교법사 가말리엘의 아버지였다고도 말합니다. 이 노인은 평생을 의롭고 경건하게 살았습니다. 그리고 자꾸만 기울어만 가도 있는 나라의 장래를 걱정하면서 누구보다도 염려를 많이 했던 그런 사람입니다. 그때는 말라기 선지자가 예언을 한 후 400년 동안이나 예언이 끊어졌던 그런 때입니다. 그래서 이 때를 가리켜서 영적인 암흑기라고도 하고, 또 침묵의 시기라고도 부릅니다. 그때 이 시므온이라는 노인은 나라는 자꾸만 기울어 가고 있고, 나타나는 징조들은 불길한 것들만 나타나고 있고, 백성들은 모두 소망을 잃어 가도 있고, 그래서 혹시나 이 때에 메시아가 오시지 않을까 하고 고대하면서 경건한 모습으로 기도하며 살았다고 합니다. 그러던 중 이 노인은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습니다. “너는 메시야를 보기 전에는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그때부터 이 노인은 이제나 저제나 하고 메시아 탄생을 기다리며 성전에서 하루도 발길을 떼지 아니하고, 살아갑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노인은 결례를 받기 위해서 성전에 온 어린 예수를 만나게 됩니다. 모세의 율법에 의하면 산모가 아들을 낳아서 33일이 지나면 성전에 가서 결례를 행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오늘로 말하자면 헌아식입니다. 예수님이 이 결례를 받기 위해서 성전에 오신 것입니다.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계시를 받았듯이 그는 죽지 않고 살아서 이 땅에 태어나신 메시아를 만났습니다. 그렇게 나라의 장래를 걱정하면서 이때야말로 메시아가 와서 이 나라를 살려야 할 때라고 간절히 기도했는데 그 기도를 응답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이 노인은 그 어린 예수를 받아 품에 안았습니다. 얼마나 감회가 깊고 감동적이었겠습니까 그 아이를 받아 안고 이 노인이 예언을 합니다.
그 말씀이 29-32절의 말씀입니다. “(눅2:29)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눅2:30)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눅2:31)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눅2:32)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여기서 이 노인이 예수님을 뭐라고 불렀습니까 예수님은 당신 입으로 “나는 잃어버린 자를 찾으러 왔다.”라고 했는데 이 노인은 예수님을 “이방에 비추는 빛”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간단한 말이지만 굉장한 뜻이 들어 있는 표현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의 의식 속에는 하나님은 이스라엘 사람들만의 하나님으로 알고 있었을 때입니다. 그리고 이방인들은 짐승처럼 대했고, 상종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방인들을 멸망받을 사람들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유대인이라는 우월감과 자부심이 대단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을 특별히 멸시했습니다. 로마 시대를 살았던 세네카라는 사람은 특별히 세 가지를 감사하면서 살았다고 합니다. 내가 짐승으로 태어나지 않고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감사한 일이고, 여자로 태어나지 않고 남자로 태어난 것이 감사하고, 내가 이 시대에 특별히 로마인으로 태어난 것을 무엇보다도 감사한다 했습니다. 그 당시는 로마가 가장 문명국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유대인들도 자신들이 유대인인 것을 무한한 영광으로 여겼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유대인만의 하나님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이방인들을 멸망받을 자들로만 여겼습니다.
그런데 시므온이라는 노인이 어린 예수를 품에 안고는 예언합니다. “이는 이방을 비추는 빛이라.” 이 말은 이 어린 예수는 이방인들을 위해서 큰 일을 할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당시로서는 굉장한 발상의 전환입니다. 그리고 예수님 스스로도 공생애를 시작하자마자 파격적인 행동을 시작합니다.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가장 먼저 찾아간 사람이 삭개오입니다. 삭개오는 로마의 세리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이 가장 경멸했고 저주했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삭개오는 당시 친구 하나 없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의 집을 방문해서 대화를 나누었고, 밥을 같이 먹었습니다. 이것은 당시로서는 굉장한 뉴스입니다. 파격적인 행동입니다. 유대인으로서는 이단적인 행동입니다. 또 사마리아에 가서는 문둥병자를 고쳐 주고, 간음한 여인을 용서해 줍니다. 그리고 가버나움에 가서는 이방인 백부장의 종의 병을 고쳐 주고, 또 혈루병자 여인의 병을 고쳐 줍니다. 이것은 당시로서는 상상도 못할 일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당시 유대인들의 의식으로는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는 일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그런 일들을 서슴없이 행하고 다닙니다. 오늘 본문에서 시므온이라는 노인이 예언한 그대로입니다. 이방을 비추는 빛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잃어버린 자를 찾으러 오신 분이고, 동시에 이방을 비추는 빛, 즉 이방인에 관심을 두신 예수입니다. 여러분, 신앙 안에서는 이 벽을 허물어야 합니다. 그리고 복음 안에서는 이 장벽이 모두 무너져야 합니다. 이 벽을 넘지 못하면 옛 생활을 청산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자기 고집 속에서 스스로 헤어 나올 수가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은 과감하게 그 벽을 허물었던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그러니까 복음이 세계로 퍼져 나갔고, 그 복음이 마침내는 오늘 세계를 점령하게 된 것입니다.
첫째 우리는 먼저 개인적으로 이 벽을 넘어야 합니다. 이 벽을 넘지 못해서 고민을 많이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개인적인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자신의 틀을 좀처럼 벗어나지 못합니다. 어느 대학 교수 부인이 있었습니다. 두 아들이 박사가 되었고, 남편이 박사에다 대학 교수입니다. 이 여인은 평소 너무나 행복해 했다고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여인이 그만 자살해서 죽고 말았습니다. 유언을 보니까 “나는 지금의 행복을 깨고 싶지 않아서 죽는다.” 그렇게 써 놓고 죽었다고 합니다. 또 어떤 젊은 부인은 4대 종가집으로 시집을 가서 딸과 아들을 낳아서 대를 이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시어머니와의 갈등 때문에 견디다 못해서 약을 먹고 죽어 버렸습니다. 자기만 죽은 것이 아니고 아이들에게도 먹이고 함께 죽었습니다. 뭐라고 말해야 좋겠습니까 시어머니와의 갈등을 해결하는 일이 쉬운 일입니까 약을 먹고 아이들과 함께 죽는 일이 쉬운 일입니까 세상에 죽는 일보다 더 어려운 일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도 이 여인은 그 어려운 방법을 택했습니다. 그 용기가 어디에서 나온 용기입니까 이것은 개인적인 벽을 넘지 못하는 고집에서, 편협함에서 나온 용기입니다. 스토아 철학자인 오르테가 이 가세트(Jose Ortega y Gdsset)는 “오늘 현대인들이 저지르고 있는 가장 큰 정신적인 범죄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불성실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불성실하니까 사람들은 99.9%의 실패를 각오하고 0.1%의 확률에 매달려서 밤을 새워 노름을 하기도 합니다. 거기에 매달리고, 거기에 온 정성을 쏟아 투자를 합니다. 그러다 뜻대로 일이 되지 않으면 죽음으로 해결하려 듭니다. 모두 자기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해서 나오는 일들입니다. 이런 생각으로는 사람을 받아들이고, 용서하고, 사랑하고,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먼저 자신의 벽을 넘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마음이 이방 세계로까지 확산될 수 있는 것입니다.
2. 교회적으로 이 벽을 넘어야 합니다. 오늘 많은 교회들이 교회의 벽을 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소한 일 가지고 온 교회가 불화하고 그럽니다. 여러분, 교회의 사명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전도하는 일이고, 선교하는 일이고, 사람들을 훈련해서 세상에 내보내는 일입니다. 그 일을 위해서 온 정열을 다 쏟아야 그것이 교회입니다.
그런데 오늘 교회들을 보면 엉뚱한 곳에 정열을 쏟고 있습니다. 목회자의 흠을 잡아 나가라, 들어와라 하고, 편을 짜서 싸우며 열을 올리는데 힘을 다 소비하는 교회가 있습니다. 당회원들끼리 편을 짜서 서로 패권 다툼을 하고 싸우느라고 할 일을 못하는 교회들도 있습니다. 그러니 언제 무슨 힘 가지고 전도를 하고, 선교사를 보내고, 그를 위해서 기도를 하고 그럽니까 이것이 모두 교회들이 자기의 벽을 넘지 못해서 나오는 일들입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망한 이유가 그것입니다. 베드로와 야고보가 당시 교회의 중진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교회를 아주 폐새적인 교회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이 사람들은 이방 세계에 전도하는 것을 부정적으로 생각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개척한 지교회인 안디옥 교회는 벌써 바울이나 바나바 같은 선교사를 길러서 이방 전도에 투입하고 있는데도 모교회인 예루살렘 교회는 여전히 고집을 부리면서 이방인과는 상종도 하지 말라고 금지령을 내립니다. 그러니 그 교회가 발전하고 새로워지겠습니까 시대를 역행하는 교회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하나님께서 이 구실을 못하는 예루살렘 교회를 아예 파괴해 버리십니다. 그렇게 되자 이 사람들이 다급하니까 엉겁결에 이방 땅으로 도망을 갔고, 사마리아 땅으로 도망 가서 숨게 됩니다. 복음의 생리는 땅에 떨어지면 그냥 있지 않습니다. 어디서나 복음은 움직입니다. 이 사람들이 도망 간 그 땅에 복음이 전해집니다. 그러다 보니까 이방 땅에 복음이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오늘 기독교가 세계의 교회가 된 것은 예루살렘 교회가 망했기 때문입니다. 옛날 평양은 안 그랬습니까 평양은 한국 기독교의 성지입니다. 하나님께서 평양에 복음을 불 일 듯 보내주셨습니다. 일제시대 때 평양은 80%의 시민이 기독교인이었다고 합니다. 한국 기독교의 불은 모두 평양에서 불어 왔습니다. 그러면 그 복음의 열기가 전국 방방 곡곡 산골까지, 저 이남 부산까지, 제주도까지 퍼져 내려가야 하는데 사람들은 평양을 중심으로 해서 밖으로 나가려고를 하지 않습니다. 요즘 구역을 갈라 놓으면 죽는 줄 알고 한사코 반대하는 사람들과 똑같습니다. 평양은 이미 성지가 되었고, 주민의 80% 이상이 기독교화되었는데도 그 곳에서 편안히 안주하려고만 합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그냥 놔 두시겠습니까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예루살렘 교회를 파괴해서 흩어 놓으시듯이 평양을 파괴해서 사람들을 흩어 놓으십니다. 사람들이 환난을 당하니까 엉겁결에 보따리를 싸 들고 서울로, 대전으로, 부산으로, 제주도로, 거제도로 밤새 걸어서 내려와 그 곳에 정착하면서 또 그 열심 가지고 교회를 짓고, 전도를 하고 해서 오늘의 한국 교회를 이루어 놓게 된 것입니다. 오늘 한국 교회가 발전하게 된 원인은 평양 교회가 파괴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교회의 벽을 넘여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는 매 맞기 전에 전도해야 하고, 기도해야 하고, 선교사를 파송하고,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전진하는 데 힘쓰고, 그래야 합니다. 교회는 그 시대를 외면하거나 교회의 사명이 끝났는데도 그대로 앉아 있으면 평양 교회가 그랬듯이, 예루살렘 교회가 그랬듯이 심판을 받게 됩니다.
3. 민족도 벽을 넘어야 합니다. 우리 민족도 이제는 고루한 벽을 넘여야 합니다. 지금 한국이 세계로 뻗어 나가려고 몸부림을 치고 있습니다. 그러려면 우선 이 벽을 넘어야 합니다. 지금 우리 나라가 세계에 내놓을 것이 무엇입니까 무엇을 내놓겠습니까 정치입니까 경제입니까 문화입니까 오늘 우리 사회를 보십시오. 산이 깨끗하기를 합니까 물이 깨끗하기를 합니까, 거리를 깨끗하기를 합니까, 서로 믿고 살기를 합니까, 물건을 정직하게를 만듭니까, 제품이 견고하기를 합니까, 만든 제품에 대해서 사후 책임을 질 줄 압니까 그뿐이 아닙니다. 거기에 졸속도 있습니다. 홍수가 지나간 후에는 왜정 시대에 놓은 다리는 그냥 있는데 새마을 공사로 만들어 놓은 다리는 모두 무너져 내립니다. 지어 놓은 아파트는 1년이 못 가서 비가 새고, 금이 갑니다. 고속도로도 만들어 놓은 지 열흘이 지나면 패이기 시작합니다. 하루에도 몇 킬로미터씩 공사를 해 놓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모두 우리가 세계로 뻗어 나가는 데 장애가 되는 벽입니다. 우리 민족은 옛부터 빠른 손재주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품을 잘 만들고, 특히 작은 물건을 잘 만들어 냅니다. 그래서 기능 올림픽을 했다 하면 세계를 휩씁니다. 미국 사람들은 손이 커서 잔재주를 부리지 못합니다. 그래서 기능 올림픽에서는 등수에도 들어가지 못합니다.
그런데 빠른 손재주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언제나 좋은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도덕성이 결여되기도 쉽습니다. 그래서 한국의 소매치기는 세계 제일입니다. 일본에 원정을 갈 정도입니다. 이 벽을 헐지 못하면 우리 민족의 세계화는 어렵습니다. 개인이나 사회나 국가나 종교나 선진화가 되려고 하면 먼저 마음에 상(像)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없으니까 이 같은 불성실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미켈란젤로가 큰 돌을 떠 놓고 그것으로 모세상을 만들려고 하는데 생각이 잘 떠오르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돌 앞에 앉아서 한참을 기도하며 명상을 합니다. 그때 환상으로 돌 위에 모세가 앉아 있는 것이 보입니다. 그래서 미켈란젤로가 망치와 징을 들고 필요없는 부분을 모두 쪼아 내고 모세만 남겨 놓았습니다. 그랬더니 훌륭한 모세상이 만들어졌다는 것입니다. 먼저 마음에 상이 있어야 합니다. 미술가는 그냥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마음에 상이 떠 오른 것을 종이에 그려 놓을 때 그것이 작품이 되는 것입니다. 마음에 이 상이 떠오르도록 하려면 먼저 장벽을 거두어 내야 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이 장벽을 거두지 못해서 그 곳으로부터 헤어나지를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누구를 사랑할 줄도, 용납할 줄도, 이해할 줄도 몰랐던 것입니다. 주님은 그 벽을 넘는 데 앞장 섰던 사람입니다. 개인적인 벽을 넘고, 교회의 벽을 넘고, 민족의 벽을 넘었습니다. 그리고 이방 땅으로, 이방 사람에게로, 다른 민족에게로 나아갔습니다. 그때 복음은 국경을 넘고, 문화를 넘어서 세계로 퍼져 나가 오늘 우리에게까지 전해진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방에 비추이는 빛입니다.
그 말씀이 29-32절의 말씀입니다. “(눅2:29)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눅2:30)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눅2:31)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눅2:32)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여기서 이 노인이 예수님을 뭐라고 불렀습니까 예수님은 당신 입으로 “나는 잃어버린 자를 찾으러 왔다.”라고 했는데 이 노인은 예수님을 “이방에 비추는 빛”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간단한 말이지만 굉장한 뜻이 들어 있는 표현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의 의식 속에는 하나님은 이스라엘 사람들만의 하나님으로 알고 있었을 때입니다. 그리고 이방인들은 짐승처럼 대했고, 상종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방인들을 멸망받을 사람들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유대인이라는 우월감과 자부심이 대단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을 특별히 멸시했습니다. 로마 시대를 살았던 세네카라는 사람은 특별히 세 가지를 감사하면서 살았다고 합니다. 내가 짐승으로 태어나지 않고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감사한 일이고, 여자로 태어나지 않고 남자로 태어난 것이 감사하고, 내가 이 시대에 특별히 로마인으로 태어난 것을 무엇보다도 감사한다 했습니다. 그 당시는 로마가 가장 문명국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유대인들도 자신들이 유대인인 것을 무한한 영광으로 여겼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유대인만의 하나님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이방인들을 멸망받을 자들로만 여겼습니다.
그런데 시므온이라는 노인이 어린 예수를 품에 안고는 예언합니다. “이는 이방을 비추는 빛이라.” 이 말은 이 어린 예수는 이방인들을 위해서 큰 일을 할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당시로서는 굉장한 발상의 전환입니다. 그리고 예수님 스스로도 공생애를 시작하자마자 파격적인 행동을 시작합니다.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가장 먼저 찾아간 사람이 삭개오입니다. 삭개오는 로마의 세리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이 가장 경멸했고 저주했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삭개오는 당시 친구 하나 없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의 집을 방문해서 대화를 나누었고, 밥을 같이 먹었습니다. 이것은 당시로서는 굉장한 뉴스입니다. 파격적인 행동입니다. 유대인으로서는 이단적인 행동입니다. 또 사마리아에 가서는 문둥병자를 고쳐 주고, 간음한 여인을 용서해 줍니다. 그리고 가버나움에 가서는 이방인 백부장의 종의 병을 고쳐 주고, 또 혈루병자 여인의 병을 고쳐 줍니다. 이것은 당시로서는 상상도 못할 일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당시 유대인들의 의식으로는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는 일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그런 일들을 서슴없이 행하고 다닙니다. 오늘 본문에서 시므온이라는 노인이 예언한 그대로입니다. 이방을 비추는 빛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잃어버린 자를 찾으러 오신 분이고, 동시에 이방을 비추는 빛, 즉 이방인에 관심을 두신 예수입니다. 여러분, 신앙 안에서는 이 벽을 허물어야 합니다. 그리고 복음 안에서는 이 장벽이 모두 무너져야 합니다. 이 벽을 넘지 못하면 옛 생활을 청산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자기 고집 속에서 스스로 헤어 나올 수가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은 과감하게 그 벽을 허물었던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그러니까 복음이 세계로 퍼져 나갔고, 그 복음이 마침내는 오늘 세계를 점령하게 된 것입니다.
첫째 우리는 먼저 개인적으로 이 벽을 넘어야 합니다. 이 벽을 넘지 못해서 고민을 많이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개인적인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자신의 틀을 좀처럼 벗어나지 못합니다. 어느 대학 교수 부인이 있었습니다. 두 아들이 박사가 되었고, 남편이 박사에다 대학 교수입니다. 이 여인은 평소 너무나 행복해 했다고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여인이 그만 자살해서 죽고 말았습니다. 유언을 보니까 “나는 지금의 행복을 깨고 싶지 않아서 죽는다.” 그렇게 써 놓고 죽었다고 합니다. 또 어떤 젊은 부인은 4대 종가집으로 시집을 가서 딸과 아들을 낳아서 대를 이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시어머니와의 갈등 때문에 견디다 못해서 약을 먹고 죽어 버렸습니다. 자기만 죽은 것이 아니고 아이들에게도 먹이고 함께 죽었습니다. 뭐라고 말해야 좋겠습니까 시어머니와의 갈등을 해결하는 일이 쉬운 일입니까 약을 먹고 아이들과 함께 죽는 일이 쉬운 일입니까 세상에 죽는 일보다 더 어려운 일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도 이 여인은 그 어려운 방법을 택했습니다. 그 용기가 어디에서 나온 용기입니까 이것은 개인적인 벽을 넘지 못하는 고집에서, 편협함에서 나온 용기입니다. 스토아 철학자인 오르테가 이 가세트(Jose Ortega y Gdsset)는 “오늘 현대인들이 저지르고 있는 가장 큰 정신적인 범죄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불성실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불성실하니까 사람들은 99.9%의 실패를 각오하고 0.1%의 확률에 매달려서 밤을 새워 노름을 하기도 합니다. 거기에 매달리고, 거기에 온 정성을 쏟아 투자를 합니다. 그러다 뜻대로 일이 되지 않으면 죽음으로 해결하려 듭니다. 모두 자기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해서 나오는 일들입니다. 이런 생각으로는 사람을 받아들이고, 용서하고, 사랑하고,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먼저 자신의 벽을 넘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마음이 이방 세계로까지 확산될 수 있는 것입니다.
2. 교회적으로 이 벽을 넘어야 합니다. 오늘 많은 교회들이 교회의 벽을 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소한 일 가지고 온 교회가 불화하고 그럽니다. 여러분, 교회의 사명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전도하는 일이고, 선교하는 일이고, 사람들을 훈련해서 세상에 내보내는 일입니다. 그 일을 위해서 온 정열을 다 쏟아야 그것이 교회입니다.
그런데 오늘 교회들을 보면 엉뚱한 곳에 정열을 쏟고 있습니다. 목회자의 흠을 잡아 나가라, 들어와라 하고, 편을 짜서 싸우며 열을 올리는데 힘을 다 소비하는 교회가 있습니다. 당회원들끼리 편을 짜서 서로 패권 다툼을 하고 싸우느라고 할 일을 못하는 교회들도 있습니다. 그러니 언제 무슨 힘 가지고 전도를 하고, 선교사를 보내고, 그를 위해서 기도를 하고 그럽니까 이것이 모두 교회들이 자기의 벽을 넘지 못해서 나오는 일들입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망한 이유가 그것입니다. 베드로와 야고보가 당시 교회의 중진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교회를 아주 폐새적인 교회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이 사람들은 이방 세계에 전도하는 것을 부정적으로 생각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개척한 지교회인 안디옥 교회는 벌써 바울이나 바나바 같은 선교사를 길러서 이방 전도에 투입하고 있는데도 모교회인 예루살렘 교회는 여전히 고집을 부리면서 이방인과는 상종도 하지 말라고 금지령을 내립니다. 그러니 그 교회가 발전하고 새로워지겠습니까 시대를 역행하는 교회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하나님께서 이 구실을 못하는 예루살렘 교회를 아예 파괴해 버리십니다. 그렇게 되자 이 사람들이 다급하니까 엉겁결에 이방 땅으로 도망을 갔고, 사마리아 땅으로 도망 가서 숨게 됩니다. 복음의 생리는 땅에 떨어지면 그냥 있지 않습니다. 어디서나 복음은 움직입니다. 이 사람들이 도망 간 그 땅에 복음이 전해집니다. 그러다 보니까 이방 땅에 복음이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오늘 기독교가 세계의 교회가 된 것은 예루살렘 교회가 망했기 때문입니다. 옛날 평양은 안 그랬습니까 평양은 한국 기독교의 성지입니다. 하나님께서 평양에 복음을 불 일 듯 보내주셨습니다. 일제시대 때 평양은 80%의 시민이 기독교인이었다고 합니다. 한국 기독교의 불은 모두 평양에서 불어 왔습니다. 그러면 그 복음의 열기가 전국 방방 곡곡 산골까지, 저 이남 부산까지, 제주도까지 퍼져 내려가야 하는데 사람들은 평양을 중심으로 해서 밖으로 나가려고를 하지 않습니다. 요즘 구역을 갈라 놓으면 죽는 줄 알고 한사코 반대하는 사람들과 똑같습니다. 평양은 이미 성지가 되었고, 주민의 80% 이상이 기독교화되었는데도 그 곳에서 편안히 안주하려고만 합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그냥 놔 두시겠습니까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예루살렘 교회를 파괴해서 흩어 놓으시듯이 평양을 파괴해서 사람들을 흩어 놓으십니다. 사람들이 환난을 당하니까 엉겁결에 보따리를 싸 들고 서울로, 대전으로, 부산으로, 제주도로, 거제도로 밤새 걸어서 내려와 그 곳에 정착하면서 또 그 열심 가지고 교회를 짓고, 전도를 하고 해서 오늘의 한국 교회를 이루어 놓게 된 것입니다. 오늘 한국 교회가 발전하게 된 원인은 평양 교회가 파괴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교회의 벽을 넘여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는 매 맞기 전에 전도해야 하고, 기도해야 하고, 선교사를 파송하고,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전진하는 데 힘쓰고, 그래야 합니다. 교회는 그 시대를 외면하거나 교회의 사명이 끝났는데도 그대로 앉아 있으면 평양 교회가 그랬듯이, 예루살렘 교회가 그랬듯이 심판을 받게 됩니다.
3. 민족도 벽을 넘어야 합니다. 우리 민족도 이제는 고루한 벽을 넘여야 합니다. 지금 한국이 세계로 뻗어 나가려고 몸부림을 치고 있습니다. 그러려면 우선 이 벽을 넘어야 합니다. 지금 우리 나라가 세계에 내놓을 것이 무엇입니까 무엇을 내놓겠습니까 정치입니까 경제입니까 문화입니까 오늘 우리 사회를 보십시오. 산이 깨끗하기를 합니까 물이 깨끗하기를 합니까, 거리를 깨끗하기를 합니까, 서로 믿고 살기를 합니까, 물건을 정직하게를 만듭니까, 제품이 견고하기를 합니까, 만든 제품에 대해서 사후 책임을 질 줄 압니까 그뿐이 아닙니다. 거기에 졸속도 있습니다. 홍수가 지나간 후에는 왜정 시대에 놓은 다리는 그냥 있는데 새마을 공사로 만들어 놓은 다리는 모두 무너져 내립니다. 지어 놓은 아파트는 1년이 못 가서 비가 새고, 금이 갑니다. 고속도로도 만들어 놓은 지 열흘이 지나면 패이기 시작합니다. 하루에도 몇 킬로미터씩 공사를 해 놓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모두 우리가 세계로 뻗어 나가는 데 장애가 되는 벽입니다. 우리 민족은 옛부터 빠른 손재주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품을 잘 만들고, 특히 작은 물건을 잘 만들어 냅니다. 그래서 기능 올림픽을 했다 하면 세계를 휩씁니다. 미국 사람들은 손이 커서 잔재주를 부리지 못합니다. 그래서 기능 올림픽에서는 등수에도 들어가지 못합니다.
그런데 빠른 손재주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언제나 좋은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도덕성이 결여되기도 쉽습니다. 그래서 한국의 소매치기는 세계 제일입니다. 일본에 원정을 갈 정도입니다. 이 벽을 헐지 못하면 우리 민족의 세계화는 어렵습니다. 개인이나 사회나 국가나 종교나 선진화가 되려고 하면 먼저 마음에 상(像)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없으니까 이 같은 불성실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미켈란젤로가 큰 돌을 떠 놓고 그것으로 모세상을 만들려고 하는데 생각이 잘 떠오르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돌 앞에 앉아서 한참을 기도하며 명상을 합니다. 그때 환상으로 돌 위에 모세가 앉아 있는 것이 보입니다. 그래서 미켈란젤로가 망치와 징을 들고 필요없는 부분을 모두 쪼아 내고 모세만 남겨 놓았습니다. 그랬더니 훌륭한 모세상이 만들어졌다는 것입니다. 먼저 마음에 상이 있어야 합니다. 미술가는 그냥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마음에 상이 떠 오른 것을 종이에 그려 놓을 때 그것이 작품이 되는 것입니다. 마음에 이 상이 떠오르도록 하려면 먼저 장벽을 거두어 내야 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이 장벽을 거두지 못해서 그 곳으로부터 헤어나지를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누구를 사랑할 줄도, 용납할 줄도, 이해할 줄도 몰랐던 것입니다. 주님은 그 벽을 넘는 데 앞장 섰던 사람입니다. 개인적인 벽을 넘고, 교회의 벽을 넘고, 민족의 벽을 넘었습니다. 그리고 이방 땅으로, 이방 사람에게로, 다른 민족에게로 나아갔습니다. 그때 복음은 국경을 넘고, 문화를 넘어서 세계로 퍼져 나가 오늘 우리에게까지 전해진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방에 비추이는 빛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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