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면받은 사형수의 감회 (눅23:13-25)
본문
세계에서 가장 오래 복역한 것으로 알려진 죄수가 95년 8.15 사면조치로 석방되었습니다. 그는 6.25 전쟁때 남파된 간첩으로 사로잡혀 사형을 선고받은 사형수였습니다. 그후 무기로 감형되었다가 2년 전에 비로소 사면된 것입니다. 그의 나이가 70세였지만 감격스러운 마음을 가누지 못해 연신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감옥에서 보낸 세월이 무려 43년 10개월이었다고 합니다. 제목:세계 최장기수 김선명씨, 43년10개월만에 출소 세계에서 가장 오래 복역한 미전향 장기수 김선명(70)씨가 정부의 8.15 사면조치로 복역 43년10개월만인 15일 오전 9시15분쯤 대전교도소에서 풀려났다. 김씨는 이 날 세상 밖으로 나와 계수씨와 임수경씨 등 재야인사, 학생 등 1백여 명 등 환영나온 사람들과 기쁨을 나누었다. 김씨는 지난 51년 10월 인민군 31사단 정찰대 소속으로 중부전선 철원지구를 정찰하다 포로가 된 뒤 52년 8월 서울고등군법회의에서 15년형이 확정됐으며 53년 4월 대구형무소로 이감된 뒤 다시 정찰대가 아니고 간첩부대인 526군부대에서 남파됐다는 혐의로 국방경비대법 33조 간첩죄가 추가돼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사형대기 중이던 54년 2월 27일 무기징역으로 감형됐고 61년5.16 후 대전교도소로 이감돼 지금까지 0.75평의 독방생활을 해왔다. 김씨는 오랜 세월을 감옥에서 보낸 사람치고 건강한 모습이였지만 힘에 겨운 듯 10분을 서있지 못해 주위의 부축을 받으며 교도소 문을 나섰다. 김씨는 감격스러운 듯 안경너머로 흐르는 눈물을 손등으로 연신 훔치며 "아직 남아 있는 장기수들을 놔두고 혼자만 나와 미안합니다"고 말했다. 김씨는 "73년 정부가 6.23선언 뒤 형무소 공작반을 만들어 장기수들에게 전향을 강요했을 때가 가장 힘들었다"고 회상했다. 앞으로 계획에 대해 김씨는 "이 나이에 세상에 나와 무슨 꿈이 그리 많겠는가. 당장 무엇을 할 수도 없을 것 같고 차츰 생각해보아야겠다. 다만 내 평생 소원인 통일을 위해 여생을 보내겠다"고 담담하게 말했다. 한편 이날 대전교도소에서는 전쟁포로로 잡혀 42년을 감옥에서 보낸 장기수 안학섭(65)씨와 38년을 감옥에서 보낸 한 장호(72)씨 등도 형집행정지로 출소했다. 발행일:95년8월15일 본문에서 우리는 또 다른 사형수를 만날 수 있습니다.
첫째, 바라바는 사형수였습니다. 바라바에 대해서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지극히 단편적인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관련하여 언급되어 있을 뿐입니다. 성경이 그에 대해서 무어라고 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본문은 바라바를 “성 중에서 일어난 민란과 살인을 인하여 옥에 갇힌 자”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19, 25절). 그는 성 안에서 폭동을 일으켰고 그 과정에서 사람을 죽였습니다. 마태복음 27장 16절에서 그가 “유명한 죄수”로 언급되어 있는 것은 그가 이 폭동의 주동자 내지는 적극 가담자였음을 뜻합니다. 또한 유대인들이 바라바를 놓아달라고 빌라도 총독에게 간청했다는 점을 고려해 본다면 그가 로마의 통치에 무력으로 항거했던 열심당원이었을지도 모르고 그가 죽인 사람이 민간인이 아닌 로마군인이었을지도 모릅니다. 마가복음 15장 7절은 그가 “민란을 꾸미고 이 민란에 살인하고 포박된 자 중” 한 사람이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그 혼자 붙잡힌 것이 아니라 다른 동료들도 함께 붙잡혔음을 의미합니다. 어쩌면 십자가에 예수님과 함께 달린 두 사람이 그의 동료들이었을 것이며, 거기에 그도 달렸어야 했을 것입니다. 이것이 막연한 추측에 의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그 좌우편에 두 강도도 같이 달렸다는 것을 스스럼 없이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마태와 마가와 요한이 그들의 기록한 복음서에서 한결같이 그 두 사람을 “강도”(thief, 마27:38; 막15:27; 요18:40)로 언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각종 범죄들이 많이 저질러지고 있는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오늘 하루만도 얼마나 많은 범죄가 전국에서 저질러지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습니다. 그러다보니 언제부터인가 강도라는 말이 가벼운 범죄를 가리키는 말인 양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강력범을 가리키는 말 중에는 무장강도, 폭력배, 흉악범, 살인자 등이 있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복음서에서 강도라는 단어를 사용했을 때는 그것이 우리가 요즘 이해하고 있는 것과는 차이가 많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을 붙잡기 위하여 한 떼의 무리가 검과 몽치(곤봉)를 가지고 겟세마네 동산으로 몰려왔을 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 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를 잡으러 나왔느냐”(마26:55) 이 말씀은 여러 사람이 무장하고 나서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예수님 당시 강도가 중무장하였다는 점을 시사해 줍니다. 또한 십자가 형은 너무 참혹하고 잔인하여 로마인들도 웬만해서는 집행하지 않았다는 것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런데도 두 강도는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보통 죄를 저지른 것이 아니라 아주 흉악한 범죄를 저질렀다는 것을 뜻합니다. 또한 성경기사에 의하면 그 중 한 강도는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을 조롱하는 동료를 책망하며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라고 하여 (눅23:41) 자신의 범죄를 인정했으며 처형방법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습니다. 이상을 종합해 볼 때 누가복음 33절과 39절에서 그들을 “행악자”(malefactor)라고 부르는 것이 일리가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들이 폭동을 일으켜 여러 민간인을 죽이고 로마군인까지 죽였다면 제국에 반기를 드는 자들에게 강력하게 응징하던 로마인이 그들을 십자가 형에 처한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바나바도 이들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의 행위는 십자가 형에 처해지기 딱 좋은 케이스였습니다. 그는 이미 유죄판결을 받았고 사형 집행을 기다리는 사형수였습니다. 다른 때도 아니고 유월절과 같은 명절에 처형을 집행한다는 것은 이례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당장이라고 예수를 달기를 원했고 빌라도는 흉악범 두 사람을 함께 달게 하여 명절 기간에 일어날 수도 있는 폭동에 대비하여 경고를 주려했다고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둘째, 바라바는 특사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빌라도 총독은 결코 바라바를 석방하려는 마음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그가 판단하기에 예수란 작자는 무죄가 확실했습니다. 그도 귀가 있기 때문에 예수가 그 동안 어떤 일을 했는지 들어 알고 있었습니다. 그가 법정으로 끌려온 것은 단지 종교적인 이유 때문이며 종교지도자들의 질투 때문이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석방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는 종교지도자들의 부추김을 받아 유죄를 선언하는 사람들의 요구를 받아들이되 유월절 명절의 특사로 예수와 사형수 바라바 중 한 사람을 사면하겠다고 최종 제안을 했습니다. 그 무리 중에는 예수에게 호감을 가진 사람들도 적지 않게 있을 것이고 반감을 가진 사람들도 다른 대안이 없는 상황에서 위험한 바라바보다는 어쩔 수 없이 예수를 선택할 것이라고 믿었던 듯합니다. 빌라도의 생각은 빗나갔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의 영향력은 상상 외로 컸습니다. 그의 앞에 모여든 유대인들은 대부분 그들이 끌여들인 사람들이라는 것이 분명해졌습니다. 바라바를 외치는 목소리가 전체를 압도했던 것입니다. 사형수 바라바에게 예기치 않은 행운이 찾아왔습니다. 감옥에 갇혀 있는 빌라도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와 같이 활동적인 사람이 비좁은 공간에서 차꼬에 채여 있으려니 오죽 답답했겠습니까! 힘으로 뜻한 바를 이루려 한 사람이 힘에 의해 결박되고 감금되었으니 얼마나 굴욕을 느꼈겠습니까! 사형선고는 그렇다 치고 언제 형이 집행될지 몰라 초조하며 시시때때로 두려움에 휩싸이기도 했었습니다. 그가 정신 이상이 되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모든 것을 다 포기했었습니다. 감방 문이 열리고 간수가 들어왔을 때 그는 이제 끝장이구나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너는 이제 석방이다. 총독 각하께서 사면하셨다”는 것이었습니다. 바라바가 사면을 위해서 한 일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가 처한 상황은 석방을 위하여 애쓸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습니다.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무엇을 애쓸 수 있었겠습니까 우리는 바라바에게서 죄를 지은 세상 모든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바라바가 사면될 수 있었던 것은총독 덕분이 아니었습니다. 빌라도는 위험인물인 그를 사면하고자 하는 생각을 추호도 가지지 않았습니다. 군중 때문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생각도 빌라도와 같았습니다. 단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겠다는 집념이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구 때문입니까 “이에 바라바는 저희에게 놓아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박히게 넘겨주니라”(마27:26) 빌라도는 예수님 때문에 사면되었습니다. “죄 없으신” 예수님 때문에 사면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미리 정하신 뜻 때문에 사면된 것입니다. “과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동하여 하나님의 기름 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스려,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행4:27,28)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은 바라바를 포함한 세상 모든 사람들을 죄로 인한 하나님의 심판에서 벗어나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셋째, 바라바는 자유인이 되었습니다. 바라바는 사면소식을 접하고 기쁜 마음으로 감옥을 나섰습니다. 그는 풀려났습니다. 아주 드물게 죄수가 형기를 마쳤거나 사면이 주어졌는데도 감옥을 나가기를 거부하는 일이 있습니다. 다행히 빌라도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자유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줄 알았습니다. 그것이 받을 자격이 없는 자에게 주어진 과분한 선물인 것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의 값 없이 주시는 구원의 선물을 사람들이 받아들이기를 주저하는 데에는 심리적인 요인도 있습니다. 사람들이 공짜 선물을 받게 되는 경우에 어떻게 행동하는지 생각해 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하고 받아들이면 되는데 혹시나 그 선물을 주는 이면에 무언가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하는 것입니다. 값을 지불해야 하는 것은 아닌가 의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도 많이 속아서 그런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진정한 의미의 선물을 받아본 적이 별로 없어서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는 완전한 선물입니다. 조건 없는 선물입니다. 사람이 무엇을 하는 것을 조건으로 주시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일단 그 은혜를 믿음으로 받는 사람은 감사하는 마음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을 하려고 하는데 이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바라바는 그 날 군중 틈에 섞여 자기 대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았을까요 그가 바라보면서 무엇을 생각했겠습니까
첫째, 바라바는 사형수였습니다. 바라바에 대해서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지극히 단편적인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관련하여 언급되어 있을 뿐입니다. 성경이 그에 대해서 무어라고 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본문은 바라바를 “성 중에서 일어난 민란과 살인을 인하여 옥에 갇힌 자”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19, 25절). 그는 성 안에서 폭동을 일으켰고 그 과정에서 사람을 죽였습니다. 마태복음 27장 16절에서 그가 “유명한 죄수”로 언급되어 있는 것은 그가 이 폭동의 주동자 내지는 적극 가담자였음을 뜻합니다. 또한 유대인들이 바라바를 놓아달라고 빌라도 총독에게 간청했다는 점을 고려해 본다면 그가 로마의 통치에 무력으로 항거했던 열심당원이었을지도 모르고 그가 죽인 사람이 민간인이 아닌 로마군인이었을지도 모릅니다. 마가복음 15장 7절은 그가 “민란을 꾸미고 이 민란에 살인하고 포박된 자 중” 한 사람이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그 혼자 붙잡힌 것이 아니라 다른 동료들도 함께 붙잡혔음을 의미합니다. 어쩌면 십자가에 예수님과 함께 달린 두 사람이 그의 동료들이었을 것이며, 거기에 그도 달렸어야 했을 것입니다. 이것이 막연한 추측에 의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그 좌우편에 두 강도도 같이 달렸다는 것을 스스럼 없이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마태와 마가와 요한이 그들의 기록한 복음서에서 한결같이 그 두 사람을 “강도”(thief, 마27:38; 막15:27; 요18:40)로 언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각종 범죄들이 많이 저질러지고 있는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오늘 하루만도 얼마나 많은 범죄가 전국에서 저질러지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습니다. 그러다보니 언제부터인가 강도라는 말이 가벼운 범죄를 가리키는 말인 양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강력범을 가리키는 말 중에는 무장강도, 폭력배, 흉악범, 살인자 등이 있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복음서에서 강도라는 단어를 사용했을 때는 그것이 우리가 요즘 이해하고 있는 것과는 차이가 많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을 붙잡기 위하여 한 떼의 무리가 검과 몽치(곤봉)를 가지고 겟세마네 동산으로 몰려왔을 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 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를 잡으러 나왔느냐”(마26:55) 이 말씀은 여러 사람이 무장하고 나서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예수님 당시 강도가 중무장하였다는 점을 시사해 줍니다. 또한 십자가 형은 너무 참혹하고 잔인하여 로마인들도 웬만해서는 집행하지 않았다는 것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런데도 두 강도는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보통 죄를 저지른 것이 아니라 아주 흉악한 범죄를 저질렀다는 것을 뜻합니다. 또한 성경기사에 의하면 그 중 한 강도는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을 조롱하는 동료를 책망하며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라고 하여 (눅23:41) 자신의 범죄를 인정했으며 처형방법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습니다. 이상을 종합해 볼 때 누가복음 33절과 39절에서 그들을 “행악자”(malefactor)라고 부르는 것이 일리가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들이 폭동을 일으켜 여러 민간인을 죽이고 로마군인까지 죽였다면 제국에 반기를 드는 자들에게 강력하게 응징하던 로마인이 그들을 십자가 형에 처한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바나바도 이들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의 행위는 십자가 형에 처해지기 딱 좋은 케이스였습니다. 그는 이미 유죄판결을 받았고 사형 집행을 기다리는 사형수였습니다. 다른 때도 아니고 유월절과 같은 명절에 처형을 집행한다는 것은 이례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당장이라고 예수를 달기를 원했고 빌라도는 흉악범 두 사람을 함께 달게 하여 명절 기간에 일어날 수도 있는 폭동에 대비하여 경고를 주려했다고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둘째, 바라바는 특사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빌라도 총독은 결코 바라바를 석방하려는 마음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그가 판단하기에 예수란 작자는 무죄가 확실했습니다. 그도 귀가 있기 때문에 예수가 그 동안 어떤 일을 했는지 들어 알고 있었습니다. 그가 법정으로 끌려온 것은 단지 종교적인 이유 때문이며 종교지도자들의 질투 때문이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석방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는 종교지도자들의 부추김을 받아 유죄를 선언하는 사람들의 요구를 받아들이되 유월절 명절의 특사로 예수와 사형수 바라바 중 한 사람을 사면하겠다고 최종 제안을 했습니다. 그 무리 중에는 예수에게 호감을 가진 사람들도 적지 않게 있을 것이고 반감을 가진 사람들도 다른 대안이 없는 상황에서 위험한 바라바보다는 어쩔 수 없이 예수를 선택할 것이라고 믿었던 듯합니다. 빌라도의 생각은 빗나갔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의 영향력은 상상 외로 컸습니다. 그의 앞에 모여든 유대인들은 대부분 그들이 끌여들인 사람들이라는 것이 분명해졌습니다. 바라바를 외치는 목소리가 전체를 압도했던 것입니다. 사형수 바라바에게 예기치 않은 행운이 찾아왔습니다. 감옥에 갇혀 있는 빌라도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와 같이 활동적인 사람이 비좁은 공간에서 차꼬에 채여 있으려니 오죽 답답했겠습니까! 힘으로 뜻한 바를 이루려 한 사람이 힘에 의해 결박되고 감금되었으니 얼마나 굴욕을 느꼈겠습니까! 사형선고는 그렇다 치고 언제 형이 집행될지 몰라 초조하며 시시때때로 두려움에 휩싸이기도 했었습니다. 그가 정신 이상이 되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모든 것을 다 포기했었습니다. 감방 문이 열리고 간수가 들어왔을 때 그는 이제 끝장이구나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너는 이제 석방이다. 총독 각하께서 사면하셨다”는 것이었습니다. 바라바가 사면을 위해서 한 일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가 처한 상황은 석방을 위하여 애쓸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습니다.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무엇을 애쓸 수 있었겠습니까 우리는 바라바에게서 죄를 지은 세상 모든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바라바가 사면될 수 있었던 것은총독 덕분이 아니었습니다. 빌라도는 위험인물인 그를 사면하고자 하는 생각을 추호도 가지지 않았습니다. 군중 때문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생각도 빌라도와 같았습니다. 단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겠다는 집념이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구 때문입니까 “이에 바라바는 저희에게 놓아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박히게 넘겨주니라”(마27:26) 빌라도는 예수님 때문에 사면되었습니다. “죄 없으신” 예수님 때문에 사면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미리 정하신 뜻 때문에 사면된 것입니다. “과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동하여 하나님의 기름 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스려,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행4:27,28)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은 바라바를 포함한 세상 모든 사람들을 죄로 인한 하나님의 심판에서 벗어나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셋째, 바라바는 자유인이 되었습니다. 바라바는 사면소식을 접하고 기쁜 마음으로 감옥을 나섰습니다. 그는 풀려났습니다. 아주 드물게 죄수가 형기를 마쳤거나 사면이 주어졌는데도 감옥을 나가기를 거부하는 일이 있습니다. 다행히 빌라도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자유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줄 알았습니다. 그것이 받을 자격이 없는 자에게 주어진 과분한 선물인 것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의 값 없이 주시는 구원의 선물을 사람들이 받아들이기를 주저하는 데에는 심리적인 요인도 있습니다. 사람들이 공짜 선물을 받게 되는 경우에 어떻게 행동하는지 생각해 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하고 받아들이면 되는데 혹시나 그 선물을 주는 이면에 무언가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하는 것입니다. 값을 지불해야 하는 것은 아닌가 의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도 많이 속아서 그런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진정한 의미의 선물을 받아본 적이 별로 없어서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는 완전한 선물입니다. 조건 없는 선물입니다. 사람이 무엇을 하는 것을 조건으로 주시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일단 그 은혜를 믿음으로 받는 사람은 감사하는 마음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을 하려고 하는데 이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바라바는 그 날 군중 틈에 섞여 자기 대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았을까요 그가 바라보면서 무엇을 생각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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