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를 지는 사람들 (눅23:26-31)
본문
모든 사람은 반드시 해야 할 일과 해선 안될 일을 선택해야 하는 윤리적. 신앙적 책임을 가지고 있습니다. 기독교인 역시 할 일과 하지 않아야 할 일을 구분해야 합니다. 그리고 꼭 해야 할 일이라면 싫더라도 해야하는 것이 윤리적 결 단이며 신앙적 태도인 것입니다. 하고 싶다고 다 해도 안되고 하기 싫다고 모조리 거절해도 안되는 것이 사람의 도리인 것입니다. 무더운 여름 홀흘 벗으면 시원하겠지만 옷을 입어야 하는 것은 사람이기 때문이고 육교를 놔둔 채 큰 길을 가로 질러 건너가선 안 되는 것은 교통도덕을 지켜야 하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황이나 교회생활의 경우 역시 내 멋대로 결정하고 행동하는 것은 금물입니다. 싫어도 할 일이 있고 억지로라도 할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예수님께서 빌라도가 내린 사형판결 때문에 십자가를 지 고 골고다로 올라가신 기사입니다. 빌라도는 당시 유대나라를 식민통치 하기 위해 파견된 로마의 총 독이었습니다. 먼저 그의 몇가지 잘못을 살펴 보겠습니다.
첫째, 정치문제와 종교문제를 흔동했습니다. 그 당시 유대나라 최 고 의결기관이었던 산헤드린 공의회는 예수의 죄목을 신성모독이라 고 확정했습니다. 신성모독이란 목수의 아들 예수가 자신을 하나님 의 아들이라고 자칭했다는 것이며 사람의 아들이 자신을 신격화 했 다는 것입니다. '나는 하늘로서 보냄을 받았다 "나를 본 자는 아버 지를 보았다'는 등의 말씀을 트집 잡아 신성모독 죄로 몰아세운 것 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지적한 신성모독과 로마 총독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로마의 신은 황제이기 때문에 로마 황제를 매도하거나 그 이름을 욕되게 하지 않는 한 신성모독은 성럽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빌라도 총독은 예수에게 사형을 언도했습니다.그는 유대인의 종교문제를 정치적으로 교묘하게 이용한 것입니다. 정치가는 종교를 교묘하게 이용하는 것이 역사적 관행으로 되어 있습니다. 정권유지나 권력보신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이 정치권력의 형태입니다. 우리가 눈으로 보고 몸으로 겪는 일들입니다만 선거철만 되면 교회문턱을 밟아 보지도 않던 사람들이 저마다 교인이라느니 신자라 며 허리를 굽히는 것을 보게됩니다 그런가 하면 기독교인이라는 사람들이 유교인이 되었다가 불교인이 되었다가 변신을 거듭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정치가 종교를 이용하려 들어도 안되고 종교가 권력 주변을 맴돈다든지 야합하면 둘 다 타락합니다 종교는 정치를 간섭하고 감독할 수는 있지만 종교가 정치권력을 장악한다든지 손을 잡는 것은 지 않습니다. 빌라도의 경우처럼 예수사건을 자신의 권력유지의 수단으로 삼는것은 용납될 수 없는 일입니다. 빌라도는 그 일 때문에 큰 실수를 저지르고 만 것입니다.
둘째. 아내의 충고를 묵살했습니다. 예수를 최종 판결하기 전닐 밤 그의 아내가 꿈을 꾸었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자신의 꿈얘기를 하면서 무죄한 예수에게 무리한 재판을 하지 말 것을 권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이야기를 묵살했 습니다. 이유는 자신의 자존심이나 권위를 세우기 위해서였을 것이 고 자신의 정치권력을 유지하고 유대인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우리는 다양한 종류의 층고와 권면을 접하며 살아갑니다. 부모형제, 윗어른, 친구들의 층고나 권면이 있습니다. 교회와 신앙선배들의 충고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린 그것을 한쪽귀로 듣고 한쪽 귀로 흘려 버리는데 익숙해져 있습니다. 그리고 달 콤한 이야기는 반색하지만 아픈 충고는 외면합니다. 그래서 현대 교회 강단은 십자가가 빠져 있고 책망이 빠져 있습니다 그런 설교를 하면 눈쌀 찌푸리고, 복 받으라, 출세하라, 성공해 라, 잘한다고 치켜 세우면 은혜 받았다고 좋아합니다 편식이 몸에 해로운 것처럼 영적 편식도 해롭습니다. 말씀을 듣는 것도 골고루 듣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야단 맞아도 아멘, 칭찬 받아도 아멘 할 수 있어야지 야단 맞았다 고 소리지르고 덤비면 주의 은혜에서 제외되고 마는 것입니다.그 날 아침 빌라도가 아내의 층고를 받아들여 바른 판결을 했더라면 역사기록이 달라졌을 것입니다.
셋째, 자신의 양심을 외면했습니다. 심리학자들의 말에 의하면 극악무도한 흉악범도 정직한 양심의 한부분은 남아 있다고 합니다. 하물며 그 날 빌라도의 경우는 예수 를 사형판결하는 것이 지 못하다는 양심의 가책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것을 외면해 버렸습니다. 그러나 양심과 하나님은 외면할 수 없습니다. 정직한 양심의 소리를 외면하면 일생동안 고 통 속에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외면하면 그 종말이 심판과 지 옥입니다. 만일 그 때 빌라도가 양심의 소리를 외면하지 않고 바른 자리에 섰더라면 그의 삶이 달라졌을 것입니다.
넷째. 속죄관이 잘못되었습니다. 그는 예수 사형을 확정판결한 후 나는 죄가 없다며 대야에 물을 떠오게 한 후 손을 씻었습니다. 예수 십자가에 못박게한 죄가 손을 씻는 행위로 없어진다는 그의 발상은 보통문제가 아첩니다 중세 천주교의 타락이 극에 달했을 때 돈을 많이내면 자신의 죄는 믈론 먼저 죽은 가족의 죄까지도 사함 받는다면서 저 유명한 속 죄부 판매를 했던 일이 있었습니다. 속죄부 판매의 총책임자였던 '탓젤'은 소리를 지르며 속죄부를 판매했습니다. 여러분의 돈 떨어지는 소리만큼 음부에 간 영혼들이 낙원으로 올라 갑니다'라며 속죄부 세일즈에 열을 올렸습니다. 그러나 죄 사함받는 것은 손을 씻는 것으로도 안됩니다. 속죄부 를 사는 것으로도 안됩니다 선을 행하고 공적을 쌓는 것으로도 안 됩니다.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믿음으로 가능한 것입니다. 의인 죽이고 손 씻는다고 죄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빌 라도는 알지 못했습니다. 다섯째, 다수의 소리에 굴복습니다. 가능하면 예수를 석방하고픈 것이 빌라도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세번씩이나 유대인과 지도자들을 설득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23:23을 보면 '저희가 큰 소리로 재촉하여 십자가에 못박기를 구하니 저희의 소리가 이긴지라 고 했고 24절을 보면 '빌라도 가 저희의 구하는대로 언도하고'라고 했습니다. 그는 다수에게 굴 복한 것입니다 다수의결이 민주정치의 성격입니다. 민주주의자는 다수의 결정을 따르고 순응해야 합니다. 그러나 때로 그 다수의 결정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는 압력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민주주의는 절대적 가치를 지닌 정치제도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세계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그 결정을 따르는 신본주 의, 신주주의가 지배하는 곳입니다.
빌라도는 대증의 소리와 그 결정에 굴복했습니다. 이러한 빌라도의 잘못으로 인한 사형언도 때문에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 가시게 되었다는 것이 본문의 줄거 리입니다. 피곤하고 지친 예수님에게 십자가는 무거운 형틀이었습니다. 언 덕은 가파르고 십자가는 무거웠습니다. 지금도 골고다로 올라가는 언덕 길은 경사가 급하고 오르기가 힘든 먼 거리입니다. 이 길을 '비아돌로사'라고 부릅니다. 예수님을 채찍질하며 뒤따르던 군병이 갑자기 주변을 두리번거리 더니 장정 하나를 불러 세웠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예수 대신 십자가를 지라고 명령했습니다. 이것은 전혀 예상밖의 사건이었습니다. 더구나 그 장정으로서는 상상도 못했던 사건이었습니다. 본문은 그 사람을 '구레네 사람 시몬'이라고 했습니다. 당시 '구레네'는 아프리카 동북편에 있던 증요한 도시로 현재는 트리폴리(Tripoli) 입니다. 그는 로마서 16:13에 바울이 언급한 루 포의 아버지였던 것으로 봅니다. 구레네 시몬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졌고 그의 아들 루포는 바울사도를 도와준 동역자였습니다. 우린 여기서 아름다운 부자의 전승 신앙을 보게 됩니다. 그 당시 예루살렘에는 구레네 사람들이 모이는 회당이 있었기 때문에 시몬도 그 회당에 속했었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예수님을 대신해 십자가를 졌고 그의 아들은 예수님의 사도인 바울을 헌신적으로 섬겼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억지로 졌던 십자가 신앙이 가져다 준 축복이었습니다 그 날 시몬이 진 십자가는 억지로 진 십자가였습니다. 그러나 그 사건은 그의 가문이 예수의 가문이 되는 결정적 동기를 부여 했습니다. 본문 26절을 보면 '저희가 예수를 끌고 갈 때에 시몬이라는 그에게 십자가를 지워 예수를 좇게 하더라'고 했습니다 우린 여기서 시몬이 억지로 십자가를 졌다는 것과 예수를 좇게 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합니다. 시쳇말로 그는 재수없게 걸린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도 아니었고 예수와 깊은 인연을 맺고 산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예수 십자가 가까이 있었 다는 이유 때문에 그리고 남들보다 덩치가 크고 힘이 있어 보였다는 까닭 때문에 억지로 십자가를 져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십자가를 지고 예수 뒤를 따라 가야 했습니다. 26절에서 좇게 하더라'는 말의 뜻은 '뒤에서 지고 가게 하다' 라는 것입니다. 여기 깊은 진리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하은 매일 순간마다 십자가를 져야 하는 삶입니다. 싫든 좋든. 원하든 원하지 않든, 경우에 따라서는 억지로라도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섬기고 교회를 섬긴다고 해서 주님 보다 앞장서면 안됩니다. 시온이 주님의 뒤를 좇으며 십자가를 졌던 것처럼 철저하게 그 뒤를 따라 가야 합니다. 내가 져야 할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예수님 때문에 겪는 고통이며 예수님 때문에 입는 손해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견뎌야 하는 시련이며 시험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신앙적 관심은 예수님 때문에 행복하고, 성공하고, 출세 하고, 번영하는데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 대신해 십자가를 질 수 있는 사람이라야 영광과 축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증요한 것은 주님과 교회를 위해 희생하고 봉사했다고 해서 기염을 토하거나 생색을 내선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 님을 제쳐 놓고 앞장서도 안됩니다. 사복음서를 살펴보면 엉겁결에 십자가를 져야 했던 시몬이 그 어떤 항변도 불평또 늘어 놓지 않았 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말없이 묵묵히 십자가를 지고 주님의 뒤를 따라 갔습니다. 저는 이 모습 속에서 말없이 아버지 아브라함을 따라 모리아산의 번제단을 향해 올라갔던 이삭이 떠올랐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복용 했던 한약 가운데 육모초 생즙보다 더 쓴약은 먹어 본 일이 없습니다. 여름철 더위 먹고 배탈나면 어머님이 육모초를 뜯어다가 생즙 을 내 마시게 했습니다. 그 쓴맛을 말로 다 못합니다. 안먹으면 매 를 때려서라도 마시게 했습니다.
그런데 육모초 생즙 한 대접만 마 시면 더위도 배탈도 달아나 버립니다. 억지로 마신 육모초 생즙이 몸에는 보약이었습니다. 주님을 위하억라면, 주님이 주신 일이라면 억지로라도 합시다. 맛이 쓰고 힘겹고 배짱에 맞지 않더라도 억지로라도 합시다, 주 님은 그 사람을 영월히 기억하시고 그 자손을 축복하실 것입니다. 십자가를 집시다 그러나 앞장서진 맙시다.주님 뒤따르며 주님을 위해 십자가를 집시다
첫째, 정치문제와 종교문제를 흔동했습니다. 그 당시 유대나라 최 고 의결기관이었던 산헤드린 공의회는 예수의 죄목을 신성모독이라 고 확정했습니다. 신성모독이란 목수의 아들 예수가 자신을 하나님 의 아들이라고 자칭했다는 것이며 사람의 아들이 자신을 신격화 했 다는 것입니다. '나는 하늘로서 보냄을 받았다 "나를 본 자는 아버 지를 보았다'는 등의 말씀을 트집 잡아 신성모독 죄로 몰아세운 것 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지적한 신성모독과 로마 총독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로마의 신은 황제이기 때문에 로마 황제를 매도하거나 그 이름을 욕되게 하지 않는 한 신성모독은 성럽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빌라도 총독은 예수에게 사형을 언도했습니다.그는 유대인의 종교문제를 정치적으로 교묘하게 이용한 것입니다. 정치가는 종교를 교묘하게 이용하는 것이 역사적 관행으로 되어 있습니다. 정권유지나 권력보신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이 정치권력의 형태입니다. 우리가 눈으로 보고 몸으로 겪는 일들입니다만 선거철만 되면 교회문턱을 밟아 보지도 않던 사람들이 저마다 교인이라느니 신자라 며 허리를 굽히는 것을 보게됩니다 그런가 하면 기독교인이라는 사람들이 유교인이 되었다가 불교인이 되었다가 변신을 거듭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정치가 종교를 이용하려 들어도 안되고 종교가 권력 주변을 맴돈다든지 야합하면 둘 다 타락합니다 종교는 정치를 간섭하고 감독할 수는 있지만 종교가 정치권력을 장악한다든지 손을 잡는 것은 지 않습니다. 빌라도의 경우처럼 예수사건을 자신의 권력유지의 수단으로 삼는것은 용납될 수 없는 일입니다. 빌라도는 그 일 때문에 큰 실수를 저지르고 만 것입니다.
둘째. 아내의 충고를 묵살했습니다. 예수를 최종 판결하기 전닐 밤 그의 아내가 꿈을 꾸었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자신의 꿈얘기를 하면서 무죄한 예수에게 무리한 재판을 하지 말 것을 권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이야기를 묵살했 습니다. 이유는 자신의 자존심이나 권위를 세우기 위해서였을 것이 고 자신의 정치권력을 유지하고 유대인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우리는 다양한 종류의 층고와 권면을 접하며 살아갑니다. 부모형제, 윗어른, 친구들의 층고나 권면이 있습니다. 교회와 신앙선배들의 충고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린 그것을 한쪽귀로 듣고 한쪽 귀로 흘려 버리는데 익숙해져 있습니다. 그리고 달 콤한 이야기는 반색하지만 아픈 충고는 외면합니다. 그래서 현대 교회 강단은 십자가가 빠져 있고 책망이 빠져 있습니다 그런 설교를 하면 눈쌀 찌푸리고, 복 받으라, 출세하라, 성공해 라, 잘한다고 치켜 세우면 은혜 받았다고 좋아합니다 편식이 몸에 해로운 것처럼 영적 편식도 해롭습니다. 말씀을 듣는 것도 골고루 듣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야단 맞아도 아멘, 칭찬 받아도 아멘 할 수 있어야지 야단 맞았다 고 소리지르고 덤비면 주의 은혜에서 제외되고 마는 것입니다.그 날 아침 빌라도가 아내의 층고를 받아들여 바른 판결을 했더라면 역사기록이 달라졌을 것입니다.
셋째, 자신의 양심을 외면했습니다. 심리학자들의 말에 의하면 극악무도한 흉악범도 정직한 양심의 한부분은 남아 있다고 합니다. 하물며 그 날 빌라도의 경우는 예수 를 사형판결하는 것이 지 못하다는 양심의 가책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것을 외면해 버렸습니다. 그러나 양심과 하나님은 외면할 수 없습니다. 정직한 양심의 소리를 외면하면 일생동안 고 통 속에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외면하면 그 종말이 심판과 지 옥입니다. 만일 그 때 빌라도가 양심의 소리를 외면하지 않고 바른 자리에 섰더라면 그의 삶이 달라졌을 것입니다.
넷째. 속죄관이 잘못되었습니다. 그는 예수 사형을 확정판결한 후 나는 죄가 없다며 대야에 물을 떠오게 한 후 손을 씻었습니다. 예수 십자가에 못박게한 죄가 손을 씻는 행위로 없어진다는 그의 발상은 보통문제가 아첩니다 중세 천주교의 타락이 극에 달했을 때 돈을 많이내면 자신의 죄는 믈론 먼저 죽은 가족의 죄까지도 사함 받는다면서 저 유명한 속 죄부 판매를 했던 일이 있었습니다. 속죄부 판매의 총책임자였던 '탓젤'은 소리를 지르며 속죄부를 판매했습니다. 여러분의 돈 떨어지는 소리만큼 음부에 간 영혼들이 낙원으로 올라 갑니다'라며 속죄부 세일즈에 열을 올렸습니다. 그러나 죄 사함받는 것은 손을 씻는 것으로도 안됩니다. 속죄부 를 사는 것으로도 안됩니다 선을 행하고 공적을 쌓는 것으로도 안 됩니다.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믿음으로 가능한 것입니다. 의인 죽이고 손 씻는다고 죄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빌 라도는 알지 못했습니다. 다섯째, 다수의 소리에 굴복습니다. 가능하면 예수를 석방하고픈 것이 빌라도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세번씩이나 유대인과 지도자들을 설득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23:23을 보면 '저희가 큰 소리로 재촉하여 십자가에 못박기를 구하니 저희의 소리가 이긴지라 고 했고 24절을 보면 '빌라도 가 저희의 구하는대로 언도하고'라고 했습니다. 그는 다수에게 굴 복한 것입니다 다수의결이 민주정치의 성격입니다. 민주주의자는 다수의 결정을 따르고 순응해야 합니다. 그러나 때로 그 다수의 결정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는 압력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민주주의는 절대적 가치를 지닌 정치제도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세계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그 결정을 따르는 신본주 의, 신주주의가 지배하는 곳입니다.
빌라도는 대증의 소리와 그 결정에 굴복했습니다. 이러한 빌라도의 잘못으로 인한 사형언도 때문에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 가시게 되었다는 것이 본문의 줄거 리입니다. 피곤하고 지친 예수님에게 십자가는 무거운 형틀이었습니다. 언 덕은 가파르고 십자가는 무거웠습니다. 지금도 골고다로 올라가는 언덕 길은 경사가 급하고 오르기가 힘든 먼 거리입니다. 이 길을 '비아돌로사'라고 부릅니다. 예수님을 채찍질하며 뒤따르던 군병이 갑자기 주변을 두리번거리 더니 장정 하나를 불러 세웠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예수 대신 십자가를 지라고 명령했습니다. 이것은 전혀 예상밖의 사건이었습니다. 더구나 그 장정으로서는 상상도 못했던 사건이었습니다. 본문은 그 사람을 '구레네 사람 시몬'이라고 했습니다. 당시 '구레네'는 아프리카 동북편에 있던 증요한 도시로 현재는 트리폴리(Tripoli) 입니다. 그는 로마서 16:13에 바울이 언급한 루 포의 아버지였던 것으로 봅니다. 구레네 시몬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졌고 그의 아들 루포는 바울사도를 도와준 동역자였습니다. 우린 여기서 아름다운 부자의 전승 신앙을 보게 됩니다. 그 당시 예루살렘에는 구레네 사람들이 모이는 회당이 있었기 때문에 시몬도 그 회당에 속했었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예수님을 대신해 십자가를 졌고 그의 아들은 예수님의 사도인 바울을 헌신적으로 섬겼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억지로 졌던 십자가 신앙이 가져다 준 축복이었습니다 그 날 시몬이 진 십자가는 억지로 진 십자가였습니다. 그러나 그 사건은 그의 가문이 예수의 가문이 되는 결정적 동기를 부여 했습니다. 본문 26절을 보면 '저희가 예수를 끌고 갈 때에 시몬이라는 그에게 십자가를 지워 예수를 좇게 하더라'고 했습니다 우린 여기서 시몬이 억지로 십자가를 졌다는 것과 예수를 좇게 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합니다. 시쳇말로 그는 재수없게 걸린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도 아니었고 예수와 깊은 인연을 맺고 산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예수 십자가 가까이 있었 다는 이유 때문에 그리고 남들보다 덩치가 크고 힘이 있어 보였다는 까닭 때문에 억지로 십자가를 져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십자가를 지고 예수 뒤를 따라 가야 했습니다. 26절에서 좇게 하더라'는 말의 뜻은 '뒤에서 지고 가게 하다' 라는 것입니다. 여기 깊은 진리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하은 매일 순간마다 십자가를 져야 하는 삶입니다. 싫든 좋든. 원하든 원하지 않든, 경우에 따라서는 억지로라도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섬기고 교회를 섬긴다고 해서 주님 보다 앞장서면 안됩니다. 시온이 주님의 뒤를 좇으며 십자가를 졌던 것처럼 철저하게 그 뒤를 따라 가야 합니다. 내가 져야 할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예수님 때문에 겪는 고통이며 예수님 때문에 입는 손해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견뎌야 하는 시련이며 시험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신앙적 관심은 예수님 때문에 행복하고, 성공하고, 출세 하고, 번영하는데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 대신해 십자가를 질 수 있는 사람이라야 영광과 축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증요한 것은 주님과 교회를 위해 희생하고 봉사했다고 해서 기염을 토하거나 생색을 내선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 님을 제쳐 놓고 앞장서도 안됩니다. 사복음서를 살펴보면 엉겁결에 십자가를 져야 했던 시몬이 그 어떤 항변도 불평또 늘어 놓지 않았 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말없이 묵묵히 십자가를 지고 주님의 뒤를 따라 갔습니다. 저는 이 모습 속에서 말없이 아버지 아브라함을 따라 모리아산의 번제단을 향해 올라갔던 이삭이 떠올랐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복용 했던 한약 가운데 육모초 생즙보다 더 쓴약은 먹어 본 일이 없습니다. 여름철 더위 먹고 배탈나면 어머님이 육모초를 뜯어다가 생즙 을 내 마시게 했습니다. 그 쓴맛을 말로 다 못합니다. 안먹으면 매 를 때려서라도 마시게 했습니다.
그런데 육모초 생즙 한 대접만 마 시면 더위도 배탈도 달아나 버립니다. 억지로 마신 육모초 생즙이 몸에는 보약이었습니다. 주님을 위하억라면, 주님이 주신 일이라면 억지로라도 합시다. 맛이 쓰고 힘겹고 배짱에 맞지 않더라도 억지로라도 합시다, 주 님은 그 사람을 영월히 기억하시고 그 자손을 축복하실 것입니다. 십자가를 집시다 그러나 앞장서진 맙시다.주님 뒤따르며 주님을 위해 십자가를 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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