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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적 자녀 양육 (눅2:2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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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를 양육하는 부모의 마음은 늘 자녀들에게 있습니다. 자녀를 양육하면 서 자녀들이 최소한 나보다 더 나은 사람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자기 자녀가 잘못되기를 바라는 부모는 한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다 자녀들이 나보다 더 훌륭한 사람으로 인생을 성공적으로 살아 가도록 하기 위해서 부모는 피와 눈물과 땀을 쏟습니다. 하지만 그 일이 그 렇게 쉽지 않습니다. 자녀를 양육하는 일이 박사학위를 받는다고 해서 가능 한 일이던가요. 자녀를 잘 키우는 것이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이라서 잘 양육할 수 있던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농사 중에서도 자식농사가 제일 큰 농사라고 하는데 자식농사야 한번 지으면 그걸로 끝이 나버리기 때문에 조 심스럽기도 하고 정말로 두렵기도 합니다. 이 귀한 자녀 양육 책임을 맡으면 서 내가 정말로 자녀를 양육하는 이 방법이 옳은 것인지 아니면 잘못된 것 인지 정확히 판단할 만한 자신도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녀 양육에 성공 했다는 사람들의 수기를 어떤 잡지나 언론매체나 주변사람들을 통해서 자주 보게 됩니다. 해마다 5월 달이 되면 모든 잡지나 언론매체들이 자녀 양육을 성공적으로 한사람들의 이야기를 기사로 또는 대담형식으로 사람들에게 알 려줍니다.
그런데 소위 그들이 말하는 자녀양육에 성공했다는 사람들의 내용 을 살펴보면 자식 5남매를 모두 다 서울대 합격시켰다든지, 형제가 사법고시 다 합격을 했다든지, 아니면 어린 나이에 유학을 해서 세계 수재들이 모이는 미국의 일류대학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을 했다든지 하는 것입니다. 가만 히 보면 자녀를 잘 양육하는 것은 공부를 잘하게 하는데 있다는 것에 초점 에 맞추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나도 그렇게 자녀를 키워보기 원하지만 그 일 이 그렇게 쉽게 되지 않습니다. 아무리 노력하고, 때론 애걸복걸 해보아도 자녀들이 그렇게 내 뜻대로 공부를 잘해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때론 마음속 으로 절망감도 갖습니다. '저 원수 같은 것을 내가 무엇 때문에 낳았나.' 하는 자기 절망감도 자주 갖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한번쯤 이렇게 생각해 보셨습니까 정말로 세상이 말하는 자녀양육의 성공은 자녀들이 공부 잘하는데 있는 것인지, 과연 이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생각해 보셨습니까 정말로 아이들을 공부 잘하는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 자녀를 위한 최선에 사랑이라 고 생각하십니까 그래서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일류대학을 보내야 하는 것입니까 그래서 최선의 노력을 다해서 일류대학 뺏지라도 달아야 시원하 겠다는 말입니까 우리가 신앙인으로서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공부도 은사 라는 사실입니다. 은사가 공부인 사람은 공부로 성공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은사가 아닌 사람을 자꾸만 공부 시키려고 하면 그 아이를 죽이는 것입니다. 이 세상 수많은 생명가운데 공부에 은사인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될 까요 이 세상 모든 사람이 다 공부에 은사가 있는 사람이라면 아마 세상은 진즉 망했을 것입니다. 더더군다나 공부에 대해서 어른들이 머리를 좀 바꿔 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공부는 책상에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놀면서도 얼마든지 공부할 수 있습니다. 선진 교육을 이룬 서구의 모든 사회를 보면 공부는 단순히 단어 몇 개를 외우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얼마든지 놀이를 통해서 원리만 깨달아서 알면 하나의 진리를 가지고 백 개를 풀어 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놀이와 반복학습을 통해서 원리 하나를 깨우치는데 일주일이 가기도 합니다. 또 우리 교육은 원리를 깨닫도록 가르치지 않습니다. 외우기는 잘하는데, 시험지는 잘 푸는데, 교과서에 없는 내용이 나오면 아무 것도 모릅니다. 유대인들의 교육을 말하면서 그들은 "고기를 잡아 주기 않고 고기를 잡는 법을 가르쳐 준다"고 합니다. 이것이 다릅니다. 아이들은 놀면서도 공부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애들이 책상에만 붙어 앉아 있어야 공 부하는 줄로 착각합니다. 또한가지 분명한 것은 교과서를 통달하는 것만이 지식이 아니고 세상에 여러 경험도 교과서 못지 않은 산지식이란 것을 알아 야 합니다. 그런 산지식을 어릴 때 경험하게 하는 것이 평생 잊지 못할, 굉 장한 지식의 원천이 되는 것입니다. 가정의 달 5월에 우리는 다시 한번 겸손하게 자녀양육의 문제를 성경에서 배워야겠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온전한 사람이십니다. 성 공이라고 말한다면 예수님보다 더 성공한 인생은 찾아볼 수 없을 겁니다. 그 분은 지식도 없으셨습니다. 그분은 세상에서 출세를 하신 분도 아니십니다. 그렇다고 고고한 학문의 업적을 남기신 분도 아니셨습니다. 하지만 오직 그 분만이 역사를 두 조각 내버리셨습니다. 오직 그를 만나는 사람마다 그의 생 명이 새롭게 변화되어지고, 오직 그를 만나는 사람마다 오늘도 구원이라는 놀라운 새로운 세계에 들어갑니다. 이 세상 어느 누가 그를 만나는 사람마다 변화되고 어떤 위대한 성자가 그를 만나는 사람마다 오늘도 구원에 이르게 할 수 있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고귀한 예수님, 인간 중에 가장 성공적인 삶을 사신 예수님의 어린 시절을 요셉과 마리아에게 맡겨 주 셨습니다. 그리고 요셉과 마리아의 손을 통해서 아기 예수가 자라가도록 위 임하셨습니다. 오늘날 정말로 자녀를 사랑한다면 요셉과 마리아가 아기예수 를 양육했던 그 양육방법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에 수많은 교육이론이 있고 유아교육의 모델이 있지만 그것은 참고사항일 뿐이지 정말로 아이들의 영혼과 그의 장래에 가장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은 성경적 자녀양육방법이 무 엇이냐 요셉과 마리아가 과연 예수님을 기른 그 양육방법이 무엇인가를 깊 이 배워서 우리의 삶 가운데 하나라도 적용할 수 있다면 절대 실패하지 않 은 자녀양육이 될 줄로 믿습니다. 첫 번째로 보면 요셉과 마리아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했습니다. 짧은 본문의 말씀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표현하는 구절이 여섯 번 나옵니다. 그 짧은 본문 안에서 아직 어린 예수, 난지 40일 밖에 되지 않은 어린 예수를 가슴에 안고 요셉과 마리아는 '율법대로' '율법대로' '율법대로'라는 말 을 다섯 번, 여섯 번 반복하도록 그렇게 아이를 양육했습니다. 불면 날아갈 것 같은 그 어린 생명, 난지 40일 밖에 되지 않은 그 어린 생명에게 요셉과 마리아는 아기 예수의 건강을 위해서 예방주사를 맞게 하는 것이 아니라 율 법의 정신을 따라 그 아이를 하나님께 드리길 원했다는 사실입니다. 유대인 들은 지금도 예수님이 오시지 않고, 메시아가 오시지 않고 아직도 오실 메시 아가 있다고 보기 때문에 구약의 모든 가르침에 따라 자녀를 양육합니다. 그런데 지금도 강조하는 두 가지 예식이 있습니다. 소위 할례의식과 결례의식 입니다. 오늘 말씀처럼 할례의식은 사내아이가 이 땅에 태어나면 8일만에 남 자의 표피를 잘라주는 예식입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포경수술입니다. 이때 부모가 또는 그 주위에 사는 랍비가 그냥 포경수술을 해줍니다.
그런데 지금 도 의학적으로 밝혀진 것은 아이가 낳은 지 8일만에 가장 면역력이 강하답니다. 어떤 방법으로 수술을 해도 상처가 덧나지 않습니다. 이 할례의식은 하나님께서 창세기 17:9-11말씀에 가르친바 대로 아브라함에 후손 된 인식으 로 유대인들이 늘 행해왔던 의식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때 바로 이름을 지어 줍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오늘 요셉과 마리아는 예수님을 할례하고 그 다음에 이름을 지어주는데 성경은 뭐라고 말합니까. '천사가 가르쳐 준대로', 곧 하나님의 말씀대로 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아기의 이름을 예수라 고 지었습니다. 그 다음에 40일이 되어서 결례의식을 행하였습니다. 결례란 무엇을 말합니까 특별히 한 가정에 장자로 때어난 자녀를 하나님께 드리는 봉헌예식입니다. 성경에 보면 그런 말씀이 있습니다. 출애굽기 13:2, 12 말씀에 "이스라엘 자손 중에 사람이나 짐승이나 무론하고 초태생은 다 거룩 히 구별하여 내게 돌리라 이는 내 것이니라 하시니라. 너는 무릇 초태생과 네게 있는 생축의 초태생을 다 구별하여 여호와께 돌리라 수컷은 여호와의 것이니라."하셨습니다. 장자든지 짐승의 첫 새끼든지 모두가 다 하나님에 것 이니까 하나님께 드려라 말씀하신 대로 요셉과 마리아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아기예수를 하나님께 드린 것입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가난한 가정이어 서 어린 비둘기 두 마리를 가지고 와서 아기예수 대신 어린 비둘기 두 마리 를 잡아서 하나님께 봉헌한 것입니다. 여기에 소중한 진리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마지막 39절에도 '율법에 가르친바 대로 모든 내역을 마치고 고향 나 사렛으로 돌아갔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아기예수께 맨 먼저 접촉하게 한 것은 영적 생명이라는 말입니다. 아기의 건강보다 더 소중한 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따른 영적인 훈련', 이것이 소중하기 때문에 할례와 결례의 의식 통해 예수님을 하나님께 드려버렸다는 말입니다. 저는 종종 출산예배를 드릴 때나 돌 예배를 드릴 때, 백일예배를 드릴 때 에 그 집에 들어가면서 집안 분위기를 대충 살펴봅니다. 어떻게 아이를 양육 하고 있는가… 대부분 똑같습니다. 제가 가끔가다 권해 드리지만 설교만 듣 고 그대로 행동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듣고서 꼭 그 대로 해보시기 바랍니다. 아이를 난 집에 가보면 대충 어떤 줄 아십니까 위 에 모빌이 걸려 있습니다. 잠자리, 나비, 별이 흔들거리며 왔다갔다합니다. 돌이 되고 백일만 넘어보세요. 그림 동화책이 전집으로 몇 세트씩은 반드시 그 옆에 있습니다. 엄마가 들려주는 재미있는 동화 시리즈나 카세트가 옆에 놓여 있습니다. 또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각양 각색의 장난감들. 아이들이 보고 쥐고 흔들고 놀 수 있도록 전부다 세상교육의 방법을 그대로 받아들여 서 빨리 우리아이가 자라서 천재가 되기를 원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머리도 잘 발달하고
I.Q 뿐만 E.Q도 잘 발달해서 우리 아이가 다른 아이보다 뛰어 난 아이가 되기를 원하는 바램이 있습니다. 제가 아무리 눈을 씻고 찾아봐도 아이들에 머리맡에 성경, 찬송이 놓여 있는 가정을 못 보았습니다. 예전에 구약의 율법에 의하면 분명히 할례와 결례가 이 아이를 하나님께 받치는 의식입니다. 그래서 그 아이의 영혼 속에 이미 하나님의 생명이 들어 가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무엇입 니까. 우리가 낳은 지 8일만에 할례를 할 것입니까. 그게 아닙니다. 지금도 유아교육학자들이 굉장히 깊이 하는 말이 있습니다. 태어난 아이들은 첫 만 남이 무엇인지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처음 들은 말이 무엇인지 굉장히 중요 합니다. 그리고 큰 표현은 못하지만 아이의 무의식 속에 깊이 자리를 잡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욕심이 있다면 우리 어린이집에서 갓난아기도 받았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하고싶은 것은 그냥 날마다 성경, 찬송만 들려주었으면 좋 겠습니다. 아이들에게 동화를 들려주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매일 아이를 가 슴에 안고 성경을 한 장씩 읽어 줘 보십시오. 제가 우리 삼남매를 기르면서 놓쳐버린 것이 그것입니다. 다른 것들은 참 많이 시도해 봤는데 그 철부지 어린아이 때 아이 머리맡에서, 또는 가슴에 안고 성경책을 읽어 주는 일은 못해 보았니다. 개역성경이 어렵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이 관심만 있다면 동화책 전집 살 값 십분지일만 줘도 현대어로 번역된 성경들이나 쉬운 성경 들이 많은지 모릅니다. 내가 영어를 좀 안다면 쉬운 영어 번역으로 그 아이 의 머리맡에서 매일 1장 내지 3장 정도를 읽어주는 그런 관심을 가져보면 어떨까요 아이들의 머리맡에 오늘도 세상의 동화, 쓸데없는 공상의 동화를 들려주는 것보다는 하나님의 말씀과 찬양을 들려주는 것이 얼마나 좋을까 요 '아무 것도 모르는 애들인데 어떻게 어른들도 이해하기 어려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줄 수 있겠는가'하고 반문하실 분이 계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교육은 아이들이 이해하라고 전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아이들이 돌이 넘어서 그림책 볼 때에 아이들을 이해시키면서 보여줍니까 아니지요. 같은 값이면 성경에 나온 수많은 순례자들의 이야기, 족장들의 이야기, 선교사들 의 이야기를 들려주면 얼마나 그들의 영혼 속에 하나님의 영적인 부유함이 자리 잡을 수 있겠습니까 어떤 분은 이렇게 생각하실 지도 모릅니다. '아이 고 나는 이미 늦었다. 나에겐 젖먹일 아이도 없고 유치원 다니는 애도 없고 나는 이미 틀렸다.' 아닙니다. 정말로 자녀들에게 소중한 모범이 무엇입니까. 제가 아마 여러분 자녀 다 불러모아서 통계를 내보면 충격 받으실 겁니다. 어느 교회나 마찬가지일 거예요. 정말로 예수를 30년, 40년 믿으면서 자녀들 보는 앞에서 성경 읽는 아빠의 모습 보여 주신 적 있습니까 성경을 읽는 엄마의 모습 얼마나 많이 보여주셨습니까 부모님의 입을 통해서 찬양하는 모습을 얼마만큼 자녀들이 볼 수 있도록 보여주셨습니까 죄송합니다만 전 지금도 돌아가신 어머니를 잊지 못합니다. 저희 아버지는 초등학교 교장선생 님도 하신 분이십니다. 30대 초반에 제련소에 부공장장도 하신 쟁쟁한 어른 이십니다. 일제시대 때에는 면장도 하셨던 분입니다. 나름대로 학식과 인격 과 경륜이 대단한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우리 십 남매에게 가장 큰 것은 어머니의 말씀 한마디입니다. 그분은 돌아가실 때까지 성경을 손에서 놓지 않 으셨습니다. "안목사야, 성경이 이제 안 보인다. 성경을 읽을 수가 없다. 재미 가 없다." 그러하기에 초등학교 4학년밖에 나오지 않은 어머니지만 그분의 말씀 한마디 한마디는 자녀들의 가슴에 박히는 인생의 교훈이 된 것입니다. 자녀들에게 믿음으로 살라고 말하지만 정말로 집에서 성경 읽고 기도하고 찬송하는 부모의 모습을 보여 주신 적 있습니까 "우리 아빠" 그러면 날마다 TV 틀어놓고 스포츠나 보시고, "우리엄마" 그러면 TV 틀어놓고 일일연속극 에 심취해 사시는 엄마. 그 정도만 인식이 되어진다면 거기에 진정한 영적 생명이 자리 잡을 수 있겠습니까. 그건 불가능합니다. 이번 주 기독공보에도 보니까 가정의 달을 맞이하면서 주일 이산가족의 문제를 다루면서 이제 가 족과 함께 드리는 예배로 바꿔야 한다는 그런 취지의 제안이 나와 있었습니다. 내용은 한가지입니다. 정말로 교회에 열심히 봉사하는 평신도들은 아침 일찍 나와서 저녁예배드릴 때까지 가족들을 만나볼 기회가 없어요. 성가대, 교사 또 자치단체 모임들, 또 무슨 회의 해야죠. 가족들을 만날 기회가 없어 요. 오히려 평소에 더 바쁘게 지내다가 주일날만큼은 가족끼리 한자리에 모 여서 예배드려야 되겠는데 주일은 더 바빠서 가족의 얼굴을 볼만한 시간이 없습니다. 그래서 새롭게 "가족과 함께 드리는 예배"를 시도해야 한다는 제 안을 했습니다. 예배가 세상의 교육학의 방법을 도입해서 아이들 따로 예배 드리고 청소년 따로 예배드리고 청년들 따로 예배드리고 어른들 예배 따로 드립니다. 언제 만나겠습니까. 우리 교회가 가족과 함께 예배드리는 그런 모 습들이 소문이 나면서 관심 있는 목사님들이 가끔 1년에 십여차례 전화가 옵니다. 그럼 그분들이 꼭 묻는 두 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첫째가 뭔가 하면 "안 떠듭니까"
그런데 1부 예배 나와 보십시오. 안떠들어요. 왜 아이들이 안 떠듭니까 부모님께서 경건하게 말씀에 집중하고 힘있게 찬송 부르시고 하나님 앞에 서있는 마음으로 예배드리고 있는데 어떻게 자녀들이 옆에서 떠 들겠습니까 부모의 예배드리는 모습을 통해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간접적 으로 경험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질문이 있습니다. "아이들이 목사님 설교를 알아듣습니까" 전 그렇게 대답합니다. "그러면 아동부, 유치부 예배에서 아 이들은 설교 알아듣습니까 그리고 한가지 더 분명한 것은 유치부, 아동부 설교가 설교입니까 동화입니까" 전 그렇게 물어봅니다. 대부분 동화이지 요. 이야기지요. 그러면 목사님 설교에 이야기가 나옵니까 안나옵니까. 적어 도 한 두개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이야기만이라도 알아들을 수 있으면 설 교 듣는 것이죠. 오늘 우리가 정말로 하나님에 말씀 안에서 자녀들에게 영적 인 삶의 부유함과 아름다움을 보여주지 못하고 단순히 '교회가거라. 하나님 이 인생에 주관자다' 그렇게 말하는 것으로 신앙교육이 다 끝나는 것으로 착 각하는 모순이 있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적어도 요셉과 마리아는 아기 예수 를 키우면서 이런 신앙에 모범을 그 아이가 철이 들기 전, 의식이 없을 때부터 하나님 말씀에 따라 그를 양육하며 그를 세워갔습니다. 지금도 청소년이 있다면 늦지 않았습니다. 아이들이 집으로 돌아올 때 비록 돋보기 안경을 쓰 고 성경을 한 장씩 소리내며 읽는 부모님의 모습을 보여줘 보십시오. 그리고 읽은 성경말씀을 가지고 그 다음날 아침 식탁에서 지난밤에 읽은 성경의 이 말씀이 너무나 좋더라 하면서 지나가는 말로 한마디씩만 던져 보십시오. 매 일 그렇지 않더라도 일주일에 한번씩만 그렇게 해보십시오. 그렇게 하고도 자녀들이 탈선하고 자녀들이 바르게 자라지 못한다면 이상한 일일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아브라함 링컨이 그 나이 아홉 살 때 어머니 낸시가 세상을 떠나면서 아들에게 그렇게 당부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아들아! 너는 내 가 늘 보던 이 성경, 이 성경을 네 손에 놓지 말고 성경을 읽고 그 말씀대로 살아라.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며 살아라. 이것이 나의 마지막 유언이요 마 지막 부탁이다." 그렇게 하고 죽었습니다. 아홉 살 된 링컨이 죽을 때까지 그 원리를 잃지 않았습니다. 어머니의 성경읽는 모습이 초등학교밖에 나오지 않 은 링컨을 변호사 되게 하고 대통령되게 하며 노예해방을 이루어낸 삶의 원 동력이었습니다. 두 번째로 믿음의 사람들에게 축복을 받도록 해주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양육하는 요셉과 마리아에게 성전에서 경건한 사람 시므온과 안나을 만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통해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하였습니다. 자녀양육은 부모 두 사람 힘만으로 되지 않습니다. 일가 친척과 특별히 경건한 믿음의 사람들의 축복이 필요합니다. 시므온과 안나는 성령님의 사람이었습니다. 성령님의 사람 그들로부터 그 어린 생명을 축복해주는 일들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오늘 성경은 보여주고 있습니다. 성령님의 사람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 번째로 의로운 사람입니다. 어찌하던지 하나님의 말씀 앞에 자신을 드리기를 힘씁니다. 시므온이 의롭다 고 표현된 것은 믿음으로 인한 의가 아닙니다. 율법 아래 살면서 율법을 힘 을 다해 지키려는 몸부림 가운데 말씀의 의로움이, 믿음이 아닌 말씀을 행함 으로 따라오는 의로움이 드러났다는 말입니다. 안나라는 여인은 참으로 불행 한 여인이었습니다. 그가 그러한 불행을 인간적인 방법으로 해결하지 않고 84년을 하나님의 성전에서 주야로 금식하며 살았습니다. 자신의 감정과 욕심 을 절제할 줄 알았다는 말입니다. 어린아이는 특별히 자기가 이상적으로 바 라는 어른들을 만나면 꼭 그를 닮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정말로 어린아이의 손을 잡고 믿음의 사람들을 자주 찾아다니는 것이 아이들의 신앙양육과 바 른 성장에 굉장히 중요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전 개인적인 고백입니다만 제 가 어른예배를 중학교 다닐 때부터 스스로 참석했던 이유가 하나 있습니다. 저희들이 어렸을 적엔 부흥회를 하면 그렇게 아이들을 쫓아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쫓아냈음에도 불구하고 어머니가 제 손을 붙잡고 부흥회를 참석하셨 습니다. 그때 아무 것도 몰랐었지만 말씀을 듣고 함께 기도하는 손의 뜨거운 열기가 제 몸에 피부로 다가왔습니다. 그것은 세상 그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어린 나이지만 초등학교 때지만, 거룩한 감격이었습니다. 그것이 너무 나 그리웠습니다. 돌이켜 생각해 보십시오. 아이들이 뭔가 흉내낼 때 무엇을 흉내내야 합니까.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를 이야기합니다. 교육의 아름 다운 모델로 그것을 이야기합니다. 아이들은 보는 대로 배우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쩌자고 TV앞에서 연예인들 흉내내는 것보고 "잘한다."하면서 더하라 고 박수를 치는 것입니까. 어린 나이지만 기도하는 모임에 데려가 보십시오. 어린 나이지만 하나님 말씀 안에 사는 경건한 사람 만나서 10분, 20분 부모 님과 대화하는 가운데 가만히 앉아 있도록 훈련시켜 보십시오. 사람은 영적 인 존재이기 때문에 그 영적 생명이 말씀과 경건과 부딪치기 시작하면 거기 에는 그 무엇으로도 깰 수 없는 하나님의 권세가 임하는 줄로 믿습니다. 성령의 사람은 두 번째로 "기도의 사람"입니다. 시므온은 하나님의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 죽지 아니하리라는 음성을 들은 기도의 사람이었고 안나는 성전에서 주야로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 과 우리를 이어주는 유일한 통로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볼 수 있고, 기도하는 사람을 통해서 오늘도 내 힘으로 사는 것 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과 힘으로 사는 것임을 배울 수 있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정말로 어린아이를 믿음의 사람, 기도의 사람에게 데 리고 가서 그 믿음의 사람이 기도해 주며, 영적으로 축복하고 예언해 주는 것은 아이에게 대단한 축복인 것입니다. 대단한 영광인 것입니다. 우리는 아 이들에게 이런 경험을 해주지 않고 믿음으로만 살기를 강요합니다. 거기에 한계가 있는 것입니다. 상담을 해도 아이들을 같이 데리고 와서 내 문제를 상담을 하고 울고, 좀 장난을 치더라도 아이들을 같이 데리고 와서 목사님 얘기도 듣고, 하는 것이 훨씬 유익합니다. 저 귀찮은 혹 떼어놓고 내 문제만 처리하겠다고 생각하는 거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감사의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성령님의 사람은 언제나 긍정적입니다. 시와 찬미와 신령 한 믿음으로 늘 하나님께 화답합니다. 시므온과 안나를 보십시오. 오늘도 아 기예수를 붙잡고 얼마나 감격합니까.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제는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이 생명을 보았사오니 이는 내 영혼이 주님을 찬양할 것 뿐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많은 부분이 감사와 찬양으로 가득 차 있는 것 을 보게 됩니다. 일전에 책을 읽으면서 참 충격되는 구절이 하나가 있었습니다. 부정적인 성격 즉, 똑같은 사건을 보아도 늘 부정적이고 파괴적으로 안 된다고 보는 사람은 유전적인 성향이 강하답니다. 핏줄의 성향이 강한데 그 걸 어떻게 끊어 버릴 수 있습니까 어떻게 부정적인 사람이 긍정적인 "감사 의 사람"으로 바뀌어질 수 있는 겁니까 나는 바꿀 수 없지만 내 피, 내 자 식을 바꿀 수는 없지만 성령님의 사람, 감사가 충만한 사람과 만나게 되면 어 린 심령가운데 유전적 성격의 모순도 하나님께서 그런 방법을 통해 바꿔 주 실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어린 생명들이지만 믿음의 사람, 경건한 사람과 만나게 하는 것이 소중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가끔 드리는 말씀이지 만 아직도 우리 교회에서 이 일이 잘 되지 못해요. 구역예배 드릴 때에나 때 로는 제가 심방을 가서 예배 드릴 때 제발 아이를 쫓아 내지 마십시오. 제발 쫓아내지 마십시오. 떠들어도 좋고 성경책을 찢어도 좋으니까 제발 쫓아내지 말고 같이 예배 드릴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왜 쫓아내야 합니까 잠자는 아 이라면 데리고 와서라도 좀 울더라도 어때요. 같이 예배를 드리는 그런 경건 함이 우리에게 얼마나 필요한지 모릅니다. 전 지금도 참 부러운 것이 있습니다. 제가 목회 초기에 정말로 목회가 너무나 힘들고 어떻게 설교 할 줄도 몰 라서 여름 휴가 때가 되면 기도원을 많이 찾았습니다.
그런데 그 기도원에 젊은 부부가 자기 아이들을 데리고 와서 기도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와 똑 같은 나이인데 그래서 물어 보았습니다. "이 애들이 기도하는 것을 좋아합니 까" 3년째 왔다는데 뭐라는 줄 아세요 아이들이 산과 바다로 바캉스 가는 것보다 더 좋아한답니다. 그리고 같이 예배드리면 땀을 흘리며 기도하는데 그날 저녁에 방언이 터지더라구요. 아이들이, 초등학생 아이들이… 하두 신 기해서 물어 보았습니다. "야! 너 산이나 바다 가서 수영하는 것보다 여기가 더 재미있니" 물었더니 그 아이들이 뭐라고 한 줄 아세요. "재미있어요. 전 도사님. 기도하면 재미있어요." 재미있다고 그러더라구요. 무슨 경험을 어떻 게 시켰느냐가 문제입니다. 20년이 지난 지금이지만 궁금한 것은 지금 그 아 이들이 무엇이 됐을까, 어떻게 자랐을까. 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무리 합니다. 성경적 자녀양육방법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먼저 영적 생명에 관심을 두고 길러야 합니다. 사람의 근본은 지혜에 있는 것도 아니고 육체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사람의 근본은 영에 있기 때문에 오늘도 영적 양식을 먼저 넣어 주는 것이 바른 양육방법이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그렇게 사랑하는 자녀를 올바르게 양육하기를 원 하면서도 순서를 뒤바꾸고 있습니다. 영적인 삶을 채워주기보다는 기능과 재 능과 지식을 키워주는데 앞장서고 있습니다. "영"은 어른이 되어서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세계 를 지배하는 유대인들의 자녀양육의 비결이 어디 있습니까 절대로 순서를 뒤바꾸지 않습니다. 아이의 생명을 잃어버리더라도 절대로 이 영적인 삶을 먼저 채워주는 순서를 뒤바꾸지 않습니다. 지금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오히 려 가장 좋은 때입니다. 지금부터 이 두 가지 원리를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가까이 하도록 양육하십시오. 그리고 늘 믿음의 훌륭한 선배, 내가 존경하는 믿음의 사람 앞에 같이 데리고 가서 기도도 하고 안수도 받도록 해주십시오. 그 분들에게 기도해 달라고 부탁하는 열정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거기에서 우리 아이들의 생명이 얼마나 강건해지고, 하나님께서 쓰실 만 한 아름다운 재목으로 다듬어져 갈지, 생각만 해도 기대가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여러분의 성경적 자녀양육을 통해서 이런 고귀한 아름다움이 늘 계속 될 수 있기를 기대하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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