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자가 되려는 자에게 (눅22:24-30)
본문
예수님의 제자들이 철딱서니 없게 행동한 것을 우리는 복음서에서 심심찮게 볼 수 있습니다. 그 중에서 대표적인 것이 본문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죽게 될 것을 벌써 누차 말씀하셨습니다. 제자 중 한 사람이 자신을 배반할 것이라고 말씀하신 지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같은 자리에서 “누가 크냐”는 논쟁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여기에 철부지 제자들이 있습니다. 철부지 그리스도인도 있습니다. 우리가 철부지처럼 행동하는 한 큰 자가 될 수는 없습니다.
첫째, 큰 자가 되려는 생각을 갖는 것은 잘못이 아닙니다. 성경에는 겸손을 가르치는 교훈들이 많이 있습니다.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눅14:11; 16:14)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이나 너희 마음을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시나니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16:15)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니라”(잠18:12)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복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벧전5:5) 겸손은 좋은 미덕임에 틀림없습니다. 우리는 당연히 성경의 가르침을 좇아 겸손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미덕을 강조하다보니까 큰 뜻을 품고 위대한 인물이 되겠다는 것이 죄악된 욕망인 양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제각기 그 중에서 큰 자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이것은 “누가 크냐”는 논쟁으로까지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이번 말고 전에도 이런 논쟁을 벌였던 적이 있었습니다(9:46). 이것은 시기 적절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책망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분께서는 큰 자가 되겠다는 그들의 야망을 꺽으시지 않았습니다. 큰 자가 되지 말라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단지 그들의 잘못된 생각을 바로잡아 진정 큰 자가 되도록 돕고자 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두목은 섬기는 자와 같을지니라” 이 말씀을 풀어 쓰면 다음과 같습니다. “너희 중에서 큰 자는 젊은 자와 같은 사람이니 큰 자가 되려면 젊은 자와 같이 행해야 할 것이며, 두목이 되려면 섬기는 사람과 같이 행해야 한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이 큰 자가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들이 장차 그분의 나라에서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많은 것을 성경에 약속해 놓으셨습니다. 우리가 그 약속하신 상급을 받겠다고 하는 것이 잘못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이 큰 상급을 받기 원하십니다. 그들에게 동기를 부여하려는 차원에서 그러한 약속을 하셨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성경은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고 가르칩니다(약3:1). 그러나 큰 자가 되지 말라고 하신 말씀은 없습니다. 선생도 되고 큰 자도 되기 위하여 힘쓰십시오. 그러나 그렇게 되고자 하는 자는 더욱 자신의 몸가짐을 바로 하고 더욱 본이 되고 더욱 시험에 들지 않게 자신을 살펴야 합니다. 당신은 큰 자가 되고자 하는 갈망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무엇을 위해서 큰 자가 되고자 합니까 나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가 아니고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큰 자가 되려는 열망을 가지십시오. 큰 자가 되겠다는 것은 결코 잘못이 아닙니다. 주의해야 할 것은 우리 능력밖에 있는 허황된 목표를 이루려 하는 유혹입니다. 사단은 높아지고자 하는 욕망을 부추겨서 하와를 유혹했습니다. 그 자신도 하나님처럼 높아지고자 하자 그 순간 타락했음을 기억하십시오. 애당초 피조물이 하나님처럼 높아지겠다는 것이 허황된 목표였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다음과 같이 충고합니다.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중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롬12:3) 우리는 주위에서 최고가 되라는 말을 많이 들으며 자라왔습니다. 훌륭한 사람이 되라는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1등만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 주위에는 2인자 역할을 떠맡고자 하는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사회에는 1인자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2인자, 3인자도 필요합니다. 영화 제작에 주연 한 사람이 확보되었다고 해서 좋은 영화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영화에는 조연도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능력 범위 안에서 우리가 최선을 다할 때 최고로 여기시는 분입니다. 이 사실을 믿으십시오.
둘째, 섬김 없이 큰 자가 될 수는 없습니다. 사람들은 지름길을 원합니다. 짧은 시간 안에 목적지에 도달하기를 원합니다. 노력을 하지 않고도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고통 없이 많은 경험을 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실패 없이 성공을 하기를 원합니다. 섬김 없이 큰 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이 모든 것이 당사자에게 반드시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설령 이런 것들이 이루어졌다 하더라도 그것이 오래 지속되지 않습니다. 이회창 신한국당 대표가 정치권에 뛰어든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당의 대통령 후보로 화려하게 추대되었고 각종 여론조사에서 한 동안 수위를 차지했습니다. 그러나 정치인으로서의 경험이 적기 때문에 경선 과정에서 불거진 당내 갈등을 추스르는 데 실패했습니다. 그것이 정치인에게 꼭 필요한 정치력입니다. 그것은 한두 해에 습득되어지는 것은 분명 아닙니다. 그분의 배경을 살펴보면 엘리트 코스를 밟아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특별한 어려움 없이 순탄한 과정을 밟아왔습니다. 부유한 집안, 경기고, 서울대 법대, 대법관, 감사원장, 총리, 당고문, 대통령후보. 그러다 아들 병역 문제라는 전혀 생각지 못했던 일로 어려움에 봉착하여 제대로 대처하지 못함으로 대통령 후보로서의 위상도 흔들리고 있습니다. 반면에 김대중 총재는 어떻습니까 정치인으로서 온갖 역경을 헤쳐나온 사람입니다. 정계 은퇴를 번복하는 과정에서 여론의 질타도 많이 받았습니다. 당내에서의 반발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 9단답게 자신의 정적을 끌어안으며 자신에 대한 대중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점차로 바꾸어 놓는데 성공하고 있지 않습니까 사다리는 아랫단부터 올라야 합니다. 오늘날 사회 각 분야에서 명성을 날리는 사람들은 산전수전 다 겪은 사람들입니다. 이미 실패를 거듭하고 고통을 많이 겪은 사람들입니다. 하루 아침에 그런 자리에 오른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큰 자가 되기 위해서는 젊은 자와 같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젊은 사람은 노인처럼 대접받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나이가 젊기 때문에 해야 할 일이 있다면 누구에게 시켜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고 자기가 직접 합니다. 이것이 섬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섬기는 자와 같을지니라”고 하신 말씀의 뜻입니다.
그분께서는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요한복음에 나오는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사건은 이 말씀을 전후로 하여 있었을 것입니다(요13:4-17). 그분께서는 제자들을 섬기셨고 세상 사람들을 섬기셨습니다. 낮은 자가 되고 섬기는 자가 되라는 교훈은 한 번 듣고 쉽게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제자들은 전에도 같은 논쟁을 했고(9:46-50) 그에 대해서 주님으로부터 책망을 받고 교훈도 받았지만 또 재연된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친히 제자들의 발을 씻기심으로 그들이 잊을 수 없는 섬김의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지위가 높아지면 태도나 마음가짐이 달라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큰 자가 되더라도 마음가짐은 그 전과 다를 바 없어야 합니다. 계속 섬기는 자세를 잃게 될 때 어느 사이에 오만함이 자리하게 될 것이고 진정 큰 자로 길이 기억될 수 없을 것입니다. 섬기는 사람의 자세가 가장 잘 표현된 말씀은 누가복음 17장 7-10절이라고 생각합니다. “너희 중에 뉘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저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할 자가 있느냐, 도리어 저더러 내 먹을 것을 예비하고 띠를 띠고 나의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사례하겠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빅토르 위고의 소설 레 미제라블은 너무나 잘 알려진 이야기입니다. 빵을 훔친 죄로 19년 동안 감옥살이를 하고 나와 사회의 냉대를 받으나 신부의 사랑을 받고 새로운 삶을 살게 됩니다. 그의 삶이 성경적 섬김의 삶이었습니다. 위험을 무릅쓰고 불길 속의 아이를 구해준 일, 공장을 차려서 번 돈을 자선사업에 쓴 일, 시장이 되어서도 고자세가 아니라 섬김의 자세를 취한 일, 무고한 사람을 구하기 위하여 불이익이 닥칠 것을 알면서도 법정에서 자기의 정체를 밝힌 일, 불쌍한 코제트를 키워준 일, 자신을 좇는 자베르 경감의 생명을 구해준 일 등등 이루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겸손함이 시종일관 돋보입니다. 그가 이와 같은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이 굶주림을 겪었고 고통을 겪어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의 처지를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부분에는 주인공 장발장이 임종시 양녀 코제트와 사위에게 유언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내가 죽거든 아무데나 묻고 그 위에다 돌을 새워다오. 돌에는 이름을 새겨서는 안된다. 뭐, 아주 멀리 떠나는 것도 아니야. 하늘에서 나는 너희들을 내려다보고 있을게다.” 그 유언을 따라 그의 시신은 공동묘지에 묻혔습니다. 그 묘사가 애절하며 감동적입니다. “페일 라세즈 공동묘지 한 구석에는 외로운 장 발장의 비석이 서 있었다. 그 비석은 크고, 높고 호화롭게 번쩍이며 늘어서 있는 다른 훌륭한 비석들과는 멀리 뚝 떨어져, 풀 숲 사이에 호젓하게 서 있었다. 아무 손질도 장식도 하지 않았고 이름조차 새겨져 있지 않았다. 기구한 운명과 싸우며 괴로움을 이겨 낸 위대한 사람이 이 곳에 고이 잠들다.“
첫째, 큰 자가 되려는 생각을 갖는 것은 잘못이 아닙니다. 성경에는 겸손을 가르치는 교훈들이 많이 있습니다.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눅14:11; 16:14)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이나 너희 마음을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시나니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16:15)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니라”(잠18:12)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복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벧전5:5) 겸손은 좋은 미덕임에 틀림없습니다. 우리는 당연히 성경의 가르침을 좇아 겸손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미덕을 강조하다보니까 큰 뜻을 품고 위대한 인물이 되겠다는 것이 죄악된 욕망인 양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제각기 그 중에서 큰 자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이것은 “누가 크냐”는 논쟁으로까지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이번 말고 전에도 이런 논쟁을 벌였던 적이 있었습니다(9:46). 이것은 시기 적절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책망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분께서는 큰 자가 되겠다는 그들의 야망을 꺽으시지 않았습니다. 큰 자가 되지 말라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단지 그들의 잘못된 생각을 바로잡아 진정 큰 자가 되도록 돕고자 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두목은 섬기는 자와 같을지니라” 이 말씀을 풀어 쓰면 다음과 같습니다. “너희 중에서 큰 자는 젊은 자와 같은 사람이니 큰 자가 되려면 젊은 자와 같이 행해야 할 것이며, 두목이 되려면 섬기는 사람과 같이 행해야 한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이 큰 자가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들이 장차 그분의 나라에서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많은 것을 성경에 약속해 놓으셨습니다. 우리가 그 약속하신 상급을 받겠다고 하는 것이 잘못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이 큰 상급을 받기 원하십니다. 그들에게 동기를 부여하려는 차원에서 그러한 약속을 하셨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성경은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고 가르칩니다(약3:1). 그러나 큰 자가 되지 말라고 하신 말씀은 없습니다. 선생도 되고 큰 자도 되기 위하여 힘쓰십시오. 그러나 그렇게 되고자 하는 자는 더욱 자신의 몸가짐을 바로 하고 더욱 본이 되고 더욱 시험에 들지 않게 자신을 살펴야 합니다. 당신은 큰 자가 되고자 하는 갈망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무엇을 위해서 큰 자가 되고자 합니까 나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가 아니고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큰 자가 되려는 열망을 가지십시오. 큰 자가 되겠다는 것은 결코 잘못이 아닙니다. 주의해야 할 것은 우리 능력밖에 있는 허황된 목표를 이루려 하는 유혹입니다. 사단은 높아지고자 하는 욕망을 부추겨서 하와를 유혹했습니다. 그 자신도 하나님처럼 높아지고자 하자 그 순간 타락했음을 기억하십시오. 애당초 피조물이 하나님처럼 높아지겠다는 것이 허황된 목표였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다음과 같이 충고합니다.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중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롬12:3) 우리는 주위에서 최고가 되라는 말을 많이 들으며 자라왔습니다. 훌륭한 사람이 되라는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1등만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 주위에는 2인자 역할을 떠맡고자 하는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사회에는 1인자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2인자, 3인자도 필요합니다. 영화 제작에 주연 한 사람이 확보되었다고 해서 좋은 영화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영화에는 조연도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능력 범위 안에서 우리가 최선을 다할 때 최고로 여기시는 분입니다. 이 사실을 믿으십시오.
둘째, 섬김 없이 큰 자가 될 수는 없습니다. 사람들은 지름길을 원합니다. 짧은 시간 안에 목적지에 도달하기를 원합니다. 노력을 하지 않고도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고통 없이 많은 경험을 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실패 없이 성공을 하기를 원합니다. 섬김 없이 큰 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이 모든 것이 당사자에게 반드시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설령 이런 것들이 이루어졌다 하더라도 그것이 오래 지속되지 않습니다. 이회창 신한국당 대표가 정치권에 뛰어든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당의 대통령 후보로 화려하게 추대되었고 각종 여론조사에서 한 동안 수위를 차지했습니다. 그러나 정치인으로서의 경험이 적기 때문에 경선 과정에서 불거진 당내 갈등을 추스르는 데 실패했습니다. 그것이 정치인에게 꼭 필요한 정치력입니다. 그것은 한두 해에 습득되어지는 것은 분명 아닙니다. 그분의 배경을 살펴보면 엘리트 코스를 밟아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특별한 어려움 없이 순탄한 과정을 밟아왔습니다. 부유한 집안, 경기고, 서울대 법대, 대법관, 감사원장, 총리, 당고문, 대통령후보. 그러다 아들 병역 문제라는 전혀 생각지 못했던 일로 어려움에 봉착하여 제대로 대처하지 못함으로 대통령 후보로서의 위상도 흔들리고 있습니다. 반면에 김대중 총재는 어떻습니까 정치인으로서 온갖 역경을 헤쳐나온 사람입니다. 정계 은퇴를 번복하는 과정에서 여론의 질타도 많이 받았습니다. 당내에서의 반발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 9단답게 자신의 정적을 끌어안으며 자신에 대한 대중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점차로 바꾸어 놓는데 성공하고 있지 않습니까 사다리는 아랫단부터 올라야 합니다. 오늘날 사회 각 분야에서 명성을 날리는 사람들은 산전수전 다 겪은 사람들입니다. 이미 실패를 거듭하고 고통을 많이 겪은 사람들입니다. 하루 아침에 그런 자리에 오른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큰 자가 되기 위해서는 젊은 자와 같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젊은 사람은 노인처럼 대접받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나이가 젊기 때문에 해야 할 일이 있다면 누구에게 시켜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고 자기가 직접 합니다. 이것이 섬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섬기는 자와 같을지니라”고 하신 말씀의 뜻입니다.
그분께서는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요한복음에 나오는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사건은 이 말씀을 전후로 하여 있었을 것입니다(요13:4-17). 그분께서는 제자들을 섬기셨고 세상 사람들을 섬기셨습니다. 낮은 자가 되고 섬기는 자가 되라는 교훈은 한 번 듣고 쉽게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제자들은 전에도 같은 논쟁을 했고(9:46-50) 그에 대해서 주님으로부터 책망을 받고 교훈도 받았지만 또 재연된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친히 제자들의 발을 씻기심으로 그들이 잊을 수 없는 섬김의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지위가 높아지면 태도나 마음가짐이 달라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큰 자가 되더라도 마음가짐은 그 전과 다를 바 없어야 합니다. 계속 섬기는 자세를 잃게 될 때 어느 사이에 오만함이 자리하게 될 것이고 진정 큰 자로 길이 기억될 수 없을 것입니다. 섬기는 사람의 자세가 가장 잘 표현된 말씀은 누가복음 17장 7-10절이라고 생각합니다. “너희 중에 뉘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저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할 자가 있느냐, 도리어 저더러 내 먹을 것을 예비하고 띠를 띠고 나의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사례하겠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빅토르 위고의 소설 레 미제라블은 너무나 잘 알려진 이야기입니다. 빵을 훔친 죄로 19년 동안 감옥살이를 하고 나와 사회의 냉대를 받으나 신부의 사랑을 받고 새로운 삶을 살게 됩니다. 그의 삶이 성경적 섬김의 삶이었습니다. 위험을 무릅쓰고 불길 속의 아이를 구해준 일, 공장을 차려서 번 돈을 자선사업에 쓴 일, 시장이 되어서도 고자세가 아니라 섬김의 자세를 취한 일, 무고한 사람을 구하기 위하여 불이익이 닥칠 것을 알면서도 법정에서 자기의 정체를 밝힌 일, 불쌍한 코제트를 키워준 일, 자신을 좇는 자베르 경감의 생명을 구해준 일 등등 이루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겸손함이 시종일관 돋보입니다. 그가 이와 같은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이 굶주림을 겪었고 고통을 겪어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의 처지를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부분에는 주인공 장발장이 임종시 양녀 코제트와 사위에게 유언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내가 죽거든 아무데나 묻고 그 위에다 돌을 새워다오. 돌에는 이름을 새겨서는 안된다. 뭐, 아주 멀리 떠나는 것도 아니야. 하늘에서 나는 너희들을 내려다보고 있을게다.” 그 유언을 따라 그의 시신은 공동묘지에 묻혔습니다. 그 묘사가 애절하며 감동적입니다. “페일 라세즈 공동묘지 한 구석에는 외로운 장 발장의 비석이 서 있었다. 그 비석은 크고, 높고 호화롭게 번쩍이며 늘어서 있는 다른 훌륭한 비석들과는 멀리 뚝 떨어져, 풀 숲 사이에 호젓하게 서 있었다. 아무 손질도 장식도 하지 않았고 이름조차 새겨져 있지 않았다. 기구한 운명과 싸우며 괴로움을 이겨 낸 위대한 사람이 이 곳에 고이 잠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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