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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상고하자 (눅20:27-40)

본문

성경을 공부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범죄하지 않고 깨끗한 생활을 하기 위해서(시119:9,11) 하기도 있고, 하나님의 뜻을 살피기 위해서 하기도 하고, 영적 성숙을 이루기 위해서 하기도 합니다. 오늘은 본문을 통해서 성경을 공부하지 않아서 그 내용을 모른다면 어떤 결과가 나타나게 될 것인지 살펴보려고 합니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성경공부의 또 다른 이유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첫째, 성경을 모르면 잘못된 교리를 믿게 됩니다. 본문에 나오는 사두개인들은 바리새인과는 다른 부류의 유대교인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주로 제사장 가문과 귀족 출신들이었으며 성경전서의 처음 5권만이 성경이라고 믿었습니다. 이 책들은 모세가 기록한 것으로 성막과 제사제도와 제사장 직분과 관련된 것이므로 그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이들은 수적으로 얼마 되지 않았고 과거와 달리 많은 영향력을 가지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일반 대중이 로마의 지배에 강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어 세속권력과 결탁 내지 분점하고 있는 그들보다 민족주의자인 바리새인에게 더 공감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부활이 없다고 주장했습니다(27절). 또한 천사들과 영적 존재들도 믿지 않았습니다. “이는 사두개인은 부활도 없고 천사도 없고 영도 없다 하고 바리새인은 다 있다 함이라”(행23:8) 이들은 모세가 이런 것에 관해서 전혀 기록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들은 예수님께서 부활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을 알고 있던 터라 부활이 터무니 없다는 것을 밝히고 그분을 조롱하기 위해서 가상질문을 하나 가지고 찾아왔습니다.
그 질문은 신명기 25장 5,6절의 수혼(嫂婚:형수와의 결혼) 계명에 근거한 것으로 한 여인이 칠 형제의 맏이와 결혼했으나 자식이 없이 사별하고 그후 시동생들과 차례로 결혼할 수밖에 없게 되었으나 결과는 마찬가지인 상황에 처하게 된 경우 부활 때에 누구의 아내가 되는 것인가 입니다. 이들은 부활교리가 성경에 나타나지 않는다는 이유 말고도 이런 난처한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는 생각에 그것이 허황된 것이라고 주장한 것입니다. 본문에는 언급되어 있지 않지만 같은 사건을 다루고 있는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는 예수님께서 이들의 근본적인 문제가 성경을 알지 못함에 있다고 하신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고로 오해하였도다”(마22:29)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므로 오해함이 아니냐”(막12:24)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그들의 생각과 달리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굳게 믿고 있는 모세의 글에도 부활 교리가 있음을 지적하셨습니다. “죽은 자의 살아난다는 것은 모세도 가시나무 떨기에 관한 글에 보였”다고 말씀하셨습니다(37절). “죽은 자의 부활을 의논할진대 하나님이 너희에게 말씀하신바,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마22:31,32) 이 말씀은 출애굽기 3장 15절에 기록된 것을 인용하신 것으로 예수님께서는 여기서 현재형을 쓰셨다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분께서는 그 구절을 이렇게 해석하신 것입니다.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었고 이삭의 하나님이었고 야곱의 하나님이었다”가 아니라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고 이삭의 하나님이고 야곱의 하나님이다. 과거에 그들이 지상에 있을 때에도 그랬고 지금 그들이 지상에 없을 때에도 그렇다. 나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인데 내가 이런 표현을 쓴 것은 수 세기가 지난 지금도 그들이 살아 있다는 뜻이다.” (마태복음에서만 현재형 eimi 동사를 사용했고 마가, 누가복음에서는 동사 없이 사용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이는 너희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표호니라” 모세의 첫 번째 책인 창세기에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이삭을 번제로 바치려 한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때 자기가 이삭을 번제로 드리면 하나님께서 그를 부활시켜 주실 것이라고 믿었다고 보아야 한다고 히브리서 기자는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삭을 통해서 많은 자손을 주시겠다고 했는데 아직 이삭은 장가도 들지 않았고 자식을 두지도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가 다시 살아나야 한다는 논리에서였습니다.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데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히11:19) 사두개인들은 하나님을 믿었지만 하나님을 믿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성경에 무지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부인하며 죽이는 데 앞장섰습니다. 성경을 제대로 아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어설프게 알다가는 이 사두개인 같이 되기 쉽습니다. 각종 이단들은 성경을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위험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데살로니가 사람들처럼 힘써 성경을 상고해야 합니다. 살전17:11에서 “상고한다”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 anakrino는 재판관이 신중하게 조사하며 판단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둘째로, 성경을 모르면 하나님의 능력을 알 수 없습니다. 앞에서 살펴본 마태복음 22장 29절에 의하면 사두개인들이 하나님의 말씀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므로 오해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아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성경입니다. 따라서 성경을 모르면 하나님의 능력도 모르게 됩니다. 솔로몬 왕은 한 아기를 두고 두 여인이 서로 자기 아이라고 다투는 난감한 문제를 지혜로 공평하게 해결했습니다. 우리가 이미 들어서 답을 알고 있다고 하여 그것이 무엇이 그렇게 대단한 것이냐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 당시 어느 누구도 두 여인의 갈등을 해결해 주지 못했습니다. 이웃들이 도와주지 못했습니다. 지방관리들이 도와주지 못했습니다. 솔로몬 왕이 지혜로우니까 주위에서 왕을 찾아가라고 했을 것이고 최종적으로 그의 재판을 받게 된 것입니다. 솔로몬 왕에게 지혜를 주신 분이 하나님이시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보다 훨씬 지혜로우십니다. 그 하나님께서 사두개인들이 제기한 것과 같은 상황에서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정도로 공평하게 해결하실 것이라고 믿기가 그렇게 어렵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분께는 능치 못함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죽음 가운데서 부활하셨습니다. 그분을 부활하게 하신 하나님께서 죽은 자를 부활시키지 못하겠습니까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롬8:11)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니”(고후4:14) 성경을 모르면 하나님의 능력을 모르게 될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위로를 받지도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달려 돌아가시고 나서 그분을 좇는 제자들이 왜 그렇게 무기력했습니까 그들은 예수님께서 메시야임을 분명히 믿었으나 그 메시야가 고난당한 후 부활할 것을 몰랐습니다. 그래서 당국자들이 예수님을 죽였으니다음은 자기들도 죽일 것이라는 생각에 두려움에 사로잡혀 집문을 굳게 닫아 걸고 마음 조아려야 했습니다. 적어도 부활의 주님을 만나기까지는 그랬습니다.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요20:19) 그분을 좇았던 여인들은 눈물로 그 기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도 슬픈 기색을 보이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여러 가지 어려운 환경에 처하게 될 때 근심하고 걱정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 모든 환경을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계시다는 성경의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문제는 크게 보이나 하나님은 왜소하게 보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모르면 쓸데 없는 불안이나 공상에 빠지게 되고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을 누리지 못합니다. 구원의 확신을 가지지 못하고 언제 다시 잃게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갖는 것도 하나님 말씀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요10:28,29) 생활의 어려움을 겪을 때 로마서 8장 32절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얼마나 위로가 되겠습니까!,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않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마르다와 마리아는 오라버니가 죽음으로 큰 슬픔에 젖었습니다. 마르다는 마지막 날 부활에 오라버니가 살 줄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원하신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이 세상에서 만날 수 있게 하시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습니다(요11:17). 그녀는 지금이라도 예수님께서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께서 주실 것이라고 고백했으나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다시 살리려 구하시리라는 것을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안위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롬15:4)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저에게 있을지어다”(벧후3:18)
셋째, 성경을 모르면 불신앙에 빠지게 됩니다. 성경을 떠나서는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완전하게 알 수 없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특별 계시입니다. 성경에 대해서 사람들이 가장 기본적으로 알아야 할 것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입니다. 예화 “시력만은 끝내줍니다. 내 눈은 결코 나를 속이는 일이 없습니다.” “그럴까요 제 눈은 가끔 저를 속이는데요. 저 앞을 보십시오. 이 철길이 저 앞에서는 레일이 서로 닿는 듯 보이는데 당신은 그렇게 안 보입니까” “그야 저도 그렇게 보입니다만.” “아무리 좋은 시력이라도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 기만에 속아서 기차를 멈추는 기관사는 없지요. 많은 사람들이 불완전한 시각, 청각에 속아서 불신앙의 늪에 빠져들지요. 안 보이는 것을 보며 보이는 대로만 보지 않는 것이 신앙의 시력입니다. 달이 가는 것을 보고 구름이 가는 줄 알아야 하고, 산천이 달리는 것을 보고 기차가 달리는 줄 알아야 합니다.” 미물도 다른 생이 있다. “예수를 믿으십시오. 그래야 행복한 내세를 사실 수 있습니다.” 전도자는 정자 아래서 한담을 하고 있는 노인들에게 전도의 포문을 열었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흙이 되는데 내세가 어디 있냐고 반박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제 조금 있으면 나무 위에서 매미가 우는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매미가 그렇게 아름다운 소리로 노래하기까지 7년간을 땅 속에서 애벌레로 산다고 합니다.
북아메리카에 사는 어떤 매미는 애벌레 기간이 무려 17년간이나 된다고도 합니다. 징그러운 굼벵이가 날개를 달고 푸른 하늘을 자유롭게 날며, 아름다운 소리로 노래하는 전혀 새로운 삶이 있으리라고 꿈엔들 생각했겠습니까 한낱 미물인 굼벵이에게도 이렇게 놀라운 변신이 가능하다면 만물의 영장인 사람에게 내세가 있다는 것이 무엇이 이상합니까 주님께서는 부활과 불멸을 믿으셨다(35,36) 불멸-다시 죽을 수도 없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38절).-모든 사람이 산 자로 보인다 사후에서 인식할 수 있으며 상대에 대한 사랑과 관심을 가진다. 음부의 부자는 세상의 형제들을 인식하며 기억했다. 그리고 성경은 결혼 관계가 죽음으로 끝난다고 밝혀주고 있습니다. 천국에서는 더 이상 결혼관계에 얽매이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서로를 알아보지 못하리라는 것은 아닙니다. 현재의 남편, 현재의 아내와 함께 부부관계에 놓이지 않게 되는 것을 복음으로 생각하는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지긋지긋한데 그 천국이란 얼마나 좋은 곳인가! 그러나 그것이 복음이 아닙니다. 복음이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죄을 담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려돌아가셨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은 피조물의 탄식을 언급하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부활을 통해서 몸의 구속이 이루어질 것을 증거합니다. 그것은 정말 복스러운 소망이 아닐 수 없습니다.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딛2:13) 그러나 사두개인들은 성경에 무지했기 때문에 부활의 소망을 가지기는커녕 그것을 부정했습니다. 에녹은 들림받아 죽음을 보지 않고 천국에서 하나님과 함께 지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성경에 무지하기 때문에 천국이 아니라 지상의 나라를 바라보는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함(anastasis ex nekron)은 구원받지 못한 자들의 부활과 대조되는 구속받은 자들의 부활을 가리친다. 후자는 사실상 전혀 부활이라 할 수 없는 것이다. 영원한 멸망으로 이르는 길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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