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징조를 읽는 종교개혁의 정신 (눅21:10-13)
본문
예수께서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한 민족이 일어나 딴 민족을 치고 한 나라가 일어나 딴 아라를 칠 것이며 곳곳에 무서운 지진이 일어나고 또 기근과 전염병도 휩쓸 것이며 하늘에서는 무서운 일들과 굉장한 징조들이 나타날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이 일어나기 전에 너희는 잡혀서 박해를 당하고 회당에 끌려 가 마침내 감옥에 갇히게 될 것이며 나 때문에 임금들과 총독들 앞에 서게 될 것이다. 그 때야말로 너희가 나의 복음을 증언할 때이다. 그 때 어떻게 항변할까 하고 미리 적정하지 말라. 너희의 적수들이 아무도 맞서거나 반박할 수 없는 언변과 지혜를 내가 주겠다. 너희의 부모와 형제와 친청과 친구들가지도 너희를 잡아 넘겨서 더러는 죽이기까지 할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나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겠지만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참고 견디면 생명을 얻을 것이다. 오늘 우리가 사는 세계는 심한 혼돈속에 있습니다. 소련과 동구권의 변화로 그동안 세계를 양분화해왔던 정치이데올로기의 대립구조가 무너지고 이에 따라 동구를 포함한 세계 모든 민족들과 나라들은 자유와 평등과 평화와 인류의 생존을 보장하는 길이 과연 무엇인가 골몰하며 찾고 있습니다. 또 그동안 민족들과 나라들의 긴장관계를 유지해왔던 정치이데올로기 대결구조는 그 파라다임을 경제적 대결로 바꾸었습니다. 이의 현상이 유럽에서는 강력한 유럽공동체 형성의 시도로 나타나고 이에 미국과 일본이 세계경제의 패권을 장악하기 위한 싸움에 뛰어들었는데 걸프전은 바로 이런 배경에서 출발한 전쟁이었습니다. 걸프전은 미국경제의 부활을 위하고 여기에 유럽의 나라들과 일본까지 군대파병을 통한 직접참여나 전쟁비용 부담을 통한 간접참여로 전쟁에 가담하고 이를 통한 세계의 경제적 패권을 장악하게 되었으나 그 속에서 개발도상국이나 제3세계의 경제는 심한 위협을 받게 되고 또 경제대국끼리도 일단 자기들의 유리한 입지를 확보하고난 다음에는 당장 자기들끼리 경쟁체제로 돌입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나라같은 개발국에 많은 생존의 위협을 줍니다.그 위협을 피부로 경험하고 있는 것의 한 실례가 바로 Uruguay Round 협상입니다. 이러한 위협은 우리 보다 경제적으로 취약한 제3세계에 가면 그 위협도가 훨씬 심각합니다. 이런 현상들은 우리에게 앞으로 우리의 생계를 보장하는 산업과 문명적 기반이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한 불안을 안겨주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우루과이라운드협상으로 결국 우리 농촌이 피폐되고 농민들이 삶의 터전을 잃는 것은 물론 농업도 대기업 내지 다국적 기업의 밥이 되어버리고 우리 사회의 빈부의 격차는 심해질 것이고 열심히 일하는 삶의 태도는 사라지고 삶의 스타일은 불로소득같은 더 타락되는 쪽으로 바뀌어 져 갈 것입니다. 1990년대 들어오면서 가장 자주 입에 오르내리는 말이 "지구의 생존, 인류의 생존" 이란 말입니다. 이 생존이란 말은 이미 교회에서도 자주 쓰는 개념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인류가 발전하고 번영할 것인가 하는 말은 사라진지 오래이고 과연 생존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게 되는 배경에는 그동안 무절제하게 산업화된 문명의 결과로 지구의 환경이 심하게 위협받고 있고 공해문제, 생태계의 위기의 문제가 바로 우리앞에 생존의 위협으로 닥아와 있다는 현실에 대한 불안의 표현입니다. 이 생존의 위협이 얼마나 큰 것이냐에 대해 지난 89년 서울에서 개최되었던 WARC 제22차 총회의 문서에 나와있는 데이타를 인용하면,-세계각국이 1분에 군사무기를 위해 쓰는 비용이 180만 불에 달하고-1 시간에 1500명의 어린이가 기아와 관련하여 죽어가고-하루에 한 종류의 생물이 멸종해가고-1980년대에는 1주일에 과거 어느시대보다도 더 많은 사람들이 독제권력에 의해 구속되고 고문받고 암살되고 자기의 고국을 떠나는 망명을 해야했고-현 세계경제구조는 이미 제3세계가 지기 힘겨운 150억불의 외채에다 매달 7500만불을 더하고 있고-매년 한반도 4분의3 크기의 숲이 사라지고 있고-매10년 온도가 썹씨1.5도 내지4.5도 높아지는 온실효과로 지구는 재해를 가져오고 그 결과로 미래에는 백사장이 사라져 버리는 위협을 우리가 맞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비공식 통계이긴 하지만 우리나라의 신생아 출산의 3분의 1이 기형아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여기에는 비록 테어나지 못하는 인공유산이 아닌 자연유산 및 사산까지를 포함하지만 아기를 가지면 3명 중에 한 명은 어쨋든 생명으로 테어나지 못한다는 이 사실이 생존위협의 한 단면입니다. 오늘 우리 한국사회를 보면 물가는 치솟고, 집값이 폭등하고, 환락의 문화는 소돔과 고모라를 무색하게 하고, 불신의 정치, 과외로 시달리는 아이와 부모, 부동산투기로만 살려고 하는 삶의 자세, 온통 우리의 미래에 대해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이 상황을 우리는 부인하지 못합니다. 자! 이러한 상황속에서 우리 크리스챤과 교회는 무엇을 해야하고 무엇을 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 오늘 복음을 세상에 선포해야 하는 우리에게 심각한 도전이 되고 있습니다. 이런 세계의 위기를 앞에 놓고 걱정하는 사람들은 2000년 인류역사를 주도해 온 기독교가 오늘도 이 위기를 구원할 능력이 있는가, 과연 교회에 희망을 두고 의지할 수 있겠는가 하는데 대해 상당히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 같습니다. 지난 89년 말부터 전개되는 동구의 변화속에 비록 교회가 그 변화를 주도하지는 않았지만 수많은 자유를 갈망하던 사람들이 밀물처럼 교회에 몰려와서 그 갈망을 표현했고 교회주위에 촛불을 켜 그들의 처절한 기도를 표현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동구의 교회는 변화직후에 불어났던 교회교인들이 벌써 줄어들기 시작하는데 이 현상을 우리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지금 쏘련과 중국에는 교회가 왕성합니다.
쏘련 같은 경우에 어떤 지역의 러시아정교회에는 하루 주일에 2000명이 세례를 받고자 합니다. 이러한 현상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를 분석하는 것이 중요한데 이들이 이제 신앙의 자유를 얻었다고 감격하고 오는 것만이 아니라 지난 40년동안의 스탈린주의 독제체제에 시달리던 사람들이 거기에서 실망하고 그 희망을 둘 때가 아무데도 없기 때문에 교회로 오는 것이고 이것은 교회에 대해 강력한 기대를 하고 있다는 생각을 우리가 해야 하는 대목입니다. 오늘 우리 한국교회에도 교세성장이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한다고 하는데 여기에는 여러가지 원인이 있으나 그 중 하나가 젊은이들이 교회에 희망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떠나는 사실을 볼 때 이를 깊히 생각해야 할 대목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의 교회에 대한 실망은 시대의 고민을 안고 있는 세계가 교회에 의탁해서 그 문제들을 풀어갈 만한 신뢰도 갖지 못하고 있고 그런 능력도 교회가 갖고 있지 못하며 심지어 그런 안목도 없으며 그런 책임감도 느끼고 있는 것 같지 않는 것 같고 교회가 그런 관심도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 교회는 개교회주의에 빠져 있고 자기 교리의 수호에 급급해 있고 자기 교단의 좁은 선교안목에 잡혀 있고 자기 교회의 테두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인접해 있는 지역사회나 교회를 향해 수많은 신음소리를 발하는 이웃과 지역사회와 민족과 역사와 사회와 세계에 대한 열린 자세가 전혀 없고 시간적으로 말할 때 과거의 영광에 안주하고 현재조차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으며 더더욱 미래에 대해선 두 말할 것도 없이 세계가 나아가야 할 아무런 구체적인 비젼도 제시하지 못하고 기껏 하는 말이라는 것이 세계의 종말이 온다는 정도의 희망없는 이야기들만 하고 있는 셈입니다. 자 이런 상황은 우리로 하여금 복음의 선포가 무엇이어야 하느냐 하는 도전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크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교회를 세상에 보내시고 기름부으시고 존재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뜻과 그 명령이 거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 명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세상에 오심에 근거하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세상에 오심은 바로 하나님이 이 세상을 멸망치 않고 구원하게 하시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멸망의 위협속에 있을 때 이 세상을 구원할 그 과제는 무엇인가 하는 생각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오늘의 세계의 희망적인 모습을 낳게 했던 개혁신앙을 유산으로 받은 교회로써 오늘 그 개혁전통을 다시 한번 음미하고 세상에 대해 희망을 선포할 수 있는 우리의 선교과제를 찾고 그로써 하나님의 구원이 세상에 의해 찬양되는 영광을 돌릴 수 있도록 묵상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이것은 16세기 종교개혁에서 그 개혁운동이 낳은 역사발전에서 그 원리를 우리가 이미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더 원초적인 근거는 종교개혁의 정신이 초대교회공동체의 증언을 원형으로 잡고 복음의 의미를 가장 순수하게 제시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종교개혁의 정신을 제대로 파악하고 거기에서 이 갈망하는 세계속에 하나님의 구원의 희망을 선포하는 바른 길을 우리가 진지하게 숙고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1) 어두움이 가고 빛이 온다. 우리가 구체적인 논의를 하기 전에 먼저 종교개혁을 이해하는 각도의 시정이 필요합니다. 먼저 우리는 그동안 종교개혁을 예정론, 성서의 권위, 믿음에 의한 구원 등의 너무 교리적 차원에서 해석해 왔는데 이는 종교개혁을 대단히 편협하게 이해하는 방법입니다. 이런 교리적인 개혁은 바로 시대의 암울한 징조를 읽고 그 암울한 상황속에서 빛을 가져오려는 종교개혁운동이 복음에서 발견한 개혁의 원칙이며 이 원칙은 시대의 징조를 읽고 분석하고 그 암울한 상황이 오로지 복음의 참다운 이해에서만 극복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고백한 신앙의 요지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제네바에 가면 제네바대학과 연결되어 있는 국제종교개혁자기념공원 (International Reformers' Monument ) 이 있습니다. 그 공원 한 쪽 벽에는 제네바에서 종교개혁을 주도했던 네 사람, 즉 기용 파렐 (Guillaume Farel), 죤 칼빈 (Jean Calvin ), 데오도르 베자 (Theodore Beza ), 죤 녹스 (John Knox ) 이렇게 네 사람의 입상이 벽에 세워져 있습니다. 그리고 총 길이 약 90여 m 에 달하는 벽 위에는 라틴어로 이런 글씨가 새겨져 있습니다. Post Tene, Bras Lux (즉, 어두움이 가고 빛이 온다.) 이것은 제네바의 종교개혁 기념지 어디를 가든지 발견할 수 있는 구호입니다. 종교개혁의 구호는 바로 어두움을 몰아내고 빛을 가져온다는 혁명적 구호였습니다. 오직 믿음, 오직 성서, 오직 그리스도, 오직 하나님의 영광 이렇한 종교개혁의 교리들은 바로 이 중세 시대의 어두움을 몰아내고 빛을 가져오는 거대한 변혁의 작업속에서 개혁자들이 성서로부터 발견해낸 시대의 위기를 읽고 치유하는 복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종교개혁의 이해는 이 교리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시대의 어둠을 몰아내고 빛을 가져오려는 그 복음에 의한 변혁의 몸부림에서 이해해야 그 역동적인 모습을 잡아낼 수 있습니다. 제네바에서는 요즘도 칼빈을 추종하는 사람들을 두 종류로 나누는데 첫번째는 Calvinist 라고 하여 칼빈이 그때 말한 교리를 그대로 문자적으로 따르는 사람들은 가리킵니다. 이들은 교리적으로 종교개혁을 이해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한편 칼빈의 정신을 따르는 사람들을 Calvinian 이라고 부르는데 이들은 칼빈이 그 시대의 사회와 교회를 개혁한 정신을 이어받는 사람들을 말하며 이것은 곧 칼빈을 교리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시대의 징조를 읽고 복음의 빛아래서 그 시대의 구원을 위해 일하는 그런 역동적인 시각을 가리킵니다. 저는 이 후자의 입장에 서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2) 시대의 징조를 읽은 종교개혁 종교개혁의 문명사적 배경은 바로 인문주의입니다. 스위스의 개혁을 주도했던 칼빈의 개혁사상의 배경도 이 인문주의이며 쯔빙글리는 바젤에서 인문주의 운동을 펼치던 에라스무스의 절대영향을 받았습니다. 인문주의는 희랍고전에 대한 재 발견과 거기에 입각한 인간의 재발견으로 요약이 될 수 있습니다. 인문주의 태동은 세속적인 차원에서 말씀드리면 다소 불경스러운 말이지만 인간을 신에게서 해방시키는 운동이었습니다. 중세에는 신만 존재했지 인간은 완전히 부속물로서 존재했습니다. 르네쌍스는 이렇게 매몰되어 있는 인간의 존엄성과 탁월성을 찾는 운동이었고 그 존엄성과 탁월성을 교회와 신학은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희랍과 로마고전을 근거로 찾기 시작했습니다. 르네쌍스는 교회와 신학의 지배로 부터 역사의식이나 시나 문학, 자연의 법칙 등을 해방시키는 작업을 했습니다. 이것은 사실 인간이 하나님의 지배에서 떠나려는 몸짓이었고 인간을 종교로부터 자유하게 하는 일이었고 오늘의 말로 바꾸면 세속화를 감행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많은 사람들은 이 인문주의의 발흥은 인간이 하나님의 품을 떠난 것으로 생각을 하여 이것을 인본주의라 부르고 신본주의와 배치되는 개념으로 생각하는데 이는 이 거대한 현상에 대한 소극적인 해석이며 수세적인 해석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잘못하여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떠나려했던 것이 아니고 중세 교회와 신학이 인간을 억압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억압적 교회와 신학에서 인간을 해방시키려는 운동이었습니다. 이것은 시대의 징조였고 이것을 부정하는 태도보다는 오히려 적극적으로 시대의 징조를 읽는 일이 훨씬더 중요한데 종교개혁자들은 바로 이 시대의 징조를 읽은 사람들입니다. 종교개혁자들의 기여는 이 시대의 징조를 읽고 적절하게 대응함으로 말미암아 세계역사와 기독교 역사를 바꾸는 일입니다. 종교개혁자들이 한 일은 바로 이 하나님으로 부터 해방되려는 정확히 말하면 교회의 억압적 지배에서 해방되려고 하는 혹은 종교의 무책임한 포수의 생활에서 해방되려고 하는 인간의 이 열망을 복음으로 끌어안고서 그들을 해방시키며 동시에 다시 하나님에게 돌아가게 하는 일을 한 것입니다. 제네바 대학에서 1950년대에 "칼빈의 사회경제적 사고" (La penc e conomique et sociale de Calvin ) 라는 박사논문을 씀으로서 칼빈의 종교개혁의 사회경제적 의미의 연구에 결정적 공헌을 한 Andr Bi ler 라는 학자가 있습니다. 그는 당시 교회가 인간을 종교로부터 자유하게 하여 그리스도에게로 개방시키는 일을 하는 대신에 인간을 종교속에 가두어두었다고 하고 종교개혁은 바로 인간을 종교로부터 자유하게 하여 그리스도에게로 열려지도록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Andre Bieler, The Social Humanism of Calvin, (Richmond:John Knox Press, 1964), p.11.) 제네바 시의 깃발이 이것을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제네바 시의 깃발은 왼쪽에는 독수리 반쪽과 오른쪽에는 열쇠한개가 그려져 있는 도안으로 되어 있는데 독수리는 국권(State Power)을 상징하고 열쇠는 교권(Church Power)를 상징합니다.
그런데 독수리날개가 두개가 있어야 완전한 것이고 열쇠는 두 개가 각개로 있어냐 완전한 것인데 그 중에서 날개 한 쪽만 취하고 두개가 있어야 완전한 교권의 상징이 되는 열쇠를 한 개만 취함으로써 한 개인을 억압적 국권으로부터도 자유하게 하고 억압적 교권으로 부터도 자유하게 하는 의미를 얼마나 강하게 부각시키고 있는지를 우리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사실 당시의 인간은 복음안에서 자유한 것이 아니라 종교의 노예가 되어 있었습니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교회를 거치지 않고는 그 존재가 인정되지 않는 채로 예속이 되어 있었고 또 인간은 비인간화하는 사회적 노예상태에 처해 있었고 영적인 갈망까지도 잘못된 신비주의에 빠져 있었습니다. 쯔빙글리가 종교개혁을 했던 일에서 우리는 당시 인간의 노예상태에서 종교개혁이 이룩한 인간의 종교의 노예상태, 사회적 노예상태, 영적 노예상태에서 해방시킨 일을 명확히 한 예로 볼 수 있습니다. 쯔빙글리는 어느날 종교개혁동지들과 함께 친구의 집에서 고기를 먹는 것을 금지한 사순절에 의도적으로 쏘쎄지를 썰어놓고 먹었습니다. 이것은 의도적으로 행한 일인데 바로 율법적 신앙을 넘어서기 위한 일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바로 이런 율법에 메여있는 인간을 자유하게 하여 하나님에게 자유하게 열리도록 하는 해방작업이었습니다. 이것은 마치 유대인의 율법에 의해 하나님의 은총으로부터 차단당하고 있던 이방인들을 그리스도께서 그 몸으로 벽을 허무심으로써 이방인들을 하나님의 은총앞에 열려 있도록 만드신 일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해방작업과 일치하는 것입니다. 또 당시 스위스사람들은 돈을 받고 전쟁에서 대신 싸워주는 용병제도를 통해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다 용병으로 국내에서 돈을 버는 영주들에게 노예가 되어있는 상태였습니다. 쯔빙글리는 바로 이 용병제도를 반대하고 그들로 하여금 낙농과 노동으로 삶을 스스로 이루어 가도록 인도하였습니다. 쯔빙글리의 개혁에 최고 제동을 걸던 사람들은 교권의 억압적 행사를 유지해 보려는 로마 교회 교권자들과 바로 이 용병으로 도는 버는 자본가들이었으나 쯔빙글리의 개혁으로 이 용병들이 사회적 노예상태에서 해방이 되었습니다. 개혁자들의 복음해석은 바로 이 인간을 자유하게 하여 다시 하나님앞에 자유하게 열리도록 하는 그 일을 위한 노력이었습니다. 자 여기에서 우리가 주의해서 보아야 할 점은 종교개혁자들이 인간을 해방시키는 일을 아무 생각없이 무조건 한 것이 아닙니다. 나중에 종교개혁자들은 인문주의자들과 결별을 하게 되는데 그것은 인문주의 운동이 아무런 대안없이 무조건 인간을 해방시킨 일을 했다면 개혁자들은 인간을 해방시키되 하나님앞에 자유하게 돌아가도록 하는 해방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종교개혁자들은 이처럼 인간을 해방시키는 일을 하였는데 무조건 인간을 해방시키는 일, 거기에서 그친 것이 아니라 그 보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하나님앞에 은총을 받아 자유하게 되는 인문주의라는 새로운 인문주의까지로 나아가게 된 것입니다. 종교개혁자들은 진정한 인간의 자유는 그리스도안에서의 인간성이 회복되는 것이라고 보고 그리스도안에서 자유하게 하는 차원에서 인간을 해방시킨 것입니다. 루터가 1520년에 발표한
셋째 논문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하여" (On Christian Liberty)는 바로 이 점을 밝힌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사실 한 가지는 종교개혁자들이 인간이 교회로부터 벗어날려고 하는 그 시대의 징조를 정확히 읽고 인간을 잘못된 신학과 신앙과 종교구조에서 해방시켜 그리스도앞에 다시 자유하게 열린 모습으로 서게 했다는 이 시대의 징조를 읽고 거기에 대응하는 지혜입니다. 다시 말하면 종교개혁자들은 종교로부터 해방시킨 인간을 다시 전적 타락한 죄인으로 정의하게 되는데 이는 인간에 대한 무조건적인 해방이 아니라 인간이 스스로를 철저하게 이해하는 인간에 대한 진실한 고찰이며 강요된 죄인이 아니라 스스로 참회하는 죄인이란 측면에서 개혁이전의 인간에 대한 부정적 견해와는 판이하게 차이가 있은 것입니다. 강요되는 죄인이 아닌 스스로 고백하는 죄인이 되는 것입니다. 주의해야 할 점은 오늘 교회가 이를 교리적으로 이해해서 인간을 죄인으로 강요하는 일은 반종교개혁 정신임을 감안해야 하는 것입니다.
3) 시대의 변혁을 주도하는 종교개혁의 정신 이 시대의 징조를 읽고 대응하는 종교개혁의 정신은 개혁자들마다 각기 다른 강조점을 낳게 했습니다. 이를테면 영국에서 이미 14세기에 개혁을 주창했던 위클리프 (John Wyclif ) 에게서는 지배권은 유일하게 하나님에게만 있고 성서가 유일한 법칙이라는 종교개혁사상의 씨앗을 탄생시켰고, 그의 영향을 받은 현 체코인 보헤미아의 개혁자 후쓰(Jhon Huss)에게서는 인간은 진리에 따라 살아야 한다라는 진리중심의 삶으로 승화되었고 그의 정신을 이은 루터(Martin Luther)에게서는 인간은 하나님의 은총으로 산다는 영적 겸손의 정신으로 이어졌고 쯔빙글리 (Huldreich Zwingli)에게서는 성서에 입각한 기독교공동체의 민주적 권위의 정신으로 이어졌고, 토마스 뮌쪄(Thomas Munzer)에게는 인간의 내면적 변화에 의한 혁명과 억압적 상황에 대한 정당한 저항정신으로 이어졌고, 칼빈(Joh Calvin)에게서는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신정정치의 정신으로 이어졌습니다. 이는 종교개혁의 정신이 시대의 정신을 읽은 것뿐만 아니라 그 암울한 시대를 변화시킬 복음의 원리를 발견했고 동시에 그것을 그들이 각기 처한 상황속에서 정확하게 적용했으며 그것에 의해 어둠속에 있는 인간과 사회를 빛으로 인도해 내는 개혁해 나갔다는 사실로 말해 질 수 있습니다. 이 종교개혁의 정신은 여기에서 머물지 않고 노예상황이 있는 곳에서는 어디에서나 자유의 정신으로 작용한 것을 역사적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한 예를 들면 바로 항가리의 경우입니다. 항가리에서 개혁신앙의 정신은 바로 민족주의와 연결이 되는데 그 이유는 역사적 경험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항가리는 본래 아시아에서 유래된 민족으로 7세기경에 현재 항가리에 정착을 하고 11세기에 성 스테판(St. Stephen)이라는 왕의 주도하에 서방기독교를 받아들임으로써 기독교국가가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16세기에 들어와서 터키의 침공하에 합락이 되고 나라는 세조각으로 나뉘어 지고 민족의 분단된 지역들은 터키와 당시 유럽을 지배하고 있던 합스부르그 왕가의 지배하에 있게 됩니다. 합스브르그왕가는 카톨릭교회를 배경으로 민족을 식민지로 전락시키는 상황하에서 이 민족의 식민지화 속에서 갈등하던 학생들이 제네바로 공부를 하러갔고 그들이 거기에서 개혁의 원리를 배우게 되고 그들이 고국으로 돌아오면서 개혁정신에 의한 독립운동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후 터키를 멸망시킨 합스부르그왕가가 다시 카톨릭교회를 앞세워 항가리를 지배하고 카톨릭교회는 반종교개혁운동을 감행하여 항가리 민족을 말살하려 했습니다. 이에 항가리 민족독립을 염원하던 사람들은 개혁운동에 가담하게 되고 민족의 독립을 위하여 합스부르그왕가의 지배와 맞서 싸웁니다.
그러므로 항가리에서는 개혁신앙이라는 것은 항상 억압받는 민족의 해방과 독립정신으로 남아있습니다. 이 경험은 우리 민족에게는 재차 설명할 필요도 없을 정도로 너무나도 생생하게 경험된 일들입니다. 이것은 남미쪽에서도 나타나는데 1870-1890년 사이 우리나라와 비슷하게 개신교가 들어가면서 카톨릭교회를 앞세운 스페인 식민주의에 맞서는 민주주의, 자유, 정의, 발전의 이념을 공급하게 되었습니다. 불행하게도 이 경험들이 남미나 오늘 우리 나라에서는 많이 쇠퇴하고 말았습니다. 종교개혁정신은 당도하는 곳마다 그 자유의 정신, 민주의 정신, 평등의 정신, 새로운 시대를 읽어내는 정신으로 그 세상을 멸망의 상태에서 구원으로 인도하는 견인차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4) 오늘의 시대를 읽는 개혁정신의 책임 이제 이 개혁신앙의 전통을 유산으로 하고 있는 우리에게 걸려진 과제와 책임은 서서히 들어나기 시작합니다.
(1) 시대의 징조를 읽어내는 개혁신앙이 되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시대의 징조를 읽지 못하면 복음의 선포가 불가능합니다. 소련의 최근의 구테타 실패의 교훈은 오늘 우리에게 큰 시사를 해 주고 있습니다. 개혁과 개방으로 나아가는 시대의 징조에서 옛 스탈린주의의 낡은 틀을 유지해 보자는 발상이 역사의 심판을 받는 일이었습니다. 고르바쵸프의 실수도 바로 거기에 있었습니다. 사회주의가 되더라고 그것은 인간을 노예화하고 있던 스탈린식의 사회주의에서 해방시켜서 인간의 얼굴을 지닌 사회주의가 되도록 해야 하며 억압의 옷을 자유의 옷으로 갈아입히는 일을 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이런 차원에서 오늘 교회는 인간과 사회가 교회로부터 떠나려고 하는 원인이 무엇인가를 냉철하게 분석해야 합니다. 동서 냉전의 종식으로 부각되는 이데올로기의 공백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오늘 세계는 인간의 자유를 보장하지 못하는 전체주의식 사회주의도 아니고 인간의 평등을 책임질 수 없는 자본주의도 아닌 제 3의 이데올로기를 목마르게 찾고 있습니다.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은 당시에 인문주의라는 틀로 인간의 존엄성과 탁월성을 찾고자 하는 시대를 읽고 거기에 복음으로 그 길을 제시하는 복음의 증언을 하였는데 오늘 우리는 무엇을 제시해야 할 것인가 고민하여야 합니다. 불신의 정치, 불균형의 경제구조, 타락하고 잘못된 삶의 양식, 목적없는 산업화, 숱한 문제를 안고 있는 이 시대를 읽고 자유하려고 하고 정의로워 지려고 하고 지구와 인류의 멸망에서 생존을 지키려고 하는 이 시대의 몸부림을 해방시키고 다시 하나님의 은총에 안겨주는 일을 해야 하리라고 생각합니다.
(2) 이 시대의 징조를 읽은 후에는 그 갈망을 수용할 수 있는 복음의 재발견이 필요합니다. 오늘 서구의 세속화는 인간이 교회를 떠나는 상황을 의미합니다. 우리 한국교회와 사회에서도 세속화물결이 닥치면 교회가 비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세속화라고 한탄할 일이 아니라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는 일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교회가 사람을 놓지는 현상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1990년 11월에 스위스에서 한국 스위스 교회협의회가 있었습니다. 그 협의회 기간중에 바젤교회총회에서 협의회 참석자들을 위하여 리셉션을 하였는데 그때 바젤교회 총회장이 인사말을 하면서 아주 가슴아픈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 여러분, 우리 총회는 내일 임시총회를 모이는데 그 의제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교회의 반을 문을 닫느냐 그대로 열어두느냐 하는 의제입니다." 교회는 비고 체면상 교회문을 열어놓자니 유지비만 나갈 뿐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윽고 총회장이 왜 이 지경이 되었느냐는 설명을 하는데 이런 설명을 합디다. 10년전에 우리 총회에서 당시 젊은이들을 교회에 수용하기 위해서 교회를 갱신할 것이냐 아니면 전통을 고수할 것이냐 하는 논쟁을 했는데 그 때 우리 총회는 전통을 고수하기로 했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로 한 세대, 즉 25세부터 35세까지 젊은이를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전통이 중요하냐, 복음의 전수가 중요하냐에서 전통을 고수하므로 종교개혁자들을 낳은 그 역사깊은 나라에서 오늘 복음을 선포할 대상이 사라져 버린 셈입니다. 오늘 우리 한국교회는 이 갈림길에서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신중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종교개혁자들은 교회는 계속 개혁되어야 한다(Semper Reformanda)고 했는데 그것은 교회가 타락하지 않기 위해서도 그렇지만 시대의 열망을 복음의 품에 감싸기 위하여 취해야 할 유연한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3) 이 시대의 아픔을 치유하는 신학적인 발견을 복음에서 해야 합니다. 우리는 복음이 인간의 상처를 치유하시는 하나님의 처방이라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복음에는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게 한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은 그 시대의 징조를 읽고 믿음으로 구원에 이른다란 하나님의 처방을 찾아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자손을 주고 창대케 하리란 하나님의 약속과 계약을 의지하여 그 방랑의 시대를 이겨나갔습니다. 모세는 애급의 종살이에서 벗어나는 출애급의 해방을 복음으로 선포했습니다. 이사야는 우리에게 영원한 정의와 평화의 왕 메시야가 오신다는 메시야대망사상으로 그 암울한 시대를 이겨나갔습니다. 바울은 인간은 율법이 아닌 믿음으로 충분하게 하나님앞에 나갈 수 있다고 함으로써 율법밖에 있던 이방인들을 하나님앞에 열리게 했습니다. 라틴 아메리카 교회는 종속된 상태속에서 해방을 시대가 갈망하는 복음의 의미로 해석함으로써 남미의 사람들이 하나님께 기도하도록 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민족이 분단되고 동서가 분열되고 교회가 분열되고 부자와 가난한 자가 분열되고 기업주와 노동자가 분열되고 대학을 가는 자와 낙오자가 분열되고 정치적 견해로 분열되고 사회적 신분으로 분열되고 교리로 분열되고 온갖 것으로 분열되어 모래알 처럼 상대방에게 아픈 상처를 주면서 사는 이 현실속에서 복음을 어떻게 선포해야 하는 것입니까 복음의 선포는 시대의 징조를 읽어야 하고 그 시대의 아픔의 신음소리를 들어야 선포할 수 있는데 그 신음소리가 들리십니까 그 신음소리는 무슨 소리입니까 어떤 신음소리가 들리십니까 우리의 신학적 훈련과 영적 단련은 이 신음소리를 듣는 훈련이고 이 신음소리에 대해 기쁨의 소리를 발하는 훈련인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의 지혜롭고 감동적이고 신실한 신학적 성찰로 우리가 처한 어두움이 물러가고 빛이 찾아오는 희망을 기대합니다.
이것은 우리나라같은 개발국에 많은 생존의 위협을 줍니다.그 위협을 피부로 경험하고 있는 것의 한 실례가 바로 Uruguay Round 협상입니다. 이러한 위협은 우리 보다 경제적으로 취약한 제3세계에 가면 그 위협도가 훨씬 심각합니다. 이런 현상들은 우리에게 앞으로 우리의 생계를 보장하는 산업과 문명적 기반이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한 불안을 안겨주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우루과이라운드협상으로 결국 우리 농촌이 피폐되고 농민들이 삶의 터전을 잃는 것은 물론 농업도 대기업 내지 다국적 기업의 밥이 되어버리고 우리 사회의 빈부의 격차는 심해질 것이고 열심히 일하는 삶의 태도는 사라지고 삶의 스타일은 불로소득같은 더 타락되는 쪽으로 바뀌어 져 갈 것입니다. 1990년대 들어오면서 가장 자주 입에 오르내리는 말이 "지구의 생존, 인류의 생존" 이란 말입니다. 이 생존이란 말은 이미 교회에서도 자주 쓰는 개념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인류가 발전하고 번영할 것인가 하는 말은 사라진지 오래이고 과연 생존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게 되는 배경에는 그동안 무절제하게 산업화된 문명의 결과로 지구의 환경이 심하게 위협받고 있고 공해문제, 생태계의 위기의 문제가 바로 우리앞에 생존의 위협으로 닥아와 있다는 현실에 대한 불안의 표현입니다. 이 생존의 위협이 얼마나 큰 것이냐에 대해 지난 89년 서울에서 개최되었던 WARC 제22차 총회의 문서에 나와있는 데이타를 인용하면,-세계각국이 1분에 군사무기를 위해 쓰는 비용이 180만 불에 달하고-1 시간에 1500명의 어린이가 기아와 관련하여 죽어가고-하루에 한 종류의 생물이 멸종해가고-1980년대에는 1주일에 과거 어느시대보다도 더 많은 사람들이 독제권력에 의해 구속되고 고문받고 암살되고 자기의 고국을 떠나는 망명을 해야했고-현 세계경제구조는 이미 제3세계가 지기 힘겨운 150억불의 외채에다 매달 7500만불을 더하고 있고-매년 한반도 4분의3 크기의 숲이 사라지고 있고-매10년 온도가 썹씨1.5도 내지4.5도 높아지는 온실효과로 지구는 재해를 가져오고 그 결과로 미래에는 백사장이 사라져 버리는 위협을 우리가 맞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비공식 통계이긴 하지만 우리나라의 신생아 출산의 3분의 1이 기형아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여기에는 비록 테어나지 못하는 인공유산이 아닌 자연유산 및 사산까지를 포함하지만 아기를 가지면 3명 중에 한 명은 어쨋든 생명으로 테어나지 못한다는 이 사실이 생존위협의 한 단면입니다. 오늘 우리 한국사회를 보면 물가는 치솟고, 집값이 폭등하고, 환락의 문화는 소돔과 고모라를 무색하게 하고, 불신의 정치, 과외로 시달리는 아이와 부모, 부동산투기로만 살려고 하는 삶의 자세, 온통 우리의 미래에 대해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이 상황을 우리는 부인하지 못합니다. 자! 이러한 상황속에서 우리 크리스챤과 교회는 무엇을 해야하고 무엇을 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 오늘 복음을 세상에 선포해야 하는 우리에게 심각한 도전이 되고 있습니다. 이런 세계의 위기를 앞에 놓고 걱정하는 사람들은 2000년 인류역사를 주도해 온 기독교가 오늘도 이 위기를 구원할 능력이 있는가, 과연 교회에 희망을 두고 의지할 수 있겠는가 하는데 대해 상당히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 같습니다. 지난 89년 말부터 전개되는 동구의 변화속에 비록 교회가 그 변화를 주도하지는 않았지만 수많은 자유를 갈망하던 사람들이 밀물처럼 교회에 몰려와서 그 갈망을 표현했고 교회주위에 촛불을 켜 그들의 처절한 기도를 표현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동구의 교회는 변화직후에 불어났던 교회교인들이 벌써 줄어들기 시작하는데 이 현상을 우리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지금 쏘련과 중국에는 교회가 왕성합니다.
쏘련 같은 경우에 어떤 지역의 러시아정교회에는 하루 주일에 2000명이 세례를 받고자 합니다. 이러한 현상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를 분석하는 것이 중요한데 이들이 이제 신앙의 자유를 얻었다고 감격하고 오는 것만이 아니라 지난 40년동안의 스탈린주의 독제체제에 시달리던 사람들이 거기에서 실망하고 그 희망을 둘 때가 아무데도 없기 때문에 교회로 오는 것이고 이것은 교회에 대해 강력한 기대를 하고 있다는 생각을 우리가 해야 하는 대목입니다. 오늘 우리 한국교회에도 교세성장이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한다고 하는데 여기에는 여러가지 원인이 있으나 그 중 하나가 젊은이들이 교회에 희망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떠나는 사실을 볼 때 이를 깊히 생각해야 할 대목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의 교회에 대한 실망은 시대의 고민을 안고 있는 세계가 교회에 의탁해서 그 문제들을 풀어갈 만한 신뢰도 갖지 못하고 있고 그런 능력도 교회가 갖고 있지 못하며 심지어 그런 안목도 없으며 그런 책임감도 느끼고 있는 것 같지 않는 것 같고 교회가 그런 관심도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 교회는 개교회주의에 빠져 있고 자기 교리의 수호에 급급해 있고 자기 교단의 좁은 선교안목에 잡혀 있고 자기 교회의 테두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인접해 있는 지역사회나 교회를 향해 수많은 신음소리를 발하는 이웃과 지역사회와 민족과 역사와 사회와 세계에 대한 열린 자세가 전혀 없고 시간적으로 말할 때 과거의 영광에 안주하고 현재조차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으며 더더욱 미래에 대해선 두 말할 것도 없이 세계가 나아가야 할 아무런 구체적인 비젼도 제시하지 못하고 기껏 하는 말이라는 것이 세계의 종말이 온다는 정도의 희망없는 이야기들만 하고 있는 셈입니다. 자 이런 상황은 우리로 하여금 복음의 선포가 무엇이어야 하느냐 하는 도전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크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교회를 세상에 보내시고 기름부으시고 존재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뜻과 그 명령이 거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 명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세상에 오심에 근거하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세상에 오심은 바로 하나님이 이 세상을 멸망치 않고 구원하게 하시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멸망의 위협속에 있을 때 이 세상을 구원할 그 과제는 무엇인가 하는 생각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오늘의 세계의 희망적인 모습을 낳게 했던 개혁신앙을 유산으로 받은 교회로써 오늘 그 개혁전통을 다시 한번 음미하고 세상에 대해 희망을 선포할 수 있는 우리의 선교과제를 찾고 그로써 하나님의 구원이 세상에 의해 찬양되는 영광을 돌릴 수 있도록 묵상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이것은 16세기 종교개혁에서 그 개혁운동이 낳은 역사발전에서 그 원리를 우리가 이미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더 원초적인 근거는 종교개혁의 정신이 초대교회공동체의 증언을 원형으로 잡고 복음의 의미를 가장 순수하게 제시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종교개혁의 정신을 제대로 파악하고 거기에서 이 갈망하는 세계속에 하나님의 구원의 희망을 선포하는 바른 길을 우리가 진지하게 숙고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1) 어두움이 가고 빛이 온다. 우리가 구체적인 논의를 하기 전에 먼저 종교개혁을 이해하는 각도의 시정이 필요합니다. 먼저 우리는 그동안 종교개혁을 예정론, 성서의 권위, 믿음에 의한 구원 등의 너무 교리적 차원에서 해석해 왔는데 이는 종교개혁을 대단히 편협하게 이해하는 방법입니다. 이런 교리적인 개혁은 바로 시대의 암울한 징조를 읽고 그 암울한 상황속에서 빛을 가져오려는 종교개혁운동이 복음에서 발견한 개혁의 원칙이며 이 원칙은 시대의 징조를 읽고 분석하고 그 암울한 상황이 오로지 복음의 참다운 이해에서만 극복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고백한 신앙의 요지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제네바에 가면 제네바대학과 연결되어 있는 국제종교개혁자기념공원 (International Reformers' Monument ) 이 있습니다. 그 공원 한 쪽 벽에는 제네바에서 종교개혁을 주도했던 네 사람, 즉 기용 파렐 (Guillaume Farel), 죤 칼빈 (Jean Calvin ), 데오도르 베자 (Theodore Beza ), 죤 녹스 (John Knox ) 이렇게 네 사람의 입상이 벽에 세워져 있습니다. 그리고 총 길이 약 90여 m 에 달하는 벽 위에는 라틴어로 이런 글씨가 새겨져 있습니다. Post Tene, Bras Lux (즉, 어두움이 가고 빛이 온다.) 이것은 제네바의 종교개혁 기념지 어디를 가든지 발견할 수 있는 구호입니다. 종교개혁의 구호는 바로 어두움을 몰아내고 빛을 가져온다는 혁명적 구호였습니다. 오직 믿음, 오직 성서, 오직 그리스도, 오직 하나님의 영광 이렇한 종교개혁의 교리들은 바로 이 중세 시대의 어두움을 몰아내고 빛을 가져오는 거대한 변혁의 작업속에서 개혁자들이 성서로부터 발견해낸 시대의 위기를 읽고 치유하는 복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종교개혁의 이해는 이 교리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시대의 어둠을 몰아내고 빛을 가져오려는 그 복음에 의한 변혁의 몸부림에서 이해해야 그 역동적인 모습을 잡아낼 수 있습니다. 제네바에서는 요즘도 칼빈을 추종하는 사람들을 두 종류로 나누는데 첫번째는 Calvinist 라고 하여 칼빈이 그때 말한 교리를 그대로 문자적으로 따르는 사람들은 가리킵니다. 이들은 교리적으로 종교개혁을 이해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한편 칼빈의 정신을 따르는 사람들을 Calvinian 이라고 부르는데 이들은 칼빈이 그 시대의 사회와 교회를 개혁한 정신을 이어받는 사람들을 말하며 이것은 곧 칼빈을 교리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시대의 징조를 읽고 복음의 빛아래서 그 시대의 구원을 위해 일하는 그런 역동적인 시각을 가리킵니다. 저는 이 후자의 입장에 서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2) 시대의 징조를 읽은 종교개혁 종교개혁의 문명사적 배경은 바로 인문주의입니다. 스위스의 개혁을 주도했던 칼빈의 개혁사상의 배경도 이 인문주의이며 쯔빙글리는 바젤에서 인문주의 운동을 펼치던 에라스무스의 절대영향을 받았습니다. 인문주의는 희랍고전에 대한 재 발견과 거기에 입각한 인간의 재발견으로 요약이 될 수 있습니다. 인문주의 태동은 세속적인 차원에서 말씀드리면 다소 불경스러운 말이지만 인간을 신에게서 해방시키는 운동이었습니다. 중세에는 신만 존재했지 인간은 완전히 부속물로서 존재했습니다. 르네쌍스는 이렇게 매몰되어 있는 인간의 존엄성과 탁월성을 찾는 운동이었고 그 존엄성과 탁월성을 교회와 신학은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희랍과 로마고전을 근거로 찾기 시작했습니다. 르네쌍스는 교회와 신학의 지배로 부터 역사의식이나 시나 문학, 자연의 법칙 등을 해방시키는 작업을 했습니다. 이것은 사실 인간이 하나님의 지배에서 떠나려는 몸짓이었고 인간을 종교로부터 자유하게 하는 일이었고 오늘의 말로 바꾸면 세속화를 감행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많은 사람들은 이 인문주의의 발흥은 인간이 하나님의 품을 떠난 것으로 생각을 하여 이것을 인본주의라 부르고 신본주의와 배치되는 개념으로 생각하는데 이는 이 거대한 현상에 대한 소극적인 해석이며 수세적인 해석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잘못하여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떠나려했던 것이 아니고 중세 교회와 신학이 인간을 억압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억압적 교회와 신학에서 인간을 해방시키려는 운동이었습니다. 이것은 시대의 징조였고 이것을 부정하는 태도보다는 오히려 적극적으로 시대의 징조를 읽는 일이 훨씬더 중요한데 종교개혁자들은 바로 이 시대의 징조를 읽은 사람들입니다. 종교개혁자들의 기여는 이 시대의 징조를 읽고 적절하게 대응함으로 말미암아 세계역사와 기독교 역사를 바꾸는 일입니다. 종교개혁자들이 한 일은 바로 이 하나님으로 부터 해방되려는 정확히 말하면 교회의 억압적 지배에서 해방되려고 하는 혹은 종교의 무책임한 포수의 생활에서 해방되려고 하는 인간의 이 열망을 복음으로 끌어안고서 그들을 해방시키며 동시에 다시 하나님에게 돌아가게 하는 일을 한 것입니다. 제네바 대학에서 1950년대에 "칼빈의 사회경제적 사고" (La penc e conomique et sociale de Calvin ) 라는 박사논문을 씀으로서 칼빈의 종교개혁의 사회경제적 의미의 연구에 결정적 공헌을 한 Andr Bi ler 라는 학자가 있습니다. 그는 당시 교회가 인간을 종교로부터 자유하게 하여 그리스도에게로 개방시키는 일을 하는 대신에 인간을 종교속에 가두어두었다고 하고 종교개혁은 바로 인간을 종교로부터 자유하게 하여 그리스도에게로 열려지도록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Andre Bieler, The Social Humanism of Calvin, (Richmond:John Knox Press, 1964), p.11.) 제네바 시의 깃발이 이것을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제네바 시의 깃발은 왼쪽에는 독수리 반쪽과 오른쪽에는 열쇠한개가 그려져 있는 도안으로 되어 있는데 독수리는 국권(State Power)을 상징하고 열쇠는 교권(Church Power)를 상징합니다.
그런데 독수리날개가 두개가 있어야 완전한 것이고 열쇠는 두 개가 각개로 있어냐 완전한 것인데 그 중에서 날개 한 쪽만 취하고 두개가 있어야 완전한 교권의 상징이 되는 열쇠를 한 개만 취함으로써 한 개인을 억압적 국권으로부터도 자유하게 하고 억압적 교권으로 부터도 자유하게 하는 의미를 얼마나 강하게 부각시키고 있는지를 우리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사실 당시의 인간은 복음안에서 자유한 것이 아니라 종교의 노예가 되어 있었습니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교회를 거치지 않고는 그 존재가 인정되지 않는 채로 예속이 되어 있었고 또 인간은 비인간화하는 사회적 노예상태에 처해 있었고 영적인 갈망까지도 잘못된 신비주의에 빠져 있었습니다. 쯔빙글리가 종교개혁을 했던 일에서 우리는 당시 인간의 노예상태에서 종교개혁이 이룩한 인간의 종교의 노예상태, 사회적 노예상태, 영적 노예상태에서 해방시킨 일을 명확히 한 예로 볼 수 있습니다. 쯔빙글리는 어느날 종교개혁동지들과 함께 친구의 집에서 고기를 먹는 것을 금지한 사순절에 의도적으로 쏘쎄지를 썰어놓고 먹었습니다. 이것은 의도적으로 행한 일인데 바로 율법적 신앙을 넘어서기 위한 일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바로 이런 율법에 메여있는 인간을 자유하게 하여 하나님에게 자유하게 열리도록 하는 해방작업이었습니다. 이것은 마치 유대인의 율법에 의해 하나님의 은총으로부터 차단당하고 있던 이방인들을 그리스도께서 그 몸으로 벽을 허무심으로써 이방인들을 하나님의 은총앞에 열려 있도록 만드신 일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해방작업과 일치하는 것입니다. 또 당시 스위스사람들은 돈을 받고 전쟁에서 대신 싸워주는 용병제도를 통해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다 용병으로 국내에서 돈을 버는 영주들에게 노예가 되어있는 상태였습니다. 쯔빙글리는 바로 이 용병제도를 반대하고 그들로 하여금 낙농과 노동으로 삶을 스스로 이루어 가도록 인도하였습니다. 쯔빙글리의 개혁에 최고 제동을 걸던 사람들은 교권의 억압적 행사를 유지해 보려는 로마 교회 교권자들과 바로 이 용병으로 도는 버는 자본가들이었으나 쯔빙글리의 개혁으로 이 용병들이 사회적 노예상태에서 해방이 되었습니다. 개혁자들의 복음해석은 바로 이 인간을 자유하게 하여 다시 하나님앞에 자유하게 열리도록 하는 그 일을 위한 노력이었습니다. 자 여기에서 우리가 주의해서 보아야 할 점은 종교개혁자들이 인간을 해방시키는 일을 아무 생각없이 무조건 한 것이 아닙니다. 나중에 종교개혁자들은 인문주의자들과 결별을 하게 되는데 그것은 인문주의 운동이 아무런 대안없이 무조건 인간을 해방시킨 일을 했다면 개혁자들은 인간을 해방시키되 하나님앞에 자유하게 돌아가도록 하는 해방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종교개혁자들은 이처럼 인간을 해방시키는 일을 하였는데 무조건 인간을 해방시키는 일, 거기에서 그친 것이 아니라 그 보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하나님앞에 은총을 받아 자유하게 되는 인문주의라는 새로운 인문주의까지로 나아가게 된 것입니다. 종교개혁자들은 진정한 인간의 자유는 그리스도안에서의 인간성이 회복되는 것이라고 보고 그리스도안에서 자유하게 하는 차원에서 인간을 해방시킨 것입니다. 루터가 1520년에 발표한
셋째 논문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하여" (On Christian Liberty)는 바로 이 점을 밝힌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사실 한 가지는 종교개혁자들이 인간이 교회로부터 벗어날려고 하는 그 시대의 징조를 정확히 읽고 인간을 잘못된 신학과 신앙과 종교구조에서 해방시켜 그리스도앞에 다시 자유하게 열린 모습으로 서게 했다는 이 시대의 징조를 읽고 거기에 대응하는 지혜입니다. 다시 말하면 종교개혁자들은 종교로부터 해방시킨 인간을 다시 전적 타락한 죄인으로 정의하게 되는데 이는 인간에 대한 무조건적인 해방이 아니라 인간이 스스로를 철저하게 이해하는 인간에 대한 진실한 고찰이며 강요된 죄인이 아니라 스스로 참회하는 죄인이란 측면에서 개혁이전의 인간에 대한 부정적 견해와는 판이하게 차이가 있은 것입니다. 강요되는 죄인이 아닌 스스로 고백하는 죄인이 되는 것입니다. 주의해야 할 점은 오늘 교회가 이를 교리적으로 이해해서 인간을 죄인으로 강요하는 일은 반종교개혁 정신임을 감안해야 하는 것입니다.
3) 시대의 변혁을 주도하는 종교개혁의 정신 이 시대의 징조를 읽고 대응하는 종교개혁의 정신은 개혁자들마다 각기 다른 강조점을 낳게 했습니다. 이를테면 영국에서 이미 14세기에 개혁을 주창했던 위클리프 (John Wyclif ) 에게서는 지배권은 유일하게 하나님에게만 있고 성서가 유일한 법칙이라는 종교개혁사상의 씨앗을 탄생시켰고, 그의 영향을 받은 현 체코인 보헤미아의 개혁자 후쓰(Jhon Huss)에게서는 인간은 진리에 따라 살아야 한다라는 진리중심의 삶으로 승화되었고 그의 정신을 이은 루터(Martin Luther)에게서는 인간은 하나님의 은총으로 산다는 영적 겸손의 정신으로 이어졌고 쯔빙글리 (Huldreich Zwingli)에게서는 성서에 입각한 기독교공동체의 민주적 권위의 정신으로 이어졌고, 토마스 뮌쪄(Thomas Munzer)에게는 인간의 내면적 변화에 의한 혁명과 억압적 상황에 대한 정당한 저항정신으로 이어졌고, 칼빈(Joh Calvin)에게서는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신정정치의 정신으로 이어졌습니다. 이는 종교개혁의 정신이 시대의 정신을 읽은 것뿐만 아니라 그 암울한 시대를 변화시킬 복음의 원리를 발견했고 동시에 그것을 그들이 각기 처한 상황속에서 정확하게 적용했으며 그것에 의해 어둠속에 있는 인간과 사회를 빛으로 인도해 내는 개혁해 나갔다는 사실로 말해 질 수 있습니다. 이 종교개혁의 정신은 여기에서 머물지 않고 노예상황이 있는 곳에서는 어디에서나 자유의 정신으로 작용한 것을 역사적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한 예를 들면 바로 항가리의 경우입니다. 항가리에서 개혁신앙의 정신은 바로 민족주의와 연결이 되는데 그 이유는 역사적 경험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항가리는 본래 아시아에서 유래된 민족으로 7세기경에 현재 항가리에 정착을 하고 11세기에 성 스테판(St. Stephen)이라는 왕의 주도하에 서방기독교를 받아들임으로써 기독교국가가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16세기에 들어와서 터키의 침공하에 합락이 되고 나라는 세조각으로 나뉘어 지고 민족의 분단된 지역들은 터키와 당시 유럽을 지배하고 있던 합스부르그 왕가의 지배하에 있게 됩니다. 합스브르그왕가는 카톨릭교회를 배경으로 민족을 식민지로 전락시키는 상황하에서 이 민족의 식민지화 속에서 갈등하던 학생들이 제네바로 공부를 하러갔고 그들이 거기에서 개혁의 원리를 배우게 되고 그들이 고국으로 돌아오면서 개혁정신에 의한 독립운동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후 터키를 멸망시킨 합스부르그왕가가 다시 카톨릭교회를 앞세워 항가리를 지배하고 카톨릭교회는 반종교개혁운동을 감행하여 항가리 민족을 말살하려 했습니다. 이에 항가리 민족독립을 염원하던 사람들은 개혁운동에 가담하게 되고 민족의 독립을 위하여 합스부르그왕가의 지배와 맞서 싸웁니다.
그러므로 항가리에서는 개혁신앙이라는 것은 항상 억압받는 민족의 해방과 독립정신으로 남아있습니다. 이 경험은 우리 민족에게는 재차 설명할 필요도 없을 정도로 너무나도 생생하게 경험된 일들입니다. 이것은 남미쪽에서도 나타나는데 1870-1890년 사이 우리나라와 비슷하게 개신교가 들어가면서 카톨릭교회를 앞세운 스페인 식민주의에 맞서는 민주주의, 자유, 정의, 발전의 이념을 공급하게 되었습니다. 불행하게도 이 경험들이 남미나 오늘 우리 나라에서는 많이 쇠퇴하고 말았습니다. 종교개혁정신은 당도하는 곳마다 그 자유의 정신, 민주의 정신, 평등의 정신, 새로운 시대를 읽어내는 정신으로 그 세상을 멸망의 상태에서 구원으로 인도하는 견인차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4) 오늘의 시대를 읽는 개혁정신의 책임 이제 이 개혁신앙의 전통을 유산으로 하고 있는 우리에게 걸려진 과제와 책임은 서서히 들어나기 시작합니다.
(1) 시대의 징조를 읽어내는 개혁신앙이 되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시대의 징조를 읽지 못하면 복음의 선포가 불가능합니다. 소련의 최근의 구테타 실패의 교훈은 오늘 우리에게 큰 시사를 해 주고 있습니다. 개혁과 개방으로 나아가는 시대의 징조에서 옛 스탈린주의의 낡은 틀을 유지해 보자는 발상이 역사의 심판을 받는 일이었습니다. 고르바쵸프의 실수도 바로 거기에 있었습니다. 사회주의가 되더라고 그것은 인간을 노예화하고 있던 스탈린식의 사회주의에서 해방시켜서 인간의 얼굴을 지닌 사회주의가 되도록 해야 하며 억압의 옷을 자유의 옷으로 갈아입히는 일을 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이런 차원에서 오늘 교회는 인간과 사회가 교회로부터 떠나려고 하는 원인이 무엇인가를 냉철하게 분석해야 합니다. 동서 냉전의 종식으로 부각되는 이데올로기의 공백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오늘 세계는 인간의 자유를 보장하지 못하는 전체주의식 사회주의도 아니고 인간의 평등을 책임질 수 없는 자본주의도 아닌 제 3의 이데올로기를 목마르게 찾고 있습니다.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은 당시에 인문주의라는 틀로 인간의 존엄성과 탁월성을 찾고자 하는 시대를 읽고 거기에 복음으로 그 길을 제시하는 복음의 증언을 하였는데 오늘 우리는 무엇을 제시해야 할 것인가 고민하여야 합니다. 불신의 정치, 불균형의 경제구조, 타락하고 잘못된 삶의 양식, 목적없는 산업화, 숱한 문제를 안고 있는 이 시대를 읽고 자유하려고 하고 정의로워 지려고 하고 지구와 인류의 멸망에서 생존을 지키려고 하는 이 시대의 몸부림을 해방시키고 다시 하나님의 은총에 안겨주는 일을 해야 하리라고 생각합니다.
(2) 이 시대의 징조를 읽은 후에는 그 갈망을 수용할 수 있는 복음의 재발견이 필요합니다. 오늘 서구의 세속화는 인간이 교회를 떠나는 상황을 의미합니다. 우리 한국교회와 사회에서도 세속화물결이 닥치면 교회가 비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세속화라고 한탄할 일이 아니라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는 일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교회가 사람을 놓지는 현상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1990년 11월에 스위스에서 한국 스위스 교회협의회가 있었습니다. 그 협의회 기간중에 바젤교회총회에서 협의회 참석자들을 위하여 리셉션을 하였는데 그때 바젤교회 총회장이 인사말을 하면서 아주 가슴아픈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 여러분, 우리 총회는 내일 임시총회를 모이는데 그 의제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교회의 반을 문을 닫느냐 그대로 열어두느냐 하는 의제입니다." 교회는 비고 체면상 교회문을 열어놓자니 유지비만 나갈 뿐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윽고 총회장이 왜 이 지경이 되었느냐는 설명을 하는데 이런 설명을 합디다. 10년전에 우리 총회에서 당시 젊은이들을 교회에 수용하기 위해서 교회를 갱신할 것이냐 아니면 전통을 고수할 것이냐 하는 논쟁을 했는데 그 때 우리 총회는 전통을 고수하기로 했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로 한 세대, 즉 25세부터 35세까지 젊은이를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전통이 중요하냐, 복음의 전수가 중요하냐에서 전통을 고수하므로 종교개혁자들을 낳은 그 역사깊은 나라에서 오늘 복음을 선포할 대상이 사라져 버린 셈입니다. 오늘 우리 한국교회는 이 갈림길에서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신중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종교개혁자들은 교회는 계속 개혁되어야 한다(Semper Reformanda)고 했는데 그것은 교회가 타락하지 않기 위해서도 그렇지만 시대의 열망을 복음의 품에 감싸기 위하여 취해야 할 유연한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3) 이 시대의 아픔을 치유하는 신학적인 발견을 복음에서 해야 합니다. 우리는 복음이 인간의 상처를 치유하시는 하나님의 처방이라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복음에는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게 한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은 그 시대의 징조를 읽고 믿음으로 구원에 이른다란 하나님의 처방을 찾아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자손을 주고 창대케 하리란 하나님의 약속과 계약을 의지하여 그 방랑의 시대를 이겨나갔습니다. 모세는 애급의 종살이에서 벗어나는 출애급의 해방을 복음으로 선포했습니다. 이사야는 우리에게 영원한 정의와 평화의 왕 메시야가 오신다는 메시야대망사상으로 그 암울한 시대를 이겨나갔습니다. 바울은 인간은 율법이 아닌 믿음으로 충분하게 하나님앞에 나갈 수 있다고 함으로써 율법밖에 있던 이방인들을 하나님앞에 열리게 했습니다. 라틴 아메리카 교회는 종속된 상태속에서 해방을 시대가 갈망하는 복음의 의미로 해석함으로써 남미의 사람들이 하나님께 기도하도록 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민족이 분단되고 동서가 분열되고 교회가 분열되고 부자와 가난한 자가 분열되고 기업주와 노동자가 분열되고 대학을 가는 자와 낙오자가 분열되고 정치적 견해로 분열되고 사회적 신분으로 분열되고 교리로 분열되고 온갖 것으로 분열되어 모래알 처럼 상대방에게 아픈 상처를 주면서 사는 이 현실속에서 복음을 어떻게 선포해야 하는 것입니까 복음의 선포는 시대의 징조를 읽어야 하고 그 시대의 아픔의 신음소리를 들어야 선포할 수 있는데 그 신음소리가 들리십니까 그 신음소리는 무슨 소리입니까 어떤 신음소리가 들리십니까 우리의 신학적 훈련과 영적 단련은 이 신음소리를 듣는 훈련이고 이 신음소리에 대해 기쁨의 소리를 발하는 훈련인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의 지혜롭고 감동적이고 신실한 신학적 성찰로 우리가 처한 어두움이 물러가고 빛이 찾아오는 희망을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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