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인의 구주 (눅19:1-10)
본문
성경에 나타난 ‘여리고’는 하나님의 구속 역사와 깊은 관계가 있는 유서 깊은 성입니다. 사람들은 이 여리고를 가리켜 ‘종려의 도시’(The City of Palms)라고 불렀습니다. 옛날이나, 지금을 막론하고 부요하고, 정략상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도시입니다. 이 도시는 긴 요단 계곡에 위치하고 있고,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과 요단 동쪽 지방으로 나가는 강의 건널목의 거점입니다. 여기에는 지금도 큰 종려나무 숲이 있고 주변 몇 마일까지 향기를 풍기는 유명한 발삼(balsam)향나무 숲이 있습니다. 역사가 요세푸스는 이 도성을 가리켜 ‘신성한 영역’ ‘팔레스틴에서 가장 비옥한 땅’이라고 불렀습니다. 당시 로마 사람들은 이 곳의 농산물과, 특히 대추야자 열매와 발삼 향유를 세계시장에 내어 명성을 드러낸 일이 있습니다. 따라서 예루살렘 다음가는 과세 지역으로 로마인들의 관심을 집중시킨 도시였습니다. 지금은 이스라엘과의 협정에 따라서 팔레스틴 해방기구(PLO)의 지역으로 들어갔습니다(199
4). 성경에는 저 유명한 기생 라합이 여호수아 군대에 의하여 극적으로 구원받은 역사를 지니고 있는 도시입니다. 그 때 그 곳에 ‘여호와의 군대장관’이 여호수아에게 나타난 곳이기도 합니다(수2장). 먼훗날에 엘리사 시대에 ‘수원에 소금을 치는 일로’ 그 물이 달아서 ‘여리고 샘’으로 오늘날까지 이르고 있습니다(왕하2:19-25). 예수님 당시에는 ‘소경 거지 바디메오가’ 눈이 열려 빛을 본 기적이 일어난 장소이기도 합니다. 아마 예수께서 여리고를 들어 오시는 입구에서 그는 빛을 보는 축복을 입은 것 같습니다(눅18:35-43)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본문은 저 유명한 ‘예수 여리고 선언’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선언이 무엇입니까 확실히 예수 여리고 방문은 필연적이요, 계획적이요, 목적적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성공적이었습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나타내신 여리고 선언 가운데서 나타났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고 한 사실에서 보여 집니다(19:9-10). 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시기 위함이라고 하였습니다.
I. 삭개오를 부르시는 선언입니다. 누가복음 19장 5절에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고 하였습니다. 삭개오! 그의 이름은 ‘순결’ 혹은 ‘정의’를 뜻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그 이름과는 반대되는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큰 국경도시 여리고에서 관세를 받는 세무서 서장이었습니다. 그는 키가 작고, 체구도 작은 사람으로 여겨집니다. 그는 당시 로마 정부와의 중간 역할을 자유롭게하여 세금을 징수하고 일정한 액수를 로마 정부에 바친 후 나머지는 본인의 것으로 삼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소유가 많았습니다. 옜날이나, 오늘이나 세관원은 부유합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삭개오를 매국노처럼 여겼습니다. 당시에 유대인들은 그를 가리켜 ‘면허증을 가진 강도’라는 별명까지 붙여 주었습니다. 그는 부요하였지만 그 인생은 행복스럽지 못했습니다. 그는 마음에 불안과 죄책을 안고 살았던 것 같습니다. 그는 예수께서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라는 소식을 들었던 것 같습니다. 때마침 예수께서 ‘여리고를 지나가신다’는 꿈같은 현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의 영혼은 예수에게로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그는 여리고 거리의 많은 인파 때문에, 또 키가 작은 이유 때문에, 자신도 모르게 뽕나무 위로 올라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보고자 하는 그 무엇의 영적 열정에 사로잡히고 말았습니다. 여리고에 이르르신 예수! 인파의 군중 속에서 여리고의 중앙통을 걸어 가신 예수! 그는 뽕나무 위에 올라가서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보고자 하던 그 사람 삭개오에게 세상이 깜짝 놀랄 자기 선언을 하였습니다.
1 삭개오야! 속히 내려 오라! 고 하였습니다(19:5). 선택적 부름, 지명적 부름, 알고 부르시는 전지(全知)의 부름이었습니다.
2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눅19:5) 고 하였습니다. 모였던 여리고의 군중들은 엄청난 쇼크를 받았습니다. 저들은 수군거리기 시작했고 마침내 저가 죄인의 집에 들어갔다고 힐난(詰難)하기 시작하였습니다.
3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고 하였습니다(눅19:9). 주님은 그 집에 구원을 선언하였습니다.
4 이 사람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하였습니다(눅19:9). 주님은 삭개오의 본래를 되찾아 주었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자기 선언 속에는 삭개오는 본래 하나님의 선택받은 언약 안에 자손임을 공개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은 예수께서 이 세상에 화육강세하신 목적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는 의인을 찾아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를 구원하려고 세상에 오셨다고 하였습니다(막2:17). 그는 죄인의 구원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주려고 이 세상에 오셨다고 하였습니다(막10:4
5). 이렇게 주님은 삭개오를 잃어버림에서 다시 찾아내었습니다. 그의 본래를 다시 찾아주었습니다. 그의 족보와 신분을 다시 찾아 주었습니다. 그가 빼앗긴 생명을 다시 찾아 구원 곧, 영생을 허락하였습니다. 이것이 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이라고 하였습니다.
Ⅱ. 죄인의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는 선언입니다. 본문 19장 5절 하반절에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실로 엄청난 ‘예수 여리고 선언’입니다. 기상천외의 선언입니다. 많은 여리고성의 사람들에게 경악을 불러일으킨 선언입니다. 그 이유는 그 집은 ‘죄인의 집’으로 인식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뭇 사람이 보고 수구거려 가로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 갔도다(19:7)라고 하였습니다. 삭개오는 여리고성 사람들에게 ‘죄인’ 이요, 그의 집은 ‘죄인의 집’으로 딱지가 붙었습니다. 자타가 공인하는 죄인이요, 죄인의 집이었습니다. 그는 로마 정부의 앞잡이 세리장이로 부자가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매국노 집이 되기에 충분한 것이었습니다. 예수께서 바리새인 시몬의 집에 들어가셨을 때도 예수께 나아 온 한 여인을 향하여 그 집 주인 시몬과 동리 사람들은 ‘죄인인 한 여자’라고 하였습니다(눅7:39). 실로 엄청난 예수의 자기 선언입니다. 더욱이 유대인의 메시야로 기대했던 예수께서 이런 ‘죄인을 부르시고’ 또 ‘그 죄인의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는 주님의 선언은 여리고성 주민들을 아연 실색케 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Ⅲ. 잃어버린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선언하였습니다. 누가복음 19장 7절에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주님은 삭개오에 대한 본래를(뿌리) 공개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1 육신적으로 아브라함의 혈통이란 뜻도 있습니다.
2 그러나 주님의 의중에는 영적 의미가 더 크게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나라 주인공인 아브라함(눅16:22)의 자손이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그는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사실상 주님께서는 삭개오를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선언함은 그는 선택받은 백성, 선택받은 선민(選民)이요, 성민(聖民)이란 말입니다.
3 따라서 삭개오는 신앙의 사람이 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는 본래부터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던 자요, 축복의 선택권 안에 들어있었던 자라고 하였습니다. 다만 잃어버려졌을 뿐이라고 하였습니다(눅19:10). ‘잃어버려졌다’는 말은 ‘위치가 잘못되어 있음’(in the wrong place)을 뜻합니다. 물건이 본래 있어야 할 장소에서 이탈해서 잘못된 장소에 있다는 뜻입니다. 주님이 세상에 오신 것은, 아니 여리고에 오신 것은 ‘삭개오’를 본래의 장소로 옮겨 놓기 위하여 오셨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예수 여리고 선언’입니다.
그렇다면 삭개오의 뿌리는 참으로 깊습니다. 삭개오의 근원은 대단히 멀고 먼 곳에 기초를 하였습니다. 그것은 창세전에 성부, 성자, 성신의 기쁘신 뜻에 따라 예정을 입은 사람입니다. 삭개오의 본래는 하나님의 품속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결코 삭개오는 본래부터 매국노가 아니고, 죄인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역사 속에 자리잡은 삭개오는 죄인이 되었고, 죄인같이 여겨졌고, 죄인의 대접을 받았을 뿐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삭개오의 본래를 되찾아 주었습니다. 여기에 ‘예수 여리고 선언’의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19장 10절에서 예수님은 삭개오를 잃어버린 자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잃어 버려졌다는 말은 ‘잘못된 위치(in the wrong place)에 있음을 뜻합니다. 어떤 요긴한 물건이 본래 있어야 할 자리에서 이탈해서 잘못된 장소에 있을 때 그것을 가리켜 ‘잃어버려 진 것’이라고 합니다. 삭개오는 ‘잘못된 위치’에 있었던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말하자면 우리안에 있어야 할 양이 우리를 떠나 우리밖에 있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그 양을 가리켜 잃어버린 양이라고 하였습니다(눅15:4). 목자 아래 있어야 하고, 목자의 우리안에 있어야 할 양이 그 위치와 장소를 떠났을 때 ‘잃어버린 양’이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릇 행하여 길을 잃은 양, 제 갈 길로 가 버린 양과 같은 인생을 가리킵니다(벧전2:25). 집안에 있어야 할 열 드라크마 중 한 드라크마가 그 있어야 할 장소를 떠나 버렸을 때 ‘잃은 드라크마’라고 하였습니다(눅15:8). 아버지 곁에 있어야 할
둘째 아들이 아비 집을 떠나
1 먼 나라에 가서
2 거기서 허랑방탕하고
3 허비하고 있는 그 장소가 바로 잃어버려진 탕자의 상태라고 하였습니다(눅15:13-14). 아버지에게 붙어살아야 할 아들이 먼 나라 백성 중 하나에게 붙어사는 상태, 아버지 집에 풍족한 양식을 먹어야할 아들이 돼지 먹는 쥐염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는 그 상태가 잃어버려진 아들이라고 하였습니다(눅15:15-16). 바로 아버지의 살림(재산)을 창기와 함께 먹어 버린 상태가 잃어버린 아들이라고 하였습니다(눅15:30). 바로 그러한 상태를 아버지는 ‘죽었던 상태의 아들’이라고 하였습니다(눅15:32). 이러한 예수님의 비유적 교훈을 종합하여 보면 잃어버린 삭개오란 하나님 없는 자리, 하나님 떠난 자리, 하나님과 상관하지 못한 인생의 위치를 뜻합니다. 그는 ‘세리장’이라고 하는 세상적인 지위와, ‘부자’라고 하는 세상 속에 파묻히고 말았습니다. 아니 로마제국의 앞잡이로 동족 유대인의 피(세금)를 빨아 가는 매국노라고 하는 당시 동족들의 증오감 속에 파뭍히고 말았습니다. 그는 동족들에게 ‘죄인’이라고 하는 딱지를 받고, 그러한 사회적인 냉대와 멸시 속에 파묻히고 말았습니다. 말하자면 잃어버려진 자였습니다. 그는 영적으로 하나님과 멀리 떨어져 있는 죄인이요, 이 세상에서 사회적인 신분으로도 죄인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잃어버려진 자였습니다.
Ⅳ. 구원받은 사람(구원의 집)임을 선언하였습니다. 본문 19장 9-10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 여리고 선언은 마침내 그 절정에 이르고 있습니다. 그것은 삭개오에게 허락된 구원선언입니다. 많은 여리고성의 사람들 앞에서 여지없이 공개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예수 여리고 방문의 목적’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예수 여리고 선언의 목적은 ‘삭개오의 구원’입니다. 죄인 삭개오가 ‘구원을 받는 사람’이란 선언입니다. 그가 죄인이요, 그의 집은 죄인의 집이었기에 그에겐 ‘구원이 필요하다는 사실입니다. 그 구원은 어떤 것입니까
1 ‘오늘’의 구원입니다. 곧 현재의 구원, 성취될 구원입니다. 한 편 강도에게 허락된 즉석에서의 구원입니다.
2 이르른 구원입니다.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즉 삭개오 자신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이르른 구원’ ‘찾아 온 구원’ ‘발생한 구원’을 뜻합니다. 예수 자신께로 말미암아 직접 주어진 구원을 뜻합니다.
3 선택적 구원입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에게 이르른 구원입니다(눅19:9).
4 신앙에 의한 구원입니다. 주님의 초청을 받은 삭개오에게는 놀라운 생명의 운동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급히 내려왔습니다(눅19:6). 즐거워 하였습니다(눅19:6). 영접하였습니다(눅19:6). 그리고 엄숙하게 공적으로 회개하고 서원하였습니다.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배나 갚겠나이다(눅19:8)고 하였습니다. 바로 이러한 삭개오편의 모든 행동과 마음은 주님을 영접한 결과를 말합니다. 신앙과 회개, 회개와 신앙의 결과 일어난 생명의 징조들입니다. 5 가족적 구원입니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이르렀다’고 하였습니다. 삭개오 개인의 신앙이 온 가족의 신앙과 구원으로 연결되었습니다. 저 빌립보성의 자주장사 루디아나(행16:15), 옥사장의 가정이 모두 그러하였습니다(행16:31).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께서 여리고를 들어오셔서 지나가셨습니다(눅19:1). 그것은 예수 자신께서 여리고에서 중대한 선언을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삭개오를 부르는 선언입니다. 죄인 삭개오의 집에 유하시겠다고 하는 선언입니다. 그 삭개오는 본래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하신 선언입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인 삭개오는 ‘구원’받은 사람이란 선언입니다. 이것은 바로 예수께서 여리고를 들어오셔서 지나가신 목적이었습니다. 이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 평강교회를 세우신 본질’을 알려 주는 선언입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죄인 구원’입니다. 해 아래 살아가는 모든 인류는 예외 없이 ‘죄인’이라는 공통적인 본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담 이후 모든 세기를 살아오는 모든 류의 인생은 예외없이 죄인입니다. 모든 세계인은 죄인입니다. 의인은 없습니다. 하나도 없습니다(롬3:10). 모든 인류는 원죄와 자범죄로 사망에 이를 비극적 실존입니다(롬6:23). 예수 그 이름은 바로 ‘구원’입니다. 자기 백성 곧 잃어버린 아브라함의 자손을 찾아 구원하러 오신 만백성의 구세주입니다(눅2:10).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러 오셨습니다(마1:21). 그래서 그는 죄인을 영접하였습니다. 죄인의 집을 찾았습니다. 죄인을 만나 주었습니다. 그는 죄인의 친구요, 죄인의 선생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를 가리켜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고 하였습니다. 옳은 말입니다. 바리새인들이 바로 보고, 바로 말하였습니다. 그것은 예수님 자신께서도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대로 실천에 옮겼습니다. 마가복음 2장 17절에 예수께서 들으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자에게라야 쓸데가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이웃이 예수를 믿어 구원받게 하시는 일은’ 성공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이유는 인류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복음화 운동은 어디에나, 언제나 언제나 어느 사람, 어느 나라, 어느 민족에게도 적용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외쳤습니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1:15).
그러므로 오늘도 ‘예수 여리고 선언’은 계속 되고 있습니다. 죄인 삭개오가 구원 받아야 되겠다고 하는 복음이기 때문입니다.-할렐루야-
4). 성경에는 저 유명한 기생 라합이 여호수아 군대에 의하여 극적으로 구원받은 역사를 지니고 있는 도시입니다. 그 때 그 곳에 ‘여호와의 군대장관’이 여호수아에게 나타난 곳이기도 합니다(수2장). 먼훗날에 엘리사 시대에 ‘수원에 소금을 치는 일로’ 그 물이 달아서 ‘여리고 샘’으로 오늘날까지 이르고 있습니다(왕하2:19-25). 예수님 당시에는 ‘소경 거지 바디메오가’ 눈이 열려 빛을 본 기적이 일어난 장소이기도 합니다. 아마 예수께서 여리고를 들어 오시는 입구에서 그는 빛을 보는 축복을 입은 것 같습니다(눅18:35-43)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본문은 저 유명한 ‘예수 여리고 선언’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선언이 무엇입니까 확실히 예수 여리고 방문은 필연적이요, 계획적이요, 목적적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성공적이었습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나타내신 여리고 선언 가운데서 나타났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고 한 사실에서 보여 집니다(19:9-10). 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시기 위함이라고 하였습니다.
I. 삭개오를 부르시는 선언입니다. 누가복음 19장 5절에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고 하였습니다. 삭개오! 그의 이름은 ‘순결’ 혹은 ‘정의’를 뜻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그 이름과는 반대되는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큰 국경도시 여리고에서 관세를 받는 세무서 서장이었습니다. 그는 키가 작고, 체구도 작은 사람으로 여겨집니다. 그는 당시 로마 정부와의 중간 역할을 자유롭게하여 세금을 징수하고 일정한 액수를 로마 정부에 바친 후 나머지는 본인의 것으로 삼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소유가 많았습니다. 옜날이나, 오늘이나 세관원은 부유합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삭개오를 매국노처럼 여겼습니다. 당시에 유대인들은 그를 가리켜 ‘면허증을 가진 강도’라는 별명까지 붙여 주었습니다. 그는 부요하였지만 그 인생은 행복스럽지 못했습니다. 그는 마음에 불안과 죄책을 안고 살았던 것 같습니다. 그는 예수께서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라는 소식을 들었던 것 같습니다. 때마침 예수께서 ‘여리고를 지나가신다’는 꿈같은 현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의 영혼은 예수에게로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그는 여리고 거리의 많은 인파 때문에, 또 키가 작은 이유 때문에, 자신도 모르게 뽕나무 위로 올라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보고자 하는 그 무엇의 영적 열정에 사로잡히고 말았습니다. 여리고에 이르르신 예수! 인파의 군중 속에서 여리고의 중앙통을 걸어 가신 예수! 그는 뽕나무 위에 올라가서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보고자 하던 그 사람 삭개오에게 세상이 깜짝 놀랄 자기 선언을 하였습니다.
1 삭개오야! 속히 내려 오라! 고 하였습니다(19:5). 선택적 부름, 지명적 부름, 알고 부르시는 전지(全知)의 부름이었습니다.
2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눅19:5) 고 하였습니다. 모였던 여리고의 군중들은 엄청난 쇼크를 받았습니다. 저들은 수군거리기 시작했고 마침내 저가 죄인의 집에 들어갔다고 힐난(詰難)하기 시작하였습니다.
3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고 하였습니다(눅19:9). 주님은 그 집에 구원을 선언하였습니다.
4 이 사람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하였습니다(눅19:9). 주님은 삭개오의 본래를 되찾아 주었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자기 선언 속에는 삭개오는 본래 하나님의 선택받은 언약 안에 자손임을 공개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은 예수께서 이 세상에 화육강세하신 목적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는 의인을 찾아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를 구원하려고 세상에 오셨다고 하였습니다(막2:17). 그는 죄인의 구원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주려고 이 세상에 오셨다고 하였습니다(막10:4
5). 이렇게 주님은 삭개오를 잃어버림에서 다시 찾아내었습니다. 그의 본래를 다시 찾아주었습니다. 그의 족보와 신분을 다시 찾아 주었습니다. 그가 빼앗긴 생명을 다시 찾아 구원 곧, 영생을 허락하였습니다. 이것이 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이라고 하였습니다.
Ⅱ. 죄인의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는 선언입니다. 본문 19장 5절 하반절에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실로 엄청난 ‘예수 여리고 선언’입니다. 기상천외의 선언입니다. 많은 여리고성의 사람들에게 경악을 불러일으킨 선언입니다. 그 이유는 그 집은 ‘죄인의 집’으로 인식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뭇 사람이 보고 수구거려 가로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 갔도다(19:7)라고 하였습니다. 삭개오는 여리고성 사람들에게 ‘죄인’ 이요, 그의 집은 ‘죄인의 집’으로 딱지가 붙었습니다. 자타가 공인하는 죄인이요, 죄인의 집이었습니다. 그는 로마 정부의 앞잡이 세리장이로 부자가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매국노 집이 되기에 충분한 것이었습니다. 예수께서 바리새인 시몬의 집에 들어가셨을 때도 예수께 나아 온 한 여인을 향하여 그 집 주인 시몬과 동리 사람들은 ‘죄인인 한 여자’라고 하였습니다(눅7:39). 실로 엄청난 예수의 자기 선언입니다. 더욱이 유대인의 메시야로 기대했던 예수께서 이런 ‘죄인을 부르시고’ 또 ‘그 죄인의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는 주님의 선언은 여리고성 주민들을 아연 실색케 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Ⅲ. 잃어버린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선언하였습니다. 누가복음 19장 7절에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주님은 삭개오에 대한 본래를(뿌리) 공개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1 육신적으로 아브라함의 혈통이란 뜻도 있습니다.
2 그러나 주님의 의중에는 영적 의미가 더 크게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나라 주인공인 아브라함(눅16:22)의 자손이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그는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사실상 주님께서는 삭개오를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선언함은 그는 선택받은 백성, 선택받은 선민(選民)이요, 성민(聖民)이란 말입니다.
3 따라서 삭개오는 신앙의 사람이 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는 본래부터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던 자요, 축복의 선택권 안에 들어있었던 자라고 하였습니다. 다만 잃어버려졌을 뿐이라고 하였습니다(눅19:10). ‘잃어버려졌다’는 말은 ‘위치가 잘못되어 있음’(in the wrong place)을 뜻합니다. 물건이 본래 있어야 할 장소에서 이탈해서 잘못된 장소에 있다는 뜻입니다. 주님이 세상에 오신 것은, 아니 여리고에 오신 것은 ‘삭개오’를 본래의 장소로 옮겨 놓기 위하여 오셨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예수 여리고 선언’입니다.
그렇다면 삭개오의 뿌리는 참으로 깊습니다. 삭개오의 근원은 대단히 멀고 먼 곳에 기초를 하였습니다. 그것은 창세전에 성부, 성자, 성신의 기쁘신 뜻에 따라 예정을 입은 사람입니다. 삭개오의 본래는 하나님의 품속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결코 삭개오는 본래부터 매국노가 아니고, 죄인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역사 속에 자리잡은 삭개오는 죄인이 되었고, 죄인같이 여겨졌고, 죄인의 대접을 받았을 뿐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삭개오의 본래를 되찾아 주었습니다. 여기에 ‘예수 여리고 선언’의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19장 10절에서 예수님은 삭개오를 잃어버린 자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잃어 버려졌다는 말은 ‘잘못된 위치(in the wrong place)에 있음을 뜻합니다. 어떤 요긴한 물건이 본래 있어야 할 자리에서 이탈해서 잘못된 장소에 있을 때 그것을 가리켜 ‘잃어버려 진 것’이라고 합니다. 삭개오는 ‘잘못된 위치’에 있었던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말하자면 우리안에 있어야 할 양이 우리를 떠나 우리밖에 있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그 양을 가리켜 잃어버린 양이라고 하였습니다(눅15:4). 목자 아래 있어야 하고, 목자의 우리안에 있어야 할 양이 그 위치와 장소를 떠났을 때 ‘잃어버린 양’이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릇 행하여 길을 잃은 양, 제 갈 길로 가 버린 양과 같은 인생을 가리킵니다(벧전2:25). 집안에 있어야 할 열 드라크마 중 한 드라크마가 그 있어야 할 장소를 떠나 버렸을 때 ‘잃은 드라크마’라고 하였습니다(눅15:8). 아버지 곁에 있어야 할
둘째 아들이 아비 집을 떠나
1 먼 나라에 가서
2 거기서 허랑방탕하고
3 허비하고 있는 그 장소가 바로 잃어버려진 탕자의 상태라고 하였습니다(눅15:13-14). 아버지에게 붙어살아야 할 아들이 먼 나라 백성 중 하나에게 붙어사는 상태, 아버지 집에 풍족한 양식을 먹어야할 아들이 돼지 먹는 쥐염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는 그 상태가 잃어버려진 아들이라고 하였습니다(눅15:15-16). 바로 아버지의 살림(재산)을 창기와 함께 먹어 버린 상태가 잃어버린 아들이라고 하였습니다(눅15:30). 바로 그러한 상태를 아버지는 ‘죽었던 상태의 아들’이라고 하였습니다(눅15:32). 이러한 예수님의 비유적 교훈을 종합하여 보면 잃어버린 삭개오란 하나님 없는 자리, 하나님 떠난 자리, 하나님과 상관하지 못한 인생의 위치를 뜻합니다. 그는 ‘세리장’이라고 하는 세상적인 지위와, ‘부자’라고 하는 세상 속에 파묻히고 말았습니다. 아니 로마제국의 앞잡이로 동족 유대인의 피(세금)를 빨아 가는 매국노라고 하는 당시 동족들의 증오감 속에 파뭍히고 말았습니다. 그는 동족들에게 ‘죄인’이라고 하는 딱지를 받고, 그러한 사회적인 냉대와 멸시 속에 파묻히고 말았습니다. 말하자면 잃어버려진 자였습니다. 그는 영적으로 하나님과 멀리 떨어져 있는 죄인이요, 이 세상에서 사회적인 신분으로도 죄인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잃어버려진 자였습니다.
Ⅳ. 구원받은 사람(구원의 집)임을 선언하였습니다. 본문 19장 9-10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 여리고 선언은 마침내 그 절정에 이르고 있습니다. 그것은 삭개오에게 허락된 구원선언입니다. 많은 여리고성의 사람들 앞에서 여지없이 공개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예수 여리고 방문의 목적’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예수 여리고 선언의 목적은 ‘삭개오의 구원’입니다. 죄인 삭개오가 ‘구원을 받는 사람’이란 선언입니다. 그가 죄인이요, 그의 집은 죄인의 집이었기에 그에겐 ‘구원이 필요하다는 사실입니다. 그 구원은 어떤 것입니까
1 ‘오늘’의 구원입니다. 곧 현재의 구원, 성취될 구원입니다. 한 편 강도에게 허락된 즉석에서의 구원입니다.
2 이르른 구원입니다.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즉 삭개오 자신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이르른 구원’ ‘찾아 온 구원’ ‘발생한 구원’을 뜻합니다. 예수 자신께로 말미암아 직접 주어진 구원을 뜻합니다.
3 선택적 구원입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에게 이르른 구원입니다(눅19:9).
4 신앙에 의한 구원입니다. 주님의 초청을 받은 삭개오에게는 놀라운 생명의 운동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급히 내려왔습니다(눅19:6). 즐거워 하였습니다(눅19:6). 영접하였습니다(눅19:6). 그리고 엄숙하게 공적으로 회개하고 서원하였습니다.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배나 갚겠나이다(눅19:8)고 하였습니다. 바로 이러한 삭개오편의 모든 행동과 마음은 주님을 영접한 결과를 말합니다. 신앙과 회개, 회개와 신앙의 결과 일어난 생명의 징조들입니다. 5 가족적 구원입니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이르렀다’고 하였습니다. 삭개오 개인의 신앙이 온 가족의 신앙과 구원으로 연결되었습니다. 저 빌립보성의 자주장사 루디아나(행16:15), 옥사장의 가정이 모두 그러하였습니다(행16:31).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께서 여리고를 들어오셔서 지나가셨습니다(눅19:1). 그것은 예수 자신께서 여리고에서 중대한 선언을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삭개오를 부르는 선언입니다. 죄인 삭개오의 집에 유하시겠다고 하는 선언입니다. 그 삭개오는 본래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하신 선언입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인 삭개오는 ‘구원’받은 사람이란 선언입니다. 이것은 바로 예수께서 여리고를 들어오셔서 지나가신 목적이었습니다. 이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 평강교회를 세우신 본질’을 알려 주는 선언입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죄인 구원’입니다. 해 아래 살아가는 모든 인류는 예외 없이 ‘죄인’이라는 공통적인 본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담 이후 모든 세기를 살아오는 모든 류의 인생은 예외없이 죄인입니다. 모든 세계인은 죄인입니다. 의인은 없습니다. 하나도 없습니다(롬3:10). 모든 인류는 원죄와 자범죄로 사망에 이를 비극적 실존입니다(롬6:23). 예수 그 이름은 바로 ‘구원’입니다. 자기 백성 곧 잃어버린 아브라함의 자손을 찾아 구원하러 오신 만백성의 구세주입니다(눅2:10).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러 오셨습니다(마1:21). 그래서 그는 죄인을 영접하였습니다. 죄인의 집을 찾았습니다. 죄인을 만나 주었습니다. 그는 죄인의 친구요, 죄인의 선생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를 가리켜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고 하였습니다. 옳은 말입니다. 바리새인들이 바로 보고, 바로 말하였습니다. 그것은 예수님 자신께서도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대로 실천에 옮겼습니다. 마가복음 2장 17절에 예수께서 들으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자에게라야 쓸데가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이웃이 예수를 믿어 구원받게 하시는 일은’ 성공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이유는 인류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복음화 운동은 어디에나, 언제나 언제나 어느 사람, 어느 나라, 어느 민족에게도 적용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외쳤습니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1:15).
그러므로 오늘도 ‘예수 여리고 선언’은 계속 되고 있습니다. 죄인 삭개오가 구원 받아야 되겠다고 하는 복음이기 때문입니다.-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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