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가 쓰시겠다 하라 (눅19:28-40)
본문
오늘 본문의 내용은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거의 마치시고 예루살렘으로 고난을 받으시기 위해서 올라가시는 공생애 마지막 주간에 되어진 일입니다. 베다니 마을에 오셔서 (베다니 마을은 예루살렘에서 한 5리쯤. 베다니에서 올라가면 감람산이 나오고 감람산을 넘으면 바로 예루살렘이 나옵니다. ) 그 근방에 매어 있는 한 나귀 새끼를 예수님이 끌어 오게 하신 다음에 그 나귀 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는 그런 장면입니다. 이 장면에서 유명한 요한 칼빈 선생이 감동을 받고 예수님을 태우고 가는 나귀 새끼의 모습에서 "아! 나의 그림이구나!" 그래서 선생의 삶의 모토(motto 좌우명)가 "나는 예수님을 태우고 가는 나귀다" 라고 했습니다. 아주 그림 같은 모습이죠 예수님을 태우고 가는 이 나귀 모습과 예수님께서 그 나귀 새끼를 부르실 때에 주가 쓰시겠다고 끌고 오너라 하신 이 장면에서 "예수님과 나귀 새끼" 동시에 "예수님과 나와의 관계" 이러한 깊은 진리를 더듬어 볼 수 있습니다. 나는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가 또 나는 이 세상에 살 동안에 어떻게 살아야 될 것인가 동시에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와 축복이라는 것이 무엇을 말씀한 것인가 이러한 중요한 진리를 이 그림 같은 장면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세 가지로 말씀 드리면서 은혜 받고자 합니다.
첫째로 "나는 누구냐" 하는 것입니다. 곧 나의 정체성입니다. 여러 가지로 말씀드릴 수 있지만 가장 중요한 질문은 이 나귀 새끼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이 나귀 새끼를 지명하여 택하시고 불러 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나귀 새끼에게는 결정적인 운명의 전환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똑같이 나에게도 내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질문은 주님께서 나를 쓰시겠다고 나를 선택했느냐 안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운명의 갈림길이요 근본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나에게)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이사야 43장 1절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것이라" 선택받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또 이사야 44장 2-3절을 보면 " 너를 지으며 너를 모태에서 조성하고 너를 도와줄 여호와가 말하노라 (우리가 어머니 뱃속에서 지음을 받는데 선택받은 자는 하나님께서 지었다 라는 것이죠 ) 나의 종 야곱, 나의 택한 여수룬아 두려워 말라 대저 내가 갈한 자에게 물을 주며 마른땅에 시내가 흐르게 하며 나의 신을 네 자손에게, 나의 복을 네 후손에게 내리리니"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선택한 사람에게 또 그 자손에게 복을 주시려고 선택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두려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또 이사야 45장 2-3절을 보면 "내가 네 앞서 가서 험한 곳을 평탄케 하며 놋문을 쳐서 부수며 쇠빗장을 꺾고 네게 흑암중의 보화와 은밀한 곳에 숨은 재물을 주어서 너로 너를 지명하여 부른 자가 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인 줄 알게 하리라 " 이 말씀 보면 훗날에 내가 나이 들어서 지금까지 지내 온 일생을 다 내다보면서 " 아! 내가 왜 이렇게 잘됐나! 내가 왜 이런 복을 누리고 사나! 하면서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구나!" 그렇게 말하게 해 주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택한 사람은 하나님이 그렇게 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머리에 백발이 됐을 때 저는 그렇게 고백할 수 있어요. 지금까지 지나온 것을 보면 많은 환난, 고통이 있었지만 하나님이 다 되게 해 주셨기 때문에 감사의 고백이 나옵니다.
에베소서 1장 4-5절을 보면 "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이렇게 말했습니다. 창세 전에 택하셨습니다. 이제 중요한 것은 과연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선택을 받은 자인가! 그것을 어떻게 알수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베다니 마을 많은 나귀 중에 그 나귀 새끼 하나를 예수님이 어디가면 어떤 나무에 매어 있는 나귀 새끼다 하고 분명히 지적했어요. 그리고 그걸 "주가 쓰시겠다고 하고 끌어오너라" 그리고 실제로 그 나귀 새끼를 끌어 와 가지고 예수님이 그 위에 타시고 예루살렘으로 가신 것입니다. "나를 택하셨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 그것만 알면 이제 끝나는 거에요. 택함 받은 사람인 것만 확실하면 하나님이 장중에 붙드시고, 다 지키시고, 인도하시고, 되게 하시고, 복을 부어 주시는 것이니까 택함 받은 사람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정말로 나 같은 자가 택함 받았다는 그 놀라운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확실하게 아는 증거가 있습니다. 에베소서 2장 1절에 보면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죄와 허물로 죽은 우리를 하나님이 살리셨다 이것이 무슨 말씀입니까 "살리셨다"는 말은 죄와 허물로 죽은 우리들이기 때문에 그대로 나두면 절대로 예수 믿을 사람이 아니다. 그 말입니다. 한 사람도 예수님께로 나올 사람이 없다는 거에요. 요한복음 11장을 보면 나사로가 죽었잖아요 죽어서 썩어 냄새나는 나사로를 예수님이 불러 내셨어요. "나사로야 나오라"그러니까 죽었던 나사로가 무덤에서 걸어 나왔어요. 하나님이 불러 내시닌까 죽은 자가 살아 나오는 것처럼 죄와 허물로 죽은 우리들을 하나님이 택하시고 불러내신다는 거에요. 요한복음 6장 44절을 보면 "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다" 그랬습니다. 어제 교회에 여러분이 왔다 갔다 하시니까 제가 묻기를 "고향에 안 가십니까주일날 예배드리고 가겠습니다." 그런 분도 있고 "고향에 가서 예배 드리겠습니다" 그런 분도 있어요. 바로 그렇게 내가 주일날 교회 가서 예배드린다. 나 예수 믿는다. 이런것이 별거 아닌 것 같은데 아닙니다. 택한 사람 그리고 하나님께서 큰 은혜와 큰 권능으로 불러낸 사람만이 예수님께로 나올 수 있고 예수님을 믿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신학적 용어로 "거역할 수 없는 강력한 부르심" 이라고 합니다. 사도행전 13장 48절을 보면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기 앉아 있다는 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오늘 내가 교회 나와서 하나님 앞에 예배드린 다는 것이 얼마나 굉장한 것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아 내가 택함 받아서 이렇게 됐구나!" 그렇게 아시기 바랍니다. 내가 선택 받은 사람이구나! 지금은 좀 보잘것 없고 많은 문제가 있어도 하나님이 나를 선택 하시고 실제로 때가 되어서 나를 불러 예수님 앞으로 나오게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한 우리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이제는 계속해서 은혜를 부어 주셔서 아름답게 주님이 쓰시는 그릇으로 만드신 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는 되는 거에요. 앞으로 하나님이 그렇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29-30절을 보면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 미리 정하셨으니, 미리 정하신 자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 세 번이나 미리 정하신 자를 부르신다고 하십니다. 이 미리 정하신 자들, 선택 받은 자들 그 안에 나도 들어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크게 기뻐하시고 담대하십시오. "나는 선택 받은 자다" 의심하지 마십시오. 두 번째, 이제 예수님이 선택한 나귀 새끼를 끌어오게 하신 다음에 나귀 새끼를 타고 가셨다. 쓰셨다. 주님의 도구로 사용하셨다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이 나귀 새끼를 타고 가실 때 사람들이 종려 가지를 들고 찬양을 부르면서 겉옷을 벗어 길 바닥에 펼 때 나귀 새끼도 굉장히 흥분했을 것입니다. 바로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신 다음에 우리를 주님의 영광스런 도구로 만들어서 쓰시는 바로 이것이 축복이고 사명이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두 사람의 일본 사람인데요. "애도미 야스히로" 라는 사람인데 중증 장애자 입니다. 이 사람은 몸이 완전히 마비 상태입니다. 움직일 수 있는 부위는 오른발 엄지발가락 뿐입니다. 그 외는 완전히 마비 상태에 있습니다. 이 불행하기 그지없는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이 사람에게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절망과 슬픔과 저주와 사망의 그늘 속에 잠겨 사는 이 애도미 야스히로 라는 사람에게 예수님이 가까이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 마음속에 빛을 비쳐 주셨습니다. 은혜를 부어 주셨습니다. 그 가슴에 있는 절망은 물러가고 어둠은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기가 어떤 존재인가를 보게 됐습니다. 이 사람은 너무 감사해서 하나님의 그 사랑과 은혜를 나타내고 싶어했는데 손발을 움직이지 못하니 나타낼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생각 끝에 움직일 수 있는 엄지발가락으로 타자를 치는 것을 배웁니다. 필사적인 노력으로 엄지 발가락으로 글자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한 문장을 쓸 때에 때로는 하루가 가기도 했지만 그렇게 처참한 노력으로 쓴 글을 모아서 책으로 나온 것이 "엄지발가락"이라는 책인데 그 중에 "돌"이라는 짧은 글이 있습니다. 나는 돌맹이만도 못한 존재였다 아무 쓸모 없는 돌맹이였다 세상에 태어나서 모든 사람 앞에 아픔을 주는 자였다 그러한 나에게 예수님이 오셨다 그 후 쓸모 없는 이 돌맹이는 모든 사람을 놀라게 하는 귀한 보석으로 바꾸어 졌다 그렇게 자기 자신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왜요 전에는 사람들에게 "참 불쌍한 사람이구나!" 그렇게 밖에 안 된 사람이였는데 예수님이 오신 이후에는 사람들이 와서 보고는 그 불행하기 그지없는 비참한 모습이지만 거기에는 평안이 있고 빛이 흐르고 있고 생기가 있는 것을 보고는 생애 의욕을 잃은 수많은 사람들이 와서 이 사람의 모습에서 힘을 얻고 가는 것입니다. 또한 사람 "미쯔노 겐죠" 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도 누워서만 지내는 사람입니다. 손발, 엄지발가락도 움직이지 못한 사람입니다. 말도 못합니다. 의사 표시를 한다면 귀로 말은 들을 수 있는데 눈빛으로만 하는 사람입니다. 이 비참한 사람에게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이 사람도 예수님이 오신 후 예수님의 사랑을 알게 됐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는다. 말씀을 알아듣는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인간의 능력으로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깨닫게 해 주시고 알게 하시고 보게 해 주셔야 느끼고 알고 깨닫는 겁니다. 이런 중증 장애자가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아요 우리도 매일 불평이나 하고 앉아 있는 사람인데 . 그렇지만은 이런 사람에게도 그 영혼에 빛을 비쳐 주실 때 하나님의 사랑을 놀랍게 깨닫는 거에요. 그래서 이 사람도 부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표현하고 다른 사람에게 알리고 싶었지만 방법이 없었어요. 어머니와 의사 표현을 어떻게 하는가 하면 눈빛으로 하는 거에요. 그래서 눈빛으로 어머니한테 그런 걸 해요. 글자판을 만들어 주라고 "내가 지적하는 글자를 모아서 글자를 만들라고" 이것을 엄마가 알아듣고 글자판을 펴놓고 아들이 눈빛으로 싸인을 보내는 것을 더듬어 찾아요. 때로는 단어 하나 만드는데 하루가 가고, 이틀이 가고 그러다 두 모자(母子)가 끓어안고 울고, 불쌍해서 울기도 하지만 내 불쌍한 아들이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는 글을 보고 엄마도 감사해서 울고 그래서 만든 시집이 세 권이나 나왔어요.
여러분! 우리가 이런 사람들을 보면 못한다고, 나는 불행하다고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내 은혜가 내게 족하도다" 하는 책에 이런 시가 있습니다. 제목이 "슬픔이여" 입니다. 슬픔이여 슬픔이여 참으로 고마워 네가 오지 않아 내가 강해지지 않았더라면 나는 지금 어떻게 되었을까 슬픔이여 슬픔이여 네가 이 세상에서는 둘도 없는 큰 기쁨, 변치 않는 평안 주님 곁에 나를 인도 하였도다. 그렇게 찬양합니다. 또 하나는 "저렇게도" 라는 찬양 시인데 주 예수께서 저렇게도 주 예수께서 저렇게도 우리들의 죄를 위하여 눈물을 흘리시는데 죄를 슬퍼하지 않아도 좋을까 죄를 슬퍼하지 않아도 좋을까 주 예수께서 저렇게도 주 예수께서 저렇게도 우리들을 사랑 하시여 피 흘려 괴로워하시는데 회개하지 않아도 좋을까 회개하지 않아도 좋을까 주 예수께서 저렇게도 주 예수께서 저렇게도 우리들을 구원하시려 어제도 오늘도 부르시는데 주님께로 가지 않아도 좋을까 주님께로 가지 않아도 좋을까 어떻게 그런 분들의 영혼에서 이런 찬양이 나올 수 있습니까 이와 같은 노래가 평생 누워서 지내는 사람들의 입에서, 영혼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라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님은 그렇게 쓰시고 계십니다. 주님이 쓰신다고 하니까! 무슨 말을 하는 것입니까 무슨 굉장한 일인 것 같지만 아닙니다. 주님이 내게 오셔서 나를 주님의 도구로 쓰신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내 안에 절망이 나갔고, 슬픔이 물러가고, 다른 사람들을 향하여 사랑할 줄 아는 사람, 주님의 사랑을 노래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영혼으로 바꾸어지는 것, 우리 나라에도 "나 가진 재물 없으나"를 지은 송명희 자매라든지 "주 예수 나의 당신이여" 라는 찬양 시를 쓴 이인숙 자매도 중증 장애자입니다. "불 속에라도 들어가서" 그런 찬양을 부른 최수동 형제는 중동 사막에 가서 일 하다가 두 다리가 잘린 사람입니다. 두 다리가 몽땅 잘려 나간 다음에 예수님 앞으로 나온 사람입니다. 탕자를 살려 준 주님 말씀에 죄인의 두 다리 묻어 두었네 아들이여 일어나 내 손을 잡고 남은 몸, 모든 영혼 바치라 하네 불 속에라도 들어가서 불 속에라도 들어가서 세상에 널리 전하리 주의 사랑을 두 다리가 잘린 사람이 주님의 사랑을 전한다는 것입니다. 쓰레기만도 못한 우리들 아닙니까 이런 쓸모 없는 것들을 예수님은 불러내셔서 이렇게 사용하시려고 하는 것입니다. "나는 어떻게 살고 있는가! " 나를 택하여 부르신 주님이 이런 모습으로 기어코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오늘의 내 모습 때문에 절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다만 나를 부르신 하나님이 이렇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니에요.
셋째로 이런 예수님 앞에 나는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하루하루 어떻게 살 것인가 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저도 예수님 앞에 부름 받은 그 날에 비로소 내 삶의 목표는 무엇이어야 되는지 내 삶의 동기는 어디에다 두어야 되는지 또 나는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를 분명히 알게 됐습니다. 나를 부르시고, 나를 쓰시려고 하신 예수님 앞에서 항상 세 가지 소원을 품고 있습니다.
첫째는, 주님! 저를 주님이 쓰시기에 합당한 도구로 주장해 주시옵소서. 순간 순간 주장해 주시옵소서. 왜요 주님이 주장하지 아니하시면 내 속에 또 악심이 일어나고 복잡한 사람이 되고 맙니다. 아무 쓸모 없는 사람이 되고 말아요. 내가 내 힘으로 내 의지로 내 결심으로 하는 게 아닙니다. 주님이 주장해 주셔야 돼요. 주여! 순간 순간 이 몸을, 이 마음을, 이 생각을 , 이 감정을 주장해 주시옵소서. 그렇게 주님을 바라보지 않고는 안되는 겁니다. 그러면서 회개하고 주님을 바라보고 한걸음 한걸음 살아가는 것입니다.
둘째는 확신과 담대함을 갖습니다. 왜요 나를 택하여 부르신 주님은 그대로 두는 게 아니거든요 나를 부르실 때는 쓸데가 있어서 부르신 것입니다. 나를 통해서 하실 계획이 있어서 주님의 뜻이 있어서 부른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반드시 그걸 이루시는 것입니다. 나를 되게 하시고 나와 관계된 자들을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더 쉽게 말하면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지금은 너무 어려운 시대입니다. 두렵고 불안합니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 한가지 확신하십시오. "나는 선택받은 사람이다" 이것만 분명히 하십시오. 여러분을 선택하고 부르신 주님께서 여러분을 귀한 도구가 되도록 반드시 세워 주시고 인도해 주신다는 것을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담대해도 괜찮습니다. 세번째, 주님 앞에 정말로 간절한 소원이 있어요. 그것은 끝까지 쓰임 받는 것입니다. 천국 문턱을 넘어 설 때까지, 내 몸에 숨이 붙어 있는 날 까지는 주님! 저로 하여금 다른 사람에게 부담을 주는 자 되지 않게 해 주시옵소서, 주님! 저 정말 주님 앞에 부름 받을 때까지 내 몸둥이 내가 마음대로 움직이고 살다가 주님 부름 받게 해 주시옵소서. 그것도 쓰임 받는 것입니다. 그렇게 내 평생 이 땅에 사는 날 동안 다른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는 자로 살기 위해서는 한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교만하면 안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귀하게 쓰실 때, 복되게 하실 때 뭐 내가 있어서, 내가 잘라서, 남 달리 경건해서 된 줄로 착각을 합니다. 이 나귀 새끼가 예수님 태우고 가니까 또 사람들이 종려가지 흔들고 찬양하고 환영하니까 나귀 새끼가 흥분이 되어 가지고 "와! 나를 환영하는 구나!" 하고 두 발을 높이 들고 일어 서면 되겠습니까
그런데 그런 착각을 가끔 한다는 말이에요. 나는 비천한 죄인이라는 것을 항상 잊지 말고 주님만 바라보고 살면 비록 쓸모 없는 돌맹이 같이 지금까지는 많은 사람들을 아프게 했고, 많은 사람에게 고통을 주며 가시 노릇이나 하고 정말로 의미 없는 삶을 살았지만 이제 주님이 나를 부르셨으니 우리 모두를 참으로 귀한 보석으로 만들어서 아름답게 사용해 주실 줄 믿습니다.
첫째로 "나는 누구냐" 하는 것입니다. 곧 나의 정체성입니다. 여러 가지로 말씀드릴 수 있지만 가장 중요한 질문은 이 나귀 새끼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이 나귀 새끼를 지명하여 택하시고 불러 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나귀 새끼에게는 결정적인 운명의 전환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똑같이 나에게도 내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질문은 주님께서 나를 쓰시겠다고 나를 선택했느냐 안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운명의 갈림길이요 근본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나에게)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이사야 43장 1절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것이라" 선택받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또 이사야 44장 2-3절을 보면 " 너를 지으며 너를 모태에서 조성하고 너를 도와줄 여호와가 말하노라 (우리가 어머니 뱃속에서 지음을 받는데 선택받은 자는 하나님께서 지었다 라는 것이죠 ) 나의 종 야곱, 나의 택한 여수룬아 두려워 말라 대저 내가 갈한 자에게 물을 주며 마른땅에 시내가 흐르게 하며 나의 신을 네 자손에게, 나의 복을 네 후손에게 내리리니"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선택한 사람에게 또 그 자손에게 복을 주시려고 선택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두려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또 이사야 45장 2-3절을 보면 "내가 네 앞서 가서 험한 곳을 평탄케 하며 놋문을 쳐서 부수며 쇠빗장을 꺾고 네게 흑암중의 보화와 은밀한 곳에 숨은 재물을 주어서 너로 너를 지명하여 부른 자가 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인 줄 알게 하리라 " 이 말씀 보면 훗날에 내가 나이 들어서 지금까지 지내 온 일생을 다 내다보면서 " 아! 내가 왜 이렇게 잘됐나! 내가 왜 이런 복을 누리고 사나! 하면서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구나!" 그렇게 말하게 해 주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택한 사람은 하나님이 그렇게 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머리에 백발이 됐을 때 저는 그렇게 고백할 수 있어요. 지금까지 지나온 것을 보면 많은 환난, 고통이 있었지만 하나님이 다 되게 해 주셨기 때문에 감사의 고백이 나옵니다.
에베소서 1장 4-5절을 보면 "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이렇게 말했습니다. 창세 전에 택하셨습니다. 이제 중요한 것은 과연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선택을 받은 자인가! 그것을 어떻게 알수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베다니 마을 많은 나귀 중에 그 나귀 새끼 하나를 예수님이 어디가면 어떤 나무에 매어 있는 나귀 새끼다 하고 분명히 지적했어요. 그리고 그걸 "주가 쓰시겠다고 하고 끌어오너라" 그리고 실제로 그 나귀 새끼를 끌어 와 가지고 예수님이 그 위에 타시고 예루살렘으로 가신 것입니다. "나를 택하셨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 그것만 알면 이제 끝나는 거에요. 택함 받은 사람인 것만 확실하면 하나님이 장중에 붙드시고, 다 지키시고, 인도하시고, 되게 하시고, 복을 부어 주시는 것이니까 택함 받은 사람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정말로 나 같은 자가 택함 받았다는 그 놀라운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확실하게 아는 증거가 있습니다. 에베소서 2장 1절에 보면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죄와 허물로 죽은 우리를 하나님이 살리셨다 이것이 무슨 말씀입니까 "살리셨다"는 말은 죄와 허물로 죽은 우리들이기 때문에 그대로 나두면 절대로 예수 믿을 사람이 아니다. 그 말입니다. 한 사람도 예수님께로 나올 사람이 없다는 거에요. 요한복음 11장을 보면 나사로가 죽었잖아요 죽어서 썩어 냄새나는 나사로를 예수님이 불러 내셨어요. "나사로야 나오라"그러니까 죽었던 나사로가 무덤에서 걸어 나왔어요. 하나님이 불러 내시닌까 죽은 자가 살아 나오는 것처럼 죄와 허물로 죽은 우리들을 하나님이 택하시고 불러내신다는 거에요. 요한복음 6장 44절을 보면 "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다" 그랬습니다. 어제 교회에 여러분이 왔다 갔다 하시니까 제가 묻기를 "고향에 안 가십니까주일날 예배드리고 가겠습니다." 그런 분도 있고 "고향에 가서 예배 드리겠습니다" 그런 분도 있어요. 바로 그렇게 내가 주일날 교회 가서 예배드린다. 나 예수 믿는다. 이런것이 별거 아닌 것 같은데 아닙니다. 택한 사람 그리고 하나님께서 큰 은혜와 큰 권능으로 불러낸 사람만이 예수님께로 나올 수 있고 예수님을 믿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신학적 용어로 "거역할 수 없는 강력한 부르심" 이라고 합니다. 사도행전 13장 48절을 보면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기 앉아 있다는 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오늘 내가 교회 나와서 하나님 앞에 예배드린 다는 것이 얼마나 굉장한 것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아 내가 택함 받아서 이렇게 됐구나!" 그렇게 아시기 바랍니다. 내가 선택 받은 사람이구나! 지금은 좀 보잘것 없고 많은 문제가 있어도 하나님이 나를 선택 하시고 실제로 때가 되어서 나를 불러 예수님 앞으로 나오게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한 우리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이제는 계속해서 은혜를 부어 주셔서 아름답게 주님이 쓰시는 그릇으로 만드신 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는 되는 거에요. 앞으로 하나님이 그렇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29-30절을 보면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 미리 정하셨으니, 미리 정하신 자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 세 번이나 미리 정하신 자를 부르신다고 하십니다. 이 미리 정하신 자들, 선택 받은 자들 그 안에 나도 들어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크게 기뻐하시고 담대하십시오. "나는 선택 받은 자다" 의심하지 마십시오. 두 번째, 이제 예수님이 선택한 나귀 새끼를 끌어오게 하신 다음에 나귀 새끼를 타고 가셨다. 쓰셨다. 주님의 도구로 사용하셨다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이 나귀 새끼를 타고 가실 때 사람들이 종려 가지를 들고 찬양을 부르면서 겉옷을 벗어 길 바닥에 펼 때 나귀 새끼도 굉장히 흥분했을 것입니다. 바로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신 다음에 우리를 주님의 영광스런 도구로 만들어서 쓰시는 바로 이것이 축복이고 사명이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두 사람의 일본 사람인데요. "애도미 야스히로" 라는 사람인데 중증 장애자 입니다. 이 사람은 몸이 완전히 마비 상태입니다. 움직일 수 있는 부위는 오른발 엄지발가락 뿐입니다. 그 외는 완전히 마비 상태에 있습니다. 이 불행하기 그지없는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이 사람에게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절망과 슬픔과 저주와 사망의 그늘 속에 잠겨 사는 이 애도미 야스히로 라는 사람에게 예수님이 가까이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 마음속에 빛을 비쳐 주셨습니다. 은혜를 부어 주셨습니다. 그 가슴에 있는 절망은 물러가고 어둠은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기가 어떤 존재인가를 보게 됐습니다. 이 사람은 너무 감사해서 하나님의 그 사랑과 은혜를 나타내고 싶어했는데 손발을 움직이지 못하니 나타낼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생각 끝에 움직일 수 있는 엄지발가락으로 타자를 치는 것을 배웁니다. 필사적인 노력으로 엄지 발가락으로 글자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한 문장을 쓸 때에 때로는 하루가 가기도 했지만 그렇게 처참한 노력으로 쓴 글을 모아서 책으로 나온 것이 "엄지발가락"이라는 책인데 그 중에 "돌"이라는 짧은 글이 있습니다. 나는 돌맹이만도 못한 존재였다 아무 쓸모 없는 돌맹이였다 세상에 태어나서 모든 사람 앞에 아픔을 주는 자였다 그러한 나에게 예수님이 오셨다 그 후 쓸모 없는 이 돌맹이는 모든 사람을 놀라게 하는 귀한 보석으로 바꾸어 졌다 그렇게 자기 자신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왜요 전에는 사람들에게 "참 불쌍한 사람이구나!" 그렇게 밖에 안 된 사람이였는데 예수님이 오신 이후에는 사람들이 와서 보고는 그 불행하기 그지없는 비참한 모습이지만 거기에는 평안이 있고 빛이 흐르고 있고 생기가 있는 것을 보고는 생애 의욕을 잃은 수많은 사람들이 와서 이 사람의 모습에서 힘을 얻고 가는 것입니다. 또한 사람 "미쯔노 겐죠" 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도 누워서만 지내는 사람입니다. 손발, 엄지발가락도 움직이지 못한 사람입니다. 말도 못합니다. 의사 표시를 한다면 귀로 말은 들을 수 있는데 눈빛으로만 하는 사람입니다. 이 비참한 사람에게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이 사람도 예수님이 오신 후 예수님의 사랑을 알게 됐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는다. 말씀을 알아듣는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인간의 능력으로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깨닫게 해 주시고 알게 하시고 보게 해 주셔야 느끼고 알고 깨닫는 겁니다. 이런 중증 장애자가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아요 우리도 매일 불평이나 하고 앉아 있는 사람인데 . 그렇지만은 이런 사람에게도 그 영혼에 빛을 비쳐 주실 때 하나님의 사랑을 놀랍게 깨닫는 거에요. 그래서 이 사람도 부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표현하고 다른 사람에게 알리고 싶었지만 방법이 없었어요. 어머니와 의사 표현을 어떻게 하는가 하면 눈빛으로 하는 거에요. 그래서 눈빛으로 어머니한테 그런 걸 해요. 글자판을 만들어 주라고 "내가 지적하는 글자를 모아서 글자를 만들라고" 이것을 엄마가 알아듣고 글자판을 펴놓고 아들이 눈빛으로 싸인을 보내는 것을 더듬어 찾아요. 때로는 단어 하나 만드는데 하루가 가고, 이틀이 가고 그러다 두 모자(母子)가 끓어안고 울고, 불쌍해서 울기도 하지만 내 불쌍한 아들이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는 글을 보고 엄마도 감사해서 울고 그래서 만든 시집이 세 권이나 나왔어요.
여러분! 우리가 이런 사람들을 보면 못한다고, 나는 불행하다고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내 은혜가 내게 족하도다" 하는 책에 이런 시가 있습니다. 제목이 "슬픔이여" 입니다. 슬픔이여 슬픔이여 참으로 고마워 네가 오지 않아 내가 강해지지 않았더라면 나는 지금 어떻게 되었을까 슬픔이여 슬픔이여 네가 이 세상에서는 둘도 없는 큰 기쁨, 변치 않는 평안 주님 곁에 나를 인도 하였도다. 그렇게 찬양합니다. 또 하나는 "저렇게도" 라는 찬양 시인데 주 예수께서 저렇게도 주 예수께서 저렇게도 우리들의 죄를 위하여 눈물을 흘리시는데 죄를 슬퍼하지 않아도 좋을까 죄를 슬퍼하지 않아도 좋을까 주 예수께서 저렇게도 주 예수께서 저렇게도 우리들을 사랑 하시여 피 흘려 괴로워하시는데 회개하지 않아도 좋을까 회개하지 않아도 좋을까 주 예수께서 저렇게도 주 예수께서 저렇게도 우리들을 구원하시려 어제도 오늘도 부르시는데 주님께로 가지 않아도 좋을까 주님께로 가지 않아도 좋을까 어떻게 그런 분들의 영혼에서 이런 찬양이 나올 수 있습니까 이와 같은 노래가 평생 누워서 지내는 사람들의 입에서, 영혼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라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님은 그렇게 쓰시고 계십니다. 주님이 쓰신다고 하니까! 무슨 말을 하는 것입니까 무슨 굉장한 일인 것 같지만 아닙니다. 주님이 내게 오셔서 나를 주님의 도구로 쓰신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내 안에 절망이 나갔고, 슬픔이 물러가고, 다른 사람들을 향하여 사랑할 줄 아는 사람, 주님의 사랑을 노래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영혼으로 바꾸어지는 것, 우리 나라에도 "나 가진 재물 없으나"를 지은 송명희 자매라든지 "주 예수 나의 당신이여" 라는 찬양 시를 쓴 이인숙 자매도 중증 장애자입니다. "불 속에라도 들어가서" 그런 찬양을 부른 최수동 형제는 중동 사막에 가서 일 하다가 두 다리가 잘린 사람입니다. 두 다리가 몽땅 잘려 나간 다음에 예수님 앞으로 나온 사람입니다. 탕자를 살려 준 주님 말씀에 죄인의 두 다리 묻어 두었네 아들이여 일어나 내 손을 잡고 남은 몸, 모든 영혼 바치라 하네 불 속에라도 들어가서 불 속에라도 들어가서 세상에 널리 전하리 주의 사랑을 두 다리가 잘린 사람이 주님의 사랑을 전한다는 것입니다. 쓰레기만도 못한 우리들 아닙니까 이런 쓸모 없는 것들을 예수님은 불러내셔서 이렇게 사용하시려고 하는 것입니다. "나는 어떻게 살고 있는가! " 나를 택하여 부르신 주님이 이런 모습으로 기어코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오늘의 내 모습 때문에 절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다만 나를 부르신 하나님이 이렇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니에요.
셋째로 이런 예수님 앞에 나는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하루하루 어떻게 살 것인가 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저도 예수님 앞에 부름 받은 그 날에 비로소 내 삶의 목표는 무엇이어야 되는지 내 삶의 동기는 어디에다 두어야 되는지 또 나는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를 분명히 알게 됐습니다. 나를 부르시고, 나를 쓰시려고 하신 예수님 앞에서 항상 세 가지 소원을 품고 있습니다.
첫째는, 주님! 저를 주님이 쓰시기에 합당한 도구로 주장해 주시옵소서. 순간 순간 주장해 주시옵소서. 왜요 주님이 주장하지 아니하시면 내 속에 또 악심이 일어나고 복잡한 사람이 되고 맙니다. 아무 쓸모 없는 사람이 되고 말아요. 내가 내 힘으로 내 의지로 내 결심으로 하는 게 아닙니다. 주님이 주장해 주셔야 돼요. 주여! 순간 순간 이 몸을, 이 마음을, 이 생각을 , 이 감정을 주장해 주시옵소서. 그렇게 주님을 바라보지 않고는 안되는 겁니다. 그러면서 회개하고 주님을 바라보고 한걸음 한걸음 살아가는 것입니다.
둘째는 확신과 담대함을 갖습니다. 왜요 나를 택하여 부르신 주님은 그대로 두는 게 아니거든요 나를 부르실 때는 쓸데가 있어서 부르신 것입니다. 나를 통해서 하실 계획이 있어서 주님의 뜻이 있어서 부른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반드시 그걸 이루시는 것입니다. 나를 되게 하시고 나와 관계된 자들을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더 쉽게 말하면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지금은 너무 어려운 시대입니다. 두렵고 불안합니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 한가지 확신하십시오. "나는 선택받은 사람이다" 이것만 분명히 하십시오. 여러분을 선택하고 부르신 주님께서 여러분을 귀한 도구가 되도록 반드시 세워 주시고 인도해 주신다는 것을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담대해도 괜찮습니다. 세번째, 주님 앞에 정말로 간절한 소원이 있어요. 그것은 끝까지 쓰임 받는 것입니다. 천국 문턱을 넘어 설 때까지, 내 몸에 숨이 붙어 있는 날 까지는 주님! 저로 하여금 다른 사람에게 부담을 주는 자 되지 않게 해 주시옵소서, 주님! 저 정말 주님 앞에 부름 받을 때까지 내 몸둥이 내가 마음대로 움직이고 살다가 주님 부름 받게 해 주시옵소서. 그것도 쓰임 받는 것입니다. 그렇게 내 평생 이 땅에 사는 날 동안 다른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는 자로 살기 위해서는 한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교만하면 안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귀하게 쓰실 때, 복되게 하실 때 뭐 내가 있어서, 내가 잘라서, 남 달리 경건해서 된 줄로 착각을 합니다. 이 나귀 새끼가 예수님 태우고 가니까 또 사람들이 종려가지 흔들고 찬양하고 환영하니까 나귀 새끼가 흥분이 되어 가지고 "와! 나를 환영하는 구나!" 하고 두 발을 높이 들고 일어 서면 되겠습니까
그런데 그런 착각을 가끔 한다는 말이에요. 나는 비천한 죄인이라는 것을 항상 잊지 말고 주님만 바라보고 살면 비록 쓸모 없는 돌맹이 같이 지금까지는 많은 사람들을 아프게 했고, 많은 사람에게 고통을 주며 가시 노릇이나 하고 정말로 의미 없는 삶을 살았지만 이제 주님이 나를 부르셨으니 우리 모두를 참으로 귀한 보석으로 만들어서 아름답게 사용해 주실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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